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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일요일

가능성의 틈을 발견하기: 창의적 상상력과 지적 자제력 사이에서

 내 기준에서 그냥 그 자체로 담백하게 받아들일 만한 무언가에 과도하게(?) 매료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있었다. 예컨대 물리에서의 수학적 도구 같은 것이나, 인문사회학적 개념어 같은 것. 대화할 때 종종 부담스럽거나 오글거렸고, 지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지식을 생산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파괴력있는 뭔가를 내놓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주로 기술창업이나 예술 쪽에서 그랬지만 공부하는 쪽에서도 몇번 봤었다. 뭔가 사고에 제한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상상하면서도, 어떤 형태로 갖다써야 말이 될지에 대한 고민은 놓지 않고 집요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그 결과로 나온 것들도 위에서 말한 오글거림은 줄어들고 상당히 멋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어떤 것에 강하게 매료되면, 그런 사고의 흐름 자체가 두려워서 가능한 한 억압하고 보는 편인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매료됐었는지, 과연 그럴 만한 것이었는지 계속 생각해 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 된다는 식의 사고흐름은 발달했는데, 상상력과 창의력의 측면에서는 놓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결국 집요하게 가능성의 틈을 발견하는 건 후자의 측면일텐데, 생각의 리미터를 좀더 유연하게, 필요에 따라 조였다 풀었다 할 줄 알아야 의미있는 걸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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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7일 금요일

검찰의 판사 세평 수집: 정확히 왜 문제인가?

판사 세평 등을 수집한 검찰 문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


어제 글에서는 전례 없는 상황에 이 사안이 얽혀 버려서 함부로 무슨 말을 못 하겠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하느라, 정작 이게 정확히 왜 부적절한지 의견을 충분히 쓰지 못했다. 어제 하루 동안 여러 사람들과 생각 나눈 것을 바탕으로 이를 좀더 보충해 본다.

<목차>
- 대학 동아리의 가상사례
- 학교 시험 족보의 사례
- 검찰에 대한 일반론
- 심층진단
- 국정원의 사례: '안 들켰어야지'로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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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름 공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익혀 봤던 몇 안 되는 계기가 그나마 대학교 동아리여서 그 쪽 예시를 먼저 들고자 한다. 만약 동아리 연합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동아리가 동연 집행부 사람들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 같은 것을 알아냈다고 치자.

이를 사석에서 서로 슬쩍 귀띔하는 것이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동아리 내부 회의 자리에서 나온다거나, 아예 문서로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 된다. 신청서의 내용과 평가 항목 등 절차에 따른 심사가 엄연히 있는데, 편법적으로 지원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지원금이라는 것은 용돈 같은 게 아니라 공적인 목적으로 마련돼 있는 돈이다. 동아리 외부인이 볼 것이 걱정된다는 보신적(?) 이유에서라도, 지원금을 얻으려는 준비과정에서 그런 발언이나 문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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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일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비유로 드는 건 학교 시험 족보이다. 왜 그런가 봤더니 해당 문건을 작성한 검사 본인이 그 비유를 든 것 같더라. 내가 족보에 대해 들었던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 어떤 과에서 특정 동아리 안에서만 족보 물려주는 게 문제가 되자, 과 학생회 차원에서 그걸 입수해서 모두에게 뿌린 것이다. (아마 우리 학교 얘기였던 거 같은데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이건 그 과 내에서만 본다면 분명히 일종의 정의구현(?)처럼 보이며, 실제로 인맥을 무력화한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학생회가 충실하게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원칙적으로 보자면, 학과 바깥의 제3자가 볼 때 족보라는 게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일 수 있고, 그걸 문제삼으면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게 맞다.

게다가 족보 덕분에 다들 학점이 잘 나오면(어차피 대부분 학교가 상대평가긴 할텐데 그런 디테일은 잠시 접어두고), 그 과 사람들은 다른학교 동일 계열보다 취업 등에서 유리해질 것이다. 위에서 말한 동아리 지원금이랑 비슷하게, 교육과 적절한 평가를 통해 신뢰할 만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대학교의 존재 의의를 침해해 가면서,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지 않고 높은 성적이라는 이득을 편법적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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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는 동연한테 지원금을 받는 입장이고, 학생들은 교수님들에게 평가를 받는 입장이어서 비대칭성이 꽤나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문건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이런 '없어야 하는 문건', 정상적 절차 외적인 이익을 의도하는 문건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가 공권력인 검찰이라면, 문제는 더 커진다.

그러나 공권력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 단순히 힘이 세서 그런 거면 결국 제대로 된 기준이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검찰조직에 대한 일반론으로 돌아가자. (1)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며 사법부와는 삼권분립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또한 (2) 검찰이 하는 일은 증거와 법리를 검토해 가며 재판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 검찰 조직의 존재 목적도 엄밀하게 따지면 '검사들이 재판에서 이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올바르게 구현해서 국민 일반의 법익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건 좀 전체론적인(?) 시각이고, 검찰과 그 구성원 입장에서 실질적으로는 '재판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고, 이런 목적성을 인정하되 그걸 공익에 복무시키기 위해 삼권분립을 필두로 여러 견제장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목적의 균형'이라고 내 맘대로 부르겠다. 그러나 때로는 검찰이 그런 목적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도 하다 보니 꾸준히 문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 그런 문건을 생산하는 건 위의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법리와 증거가 아닌, 법관 성향 등을 참고해 가며 재판에 임한다면 재판에 임하는 태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이는 위에서 말한 '목적의 균형'을 명백하게 깬다.

물론 판사의 재판 스타일 같은 자료는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그 영향이 제한적이겠지만, 공권력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유죄 나오기 어려운 사건이라면 검찰이 기소를 안 하는 게 보통이겠으나, 만약 기소한 뒤 자신들이 파악한 법관의 정보를 특정한 방향으로 활용해서 무리하게 결과를 낸다면 재판 당사자들의 법익이 침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석 대화 내지는 개인 메모 같은 데에나 들어갈 얘기들이, 추미애 장관 칼자루에 걸릴 형태의 문건으로 돌고 있으며 그게 총장 선에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용납되는 상황이었다면 이는 분명한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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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안 걸리면 끝'인 건가? 사석에서는 무한정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건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 사실 이 문제가 미묘한데, 이걸 생각해 보기 위해 국정원의 예시를 가져오자.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은 스파이를 잡거나 외교안보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때때로는 초법적인 수단이나, 바깥에 드러났을 때 문제가 될만한 수단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짐작만 할 뿐이다. 여하간 그런 게 우연히 드러났을 때 어떨 때는 감시 주체들이 용납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반면에, 어떨 때는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인터넷 덧글작업이나 검색어조작 같은 국내 정치공작이야 당연히 하면 안되는 거지만(나는 아직까지도 원세훈 시절 국정원이 잘못한 것들이 국민들한테 충분히 안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짜 대외안보를 위해 하던 것들도 밖에 드러나서 문제가 될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쨌든 음침한 수단을 동원한 그 정도만큼 까이게 돼 있고, 털리고 넘어가야 하는 구조다.

하물며 검찰은 어떤가? 검찰의 경우 산업스파이도 간첩도 아닌 일반 사회구성원들이 많이 얽혀 있는데, 목적 달성을 위해 정석적인 절차의 바깥에 있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은 결코 떳떳한 게 아니다. 버젓이 문건으로 있는 상황과, 오래된 관행이라는 해명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물론 그 문건이 존재하는 게, 정보기관들이 때때로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음침한 수단들에 비할 만큼 심각한 일이냐 하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원론적으로는 성격이 통해 있는거고, 얼마든지 더욱 심각하게 흘러갈 수도 있으므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정글과 같은 국제사회가 아니라 한국 내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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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에, 하필 지금처럼 전례 없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상황에서 이 사안이 튀어나오면서 근거로 쓰이는 바람에 오히려 이런 식의 얘기들이 그 의도를 의심받고,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쉽다. 지난 글에서 그 어느 쪽한테도 인기 없을 거 같아서 슬프다 한 것도 그런 이유이고 말이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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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6일 목요일

검찰의 판사 세평 수집: 현 갈등국면과는 별개로 짚고 넘어가야

법무장관이 이유야 어떻든 검찰총장을 공격하는 방향성 하에 인사, 감찰 등등 해온거야 명백하고, 직무정지 사유 중 몇 가지는 궁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찾아보고 생각해 볼수록 소위 법관 사찰이라고 하는, 판사들 성향 자료 모았다는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만약에 총장이 적극적으로 한 게 아니라 검찰이 원래 해 오던 관성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파국적으로 되어 버린 지금의 국면에서 검찰총장 팔다리 자르기 위한 하나의 카드 정도로 언론 등에서 다뤄지고 말 것 같은데 이 점이 오히려 유감스러울 만큼, 검찰개혁의 원관념(?)과 닿아있고 공익적(?)으로 무척 중요한 사안같아보임.

검찰도 결국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 하는 건데 조직 내부에서 통용되는 암묵지 같은 것이야 아예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검찰이 분명한 공권력 행사의 주체인 만큼, 법관들 성향을 참고삼아서 전략을 짤 수 있도록 파악해둔 문서가 존재하고 유통되는 것은 법관들이 위협적으로 느낄 수 있고, 나아가 재판 당사자들의 법익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그런 문건 자체가 존재하면 안되는 성격의 문건이다. 게다가 문제가 된 그 특정 문건의 경우는 생산과정 중 일부가 양승태 대법원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는지라.... 만약 검찰이 관행처럼 해오던 것의 연장선이라면, 검찰총장이 컷하고 끊어내는 것이 원칙상 맞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전달을 지시한것은 분명 잘못된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부적절한 관행의 대표사례인, 수사정보가 언론에 흘려지는 것도 그동안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지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검찰개혁 기치가 무색해졌다는 여론에 있어서 원론적인 무한책임 이상으로 정부여당이 실질 책임이 있다고 보는 편이다. 해석이야 어떻든, 일단 검찰개혁의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 전방위적 검찰수사의 당사자가 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상술했듯 검찰이 기계가 아닌만큼 그 수사에 어떠한 의도와 판단도 작용 안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문제되는 사안들이 지나치게 많았는데 임명이 강행된 점이 있고 부적절한 옹호 역시 많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때의 극단적인 국론분열이 정치쟁점화되면서 검찰개혁의 내용에 대한 갑론을박이 실종된 게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봐야겠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식의, 검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정말로 중요한 이슈가 묻히는 것 같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도 그 내용이 어렵다보니, 여러모로 직관에 소구하는 자극적인 면이 많았던 박근혜 청와대 내부 일들에 비해 관심을 못 받았었다. 이번에도 하나하나씩 고쳐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 지나치게 비장하게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면서 오히려 설득이 덜 되는 느낌이 있다.

물론 검찰쪽의 반발이 극심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을테다. 확실히 전형적 공무원 집단과 다른 검찰 특유의 문화라는게 있기는 한 것 같고, 그것이 검찰 본연의 역할과 소위 화학적 결합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에 필요한 것과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논쟁은 필요하겠다.

쓰고 보니 정말 누구에게도 인기 없을 듯한 소리 같아서 슬프긴 한데, 여하간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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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2일 일요일

경계에 선 시민참여 저널리즘: 퇴행인가 대안인가

오마이뉴스가 그 모토에서부터 드러나는, 일반적인 저널리즘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긍정적인 쪽으로 가져갈 수 있으려면 목수정 작가의 이번 글과 같은 기사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고민이 필요할 때다.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전세계적인 화두이고,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인 줄 알았던 음모론이 거시적인 정치세력의 응결핵이 되어 정국을 구체적으로 들었다놨다 하는 시대다.

특정 사건에 대해 정권이 석연치않은 대처를 하면서 사실관계를 불명확하게 만들 때 생겨나는 각종 의심들 중에서 음모론이 섞여 들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헛발질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구태여 발굴해서 조롱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나를 포함한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사안에 대해 이미 프랑스 현지에서도 거짓임이 확인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걸러내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일반 언론과 차별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퇴행적인 것에 불과하다. 설령 좌파적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하더라도 극우 음모론과 그다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물론 기성 언론에서도 교묘한 왜곡보도와, 사실확인이 안된 채로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보도를 통해 공익을 해치곤 하며 이런 저널리즘 역시 문제적이다. 그러나 가짜뉴스 및 음모론의 생산기제는 아직까진 그런 것들과 나름대로 구별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마이뉴스의 특별한 저널리즘은 독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면서 그런 최후의 경계마저 흐릴 것인가? 아니면 정형화된 언어 속에 프레임을 숨겨두는 행태에서 벗어난 담백하고 개성있는 저널리즘을 통해 성공적인 대안으로 꾸준히 기능할것인가? 앞으로는 후자와 같은 날카로운 시각의 기사를 더 많이 보게 되기를 바란다.

(Facebook 페이지 '오하이오의 낚시꾼'의 게시물(링크)을 공유하며 추가한 코멘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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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4일 토요일

여기는 종교법정이 아닌 세속법정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대체복무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 헌법불합치라는 헌재 판결이 이뤄졌고 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대체역도 신설되어 2020년 10월부로 첫 소집되었다. 그러나 진행중인 병역거부 사건들에서 신념의 진정성을 다툴 때 검찰이 사용하는 주된 논리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잘 부합하지 못하며, 병역거부자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 인식 역시 헌재 판결 이전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 논리의 저변에는 특유의 어떤 관점이 깔려있다. 그 정체를 논하기 위해 아래에서는 병역거부자의 신념을 종교에 비유하여, 검찰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마치 세속재판이 아닌 종교재판처럼 임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이는 단순 편의상의 비유이며, 양심적 병역거부는 근본적으로 특정 종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신념, 단순 보이콧 등 무엇에 의해서도 될 수 있어야 함을 미리 밝혀둔다.

또한, '현역 입영자들이 비양심적인 것인가?'라는 흔한 반발은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는 양심의 자유에 따른 병역거부를 *남들보다 양심적이어서 하는 병역거부*로 혼동해서 일어나는 단순오류이며, 헌재 결정요지문 본문에도 무려 맨 처음 단락에 이 내용이 설명되어있다. 이전에도 밝혔듯 양심적 병역거부의 반댓말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이 아닌 '양심적 병역이행' 정도로 보아야 한다. 물론 제도의 취지를 착각해서가 아니라 거부자들의 신념을 선민의식이라고 판단해서 위와 같이 반발할 수도 있으나, 그 경우에도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므로 해소 방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검찰이 사용하는 논리의 두 개 축 중 첫번째는 FPS 게임 하지 않았냐는 것으로 대표되는, 신념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증거의 발견이다. 병역거부에 대한 기본적인 여론도 좋지 않은데다 이런 경우는 '선택적 양심발휘'이라는 조롱섞인 비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논리는 직관에의 소구가 굉장히 강력하고 병역거부자 개인을 숭고하지 않은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신앙심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탄에 따른 소위 '나이롱 신자' 걸러내기에 해당한다. 인품과 생활양식에 대한 이러한 판단이 병역거부의 유무죄를 가르는 세속법정에서 핵심쟁점이 될 수는 없다. 거부자 개인 및 그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내적으로 참회할 일일 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신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진술 및 일관된 실천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이 품행과 생활에서의 미비는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하지 않은 한 병역관련 신념의 진정성을 반증하기는 어려우므로, 후술하듯이 이에 대해선 비교적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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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를 대하는 논리의 두번째 축은, 그의 신념 자체가 내적 일관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일관성을 따를 때 그 신념이 유효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최근 읽은 임재성 변호사님의 사례(검사가 피고인에게 군대의 필요성과 평화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쟁하려 함. https://www.facebook.com/jaesung.lim.182/posts/4046959075330964)도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교리논쟁'으로, 비유하자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 만약 있다면 어떤 형태로 있는지를 다투겠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신학자들끼리의 논쟁 혹은 이단심문 같은 종교재판에서 할 일이지, 세속법정에서는 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만약 어떤 신념이 완전히 일관적인데 심지어 현실적으로도 유효하다면, 그런 성공적인 신념체계를 만들어낸 사람은 거의 성인으로 추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렇듯 내가 아는 한 모든 신념은 불완전하며, 철저하게 일관적으로 추구되었을 때 내부 모순이 드러나거나 유효성을 잃는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심문은 근본적으로 그 누구도 통과할 수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 그 양심이 마치 어떤 공표된 학술적 주장인 양 (설령 그렇다고 해도 공권력이 논쟁에 개입하는 건 여전히 이상하긴 한데) 정합성과 유효성을 논쟁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개념 자체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양심 자체는 공권력이 인정하거나 기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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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을 갖고 있다고 해서 현역 징집이라는 강제력에서 예외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이견을 가지고 논해 볼 수 있다(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양심의 자유가 수호된다고 결론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든, 그 논의의 과정은 늘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신념은 행위의 일관성과 합리성 같은 것이 정황적으로, 보충적으로 작용해서 증명하는 것일 뿐 신념의 내용 자체를 둘러싼 논쟁을 핵심쟁점 삼아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근본적으로 신념이라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 강한 의미로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양심의 자유에 있어서 중요하다.

이처럼, 신념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자, 통과!' 해서 대체역으로 갈 수 있는 방식은 양심의 자유라는 가치와 결이 맞지 않다. 따라서 신념의 진정성에 있어서는 신념의 내용 그 자체를 두고 종교재판처럼 다투기보다는, 신념이 드러나는 지속적인 실천의 존재와 진술 등을 중심으로 보면서 비교적 포괄적으로 인정해야한다.

그 대신 대체역을 어떤 평화적 봉사 부문에 투입할지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웬만큼 진정성 있는 신념이 아니면 대체역을 선택하지 않도록 유도하여 병역기피를 예방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단순 징벌적인 것이 아닌 엄연한 공익적 가치에 기여하는 대체복무로 인식되도록 제도운영 및 사회적 인식제고를 해야 한다. 교도소에 근무하도록 한 것도 그 고민의 산물일 것이다. 아무튼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인식이 변하고 그것이 병역거부 판결 및 대체역 제도운영에 반영되려면 사례도 축적되어야 하고,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인 교육과 연수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역이 아닌 현역징집병들의 처우 역시 대폭 개선되고 병역이행이 다변화되어야 한다.

한편, 한동안은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실질적으로는 특정종교 신자들일 것이다. 해당 종교는 병역뿐만 아니라 수혈거부와 같은, 동료 시민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교리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당 종교 신자들만이 현역징집의 합법적인 예외라는 인식(그리고 현실)이 생겨 버리면 이들은 공동체적인 책임을 분담하지 않는 하레디 같은 집단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서두에서 밝혔듯 병역거부는 해당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실제로 외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례를 포함하여 가장 유명한 병역거부자들 중 일부가 이미 비종교적 거부자들이기도 하다.

해당 종교집단의 하레디화를 방지함과 동시에, 모든 병역거부자들이 '다양하면서도 통합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려면, 해당 종교 외에도 위와 같은 다양한 사유의 병역거부가 알려지고 활성화되어야 하며, 특정종교임을 전제해서 관행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도 일부러라도 보편적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비교적 잘 되어있으나 현장에서와 대중적 인식상으로는 아직 미비하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대체역의 원활한 정착을 위해서는 법조영역의 판례 축적 및 인식변화를 중심으로, 사회 각 부문에서의 총체적 노력이 함께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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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3일 금요일

재능과 노력에 관한 소고

별다른 교훈(?)은 없고 재미로 써보는 학창시절 얘기.


중고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누구는 재능이고 누구는 노력파라는 식의 설왕설래가 꽤 있었다. 나는 공교육과 사교육에 널리 걸쳐있는 소위 영재교육(?) 클러스터에 다소 뒤늦게 진입해서 나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아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에 상당히 과몰입하게 된 편이었다.

또한 그런 것들이 사람 성격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문자 그대로 공부 방식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였고, 그땐 그게 나한테 더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특히 더 신경썼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나는 노력파 이미지로 종종 패싱되었는데(특히 중학교 때) 그게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위에 말했듯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할 때 반쯤은 실제 공부 습관에 대한 거였겠지만, 또 반쯤은 평소 성격을 보고 이미지화한 것 아니었겠나. 그런데 성격상 머리속의 착상을 적재적소에 짠 하고 꺼내놓기 어렵다보니(난 이게 의도하든 안 하든 일종의 쇼맨십 같은 면이 있다고 본다), 소위 천재 이미지를 갖는 데 있어 핸디캡을 깔고 가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남들이 아예 모르는 뭔가를 가져와서 풀면 뭔가 대단한 취급을 받기도 했는데, 나는 어머니가 교사셔서 그런지 학교에서는 학교 것만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정석이나 학원 교재 꺼내면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또한 어려운 거 해서 멋있어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고, 내가 하면 위화감이나 조성되고 말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노력파에 씌워져 있는(혹은 나에 대해 내 맘대로 만든 것일 수도 있는) 은근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사실 노력을 안 해도 문제가 풀리면 굳이 노력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천재가 노력파보다 기본적인 우위를 깔고 가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수학문제를 막 애써서 푸는 것보다는, 고민 좀 하다가 한번의 착상으로 간단히 푸는 게 더 멋있어 보이지 않나.

그런데 나는 내가 하는 노력이 흔히 말하는 루틴한 노력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와 재미에 기반해서 지식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공부한 게 노력이라는 단어로 평면적으로 비춰지는 데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사실 순전히 기계적인 노력이라는 게 어디 있겠나. 다들 각자마다의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지식을 처리할 것이다. 고등학생쯤 되고 공부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그런 각자마다의 처리방식을 자연스레 들어보고, 배우기도 하면서 이런 종류의 생각은 조금씩 해소되어 갔다. 또한 내가 꼭 우직한 노력파로만 보이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적분 같은 교과과정 수학과 달리 기하니 정수니 하는 경시수학은 아무리 해봐도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걸 잘 하는 친구들을 보면 진짜 머리가 좋은 게 있긴 하구나 싶기도 했다. 필요한 도구를 차근차근 익혔으면 좀더 잘 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그래도 못 했을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뭐 내가 더 하기 싫어서 안했으니 미련은 없다.

요약하자면 재능이니 노력이니 하는 남들의 잣대가 평면적이라고 생각해서 불만을 가졌지만, 사실은 반대로 내가 가진 관점이 평면적이었기 때문에 안 가져도 될 불만을 가졌던 게 아닐까 한다. 총체적으로 보고 대범하게 생각하면 좋을 텐데 시야가 좁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학에 오고 나서도 내가 범접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무척 비범한 성과, 혹은 아예 몰랐던 카테고리의 성과를 발견하면 위와 같은 사고방식이 발동돼서 종종 큰 부러움이 생기곤 했다. 그런데 그 부러움을 촉발한 사람과 운좋게 가까워지고 얘기를 많이 듣다 보면, 아 저게 어떤 종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거구나, 얼만큼 시간투자를 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이해가 되면서 비로소 그 사람이 좀 사람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여러번 겪은 게 나한테 꽤 많은 도움이 됐고, 가끔씩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발을 딛어 보기도 했다.

여튼 이런 과정을 통해 실력이라는 것의 정체를 무협지스러운 과몰입에서 약간은 벗어나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터넷이나 SNS 등에서 오가는 지능에 대한 설왕설래를 보면서 느껴지는 오글거림도, 사실 그것들에서 나한테 깊이 자리잡은 사고방식이 거울처럼 비춰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꼭 과거의 일만도 아닌 게, 매력적인 지적 성과물을 볼 때 그러한 사고방식이 다시 작동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다. 이러한 쪼잔한 과몰입과, 지식추구에 대한 자의식 과잉이 공부하는 동력에 있어 한가지 축을 이루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이를 잘 통제해 가면서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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