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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서울대의 미래: 결국 구성원의 실천만이 신뢰에 기여할 것

  학교 안에서 지켜본 바로는 트루스포럼이라는 기독보수 집단과, 현재의 비운동권 총학생회 및 그 주변 사람들은 그 기원도, 정서도, 활동도 매우 다르다. 그런데 최근에 캠퍼스가 정치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는 과정에서, 캠퍼스 외부의 조국 후보 지지자들에게 그 둘이 비슷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특히 김어준은 서울대 집회를 주최한 곳이 바로 트루스포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트루스포럼의 성격을 이해하는 건 단지 일개 캠퍼스 내의 문제가 아니라 중앙정치에서의 세력 구성에 대한 이해와도 약간은 연결이 되는 문제라서 김어준 같은 사람이 모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왜곡을 위해 그 차이를 일부러 뭉갰거나, 아니면 애초에 자세히 알아보지조차 않은 것 아닐까 싶다. 왜곡에 따른 반발이 있더라도, 공격은 어차피 효과적으로 먹힐 것이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이전에 나는 2010년대 초반의 청년보수가 박근혜 탄핵 이후로, 트루스포럼 류의 기독보수와 유튜브 채널 등을 함께하면서 어떤 면에서 실질적인 교집합을 형성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탄핵 이후에 등장한 '보리수'(?)에게선 그런 현상을 직접 관찰하지는 못했다. 또한 스스로는 비정치적임을 선언하지만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보리수(?)와 종종 유사하다고 간주되는 현 비운동권 총학생회 역시 그렇다(다른 관찰들이 있다면 댓글로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다). 정치적 공세 국면이라 가려지는 면이 있어서 이런 건데, 역사적 기록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명백히 다른 집단들을 좀 더 자세하게 나눠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순전히 내 감상을 적으려고 쓰는 것이지, 누군가를 두둔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캠퍼스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해 온 얘기들이, 캠퍼스 밖의 국가적 정치 이슈 속에서 계속 호출되고 있는 현재의 상태가 매우 흥미롭긴 하지만 다소 혼란스럽고 두렵다는 느낌도 있다. 학내 정치가 갑자기 훨씬 더 크고 무서운 중앙정치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예컨대 강용석이 취재하러 온 것도 그렇다.

  조국 교수 논란과 그에 따른 시위를 거치면서 서울대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해서 혜택을 누린다는 식의 막연한 전통적 도식(주로 입시생들 동기부여에 자주 쓰여 온)은 통하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는 것인지, 또한 그것이 왜 정당한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낼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이 학교 사람들의 많은 수가 상대적으로 큰 사회적 혜택을 받아 왔고, 사회적 시선도 많이 쏠린다는 것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 이 논란 이후에 적폐 집단이라는 식의 인식이 자리잡지 않기를 원한다면 누구의, 어떤 지혜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 그게 과연 누군가의 지금 당장의 지혜만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이기는 할까. 결국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증명해야/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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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4일 토요일

학부 졸업을 앞두고

학교는 대학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카데미에 원활히 편입될 수 있도록 많은 자원들을 제공한다. 인턴 같은 기회가 대표적이다. 학부 오래 다니면서 복수/부전공, 수업, 동아리 등 후회없이 하긴 했지만, 그런 걸 충분히 활용 못 한 건 아쉽다. 돌아보면 그때 그냥 하면 됐지 싶은데, 당시에 그게 막막하게만 느껴졌단 건 내 시야가 그 정도였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뒤늦게 졸업논문 쓰기 시작했지만 재밌게 진행을 했다. 전기과에선 control theory 쪽으로 했는데(Stability Analysis for Newly-proposed Distributed Kalman Filtering Algorithm), 물리학, 응용수학 쪽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교수님께서 관련된 주제 추천해 주셔서 재밌게 할 수 있었고, 이게 지금의 희망분야 선택에 큰 계기가 되었다. Multi-agent system의 collective behavior를 다루는 수학적 framework는 제어이론에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일부 분야에까지 공유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리과에선 멱법칙, 상전이 쪽으로 주제 잡아서 진행을 했고(Power-law Degree Distributions and Percolation Phase Transition Characteristics of 3-dimensional Weighted Stochastic Lattice), 막판에 조교님이 코딩도 많이 도와주시고 글쓰기도 피드백 주시는 등 많이 신경써 주신 덕분에 논문 쓰는 기분을 상당히 내 볼 수 있었다. 논문 검색 중에 찾은, 기존에 존재하는 2d 모델(WPSL, weighted planar stochastic lattice)을 고차원으로 꽤나 trivial하게 확장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주제를 정했다는 점에서 동기 부여가 많이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주제임에도, 프로그래밍 능력이 부족한 덕분에 실질적 구현 중에 꽤 고생을 했고 조교님의 결정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훨씬 더 축소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미학과 쪽도 많이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사실 내적친밀감은 이쪽이 제일 컸던 것 같기도), 부전공이다 보니 졸업논문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글쓰기 훈련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그래도 영미미학연습 수업에서 레포트 피드백은 한 번 받아 봤다). 철학, 미학 쪽으로 얘기 나눌 지인도 별로 없었고 해서 페이스북에 그런 쪽으로 글 많이 쓴 것 같고, 그 덕분에 페이스북 친구 분들과도 많이 교류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졸논 2번 다 랩에 자리 얻어서 출퇴근하고 랩미팅 가는 식으로는 못 한 게 아쉬워서, 지난 겨울방학 동안은 카이스트 물리학과의 연구실에서 개별연구를 했다. 여기서도 출퇴근은 안 했지만 매주 랩미팅 가서 피드백을 받으니까 상당히 빠르게 발전을 했다(물론 초기값이 낮아서 ㅎㅎ). 교수님도 늘 친절하게 조언 주셔서 개인적으로 무척 가치있게 느낀 시간이었다.

3월에 마음을 잠깐 바꾸어서 전기과에서 ML이랑 통신 이론 하시는 교수님께 예비 컨택도 해 뒀는데(물천이랑 반대로, 전기과는 입시절차와 동시에 지도교수를 정한다), 물리를 부전공한 분이다 보니 내 상황을 잘 이해해 주셔서, 좀더 고민해 보고 결정하라고 하셨다. 그 때도 카이스트 쪽 교수님께서 시간 내서 설득해 주신 덕분에 흥미 따라서 물리쪽으로 진학을 결정했다. 공부 더 하고 싶은데 안 하면 후회할 테니, 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나.

카이스트로 가려고 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몇 번 얘기했었는데, 개별연구 했던 랩이 워낙 인기가 많은데다, 후기라 TO 문제도 있다 보니 아무래도 자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물론 여기서도 원하는 랩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리천문학부의 경우 연구실 결정 전에는 인턴도 원칙상 불가능하다고 해서, 공부하고 알바하고 수업조교 하고 그러면서 준비하게 될 듯하다.

연구실이 결정될 시점(올해 12월)이면 학부 동기들은 표준적으로 이미 석박통합 2년을 마친 시점일 거라(학부 3학년 때부터 연구실 생활을 했다고 치면 무려 4년 차이), 늦었다는 조바심이 많이 든다. 뭐 늦은 건 늦은 거고,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준비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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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0일 화요일

조국교수 논란에 부쳐: 특권에 의한 공공성 훼손을 강력히 규제하자

  논란이 되고 있는 조국교수 딸의 연구참여는 고교에서 대학 등의 기관과 연계하는 프로그램이었나본데, 그걸 각계의 지위 가진 학부형들이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하도록 한 것이 상당히 놀랍다. 아무 학교에서나 하지 못할, 위화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한 발상이고 공공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위화감과 교육 공공성의 문제를 넘어 지금의 인사청문회 국면에서 조국 후보자에게 직접적으로 문제제기할 만한 것은 이 프로그램 자체라기보다는, 무리하게 1저자를 받았다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결국, 대학교수가 개인적으로 알음알음 진행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이건 고교 입장에서나 '프로그램'이었지, 사실 대학 입장에서는 학교의 자원을 자기도 모르게 고교생 개인 스펙을 위해 나눠준 셈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는 이런 프로그램을 교수 개인이 비공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공식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그리고 사전에 보고받도록 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단국대학교의 입장은 꽤나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우수한 학생 있으면 끼워서 논문 쓸 수 있지' 이런 예외적인(?) 느낌이 아니라, 상시적, 공개적으로 운영되는 쪽으로 대학 차원의 프로그램이 아예 마련되어 버렸으면 한다. 그러면 예컨대 지역 사회에 기여한다던지 하는 공익적 목적도 생길 수 있을테고 말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부당하게 할 사람들은 언제나 생길 것이고, 지역/학군 등에 따른 위화감이 빠르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학연계 프로그램이 최소한의 공적 가치라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이쪽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더 나아가서 수시입학 제도에 대한 뿌리깊은 국민적 불신을 완화하는 것과도 관련될 것 같다.

  조국교수와 같이 사회적 입지를 가진 민주/진보 인사들에게서 발생하는, 정치적 소신과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공적 영역에 진출하고자 할 때 받는 국민적 요구들과, 자녀교육 및 개인의 경제적 풍요를 위해 해 온 일들 사이의 충돌이 그 자체로 뭔가 비극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여기서 비극적이라는 건 당연히 감정적으로 슬프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모순이 누군가에게 발생하도록 사회적 구조가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의 첨단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비난을 피하기 어렵고 말이다.

  물론 위화감 그 자체만으로는 특정한 이윤 추구 행적이 '부당하다'고 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테니,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활발하게 필요할테다.

  나는 개인적 영달을 위한 찜찜한 선택의 순간에 사회적 소신에 따라 그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도덕적인 '성자'와 같은 공인들이 많아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그 자체로야 훌륭한 일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 선택지가 그들에게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는 환경, 그리고 설령 눈에 보이더라도 감시 및 견제 장치가 많아서 비자발적으로 포기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사회 주류집단에는 그러한 견제 장치가 없었고,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 오던 사람들이 공직에 오르려 할 때 언제나 망가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순 없이 정의로움을 유지하려면, '안' 하기보다는 '못' 하는 방향밖엔 없는 것이다.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국면에서 보이듯이 이런 쪽으로 개혁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그 문제의 당사자들이고(...), 그들이 공직에 나서고자 할 때 언제나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되어 실망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신뢰를 형성하고 바꿔갈 수 있을지, 찜찜하고 부당한 일들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참 막막하고 답답하긴 하다.

  더불어, 이런 구조를 비판하는 청년들의 언어가 등장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주로 특정한 세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구조의 첨단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기성 보수 언론이 그들에게 부여한 '386 세대'와 같은 단어는 '내 언어'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오히려 그 단어를 사용할수록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거라는 불안감이 든다. 민주/진보 인사 개인을 비판하되, 그 사람들 개인이 위선적 운동권이라는 식의 비판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들이 그렇게 된 요인도 함께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장기적인 해법이 등장하면 현재의 보수언론이 좋아할까? 그러지 않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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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7일 토요일

인공적 자연으로서의 영화적인 것에 대하여


  이전에 진정한 대중예술이 될 수 있는 장르로 야인시대 합성물을 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 후보는 하나 더 있다. '영화 예고편'이야말로 독자적인 장르로서, 문화산업의 영역 바깥에서 대중에 의해 창작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사례 중심으로 이 가능성을 검토해 보면서 영화적인 것 전체에 대한 고찰로 확장해 보자(작품(?)별 링크는 하단에).

  영화의 예고편은 본편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독자적 문법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고편들은 영화 본편의 흥행이라는 목적에 복무하고 있는 면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문법을 파악한 대중들은 종종 대응되는 실제의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순전히 독자적인 컨텐츠로서의 '영화 예고편'을 창작해 내곤 한다. 이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그 기원을 생각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으로, 대부분 기존 유명 영화 예고편의 주된 요소(주로 OST)를 그대로 채용하여 본인이 창작한 다른 장면들을 끼워넣는 방식이지만([1], 주로 중고등학교 UCC에 이러한 방식이 많다), 때때로는 한 예고편을 다른 예고편의 스타일로 변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2],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예고편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겨울왕국>의 가상 예고편을 만든 사례). 심지어 내용을 철저히 삭제하고 형식만을 남김으로써, 블록버스터 영화 예고편의 '공식'을 노골적으로 지적하여 웃음을 주는 영상도 있다[3].

  우리는 어떤 영화들이 지나치게 전형적이라고 종종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런 영화들이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임의의 '영화적인 것'(영화 예고편, 포스터, 플롯, 배역 등)과 결부지을 수 있는 대략적인 얼개만을 지닌 어떤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바로 그 얼개에 대응되는 전형적인 영화 한 편 혹은 그 일부를 마음 속에서 구성해 낸 듯한 느낌을 받고, 그 영화를 실제로 재생하여 감상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으면서 '영화 한 편 다 봤다'고 말하곤 한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이러한 심적인 경향을 구체화하여 직접 표현하기도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예시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주제로 한 가상의 영화 '제 78수'의 포스터[4], 그리고 그것과 동일한 주제로 쓰인, 황정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상의 플롯[5]이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대중적 화제가 되고 있는 특정한 이벤트를 영화라는 우수한 형식의 일면 속에 배치하여 특유한 효과를 노리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의 정형화된 형식에 대한 조롱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한편 우리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화 같다', 혹은 '영화보다 더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런 표현에는 사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관조한다는 데서 오는 윤리적 문제성이 있으나 일단은 차치하고, 이런 표현을 할 때에 우리가 어떤 가상의 영화를 연상해내어 해학적으로 향유하면서 집단적으로 위로받는 경향을 갖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물론 심각한 사건일수록 이러한 문학적 연상작용은 당장은 심리적으로 거부될 것이다). 2016년에 최순실 게이트가 거대한 논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모종의 '영화적인 것'을 차용한 패러디물이 다수 생산되곤 했다. 김경진 의원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압박하는 장면에 음악을 깔아 느와르 영화처럼 편집한 작품[6]도 기억에 남고, 논란이 생겼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너의 이름은>의 예고편을 패러디한 '동무의 이름은'[7], '너의 실세는'[8] 등의 가상 예고편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아니지만 또 하나 특이한 것으로는, 당시 시국을 드라마로 만든다고 가정할 때의 '가상 캐스팅'[9]도 있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경건하다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순수 창작이 아닌 재구성이라는 방식이 갖는 유머러스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는 실제 영화에 비해서 훨씬 적은 자본만 가지고도 전형적인 영화가 주는 감동을 어느 정도 내적으로 모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익명의 제작자의 실감나는 표현에 대해 감탄함과 동시에, 정형화된 감동을 이끌어내는 영화들에 대한 모방으로서의 - 우리 스스로가 마음속에 만들어낸 - 가상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웃음을 맛본다.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 이러한 모방은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경의이자 적극적인 활용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형식의 정형화를 지적하는 풍자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방향이던간에 그러한 컨텐츠들은 산업의 영역 바깥에서 오로지 대중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대중문화를 기층에서 추동하는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사실 영화적인 것이 가진 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결국 그러한 대중문화는 영화산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에서 영화가 갖는 이러한 성격은 마치 '자연'이 가지는 성격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는 대중예술을 표방하여 만들어졌고 대중에 의해 향유되고 있으나 대중에 의해 생산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포스터, 예고편, 심지어 캐스팅 등 어느 정도 독자적인 미학적 성격을 갖는 주변적 산물들을 동반한다. 현대의 대중은 이렇게 문화자본에 의해 생산되어 종합적으로 다가오는 '영화적인 것'에 대해 매우 익숙하며 직관적으로 상당히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주변적 산물들을 모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모종의 영화적인 것을 생산해 내곤 한다. 초기 인류가 자연이라는 절대적 형식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바위 위에 그리면서 향유하였듯이, 현대인들은 영화라는 인공적인 형식에 대한 미메시스를 통해 영화적인 것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재현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1] 유튜브 '영화 예고편 패러디' 검색 결과: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영화+예고편+패러디

[2] '엔드게임 제작진이 《겨울왕국》을 만들면 벌어지는일': https://www.youtube.com/watch?v=pT2Oawi330I

[3] 'How to Make A Blockbuster Movie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KAOdjqyG37A

[4] '[이세돌-알파고] 이세돌 첫 승리에 가상영화 등장?… "영화제목은 제 78수"':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0140&fbclid=IwAR3qMMTkHVIdOuw-xTfu1D0LHm06kUy26PyRTSfrQx-s1LZ1ONBFsdnsEbY

[5] 'CJ에서 황정민 데려다가 알파고 vs 이세돌 영화를 만들면ㅋㅋㅋ.jpg': https://www.instiz.net/pt/3655327

[6] '청문회 스릴러 (출연: 우병우 / 김경진 의원 / 김성태 의원)': https://www.youtube.com/watch?v=KPA24azHn3U

[7] '동무의 이름은': https://www.youtube.com/watch?v=jVQeuf6F5d0

[8] '[너의 이름은 패러디] 너의 실세는。메인 예고편 (박근혜, 최순실 주연 / 君の名は parody)': https://www.youtube.com/watch?v=X-h16VakV1g

[9] '최순실게이트 가상캐스팅':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327149&fbclid=IwAR1l7yswePW0xmjBrgB0-fqoYiS7Q-Ccns-Qp61bfXuIk_E0yGeb1Dikp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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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4일 수요일

'불편한 진실'을 지혜롭게 다루기: 방해물이 아닌 동력으로

  위안부 담론에 비판적인 관점들 중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적이 있느냐, 자발적인 위안부도 있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보거나, 더 나아가 통념과 다른 일종의 '불편한 진실'을 강조함으로써 위안부 문제 속에 있는 인륜적인 부분을 탈색시키려는 관점들이다. 그러한 관점들이 작동하면서 담론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여 상당히 유감스럽다.

  조금 다른 문제로 비유를 하자면, 후기 근대국가의 근대화 과정에서 폭력을 동반한 전통사회의 해체가 어느정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역사적 관찰이 있다고 해서, 혹은 전통사회 내에서도 근대화의 적극 협력자들이 있었고 이권을 이유로 한 내부적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폭력을 겪은 것이 피해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이건 21세기의 개발사업 등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비극들을 인정하고 부각하는 것이 국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데에 방해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마치 통념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한 다양한 이야기들에 주목하여 가시화하는 것이 바로 합리성을 담지한 사람들의 몫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의 존재를 반드시 위안부 문제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복무시킬 이유는 없지 않는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스탠스의 학자 및 스피커들이 통념과 다른 이야기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복무시키면서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고, 그럼으로써 더욱 더 설 땅이 없어지고 '흑화'한 일련의 비극적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이런 얘기다. 한국군도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것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서 전혀 뼈아프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사건에는 특수한 성격과 보편적 성격이 작용하는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후자의 측면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한국 정부가 자국에 의해 이뤄진 폭력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한국의 민족주의적 주장이기보다는 세계시민적 보편가치에 근거한 주장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이상적이겠다.

  물론 국제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구도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기는 할 것이나, 국내의 시민적 담론이 그러한 방향으로 형성되어 뒷받침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의 한국정부가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여지에 있어서 은근히 중요할 수 있겠다는 것을 요새 느낀다.

  일본군 위안부의 자발성 주장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야기들을 강조하여 위안부 담론을 허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보편성에 기대어 특정 사안을 무력화시키려는 경향과 통해 있다. 사회에서 늘상 일어났던 성의 산업화의 연장선이므로 특수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안의 단편적이지 않은, 통념과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부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그 사안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흘러가야 하는가. 이것은 그 이야기들을 하필 그 사안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복무시켰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정반대로 활용될 수 있다. 일례로 해방 이후 미군 기지촌의 성매매 역시 잘 알려져 있고 그에 대한 문학 작품들도 많이 나왔으나, 그러한 문학 작품들에서 꼭 일방적 피해자만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어느정도 주체적이고 일상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설정함으로써 사안에 '보편성'을 부여한 것이 과연 기지촌의 문제성을 희석시켰는가? 오히려 정반대로,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포함시킴으로써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보편성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내친김에 좀 더 넓혀서 식민 지배 그 자체에 대한 담론도 이야기해 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이 마치 반일 담론의 핵심 논리를 파훼하는 '불편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또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것이 대단히 부당하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본래 물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근대화는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며 늘 폭력이 동반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널리 관찰되는 것 아니었나? 해방으로 인해 현재 일본과 한국이 독립적인 두 국체로 되었고 각자의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폭력에 대한 문제성이 남아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주장되는 것이며 그것이 딱히 부당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식민 지배 문제에 대해 냉소적인 일각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과를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나? 보상금 얼마를 줘야 만족할 건가? 대체 어떻게 사과해야 진정성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부당한 구도이다. 사과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척도로써,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개를 몇 도 숙여야 하냐'는 식의 단편적인 기준만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한국인들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들므로 상당히 악의적이다.

  도대체 한일협정 이후에도 식민 지배 문제가 왜 계속 호출되는가? 첫 번째로 한일협정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정권이 상당히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이므로 시민적 차원에서 해소되지 않은 문제성(이것이 '한'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이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일본이 '사과하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교육 등에 있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직시의 측면이 매우 미흡하므로 문제가 궁극적으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보편화하기에 용이한 기준(사과를 분명히 받았고, 돈도 받았다)들을 근거로 해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다소 복잡한 문제성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앞의 내용들과 어느 정도 통한다.

  보편적 관찰, 통념과 다른 측면, 생각보다 일방적이지만은 않은 구도, 불편한 진실 등에 의거한 우파적 공격을 모두 안고 가면서도 인륜적 문제제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전선의 설정이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어떤 사안의 특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그 사안의 보편적 측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구도는 대단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취함으로써, 보편성에 의해 취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에 의거해서, 혹은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물론 판 자체가 새로 짜여야 하는 것이라 실질적으로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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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3일 토요일

인터넷 덧글창과 어린이의 마음: "원초적 정신"의 관점으로


1. 인터넷 덧글창에 대하여

  상호성이 강한 SNS 및 각종 커뮤니티를 제외한 일반 포털의 경우, 덧글창이라는 곳은 늘 내게 묘한 영감을 준다. 살펴보다 보면, 정신 속에 오랫동안 덮어뒀던 곳이 바늘로 쿡쿡 찔리는, 그러나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단순히 댓글들의 내용이 놀랍다거나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묵묵히 존재하는 덧글창이라는 공간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댓글들이 메아리치며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런 아련한 심정상태를 유발한다.

  기업형 블로그, 네이버포스트, 그리고 메인에 뜨지 않은 뉴스 등의 덧글창을 보면, 답변이나 답글이 달릴 것이라고는 딱히 기대하기 어려움에도 사람들은 그 곳에 자신의 의식과 정서를 투자하여 덧글을 작성한다. 그리고 그 덧글은 그 상태로 그 서비스 속에 반영구적으로 남는다.

  덧글 작성자들끼리 싸우는 것이라던가, 정치 단체에서 ‘작업’ 들어가서 정치적 덧글 쓰는 것은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그것들보다는 누구인지 모를 익명의 네티즌이 오롯이 자기 내면의 솔직한 생각을 투사해서 쓴 덧글들이 내게 그런 아련한 느낌을 준다. ‘외로운’ 덧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덧글들을 어릴 때 종종 몰두해서 쓰곤 했던 나의 모습도 회고해 보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그게 ‘상호적인’ 의사소통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철저히 ‘내적인’ 언어화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 여전히 그렇게 하는 다른 사람들, 그걸 볼 때마다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해 버리는 내 자신의 모습, 한 때는 융성했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곳에 있는 덧글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 그런 곳들에 표출되어 메아리치고 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있는 비일상적인 모멘트를 자극하곤 한다.

  인터넷에 저런 방향으로 종종 몰두하곤 했던(또한 그럴 수 있었던) 어릴 때의 심정상태가 나는 대체로 짠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면서, 또한 은근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하필 그 때 주로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지 시기상으로 그런 게시판들이 내가 어릴 때 융성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덧글창의 속성과, ‘어리다’는 속성 사이에 무언가 개념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




2. 어린이의 마음에 대하여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터넷 중독이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관심사의 균형이 맞춰지고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에서 꽤나 바람직한 양육을 받았는데, 인터넷을 할 때에는 그것을 활용하는 방향이 저랬을 뿐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인터넷 말고 삶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린이의 마음에는 소위 ‘어리광’, 혹은 심하면 ‘땡깡’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있기야 하지만, (불공정한 계약인) 부모-아동 간의 유대 관계에 근거하여, 비합리적인 요구일지라도 나를 봐 주고 챙겨 달라는 호소이기도 한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한 행동을 할 때 나는, 주로 내 호불호에 근거하거나 뭔가 명분을 잡아서 고집을 부렸지만, 정작 나 스스로도 그러한 행동을 명시적으로 의도하고 통제하는 수준의 메타인지는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볼 때에야, 요구 사항 자체보다는 유대 관계의 확인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비로소 생각이 들 뿐이다.

  또한, 각각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 ‘호불호’에 대한 감각을 강하게 형성한다는 사실도 위와 병렬적으로 짚어 볼 수 있다. 아이들은 경험이 쌓이면서 무언가에는 몰두하고 집착하게 되며, 또 다른 무언가는 거부하게 된다. 그러한 호불호의 감각은 아이마다 교집합도 많지만, 또 매우 특이하게 형성될수도 있으며,  의식적인 것일 수도, 감각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내 예시를 기억나는 대로 들자면, 옷 뒤 안쪽에 있는 상표가 등 위쪽에 닿아서 간지럽고 거슬리는 것을 유난히 못 견뎌해서,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위로 떼어내 주셨었다. 또한, 옳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화나는 것과 별개로, ‘나는 부조리를 싫어한다’라고 다소 의식적으로 정체화를 해서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정도면 평범했지 싶다. 아무튼 이러한 호불호의 형성 역시, 위에서 서술한 유대 관계 확인 욕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어린이들마다 다르게 형성되는 원초적인 호불호의 감각, 그리고 유대 관계 확인의 욕구를 나는 ‘원초적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나는 신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다소 두렵다고 느낀다.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그러한 감각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세련되게 포장되면서 그 날것의 형태로서는 거의 무뎌지거나 잊힌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그러한 감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나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됨과 동시에, 앞에서 쓴 인터넷 덧글창을 볼 때처럼, 약간 비일상적이지만 꼭 피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3. 종합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인터넷 덧글창과 어린이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나는 이상하게도 굉장히 비슷하게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서 적어 본다. 우선 두 가지 모두, 상대방을 향한 유효한 의사소통의 요구라기보다는 내적인 심정상태의 외적 표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모두 결코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성을 나름대로 이리저리 적용해 보며 발전시키는 필수적인 사회적 과정일 테다 (사이버네트워크의 경우, 이러한 과정은 각각의 사람뿐만 아니라 인터넷 스스로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가지 소재의 공통점을 '미성숙한 단계의 사회성'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소재 모두, ‘권력’이라는 단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의 덧글들은 종종 권력자들에 대해, 혹은 심지어 그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것들은 권력자와의 실제 의사소통 시도가 아니므로 당연히 실질적/직접적인 소통으로 가 닿지 않는다. 아이가 갖는 호불호 감각의 경우에도, 주로 아이 자신과 양육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균형(아이는 아이라는 사실 자체로 챙김받을 권력이 있으나, 양육자는 실질적으로 챙겨 줄지를 결정할 권력이 있음) 속에서 서로가 가진 권력을 본능적으로 견주어 보는 형태로 드러나지, 합리적 의사소통의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인터넷 사이트는 기술적인 한계와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에 (특히 뉴미디어가 아닌 전통적 포털의 경우) 행위의 선택지와 상호작용의 방식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제한되어 있다 보니, 그 구조가 다면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원초적 정신을 닮아 있고, 따라서 그런 원초적 정신이 표출되기에 상당히 적합한 공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통적 포털에 비해 뉴미디어 환경에서는 상호작용 방식의 선택지가 많고 또한 ‘사회성’의 모멘트가 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기가 힘들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세련된 의사소통은 권력의 행사를 간접화하는데, 이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원초적 정신이 가졌던 미성숙한 사회성이 고도의 사회성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은 일이고, 또한 어린이들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는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예시를 끌고 와서 마무리를 해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초기에 형성된 원형(archetype)적인 이미지들과 그것을 재조합한 레트로한 아트워크들이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아트워크들에서는 인터넷의 원시적 시기에 업로드되거나 생산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편집되고 조합되어 등장한다. 초기의 인터넷 컨텐츠들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원초적’이라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또한 실제로 내 어린시절에 그것들이 급속히 발달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내 정신의 초기적 구성 요소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꿰뜷는 키워드는 역시나 ‘미성숙한 사회성'이 아닐까 한다. 배제할 수도 없지만 익숙하지 않고 낯설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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