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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5일 일요일

MOF와 나노테크: 다학제 분야로서의 구획과 그 과학기술사회학

2025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주제인 MOF(금속-유기 골격체)에 대해 뒤늦게 조금 접할 기회가 있었다.

MOF는 1g 안에 축구장 몇개 넓이의 표면적이 있는 새로운 종류의 물질군이라고 한다. 프랙탈을 소개할 때 유명한 '해안선'의 예시에서 보듯이 표면적이라는 것도 측정하기 나름이지만, 아마 분자~고분자 크기 입자들이 얼마나 달라붙을 수 있는지를 측정하는, 말하자면 유효 반응 단면적(?) 같은 것을 기준으로 한 게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다학제적이며 그 경계도 조금 모호한 나노과학이라는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격언을 꼽자면 아마도 리처드 파인만의 "There i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 즉 "바닥에는 아직 충분한 공간이 있다"일 것이다.
내가 영어 native 화자가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으나, 여기서 room이 말하는 바는 아마도 '공학적 엔지니어링을 할 여지와 기회의 크기'인 것 같다. 그런데 만약 room을 그게 아니라 literally 물리적 공간의 크기로 생각한다면, 마치 도라에몽 주머니와도 같은 MOF가 바로 위 격언에 매우 잘 어울리는 예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개인적 생각이지만 나노테크에 해당한다고 간주되는 여러 분야 및 대상들을 가장 넓게 묶어주는 특징은, 바로 전기적, 기계적, 재료적 성질 중에 둘 이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 아닐까 한다. 물론 이는 나 혼자서 생각해 본 것이라서 부정확하거나 예외가 있을수 있다.

내가 한때 관심 가졌던 과학기술학적 문제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것울 과연 '분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강령 하에 전개된 운동(movement)에 가깝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나노테크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명백히 movement에 가까워 보이는 사이버네틱스에 비해 나노테크는 훨씬 더 '분야'에 가까운 듯하지만, 파인만의 유명한 격언과 몇 가지 계산들에 의해 주목받고, 에릭 드렉슬러가 큰 그림을 제시한 저술 《창조의 엔진》이 대중적으로도 히트를 치고 관료들에게도 어필되면서 미국 과학정책에 의해 드라이브가 걸린 일련의 구체적 과정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내용적인 면에서 실제 나노테크의 실현은 드렉슬러가 제시한 경로대로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혹은 드렉슬러의 구상이 애초에 원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는 지적도 본 바 있다. 과학사적/과학사회학적으로도 살펴보기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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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 향년 96세로 별세

위르겐 하버마스가 조금 전 향년 96세로 별세했다고 한다.

의사소통적 전회를 통해 이성을 한계짓고 규명함으로써 상호주관적 합리성을 정초하고 생활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던 그의 대안적 기획은 내가 접했던 사상 중 칸트의 비판철학과 함께 가장 감명깊은 이론 중에 하나였다. 요즘과 같이 현대정치의 위기징후가 뚜렷해지고 미디어에 대한 비판도 필요한 시점일수록 하버마스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더 궁금해지고 생각해 보게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래저래 큰 별이 졌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Freethinkers 동아리에서 하버마스에 대해 소개했던 세미나 발표 자료를 아래 공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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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19일 목요일

윤석열 1심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의견

윤석열에게 내란우두머리 혐의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된 데에는, 만일 계엄이 성공했더라면 윤석열, 김용현, 노상원 등이 과연 그 이후에 도대체 어디까지 계획하고 있던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도 작용한 것 같다.

특히 정보사령부가 '계엄 성공 이후'를 주로 담당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재판에서 그 실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어디까지 계획되어 있었는지가 인정되지 못했고 아마도 앞으로도 소상히 알려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 점이 실제 형량 측면에서도, 그리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측면에서도 아쉬운 듯하다. 게다가 납득하기 다소 어려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몇몇 판단들까지.


선고요지를 보면 비상계엄 선포 자체도 어느정도 유형력의 행사라고 볼 수 있을뿐더러 군의 출입 통제, 국회 진입 등이 일어났고, 그 목적도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한다. 선고요지에서 수차례 언급하듯이, 밝혀지지 않은 전후맥락을 제외하고서라도 이 사건의 핵심인 "국회에 군을 보내서 상당 기간 그 기능을 정지시키려 한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나라 전체의 평온을 해한 것이라고 인정되고, 여기에 범죄전력없음, 고령을 이유로 선처까지 해서 비로소 무기징역이라는 아주 무거운 형벌이 나온 것인데,

이를 달리 말하면 만약에 정치인을 체포해서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가 입증되었거나 (체포 시도 자체는 인정됨), 거리에 나온 국민들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더 밀어붙이려 했다는 것 등이 구체적으로 입증이 되었더라면 (혹은 그래서는 안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성공했다가 나중에 끌어내려졌다면), 훨씬 넉넉히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나왔을 듯하다. 특검의 입증 역량 문제도 있을테지만 증거를 확보하기 근본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요컨대 다른 중대 정치사건과도 그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중한 범죄인 내란에 대해서 사법부가 단호한 태도를 표명하겠다는 의지가 판결에서 상당부분 드러난 면은 있다고 본다. 장기독재를 기도하거나 정치인을 체포해서 뭘 하겠다는 건지를 일단 떠나서, 국헌문란 목적의 폭동을 일으킨 것 그 자체만으로도 무기징역이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 문장의 '떠나서'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아쉽다. 로마부터 시작되는 타국의 역사적 사례들까지 거창하게 검토한 것치고는, 그리고 헌정을 중단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무력을 동원하여 헌정위기를 촉발했던 사태의 엄중함에 비해서는, 이번 판결에서 선고에 이르는 논리 구성이나 선고요지의 구체적 표현들이 12.3을 생생히 직접 겪은, 나아가 20세기 군사독재를 겪었던 현재의 우리에게 충분히 경종을 울리지 못하고, 다소 붕 떠 있는 느낌이 들기는 해서다. 이번 사건이 워낙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보니, 국회 군 투입이라는 그 장면만 똑 떼어 놓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의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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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9일 월요일

세계 해석의 도구로서 분절적 명제화를 때로는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분절적으로 의미화·명제화하고, 논리를 통해 그것들을 직조하여 이해를 획득한다. 이는 세계를 해석할 때의 인지적 부담을 낮추어주며 폭넓은 간접 경험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절적 이해를 관성적으로 적용한다면 사태의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면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에는 소홀해지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환원주의적(혹은 원자론적) 사고논리적 사고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곤 하나, 논리라는 형식을 동원하는 방식에 따라 그 둘은 종종 정반대에 있게 되기도 한다. 사태의 부조리와 입체성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때로는 위로를 받고 때로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게 해 주는 것은, 후자보다는 주로 주로 전자에 가깝다고 본다.

고양이는 반드시 발로 착지하고, 식빵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잼을 바른 쪽으로 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고양이의 등에 식빵을 묶어 두면 무한히 회전하는, 혹은 공중에 계속 떠 있는 영구동력장치를 만들 수 있다.

이 유명한 논증(?)은 척 보기에도 다소 황당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분절적 이해에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다루다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분쟁을 겪는 상황들 중 꽤 많은 수가, 실은 고양이와 잼 바른 식빵 농담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일 수 있다.

2026년 2월 1일 일요일

AI의 무색무취함과 적당함, 그리고 지식정보망의 형해화 가능성

AI로 논문을 쓸 때 가짜 인용 문제가 자주 논란이 된다.

연구 단계에서 논문 추천 받을 때라면 몰라도,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하는 단계에서는 내 연구와 관련이 되는 일부라도 직접 정확하게 읽고 cite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난 아무리 AI 시대를 재미있어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텍스트에 대한 고전적 개념을 매우 중요시하는 인간인 듯. 나아가서 앞으로는 자동화할 수 있는 읽기, 쓰기 및 계산도 '굳이 사람의 능력으로 해 보며' 인간의 그런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학자 집단의 역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려나.

어쩌면 참고문헌이라는 것은 이젠 정말로 '참고가 된 문헌'이라기보다는, 내 논문이 지식정보망의 어디쯤에 어떠한 맥락으로 위치해 있다는 것을 느슨하게 표명하는 장치 정도가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원래도 참고문헌에는 그런 기능이 당연히 있고 또한 그런 기능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scientometrics나 science of science에서 citation network를 통해 지식정보망과 지식의 발전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많이 하는 일이다.

근데 인간의 '쪼'가 들어가지 않고 느슨하게만 관련이 있는 '무색무취한', '적당한' 인용들이 AI 때문에 폭증하게 되면,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재구성된 지식정보망의 질조차 종국에는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양이나 속도 면에서는 AI가 압도적이니, 결국 인류가 쌓아온 방식은 뒤안길로 금세 밀려나서 불필요한 것이 되고, 그런 느슨하고 적당한 방식이 압도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있다.

예컨대 분야 상으로는 내 연구와 크게 상관 없어 보이는 어떤 논문의 특정 부분에 큰 영감을 받아서 연구가 진행되었거나, 혹은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분야의 논문에서 내 생각과 비슷하고 formal한 연관성도 있는 아이디어를 이미 제시한 부분이 있었을 때, AI가 과연 그런 인용을 자동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이례적인 경우들 외에도, 내 연구가 어느 지형 위에 놓여 있다고 표명하다 보면 '학맥'이라는 것이 자연스레 형성되게 되는데 AI가 분야의 유사성, 연구대상 유사성만을 바탕으로 정보를 취합하다 보면 그런 패러다임적인 것들이 형해화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논문 작성 단계가 아니라 논문 다 마무리하고 나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한다면 결국은 흉내가 아닐까? 독해력과 문제의식을 갖춘 사람이 봤을 때 그게 납득이 갈까? 이런 생각들이 든다.

물론 새로운 기술적 매체가 등장하면서 내용의 복제가 간편해지면 늘 거대한 양적 확대가 일어나고, AI 또한 의미론적인 영역으로까지 고도화된 복제 및 정보처리 장치라고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적당하고 느슨한 인용이 더욱 발전하고 양적으로도 확대되면서 인간이 모르던 새로운 방식으로 지식의 구조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렇게 인간이 직접 자신의 정신을 개입시켜서 작성하는 텍스트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이, 나중에 나올 무언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지금 생각으로는 AI 특유의 '적당함', 그리고 인간의 안이함 때문에, 정보처리의 세밀함이 당분간은 계속 낮아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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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6일 화요일

예수와 크림의 관계: 발전하는 형식, 침잠하는 내용

단어들의 유래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종종 찾아보는데, 그 중 특히 신기해서 예전에 포스팅 했던 내용이 있다. 영어에서 쓰는 접미사 -able은 라틴어 habilis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고인류 '호모 하빌리스'의 이름에도 들어가는 이 말은 어원상 원래 '손'과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한다. 기초 어휘들이 형성될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손'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권능'과 연결지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블로그에서 해당 포스트 보기: 링크 ("영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는 재미: 어원에는 문명의 교류사가 압축되어 있다"))

'손'이라고 하는 구상적인 기원을 가진 단어가 이렇게 다른 단어 뒤에 붙어서 능력을 나타내는 다소 추상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 대단히 흥미롭다. 손을 권능과 연관지어 생각했던 옛 사람들의 관념이, '-able'을 말할 때마다 우리도 모르게 되살아나서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한국어에서 '~해 놓다', '~해 버리다' 등도, 구체적인 동작(놓기, 버리기)에서 유래된 동사가 본용언에 어떤 시공간적 상태나 뉘앙스를 더해주는 보조용언으로서 문법적 요소에 가깝게 자리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자의 제자원리에서는 기초적이고 구상적인 단위들로부터 복합적이고 추상적인 뜻을 가진 글자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매우 native하고 활발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위에 서술한 일종의 문법화(grammaticalization) 예시들과는 다르지만, 최근에도 어떤 구상적인 의미가 의외의 말 속에 살아 움직이는 흥미로운 예를 하나 더 알게 되었다. 그 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이다.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라는 호칭 뒤에 있는 Christ라는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 Messiah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인데, 이 메시아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액체 따위를 붓거나 바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구세주를 일컫는 말로 많이들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기름 부음'이 무슨 말인지 사실 잘 몰랐는데... 이는 말그대로 '기름을 부었다(pour oil)' 혹은 '발랐다'라는 뜻으로, 유대 문화권에서 선택 받은 자에게 치러지는 성스러운 의식이라고 한다.

이를 번역한 Christ(그리스어로는 Christos)라는 단어도, 원래 그 자체로서는 성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무언가를 '바르다', '문지르다'는 뜻의 Chri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말의 유래는 인도유럽조어(PIE) 'ghrei-'로 재구된다고 한다.

이걸 보고 나는 큰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면 현대 영어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뜻이나 사람 이름(Christopher 등) 등의 자명한 사례 말고, '바르다'는 뜻이 살아 있으면서 Christ와 같은 유래를 갖는 단어가 있을까? 찾아보니, 일상적으로 널리 쓰는 유명한 단어들 중에서는 딱 하나가 있는데 놀랍게도 그게 바로 'cream'이라고 한다.


이걸 알고 나니, cream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단어와 Christ라는 아주 유명한 호칭을 말할 때마다 어떤 액체를 바른다는 아주 구상적인 의미, 그리고 그것을 신성한 것과 연관지었던 옛 사람들의 생각이 함께 되살아나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매우 재미있게 생각된다.

그러나 어원 지식이 없다면 영어 원어민들도 cream이라는 단어를 듣는다고 christ를 연상한다거나, 둘을 결부지어 cream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성유(성스러운 기름)를 뜻하는 'Chrism'이라는 단어는 그 발음이 Christ와도 cream과도 비슷하고 당연히 어원도 같으므로, 만약에 이러한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들을 때 Christ와 cream 모두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언어학 방법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찾아보니 인도유럽조어는 가설로서 설정되고 재구된 것이지 직접 발견된 언어는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cream과 christ가 어원이 같다는 것은 정설이라고 한다. 학술적 근거를 갖고 추적이 된 게 있겠지 싶다.
(기ghee 버터도 같은 어원을 가졌다는 것 같다. grime, grisly 등도 같은 어원이라는 설이 많다고 하는데 이들은 ghee나 cream만큼 확실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massage, masquerade, mascara 등이 messiah와 같은 유래를 갖는다는 설도 있는 모양이다. 셋 다 뭔가 바른다는 뜻이니 그럴듯한데, 이것은 분명히 논거도 있고 인정받는 학설 중에 하나이지만 이설들도 있어서 cream과 christ의 관계처럼 완전히 정설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Christ라는 호칭 말고 Jesus라는 이름은 어떨까? 먼저, Jesus는 예수의 말하자면 '본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렸을 것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구약성경은 존재했고 야훼라는 신은 믿어졌는데, 예수(혹은 근본적으로 같은 이름인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바로 '야훼께서 구원하노니(Yhwh Shua)'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신의 이름인 야훼에도 무언가 뜻이 있을까? 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존재하게 하는 자' 정도의 뜻일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풀어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께서 구원하신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격을 부여받은 것과 별개로 그냥 그 당시에 널리 쓰이던 이름이었기 때문에, 굳이 저렇게 문장으로 이어서 해석하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헤수스, 여호수아, 존, 조셉, 조세핀, 요슈아 등 서구권의 정말 많은 이름에, 야훼의 이름이 깃들어(?) 있다고, 혹은 더 나아가 스스로를 존재하게 하거나 다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신적 권능에 대한 생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위의 cream-christ 연관성만큼이나 흥미로운 듯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문화라는 누적적이고 복잡하고 고유한 현상의 매우 fascinating한 점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는 이런 것들을 의식하며 말하지 않겠지만, 언어생활의 배후에는 인류 문명이 여러 사건의 연쇄 그리고 지구라는 환경 속에서 조건지워진 바를 통해 우연적/필연적으로 축적해온 어떤 원형들의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될 수 있는, 예전에 썼던 다른 글(hapseda blog 게시물: 링크 ("삶, 기록, 의미... 그리고 재조직화하는 흐름으로서의 인간"))의 몇 문단을 아래에 가져오면서 글의 마무리를 대신해본다. 아래 글에서는 형식의 발전에 주목했지만, 요즘은 그렇게 발전한 형식뿐 아니라 침잠해버린 내용의 흔적들도 무척 흥미롭다는 생각을 한다.

"(전략)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꾸만 '저장', 그리고 '처리와 재조직화'라는 두 키워드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생각이 전개되게 된다. 인간의 정신은 정보를 단순히 쌓아둘 수도 있지만 정보를 예쁘고 유용하게 처리하고 가공해서 흘려보내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마저 재조직화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어떤 형식인데 이러한 처리 능력이 그저 인간의 기능적인 부분에 그치는 대신 유희적이고 감상적인 부분, 인격을 형성하는 부분에까지 심원하게 닿아 있고 (물론 내용을 단순히 저장하는 기능도 정보처리에 따른 side effect로서 개인과 세계에게 매우 중요하긴 할테다), 그로 인해 위와 같은 일이 생기는 듯하다.
심지어 '저장'이 아닌 '처리와 재조직화'라는 이러한 인간 역량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와중에 문명 전체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어떤 기능일 수도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 무엇도 명시적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버려지더라도 그러한 내용들을 처리하고 재조직화하는 형식의 작동을 통해 그 형식 자체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발전한 형식이 존재하는 한 그 모든 사라진 내용들, 혹은 발견되기 어렵게 가라앉아 있는 내용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고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문명사적 차원에서도 유효한 것 같다. 너무 거창한 예시지만 언어들의 초기 역사 중에서는 절대로 알수 없게 돼버린 것들도 많을텐데 그 과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나. (후략)"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