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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도서 소개]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 - 다슌 왕,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우리 비평형 통계물리 분야의 옆집인 복잡계 물리학 분야에서 이번에 교양서 번역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공유해 봅니다.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 다슌 왕,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이은, 노다해 옮김, 도서출판 이김(2023).

도서 링크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0778375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은 이 책의 제목이면서, 저자인 Dashun Wang이 연구하는 '분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학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광의의 메타과학 내지는 과학학으로서 과학인문학(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사회학)과 공통점이 많이 있으나, 과학 활동을 분석하기 위해서 인문사회학이 아니라 네트워크 과학을 필두로 한 복잡계 과학 및 데이터 사이언스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인문학과도 방법론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h-index 등을 비롯한 과학 연구 실적지표를 제안하고 개발하는 '과학계량학(scientometrics)'과는 어떤 관계일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저자인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Reka Albert, 정하웅 교수님과 함께 인터넷 연결망의 구조 분석, 신진대사 네트워크 분석 등으로 scale-free network라는 개념을 데뷔시킨, 네트워크 이론 및 복잡계 물리학 분야의 거장이기도 합니다.

주로 네트워크 분석 방법으로 사회 동역학과 다양한 사회현상을 연구하시는 이은 교수님과, 역시 네트워크이론 전공으로 과학대중화 및 커뮤니케이션에 힘쓰고 계시는 노다해 선생님이 번역을 했습니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 제너럴한 독자뿐만 아니라 과학을 업으로 삼는 연구자들이 얻어갈수 있는 팁들도 많이 있다고 하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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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미래지향적 연금제도를 바란다: 국가 체질변화의 총체적 과도기를 앞두고

연금개혁은 하기는 해야 한다. 방향성을 전문가들이 잘 정하긴 하겠지만 꼭 지켜져야 할 것이 있는데, 미래 세대까지 실제로 수혜를 잘 입을 수 있는 쪽으로 개혁이 되어야 할 테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할 얘기가 없으니 나랏일(?) 얘기를 자연스레 하게 될 때가 있는데, 얘기해 보면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는 이상 딱 우리 세대쯤부터 국민연금을 내기만 하고 노후에 못 받지 않냐고, 너무 아까운거 같다고 기정 사실화된 분위기가 있다. 이는 근거 없이 팽배한 불신이 아니고 심지어 국민연금 측에서도 공식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금제도는 나라가 다 책임을 지고 운용하는 건데 설마 고갈이 되겠냐고, 그럴 일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앞으로 인구문제와 지방소멸, 산업경쟁력 상실을 포함해서 국가 성장이 총체적으로 꺾이게 될,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총체적 과도기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주장인 듯하다.


여러가지 커다란 문제를 애매하게 타협적으로 끌고 가지 말고, 인식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조기에 확실하게 방향을 정해서 개혁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이민정책이나 가족제도 같은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못하면 나라에 하나둘씩 구멍이 날 수 있고, 또 그게 이미 예정되어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아무튼 국민연금이라는 것에 대해 좀 알아보니, 국민들한테 믿음을 주고 가입률을 높게 유지해야 실제로 나중에도 다들 잘 받을 수 있고, 다들 못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입률이 떨어지면 실제로도 받기 어렵게 되는 구조가 있는 것 같다. 물론 표준에 가깝게 받아들여지는 노동의 형태이며 실제 생산가능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근로소득자의 경우 애초에 의무가입이기도 하니, 여건 변화에 따라 납부율과 소득대체율을 잘 조절하는 지혜가 훨씬 중요하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지속가능하게 유지가 된다면야 내가 지금 내는 돈을 내가 미래에 받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가 낸 돈은 윗세대에 가고 나는 미래 세대가 낸 돈으로 수혜를 입는 구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한다면 연금제도가 대체로 잘 작동할 것이므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데, 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들면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정말 커지게 된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나라가 마주하고 있는 망국적 저출생에 의한 인구 감소가 크리티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이다.


여하간 우리 세대부터는 나라가 제공하는 여러 사회보장 제도나 안전 및 건강 환경이 지금처럼 계속 그럭저럭 돌아갈 거라는 근거없는 신뢰를 접고, 여러가지 리스크들 (그리고 이미 예정된 문제들) 을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우리보다 더 미래 세대에게는 어떻게든 변화한 상황에 맞는 국민 인식의 변화와 제도적 체질개선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세대야말로 그야말로 과도기이다 보니, 나라가 처음으로 겪는 총체적 체질 변화를 아무 안전장치 없이 정면으로 맞아서 정말 힘든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왜 하필 나라가 고점을 찍고 성장세가 꺾일 때 태어났는가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근본적 불안감을 다른 세대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어느 쪽으로든 확실하게 방향을 정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예정되어 있는 문제들을 우리 세대 중심으로 직접 미리미리 제기하지 않는 한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국민연금은 근로소득자만 의무 가입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생 신분인 나도 임의가입 형태로 가입을 할 수는 있고 주변에서도 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개혁의 방향이나 강도가 어떻게 되는지 좀 더 지켜보고 정하려고 한다. 다만 어차피 가입할 거라면 일찍 가입해 둘수록 나쁠 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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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심리 해킹을 경계하라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1)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감정 소모와는 별개로 정신세계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건드려질 일은 잘 없고, 설령 건드리더라도 거기에는 피차 아주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불완전하고 얕은 면모와, 심연같고 신비로운 면모를 다들 피차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테다.

근데 만약에 그리 친밀하지 않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내밀한 부분이 사정없이 건드려지는 느낌이 든다면, 혹은 지나치게 고양되거나 푹 빠지는 기분이 든다면 (상대방이 의도했든 아니든) 사실은 상당히 무례한 일을 당하고 있는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대화를 통해 뭔가 인간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 특별한 시각을 체험했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걸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잘 디자인된 허풍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진짜로 우리네 심리구조의 어떤 의미있는 영역을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사람 사이에서 그게 굳이 끄집어내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며... 만약 그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례한 악취미라고 생각해 버려도 크게 나쁠 게 없는 듯.


꼭 의도하지 않더라도, 대화하는 질감이 남들과 약간 다른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뭔가 남다르고 깊은 게 있다거나, 상대방을 꿰뚫어본다는 느낌을 주기가 쉽고, 말을 하는 본인까지 이것을 자각해서 활용하다 보면 위처럼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렇게 언변이 지나치게 좋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발언이나 그럴듯한 거짓말 같은 걸 일삼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해킹하기에 용이하게끔 타고난, 혹은 어디서 배운 몇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적인 사기를 기획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도 결국 믿음의 영역을 건드려서 해킹하는 것이다 보니 사이비종교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일테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을 꿰뚫어볼줄 아는 것'이나, '사람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식의 말들을 확실한 컨텐츠 없이 모호하게 강조하면서 중요시하는 사람들, 혹은 인간의 내밀한 심리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타인한테든 자신한테든 그러한 영역을 심오한 것인 양 뜯어보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바로 그러한 관심사 때문에 사기나 컬트에 매우 취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그런 영역까지 건드릴 일이 없다는걸 기억하고, 사적으로 잘 관리하면서 자기 할 일을 잘 하면 되는 것 같다. 사적이라는 게 꼭 혼자 힘으로 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건 공부든 예술이든 체육이든 자기 할일을 잘 하는 능력과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나이를 먹다 보면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 혹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과 지내면서 물러지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잘 파고드는 사람을 주변에 계속 두고 있다 보면 하나둘씩 그리 권할 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되는 듯하다.

근데 그러면서도 자기 하는 일의 영역에서는 변함없이 멀쩡하게 잘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남들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혹은 알아채더라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도 하고... 참 어려운 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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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음악 지휘 행위의 흥미로운 점: 비언어적으로 명령화되는 동작적 계기로서

예술활동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요체를 이루는 감각에 대한 기본적 체험조차 해 보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인 것 같다.


물론 지휘라는 것이 오직 지휘현장에서의 손의 움직임만으로 환원되는 건 아니고,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감독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곡 해석을 바탕으로 평소에 단원들과 연습하고 교감하는 것이 아주 많이 작용할테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연 현장에서의 지휘행위에 일단 집중해보기로 한다.


위계 하에서의 협동으로 진행되는 예술활동은 물론 지휘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지휘의 경우는 신체의 동작적 계기와 그 연속적 질감이 단원들에 대한 명령으로서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해서, 단원들에게 언어 이전에 감각의 레벨에서 수용되고, 그 결과가 '연주'라고 하는 피드백 겸 예술실현의 결과로 시시각각 돌아오는데, 이는 다른 예술활동에는 잘 없는 요소인 듯하다.


그 이전에, 이미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들이 누군가의 지휘를 받기 위해 굳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야 하는데, 실제 음악경력을 바탕으로 지휘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럴 일 자체가 없기도 하다. 지휘라는 기회는 이만큼 주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에서의 행동 중에 그나마 지휘와 연관될 수 있는 계기를 굳이 찾아보자면, 다름이 아니라 음악을 청취하면서 박자에 맞게 손과 발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흔드는 등의 행동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행동들, 혹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싶게 되는 심적 경향을 '동작적 계기'라고 부를 수 있겠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경우는 대체로 누구나 예측 가능하게 레귤러한 박자로 연주를 이어가지만, 가끔가다가 그러지 않고 점점 빨라지거나 느려질 때, 혹은 갑자기 연주를 중단하거나('잡는다'고 종종 표현됨), 모든 악기가 다같이 한번에 긁어서 청자의 집중을 유도할('깬다'고 종종 표현됨) 때, 그 곡에 대해 청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해석을 바탕으로 그 순간을 올바르게 '맞추게' 되면, 특히 그것을 동작적 계기와 성공적으로 연결짓게 되면 이는 청자에게 상당한 쾌감을 유발하게 된다. 물론 레귤러한 박자에 맞게 신체를 움직이는 것 자체도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작적 계기가 오케스트라 지휘에 있어서도 기초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다만 지휘는 위의 예시와 달리, 청자와는 무관하게 이미 잘 연주되고 있는 곡을 동작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서, 이미 대략적인 얼개가 정해진 연주들에 동작적 계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개입해서 세부적 질감을 조직해 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게 지휘 행위와 비슷한 일을 해 볼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위의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기술매체의 발전에 따라, 이렇게 지휘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체험해볼수 있는 반응형 컨텐츠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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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 일요일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 맛집 'Radio Cafe'에 얽힌 역사적, 정치적 이야깃거리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Jagiellonian University,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움 "36th Marian Smoluchowski Symposium"에 참여하기 위해 다녀온 이번 폴란드 출장에서,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단순히 출국 항공편 때문에 들른 거라 저녁에 딱 한 끼 먹을 시간만 있었다. 그런데 바르샤바 중앙역 앞에서 랩 동료가 우연히 찾아서 함께 들어간 식당 'Radio Cafe'가 상당히 역사적, 정치적인 이야깃거리가 많은 장소였다. 이 식당이 국내 인터넷에서 바르샤바 맛집으로는 나름 유명함에도,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인터넷상에 한국어로 소개된 자료가 거의 없는 것 같아 한번 소개해 본다.


이 식당은 바르샤바 중앙역 역전앞에서 큰길을 건너면 바로 있는데,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달리 우리가 앉은 자리 옆에 푸틴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길래 범상치 않은 식당이구나, 그리고 폴란드 사람들도 현재의 러시아를 커다란 위협으로 느끼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잠깐 건네주는 읽을거리를 보니 이 식당에는 과연 그럴 만한, 그러나 일반론을 넘어선 훨씬 구체적인 배경이 있었다.




RFE(Radio Free Europe)이라고 해서 마치 한국의 대북방송처럼, 서구권 국가들이 냉전시기에 동구권에 송출했던 선전 방송이 있는데, 우리가 들른 식당 Radio Cafe가 다름이 아니라 RFE의 전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폴란드에서 나중에 대통령을 하게 되는 레흐 바웬사도 이 RFE를 들으면서 국제적 대립과 동구권이 놓인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기자를 하실 적에 젊은 시절의 바웬사와 직접 인터뷰를 하셨다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때쯤이 아닐까 한다).


이 식당은 바르샤바의 대학생들과, 최근에 이주해온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주로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RFE 직원들이라는 배경에 의해 형성된 그들의 사회적, 국제정치적 신념을 실천하는 나름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진의 일러스트에서도 보이듯이,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우리가 뚫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지금의 푸틴도 갈수록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하고 전면전까지 일으키면서 주변국들과 서구사회를 위협하고 있기에, 이들에게는 과거의 소련 혹은 그 이상으로 대단히 경계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는 듯했다.

이렇듯 정치적 요소가 있었지만 손님한테 부담을 주는 부분은 없었고 전반적인 음식 맛과 식당 분위기는 정말 훌륭했다. 특히 비록 메인메뉴 나오기 전의 에피타이저 같은 거였긴 하지만, 서양권 문학에서 가족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종종 등장하는 따뜻한 닭고기 수프를 여기서 처음 먹어 보았다.

메인메뉴였던 슈니첼도 커다랗고 맛있게 요리되어서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약간 매운맛이 있는 자우어크라우트 (빨간 김치와 비슷한 포지션일텐데 한국인 입장에서는 전혀 맵지 않은 정도) 도 잘 어울렸다.






식당으로 가는 과정에서 본, 바르샤바 중앙역의 역전앞에서 가장 존재감이 큰 두 건물은 바로 삼성과 LG 건물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서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럴 수밖에 없게끔 위치해 있다. 특히 LG 건물에 쓰여진 future is here 라는 문구는 정말 잘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면 소련의 스탈린이 1950년대에 바르샤바에 지어 준, 2020년까지도 폴란드 최고층 건물이었던 문화과학궁전이 있다. 참 웅장한 건물이다.




바르샤바의 복합적인 역사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인상적인 스카이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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