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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초개인화와 정밀의료를 다시 생각한다: HSC의 글 소개

유전자결정론과 정밀의료 등에 대한 세밀하고 재미있는 글이 HSC(health socialist club)에 올라왔다. (최하단에 링크)

한국에서도 유전자 검사를 바탕으로 암을 비롯한 질병 위험군이라고 살벌하게 경고(?)해주는 회사들이 몇 개 있던데, 내가 판단할 능력이야 없지만은 그 중에 꽤 많은 수는 평소 수면, 식이, 술담배 등 생활습관 관리 중요성에 준하는 정도의 실질적인 예측력을 제공하는지 의문인, 다소간에 불안감을 조장하는 서비스들이 아닐까 싶다. 유전학이 인류의 지식발전과 복리 증진에 많이 기여하고 있는 바와 별개로, 유전자에 대한 나노단위 분석과 초개인화를 통해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과 욕망은 과도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으면서도 인간의 유형 및 운명과 관련된 사회적 유행이 크게 발달해있고, 사람들간에 우열과 급을 나누는 사고가 강한 편이면서도 유전자결정론 및 우생학이 사회 전면에서 문제를 일으킨 경험은 적기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 사회적 경각심이 낮을 수 있다. 생물학 및 의학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 관심을 갖고 경고해주는 목소리들의 존재가 중요할듯하다.

(참고로, 정밀의료precision medicine과 기능의학functional medicine은 유전자 검사를 바탕으로 한 개인화 의료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보일지 모르나 그 지적 배경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오용재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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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HSC 글 인용)
"재밌는 것은 케네디의 주장이 근래 각광을 받고 있는 정밀의료 (Precision Medicine)의 핵심 논리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이다. 개인화 의료 (Personalized Medicine) 혹은 개인 맞춤형 의료라고도 불리는 정밀의료는 개인의 유전적 환경적 요인을 바탕으로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정밀의료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유전자를 정밀 분석해 배아의 질병위험을 예측’ 한다거나 ‘건강 수명 증가를 통한 고령층의 사회진출 확대’ 같은 지금까지의 홍보 문구를 보면 한국사회는 마치 정밀의료를 통해 ‘제2의 우생학’시대를 열어가려는 듯하다."

HSC Facebook에서 게시물 읽기: 링크
HSC Notion에서 게시물 읽기: 링크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과도기성: 기분의 문제, 그러나 오직 기분의 문제만은 아닌 것

이번 부동산규제가 비판받으니까 위선적으로 지방균형 갑자기 다같이 꺼내들고 나온다고 비난하는 플로우가 있다. 그렇지만 예전부터 서울 부동산 중심으로 일원화된 욕망의 구조와 그러한 욕망을 실제로 지탱하는 물적 토대가 한국 사회 최대 문제이자 초저출산의 원인이고 그걸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해온 사람들은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 인스턴트하게 지방균형 얘기를 꺼내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아마도 앞서 말한 사람들과 꼭 동질적인 집단은 아닐 것이다.


구체적인 대책과 방안 없이 무조건 청년들보고 지방에 왜 안가냐고 하는 것도 물론 열받는 일이다. 어제 쓴 글(블로그에서 보기: 링크)에서도 말했듯이, 수도권 부동산만이 최고의 자산이라고 인식이 자리잡혀버린 상황에서 저렇게 말하는건 계급 고착화에 불만을 갖지 말라는 뜻에 다름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서울 아파트 이미 보유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나. 하지만 '그러면 니가 먼저 가라', '너는 서울집 팔고 갈 거냐', '너가 먼저 가라하면 안 갈 거잖아' 이런 식으로 너무 비난만 하는 것 역시 그렇게 생산적인 방향을 향하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저런 말도 사실 지방은 가기 싫은 곳이라는 식의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 않나.

(물론 상대방이 그런 전제를 가진채로 말하고 있을테니 그걸 자기가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수도 있으며, 이 주장도 꽤나 일리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주장을 할때 따옴표를 쳤느냐 안쳤느냐를 서로 헷갈리는 거다. 이런 건 굉장히 피곤한 논쟁이지만 하기는 해야 하며, 말을 조금씩 더 정교하게 하면 약간은 해결될 때도 있다. 이런 것도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할 frustration의 한 예시가 된다.)


지금 지방균형발전을 얘기한다고 왜 민주당 옹호라고 단정하는가? 정부여당이 지방균형 드라이브 걸고 있지를 않은데, 차라리 비판이면 비판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모르겠지만 내 스탠스는 부동산 문제를 기술적 대책이 아닌 근본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계급고착화를 막아야 한다는 것 딱 여기까지다. 물론 실제로 충분한 방안 없이 인스턴트하게 지방균형을 끌고 와서 얘기하는 사람들도 꽤 많기는 한 모양이다. 정치 강성지지층 여론형성 과정에서 의제를 막론하고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의제가 그렇게 소비되면 원래부터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오던 사람들은 오히려 낙담하고 배제되는 경우도 많고 그게 바로 숱한 정책이 실패한 과정임을 알아야한다.

지역균형을 얘기할 때에는 비수도권 도시들이 실제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도록, 무슨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그냥 거기에 양질의 일자리가 있으니까 지방에 가는 것이 되게끔 아주 확실한 지방분산을 해낸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비난에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그걸 절대로 못해낼 거라는 확신, 진지한 추진과제가 절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는 느낌도 있다. 솔직하게 지금까지로 보면 정말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다. 고위직들의 위선도 분명히 지난 몇년간 봤다. 근데 그렇다고 자포자기하고 그걸 안 하면 나라의 미래가 어둡지 않나. 무슨 국민들끼리 누가 먼저 내려갈지 눈치싸움을 시키고 있나. 나라가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밀어주고, 국민들도 진지하게 어떻게 실현시킬지 마음을 모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지방균형발전이라는 것이 꼭 모든 소멸위험지역을 다 살려야 하고 모든 지자체에 인프라와 공공기관 등을 나노 단위로 나눠주자는 주장인 것도 아니다. 꼭 그런 극단적인 전제를 깔고 비난하는 것도 잘 이해가 안 간다. 광역시에 에너지를 집중시켜서 되살리는 것 역시 얼마든지 지방균형발전의 범주에 속한다 (사실 나름 10위권 경제대국인데 제2, 제3도시들에 청년들이 선호하는 대규모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인 것 자체가 정말 가슴아픈 상황이다. 이게 해결되어야 한다). 나노단위의 인프라 분산과 광역시 일자리 되살리는 것은, 동일한 지방균형발전이라는 말로 묶이기 어려울 만큼 크게 다르다. 어쩌면 서울집중과 지방균형발전만큼이나 다를 수도 있다. 나는 전자는 개별적인 경우들에 대해 사회문화적 경제적 가치가 있을 수 있고,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할 문제는 후자에 가깝다고 본다.

이런 것도 결국 시간축 위에서 과거에 벌어진 선후관계와 미래에 벌어질 선후관계를 고려하면서 복합적으로 풀어가야 될 문제를, 지금 현재에 사영시켜서 한번에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frustrating한 메타적 문제다. '실제로' 사태가 시간축 위에서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공간마다 사람마다 동질적이지 않게 전개되어 왔는데, 그 모든 시공간을 거쳐온 우리가 지금 현재 여기서 같은 의제를 놓고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건 굉장히 실제적인 얘기이고 너무 현학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현재로서는 이정도 표현밖에 안 떠오른다.

또 하나의 민감한 얘기를 꺼내자면, 지난 10년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이에 대한 반발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문제, 말하자면 '과도기의 문제'가 어느정도는 작용했다고 본다. 누군가가 어떤 주장을 할 때, 인식변화의 과도기 이전에 머물면서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이후의 패러다임을 어느정도는 인지하거나 전제하면서 말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서로 (그리고 꽤 자주 스스로도) 헷갈리는 게 많다. 전자인 사람이 스스로 후자라고 생각할때 주로 사고가 난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발언의 의도가 아무리 있어도 자기가 서있는 땅이 어디냐에 따라 별로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 되고, 그럴 때 자기 주장을 더 하기보다는 그냥 말을 아끼는게 더 나은 상황도 많다. 게다가 시공간마다, 사람간의 관계마다 변화가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단지 인식상의 문제, 논쟁을 어렵게 만드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도' 손익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특정 쟁점에 있어서 과거에 이득을 본 사람들이 미래에 양보를 하고, 과거에 손해를 본 사람들이 미래에 권익을 찾고자 하는데, 전자의 경우가 반발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한다고 해도 '누가 먼저 할지'로 싸우는 와중에 과거와 미래 양방향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점 또한 부동산문제와 판박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이 시간적으로뿐만 아니라 공간과 사람 사이에도 있다.

부동산이든 젠더 문제든, 물론 그런 시공간적 비균질성을 의식하고 말을 조금씩만 더 정교하게 하면 나아지는 부분이 상당히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결국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지금에 비해 모순이 해결된 최종상태가 무엇인지 모두가 어느정도 알면서도, 역학관계 때문에 '실제로' frustrated되어서 해결의 경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지점들을 단계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강력한 드라이브가 걸려야 하고, 구성원들이 이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위에서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과도기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순이 해결된 (그리고 아마 새로운 모순이 생긴) '미래'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에야 그걸 정말로 과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가 오길 바란다. 이 글조차도 민주당이 욕 먹으니까 말 복잡하게 돌리는 글로 보이는가? 정반대로 해석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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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6일 목요일

부동산: 숫자 너머를 사유하기, 욕망구조의 물적 토대를 전환하기

요 며칠 뉴스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온갖 반응을 보다 보니 부동산에 대해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경제도 잘 모르는데다 부동산을 주식보다도 더 모르고 집 얘기는 아직 멀게 느껴지는 입장이다보니 아래는 틀린 얘기일 가능성도 많은데, 그런 것치고는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그래도 그냥 올려본다. 공부해두어서 나쁠 건 없으니 앞으로 사람들 얘기에 귀를 좀 열고 공부해보려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주식은 '자산의 숫자 값'로서의 양적인 측면 외에 삶의 조건을 질적으로 직접 결정하는 부분은 적다. 그러나 부동산은 전혀 다르다. 부동산은 삶의 터전이기도 하며 거기에는 숫자 그 이상이 있다. 그렇지만 부동산을 생각할때 숫자를 너무 많이 생각해야 하는 비극이 있다.

나는 중국에서 오직 숫자를 생각하면서 벌인 부동산 사업으로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으나 모두 비어있는 기괴한 장면을 짤로 본적이 있다. 사실 과잉 공급된 제조업 생산품들도 가끔씩은 그런 기괴한 느낌을 주지만, 부동산은 하나하나가 워낙 큰 물건들이니 더욱 임팩트가 크다. 부동산 광풍에 너무 숫자만 생각하고 사업을 벌여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 생활숙박시설 등 신개념 부동산들이 뜰때마다 그런 부동산들에 혹했다가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하자물건을 만나는 경우도 늘 발생하는데, 경우는 좀 다르긴 하지만 이런 것도 위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든다. 가령 위례성대로에는 한때 오피스텔 모델하우스가 굉장히 많았다. 붙잡혀서 거기 들어가보면 그 무엇보다 믿음직해야 할 부동산계약과 관련된 장소인데도, 거의 사이비종교 포교와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굉장히 믿음직하지 못하고, 아주 질 낮은 자본이 개입되어 있다는 직감이 든다. 숫자로만 접근해서 주거를 면밀히 생각하지 않고 인스턴트하게 벌이는 사업들인 것이다. 매수자들도 거주뿐 아니라 그런 숫자적 접근에 혹하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장면들이, 현재 한국 부동산에서, 나라가 망하는 원인으로 꼽힐 정도로 심각하게 커져있는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부동산은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아주 느리고 무거운 특수한 자산이고 유동화도 주로 안 되어 있어서 재투자 효과도 아무래도 낮다. 국민 자산의 너무 많은 부분이 무리하게 들어가있고, 그렇게 된 이유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미 보유한 사람과 보유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도 너무나 다르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부동산은 그 얘기만 나와도 사람들을 심란하게 하고 미치게 만든다.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청년들의 분노를, 너네들 어차피 서울집 못사지 않냐는 식으로 조롱해서는 안된다. 기회가 끊기고 자산격차가 고착되는 것은 그러면 옳은 일인가? 수도권 주택 말고도 청년들에게 어느정도 안정감과 상승감을 줄수 있는, 생애주기를 꾸려가는 '평범한' 선택지가 충분히 다원적으로 존재해야한다. 다른 사다리들이 많아야 한다는뜻이다.

전세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도 비슷하다. 자산관리 관점에서 불리하며 비정상적 형태의 주거다라는 주장은 납득되는 부분이 있으나, 위에도 말했듯이 집이 단순히 자산 숫자일 뿐인가? 물론 지나치게 숫자 위주로 생각하게 된 부분이 가슴이 아프지만 그또한 어떤 현상의 결과이다. 이미 경로의존성에 의해서 그러한 주거형태에 매달려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쉽게 얘기할수는 없는것이다.

이거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집 못사겠으면 비싼 월세 내던지, 월세 못 감당하겠으면 밀려나서 다른 지역 가던지 하라는 등의 냉소적이고 조롱섞인 얘기가 참 많이 보인다. 그러지 말고, 경로의존성에 따라 형성되어있는 압력을 해소하고 연착륙을 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대책을 제시해야한다.


부동산을 둘러싼 모순을 해결하고자 할때, 자산격차에 의한 계급 고착화를 어쩔수 없이 인정하자는 소리로 비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도 뭔가 생각을 하다가, 엥 근데 이렇게 되면 계급 고착화를 그냥 인정하자는 얘기가 되네 싶어서 생각하기를 멈추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현재와 같은 주류적 주거 방식과 수도권 초집중 하에서는 빚을 무리하게 내서까지 집을 사는 욕망이 포기된다면 바로 계급 고착화로 갈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건 단순히 '그렇게 비칠까봐 조심스러운', 단순히 말을 정교하게 한다고 설득되고 해결되는 식의, 단순히 아 다르고 어 다른 문제가 아니다.

내 생각에 부동산정책이 장기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부동산을 둘러싼 문제가 해소되려면, 결국에는 국민 다수에게 인지되는 아주 확실한 비수도권 (특히 광역도시권) 일자리 진흥정책이 동반되어야 될 것 같다. 수도권 집 사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밀려나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회사들이 거기 있으니까, 좋은 문화가 거기 있으니까 비수도권 광역도시에 거주하는 형태를 만들어야한다. 이건 기분의 문제, 말로 포장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며 실제로 아주 다르다.


욕망이 모이는 구조의 물적 토대가 되는 이러한 국가의 기본적인 판 자체를 과감히 전환하지 않는한, 규제 풀고 조이고 하는 기술적 부동산 정책은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잘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 보일 정도이다. 서울에 매우 공격적인 공급을 하자는 얘기도 있다. 수요를 만족시킬 공급을 해야 되는것은 당연하나, 공급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막상 공급하고 나면 인구 피라미드에서 이미 박살나서 바꿀수 없게 된 향후 20-30년에 해당하는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된다. 결국 시계열적으로 봐야 하고, 이런 부분은 이민정책의 변화를 통한 국가의 새판짜기와도 병행되면 좋을 것이다.

물론 수도권에서도 직업때문에 실거주하려는 수요 그 자체를 비현실적 꿈이자 무리한 투자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서 접근해서는 안될것이고.


지방 소멸 해결에 대한 상상력을 은퇴자들이 쉬러 가는 공간, 특별한 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가는 공간 정도에 그치지 말고, 생애주기의 허리에서 '아주 많은 수의 평범한 일자리'를 제공할수 있어야 지방이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해묵은 표현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 인식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진보적 문제의식이 있다면 이런 논의가 너무 생애주기설계의 표준적, 중산층적 모델만을 상정한 의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국민 다수가 관심있고 국민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표준 성공 모델의 물적 토대를 재개발하는 것을, 과연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수 있을까?

그리고 상업용 부동산 외에 주택에 대해서도 유동성 확대의 효과를 주는 주택연금 등의 제도를 적극 연구해서 개선하고 홍보해봐야 한다. 부동산에 묶인 그 큰 돈이 실제 쓸 수가 없는 형태이니 재투자와 경제 순환은 안되고, 보유자는 보유자대로 심술이 나서 통계에 잡히는 자산보다 실제 삶의 질이 낮다고 호소하고, 그걸 보는 미보유자는 도대체 저게 무슨 기만적인 말인가 싶은데, 이런 갈등을 완화할 방법이 필요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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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3일 월요일

주류 학계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강단사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내가 알기로는 조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학도들은 역사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은 부분까지 입체적으로 발굴해내려고 노력하면서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높은 가치와 약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체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캡처한 글(아래 이미지)의 후반부에서는, 실록이라는 훌륭한 기록물이 있는데 (아마도 매체나 세간에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등 유명 인물만 조명받는다며 역사학계를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비난이 심하다 아니다를 넘어서 그 구도 자체가 매우 이상하다고 느껴진다. 그 실록 번역과 전산화는 그러면 누가했을까?



실록 번역은 다 되었지만 (물론 더 쉬운 번역 등 접근성 개선은 필요할수 있다), 승정원일기라던가 다른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물들, 중요한 역사인물들의 사상을 담은 서적들의 번역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역사학자들이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관심은 너무 많은데 역사학을 연구할 사람, 그중에서도 연구에 그치지 않고 번역까지 할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강단사학(?)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발산하기보다는 학계에서 어떤 논의와 협동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나도 역사는 정말 잘 모르는 입장이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상술했듯이 '역사학계가 세종과 이순신만을 조명한다'는 식의 구도가 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존에 조명되지 않은 인물 및 사건을 다루거나, 이미 조명된 것이라면 기존의 토대를 계승하면서도 재구축하면서 새로운 측면을 다루어야 논문 감이 되지 않겠나.

꼭 이 글에 대한 얘기는 아닌데, 이 글과 덧글들이 나한테 상기시킨 어떤 다른 주제들, 다른 글들에 대한 얘기도 해보겠다. 문제가 있는 이야기들로 싸움을 먼저 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학계의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것은 왜 늘 강단사학 내지는 식민사관이라는 납작한 표현으로 단순화되고 사악한 기득권이라고 공격당해야 하나? 어디까지 착하게 말해야 하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착하게 말하는 과정에서 마치 동등한 두 입장인 것처럼 오히려 링 위에 올려주는 꼴이 되는 딜레마적 현상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최근에 과학커뮤니케이션 논쟁에서도 약간 시사되는, 과학기술 쪽에서도 어느정도 동감이 되는 이러한 억울함은 궁극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딱히 도움이 안되고 학계가 더 노력해서, 더 착하고 재미있게 말함으로써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계 구성원들에게 메타적인 억울함을 준다.
(애초에 학계라는 게 어느정도의 통용되는 합의는 있지만 대립도 존재하고, 따라서 한통속인 집단도 아니므로 위에서는 안전하게 '학계의 누군가'라고 썼다. 학계를 동질적인 집단으로 간주하거나 이상화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역사라는 게 워낙 민감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주제이다보니, 그런 반감을 필요이상으로 조장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취하거나 심하게는 유사역사학으로 이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것도 사실이고, 정치권에도 상당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도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오로지 학계의 문제점에서 파생된 부산물 내지는 현상으로만 보고 간접적 해결만 기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과도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창조과학 유행의 일차적 책임을 진화론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하지 않은 것에 돌리는 게 맞겠는가 아니면 꽤 많은 기독교 단체들에서 그런 걸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겠는가?

공유한 글에서 언급하는 식민사관이라는 것의 실체(물론 이분이 생각하는 식민사관이라는 것의 외연은 지나치게 넓고 타겟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비판은 바로 위와 같은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근거를 바탕으로 과도한 반감을 적극 조성하는 것은 비판하되, 그런 반감이 호응을 얻는 현상은 면밀하게 분석을 하고 관심을 가져서 보다 세심하고 간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김해시사》나 《전라도 천년사》에 대해서도 굉장히 씁쓸한 이야기들이 있는 모양인데, 나도 이 두 개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던 것인지 기회가 되면 논쟁을 팔로업하며 이해해 보고자 한다.

사실 이 정도로 비난 일변도인 짧은 글, 그것도 딱 후반부 2개 문단 정도를 보고 이렇게 굳이 길게 코멘트를 적는 것이 오히려 위에 썼듯이 '링 위에 올려 주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글 쓴다고 해서 딱히 링 위에 올려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글에 좋아요가 너무나 많고, 이 분 타임라인의 다른 글들을 보니 어쩌다가 나온 말만은 아닌 것 같아서 몇 마디 적는다. 그리고 위에 썼듯이, 딱 이 글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 글이 내게 트리거시킨 여러 다른 글에 대한 기억들을 상기하며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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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9일 목요일

(2025 노벨상) 올해도 상당히 재미있었던 노벨상 시즌

작년 노벨상은 개인적으로 거의 모든 부문이 평년보다 훨씬 인상깊고 재미있었다. 6개 부문 중 내가 제일 문외한인 영역인 경제에서조차 언젠가 받을 것 같다고 이름을 많이 들어 본 Acemoglu가 수상을 했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하필 올해 여름에 스웨덴에 갈 기회가 있어서, 한강 작가님이 싸인하신 의자도 보고, 홉필드, 힌튼, 허사비스, 점퍼, 베이커 등의 싸인과 전시물도 보고, 김대중 대통령 기증품(꽤 많다)도 볼 수 있고 해서 참 좋았었다.

이번 노벨상도, 특히 내 전공분야이기도 한 물리학에서 누가 받을지 상당히 궁금했다. 예측까지는 아니지만Michael V. Berry, Xiao-Gang Wen, Alexei Y. Kitaev 이런 분들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것 같고 또한 그러면 좋겠어서, 노벨상 시즌이 되면 이 분들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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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발표된 노벨물리학상은 거시적 크기의 물체에서 양자 터널링을 구현한 연구자 3명에게 주어졌다. 그 중에 한 명인 Michel H. Devoret은 내 고등학교 동기의 (전)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그 친구가 작년에 한국에 놀러 와서 초전도 큐비트 실물을 보여주었다. 한 손에 잡히는 유리 기판처럼 생겼다. 큐비트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부가적인 장치가 달려 있을지언정 그 핵심에는 원자 한 개 스케일의 물리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크기의 이 회로 자체가 큐비트 1개라길래 잘 이해가 안되면서도 신기했었다. 그 신기함이 이번 시상에서 해결이 되는 느낌이었다.
(여담으로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엘 모키어의 경우, 2018-19년경 진행한 과학기술학 스터디에서 그의 저작인 <성장의 문화>를 함께 읽어 보며 많은 지적 자극을 얻었던 기억이 있어서 참 반가웠다)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과학계에 대학원생으로서 오랫동안 있다 보니, 나와 직접적인 연관까지는 없더라도 내 주변과의 관련성을 상당 수준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가 이것저것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그룹에서도 노벨상이 꽤 자주 나온다는 느낌이 든다. 그 말인즉슨, 한국 과학계도 노벨상을 받는 그룹들과의 과학계량학적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과학 분야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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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노벨물리학상 수상 사례들을 보면 수여의 취지가 되는 연구 성과 아래에 후속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샤라웃(?)을 받고, 그러면서 점점 높은 단계의 상들(대표적으로 우리 통계물리 분야 안에 있는 Boltzmann medal)을 쓸어담는 과정을 거쳐 노벨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마치 영화업계에서의 오스카 레이스처럼 말이다.

한국인이 과학분야 노벨상을 수상하려면 물론 연구 성과 자체의 임팩트가 제일 중요하겠으나, 그렇게 달성된 성과를 활용해서 위처럼 학계에 지속적으로 recognize되는 어떤 연속성 있는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 같다. 호암상을 비롯한 한국 로컬 상들이 국제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한국 연구문화의 글로벌화가 필요하다고 꾸준히 지적되는 것도 아마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사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기존에도 이미 한국인 혹은 한국계 과학기술인들에 의해 인류 최초로 연구개발된 것들도 찾아보면 꽤 많다. 그런 성과들이 노벨상까지 닿기에는 끗발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서사를 만들어서 위원회에 어필이 되었다면 수상 가시권에 보다 수월하게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국 현지에서 독자적으로 쌓아올린 입지만으로도 노벨상 수상 가시권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휘소 박사,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 전자기기에 수억 개씩 들어가는 MOSFET을 발명한 강대원 박사가 너무 일찍 작고하신 게 안타까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조금 더 최근에 노벨상과 관련지어 notable한 한국인/한국계 연구자들로는 그래핀과 위상 물질에서 업적을 남긴 하버드대학교 김필립 교수, 노벨상을 수상한 David Baker의 포닥 제자로서 현재 최다인용 논문의 1저자인 서울대학교 백민경 교수의 사례 등이 있다).

심지어 실제로 그런 흐름이 존재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걸 식별해 내서 이름을 붙여주고 글로 써 주고, 국제 컨퍼런스의 academic talk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해주고 그래야만 동시대에 빛나는 업적으로서 recognize될 수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게 어디까지가 국가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고 어디부터 개별 과학자들 및 과학 커뮤니티의 역할인지는 잘 모르겠다. 국가의 역할은 예를 들어서 난제 해결을 위한 거대과학 연구시설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게 신경쓰는 것, 연구문화의 실질적인 국제화가 이뤄지도록 외국인 연구자를 유치하는 것, 뛰어난 재외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서 그들과 국내 연구생태계의 연계를 유지하는 것 등이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내가 잘 모르는 채로 마음대로 상상하는 부분이라서 앞으로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숫자 장난과 내수용 언론플레이를 비롯한 순전한 공학(정치공학과 비슷한 의미에서) 그리고 국가적 밀어주기로만 노벨상을 달성할수 있다고 기대해서도 안 될 일일테다. 훌륭한 연구자를 찾아서 '실질적으로' 국제적인 어필이 되게끔, 정석적인 방법으로 연구사를 정리하고 학계에서 인지도를 형성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가시권에 들자 당시 한나라당이 정치적 동기로 반대 로비를 하질 않나, 수상 이후에는 MB 국정원이 노벨평화상 취소 공작을 하질 않나 (루머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이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내용이다), 그리고 향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한강을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에나 올리기나 하고. 한편 민주당 진영에서는 황우석 박사를 국가적으로 밀어주다가 사고가 나기도 하고 (이는 과학사회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아무튼 이런 일들을 보면 국가는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학관료나 정치인들이 과학계와 형성하고 있는 인맥뿐 아니라, 과학기술에 대해 실질적으로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현장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꼭 노벨상을 떠나서, 이번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인사가 기존 정권들에 비해 기대되는 부분들이 있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2000년대를 풍미한 복잡계 물리학 및 네트워크 사이언스 분야도 그 임팩트와 해당분야의 볼륨만 본다면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당분야가 통계물리의 한 분야로서 자리를 잡고 빵 뜰 수 있게 된 데에 pioneering한 역할을 한 world wide web 구조 논문 (척도없는 네트워크와 멱법칙) 의 저자 중에 한 분이 한국인이시고(정하웅 교수님), 그 흐름 속에서 다른 한국인 물리학자들도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함께 상당히 많은 일을 하면서 일파를 형성을 하셨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네트워크라는 게 전통적인 물리학적 연구대상과는 다소 다르다 보니 ('응용분야'라고 말하기는 조금은 애매하다. 대상이 비전통적일 뿐 분명 순수과학에 더 가까운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노벨물리학상의 관심사가 될지 의문이기도 하고, '통계물리학으로서의' 네트워크과학 말고 전체 네트워크과학에서 한국인 학자가 pioneering한 역할로 탑 3에 들 수 있냐 하면 그것도 쉽지 않은 건 사실이기는 한지라... 아무튼 이쪽의 연구 흐름도 꾸준히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정리가 되면서 연속성있게 그 유산이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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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9일 월요일

과학교육과 과학문화 사이의 긴장을 통해 보는 단순화된 지식전달에서의 책임

커뮤니케이터 궤도 님이 방송에서 생물학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비판한 안준용 교수님 포스팅을 시작으로, 과학커뮤니케이션/과학문화의 역할 및 과제에 대한 논쟁이 어제부터 굉장히 많다. 과학담론에 관여된 그룹들이 서로 동질적이지는 않지만 서로 아주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라서, 가끔씩은 이런 식으로 서로의 인식 차이를 견주어 보는 얘기도 하기는 해야 한다.

나같은 경우 이에 대해 뭔가 새롭게 긴 글을 쓸 만큼 확실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없어서, 과학 및 그 인접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행위자들 간에 발생하는 협력과 긴장에 대해 예전에 느슨하게 썼던 글[https://bit.ly/3xu1jgs (한국 과학담론의 지형)]을 다시 가져와만 본다. 어제부터 보이는 논쟁도 이러한 긴장들, 그 중에서도 과학과 과학문화 사이의 긴장에 대한 좋은 예시일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있다.

단순화는 불가피하다. 이는 과학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직업 과학자들이 대중화에 직접 나설 때도, 심지어 직업 과학자들이 대학교 강단에서 전공생들에게 수업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식 전달 면에서 도움이 되는 체계적인 단순화와 그렇지 않은 단순화, 그리고 한때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수명이 다한 단순화는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그 경계는 모호하고 정답은 없으며, 이에 대해 건강하게 토의해야 한다.

아주 사골 같은 예시지만, 물이 전도체인지 부도체인지가 초/중/고/대학 교과서에서 매번 달라진다는 것도 약간은 비슷한 맥락이다. 교육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있어서 그 외의 복잡한 진실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또다른 예시로, 최근에 본 'DMT Park' 채널의 유튜브 영상('물리 교과서 보고 충격받았습니다', 링크)에서는 많은 물리교과서의 특수상대론 부분에 나와 있는 단순화된 설명(아인슈타인의 어릴 적 사고 실험)이 사실은 어떠한 제대로 된 개념도 전달하고 있지 않고 물리학적 의미가 없으므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 원론적으로도, 구체적으로도 공감한다.

이렇듯, 전제된 맥락과 의도가 무엇인지 모호한, 따라서 '정확히 어떠한 개념을 전달하고자 하는지가 불명확한' 임의적인 단순화는 지양해야 한다.

물론 과학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은 제도권 과학교육의 현장과는 다르기 때문에 교육 커리큘럼처럼 엄격하게 승인된 방식의 비유, 승인된 방식의 단순화만 할 수는 없다. 각자의 창의성을 동원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좋다고 본다.

그러나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 실제 내용과 개념에 대한 충실성을 넘어서는 순간들에 종종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다. 특히 유전학/진화생물학, 심리학, 뇌과학 등 유난히 세간에 화두가 되고 사회적 파급효과가 있는 내용의 경우에는 전달에 있어서 더 주의하고, 전문가의 최신 견해를 반영하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다. 단순화를 통해 개별적인 최신 사실들이 뭉개지는 것을 넘어서, 최신의 이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포인트가 뭉개진다면 그것은 지적될 필요도 있다.

무언가를 단순화해서 재미있게 전달했을 때, 해당 과학지식 혹은 과학분야에 대해 청중들에게 '과연 정말로 전달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점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다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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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3일 토요일

엘리자베스 랭그리터 개인전 <매일이 휴가!> 관람 후기

오늘 낮에 잠실 소피텔에서 하는 엘리자베스 랭그리터 개인전 <매일이 휴가!>에 다녀왔다. 전시 제목에서 보이듯이 행복과 편안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생각을 너무 깊게 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즐겨도 마음이 편안한 그런 전시였다.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작가 본인의 작업 태도도, 과도하게 밝은 작품들에 으레 따라붙는 어둡고 강박적인 이야기들과는 달리 실제로도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운 느낌에 가까워보였다. 작업 시작한 지 5년도 안 되었는데 차원을 모호하게 만드는 독특한 질감과 맑은 분위기로 빠르게 인기 작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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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6일 토요일

의식 연구에서 계산신경과학적 개념들의 지위: 복잡계 유행과의 비교

베이즈 뇌, 자유에너지 원리, 예측코딩 등 계산신경과학에서 발전한 개념들은 수식 및 물리적 의미로 보면 명료한데, 뇌 및 의식 연구에서 그것들을 다루는 국내 텍스트들 중 꽤 많은 수가 너무 '말로만' 되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수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되는 (혹은 반대로 그 이론들의 결과를 통해 형성되는) 뇌 연구의 철학적 전제들이 다 있는 거고, 그런 얘기들이 뇌와 의식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말'이 길어지는 점은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라, 때때로는 수식으로부터 연역될수 있는 개별적인 결과들까지 그 개별 명제들 단위로 일일이 저장해두고 그 연역단계와 결과들을 말로 풀어서 서술하는 느낌, 그리고 그 말들에 지나치게 천착하는 느낌이 들때도 있어서, 이게 과연 이해에 도움이 되는 방식이 맞는가 하는... 그리고 서로간에 관계를 가지고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할 가설들인 건데 그냥 병렬적인 관점과 개념들인 것처럼 조금 어색한 층위에서 나열 서술되는 것 같아서 아무리 읽어도 뭔가 이해가 불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이게 실제로는 배후에서 작동하는 수학은 서로간에 다 공유되고 있되 단지 더 넓은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글이 그렇게 써질 뿐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해당분야에서 그런 이해로 충분한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약에 후자에 가깝다면, 물리학을 중심으로 등장해서 2000년대 초반을 주름잡은 지적 패러다임인 '복잡계' (여기서 더 과거로 가면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때때로는 다소간에 남용되기도 한 사례들이, 지금 현재의 우리가 지적 신중함을 기하는 데 참고가 될수 있다고 보인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임계성, 멱법칙, 창발, 자기조직화, 혼돈, 열린 계, 흩어지기 구조 등은 (100% 통합된 체제는 아닐지라도) 통계물리학 및 복잡계 물리학에서 상당히 연역적인 상호관계를 맺는 것들인데, 그 연역관계에 대한 명시적/묵시적 인식 없이 복잡계의 집단현상을 그 개별 단어들로 reduce시켜서 이해하고 "말로만 복잡계 연구를 하는" 일이 한동안 경제학, 행정학, 경영학 등에서 꽤나 많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이후의 복잡계는 하나의 '분야'였는가, 아니면 ai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켜서 실제 현재 주류 ai와 계보학적 연관성까지 갖고있고, 한편으로는 '사이버-'라는 단어를 문화/기술계에 정착시키도 하면서 성과를 거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처럼 일종의 'movement'였는가? 후자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 운동의 강령 아래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그 이념을 따라서 전개되기만 한다면 모두 적법한 복잡계에 대한 논의로 볼수 있는가? 하여튼 복잡계 이 쪽에서도 때로는 흥미롭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흔적들이 참 많은데 역사가 정리가 좀 덜 된 부분이 있다.

물론 그렇게 개별 명제, 개별 개념 수준에서 말로 하더라도 충분히 좋은 관점이 제공될 수는 있겠지만, 이를테면 식재료들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레토르트 식품들을 까서 원하는 재료만을 취해서 요리를 만드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무튼 쓰다 보니 복잡계로 얘기가 샜는데, 뇌 및 의식에 대해서는 물론 나도 뭘 자세히 알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수식들에 대해, 그리고 뇌 및 의식연구에 대한 철학적 함의에 대해 세미나 몇 개에서 듣고 문헌들 조금 찾아본 게 전부인 채로 인상비평 하는 것이라, 이번 글은 다소 조심스럽게만 적어두고 끝맺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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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3일 월요일

카드캡터체리 봉인해제 컬렉션 2탄 가챠

대전역 가챠샵에서 카드캡터체리 봉인해제 컬렉션 2탄을 하나 사 봤는데, 거기서 나온 통신전화 품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인터넷 쇼핑을 통해 풀세트를 어렵게 구했다. 어릴 때에는 풀세트를 사려면 부모님 설득을 열심히 했었어야 할 텐데,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컬렉션 대부분에 움직이는 파츠나 자석 등 재미있는 기믹이 있으며, 책과 그 안의 카드 두 장이 특히 완성도가 높고 마음에 든다. 유일하게 별다른 기믹이 없는 최종 화 지팡이도 이번에 최초로 입체 제품화된 거라고 하니 꽤 의의가 있어 보인다. 조립하니 거의 볼펜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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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6일 월요일

『서사의 위기』(한병철) 서평 - 밈컬쳐의 정치적 위험성과 팩트의 국소성

이번 자율독서모임에 가져가서 읽은 책은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이다. 저자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로, 20년쯤 전에 <피로사회>로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책을 작년에 훈련소에 갔을 때 진중문고 서가에서 처음 보고는 한병철의 이름과 <서사의 위기>라는 제목만 보고 기억을 해 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눈에 띄길래 구입했다. 많은 철학사상들이 인용되어서 다소 어렵긴 하지만, 어떤 의도로 그러한 철학들을 인용하는지 잘 설명해 주는데다 책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는 사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농도짙게 가져가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적되고 전승되어 온 고맥락 리터러시가 무너지고, 즉물적인 것에 의해 지배되며 '재미'라는 가치가 과대대표되는 밈 컬쳐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의 유해성이라는 주제에 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책의 내용은 현대 미디어가 인간의 세계 지각과 행동 양식을 바꾸어놓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내용이었다.

서사, 즉 내러티브는 누적된 경험들이 생략과 증폭을 거쳐 서로 잇따라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서사가 붕괴되고 밈, 쇼츠가 유행하고있다. 나도 밈을 굉장히 즐기기는 하지만, 밈의 특징은 ‘의미 없는 재미’에 있다. 만약에 내가 즐긴 밈을 보고 남이 ‘어 그거 아닌데’, ‘어 그거 틀렸는데’라며 훼방을 놓는다면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 들 것이고 이는 불쾌감으로 이어진다. 만약에 정치적인 의도 하에 편집된 밈이라면 이러한 불쾌감은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감으로 이어지며 이를 응집력 삼아서 사람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정치에서의 이러한 밈적 사고를 경계하는 편이다.

실제 책 내용 역시 밈, 쇼츠, 커뮤니티 등과 깊은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었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정치학보다는 인식론에 더 가깝다. 서사에서 경험된 것들의 생략과 증폭을 통해 얻어지는 일종의 신비로움, '생각할 틈'을 철학자들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에서는 모든 것이 지극히 선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록되며 무한히 복제되고 편집된다. 매스미디어에서 정보는 그렇게 누적되고 전승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여기서 아우라는 파괴된다.

책 표지에 있는 ‘스토리 중독 사회’라는 말에서 스토리란 언뜻 보면 서사와 똑같은 말 같다. 그러나 사실 반대로, 여기에서의 스토리란 인스타그램에 있는 바로 그 스토리 시스템에서 따온 말로,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사라지는, 맥락이 제거된 정보의 향유를 말한다. 여기에 더해서, 저자는 인간학적 의미가 없는 마케팅 기술로서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정보화사회에서 매분 매초 트럭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들도 저자는 ‘스토리’와 같은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나마 뉴스는 일방적이라면, 스토리의 경우는 소비자들이 직접 편집하고 게시하고 소비하며 밀도높은 양방향적 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특징을 억압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를 대신하는 기술기반의 스마트한 지배라는 뜻에서 ‘신 지배형식’이라고 부른다. 끊임없이 정보를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가며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디지털매체 특유의 시간성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밀착되게 개입하면서 우리를 ‘압도한다’.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그대신 자유를 최대한으로 밀어붙여서 자유를 exploit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할 틈을 더 효과적으로 지워버린다.

<24시간 시대의 탄생>(김창선)이라는 책에서도 시간의 정밀한 통제와 밀도높은 사용에 대해 다룬다. 그 책이 일터(하버마스적으로 말하면 ‘체계’이려나)와 공적 공간에서 시간이 세분화되는 것의 정치성을 다루었다면, 이 책에서는 생활적인 영역(생활세계)에서 우리가 세계와 지나치게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 서사를 약화시킴을 지적한다 (물론 두 책이 속해 있는 지적 배경은 상당히 다르다). 저자는 서사야말로 과거로부터 누적된 전승이고, 우리를 생각하게 해 주고,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갖게 해 준다고 말한다. 반면 즉각적 정보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근대성이라는 얇디얇으면서도 매우 논쟁적이고 중요한 계기를 저자가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다소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근대의 야심찬 계몽적 기획이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안온함, 즉물성 등으로 귀결되면서 실패한 셈인데, 서사의 시대와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사이에 있어야 할, 근대적 이성의 이중적 면모가 이 책에서는 다소 overlook된다.

내가 생각하는 근대의 실패는 소위 말하는 '팩트'의 이중적 면모와도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의적으로 탈락되고 재구성되는 서사의 불완전함을, 국소적이면서도 치밀하고 보편적인 근대적 지식들이 대체하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대가 도래하고 보니 오히려 팩트는 개별자들을 치밀하게 보편성으로 엮어내는 힘이 부족하며 국소성이라는 계기만을 너무 크게 가지므로, 오히려 훨씬 더 자의적, 즉물적, 일회적으로 소비되고 만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성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이걸 꼽겠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의) 과학적 탈신비화와 (현대 소비사회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를 병치하며 다음과 같이 대비할 뿐이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이러한 두 탈신비화를 근대의 양면성을 바탕으로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쉽다.

저자가 서사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비약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이야기를 제공해주고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인 연속체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적 선택에 기반한다. 사진과 달리 기억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선택된다. 또한 기억은 시간적 간격을 늘리거나 줄인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을 건너뛰기도 한다.” 이렇게 망각과 선택을 통해 구성된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삶을 우연성의 무한 연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희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도 이러한 자의적으로 구성된 서사로부터 종종 개인적인 동기부여를 얻고 사회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곤 하므로 이러한 지적은 꽤 와닿기는 한다.

여러 책들에서, '인류 마음의 심원한 곳에는 늘 종교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없을 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나는 다소 심술이 나곤 한다.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무리 면밀히 봐도 종교성에 해당하는 심리적 계기를 딱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서사’를 대하는 관점도 약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술이 나기도 했다. '인간은 결국은 서사 없이는 안돼! 그래야만 해!' 밑에서 쓰겠지만 나는 서사가 인간에게 갖는 강력한 힘을 인식하되, 결국은 그 강력함 때문에 오히려 서사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라서 저자와 입장이 다르다. 이를 ‘서사의 위기’가 아니라 ‘서사라는 오래된 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철학적 사유를 걷어내고 이 책의 메시지만 보자면, 약간 기성세대가 어린이들이 TV 많이 보면서 바보가 된다고 걱정하던 느낌이라서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런데 이제 그런 기성세대들도 유튜브, 쇼츠 중독에 빠지곤 한다. 현대인들이 이것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철학적으로도 벤야민의 매체미학,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 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매체이론 등을 포함한, 어디에선가 한번쯤 봤을 이야기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막 공부하면서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각자의 문제의식과 연결지어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보인다.

그러나 뻔하지 않은 예시들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서 (1) 심박수, 혈압, 등 우리가 상시 착용하고 있는 센서들이 제공하는 숫자를 활용해서 헬스케어를 하는 것, (2) 인공지능 기반의 추천 (유튜브 알고리즘이나 광고 등)이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의 선호를 잘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보를 ‘떠먹여 주면서’ 우리를 압도하며 은밀하게 시스템에 복무시키는 현상은 확실히 좀 참신한 예시이고, 주의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그리고 위에서 몇 번 언급한, 서사에서 자의적인 (그러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보의 생략과 증폭이 중요하다는 지적 또한 꽤나 흥미롭다. 인류 문명에서 전승되는 지혜도 이처럼 생략을 통해 아우라를 획득하고 보편적 지혜의 지위를 얻는다. 그리고 현대인의 개인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빠짐없이 수치화되어 기록되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의 차이가 지워져서", 서사 성립에 필요한 인간적인 '기억'이란 것이 없게 된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공동체 또한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서사를 바탕으로만 조직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서사가 위기에 처하면 공동체도 붕괴되며, 여기에서 저자의 테제가 정치사회 이슈와 연결될 계기가 발생한다. 공유와 소통이 (과도할 정도로) 늘어나는데 오히려 서사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관찰이기는 하다. 인간적으로는 점점 고립되지만 정보의 바다에는 상시 접속되어 있으면서 그 정보들에 압도되는, 말하자면 풍요 속의 빈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서사의 부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서사가 사라진 공간에서 무엇이 새롭게 등장하는지에 더 구체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팩트와 재미라는 두 개 바퀴의 역설적 결합을 통해 질주하는 즉물적인 밈 컬쳐가, 시시각각 형성되었다가 해체되는 무책임한 매스미디어적 정치성을 어떻게 은밀하게 조직해내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과 상충되는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서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훨씬 더 많다. 사실 2018년 경에 ‘서사를 경계하라’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글을 쓰다가 만 적이 있다 (개인 드라이브에만 저장되어 있다).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들 중에서도 사실은 서사성을 가지는 것이 많다. 증언으로서의 서사는 보편성을 확장시켜주고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게 해주지만, 강요되는 규범으로서의 서사는 허위의 보편성으로서 폭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이 서평의 범위를 넘는다. 나중에 더 풀어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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