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담론에 비판적인 관점들 중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적이 있느냐, 자발적인 위안부도 있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보거나, 더 나아가 통념과 다른 일종의 '불편한 진실'을 강조함으로써 위안부 문제 속에 있는 인륜적인 부분을 탈색시키려는 관점들이다. 그러한 관점들이 작동하면서 담론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여 상당히 유감스럽다.
조금 다른 문제로 비유를 하자면, 후기 근대국가의 근대화 과정에서 폭력을 동반한 전통사회의 해체가 어느정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역사적 관찰이 있다고 해서, 혹은 전통사회 내에서도 근대화의 적극 협력자들이 있었고 이권을 이유로 한 내부적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폭력을 겪은 것이 피해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이건 21세기의 개발사업 등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비극들을 인정하고 부각하는 것이 국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데에 방해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마치 통념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한 다양한 이야기들에 주목하여 가시화하는 것이 바로 합리성을 담지한 사람들의 몫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의 존재를 반드시 위안부 문제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복무시킬 이유는 없지 않는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스탠스의 학자 및 스피커들이 통념과 다른 이야기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복무시키면서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고, 그럼으로써 더욱 더 설 땅이 없어지고 '흑화'한 일련의 비극적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이런 얘기다. 한국군도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것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서 전혀 뼈아프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사건에는 특수한 성격과 보편적 성격이 작용하는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후자의 측면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한국 정부가 자국에 의해 이뤄진 폭력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한국의 민족주의적 주장이기보다는 세계시민적 보편가치에 근거한 주장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이상적이겠다.
물론 국제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구도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기는 할 것이나, 국내의 시민적 담론이 그러한 방향으로 형성되어 뒷받침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의 한국정부가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여지에 있어서 은근히 중요할 수 있겠다는 것을 요새 느낀다.
일본군 위안부의 자발성 주장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야기들을 강조하여 위안부 담론을 허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보편성에 기대어 특정 사안을 무력화시키려는 경향과 통해 있다. 사회에서 늘상 일어났던 성의 산업화의 연장선이므로 특수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안의 단편적이지 않은, 통념과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부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그 사안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흘러가야 하는가. 이것은 그 이야기들을 하필 그 사안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복무시켰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정반대로 활용될 수 있다. 일례로 해방 이후 미군 기지촌의 성매매 역시 잘 알려져 있고 그에 대한 문학 작품들도 많이 나왔으나, 그러한 문학 작품들에서 꼭 일방적 피해자만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어느정도 주체적이고 일상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설정함으로써 사안에 '보편성'을 부여한 것이 과연 기지촌의 문제성을 희석시켰는가? 오히려 정반대로,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포함시킴으로써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보편성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내친김에 좀 더 넓혀서 식민 지배 그 자체에 대한 담론도 이야기해 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이 마치 반일 담론의 핵심 논리를 파훼하는 '불편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또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것이 대단히 부당하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본래 물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근대화는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며 늘 폭력이 동반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널리 관찰되는 것 아니었나? 해방으로 인해 현재 일본과 한국이 독립적인 두 국체로 되었고 각자의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폭력에 대한 문제성이 남아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주장되는 것이며 그것이 딱히 부당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식민 지배 문제에 대해 냉소적인 일각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과를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나? 보상금 얼마를 줘야 만족할 건가? 대체 어떻게 사과해야 진정성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부당한 구도이다. 사과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척도로써,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개를 몇 도 숙여야 하냐'는 식의 단편적인 기준만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한국인들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들므로 상당히 악의적이다.
도대체 한일협정 이후에도 식민 지배 문제가 왜 계속 호출되는가? 첫 번째로 한일협정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정권이 상당히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이므로 시민적 차원에서 해소되지 않은 문제성(이것이 '한'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이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일본이 '사과하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교육 등에 있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직시의 측면이 매우 미흡하므로 문제가 궁극적으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보편화하기에 용이한 기준(사과를 분명히 받았고, 돈도 받았다)들을 근거로 해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다소 복잡한 문제성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앞의 내용들과 어느 정도 통한다.
보편적 관찰, 통념과 다른 측면, 생각보다 일방적이지만은 않은 구도, 불편한 진실 등에 의거한 우파적 공격을 모두 안고 가면서도 인륜적 문제제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전선의 설정이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어떤 사안의 특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그 사안의 보편적 측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구도는 대단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취함으로써, 보편성에 의해 취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에 의거해서, 혹은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물론 판 자체가 새로 짜여야 하는 것이라 실질적으로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