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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한국 정부가 일본 측에 진정성 있는 사과, 법적 책임 인정, 배상 등을 요구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진정성 있는 반성이란, 자국 정부가 과거에 행한 전체주의적 폭력을 적극적으로 밝혀내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교육을 자국민들에게 시킬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단순히 두 정부 간의 외교적 갈등이라고 인식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러나, 합의 내용에 대한 홍보를 보면, '금번 합의를 통해 앞으로 갈등을 안 겪을 수 있어서 잘 된 일'이라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합의 내용을 보면, 진정성 있는 반성과 법적 책임 이행은 일본 측에 요구되지 않았고, 일본 총리가 짧게 사과하는 것(그 날도, 총리의 부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다)과,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단에 일본 측에서 자금을 출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사과를 받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문제로 인한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문제를 천으로 덮어 버린 것에 불과하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는 국제무대 등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합의는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본질적으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후대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냥 제기하는 것이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선언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은 일본에 영원한 면죄부를 주고, 향후 문제 제기에도 철면피로 일관할 수 있게 하므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이다.
이 합의 과정에서, 주체인 피해 국민들은 완벽히 배제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할 정부가, 독단적으로 매듭을 지어 버렸다. 갈등을 해소했다기보단, 갈등이 보이지 않도록 땅 속에 묻어 버린 것에 가깝다.

과연 누구를 위한 합의였나. 대승적 관점에서 이해를 바란다고 하는데, 그 대승적이란 거 아무래도 '사사로운 이익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식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돌려 말한 것 아닌가.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대리자 아닌가.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말로 매듭을 지어 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통탄할 노릇이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6.25 및 베트남전 당시에 국군에 의해서 유사한 일들이 이뤄졌다는 것도 더 이상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덮어 버리지 않고 적극적인 논의를 통해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진정으로 과거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간, 민족간의 문제라는 추상적인 워딩으로 왜곡하지 말고, 현현히 실존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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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일 목요일

정치적 발화를 둘러싼 어떤 부조리에 대하여

[ 처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 - 함께하고 싶은 집회를 위하여 (by 박현우, Nov 30. 2015) ]

  말해져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져야 하기에, 오히려 말해지기 힘든 주제들이 있다.

  어떤 것에 찬성하면서도, '이런 단점이 있긴 하다'고 지적하면서 개선을 권유함으로써 보다 나은 찬성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반대하면서도, '이런 장점도 있긴 하다'고 하면서 맹목적인 반대가 아님을 천명함으로써 보다 나은 반대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들은 점차 다면화되는 반면에, 우리가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오히려 심도있는 비판이 사라지고, 일차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되고, 진영논리로 고착되고, 단편적인 인상들만이 흥행하고 있다. 그에 따라,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을 하려면 마치 사상검증 하듯이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하게 밝혀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그래서 말을 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찬성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반대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고
역으로,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반대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찬성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찬성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링크한 글과 같이 더 나은 집회를 위한 코멘트로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군을 동원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페이스북 페이지 '국민의힘'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더 나은 집회를 위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집회 자체를 부정하는 측에 힘을 실어 주는 효과를 내는 것을 배격하려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비생산적인 양비론 역시 경계하려면 또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너무 어렵다.

  비단 이 주제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려다가 포기한 일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다룰 주제 자체는 너무나 다양한 맥락,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복합적인 주제인 반면에, 그 주제에 대한 어떠한 의견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어떻게 나눠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차원적 대결 구도의 양쪽 편 중 한 쪽을 추켜세우고 한 쪽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그렇지 않을 거면 차라리 존재하기 말기를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도 의견이 사실상 '거의' 양분되어 있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 모두가 각자의 맥락 속에서만 주장한다면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상술한 사회적 강요 속에서 양분적인 대결 구도 자체에 매몰되는 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현상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더 좋은 말, 더 좋은 글을 생산한다면 그러한 현상을 피해갈 수 있을까? 그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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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21세기적 극단주의 추세에 대한 진단: 보편 가치를 통한 문제의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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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 이후에 근대 국가가 탄생하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모더니티의 모순성이 전체주의, 2차 세계대전, 핵폭탄 등을 통해 극단적으로 분출된 이후, 탈식민지화가 진행되고 민주주의, 평화, 다원성, 인본주의, 환경보호 등의 가치가 정착되면서, 세계는 꾸준히 위대한 보편적 인류애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이행되었다고 나는 믿어 왔다.

  문명이 도래하고 천여 년 만에 드디어 인간이 인간처럼 대우받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런 세상을 사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국가가 국민들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일이나, 영토 싸움, 종교 싸움, 이념 싸움에서 비롯된 국가 간의 전면전에 국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이룩되었는가? 위와 같은 면에선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문제가 터지고 있다. 새로운 문제인지, 아니면 가려져 있다가 비로소 분출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세계 각국을 막론하고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당히 일관되어 있는 바, 우리는 그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결과 그 '일관된 문제'들이란 바로, 산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일상을 위협하는 테러리즘, 보편 가치 추구자들의 맹목화, 개인 사이의 증오, 인종이나 성별 등으로 나뉘는 집단 사이의 혐오, 정보화 및 글로벌화에 의해 정교하게 내재화된 인간 소외 현상, 갈수록 공고해져서 해답이 안 보이는 선진국과 빈곤국의 격차와 난민의 발생 등이다.

  국외에서는, 웬만한 국가 규모로 급성장해서 중세적인 방식으로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극단주의 종교 세력 및 그에 경도된 개인들에 의해 호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에서 반인륜적인 테러가 일어나고 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외국인이나 특정 종교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 및 증오 범죄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의 무덤인 아프리카, 전체주의의 무덤인 북한 같은 지역은 심지어 이러한 논의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어 극도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단 위의 '일관된 문제' 이전에 권위주의적 군사 문화, 국가주의, 종교적 맹목성 등부터가 아직 극복되지 못했고, 심지어 더욱 심해지고 있다(이 내용 역시, 어찌보면 이 글보다 더욱, 정말 중요하지만, 별개의 글에서 다루어야 하므로 일단 보류한다). 또한 위의 '일관된 문제'에 속하는 성별 집단, 인종 집단 등에 대한 각종 혐오 언행, 개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증가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이 꼭 필요한 움직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맹목화되어 퇴색되고 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글로벌한 규모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사유와 담론은 도태되고 말초적 자극만이 힘을 키워 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가장 사회성숙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국가에서 차별 발언 및 증오 범죄가 가장 광기어린 형태로 빈번하게 나타나며, 마찬가지로 시민의식이 높다고 평가되는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극단주의적 테러리즘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 호주 등과 같이 선진국이지만 사회구조 및 시민의식이 성숙하는 과정 중에 있는 국가들에서는 차별 발언 및 증오 범죄도, 테러리즘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도 이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이 갖는 함의는, 이러한 '일관된 문제'들은 모더니티의 결여 및 불완전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티 달성 이후에 생기는 '새로운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관된 새로운 문제'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할 (시도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진국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범국가적 연대를 통한 극단주의의 종식인가? 민주시민교육 빛 비판적 사고능력 함양 교육의 강화인가?

  또한,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를 이식해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미디어를 활용한 약자들의 글로벌하고 평화적인 연대를 통한 보편 가치의 추구인가? 사회민주주의적 모델인가? 지역사회의 역할 증대인가? 아니면 어떠한 가치를 이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인가?

  물음표만이 계속된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들이, '일관되게' 발생하는 데에는 분명히 어떤 원인이 존재할 것인데, 그러한 원인에 대한 검토와 진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 초반에 언급한 민주주의, 평화, 다원성, 인본주의, 환경보호 등의 보편 가치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우리가 무언가 다함께 놓치고 있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인 만큼, 이에 대한 진단은 굉장히 그 규모가 큰 담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조사하고 끊임없이 사유하여,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사람을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존재하게 해 주는 사회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그러한 해결책들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적용해 보아야 한다.

  그 과정은 어쩌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며, 극단성이 분출될 위험 역시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20세기에 그러한 혼란과 극단성 분출을 겪은 바 있다. 오히려,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기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리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여 점진적으로 가치지향을 재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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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8일 일요일

국가의 반민주적 퇴행에 대한 국민 책임론에 반대한다

  최근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그리고 그 추진 배경 및 절차에서 폭넓게 드러나는 현 정부의 반민주성과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지적해 온 바 있다.

  그런데, 현재 이슈의 진단에 있어 '국정화 반대율이 높은 청년층이 정작 투표율은 낮기 때문에 난 사달'로 규정하는 것을, 국정화 지지 측은 물론이고 반대 측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젊은이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정작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일련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국민 책임론 내지는 '20대 책임론'이라고 일컬음과 동시에,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함을 선언한다(본래 '20대 책임론'은 민주화 이래 뿌리깊은 세대갈등론에서 청년세대의 각성을 촉구해 온 진보진영의 견해를 폭넓게 일컫는 단어이나, 여기에서는 현재의 이슈와 관련지어 보다 협의의 의미로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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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로, 백 번 양보하여, 민주 정치가 이상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에서의 일상적인 정치적 의결사항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하는 국민들에게는 '표로 이야기했어야 한다'라고 성토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선거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몇 년 동안 국가를 운영하며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러한 성토는 모든 정치인들이 수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로지 본인의 선거 공약대로만 정치 활동을 한다는 아주 비현실적인 가정 하에서나 유의미한 것이다. 선거 공약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정책을 추진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국정화 논란도 그 예 중 하나이다.

  또한, '표로 이야기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헌법에 명시된 원리에 기초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정치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국민들의 역사관을 일원화시키는 시도로서 사상의 자유 침해 및 학계 침체 유발 우려가 매우 크고, 정상적인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비밀 TF팀을 조직하고 예비비를 편법으로 집행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급기야는 군 당국까지 월권하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등 헌정 민주주의의 가치를 침해할 소지가 매우 크다.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인 이상, 반대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가치에 반하는 정책 추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즉, 민주 국가에서 반민주주의적인 정책이 추진되는 데 대한 본질적인 책임은 반민주주의적인 위정자에 있는 것이며, 반대자들의 책임은 위정자들을 견제하는 데 실패한 책임 정도로 되는 것이 적절하다(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에서 후술한다). '20대 책임론'은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 데 돌리는 주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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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선거 때 어느 후보가 민주주의 침해 소지가 있는지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았냐는 비판, 예상을 했다면 왜 투표하지 않았냐는 비판, 심지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하고 확정고시한 지금도 인터넷으로나 반대하고 왜 딱히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는 비판 등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데,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문장으로 거칠게 요약해 볼 수 있다. 국민의 주권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민주성이 어느 정도 침해되어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문장을 바탕으로 성급하게 국민 미개론을 주장하기 이전에, 그러한 국민 '수준'의 형성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5000만 가짓수의 너무나도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라는 추상적인 집단에 일률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로서, 사실상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다. 그렇게 다양한 가정 환경적, 지적, 지역적, 시대적, 사상적 배경을 가진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정치적 무관심',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낮은 민감도'라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민주시민이라는 의식이 부족해서이며, 이는 바로 민주시민교육의 부재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관념적 추론이 아닌 실증적인 측면에서도 민주시민교육이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20세기 말까지 계속되어 온 군사 독재 시절 국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헌법은 무시되어 왔고 심지어 아예 바뀌어 버린 적도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민주시민교육은 잘 이루어질 수 없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시민교육은 사회 시간에, 일반적인 학교 공부와 같은 레벨에서 잠깐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왔다.

  따라서 국민 수준을 언급하며 정부의 반민주주의적 처사에 대해 '국민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계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주장하는 것 역시 적반하장격인 주장이 된다. 공교육에서 적극적 반민주주의는 아니더라도(일선 교사들이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긴 하지만), 민주시민교육을 소극적으로만 해 온 탓에 국민의 주권의식이 부족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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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론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우선 문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여, 어떠한 후보에 대해 20대 전체가 반대하고 60대 대다수가 찬성하며, 그 모두가 투표권을 행사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도 20대 유권자 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유권자 수의 격차는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체험하지 못한 고령 인구의 비율이, 민주주의를 체험한 청년 인구(적극적 민주시민교육은 여전히 거의 부재하지만)의 비율과는 대조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 구조상 청년 세대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득표 수에 따라 움직이는 민주주의 정치가들의 입장에서는 청년 세대의 목소리가 작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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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심각하여 정치 참여율이 매우 낮으며,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민감도 역시 매우 낮다는 것이 우려할 만한 점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율이 낮다'는 것을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반민주적 사태의 '원인'인 것으로 진단할 수는 없다. 사태의 원인은 학계와의, 일반 국민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국정화를 강행하고 있는 정부와 여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 낮은 정치 참여율이 우리에게 현실로 주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청년들을 향한 지적은 '참여율을 높이면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태의 원인이 아닌 '해결'을 위한, 참여 독려로의 구호로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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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5일 목요일

군인권 토크콘서트 참여 후기

2015.11.01(월) 서울대학교 사회대신양에서 열린 군인권 토크콘서트에 청중으로 참여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 김종대 정의당 국방개혁기획단장,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님이 연사로 나오셨습니다.

군대 문제에 대해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니 어쩔 수 없다'라는 만연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또한 그러한 인식은 국민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개혁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데 대한 국민들의 냉소가 고착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으로부터 격리된 군대가 아닌 국민이 만들어가는 군대, 국민이 감시하는 군대가 될 때 군인이 그의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으며, 군의 예산집행 및 인력동원의 효율, 작전력과 전투력도 향상될 것으로 봅니다.

좋은 행사를 추진해 주신 사회대 학생회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미지: 사람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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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신해철을 기억하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틀어 주신 '날아라 병아리'를 듣고 처음 접하게 된 신해철의 음악. 그 때부터 느리지만 꾸준하게, 그의 음악은 지금까지 내 플레이리스트의 빼놓을 수 없는 큰 축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왜 작년의 오늘 이전에는 알지 못했을까. 있을 때 잘 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인가.

신해철의 음악은 무한궤도 이후 솔로 시절의 감미로운 발라드부터, 넥스트 시절의 대곡지향적인 락 넘버들까지 정말로 다양한 장르적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모든 장르의 곡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자아 성찰, 현대성 비판 등을 담은 철학적인 가사들이다.

가끔은 강렬해서 오히려 더욱 순수하게 느껴지곤 했던 그의 소신있는 입담과 행동, 그런 그의 생각들을 바탕으로 한 때로는 꾸밈없는, 때로는 은유적인 음악들. 재치와 예술성을 겸비한 노래들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 신해철이 이제 우리 옆에 없다. 이제 과연 누가 그와 같은 말, 그와 같은 가사들을 우리에게 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답답해질 때가 많다. 그러나 만약 신해철이, 누군가에겐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본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간 걸출한 음악가로, 다른 누군가에겐 언제나 가치있는 삶의 문제를 고민했던 철학가로, 다른 누군가에겐 민주 국가의 시민으로서 할 말을 했던 논객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또 다른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기억된다면 그러한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많은 이야기를 주고 간 사람이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신해철을 꾸준히 이야기해 나갈 것이다.

2015.10.27

<신해철 - 단 하나의 약속 (2014.06.26 REBOOT MYSELF Part.1)>
이유 없이 화가 날 땐 모진 말로 내게 화풀이를 해도 좋아요
속상한 일들, 비밀들 내겐 털어놔도 좋아요
바쁠 때는 무시하세요. 힘들 때는 내게 기대요.
생일 약속도 다른 약속도 다 잊어버려도 좋지만
Baby 나 단 하나
Lady 더도 말고 이거 단 하나
이거 하나만큼은
맹세한다 내게 말해줘
Baby 어떡해도
Lady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하나만 약속해줘
어기지 말아줘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
내 소중한 사람아
그것만은 대신 해 줄 수도 없어
아프지 말아요
그거면 돼 난 너만 있으면 돼
돋보이지 않아도 남들이 뭐라 해도
좀 더 게을러도 괜찮아요
겉모습이 변해가면 함께 새 옷을 찾아다녀요
매달 예민해 지는 날은 내가 많이 웃겨 줄께요
but promise me, don't lie to me, this time
Baby 나 단 하나
Lady 더도 말고 이거 단 하나
이거 하나만큼은
맹세한다 내게 말해줘
Baby 어떡해도
Lady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하나만 약속해줘
어기지 말아줘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
내 소중한 사람아
그것만은 대신 해 줄 수도 없어
아프지 말아요
그거면 돼 난 너만 있으면 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은은히 타오르는 eternal flame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 and Love
It'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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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5일 월요일

모 사립고등학교 급식비리 사건을 보며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11410.html?fbclid=IwAR088-htpZxHz6P8M1hj4zcecheJhjDHja0ChIA0wbI6V7TCvH67hmYuV_c
[포토] 급식비리 알리려 직접 나선 충암고 학생들

  지난 4월, 급식비 미납 학생들을 교감선생님이 공개적으로 불러서 폭언 하고 모욕 줘서 논란이 된 학교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 학교 전임교장, 행정실장 등이 수억 원 대 급식비를 횡령한 것으로 드러나 더욱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4월의 '막말 논란' 당시에 그 학교 학생회장님이 페이스북에 올리신 글에 의아한 점이 몇 가지 있어 그분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었다.

  그 학생회장 분은 당시에 "학생들이 급식에 불만이 많다. 가격 대비 떨어지는 질 때문이다. 그리고 가격 대비 떨어지는 질은 모두 미납자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미납 비용을 교장, 교감 선생님이 사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교감선생님은 정당한 금액을 치르고 급식을 먹는 학생들의 여건이 나아지도록 노력을 하신 것이다.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 것이 잘못된 행동은 맞으나, 쏟아지는 비난은 언론에 의해 과장된 것이다"고 말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가격 대비 떨어지는 질이 미납자 문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부터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미납이 되어 재정이 부족하다고 해서 이미 정해진 급식 업체를 갑자기 바꾼다던지 영양사의 조리운영 질이 갑자기 낮아진다던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재료 구입의 경우에만 재정상태에 따라 어느 정도 유동적 운영이 가능할 것인데 이것 역시 학교와 업체들간에 월간 계획을 바탕으로 계약이 어느정도 되어 있어, 미납자 문제로 저렴한 재료로 바꾸는 것도 생각보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급식비 미납분에 따라 유동적으로 급식 예산이 축소되는 것보다는, 급식비 미납분은 학교 재정상에 적자로 기록되고 급식은 계획대로 운영되며, 미납자들이 납부해주기를 기다리게 되는 구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미납자 문제로부터 급식 질 저하가 시작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급식비를 사비로 충당한다는 것 역시 합리적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공금의 범위 내에서 적자 내고 납부를 기다리면서 운영할 수 있는데 굳이 사비로 충당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사실은 전임교장, 행정실장 등이 학생들이 낸 급식비 수억 원을 횡령해서 학생들 급식 질이 좋지 않게 된다는 게 밝혀졌다. 첫째로, 외부 용역을 안 맡겼는데 맡겼다고 거짓으로 기재한 후 그 용역 비용을 그들이 가져갔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직원만으로 업무를 해야 되기 때문에 급식의 질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 또한, 식용유를 교체하지 않고 재사용하는 방법으로 남는 비용을 그들이 가져갔다. 이것 역시 급식 질이 안 좋아지는 명확한 원인이 된다.

  앞의 교감선생님이 전임교장과 행정실장의 비리를 알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비리를 모르는 채로 급식 질 개선을 위한 모종의 어긋난 정의감에 그런 폭언을 하게 된 것인지는 뉴스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그 발언 자체를 보면, 급식 질의 저하가 급식비 미납 때문이 아닌 관리자들의 횡령 때문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 폭언의 의미는 더욱 더 땅으로 떨어진다. 관리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학생 돈을 횡령하면서, 왜 그것을 납부하지 않냐고 독촉한 모양새인 것이다.

  그 당시 해명했던 학생회장도 단순히 학생의 대표자로서 학교를 향한 비판이 당황스러워 그렇게 해명하였는지, 아니면 교원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어 전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누구보다 괴로울 것 같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돈 때문에 이렇게 비겁한 일을 하는 나쁜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청년들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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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4일 일요일

KBS1 <명견만리> 시민참여단 - 인공지능 편

오랜만에 찾아간 KBS1 '명견만리' 녹화.

장진 감독님과 정지훈 교수님이 인공지능에 대해 취재하여 강연했다.

미래사회 이슈를 다루는 게 프로그램 취지인 만큼, 인공지능 자체를 소개하는 것보다는 인공지능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초점을 두어 진행되었다. 느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 소소한(?) 인공지능들은 우리 곁에 꽤나 가까이 와 있는 듯하다. 인공지능이란 게 경계가 애매하긴 한데, 학습을 통해 사용자친화적으로 컨텐츠들을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 서비스들이나, 일본 같은 데서 열심히 만들고 있는 emotion에 초점을 둔 로봇들. 취재내용 보니 음식 메뉴도 새롭게 만들어서 추천하고 그러더라. 별게 다 있지만 이게 제일 신기했다.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데에 그 친구들이 일조하는 바가 분명히 있을 듯.

- 인공지능에서 살짝 벗어난 전반적인 자동화 이슈도 포함하는 얘기인데,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문제가 꽤나 크다고 한다. 특히 인공지능의 인력대체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사람의 일을 대체하여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게 인공지능의 꿈일 텐데, 이게 사회양극화가 있다 보니 한쪽은 편하게 돈 벌고, 다른 한쪽은 집에서 놀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런 거다.

- 독일 지멘스 사의 경우엔 그 인공지능을 관리하고 output을 분석하는 위치의 새로운 직종을 창출해서 생산성을 몇 배 높이면서도 고용 수의 변화가 없도록 했다던데 참고해도 좋을 듯. 하여간 한국은 다방면에서 청년들 어지간히 괴롭힌다. 직업구조 변화에 따른 과도기일 뿐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나, 과연?

- 각종 SF 영화처럼 인터넷망 위에 살면서 인간을 지배하려 드는 인공지능의 출현에 대해 대중들의 우려가 많다. 그러나 일단 그 정도의 능력을 갖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아직은 공상의 영역이라고 보는 게 학자들의 견해라고 한다. 그런 걸 하기 위해서 일단 빅데이터 분석을 위한 컴퓨팅 시스템 자체가 엄청나게 거대하게 필요할 거고 구글 급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듯. 또한 그런식으로 하나로 합치기에 이미 너무 멀리 온 것 같음. 아기자기한 인공지능들이 Locally 발전되어 나가는 게 좋은 것 같다.

- 위에서 말한 인공지능 스스로 폭주하는 그런 일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컴퓨터의 뛰어난 계산능력을 인간이 잘못 사용해서 생기는 문제들이다. 이건 뭐 이미 가시적인 위험이 된 지 오래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당뇨환자의 상태를 파악해서 인슐린을 주사하는 사물인터넷(IoT) 시스템을 해킹하여 치사량의 인슐린을 주입할 수 있음이 보여지기도 했으며, 또한 뭐 무인자동차한테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줘서 도심에 큰 사고를 일으켜 테러할 수도 있을 거고. 프라이버시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 결국은 사람이 먼저다. 인공지능도, 다른 기술들도 결국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위에 썼듯이 그 존재목적을 깨려는 시도는 또 누가 하는가. 말하자면,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IT의 발달로 한 사람의 병크가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게 돼 버린 이 시대에, 사람의 폭주를 막기 위해 사회적인 견제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 녹화에서 은근히 답이 안 나오는 문제로 계속 제기된 것이 '인공지능이 피해를 입혔다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이다. 무인자동차가 내부 알고리즘 오류로 탑승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해 보자. 예를 들면 그 인공지능을 감옥에 보낸다 해서 걔가 반성하고 회개하진 않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냥 걔를 사용 정지시키고 끝난다면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그 알고리즘을 만든 공학자를 처벌하기도 애매하며, 그 회사 관리자에게 책임을 묻기는 더욱더 애매하다.

- 이 애매함은 본질적인 것이다. 분명 인간이 만든 것인 만큼 명백히 인간에 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자연 재해와 다를 바 없이 '이런 알고리즘에 따라 이게 이것으로 인식되어 이러한 학습과정을 통해 이렇게 되었다' 라고 절차적으로 완벽하게 설명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자동화된 시스템에는 항상 숙련된 관리자가 필요한 것 같다. 그냥 사고 일으킨 제품은 버리면 되고 모든 게 다 매뉴얼대로 자동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냥 기계장치 작동에 의해 사회가 돌아가는 거 아닌가. 책임질 사람도 없고. 사회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인공지능은 결국 사람에 의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여튼 그 책임소재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정지훈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공학자, 생물학자, 철학자, 법학자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이 모여서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한다. 굉장히 공감이 간다. 비단 이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복잡하고 답없어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 범학제적인 포럼이 필요하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 예를 들어, 과학적으로 모두가 다 다른데 사회적으로 어떻게 그걸 존중하면서도 또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 뭐 이런 식의 엄청난 거대담론들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추구하는 철학만으로도 안 되고, 구체적인 수치 가지고 하는 정책만으로도 안 되고, 사실 자체만을 밝히는 과학만으로도 안 된다. 그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주장을 이해해 가며 토론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러한 범학제적 포럼 내지는 공론장 같은 것이 국내에 많이 부족한 듯 하며, 우리 세대 사람들 중 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데에 위기의식을 갖고 협력과 참여를 많이 많이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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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0일 일요일

전자도서제작 입력봉사활동을 마무리하며

봉천동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silwel.or.kr)에서 진행하는 시각장애인용 전자도서제작 입력봉사활동을 (두 달에 걸쳐 한 권을) 완료했다!

사람들 만나면서 직접 일하는 봉사활동에 비하면 봉사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편하게 했지만, 나름의 의의와 보람이 큰 것 같다 ㅎㅎ

난 뭔가 공대스럽게 전자도서 제작을 돕는 봉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냥 책 내용을 hwp 파일로 써서 제출하면 복지관 측에서 알아서 제작하는 거였다. 책 읽는 재미, 그리고 타자 실력 느는 재미로 한 듯.

어떤 도서를 입력할지는 복지관 측에서 시각장애인의 요청을 받아서 봉사자에게 말해 준다. 그러면 봉사자는 알아서 그 도서를 구해서 한글 파일로 입력해서 메일로 제출하면 된다.

기간은 기본 한달인데, 못 했다면 계속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 분들이 읽고 싶으셔서 요청한 것인 만큼, 왠만하면 빨리 끝내서 제출하는 게 좋다.

내가 입력하게 된 책은 '동물의 숨겨진 과학'(캐런 섀너)이었다. 봉사활동 신청서에 전공이나 직업 쓰라길래 공대라고 했더니 왠 이과냄새 나는 책을...

그래도 동물들이 실제로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닌, 술수도 쓸 줄 알고 도구도 이용할 줄 알며, 감정 같은 게 있기도 하다는 것을 방대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준다는 면에서 추천할 만한 책!

지식과 문화 컨텐츠를 접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컨텐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시각장애인용 도서 제작은 그러한 움직임의 큰 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책 한 권이지만, 사람들의 문화적, 지식적 경험의 기회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보람된 일인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용 도서의 필요성을 느끼고(아직 걸음마 수준도 안 될 정도로 시각장애인용 전자도서는 매우 부족하다) 도서제작에 참여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사실 이미 출판사는 자신이 출판한 책 내용을 컴퓨터 파일로 가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시각장애복지관 측에서 출판사로부터 파일을 제공받지 못하여 봉사자가 입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중노동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따라서 복지관이 출판사와의 계약이나 협약을 통해 컴퓨터 파일을 제공받아서 전자도서를 제작하는 게 더 간단하고 효율적인 일이 아닐까, 그래서 장기적으로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봉사자는 전자도서 형식에 맞게 그 파일을 손보는 역할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어차피 시각장애인용 도서 파일은 복지관 외부로 유출이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니 출판사 측에서 저작권 문제를 우려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 법알못이라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기 힘들 것 같다,

방학 때마다 입력 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좀 더 나아가 위와 같이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어떻게 하면 도입할 수 있을지 여러 방면으로 문의하면서, 시각장애인용 도서가 더욱더 정착 및 확대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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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88329769509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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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9일 일요일

교육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소고

교육은 중요하다. 그래서 언제나 교육은 화두다. 공부하는 대학생 입장에서 관심이 갈 수밖에.

취업률 위주의 대학 평가 및 재정지원 제한으로 대학들이 취업 위주로 학과를 통폐합할 계획을 발표하면서(대학구조조정) 대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못 하고, 이대로라면 애써 유지시켜 온 기초학문과 예술이 더 약해지게 생겼다.

정부의 대학정책이 기업논리에 지배되면서 기초학문과 문화예술 육성, 장기적, 미래적인 가치에 대한 투자, 다원성과 창조성의 존중은 폐기되고, 70년대식 획일화된 교육으로 회귀하려 한다.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다.

"모든 대법관이 개신교인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법원장께도 투정부려 봤다"는 위헌적인 발언을 하셨던 분이 현 교육부 장관이다.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장관의 소신 때문인지, 초중고 교육에서 "성소수자 인권 교육 금지" 조항이 만들어졌다(참고로 이것도 법에 명시된 조항에 위배된다).

학생들이 이러한 교육환경에서 학업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사립 중고교와 사립대학 운영자를 위주로 교육비리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학교재정의 부당한 확충, 학교재정의 횡령, 심지어는 학교를 운영자의 자금줄 역할로 운용하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말이다. 얼마 전에는 정부인사까지 관여된 과거 사학비리의 존재가 드러나기도 했다. 인류가 쌓아온 위대한 정신을 미래세대에 전수해야 할 의무를 지닌 교육계에서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이 꾸준히 보도된다.

왜 교육은 이렇게 개선되기 힘든가?

교육을 통해서는 한 시대의 지식과 가치의식,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따라서 교육에는 현재와 근미래의 사회 모습이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다고 보며, 교육의 이슈는 곧 사회적 이슈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 문제 위에 겹겹이 쌓인 수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경제적 차원에서는 취업 문제, 소득 문제, 노후 문제, 개인적 차원에서는 차별 문제, 인권 문제, 종교 문제,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 재정 문제, 국제관계 문제, 북한 문제와 같은 수많은 것들 말이다. 이들이 고착화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상위 문제들이 주는 압력 때문에 교육 개선책들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우울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역으로 교육을 조금씩 조금씩 개선해 나가면서, 교육개선으로부터 시작하는 사회문제의 개선을 꾀할 수는 없는가?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는가.

우선 사학비리를 근절하여 운영자가 본인의 자금줄 역할로 학교를 운용하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학교재정을 확충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첫째다. 또한, 평등하고 건전한 민주 시민사회와 풍요로운 과학기술과 문화예술 사회를 위해 장기적 안목으로 초등교육을 하고 대학교에서는 학문을 꾸준히 육성한다면, 공부하는 대학생 된 입장에서 정말 감사할 것 같다.

항상 그 전보다 조금씩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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