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페이스가 사회적 금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나는 작년 이맘때쯤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과거에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찍었던 사진이 논란이 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의정부고 졸업사진에서 관짝밈을 재현한 것이 블랙페이스로 논란이 되고 있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행위 자체는 어찌보면 별로 구체적이지 않으며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상당히 일반적인 행위이다. 또한 이번에 논란이 된 의정부고 졸업사진도 흑인을 희화화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밈을 그대로 따라한 것뿐인데 하필 그 밈에 등장하는 인물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흑인의 외양을 재현하겠다는 것도, 블랙페이스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일반적으로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즉, 흑인 분장을 하게 된 계기가 마치 일베처럼 금기를 위반하는 짜릿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금기라는 사실을 몰라서였다고 추측해본다(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이는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개연적으로 그럴 수 있겠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할 경우 세간의 이러한 반응에 거부감이 들거나 당혹스러울 수 있다.
찾아보니 블랙페이스는 19-20세기 연극 같은 데에서 실제로 흑인의 모습을 희화화하며 조롱하는 기능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비흑인이 검은 얼굴과 두꺼운 입술 등으로 분장하여 흑인을 모방하는 것, 나아가서 굳이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 그 자체가 금기시되게 된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이 진공 속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금기가 아니라, 여느 금기와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다(사실 자연/인위의 구분이 있다기보다는, 금기로 정착되는 배경이 된 갈등이 어느 정도로 널리 문제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겠지만).
게다가 흑인에 대한 차별은 현재진행형이며 여전히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기에 대한 교육과, 구성원 개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금기를 늘 염두에 둔 채 행동하도록 부과되는 제약, 그리고 그것이 위반되었을 때 생기는 갈등은 사회가 짊어져야 할 일종의 업보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다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것은 미국 등 서구권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행동은 글로벌한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흑인에 대한 백인 주류사회의 인종차별이라는 맥락 속에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규준을 요구하는 것이 억지스럽다는 의문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고실험을 해 보자. 평생 동안 어떤 적극적인 인종차별행위도 하지 않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도 전혀 차별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상의 아주 훌륭한 백인이 있다고 하자. 개인 차원에서는 흑인에 대한 어떠한 업보도 쌓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흑인과의 교류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면, 모종의 변화로 인해 그가 흑인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을 경우, 무지 상태에서의 개인적 선량함만으로는 그의 무결함이 담보될 수 없다. 의도치 않은 금기 위반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다양성과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성될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 한 개인을 매개체로 해서 드러난 것이다. 만약 흑인들과 실질적인 교류를 하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려면, 오히려 금기들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면서도 그 금기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일부 잘못된 인식과 달리, 선량함이라는 가치는 나쁜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이해할 때만 성취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백인과 흑인의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인종갈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가시화조차 안 될 정도로 다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문화적, 외연적으로 유독 균질적인 환경 같은 것이 작용하기는 하며(요새는 꼭 그렇지도 않은데 균질성이 강요되는 것 같지만...), 그러한 환경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분명히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그리고 추세 역시 그렇다. 다양한 외양과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을 대할 가능성이 갈수록 늘어가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발맞춰가야 한다. 조금 더 강하게 주장하자면, 그러한 가능성의 실현 여부와는 별개로 그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만 하더라도, 금기를 존중하자는 주장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기본적인 우위는 깔고 간다고 생각한다.
블랙페이스의 기원이 된,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 맥락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단순 재현한 것일 뿐인데 왜 마음대로 상처를 받느냐 하면, 우선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문화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답하고 싶다. 상처받는 이유의 정당성(?)은, 상처를 주게 된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블랙페이스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혹은 비흑인끼리의) 생활양식을 불필요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에 대한, 흑인을 향한 사회의 태도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의제가 사회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한국사회에까지 블랙페이스 금기가 이식되는 것에 대해, 단순히 사변적으로 설정한 도덕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앞으로 얼마든지 마주하게 될 매우 실질적인 문제를 위한 덕성의 연마이자, 향후 부끄러울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한 예방조치라고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이해가 되지 싶다.
노라조가 <카레>에 대해 최근에 사과를 한 것 역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떠나 꽤나 인상적으로 보았다. 외국문화 희화화에 대한 국내 인식이 부족했고 케이팝의 저변도 지금처럼 넓지 않았던 10년 전 일이라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사적 당혹감보다는, 불쾌감을 느끼는 당사집단이 존재하는 한 발맞춰가야 한다는 것을 우선시한 바람직한 태도였다고 본다.
타자를 재현하는 것, 잠시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은 이렇듯 여러모로 간단치 않은 일이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즉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행위인데도, 광의의 예술의 영역에 속하며, 모방을 하고 나면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한 시간적, 정신적 자원을 들여 고민을 하는 것은, 행위하는 이와 그것을 관리하는 이의 기본적인 책임이다.
문화라는 것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하면 안 되는 그런 사항들이 많다. 답답하고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금기들을 인식하고 존중해 보는 것은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굳이' 위반하는 의도가 충분히 정교하게 설득되어야 한다. 예컨대 (물론 당시 나를 포함한 청소년들 위주로만 그랬을 수도 있으나)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몇몇 표현은 2010년대 초중반을 중심으로 상당히 강한 금기에 해당했다. 비극적 서거를 희화화하는 단어로서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유발하지만 누군가에겐 매우 큰 불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심의 여지 없는 정치적 동지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야 기분좋다'라고 외친 것은 실제 의도와 실질적 파괴력과는 별개로, 저 금기와 관련하여 상당히 강한 미적 상징성이 있었다.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딱히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는 하는데 여튼... 금기의 존재 하에서 그것을 위반하는 짜릿함이 유행의 본질이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그 배경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물론 시민사회와 공교육의 영역에서 해결을 보아야 바람직할, 금기를 위반하는 일베적 짜릿함을 대통령이 이러한 퍼포먼스로 직접 회수해 버린 것이 온전히 정당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나(....) 이것은 뼈 있는 농담 정도로 해 두고 어찌되었든 그렇다.
금기의 존재 자체, 혹은 그 금기를 적극적으로 이식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술한 내용들을 감안할 때, 그러한 금기에 대한 충분한 이유 없는 위반은 더욱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비극이나 사회적 약자집단의 존재와 결부되어 형성된 금기를 일부러 위반하는 일베적 짜릿함은 물론이고, 이번 사건에서 내가 추측하듯이 금기인 줄 모르고 위반했다가 비판받을 때 가지게 되는 억울함 역시 그 존재는 인정받되, 잘 관리되고 교육되어야 할 감정들이다. 그러한 감정들을 갖는 것에 대한 지적, 인간적인 이해는 필요하지만 지탄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맷집 있는' 사회는 금기가 일방적으로 위반되어도 문제삼을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금기에 대한 감수성이 높고 그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정교하게 위반될 때에 다들 괜찮아하는 사회이다.
의정부고의 재미있는 전통은 이렇듯 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면이 있어 늘 우려가 된다. 요구되는 책임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큰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좋은 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금기인 줄 몰랐다면 문제가 되었을 때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반발하기보다는 그 문제성을 인지하면 되며(꼭 학생들 얘기가 아니라, 이 논란을 접하는 외부인들의 반응 얘기다), 이왕 할 거라면 사진이 촬영되고 퍼지기 이전에 교사들이 그러한 교육의 역할을 잘 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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