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들의 유래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종종 찾아보는데, 그 중 특히 신기해서 예전에 포스팅 했던 내용이 있다. 영어에서 쓰는 접미사 -able은 라틴어 habilis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고인류 '호모 하빌리스'의 이름에도 들어가는 이 말은 어원상 원래 '손'과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 기초 어휘들이 형성될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손'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권능'과 연결지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블로그에서 해당 포스트 보기: 링크 ("영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는 재미: 어원에는 문명의 교류사가 압축되어 있다"))
'손'이라고 하는 구상적인 기원을 가진 단어가 이렇게 다른 단어 뒤에 붙어서 능력을 나타내는 다소 추상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대단히 흥미롭다. 손을 권능과 연관지어 생각했던 옛 사람들의 관념이, '-able'을 말할 때마다 우리도 모르게 되살아나서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한국어에서 '~해 놓다', '~해 버리다' 등도, 구체적인 동작(놓기, 버리기)에서 유래된 동사가 본용언에 어떤 시공간적 상태나 뉘앙스를 더해주는 보조용언으로서 문법적 요소에 가깝게 자리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자의 제자원리에서는 기초적이고 구상적인 단위들로부터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뜻을 가진 글자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매우 native하고 활발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위에 서술한 일종의 문법화(grammaticalization) 예시들과는 다르지만, 최근에도 어떤 구상적인 의미가 의외의 말 속에 살아 움직이는 흥미로운 예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그 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이다.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라는 호칭 뒤에 있는 Christ라는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 Messiah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인데, 이 메시아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액체 따위를 붓거나 바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구세주를 일컫는 말로 많이들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기름 부음'이 무슨 말인지 사실 잘 몰랐는데... 이는 말그대로 '기름을 부었다(pour oil)' 혹은 '발랐다'라는 뜻으로, 유대 문화권에서 선택 받은 자에게 치러지는 성스러운 의식이라고 한다.
이를 번역한 Christ(그리스어로는 Christos)라는 단어도, 원래 그 자체로서는 성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를 '바르다', '문지르다'는 뜻의 Chri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말의 유래는 인도유럽조어(PIE) 'ghrei-'로 재구된다고 한다.
이걸 보고 나는 큰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면 현대 영어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뜻이나 사람 이름(Christopher 등) 등의 자명한 사례 말고, '바르다'는 뜻이 살아 있으면서 Christ와 같은 유래를 갖는 단어가 있을까? 찾아보니, 일상적으로 널리 쓰는 유명한 단어들 중에서는 딱 하나가 있는데 놀랍게도 그게 바로 'cream'이라고 한다.
이걸 알고 나니, cream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단어와 Christ라는 아주 유명한 호칭을 말할 때마다 어떤 액체를 바른다는 아주 구상적인 의미, 그리고 그것을 신성한 것과 연관지었던 옛 사람들의 생각이 함께 되살아나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매우 재미있게 생각된다.
그러나 어원 지식이 없다면 영어 원어민들도 cream이라는 단어를 듣는다고 christ를 연상한다거나, 둘을 결부지어 cream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성유(성스러운 기름)를 뜻하는 'Chrism'이라는 단어는 그 발음이 Christ와도 cream과도 비슷하고 당연히 어원도 같으므로, 만약에 이러한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들을 때 Christ와 cream 모두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언어학 방법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찾아보니 인도유럽조어는 가설로서 설정되고 재구된 것이지 직접 발견된 언어는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cream과 christ가 어원이 같다는 것은 정설이라고 한다. 학술적 근거를 갖고 추적이 된 게 있겠지 싶다.
(기ghee 버터도 같은 어원을 가졌다는 것 같다. grime, grisly 등도 같은 어원이라는 설이 많다고 하는데 이들은 ghee나 cream만큼 확실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massage, masquerade, mascara 등이 messiah와 같은 유래를 갖는다는 설도 있는 모양이다. 셋 다 뭔가 바른다는 뜻이니 그럴듯한데, 이것은 분명히 논거도 있고 인정받는 학설 중에 하나이지만 이설들도 있어서 cream과 christ의 관계처럼 완전히 정설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Christ라는 호칭 말고 Jesus라는 이름은 어떨까? 먼저, Jesus는 예수의 말하자면 '본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구약성경은 존재했고 야훼라는 신은 믿어졌는데, 예수(혹은 근본적으로 같은 이름인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바로 '야훼께서 구원하노니(Yhwh Shua)'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신의 이름인 야훼에도 무언가 뜻이 있을까? 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존재하게 하는 자' 정도의 뜻일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풀어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께서 구원하신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격을 부여받은 것과 별개로 그냥 그 당시에 널리 쓰이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굳이 저렇게 문장으로 이어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헤수스, 여호수아, 존, 조셉, 조세핀, 요슈아 등 서구권의 정말 많은 이름에, 야훼의 이름이 깃들어(?) 있다고, 혹은 더 나아가 스스로를 존재하게 하거나 다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신적 권능에 대한 생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위의 cream-christ 연관성만큼이나 흥미로운 듯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문화라는 누적적이고 복잡하고 고유한 현상의 매우 fascinating한 점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는 이런 것들을 의식하며 말하지 않겠지만, 언어생활의 배후에는 인류 문명이 여러 사건의 연쇄 그리고 지구라는 환경 속에서 조건지워진 바를 통해 우연적/필연적으로 축적해온 어떤 원형들의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될 수 있는, 예전에 썼던 다른 글(hapseda blog 게시물: 링크 ("삶, 기록, 의미... 그리고 재조직화하는 흐름으로서의 인간"))의 몇 문단을 아래에 가져오면서 글의 마무리를 대신해본다. 아래 글에서는 형식의 발전에 주목했지만, 요즘은 그렇게 발전한 형식뿐 아니라 침잠해버린 내용의 흔적들도 무척 흥미롭다는 생각을 한다.
"(전략)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꾸만 '저장', 그리고 '처리와 재조직화'라는 두 키워드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생각이 전개되게 된다. 인간의 정신은 정보를 단순히 쌓아둘 수도 있지만 정보를 예쁘고 유용하게 처리하고 가공해서 흘려보내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마저 재조직화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어떤 형식인데 이러한 처리 능력이 그저 인간의 기능적인 부분에 그치는 대신 유희적이고 감상적인 부분, 인격을 형성하는 부분에까지 심원하게 닿아 있고 (물론 내용을 단순히 저장하는 기능도 정보처리에 따른 side effect로서 개인과 세계에게 매우 중요하긴 할테다), 그로 인해 위와 같은 일이 생기는 듯하다.
심지어 '저장'이 아닌 '처리와 재조직화'라는 이러한 인간 역량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와중에 문명 전체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어떤 기능일 수도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 무엇도 명시적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버려지더라도 그러한 내용들을 처리하고 재조직화하는 형식의 작동을 통해 그 형식 자체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발전한 형식이 존재하는 한 그 모든 사라진 내용들, 혹은 발견되기 어렵게 가라앉아 있는 내용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고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문명사적 차원에서도 유효한 것 같다. 너무 거창한 예시지만 언어들의 초기 역사 중에서는 절대로 알수 없게 돼버린 것들도 많을텐데 그 과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후략)"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