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세평 등을 수집한 검찰 문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
어제 글에서는 전례 없는 상황에 이 사안이 얽혀 버려서 함부로 무슨 말을 못 하겠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하느라, 정작 이게 정확히 왜 부적절한지 의견을 충분히 쓰지 못했다. 어제 하루 동안 여러 사람들과 생각 나눈 것을 바탕으로 이를 좀더 보충해 본다.
<목차>
- 대학 동아리의 가상사례
- 학교 시험 족보의 사례
- 검찰에 대한 일반론
- 심층진단
- 국정원의 사례: '안 들켰어야지'로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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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름 공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익혀 봤던 몇 안 되는 계기가 그나마 대학교 동아리여서 그 쪽 예시를 먼저 들고자 한다. 만약 동아리 연합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동아리가 동연 집행부 사람들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 같은 것을 알아냈다고 치자.
이를 사석에서 서로 슬쩍 귀띔하는 것이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동아리 내부 회의 자리에서 나온다거나, 아예 문서로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 된다. 신청서의 내용과 평가 항목 등 절차에 따른 심사가 엄연히 있는데, 편법적으로 지원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지원금이라는 것은 용돈 같은 게 아니라 공적인 목적으로 마련돼 있는 돈이다. 동아리 외부인이 볼 것이 걱정된다는 보신적(?) 이유에서라도, 지원금을 얻으려는 준비과정에서 그런 발언이나 문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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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일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비유로 드는 건 학교 시험 족보이다. 왜 그런가 봤더니 해당 문건을 작성한 검사 본인이 그 비유를 든 것 같더라. 내가 족보에 대해 들었던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 어떤 과에서 특정 동아리 안에서만 족보 물려주는 게 문제가 되자, 과 학생회 차원에서 그걸 입수해서 모두에게 뿌린 것이다. (아마 우리 학교 얘기였던 거 같은데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이건 그 과 내에서만 본다면 분명히 일종의 정의구현(?)처럼 보이며, 실제로 인맥을 무력화한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학생회가 충실하게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원칙적으로 보자면, 학과 바깥의 제3자가 볼 때 족보라는 게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일 수 있고, 그걸 문제삼으면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게 맞다.
게다가 족보 덕분에 다들 학점이 잘 나오면(어차피 대부분 학교가 상대평가긴 할텐데 그런 디테일은 잠시 접어두고), 그 과 사람들은 다른학교 동일 계열보다 취업 등에서 유리해질 것이다. 위에서 말한 동아리 지원금이랑 비슷하게, 교육과 적절한 평가를 통해 신뢰할 만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대학교의 존재 의의를 침해해 가면서,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지 않고 높은 성적이라는 이득을 편법적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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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는 동연한테 지원금을 받는 입장이고, 학생들은 교수님들에게 평가를 받는 입장이어서 비대칭성이 꽤나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문건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이런 '없어야 하는 문건', 정상적 절차 외적인 이익을 의도하는 문건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가 공권력인 검찰이라면, 문제는 더 커진다.
그러나 공권력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 단순히 힘이 세서 그런 거면 결국 제대로 된 기준이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검찰조직에 대한 일반론으로 돌아가자. (1)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며 사법부와는 삼권분립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또한 (2) 검찰이 하는 일은 증거와 법리를 검토해 가며 재판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 검찰 조직의 존재 목적도 엄밀하게 따지면 '검사들이 재판에서 이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올바르게 구현해서 국민 일반의 법익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건 좀 전체론적인(?) 시각이고, 검찰과 그 구성원 입장에서 실질적으로는 '재판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고, 이런 목적성을 인정하되 그걸 공익에 복무시키기 위해 삼권분립을 필두로 여러 견제장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목적의 균형'이라고 내 맘대로 부르겠다. 그러나 때로는 검찰이 그런 목적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도 하다 보니 꾸준히 문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 그런 문건을 생산하는 건 위의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법리와 증거가 아닌, 법관 성향 등을 참고해 가며 재판에 임한다면 재판에 임하는 태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이는 위에서 말한 '목적의 균형'을 명백하게 깬다.
물론 판사의 재판 스타일 같은 자료는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그 영향이 제한적이겠지만, 공권력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유죄 나오기 어려운 사건이라면 검찰이 기소를 안 하는 게 보통이겠으나, 만약 기소한 뒤 자신들이 파악한 법관의 정보를 특정한 방향으로 활용해서 무리하게 결과를 낸다면 재판 당사자들의 법익이 침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석 대화 내지는 개인 메모 같은 데에나 들어갈 얘기들이, 추미애 장관 칼자루에 걸릴 형태의 문건으로 돌고 있으며 그게 총장 선에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용납되는 상황이었다면 이는 분명한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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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안 걸리면 끝'인 건가? 사석에서는 무한정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건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 사실 이 문제가 미묘한데, 이걸 생각해 보기 위해 국정원의 예시를 가져오자.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은 스파이를 잡거나 외교안보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때때로는 초법적인 수단이나, 바깥에 드러났을 때 문제가 될만한 수단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짐작만 할 뿐이다. 여하간 그런 게 우연히 드러났을 때 어떨 때는 감시 주체들이 용납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반면에, 어떨 때는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인터넷 덧글작업이나 검색어조작 같은 국내 정치공작이야 당연히 하면 안되는 거지만(나는 아직까지도 원세훈 시절 국정원이 잘못한 것들이 국민들한테 충분히 안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짜 대외안보를 위해 하던 것들도 밖에 드러나서 문제가 될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쨌든 음침한 수단을 동원한 그 정도만큼 까이게 돼 있고, 털리고 넘어가야 하는 구조다.
하물며 검찰은 어떤가? 검찰의 경우 산업스파이도 간첩도 아닌 일반 사회구성원들이 많이 얽혀 있는데, 목적 달성을 위해 정석적인 절차의 바깥에 있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은 결코 떳떳한 게 아니다. 버젓이 문건으로 있는 상황과, 오래된 관행이라는 해명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물론 그 문건이 존재하는 게, 정보기관들이 때때로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음침한 수단들에 비할 만큼 심각한 일이냐 하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원론적으로는 성격이 통해 있는거고, 얼마든지 더욱 심각하게 흘러갈 수도 있으므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정글과 같은 국제사회가 아니라 한국 내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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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에, 하필 지금처럼 전례 없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상황에서 이 사안이 튀어나오면서 근거로 쓰이는 바람에 오히려 이런 식의 얘기들이 그 의도를 의심받고,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쉽다. 지난 글에서 그 어느 쪽한테도 인기 없을 거 같아서 슬프다 한 것도 그런 이유이고 말이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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