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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4일 수요일

프롬프팅을 통한 거대언어모델 설계원리 탐구에서 실험 디자인과 해석의 중요성

기술의 세부에 대해서는 잘 모른채로 그냥 상상해 보는 것인데, ChatGPT를 비롯한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의 특성을 얘기하기 위해 프롬프트를 넣어서 조사를 할 때, stylized output을 줄 수 있는 LLM의 높은 capacity를 고려하여 실험 디자인과 그에 대한 해석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LLM을 가지고 놀다 보면 자기 자신의 특성 및 설계원리를 근본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출력을 내는 경우가 있다. 자기 자신이 ai로서 어떠한 특징을 갖게 설계되었다는 명시적 응답은, 개발자들의 의도에 맞게 하드코딩되거나 RLHF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사용자들이 쉽게 할 수 있으므로 오히려 비교적 덜 속아넘어갈 수 있다. 그것보다는, 우연성에 강하게 의존하는 작업을 시킬 때 LLM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설계원리를 드러내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특히 더 미묘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그렇게 accidental하게 설계원리를 드러낸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조차 대부분 stylized output, 즉 매 dialogue마다 다르게 일종의 '컨셉을 잡은' 연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LLM이 제로샷 능력(더 구체적으로는 in-context learning 능력)에 힘입어 여러가지 처음 보는 과제 및 잘 정의되지 않은 과제를 수행하는 워낙 높은 capacity를 가진 탓에, 어떤 단일 dialogue만 보면서 그것이 다른 dialogue에 비해 더 근본적으로, LLM에 내재된 중요한 특성 탓에 광범위하게 나오는 결과라고 함부로 결론내릴 수 없는 듯하다.


세심하고 반복적인 프롬프팅을 통해 LLM이 가진 경향성을 탐색하고 성능을 최대로 이끌어내는 작업은 중요하고 흥미롭다. 그러나 실험자가 무엇을 보려고 의도해서 그것을 실제로 보았을 때, 단순히 그 담화 내에서의 연기에 속아넘어가는 게 아니라 LLM의 아주 일관적인 특성을 드러내었음을, 즉 소위 말해서 학술지식으로서 가치가 있는 '논문감'임을 입증하려면 실험 디자인과 해석을 굉장히 잘 해야 하는것 같다.


사실은, 본질(?)이 아닌 연기임에도 아무튼 그러한 연기를 이끌어내는 체계적인 프롬프팅 방법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좋은 성능이 나온다면 이 역시 의미있는 결과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 두 가지를 구별하기도 어렵다. 예컨대 특정 프롬프팅을 통해 LLM이 SAT 시험 문제를 훨씬 잘 풀게 되었다고 하면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결과들이 굉장히 많다), 이것은 stylized된 연기라고 하더라도 아무튼 그 시험을 실제로 잘 풀게 된 것이며, LLM은 분명히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테다. 이는 의미있는 지식이 된다.


한편, 뭔가 도식이 한 군데 잘못되어 있어서, 일관적인 이상한 방식으로 시험문제를 틀리는 dialogue도 존재할 수 있을테다. 이런 컨셉을 수행하는 능력 역시, 설계 원리상으로 보면 어떤 failure라기보다는, 위 문단에서 서술한 시험문제를 잘 푸는 dialogue와 비교했을 때 꼭 그것과 같은 만큼 'LLM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매번 다르게 수많은 컨셉을 잡고 얘기를 할 수 있는데 (혹은 언제나 그렇게만 할 뿐인데), 그 컨셉이라는 것에 실제 전문적인 수준의 퍼포먼스를 발휘해 주는 것까지 포함이 되어 버리다 보니 LLM이 우리의 직관을 벗어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또한 유명한 ChatGPT 탈옥 방법으로 'pretend that you are a~' 따위의 프롬프팅을 통해서 부적절하고 위험한 결과를 내는 게 있는데, 이때 사용자는 겉으로 안 보이게 안에 숨겨져 있는 어떠한 능력을 uncover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냥 LLM에는 구조상 '겉면밖에 없고', 때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겉면들을 보여주며, 그것들 중에 RLHF를 통해 금지해 둔 한 가지를 우회적으로 본 것일 뿐이라는 게 좀더 적절한 이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흔히 아이폰 같은 데서 얘기하는 탈옥과는 많이 다른 듯하다.
물론 by design 그렇다는 것이지, 능력의 어떠한 계층 구조가 자연스레 emerge했을 수는 있고, 그런 걸 탐색하는 것도 정말 재밌는 작업일 것이다.

아무튼 생명과학, 심리학 등 복잡한 대상을 다루는 실험과학 분야에서도 과연 연구자가 원하는 그 효과를 제대로 보고있는게 맞는지를 확신하기 위해 실험 디자인에 굉장히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LLM을 대상으로 한 실험들에서도 비슷한 면모가 있는 듯하다.
특히 LLM의 경우 시험문제 고득점 하는것처럼 명확한 척도가 있는경우도 있겠지만,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는 창의적인 과제에 대한 수행능력을 평가할때 일률적 정량화가 곤란한 semantic한 층위가 전면에 들어오다보니 더 미묘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연구문제 설정과 실험 디자인에 있어 생각을 아주 정밀하게 해야지만 믿을 만한 지식으로 정리가 될 듯하다.
아무튼 방대한 데이터와 심원한 아키텍쳐로부터 오는 LLM의 과제 수행능력이, 단순히 답을 잘 주는 걸 넘어 다양한 부문의 대화를 수행하는 데 이르는 것을 보면 굉장히 기분이 묘하다. 마치 사람이 직업상 아주 틀에 박힌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개인으로서 여러가지 입체적 면모를 가지고 말을 할 수도 있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는 수많은 종류의 텍스트를 학습한 덕분일 것이다.
이러한 LLM은 성능이야 무척 좋지만 결국은 과제별로 따로따로 학습해야 하는 전통적인(?) 딥러닝에 비해서도, 양적, 질적, 개념적으로 한 차례 도약해 있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이 든다.

물론 서두에 말했듯 개인적으로 이쪽에 대해 주워듣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본 것들은 있지만, 제대로 된 전문적 이해는 없는 관계로 이 모든 내용은 상상에 불과하며, LLM을 평가하고 이해하기 위한 더 좋은 방법과 개념적 틀들이 이미 있을 존재할 것이다. 이들을 기회가 될 때마다 잘 팔로우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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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0일 토요일

진영 스피커를 추종하는 정치, 그리고 질료적 퍼포먼스의 정치: 원전 오염수 논란을 보며

원전 오염수가 그렇게 안전하면 방류하지 말고 유용한 곳에 그대로 갖다 써서 증명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논리가, 어디서 처음 퍼졌는지 서로서로 거의 비슷한 워딩으로 무척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경험상 이런 건 우연히 다들 비슷한 논리를 생각한 게 아니라 공통된 소스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지만, 그럼에도 베낀 숙제와 직접 한 숙제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그 소스는 주로 정치쪽 유명 스피커들이다. 사람들이 어디어디 방송에서 봤다고 얘기를 하지 않고 마치 원래 알고 있는, 혹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처럼 말하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안 보일 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반에 원래 젤렌스키가 누군지도 몰랐을 사람들(나 포함)이, 푸틴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에 젤렌스키한테 무능하다고 조롱하는 얘기를 어디 방송 같은 데에서 듣고 왔는지 다들 똑같은 얘기를 읊던 장면도 생각난다.

그때 그런 부자연스러운 얘기가 널리 퍼지게 된 건, 당시 대선을 앞두고 상대 후보를 젤렌스키에 비유해서 공격하기 위한 무리수였던 걸로 추측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인 반서방주의와 러시아에 대한 재조명을 표방해오던 대안적 진보 스피커들이 탑승해서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염수를 유용하게 쓰는 것은 차라리 퍼포먼스성으로 일부러 몇 개 하려면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 대대적으로 '실제로 써라', '쓰자고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유해한게 맞을 것이다'라는 주장에는 내용 면에서, 그리고 효과 면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내용적인 부분을 보면, 이 오염수라는 것이 양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관심 있는 스케일에서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개념 자체를 얘기할 수 없는, 어쩌다 생겨났고 한번 소모되면 끝인 말 그대로 폐기물같은 물 덩어리이지 수자원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실제 사회 및 산업 각 부문에서 굳이 기존 공급처를 놔두고 그걸 쓰자고 전환해서 일이 그런식으로 돌아가게 될 하등의 이유도, 프로세스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해서 증명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형식적으로 그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만 통쾌한 기분을 받고 끝나는 일종의 사이다 같은 것이고, 실제로 누군가에게 정합적으로 요구됨으로써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종류의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인데, 원전 관련 기관 및 회사들의 신뢰 확보는 그런 식의 질료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설령 하라고 해서 진짜로 하더라도, 비용은 비용대로 낭비하고 코믹한 밈만 되고 말 것이다.

그런 건 늘 왜 코믹하게 느껴질까? 신뢰의 확보라는 문제는 지극히 세밀한 것인데 비해서, 질료적(?) 퍼포먼스를 통한 증명은 전근대적이고 무대뽀 같은 느낌이 있다는 걸 국민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결국 사고와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국민 상대로 최대한 공개하고 설명해서 (이걸 안 한 게 아니고 나름대로 엄청나게 열심히 하는데 왜 와닿지 않는가에 대한 답답함은 백번 이해된다), 우리가 국민의 편이다 라는 신호를 실질적 실천을 통해서 발신하는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쪽의 덧글들을 보니 비판의 방향을 또 틀게 되기도 한다. 사실관계와 숫자를 도대체 언제까지 설명해야 하냐며 국민의 무지몽매함(?)을 탓하는 부적절한 태도들이 많이 보여서 그렇다. 소통을 저해하고, 국민 편이라는 느낌을 못주는 이런 태도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이다. 전문가 집단이 정치적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때 늘 겪는 문제점 중에 하나다.

환멸을 표하는 그러한 태도 속에는 사실 '아무튼 나는 맞는 말 했으니 됐다'라는 느낌의 자기만족적 통쾌함도 섞여 있게 된다. 이는 상술한 반대진영의 태도와 겹쳐보이는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설득의 대상인 국민들을 도리어 탓해 버리는 그림이 나오며, 이로써 정작 설득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이렇다 보니 양 쪽 모두 덮어놓고 편들기 어렵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참 어려운 문제 같다. 게다가 국내 문제라면 사실관계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싸워보면 되는데, 외교적인 문제다 보니 국가간의 체면 및 실익 문제까지 많이 얽혀 들어와 버려서 더 그런 듯하다. 결국 일본이 은폐, 거짓말 등등 지나치게 불투명하게 나왔던 것도 실제 위험성과 별개로 명백히 잘못됐다고 의견이 모이는 듯하고, IAEA가 오염수에 대해 아예 직접적인 검증도 할 것 같으니 어느정도 괜찮은 출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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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5일 월요일

사설업체들의 서울대 무단 캠퍼스투어 유감

돈 버는 방법도 참 다양하구나 하는 것을 요즘 느끼고 있다.


요새 학교에 캠퍼스투어 오는 중고생들이 평년보다 눈에 띌 정도로 많아져서 기본적인 학교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되고 있다. 밖에 잠깐만 나가더라도 무조건 시야에 여러 팀이 보이고, 평년보다 최소 서너 배 이상의 인원은 되는 듯하다. 게다가 정문에서 법대, 사회대 사이 큰길의 인도 쪽 거의 전체를 인솔자들과 학생들이 채우고 있을 정도이다. 학생식당 줄도 너무 길어서, 점심시간인 1시간 이내에 정상적으로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렇듯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열린 공간이니까 투어를 운영하는 것 자체에는 별 생각이 없고, 사람 많아진 건 코로나 끝나서 그런가보다 했었다.

그런데 아까 다른 일로 에브리타임 들어가서 보니까, 놀랍게도 이러한 대형 캠퍼스투어가 대부분 학교 측과는 무관하게 사설 업체에서 하는 것이고, 심지어 일부 구성원들이 학교 공식 홍보대사를 사칭해서 "수백명씩" 인솔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많았던 것이다. 규장각이나 도서관에까지 단체로 들어가서 일장연설 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설 캠퍼스투어는 학생들의 대학에 대한 관심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는 점에서 광의의 사교육(?)이라고 보인다. 돈이 필요한 실제 서울대 구성원들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사업 하는 것이겠지.

나는 학교 시설을 공식적 절차 (일선 중고등학교 및 교육청과의 협력 등) 에 따라서 중고생들한테 소개해 주고 하는 것은 공공성에 부합하므로 찬성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프로그램의 내용과 퀄리티가 보장도 되지 않은 사설 업체 영리를 위해서 학교 구성원들이 양보를 해주어야 하고, 학교의 시간적 공간적 자원이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쓰이는 것은 매우 적절치 않아 보인다.

아무튼 학교에서 국립대로서의 책임 때문에 제재를 적극적으로 못 하니까, 업체들이 아주 화수분 같은 돈벌이 수단을 잘 잡은 셈이다... 돈 버는 방법도 참 다양하구나 싶었다.
외부인 출입을 막지 않는 대표적인 논리가 세금이 들어가는 국립대라서 그렇다는 것이고 여기엔 사실 꽤 동의되지만 (그러나 상징성 때문에 여러 정신적으로 아픈 분들이 모이는 걸 생각하면 학생들 안전 문제도 생각을 안 할 수 없음), 그 세금의 목적이 학술진흥 및 교육 공공성에 있음을 생각하면, 사설 투어업체 제재 정도는 과감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설 투어로 인한 인원 과다 문제 이외에도, 요즘 들어서 학교가 기존에 겪은적 없는 수준으로 불편한 점이 요즘 너무 많아졌다. 생협(생활협동조합) 운영이 문제가 있는지, 운영하는 식당의 숫자 자체가 거의 2/3토막 났는데, 캠퍼스 내 인원은 위에서 언급한 사설업체 캠퍼스투어 포함해서 과다한지라 농식 두레미담 줄이 건물 바깥까지 온다고 하고,

학식 가격 또한 너무 비싸지다 보니, 원래 항상 제일 줄이 짧던 학B(천원의학식)이 이제는 학부생들의 기본 픽이라 늘 제일 길다는 얘기가 있고 (정작 난 요즘 채식뷔페에 정착해서 학식 줄이 긴지 어떤지 잘 몰랐다),

5511은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제일 몰리는 버스 노선인데, 신림선 개통되면서 두번에 한번씩만 서울대입구역 쪽으로 가게 되어서, 말이 격번이지 실질적으로는 두 대쯤 보내고 세번째쯤은 되어야 겨우 낑겨 탈 수 있고 (그냥 정문까지 걸어가서 타거나, 종점에 가까운 정류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타는 게 나음),

단순히 코로나 때 사람 없었던 것의 역체감이라고 보기에는, 이전에 겪지 못했던 수준으로 불편이 심해지고, 사실상 하나의 도시 규모인 이 넓은 캠퍼스에서 원활히 유지되어야 할 것들이 하나도 유지가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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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8일 월요일

aespa 'Hold on tight' 및 3rd mini album 《MY WORLD》 감상평

2023.04.25

코로나를 앓는 동안 유튜브로 이것저것 보다가 거둔 최대 소득은, Apple TV 영화 <테트리스>의 ost로 기획된 aespa의 'Hold on Tight'를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Youtube 공식 영상(visualizer): 링크, 잘 만든 팬 무비: 링크)

유명한 테트리스 테마(Youtube 영상: 링크)를 K-POP 느낌으로 무척 잘 어레인지한 것 같다. 에스파 특유의 사이버한 느낌을 잘 살린 속도감있는 진행이 마음에 들고, 테트리스와도 무척 잘 어울린다.
에스파가 이 곡으로 ost에 참여한 애플TV 영화 <테트리스>는 일종의 첩보전의 색깔을 가진 역사극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영화에 이 곡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노래는 에스파가 불렀지만 작곡 및 편곡 자체는 SM엔터테인먼트 쪽 관여 없이 영화 음악팀에서 한 것 같은데 케이팝 댄스곡의 스타일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여담이지만 에스파는 새 앨범 <MY WORLD> 발매도 앞두고 있어서 최근에 유튜브에도 티저를 올리고 공식 홈페이지인 에스파닷컴(https://aespa.com/)에도 나름의 에스테틱이 있는 간단한 인터랙티브 아트워크도 올려두고 있다. 수록곡들은 콘서트에서 이미 공개했다고 하니 팬들은 이미 들어본 셈이다.

SM엔터 내부 분쟁 때문에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던 준비기간인 만큼 어수선함을 감추게끔 잘 프로듀싱이 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5월 2일에 첫 곡이 선공개되고 5월 8일에 전체가 공개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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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이번 aespa 신보인 3rd mini album 《MY WORLD》는 준비 과정에서 SM엔터 내부 분쟁 때문에 광야 콘셉트를 급히 캔슬한다고 하길래 걱정을 했는데 그것치고는 그래도 괜찮게 뽑힌 것 같다. 회사가 어수선한 와중일 텐데 기본 이상의 프로듀싱 능력은 보여주었다는 느낌이다.


특히 'Welcome to MY world'랑 'I'm unhappy'처럼 immersive한 분위기의 느린 곡들과, 시시각각 변하는 래핑이 곡을 이끌고 가는 타이틀곡 'Spicy' 및 'Salty & Sweet' 같은 곡들 사이의 일관된 대조가 인상깊다 (아예 편하게 가는 후반부 몇 곡들은 논외로 하자).

후자의 스타일은 전전작인 'Savage'에서 이미 히트했기에 새롭지는 않은 반면, 전자는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일단은 둘 모두를 에스파의 개성으로 끌고 갈 생각인것 같다.

또한 신난다고 해서 마냥 블링블링한게 아니라, 거의 SMP 느낌이 날 정도의 하드한 어레인지가 곡 곳곳에 살아 있어서 에스파 음악의 기존 팬덤에게도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결과가 될듯하다. 물론 곡이 그렇다는 것이고 비주얼과 콘셉트는 꽤나 현실세계로 내려오긴 했다.


전작인 《Girls》에서 동명의 타이틀곡은 개인적으로 정말 단단하게 잘 편곡된 멋진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중의 반응이 크게 오질 않았던 반면, 오히려 꺾임과 빈틈이 있는 '도깨비불(illusion)'이 대중들 사이에서 꽤 흥했던 걸 보니, 곡이 전반적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보다는 균형을 다소 상실하더라도 뭔가 확 와닿는 포인트들이 있는 게 흥행에 더 중요한듯하다.

타이틀인 'Spicy'의 경우 균형은 감각적으로 깨 두었는데 비해서, 착 감기는 킬링파트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는지라 이런 면에서 흥행이 걱정이긴 하다.


정식 뮤비뿐만 아니라, 사실상 뮤비라고 봐도 되는 여러 비주얼 컨텐츠들도 거의 1곡당 2개씩 풍부하게 업로드가 되어 있다. 안그래도 어수선한 상황에서 투어랑 병행하면서 녹음 및 촬영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굴린 모양이다. 원래 기획을 거의 갈아엎는 수준으로 새로 한 모양이던데 이러니 멤버들 컨디션 난조가 안 생길 수가 없을 것 같다.

케이팝을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 꼽자면 '감각적'이라는 형용사라고 생각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송라이팅도, 케이팝에서는 리듬을 밀고 당겨서, 그리고 반음계를 재치있게 사용해서 뻔하지 않게 감각적으로 편곡되는 편이다.
예전에 TV예능 《놀면 뭐하니》에 이효리가 나왔을 때 유쾌하게 지적된 것처럼, 블랙핑크의 파라방팡 파라바라 팡팡팡이 사실 숭구리당당 숭당당과 크게 다를 게 없고 자칫 코믹해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박자의 디테일 덕분에 매우 세련되게 들렸던걸 떠올리면 쉽다.

뉴진스와 르세라핌의 약진으로 스엠이 더이상 이러한 트렌드의 선두주자라고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포스트 이수만 체제로 예기치 못하게 이행하는 지금 상황에서도 감각적인 프로듀싱의 기본이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구나 싶다.
광야와 사이버 컨셉, 그리고 SMP로 대표되는 차갑지만 빡센 송라이팅은 미래적임을 자처하지만 사실 지극히 레트로한 것들을 레퍼런스하고 있으므로 언제까지 그것들로만 할 수는 없다. 제뉴인한 퓨처리즘을 잘 찾아서 제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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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 일요일

이론물리학 지식 습득에의 미련에 관하여

공부를 하다 보면 앞으로 어차피 들여다볼 시간과 기회가 없을 법한, 그리고 내 연구와 직접 연결될 거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어렵고 멋있어 보이는 지식체계 및 이론들에 대해서 많은 미련을 가지는 편이다. 사실 특정 연구주제에 대한 전문성을 요구받기 이전인 학부생 시절에 그런 토픽별 공부를 깊게 해 두었으면 좋은데, 그렇지 못했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어떤 교수님들은 박사과정 대학원생 때야말로 '공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간이라는 점을 강조하시며, 연구와 직접 관련있지 않더라도 궁금한 이론들이 있으면 지난(至難)한 계산들을 직접 해 보며 많이 습득해 두라고 조언을 해 주신다. 한편, 명확한 목적이 없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책을 독파하는 식의 공부는 가급적 지양하고 연구와의 관련성 하에서 효율적인 공부를 하며 연구에 집중하도록 조언을 해 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공부하는 속도가 빠르다면 위 둘을 모순되지 않게 병행할 수 있겠으나, 물리학과 내에서 보통 혹은 그 이하의 실력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유한한 시간이라는 제약 하에서 위 둘은 현실적으로 충돌하며, 이도저도 아니게 둘 다 가져가려 하기보다는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결국 대학원생은 (특히 박사 수료 이후에는) 학생이라는 신분보다는 연구에 시간을 투입해서 논문을 써야 하는 예비 연구자로서의 신분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로서도 그러지 않으면 초조하기도 해서, 적어도 강령으로서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노력해서 습득할 수 있는 멋진 이론물리학 지식 체계 - 심지어 그것들은 수학적으로 기술되다 보니, 그저 체계적이기만 한 사상누각 같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하며 새로운 지식을 무한히 창출하는 것들인데 - 가 멀쩡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일일이 이해하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는 게 연구자로서 필요한 덕목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원 다니면서 제한된 시간 내에서 직접 부딪혀 보며 잘 납득하게 됐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와닿지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들여서 그 지식들을 직접 공부 해내느냐 하면... 그러면 차라리 좋을 텐데 위에서 말했듯이 그것조차 아니다. 결국 능력과 시간이 부족해서 못 하면서 무의미한 미련만 계속 생기는 것 같다. 여러모로 내 여건과 능력 하에서 공부해 볼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미련을 버리면서 지혜롭게 치고 나가는 태도를 마음 깊이 내면화해야 할 것 같다.


잠깐 대학원생의 이러한 자세한 사정을 차치하고 조금 더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지식 추구'로서의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일반적인 범주의 학업을 넘은, 지식체계에서 보이는 개념들의 탁월성과 이론의 미묘한 정합성들에 매료되어서 여기에 천착하는 태도가 과연 인생의 팔자에 도움이 되는가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혹은 성공을 할 것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사실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범주의 학업까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만약에 공부가 깊어져서 건전한 지식을 생산하면서 학술 장을 유지하고, 생산되는 지식을 사회에 공급하거나 사회와 견주어 보는 지식생산 노동에 이르게 되면, 공부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팔자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고, 관심을 가지더라도 주로 그다지 좋게 보는 쪽은 아닌 것 같다. 결국 한국 사회는 공부라는 것의 수량화, 실용화 가능한 외피와 그로 인한 성취지위에 관심이 많을 뿐, 개념들을 치열하면서도 재미있게 부딪혀 보며 갈고닦는 작업으로서의 공부의 '내용' 혹은 '과정'으로 논의가 확장되는 순간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지는 듯하다.


그런데 나처럼 내가 현실적으로 소화하기 어렵고 연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들에 미련을 갖고 굳이 들여다 보려는 경향을 갖는 사람은, 이러한 지식 추구에의 무관심, 공부의 입신양명 도구화 경향으로부터도 분명히 배울 점이 있는 듯하다. 관심을 가질수록 오히려 시간만 과다하게 투입하면서 연구의 현장과 유리되는 경향이 생기므로, 그러지 말고 내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고 또한 그러기를 요구받는 도구들 내에서 보편적 독자가 재미있어할 만한 문제 설정을 해서 빨리빨리 풀어 내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추구 라는 가치에 지나치게 매몰되기보다는, 결국 현재의 내 status에서 부여받은 역할(주로 지식생산)을 하는 것인데 그 역할이 우연히도 사회 평균보다 지식추구와 조금 더 많이 관련되어 있을 뿐인 셈이다.


재밌었던 것은 가족들에게도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원래 그런 건데 이제야 알았냐고, 15년째 나에게 똑같은 얘기를 했다고 하셨다. 공부뿐만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의 문제해결 능력 면에서도,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거면서 어렵고 답답하고 오래걸리는 길을 가려는 경향이 있어서 늘 걱정을 했다고 하신다.

아무튼 일을 하는 데에 있어 내 이러한 경향을 적당히,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내가 다룰 수 있는 이론적 도구들의 범위를 넓혀 가면서도 내 연구라는 명확한 목적 하에 생산적으로 복무시킬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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