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대중문화와 디지털 매체>
- 시공의 폭풍 : 서사성의 붕괴와 탈맥락적 조합 -
- 시공의 폭풍 : 서사성의 붕괴와 탈맥락적 조합 -

현대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문화를 구성하는 고전적인 요소들이 그 본래의 맥락과는 거의 무관하게 등장하여 서로 자유롭게 조합된다는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어 온 고전적인 문화 요소들이 RPG 게임 제작자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세계관 속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동시에 조합되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근간에서는 디지털 매체의 발달이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의 물리적 세계에서는 각각의 대상이 질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예컨대 음악 작품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각 작품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둘은 상호간에 변환될 수 없다. 반면, 그러한 대상들이 디지털로의 변환을 거쳐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매체에 편입되면서 구현된 가상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0과 1의 비트로 환원되어 일원화되며, 모든 대상들의 질적인 차이가 지워지고, 비트라는 동일한 물리적 근간을 가진 채 저장되어 있게 된다.
우리는 매우 간단히 mp3 파일을 jpg 파일로 변환해 버릴 수 있다. 비록 그 결과물에서 인간에게 유의미한 -즉 실제 세계의 대상을 지시하는- 시각적 정보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두 파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0과 1의 비트로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파일 확장자를 바꾸는 행위는, 나열된 비트들이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게 하는 장치(연결 프로그램)들을 기만함으로써 디지털 세계가 물리적 대상들과 다르다는 것을 폭로하고, 디지털 세계가 기반을 두고 있는 컴퓨터라는 물리적 대상을 상기하고자 하는 한 고전적 인간의 선언으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령과 같은 디지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빠르게 익숙해져 물리적 현실과의 구분 없이 디지털 세계를 수용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애초부터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던 것은 이 세계 자체가 아니었으며, 세계의 요소들이 우리의 두뇌 속에서 조합되면서 발생하는 ‘의미’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창조해 온 소설, 회화, 애니메이션 등의 수많은 의사소통 형식에서 이는 이미 확인되어 온 점이다. 인간은 의미를 소비하는 생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체 속의 가상을 실제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 미디어를 통해 무한대로 복제되어 전파됨에 따라 원본에 종속되어 있던 복제물들은 원본과 분리되며,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져 세상을 채우게 되고(explosion), 복제물들 간의 질적인 차이 역시 지워진다(implosion). 그리고 그 복제물들은 확고한 물리적 기반을 가진 원본들보다도 오히려 더 선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복제물들을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부른다. 이 시뮬라크르들은 비록 복제물이지만, 실재하는 원본보다도 더욱 선명한 초실재(Hyperreality)이다. 이것은 현대성의 본질과도 통해 있는 면이 있다. 현대성은 모든 양식을 흡수하고, 그로 인해 성장함으로써 그 양식들을 확산시켜 주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대성의 본질이 경제에서는 자본주의로, 문화에서는 매체로 그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디지털 매체를 읽어내는 작업에서, 위와 같은 보드리야르의 논의가 적극적으로 도입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세계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기술 수준도 상승하면서, 우리는 세계를 매우 작은 기본 요소들로 환원하여 이해한 뒤 그들을 재조합함으로써 현실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이론가 Vilem Flusser는 디지털 매체가 매우 발달한 지금과 같은 시대에 가상과 실재는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비트의 밀도' 차이일 뿐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3d 프린터를 보면 이 분석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매체는 세계의 단면을 자기 속에 끌어들여 0과 1의 비트로 일원화하는 데에서 시작했지만(implosion), 이제 그 일원화에서 오는 힘을 바탕으로 세계 자체를 새롭게 쌓아올릴 수 있게 되었다(explosion). 건축 등을 통해 주변 환경을 커스텀해 온 것이 인류 문명의 발전사 그 자체이기는 하지만, 디지털 가상(Digitaler Schein)은 그 어느 때보다 뿌리깊은 수준에서 우리 실제 삶의 양식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 속에서 0과 1의 비트로 환원된 대상들은 그 복제물의 생성을 매우 쉽게, 무한정적으로 허용한다. 그리고 그 복제물들은 원본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있다. 따라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추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인간의 삶에는 가치에 대한 새로운 지침이 요구된다. 엄숙한 세계는 유희적 세계로 전환되며, 실제 세계의 한계 체험이라는 패러다임은 가상 세계에서의 한계 극복 체험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된다.
중세의 마술성을 극복하고 명료성으로 나아갔던 근대적 세계관 속에서, 세계는 그 기본 요소들을 단위로 하여 잘게 쪼개어져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끝에서, 역설적으로 다시 마술적 세계가 탄생한다. 모든 것이 밑바닥까지 해체된 상태에서 새롭게 구성되어 쌓아올려진 디지털 세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이 엄숙하고 무한한 중세적 마술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한계, 우주의 한계를 탐구하였던 것은, 사실 더욱 더 풍부하고 선명한, 새로운 시대의 마술성을 향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143266179098419
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