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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5일 목요일

노력의 가치 재구축: 공정성이 아닌 책임성으로부터

학업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는 정서에 관한 담론이 핫한 모양이다. 여러 성취지위 중에서도 특히 '등용문' 느낌이 강한 지위(대학, 고시, 공기업 등)들에 대해 그런 정서가 많이 표출되는 것 같다. 이번 인국공 논란도 (적어도 언론이 그렇게 연결짓는 방식을 따른다면) 그것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런 식의 '공정한 노력->보상 시스템' 자체가 그리 보편적이진 않다. 이런 시스템에 대해 (1) 여러 정보를 잘 알고 있고, (2) 속할 예정이거나 속해 본 적 있으며, 결정적으로 (3) 그 속에서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을 할 기본적인 여건(가정에서 기다려줄 수 있는지 등)이 되는 계층도 꽤 한정적이다.

결국 이에 관계된 주요 계층은 특정한 이익관계 속에 놓인 특정한 계층인 건데, 이게 보편적 루트라는 사회적 믿음이 있다. 글공부가 업인 부류이다 보니 실제 발화권력과 언어적 능력도 비교적 갖춘 편이다. 또한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험공부의 절대적 우선성(?)을 규범으로 체화하고 있는데다, 꼭 저런 자리들이 아니더라도 모든 성취지위에 어느 정도는 노력->보상이라는 요소가 있으므로, 저 시스템에 딱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을 여지도 꽤 있어보인다.

그러면서도 21세기 이후의 사회적 기조는 그런 루트가 보편적이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혹은 보편적이지 않도록 만들려는 방향인 경우가 많아 이들은 여러모로 당국과의 알력이 있고 실제로 그런 정책들에 대한 반동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강력함에 주목하여, 저걸 아예 시대정신으로 승격(?)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어서 요새 이런 게 핫해지고, 또 그 반작용으로 여러모로 조소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한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위와 같은 다소 거친 인상비평 이상은 못 할 것 같고, 이 글은 사실 그냥 일기 같은 건데 하필 시사이슈와 얽히길래 여기에 써보는 것이다. 나는 저런 이슈들에 대해 잘 모르고 정서적 공감대도 적은데, 바로 그렇다는 사실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반쯤은 소외감을, 반쯤은 묘한 부심을 가져 왔다. 잘 모르는 이유는 아마 위의 (1), (2)를 갖추지 못해서일 것이다. 일단 (3)을 만족하는 가정환경임에도 집에서 그런 사회적 루트들에 대해 딱히 적극적으로 알려주거나 보여주는 편이 아니었고 진로에 대한 권유도 크게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거 하지 뭐 하는, 어찌보면 유아적인(?) 생각을 오랫동안 유지한 것 같다. 노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부터 밀려난 건지, 내가 일부러 벗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비해 내가 저런 것에서 정서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리고 기질적으로도 생활을 통제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식의 노력을 해 본 경험이 많지 않기도 하다. 오죽하면 집에서도 나한테 수능이나 고시 타입은 절대 아닌 것 같다고 했겠나. 주로 매 순간 서 있는 위치에서 재밌는 걸 하고 재미없는 걸 안 하는 길을 찾기 위한 메타적인 노력만을 많이 한 거 같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상태가 됐는데, 이게 약점이 되게 많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런저런 공부 하고 싶다는 탐색전만 깔짝깔짝 많이 해봤고 정작 공부는 그리 열심히 안했다보니(...) 주변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다들 비슷한 걸 하는데 나는 그게 재밌으니까 성과가 높았던 거고, 학부에서는 아무거나 다 해도 되고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환경에 갑자기 expose되다 보니까 그런 차이점을 극명하게 체험한 게 아닐까 한다. 물론 메타적인 노력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태스크들도 충실히 뚫어낸다면 퍼포먼스가 높겠으나, 내 경우 후자가 안됐던것.

대학원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지적, 생활적으로 통제하면서 학계에 소속될 자격을 갖추는 훈련을 받는 곳이기도 하며 또한 급여를 받으면서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같은 경우 특히 병역도 얽혀 있으니, 삶에서 거의 처음으로 이런 사회적 책임의 측면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이미 말했지만, 위에서 얘기한 좁은 의미의 노력->보상 시스템 자체는 그리 보편적이지 않으나, 속하고자 하는 커뮤니티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고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descriptively, not normatively) 분야 막론 보편적인 면이 있다. 합리적 보상에의 기대라는 측면보다는, 자격의 확보와 책임의 완수라는 측면에서 노력의 의미를 정초하고 그것에 충실하게 자율적인 자기통제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꽤나 건전하고 생산적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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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4일 일요일

귀염론

<귀여움을 다루는 방식: 불화의 가능성을 전제한 일회적 사태로서>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점점 더 빈번하게 언급되며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귀여움은 흔히 아기나 반려동물이 갖는 특성, 혹은 그러한 대상들이 촉발하는 감정으로 대표하여 묘사된다. 이와 관련하여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필요한 감정이라는 등으로 진화적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많다. 

어떤 포착되는 순간들은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우리로 하여금 무해함과 그 영속성을 상정하게 한다.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BFNekjEgvuk , Thumbnail image, 2023.03.18.)


특히 오리들이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닌다는 각인(imprinting) 효과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 (Konrad Lorenz)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연원, 목적론적 설명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귀여워함이라고 불리는 어떤 심정상태가 명백히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을 위주로 다뤄본다.

귀여움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상태라기보다는 주관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다. 즉 엄밀히 말해 우리가 일관성 있게 개념화하여 주목할 수 있는 사태는 '귀여움'보다는 '귀여워함'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촉발하기에 대체로 용이한 어떤 상태나 속성들의 범주가 있기는 한 것 같고, 이를 귀여움이라고 실용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이처럼 귀여워함은 주관의 내부에 촉발되는 것이지만 상호주관성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지향한다. 즉 귀여워함은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실제로는 성립되지 않고 있는 상호주관성을 가상적으로 형성하기까지 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갖게끔 한다.

단적인 예로, 사물의 외형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귀여움을 느낄 수 있으며 이 때 사람들은 그 사물에 가상적으로 인격을 부여하여 그것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동 챗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입력에 대해 어떤 의인화하기에 용이한 반응을 보였을 때에, 그것은 때때로 귀여운데 여기서 우리는 은연중에 그 반응을 인격에 유비한다. 또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자동차의 앞모습을 사람의 얼굴 표정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러한 표정은 차종에 따라 귀엽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 등에게서 귀여움을 발견한다면 그를 실제로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인상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해당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외형, 혹은 특정한 언행 및 장면으로부터 유발되곤 한다. 가상적인 상호주관성과 그에 따른 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여움은 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귀여워하는 감정은 순전한 존중의 태도와는 꽤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귀여워하는 감정이 일으키는 가상적인 상호주관성은 '나를 해치지 않는 인격을 대할 때의 상호주관성'에 가깝고, 적절히 관리되지 않는다면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결국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나보다 미숙한 인격체에 대한 보호, 한편으로는 통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양면성에 의거하면 귀여워함의 감정은 주관으로 하여금 비인격적 대상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인간과 같이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복잡한 대상을, 오로지 무력하고 저항하지 않는 대상으로 평면화하여 조심스럽지 못하게 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예컨대 사물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생명체를 대하듯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 반면 인간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은연중에 무해함에의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될 수 있다. 인격에 대한 순전한 존중심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두려운 행동을 볼 때에도 그 행동이 정당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후에도 반드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반면, 귀여워하는 감정은 대상이 우리의 기대를 위반하면서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시켜 줄 때에 실망을 안기면서 비교적 쉽게 사라지므로 순전한 존중과 다르다.

따라서, 귀여움의 감정만을 관계 형성의 동기로 삼는 것은 일방적이며 아슬아슬하다. 그러한 관계에서 기대가 위반되었을 때 발생하는 실망의 감정이 일차적으로는 상대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일방적으로 가졌던 기대 때문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귀여움에 대한 기대가 위반되며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상황은 그러한 점검의 계기가 된다. 물론 기대를 위반한 상대방의 행동 자체가 적절치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 상술한 점검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귀여워하는 감정을 꺼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간에 의젓한 태도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일회적으로 수립되는 귀여움은 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며 나도 그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개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충만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양쪽 모두 불만을 갖지 않는 귀여움은 인간관계의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빈번할 수는 있을지언정) 본질상 일회적인 것이므로 나중에 돌아볼 때 오글거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하겠다.

만약 귀여움 또한 미학의 대상으로서 미적 범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이러한 일회성은 사실 꽤 자연스럽다. 무언가가 귀엽다는 판단은 취미판단의 범주로서,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우리의 인지적 도식이 잠깐 동안 특별히 조화롭게 작동하면서 산출하는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진실이 도출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이것이 혼동된다면 상술한 것처럼 잘못된 기대로 이어진다.

또한 전형성에서 벗어난 전복적인 귀여워함은 문화적 변혁력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귀여움의 대상이 되지 않던 것에서 귀여움 촉발의 가능성이 문화적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그것을 재확인하는 효과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귀여움의 특성은 귀여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귀여운 대상의 행동을 (혹은 일반적으로 귀엽다고 여겨지는 행동의 범주들을) 종종 모방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위에서 밝힌 가상적으로 형성된 상호주관성 하에서 수행되는 일종의 역할극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역할극은 귀여움 상황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제3자를 의아하게 하거나, 드물게는 제3자까지 그 상황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러한 귀여움의 역할극만으로 고도의, 또한 여러 단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을 짓자면, 귀여움 너머에 있는 온갖 불화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그 위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인 귀여움을 조심스레 애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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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9일 화요일

취향 논쟁은 차이의 확인에 그칠 뿐이다: 고양이 애호가에 대한 비판을 보며

결국 이런 글도 '비평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고양이가 잔혹한 맹수이며 개체수 증가 시 생태계에 영향이 있는 것을 다 알면서도 귀엽다고 느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고양이 애호가들 입장에서 데미지가 전혀 없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의 표면에는 비평의 의도만 드러나 있지만, 마지막 줄에서는 고양이가 귀엽다는 세간의 판단과, (그것과 직결되지는 않는) 밥 주는 행위를 비판하는 서술이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특정한 실천적 방향을 가리키는 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고양이의 생태라는 자연 현상에 비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귀여움이라는 주관적인 취미판단을 논박하려는 시도라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총체적 비합리일 것이다. 「판단력비판」을 100회 필사 시켜야 한다.

일부 덧글은 더 문제적이다. 이견은 있겠으나, 길고양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중성화 등 개체 수 관리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협조하는 경우도 많은데, '귀여우므로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라는 단편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상을 가상적으로 설정해 두고 그것을 공격하는 건 혐오감만을 재생산하는 공허하고 악의적인 양성피드백일 테다.

결론적으로, 귀엽다는 판단 자체에 대한 반론(?)은 설득보다는 차이의 끝없는 확인에 그칠 것이며, 생태 균형 고려 없이 밥 주는 것을 줄이고자 한다면 개별 행위의 동기에 대한 비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 자체를 현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현실적, 정책적 논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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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7일 일요일

Criticism on 'All Lives Matter': 정치구호의 의미를 몰라내지 말자

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는 그 맥락이 시작된 곳에서 실질적으로 BLM에 대한 반동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모든 삶이 소중하다는 말 자체가 맞는 말이라는 이유로 일부 한국인들이 그 말을 쓰겠다는 것은 정치적 구호의 의미가 사전적, 원론적인 의미 바깥에서 획득되는 사회적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정당화될 수 없는 처사이다. 해당 구호 자체를 인종차별 철폐의 맥락으로 전유하려는 전복적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설령 그런 전복의 의도여도 마땅한 전선 위에서 이뤄져야 말이 되는데, 현재 국면에서는 뜬금없는 말일 뿐 설득이 되지 않는다), 서구에서 흑인에 대해 적대적으로 발화되는 all lives matter와 그 발화 의도가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실 이퀄리즘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것이어서, 이렇게 길게 얘기해야 할 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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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일 화요일

과학인들의 정치를 향해: 정치의 본령에 먼저 충실하자

과학인들이 정치사회적 열망을 풀어나가면서 집단적 영향력을 갖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과제이고 나도 관심이 많은데...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적 감수성과 기성 정치문법을 성실하게 훈련받지 않은 채 발언을 하려다 보니 의도와 메시지가 자연스레 전달되지 못하고, 사지 않아도 될 비웃음을 사는 일이 꽤 잦아서 유감스럽다. 합리성을 강조하며 그 가치에 자기 자신을 굉장히 이입하지만 정작 딱히 합리적이지는 않은 희극적 장면들 말이다. 발언의 영향과 사회적 의미까지 고려해서 발언하는 게 합리성 아니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정치뿐 아니라 과학의 작동원리에도 그다지 충실하지 않다. 정치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 기본에 충실해야 신뢰가 확보되고 공간이 열린다.

이미지: 사람 1명, 서 있음, 사람들, 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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