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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4일 화요일

가시화되는 반지성주의의 국회 입성

당에서 영입한 핵융합 국제전문가는 18번이고, 핵융합을 지구에서 구현하는 건 비현실적인데 왜 하냐고 어떤 현황도 이해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사람은 시민사회 몫으로 9번으로 당선권이구나. 비록 시민사회 및 군소정당이랑 같이 하다보니 이렇게 된 거긴 하지만, 전혀 다른 메시지 내는 두 사람이 비례후보 명단에 공존하는 것 자체가 확실한 방향성 없는 몸집 불리기로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투표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에 아쉬움이 크다.

늘 이렇게 말로만 언급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밀려나는 과학기술 쪽에서도 그렇고, 국회에 성평화, 이퀄리즘 세력이 확정적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이며 보수 종교계도 진입 시도하는 상황에서 내가 관심이 있는 또 다른 주제 중 하나인 젠더문제 및 소수자 문제에서도 그렇고, 21대 국회의 모습이 대체 어떨지 정말 걱정된다.

이와 비슷한 무력감의 문제에 대해 근 몇 년 간 느낀 바는 다음과 같다: 나를 완벽하게 대변해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릴수록, 더욱 더 이상한 사람들만이 내게로 온다. 그런 기다림의 정서가 극단주의적, 반지성주의적 정치담론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다. 결국 영역의 적극적인 확보와 개척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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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1일 토요일

세상의 절반을 생각한다: 'N번방 사건'과 그 경악스런 일반성을 보며

끔찍하고 초현실적이다. 읽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N번방 사건'에 대한 글들을 의무감에 꾸역꾸역 읽었다. 특정 범죄자 몇 명이 아니라, 한 나라 전체에서 유의미한 비율의 불특정 대중들이 참여하는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 직접적이고 심각한 폭력이 그동안 있어 왔다.

불법 음란물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재미있게 여기고 남성들끼리의 유머 소재로 소비해 온, 그 유서깊은 잘못된 분위기가 이 사건에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아니, 이 사건이 바로 그러한 분위기의 아주 극단적이면서도 솔직한 귀결 그 자체이며, 그러한 분위기가 견제받지 않을 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휴대폰 조작 몇 번에 불과한 아주 일상적인 일도,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에 영향을 줄 만큼 아주 비일상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이것이 불법적인 성적 착취와 디지털성범죄의 아주 무서운 점이다.

26만 명은 중복 집계가 있으므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들을 많이 본다. 물론 그것보다 수가 더 적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방의 회원 수만 해도 2만여 명이었다고 하며,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이 숫자만 생각하더라도 매우 높은 비율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텔레그램과 같은 비주류적 디지털 매체 사용에 익숙할 연령층이 어디까지일지 생각해 보면, 비율을 따질 때 분모에 들어갈 숫자는 훨씬 더 줄어든다. 이 정도 비율이면 위에서 말했듯 특정 집단을 넘어 사회 전체의 불특정 다수가 이 체계적 억압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말이다. 게다가 사건이 드러난 이후로 (디지털성범죄 사건에서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 범죄적 자료들에 대해 여러 경로로 관심을 갖는 이들의 게시물들이 속출했음을 고려하면 그 일반성은 더욱 확장된다.

그런데 26만명이라는 숫자가 왜 계속 강조될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있기는 하겠으나, 사건의 끔찍함에 공감하기보다 숫자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먼저 지적하면서 선 긋기, 심각성 축소하기부터 시도하는 그런 소위 '합리적' 태도를 본다면, 그 반대급부로 '결코 일부가 아니다'를 강조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자가 몇 명이냐 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반성이라는 질적인 문제와, 그에 따른 철저한 반성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이런 얘기도 해보겠다. 음란물 금지, 성매매 금지 등에 대한 대중적인 반대 의견은, 주로 그 금지의 근거가 성을 엄숙하게 보는 전근대적 관점 하에 수립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리고 판례 및 현행법의 논리 상으로는 그것이 옳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주장들이 다소 허수아비 때리기처럼 느껴진다. 남성중심적인 환경에서의 성 산업 발달이 가져올 결과를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전망하지 못하고 우려하는 이유가 정말 과연 그것뿐인가?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현대사회로 나아가자는 관점에서 그런 의견들을 비판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사건에서 극단적으로(그러나 매우 일반적으로) 드러났듯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에 대한 실질적인 성적 착취, 속임수, 폭력이 매우 일상적인 수준에서조차 만연하고, 또한 그것이 'N번방'과 같은 형태로 간단히 연결되는 지금의 환경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 전체에서 성적 관계맺음의 전면적인 비폭력적 재구성, 그리고 성 담론의 탈-남성중심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 이 상태에서 성 산업의 발달이 가져올 것은 자유와 권리의 확대가 아닌 명백한 축소일 것이 아닐까 한다. 산업의 양지화를 통해 그런 비폭력적 재구성이 알아서 유발될 것이라는 기대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오히려 비폭력적 재구성의 가능성에 대한 확실하고 정교한 근거와 사회 전체적인 추진 의지가 충분히 확보됨이 우선이고, 그에 따라서 그걸 진행하든 말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원래 얘기로 돌아오자. N번방 착취 사건, 그리고 남초 집단이 그 사건을 대하는 왜곡된 관점의 '일반성'을 고려할 때, 이 쯤 되면 여성들이 겪는 매우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성적 폭력에 대해 호모소셜 대중들의 자발적 태도변화와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딱히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지금 느껴지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저 여성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연대를 구성하고, 권력과 언어를 더 많이 획득하고, 더 많은 사실들을 찾아 폭로하고, 더 많은 호모소셜을 해체하고,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를 기억한 채 새로운 시대를 치열하게 열어 가는 방법밖에 없겠다.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미약하게나마 보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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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1일 수요일

전염된 윤리적 둔감성: 상대편의 비인격화로부터

코로나19 시국과 관련해서 지자체장 대응을 비판하는 것이나, 무슨무슨 담당 공무원이 신천지였더라, 진짜 뭐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가능하며 유의미하다. 그런데, 대구라는 지역 자체를 신천지에 점령된 곳이라는 식으로 희화화하는 분위기를 은근히 내비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본인들은 아니라고 할 것이고,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도 없다. 그렇지만, 투표 성향이 본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막말에 대한 '필터'가 묘하게 무뎌지고, 굳이 없어도 될 조롱의 뉘앙스가 섞여 들어가는 그런 거, 확실히 있다.

심지어 대구경북 지역이 투표를 잘못 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유명 작가, 총선 예비후보 등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보수 우세 지역이라서 욕했다는 건 오해이며 지자체장 한 명에 대한 이야기였다라고 해명하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공감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오해라고 해 두겠다)를 살 표현은 절대로 안 나오지 않았을까. 표현 한 마디 한 마디가 줄 수 있는 오해의 여지에 누구보다 신경써야 하고 또한 실제로 그래 왔을 사람들이 바로 작가, 정치인 아닌가. 그런데도 그렇다.

혼란에도 불구하고 질서 있는 대구의 모습을 보도하는 기사에도, 중앙정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면서 조롱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특정 지역을 중앙정부와 분리해서 보는 건 반대쪽에서 쓰던 악의적인 프레임인데, 그새 배운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인간적인 격려와 위로의 효과를 갖는 그런 기사를 조롱하지 않으면서도, 정부여당 때리기에 나선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조국 교수 논란을 겪으면서, 존경해 온 분들, 나랑 비슷한 진영이라고 여겨 온 분들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다. 안 그래도 전염병 사태와 인프라 부족으로 고통받는데, 위로와 격려, 지원은커녕 그런 식의 말들을 들으면 그야말로 뽑으려다가도 안 뽑고 싶겠다.

해도 될 말일지 아닐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의외로 다들 알고 있다. 요새는 성희롱, 여성혐오 등 문제있는 발언을 할 때도 '요새 이런 말 하면 큰일난다던데'로 운을 띄운다고 하지 않는가. 다들 아는 것이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도의에 어긋나는 사고와 언동을 제발 자제해야 한다. 투표를 잘 하라고 훈계할 시간에, 지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찾아 실천하고,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보건, 공공의료, 방역이 잘 돌아가기 위해 뭐가 필요할지 고민하고 공부하고 개발해야 한다.

물론 특정 지역 차별에 편승하며, 없애기는커녕 재생산해 온 어떤 다른 정당에서는 공천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호남에 차출시키겠다는 이야기도 나온 것을 보면, 상대방 진영을 동등한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묘한 재미까지 느껴 버리는 것은 한쪽만의 일이 아니긴 한가보다. '선택적 공감능력'이라는 말은 진보진영을 비판한답시고 오남용돼온 말인데다 약자 혐오의 맥락도 있어서 아주 싫어한다. 근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머리에서 자꾸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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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6일 금요일

내가 본 천만 관객 영화들(스포일러 있음)

Facebook에서 유행한 #천만영화리스트 해시태그를 달아서 썼던 글(링크)을 옮김.
27개 중 13개를 보았으며, 감상여부와 함께 간단한 평들도 남겨 보았다.

1. 명량(X)

2. 극한직업(O): 유튜브로 결제해서 봄. 비교적 깔끔하고 시원한 코미디 영화.

3. 신과함께-죄와 벌(X)
4. 국제시장(X)

5. 엔드게임(O): 극장에서 두 번 봄. 장르적으로 일반적인 영화라고는 보기 힘들며, 팬들을 초청해놓고 MCU를 마무리하는 클로징 이벤트? 행사?에 해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딱히 부정적 평가는 아님. 말하자면 이 영화 전체가, '파 프롬 홈' 영화 초반에 나온 PPT와 메타적으로 동등한 것임(여담이지만 나는 파프롬홈을 엄청나게 좋아함). 누구도 안 해본 대규모의 일을 했고 그것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던 듯. 통시적 짜임보다는 개별 장면에 환호하는 방식으로 감상하는 와중에, 여성캐릭터 희생은 그 목적이 설득되지 않아 아쉬웠음.

6. 겨울왕국 2(X): 봐야 하는데 하다가 결국 못 봄. 곡들 모르는 채로 보고 싶었는데 설입 할리스에서 인투디언노운 주구장창 나와서 실패... 내용은 아직 모름.

7. 베테랑(X)

8. 아바타(O): 극장에서 보긴 봤는데, 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좀 급이 떨어지는 3D로 봄. 그래서 당시 찬미받던 그래픽의 진수를 느끼진 못한 점이 꽤 아쉬움. 그래도 대단하다 느끼긴 했던 기억.

9. 괴물(O): 학창시절 학교에서 보고, 최근에(불과 몇 주 전) 다시 봄. 너디한 학생답게 괴수의 생김새와 스펙, 그래픽 같은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그런 게 뛰어나게 표현되었음에도 전면에 내세워지진 않아서 아쉬웠음. 최근에 다시 볼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여서 재밌었고, 기생충과의 색깔 차이에도 주목하게 됨.

10. 도둑들(X)

11. 7번방의 선물(O): 아버지와 극장에서 봄. 울리려고 만들었네~ 하면서 울긴 욺.

12. 암살(X)

13. 알라딘(O): 어머니랑 누나랑 봄. 화려하고 유쾌한 춤 장면 같은 걸 원래 오글거려서 잘 못 보는데, 원작 만화영화가 상기되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괜찮게 봄. 원작 스토리를 바꾼 부분은 재밌었지만 정교하기보다는 거칠고 솔직했음.

14. 광해, 왕이 된 남자(X)
15. 왕의 남자(X)
16. 신과 함께- 인과 연(X)
17. 택시운전사(X)
18. 태극기 휘날리며(X)

19. 부산행(O): 친구들끼리 봄. 오락적인 좀비영화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데, 그런 영화들에도 종종 있는 딜레마적 순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연출한 듯.

20. 해운대(X)

21. 변호인(O): 고교 때 친구랑 같이 봄. 그렁그렁하면서 봄.

22. 인피니티 워(O): 극장에서 봄. Endgame 대사를 못 이해해서, '가망 없음' 번역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음. 영화 속에서 각자의 배경을 가진 수많은 히어로들이 합류하는 거랑, 현실에서 저작물로서 각자의 지위를 가진 캐릭터들이 복잡한 계약을 통해 한 영화로 합류하는 것 사이의 필연적인 유사성이 흥미롭다는 따위의 생각을 함. 사실 쉴드의 본체는 작품 속 기관이 아니라 현실의 마블영화 생산 체계 그 자체 아닐까. 한편 엔드게임과 달리 그 기능과 필연성이 매우 분명하긴 했지만 여성캐릭터의 희생 방식이 여기서도 꽤 외상적이었음.

23. 실미도(X)

24. 에이지 오브 울트론(O): 넷플릭스로 봄. 예고편이 소름돋아서 최근까지도 즐겨 보고, 본편은 개그 장면들이 맘에 들어서 클립을 즐겨 봄. Language 드립이 엔드게임에도 나왔더라면 좋았을 듯.

25. 인터스텔라(O): 서사는 상대론 관련해서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것들을 보여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 Stay 장면 비롯한 연출은 다소 숨막혔지만 멋졌음.

26. 겨울왕국(O): 고등학교 동기랑 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노래하는 엘사의 캐릭터가 매우매우 마음에 들었음. 렛잇고도 아주 좋아하는 곡.

27. 기생충(O): 개봉한 지 얼마 안돼서 봄.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외국 상 받을려고 작정하고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었고 결국 후일 아카데미까지... 문제의식 자체가 특별히 급진적이거나 새롭진 않지만, 비교적 전형적인 주제를 아주 잘 다듬어서 비평의 여지가 많도록 잘 전달했다고 생각. 영화 내외적으로 기택 가족의 가난이 별로 존엄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비되는데 사실 비판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조차 영화 주제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냄새', '계단'(으로 대표되는 수직적 짜임구조), '계획' 정도일 텐데, 그 중 '계획'의 극중 기능은 아직도 사실 잘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