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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서울 원전 건설? 희화화로의 레토릭이 아닌 진지한 논쟁이 필요하다

서울에 원전 지으라는 레토릭이 원전 찬성론자 조롱하고 서울중심주의 비판하는 반어법(?) 느낌으로 계속 보이는데, 페북판에서 소수의견일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진지하게 찬성임.


일단 화력발전에 의한 지구온난화, 아니 그 이전에 만성적 대기오염부터가 원전보다 훨씬 다수의 사람들에게 훨씬 유해할거라 생각하고... 여기에 더해서 기술이란 것은 사회적 구성물이라 많이 관심받고 연구되고 사용되고 감시될수록 더 안전해진다고 생각함. 특정분야를 계획적, 체계적으로 사양시키는 것은 안전에 문제가 생기라고 고사 지내는 것과 같음.


원전의 안전문제는 기술적으로는, 그리고 시민의 감시와 참여 측면에서는 우수하다고 생각함. 다만 언제나 삐끗하고 신뢰를 잃는건 결국 휴먼팩터고... 탄소제로라는 가치에 대해 퍼블릭한 합의가 있다면 원전 비리 같은 흑역사의 적극적이고 지속가능한 청산을 하고, 책임 회피하지 않는 직업윤리를 형성시키고 훈련시키면서 원전을 이어나가는게 맞는 방향이었다고 봄.

'원전 서울에 못지을 이유가 없다, 다만 경제성이 문제라서 안짓는거다'라는 주장도 원전 찬성론 쪽에서 많은데, 이것도 결국 서울 못잃는(?) 주장이라고 비춰지므로 아주 진취적이거나 소구력있는 얘기는 아닐것. 경제성이라는 것도 자연과학적인(?) 수치는 아니다보니 각종 이해관계,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가치, 심지어 선언적 의미 등의 cost function을 바꾸면 얼마든지, 그것도 정당하게 바뀔수 있는듯.

이는 특히 원전의 경제성이 지난 몇년간 고무줄처럼 변하는걸 보면서 국민들이 체험했던 바이기도 함. 고무줄처럼 변하는것 자체는 잘못된게 아니고, 그 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정당한 싸움이 존재한다고 봐야함. 물론 전문기구 내지는 협의체 등의 민주적 장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투명하지 않은 곳에서 쪼인트 까서 경제성평가에 영향이 간다거나 하는건 제외.

요컨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면 경제성 평가의 기준도 정당하게 바뀌는것. 이는 원전 찬성론 쪽에서도 인지하고 활용해야 할뿐더러, 반대론 쪽에서도 비용 평가의 객관적 합리성을 과도하게 자처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내세워야할 주장이라고 생각함.

결론적으론 서울에 원전을 고려 안하는 것이 서울중심주의다, 아니다 경제성 문제다 등등 다 일리가 있지만 그것들 다 포함해서 결국에는 원전 지어도 된다, 지어야 한다는 정치적 설득이 안되어서 그런거 아니겠나. 정보버블을 깨고 운영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고 (원전비리가 워낙 충격적이었던 데다 운영주체의 직업윤리에 대해 알고있는 바가 없어서 나로서도 신뢰가 크게는 없긴하다 ㅠ), 정치적 설득을 해내서 필요하다면 어디든 원전을 지어야한다고 생각함. 다만 현실의 정치지형에서 그러한 설득이 가능할 경로가 보이지 않고 웃긴 결과들이 예상되기때문에 희극적으로 소비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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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4일 일요일

문화공간 운영방침을 둘러싼 갈등: 콘셉트의 섬세한 존중을 향해 서로 배려하자

왜인지 타임라인에 노키즈존 얘기가 많이 보여서 관련 있는 듯 없는 듯한 얘기들을 엮어서 적어 본다.


나는 가게에서 사람 가리는 티 나면 기분 좀 상하는 편인데 (사실 비슷한이유로 지인 초대 위주로만 운영되는 곳들도 그리 좋아하진 않음...), 꽤 많은 분들이 본인이 '가려지는' 입장이 아닐 경우 오히려 그런 제한을 기분좋게 받아들이곤 하더라. 누리고 대접받는 기분이랄까. 노키즈존도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공간의 콘셉트가 효과적으로 존중되려면 가격을 조정하거나 프라이빗하게 섹션 나눠 두는 등 유도를 해야 할 거고,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되면 기본적으로는 아쉽더라도 부대끼는 거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노키즈존의 경우엔 무엇보다 단순히 콘셉트와 관련된 미감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특정한 부류의 사람은 이용을 못 한다는 개념으로 연장될 수 있는 점이 실제 윤리적인 문제성으로까지 될 수 있겠다. 예컨대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인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경우 노키즈존이 확산될 시에 문화적 소외를 많이 경험하게 될 것.


조금 연결될 수도 있지만 별 상관 없는 얘긴데 다시 미감의 문제로 돌아와서... 예전에 가 봤던 어떤 공간은 주말에는 노트북 등 사용을 자제시키는데 그 이유가 장시간 점유 방지 이런 게 아니라 맘 편한 휴식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주인분의 바람이었고 그 자체가 셀링포인트 느낌이었다. 여기까진 문제 없고 차피 나도 놀러 갔던 거라 상관 없는데 웃겼던건 주인분이랑 아는 사이인 손님은 '우리가 남이가' 느낌으로 서로 하하 하며 그냥 사용 하더라고. 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일이 칼같이 어떻게 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런 거에서 위에 말한 '사람 가리는' 느낌이 나서 좀 깨긴 했었다.


나는 맘에 안 들더라도 무리 주거나 곤란하게 하는걸 잘 못하고, 공간의 콘셉트와 규칙을 존중하는 게 재밌고 예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불쾌감을 겪을 일은 현재로선 크게 없기는 하다. 예컨대 식당에서 대화 잘 안 들린다고 음악 소리 줄여달라 이런거 필요성을 못 느끼고 심지어 누가 했다는거 보기 전에는 그런요구를 해볼 생각조차 못함.... 그럼에도 섬세한 존중을 부탁하는 것과, 다소 자의적이고 불쾌한 경영의 차이를 느끼는 때는 분명히 있다. 그걸 가르는건 아무래도 운영하는 입장에서 깔린 우월감(?)의 여부 같은게 아닐까 싶은데 확실친 않다. 아 그리고 이런글 쓸때마다 단서 달아두는 거지만 기본적으로 막 비판(?)이라기보단 그저 취향이고 비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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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민족성에 대한 나이브한 비판은 반일 종족주의의 거울상이다

조선이 겪은 비극적 역사를 현대 국제정치에 그대로 대입해서 반미 반일 하는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당대기준 조선 레짐과 사회상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기록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선진성을 찬미하는것은 과연 양립가능한가? 전자는 대체로 동의하는데 그것이 후자와 함께 주장된다면 읭스럽다.


이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하기 위해 깔려 있어야 하는 전제 (혹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기획)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면, 바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정서도, 조선의 전근대성도 둘다 마음에 안 드는데 그 두 가지를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그 둘은 연장선일 수도 있지만 단절적인 부분도 크다고 보고 반서방 민족정서도 조선 민중에게서 직접 이어졌다기보다는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인 측면이 크다고 봐서 크게 동의되는 기획은 아니다. 선진적인 나라는 예전부터 그랬고 후진적인 나라도 예전부터 그랬다면 결국 민족성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결국 종족주의의 거울상에 다름 아니다.

국가의 경영자 입장에서든 분석자 입장에서든 소위 현실주의는 국내의 정치적 동기를 하나의 존재하는 현상으로 인정하고, 국제정치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하나의 요인으로 파악하고 제어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을 비판(?)한다고 되는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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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Plini를 통해 알게 된 선진적 프록메탈/재즈퓨전 음악들

Plini를 뒤늦게 접하고 요새 듣고 있는데 충격적일 정도로 취향저격이다. 연주도 작법도 뛰어나고 너무 거칠지도 않은등 가장 절대적인 형태의 음악이라고 느껴질정도임; 흔한 서양권 유튜브 베댓 레파토리를 가져오자면 천국에 갈때 브금으로 깔릴법한 느낌.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fbclid=IwAR2mN5m9AlkH6pgwTHnZzv4cEDP4uz4zIApIeBVaHPOc6BKCtfUmipsicq4&v=Rv_a6rlRjZk&feature=youtu.be)는 (아마) 대표 곡 중 하나인 Electric Sunrise인데 다른곡들도 다 좋다. 올해 초중순엔 밴드 Bubblemath가 너무 맘에들어서 밴드캠프 첨으로 가입해서 구입했었는데 이분것도 싹 구입 각임.


이런 비슷한 느낌의 차분하고 잘깎인 다른 프록메탈/재즈퓨전 밴드들도 검색해서 쭉 틀어 놓는 중이다. 내가 음악 지식이나 감각이 일천하다보니 곡을 모두 이해하면서 듣진 못하지만 좋게 들리는 포인트들을 중심으로 이 분야를 더 디깅해 보면 귀가 더 트이지 않을까 한다. 특히 이들 중 Jakub Zytecki라는 폴란드 기타리스트는 일렉트로닉 음악과의 접점도 많고 실제로 기타 음악을 별로 안듣고 안좋아한다(...)고 할정도로 색채가 독특하기도 함.

유튜브 검색만으로 대충 듣다보니 계보도 관계도 거의 모르는지라 더 찾아보는데 한계가 있기도 해서 해외 전문포털같은데도 찾아볼까 싶다.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꾸준히 팔로업하고 나아가 참여해 보려면 어떤경로로 해야하며 얼마나 잘해야 하는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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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9일 화요일

자유의 증진과 그 계승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져야한다

친중 친북을 경계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하는 국제적 감각을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스탠스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미시적으로 추동하는 싸움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사회문화적 자유의 증진을 향한 노력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표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의아하다.


시민자유를 실질적으로 증진시켜온 세력의 후신은 우파극단주의를 경계하는 감각은 있지만 국제, 국내를 막론하고 적극적 리버럴을 하고있지 못한데, 단순히 집권하고 눈치 봐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애초에 리버럴이 아니었던거 같고... 반대로 위에서 말했듯 자유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목소리높이는 세력은 정작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고, 정치적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결정적 순간에 극우랑도 은근히 선 못긋는다.

하여튼 정치적 구도가 굉장히 답답하다. 싸우고 견주어보면서 인정할건 인정하고 발전해야 하는데 서로 싸우느라 자기자신이 가지고있던 가치들까지도 퇴색만 시키고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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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6일 토요일

북카페에서 발견한 90년대 음악잡지

북카페에 95년도, 98년도 음악잡지가 있길래 꺼내 보았다. 현재 레트로컨텐츠로 접할 수 있는 문화들이 실시간으로 유행을 선도하던 생생한 기록들. 특히 95년도 잡지의 경우는 해외 국내, 록음악 댄스음악을 막론하고 현재 레전드가 된 뮤지션들의 새파란 현역시절 활동을 볼 수가 있어 무척 재미있다. 그 시절의 분위기가 궁금해진다.


현재 생산되는 이미지들이 이때에 비해 당연히 더 세련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결이 현재와 크게 단절적이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적 스타일이 이미 많이 확립되고 규모도 성장한 지금에 비해, 여러 스타일의 조그만 문화적 시도를 추동하는 정신적인 부분은 오히려 저때 더 다양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현재보다 국제적인 산업으로서 덜 체계화된 시점에 대한 낭만화일 수도 있다.

미용실에 가서도 건네주시는 잡지를 늘 관심있게 읽는 편인데 그 잡지들은 음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은지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다. 그래도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가진 필진들이 새로운 현상을 텍스트화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느껴진다.

현재의 음악계에서도 익숙하게 들리는 이름들이 이 잡지들에서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보면, 레트로한 것들이 단지 이색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로 연장되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명징하게 보이는 기분이고 소박하게나마 계보를 구성하고 파악해보고 싶어진다.

아무튼 하나쯤 소장하면서 심심할때 들춰보고 싶은 잡지들이다. 사진별로도 간단한 코멘트를 달았다 (Facebook에서 사진들 보기: 링크).

2021년 11월 4일 목요일

무운 사건: 놀람-경험의 전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다

무운 사건과 그에 대한 또다른 전직 기자의 글이 화제인데... 일단 원래 사건의 기자는 단어의 뜻을 임의로 판단해서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고, 회사가 비웃음을 당하게 했으므로 프로페셔널한 역량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건에 대한 다른 전직 기자의 글도 페친분들과 나눈 의견을 종합해보면, 원래 사건에 대해 비판적, 반성적으로 봐야 할 동종업계 종사자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평가를 맡기는 대신 '이쯤하면 충분한 대응이었다'고 스스로 단정해서 눙치려는 의도가 있어보이긴 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직한 글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한가지 내가 생각을 달리하는 포인트가 있다. 무운이라는 단어를 모를 수도 있고, 글쓴이 자신도 몰랐고,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는걸 여러 사례 수집을 통해 얘기한 것 그 자체는 무엇이 그렇게 추하거나 반지성주의적인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오히려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것 아닌가?

'몰라서는 안 된다'라는 가치판단 이전에 어쨌든 '모르는 경우가 꽤 있다'라는 사실의 전달 자체는 엄연히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 같아서 그렇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많이들 몰랐지 않나.

어떤 단어가 화제가 될 때면 그렇게 서로 물어보면서, 얼마나 보편적으로 쓰이는 단어인지 각자의 경험을 견주어보며 파악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모두가 아는 단어(여야 한다)라고 단정하는 것보다, 이 편이 오히려 인식의 확장을 향하고 있다고 본다.

이번 일 외에도 탄핵, 사흘 등 어떤 단어를 모르는게 말이 되냐는 플로우가 잊을 만하면 있는데 (주로 실시간검색어에 떠서), 나는 그때도 과도하게 놀라거나 개탄하는 반응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에 관해 포스팅도 했던 바 있다.

물론 이번에는 대중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글쓰기를 해야하는 기자가 몰랐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깔린 정서는 '이 단어를 모른다고?'라는 충격받음의 전시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본다. 놀람 경험은 순간이고 그것이 어떤 고찰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런 플로우에서는 놀람 경험만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느낌이어서 늘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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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혜적 태도를 걷어치워라: 정치적 유불리가 아닌 기본권의 보장 관점으로

페이스북에서 어떤 글을 보았다.


전형적인 좋은 일 하고도 욕먹는 화법이 이런것이다. 군인 월급이 그동안 비상식적으로 낮았고 문재인정부 때 많이 오른걸 군인들이랑 20대들이 당연히 누구보다 제일 잘 알지 그걸 왜 모르겠나.

글쓰신분의 평소 포스팅에서 보이는 정치 성향상, 20대 남성이 이걸 모르기 때문에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망 내지는 훈계도 은연중에 들어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지라 단 두줄이지만 더 좋지않게 읽힌다. 따뜻한 시선을 갖고, 권익을 보호해야할 국민의 한사람으로 보면 과연 이런 워딩이 나올수 있을까?

군인 월급 정상화 같은 기본적인 권익 관련 정책을 얘기할때는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기대해서는 안되고, 설령 정치적 지지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에' 해야한다. 무시하는 뉘앙스와 시혜적 태도가 모든걸 꼬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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