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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안티페미와 기독보수의 결합

  박근혜 탄핵 이후로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흐름은 안티페미 청년세력과 반공 기독보수 세력의 결합 가능성이다. 이 둘의 결합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자칭하면서 동성애, 페미니즘, PC주의 등을 자유주의의 대립항으로 과장되게 설정해 놓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이명박 정권 즈음에 탄생하여 박근혜 정권 당시 전경련 등의 비호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청년보수의 정치세력화를 꾀했던 이들은 주로 경제에 대하여 논하며, 종교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K-자유주의라고 부른다)에 대해서 이미 몇 개월 전에 비판적으로 적은 바 있다(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10764452348585).

  이들 청년우파가 그 발생적 기원으로 가지고 있는 2010년대 초반의 인터넷 담론은 페미니즘을 비판할 때 다름아닌 ‘종교적’이라는 단어를 쓰곤 할 정도로 페미니즘 등의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의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지 않은 편이었다. 2015년경부터 페미니즘이 사회적 의제로 급상승하면서 그 대립항으로 나타난 안티페미니즘 담론은 2010년대 초반 당시의 청년우파들의 이러한 면모를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최근의 안티페미니즘 담론은 아직 실질적인 조직화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좌파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만큼 그 저변이 확대되었으므로 더 이상 우파라는 단어로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겠다.

  한편 트루스포럼 등으로 대표되는, 박근혜 청와대와 국정원의 지원 하에 정권을 보위하다가 정권이 퇴락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보수 개신교 세력은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무신론, 페미니즘, 동성애, 포스트모'드'니즘, 인본주의 등의 다양한 단어들을 ‘네오맑시즘’이라는 표현 아래 묶어서 지칭하면서 그것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세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충 좌파이론들 중 경제에 대한 것이 아닌 사회문화에 대한 것을 묶어서 네오맑시즘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개념들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왜곡되고 뭉뚱그려져 있어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는(not even wrong) 일종의 ‘가짜뉴스’에 해당한다. 지난번 글에 이어, 이하에서는 이렇게 이들이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저 수많은 단어들을 함께 묶어서 비판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썼듯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의 대표자로 여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개신교를 등장시킨 종교 개혁이 역사적으로 자유주의 정신의 발흥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은 아예 국가 자체가 그러한 개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성립된 데다,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개신교 정신이 주류 사회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게다가, 냉전시절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이 국가 무신론을 채택했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지구의 운명을 놓고(...) 그 공산권 세력과 대립한 역사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 주류세력의 인지도식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개신교가 한 덩어리가 되고, 공산주의와 무신론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 둘이 대립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주류적 정신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사실 개신교랑 별 상관이 없이도 얼마든지 보편성을 획득하고 존립할 수 있는 체계이다. 반대로, 개신교가 역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해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 개신교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즉 개념적인) 관계는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무신론도 당연히 공산주의와 전혀 상관없이 존립할 수 있으며, 서구 사회의 무신론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을 공산주의와 연관짓는 주장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요컨대, 냉전의 역사는 보수 개신교인들이 우연(역사적 현상)과 필연(개념적 도식)을 혼동함으로써 세계를 보는 개념적 도식을 꼬이게 하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현재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자신들이 자유민주주의를 필연적으로 대표한다고 평가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으며, 오히려 현재 그들의 행보는 실천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까지 하다.

  이들 보수 개신교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등을 경계하는 맥락도 위와 통한다. 그 맥락에는 이들 사상이 다루는 개별적인 문제들에 대한 반대도 있겠지만 그것은 핑계에 가깝고, 이들 사상이 기반을 두고 있는 주된 철학적 이론들에 대한 경계심이 더 커 보인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오맑시즘’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페미니즘 이론 중 꽤 많은 수가 기반을 두고 있는, 20세기 유럽을 풍미한 철학 및 문화이론이 맑시즘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 나름대로 정확하게 캐치해 내고 있다. 이들은 부정할 수 없는 이 미약한 연결고리를 상당히 과장하여, 냉전 시기에 자신들이 가졌던 반공 정신을 그대로 반동성애, 반페미니즘 정신으로 이식시켜 버린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을 소련이 미국을 몰락시키기 위해 퍼뜨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수 개신교인들에게서 페미니즘, 퀴어 이론 등은 그 세밀한 차이가 지워진 채 엉뚱하게 사회주의와 동일시되고, 그들 스스로 수호한다고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립항으로 설정된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2010년대 초반을 풍미한 청년보수,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꾸준히 있어왔던 반공 기독보수는 박근혜 탄핵 이후로 유튜브 채널을 함께 운영하고, 보수의 재건을 꿈꾸는 언론사들에 의해 함께 묶여서 소개되는 등 실질적으로 결합되었다. 사실 이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일반적으로 서로 가깝다고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K-자유주의 청년보수와 반공 기독보수는 각각 전경련, 그리고 국정원/청와대를 매개로 하여 박근혜 정권을 비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위하던 정권 자체가 퇴락하면서 이들은 보다 직접적인 결합을 도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합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지점은 바로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아젠다들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세상을 망칠 것이라는 위기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요즘은 청년보수를 낳은 인터넷 문화의 직접적 후신이자 2015년 이래로 좌우를 막론하고 발흥하고 있는 일련의 안티페미니즘적 모멘트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발견한 대단히 흥미로운 어떤 장면이 있다. 안티페미니즘으로 대중적 화제를 얻고 있는 오세라비 작가가 내일부터 두 대학교에서 하루 간격으로 강연을 하는데, 첫번째 초청은 과격한 안티페미, 반PC주의를 표방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반종교적이기도 한 개인에 의해 이뤄진 반면, 두번째 초청은 극렬한 보수 개신교 단체인 카이스트 리버티 아카데미(트루스포럼과 동일한 단체로 보임)에 의해 이뤄졌다. 상술한 흐름을 고려할 때, 이 두 사례가 교차하는 장면은 나름 상징적이다.

  최근들어 느끼는 문제점 중 하나는, 현재 논의되는 사회적 의제들을 보았을 때 남성 청년들이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권 출범 이후 청년 일자리 문제는 충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다 고용세습 논란 등으로 박탈감과 배신감은 가중되었다. 남북평화 추구는 원론적으로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삶에의 직접적인 영향이 체감되기 어려우며 독재정권을 웃는 얼굴로 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감을 사는 측면도 있다. 남성 청년들의 삶과 관련하여 단기간에 개선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군 인권 문제 정도일 텐데 이것조차 크게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페미니즘의 급속한 정치적 의제화를 보면서 또래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무언가를 '누리는데'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정치적 박탈감은 가중된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박탈감은 현 시대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의 근원과도 같은 보수 개신교가 생산하는 컨텐츠들을 통해 은밀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충족될 수 있고, 잠재적으로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 전세계가 겪는 문제 중 하나인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서도, 정치에서의 세속주의적 가치의 수호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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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15일 목요일

고립과 배제로는 교조화를 막지 못한다

  여성이 머리를 짧게 했다고 해고되었다는 뉴스와, 머리를 짧게 했다고 린치를 당했다는 뉴스를 거의 동시에 보았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환경에서 페미니즘을 향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식의 말들이 어떻게 기만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싸움의 원인은 도대체 누구의 어떤 말들에 의해서, 누구의 어떤 행동들에 의해서 제공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오지랖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도를 논하기 이전에 여성이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개인의 자기표현일진대, 그것을 공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면 안 된다. 그 공격이 바로 여성이 머리를 짧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을 표방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핵심적으로 비춰져야 하는 지점은 명백하게 젠더폭력의 문제가 된다. 후자가 핵심이므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되 전자의 측면도 조명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탈코르셋이 교조주의적으로 흐를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최근에 많다. 나 역시 탈코르셋 운동이 가진 여러 함의 중 '기존 질서에 복무하는 특정한 상징의 철폐'라는 함의가 강화되고 '상징의 채택에 있어 간섭받지 않음'이라는 함의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목소리에 동감하는 면도 없지 않다. 개별 상징 자체의 철폐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징이든지 일방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기존의 시선을 파괴하는 것이 더 궁극적인 목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결은 이 문제에서 상관없다. 어찌되든 저런 논의는 우선 맨 처음에 제시한, 사람을 해고하거나 때리고 심지어 죽이면서 삶의 조건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젠더폭력이 제거되고 난 뒤의 문제이다. 단순히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인식상의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저런 거대한 문제가 계속되는 한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조주의를 둘러싸고 편갈라 토론하면서 충분히 세세하게 성찰할 만한 여력이 없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교조주의를 정당화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조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 교조주의의 발흥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단순히 그 과격한 모습을 비판하고 그 모습에서 눈을 돌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격함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더 과격하지만 더 은밀한 것이 마치 당연한 듯이 자리잡아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자신과 그 주변, 나아가 사회의 폭력적인 인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돌아보면서 싸워낼 필요가 있다. 어떤 문제이건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착하기를 잠시 중단하고 일상을 투쟁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실천과 참여라고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고 '진정한 페미니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래서 잘못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일관되게 주장해 온 바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커다랗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미시적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만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사람들 각자가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삶의 일정 부분 이상을 이 문제에 개입시키고 있을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과격한 태도를 중단하고 조곤조곤 설득해서 '선뜻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과격한 태도를 유지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를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린치를 하는(그리고 그것에서 젠더폭력의 맥락을 애써 지우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말이다. 특정한 언어표현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남이 페미니즘을 표방하건 말건, 머리를 짧게 하건 말건 해고하거나 린치하지 말자는 기본적인 문제 정도는 그런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시민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와, 시민적 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일단 상대방을 시민 취급 좀 하라는 문제는 다르지 않나. 물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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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5일 월요일

영단어 'radical'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

  영알못이지만 radical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그 다양한 용례로부터 받는 인상을 종합해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급진적인 것과 과격한 것은 매우 다른데, 영어의 radical에는 그 두 가지 뜻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이 단어의 다양한 사전적 의미를 모두 종합해 보았을 때, 이 단어가 담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뜻은 급진적인 것과 과격한 것 중 어느 것도 아닌, 무언가의 '근본을 타협 없이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 정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르면 무언가를 radical하게 추구했을 때 최전선의 세밀함을 보여주는 급진적인 사유로 이행할 수도 있고, 혹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사유로 이행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 둘은 교집합이 존재하지만 어떤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근래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어떤 경우에는 학술적 분파로서의 2세대 페미니즘을 일컫는 의미로, 다른 경우에는 탈코르셋 등을 예외 없이 철저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지칭하는 의미로 분리된 듯 하면서도 분리되지 않은 채 쓰이고 있다(후자가 대체로 '랟펨'으로 불리는 듯하다). 이 둘은 겹치는 점이 있지만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2세대 페미니즘과 3세대 페미니즘의 관계는 최근 담론에서 등장한 소위 '랟펨'과 '쓰까'의 관계와도 정확하게 대응되지 않는 것 같다. 한편 안티페미는 주로 그 세부적인 주장 내용보다는 주장의 공격성에 초점을 맞추어, '과격한', 내지는 '공격적인' 페미니즘이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한편, 종교적 근본주의나 정치적 극단주의에서 나타나곤 하는 반사회적 의견과 같이 '과격하면서 동시에 반동적인' 것에 radic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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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악마적인 디지털성범죄 카르텔의 원천 소탕을 염원한다

디지털성범죄 영상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제국을 세운 이가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가 회사 직원에게 행한 갑질과 폭력도 문제지만,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그의 회사가 사실상 거대한 범죄집단이라는 데에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사과문은 지극히 기만적이다. 그는 복수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디지털성범죄 영상을 유통함과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돈을 받고 영상을 삭제하고 또 다시 유통하는 악마적인 구조로 부를 축적해 왔다. 디지털성범죄와 관련된 꾸준한 여론 형성과 기자들의 노고를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며, 수익구조 차단을 위한 연구 및 입법적 노력과 더불어 디지털성범죄 영상을 무비판적으로 소비해온 이들의 철저한 인식 개선이 동반되어 이러한 기업이 더는 등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지: 사람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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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화를 환영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원심의 유죄판단을 뒤집고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최근들어 1, 2심에서의 무죄판결은 종종 있어 왔으나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은 그 개별 판결들과는 무게가 다르다고 보인다. 지난번에 헌법재판소에서 병역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에 이은 중대한 전환점인데, 이로써 현재 계류 중인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비록 나의 사적인 신념, 개인적 양심은 병역거부가 아닌 군 인권 보장을 통한 복무환경 개선 쪽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공적 영역에서 명백한 연대의 대상이다. 일부 반대론자들의 오해와 달리 양심적 병역거부의 반의어는 비양심적 병역이행이 아닌 양심적 병역이행임을 강조하면서 오늘의 판결을 환영하고 이들의 선택을 응원한다. 아울러 평화체제의 정착을 통해 다양한 대체복무의 유지 및 확대가 보다 편하게 논의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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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