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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9일 수요일

어떤 일반화는 성급하지 않다: 최소한의 정치적 진술가능성을 확보하기

집단에서 어떤 좋지 않은 경향을 발견해서 언어화하고 비판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인 듯하다. 그 좋지 않은 경향은 은밀하게 인습적으로 있는 거지, 대놓고 강령에 써져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다 보니, 옹호자들이 '그래서 구체적으로 그런 사례가 있느냐'고 반론하는 것은 손쉬운 반면(저 말만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어도 반론이 간단히 성립한다), 그에 대해 다시 답변을 하는 것은 매우 번거롭다.

집단에 어떤 경향이 있다는 인식은, 객관적으로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설득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은 그런 주장이 자신들을 부당하게 싸잡아 욕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인식이 다르며, 그 다른 지점에 대한 어떤 '전형'을 만들어서 부정적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논리적 오류라기보다는, (차별주의를 성찰적으로 배제해 나가는 것 등을 비롯한) 어느 정도 선의 링 안에서는 적법한 정치적 갈등이다. 공통점을 뽑아내서 비판하는 것이다보니, 전형을 상정하지 않고는 어떤 진술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논리와는 다른 룰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 인식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성실히 축적해 놓는 것, 그에 대한 개념어들과 언어적 표현들이 설득력 있도록 갈고닦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력 있게 적재적소에서 꺼내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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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2일 수요일

잇따르는 권력형 성폭력: 대책은 근본적 체질개선뿐

2년 동안 무려 3명의 여당소속 광역단체장이 잇달아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임이 드러나면서 낙마했다. 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진정성 있는 공적 책임을 질 수 있는 가장 나은 방식은 무엇일까? 현재 성폭력 문제를 정치환경의 근본 문제가 아니라 정세를 요동치게 한 하나의 악재 정도로만 보거나, 미래통합당은 더할 거라며 억울해하고 있는 상당수 당원들의 인식, 그리고 당대표 선거 상황 등을 볼 때 실현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이지만, 내가 상상해본 시나리오를 한번 써본다.

내 생각에는 일단 성폭력 문제에 확고한 의지와 역량이 있는 여성 정치인들이 실질적, 불가역적으로 권력을 획득하여 성폭력에 대한 인식제고, 방지 및 제대로 된 사후대처를 위한 대대적인 체질개선을 시작해야 한다. 작은 위원회나 기구 만들어서 한번 권한을 줘 보되 기존 남성중심적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무력화되거나 회수될 수 있는 그런 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단기간에 되는 작업은 아니고 근본적으로 완료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긴 하다.

그리고 보궐선거에도 당선될 역량이 있는 여성후보가 출마해야 한다. 이 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 여성이니까 성폭력 문제 없겠지 같은 나이브한 생각이어서는 당연히 안 되며, 남성 정치인들의 총체적인 반강제적 반성과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후보를 내세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권력의 축이 실질적으로 균형있게 됨으로써 가능하다. 말하자면 정치권력의 우위를 통해 젠더권력을 반영구적으로 평등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 국면을 수습하고 타개하려는 것이 아닌, 성폭력 문제에 진정성 있게 대응하고 당내 권력과 지자체 행정을 실질적으로 여성이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 역사와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과는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하는 것이다.

이 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당 소속 단체장이 부정부패로 퇴출될 경우 차기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당헌당규 상의 조항이다. 일각에서는 성폭력은 부정부패와 다르므로 이 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걸로 성폭력이 부정부패냐 아니냐 싸우게 되는 것은 정말로 너무나도 좋지 않은 그림이다. 조항의 취지를 광의로 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해석해야 하고, 이 경우 조항이 저렇다면 어쩔 수 없이 후보를 안 내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도 든다. 내 생각에 이 조항은 정당의 목적과 유권자에 대한 책임을 무시한 다소 포퓰리즘적인 조항이며, 애초에 없었어야 할 조항이다.

이제 와서 당헌당규를 바꾸는 것도 치졸해 보일 수밖에 없는데, 만약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획득하도록 하면서 보궐선거 입후보도 가능한 쪽으로 개정한다면 그래도 꽤 설득력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오히려 책임을 더 제대로 지는 방식이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좋겠다. 내가 좋게 평가해온 우리동네 근처 여성 의원들이나, 이번 국면에서 누구보다도 어려웠을 소신 발언을 한 권인숙 의원에게 후원금이나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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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0일 월요일

역사의 종말: 보편의 실현인가 혹은 보편적 착각인가

아서 단토는 그의 예술 종말론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에센스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어떻게 모방/재현하느냐에 따라 그 패러다임을 달리하면서 발전되어 온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경향을 '바사리 서사'로 부른다. 이데아와 합치하는 최고도의 인간성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건강하고 활력 있는 신체를 조각한 고대 그리스와, 그림 그 자체로 담아낼 수 없는 기독교적 신성을 암시하기 위해 상징 효과를 활용한 중세를 단토는 미술 이전 시대로 분류한다.

미술가들의 관심 대상이 이러한 예지계/상징계에서 물질계로 점점 내려오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단토가 이야기한 바사리 서사가 시작된다.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바사리에 의해 자기인식된 르네상스 미술부터, 작가의 시점, 시간대 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흐물흐물한 빛 덩어리야말로 회화로 표현할 수 있는 에센스라고 생각한 인상주의, 반대로 그러한 변화를 모두 걷어낸 것이 본질이라는 입체주의, 한편으로는 삶과 사회상을 표현하는 사실주의 등 대략 20세기 이전까지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이러한 바사리 서사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술작품은 '원본'에 해당하는 외부 대상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로 정당화된다.

위 문단에서 예고되는 것은, 개별 예술창작이 특정한 철학적 신념 위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바사리 서사에서 그 신념이란 미술에서 모방해야 할, 대상들의 에센스에 대한 철학적 규정이었다. 이는 20세기 들어 특정한 외부 대상의 모방물이 아닌, 독립되고 자기완결적인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추상미술('이게 뭐야?'라고 질문할 때 '뭔가를 그린 거야'가 아니라 '미술 작품이야'라고만 답할 수 있다는 의미로)이 등장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파괴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본격화된다(왜냐하면 입체주의, 인상주의 등 바사리 서사 후반부의 미술과 그 이후에 등장한 추상미술의 사이의 관계를 단절로 파악할 수도 있는 반면, 연속으로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들의 본질이 아닌, 예술 자체에 대한 철학적 규정으로 질문의 축이 옮겨간 것이다. 이렇게 예술가가 가진 예술에 대한 규정을 작품이 스스로 실현하도록 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을 단토는 그린버그 서사로 규정한다. 다소 순환적일 수도 있지만, 예술철학이 예술생산을 추동하며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1960년에 발표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일상 속의 공산품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작품이다(실제로는 종이박스를 그대로 갖다 놓은 것이 아니라 나무 판자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기는 한다).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강령, 강령이란 없다는 마지막 강령이 선언되고, 이것은 '예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단토가 보기에 이 시점 이후의 동시대 미술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특정한 철학적 강령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개별적이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의 어구와는 달리 이 시점 이후의 미술 창작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 찬란해진다. 개별 미술작품들은 더 이상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도, 예술규정에 대한 철학적 사조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가치를 획득한다. 예술이 마침내 오직 스스로 정당화되기에 데 이른 것은, 미술사 속의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보편적인 종착점이며 따라서 예술의 발전사는 종결된 것이다.

한편, 직접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언'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시대정신을 점유하게 된 당시의 상황은 역사 속의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종착점이라는 것이 후쿠야마의 인식이다. 단토와 후쿠야마 모두에서 보이는 것은 바로 헤겔주의적 면모가 아닐까 한다. 자연에 잠재하던 이념이 서로 다른 모멘트들의 대립을 통해 발전하면서 스스로를 세상 속에서 점점 구체적으로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역사를 이해한 헤겔의 역사철학이, 미술분야와 정치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와 단토 모두, 자본주의 체제 하의 미국만을 보편으로 상정한 좁은 고찰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처럼, 대립되는 계기들의 투쟁에 의한 역사의 발전이 언젠가 근본적으로 완결되어, 역사의 종착점에 해당하는 무시대성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며 동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라는 관념은 꽤 곳곳에서 보인다. 특히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20세기 중후반부터의 시기가, 시대적 격동기를 벗어난 제1세계 주류의 사람들에게 그런 관념을 만들어내기에 특별히 용이한 느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러한 관념을 접한 뒤 비교적 자연스레 이해하면서도, 매력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낀 이유는 이것이 내가 어릴 적 (신화를 포함한) '옛날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게 되었던 관념과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여러 인프라와 노동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완벽히 단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시기여서인지,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 실제로 구전되어 전해지던 시기와, 그것들이 인쇄/출판되어 나오는 현대 사이에는 완전하고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옛날은 뭔가 웃기거나 무서운, 부조리한 일이 많이 일어난 시기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문화재인 것과, 문화재가 아닌 것기 칼같이 구분되는 것 같았던 인식도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현대에도 어찌 보면 '옛날 이야기'의 구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이야기를 만들게끔 하는 기이하고 불가해한 것들도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옛날-동시대 이분법은 유아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꾸준히 남아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진정 보편적인 것은, 관념 속의 보편이 일시적, 국소적으로 달성되었을 때 그것을 역사의 종말로 판단하려는 인간의 경향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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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7일 화요일

믿음직한 군을 향해: 민간 감시로 보신주의 조직문화 근절해야

또 한 명의 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재의 군대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숨기는 데 급급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 모두가 알고 있다. 다른 곳이라고 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군은 (가장 이런 것에 신경 써야 할 곳임에도) 유난히 노골적으로 문제를 숨긴다. 이쯤되면 징집대상자들을 국민 취급이나 해주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마 보신주의의 산물인 것 같은데,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서, 진정성 있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믿음직한 군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세간에 있는 '끌고갈 땐 국가의 아들, 다치면 남의 아들'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본인이 군필자이거나 친족이나 지인 중에 직업군인이 있는 등 군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본 사람들은, 군에서 터진 문제가 왜 그런 식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지를 어느정도 직감한다고 한다. 군대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래된 문제들의 해결을 얼마든지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거기에는 보신주의 조직문화의 근절을 위해 그러한 구조적인 진단을 할 수 있는 경험자들의 도움과 협조가 지극히 필수적이다.

군대는 폭력의 합법적 담지자로서 기능을 가지지만, 병영 부조리와 같은 폭력은 당연히 그러한 폭력과는 아예 다른 문제다. 군대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뭉개 온 범위가 너무 넓고, 역사가 너무 길었다.

합법적인 폭력을 제대로 준비하고 수행하며 그 자격을 국민들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군대 내부의 부당한 폭력은 효과적으로 감시되고 통제되고 처벌될 필요가 있다. 군대는 체계를 중요시하는 집단이지만, 역설적으로 병영은 어떤 이들에게, 어떤 면에서 적자생존 정글 그 자체이다. 밀어넣어 놓고 책임은 제대로 안 져서 그렇다고 본다.

인권이라는 개념은 잘 정립되고 연구되어 있으며 이것이 군인에게도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기본권 제한에 대해 모르고 쓰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 개념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교육이 아닌 권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실효적인 권한을 갖는 민간 감시기구에 의한, 강제성을 갖는 통제로만 인권을 보장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비합법적 폭력을 합법적 폭력으로 조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는 어쩔 수 없다', '거긴 원래 그렇다', '눈 딱 감고 2년 갔다 오면 된다'라는 식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관심갖고 감시하고 연구하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자라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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