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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1일 월요일

오독되는 담론: 그는 왜 유효타를 내지 못했나

  소위 '정체성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텍스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대통령선거 전후로 그러한 글들이 특히 집중적으로 생산되었는데, 정체성 정치와 관련된 담론 전체에 공포감을 가지는 대안우파뿐 아니라 일부 전통적 보수진영,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도 이러한 성찰적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물론 진보진영에도 정체성의 정치 자체에 부정적인 이들은 많다). 이들은 주로 정체성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정체성 너머를 사유하여야 함을 보다 성실히 염두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나 역시 사회문화적 문제에서 신좌파가 갖는 현재적 파급력을 바람직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우는 흐름들 중 언어적 상징과 비유에 천착하는 일부의 경향을 경계하여야만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강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러한 비판들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 중에는 유효한 지점을 타격하지 못하는(때로는 그러면서 대안우파적 사고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공허한 비판의 글들이 여럿 존재한다. 며칠 전에 우연히 접한, 페이스북 페이지 '카이스트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온 글(Facebook 링크) 역시 그 한 사례로, 유효한 비판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 글이 단순히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잘못되지조차 않은(not even wrong), 유효성이 결여된 비판이라고 직관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글 후반부에 제시된 여성우대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 때문이라기보다는, 글 전반부에 제시된 모종의 '생각의 방법' 때문에 그렇다.

차라리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의 차원에서 의견이 갈린다면, 오히려 적확하다고 판단되는 비판의 지점을 추출하여 나의 생각과 견주어 보면서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 정확히 무엇이라고 지칭하기는 어렵지만(한 분께서 말씀해주신 '방법론'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가까운 것 같다) - 이러한 '생각의 방법'의 차원에서 잘못된 지점이 발견된다면, 합을 맞추어 의사소통을 시작하는 것 자체에 상당히 많은 정신력이 소모된다. 왜냐하면 유효한 지점을 타겟팅하고 있는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과적인 견해가 같을 때에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개별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립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논의의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는 애매모호한 지점들을 나름대로 명료한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더욱 좋아한다.

  그렇다면, 담론에 대한 비판의 유효성 여부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내가 직관적으로 느낀 바를 반추해 보면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비판의 유효성은, 담론지형을 얼마나 성실하게 캐치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채 작성한 글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듯하다. 이 글의 사례에 대입하여, 위 문장의 의미를 보다 상세하게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 상술하였듯 정체성 정치의 현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체성 정치 그 너머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종국에는 분열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은 무척 합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렇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 시간적 의미가 아닌 담론의 단계의 의미에서 - 의 정체성 정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follow up하지 못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글의 앞부분에서 글쓴이는 "(전략) 이렇게 생각을 해야하는게 아닌가요?"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략)
왜 본인의 성별에 대해 소속감을 느끼고 사회문제를 해당 성별에 대입해서 공감하는지 진짜 .
(중략)
그 "원인"이 "사람를 남자 여자로 나누었을 때"
그때 주로 여성들에게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야하는게 아닌가요?
대체 왜 사람을 여자 남자로 나눠 놓은 통계에 미쳐가지고 남자는 이런데..여자는 이렇네..이러고 있나요 진짜.
해당 원인을 파악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는게 우선이지,
"여성" "남성" 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 원인파악을 못하고 성별 싸움으로 다투는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무래도 해당 원인을 파악하는것 보다 그냥 "그래 여자니까..여성이니까.." 라고 생각하는게 편해서 그런건가요?
(후략)

  그런데 문제는, 담론 참여자들이 이미 당연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성별 갈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그 중에서 특히 여성주의 진영)이 두 성별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취급하고, 원인을 구체적으로 찾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 미쳐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이자 허수아비 때리기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단어에 사로잡혀서" 원인을 찾지 않고 '성별 갈등' 프레임을 적용하는 쪽은 전통적 남녀 성역할을 강조하는 진영이지 않은가? 결론은 정체성 정치를 한다고 비판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이 당연한 것을 성실하게 염두하지 않고 있거나, 혹은 정체성 정치의 이와 같은 비판자들이 오독을 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체성에 매몰되는 것이 분열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늘 염두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데에는 상당 부분 동의하며, 그런 비판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근데 정체성 기반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과연 현재의 단계에서 이 글에서 우려하고 있는 정도로 정체성에 매몰돼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허수아비 때리기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정체성 정치에 대한 꽤 많은 비판들이 담론을 이처럼 오독하고 있다. 만약 담론의 내용을 다수가 오독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담론지형이 형성된다면, 그 담론지형은 엄연한 사실이 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며 넘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경계하면서 방어하고 설득하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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