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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3일 수요일

정치성향 테스트 결과 및 소감

  정치성향 테스트를 해 볼 때 늘 고민되는 지점은 질문에 답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질문이 의도하는 바에 대해 몆 단계를 넘겨짚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넘겨짚어야 하는지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제시되는 문장이 즉물적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오는지 불쾌하게 다가오는지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 그 문장과 같은 의도를 갖고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을 때 예상되는 전형적인 결과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한편, 내 개인적 신념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신념을 가졌을 때 예상되는 전형적인 결과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나는 기준을 달리해 가며 총 두 번 테스트했는데, 일단 질문에 대한 즉물적인 인상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결과를 줄 것 같아서 어느 정도의 숙고는 기본으로 하고, 숙고의 방향을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1) 현실 정치 지형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제시된 문장 자체에 대한 호불호를 평가

(2) 제시된 문장을 매우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가상의 정치인을 상정해서, 그 정치인을 지지할 마음이 드는지의 여부를 평가

  결과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두 번의 테스트에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축에서는 정확히 같은 결과가 나왔으나, 좌파/우파 축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두 사진 중에 어느 쪽이 무슨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페친 분들께서 댓글로 맞추어 보시면 재미있을 듯).

  이 결과의 절반 정도는 나의 정치적 의식이 미숙한 탓일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내가 관심있는 의제가 정치인들에 의해 선택되고 다루어지는 주된 방식에 대한 불만 탓일 것이다.

  그리고 이 테스트의 결과 자체뿐 아니라,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테스트했을 때의 결과 차이 역시 나의 정치 성향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정치에 있어서 내용뿐 아닌 형식의 문제도 보고 싶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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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5일 화요일

철학에 대한 '교훈적' 독해를 경계하기 : 한국인의 정신적 토양에서


  모든 철학은 아주 원론적인 의미에서 삶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의 저서 속 특정한 문구를 그의 철학 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탈맥락적으로 인용하여, 그 문구가 직접적으로 삶에 대한 어떤 교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철학도에게 최우선적으로 경계되어야 한다.

  나는 인문학이 고담준론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 변화에 따른 현재적 인간상(소위 포스트휴먼)을 해명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과감하게 변화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변화하는 흐름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별개로, 나는 2010년대 초반부터 발생한 소위 인문학 열풍을 타고 출판된 수많은 인문학 베스트셀러들, 그리고 CEO를 위한 인문학 강연 같은 것들에는 매우 비판적이다. 아카데미를 떠나 그러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인문학을 나는 '인싸 인문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매우 신시대적이나, 내용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기는커녕 우리를 퇴행적인 사고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싸 인문학은 주로 철학적 개념들의 체계와 역사를 경시하고 표면적 문구에만 천착하여 자의적으로 교훈을 찾아내려고 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이러한 소비 행태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학 과잉', '도덕 과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과잉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철학의 영역을 축소시킬 뿐 아니라 문학과 도덕까지 왜곡시킨다. 이에 대해 이하에서 자세히 해명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철학자가 마치 종교의 Guru와 같은 방식으로 삶의 지침 내지는 지혜를 한 문장 속에 함축해서 제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철학자의 유명한 문구를 마치 종교 경전의 특정 문구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인다(요새는 심지어 문자주의자가 아닌 한 진짜 종교 경전조차도 이렇게 읽지는 않는다).

  예컨대 칸트 철학에서 매우 유명한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보자. 이 말은 엄격한 의미의 인식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칸트의 해명이 잘 요약되어 있는 분석적인 문구로, 굳이 말하자면 '차가운' 쪽에 속하는 문구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싸 인문학'은 모든 것을 '뜨거운' 방식으로 해독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칸트 철학의 본래 내용이 무시되고 해당 문구만이 탈맥락적으로 인용되어, "크...... 역시 삶을 건실하고 충만하게 살아야지"라는 식으로, 마치 직접적으로 삶에의 지침을 제공하는 문구인 것처럼 도덕주의적으로 독해된다. 한편, 문구 속에 함축된 삶에의 교훈이 있을 거라고 믿고 그것을 그 철저히 문구 속에서만 나름대로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학적인 독해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독해 방식들은 완전한 오독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소비되는 인싸 인문학이 본래 인문학의 내용에 비해 왜곡되기 쉬운 이유는, 주 소비층의 직관 속에서 이상하게도 철학에 해당하는 영역이 매우 작고, 문학 그리고 규범 도덕에 해당하는 영역이 비대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철학 텍스트에도 마치 문학을 대하듯, 혹은 규범 도덕을 대하듯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철학을 왜곡시킬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학과 도덕조차 왜곡시킨다. 현대에 문학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이며, 세계에서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아주 좁은 단면을 날카롭게 증언하여, 인간의 사유가 게을러져서 퇴행적으로 흐르지 않고 끊임없이 세계에 대해 세심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보편성의 확장).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여전히 그 스스로가 보편성을 자임하는 것, 거대 서사를 통해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수구적 보편성의 전시).

  한편 도덕은 상호 관계, 그리고 다자간의 관계라는 계기를 포함하여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도덕이 상호적인 예의의 측면에서 검토되기보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따라야 하는 상징적인 문화적 규범의 형태로 주로 나타난다.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 윤리학은 물론이거니와, 정언명령으로 대표되는 칸트적인 규범 윤리학에 비해서도 퇴행적인 토테미즘적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문학 과잉과 도덕 과잉의 경향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교훈 위주의 사고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일부 중장년들의 삼국지 신봉이다. 삼국지라는 특정한 작품에 삶에 대한 최고도의 도덕적 진리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고 그 책이 제공하는 교훈들이 교육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서양에 비유하자면 장르의 미분화와 문자 기술의 부재로 인하여 원시종합예술을 통해서만 지식이 교육될 수 있었던 고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와 같은 소위 인문 고전을 현실적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한 최고의 참고서인 양 신봉하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무리한 주장을 해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기까지 하다. 거대한 서사(narrative)와 그 속의 상징(symbol)에 의존하여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컬트에 불과하며 공적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컬트를 신봉하는 이들의 국가는 현실 속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닌 이념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양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내 직관에 따르면 위와 같은 현상에는 리더의 덕목만을 강조하는 동양권의 입신양명 서사, 그리고 중화로부터 비롯된 유교 문화권의 지적 전통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주류적인 분위기 하에서는 분석적이고 건조한(?) 철학의 영역이 축소되어 있고 문학의 영역 및 규범도덕의 영역이 과잉되어 있으며, 후자의 두 영역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한국 특유의 '교훈' 개념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규범도덕도 왜곡된다. 그리고 시장의 수요에 맞추어야 하는 인싸 인문학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왜곡되어 독해되며, 결국 그 주류적인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데 복무하게 된다. 그리고 약간 무리하게 확장하자면 이것은 반민주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이 오직 한국만의 경향이라고 단정지어 자국혐오를 자행할 생각은 없으나, 굳이 해외와의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문제라고는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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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9일 수요일

대학생 장터 주류판매 금지 관련

  국세청 및 교육부에서 대학생들이 장터에서 주류를 판매하는 것이 (면허가 없다면) 주세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는 공문을 각 대학에 보냄에 따라 근래 며칠 동안 학생사회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처음 소식을 듣고 나는 개별 부스가 아닌 주최측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허가 받아서 토큰제를 시행하는 것을 상상했었는데, 공유한 POSTECH의 사례가 이것과 비슷한 방향으로 잘 해결을 본 것 같다.

  학생회와 동아리 등이 장터를 운영하면서 사회운동 등을 위한 자금 마련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그래서 사회진출한 선배들이 방문해서 팔아주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역사적 기원에 가깝고, 현재 장터의 주된 모습은 주로 수입 자체보다는 구성원들 간의 친목과 재미에 그 의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류 판매는 사실 하지 않으면 그만이긴 한데, 학생들의 요구가 많다면 학생회가 이렇게 책임지고 해결하는 것이 학생들의 법익을 보호하면서도 캠퍼스 문화를 활성화한다는 면에서 모범적인 모습인 것 같다. 물론 모든 학생회에 이것을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음주 때문에 발생하는 학내의 소음 및 추태로 인한 항의도 많다는데 이왕 찝찝한 탈법의 영역을 해소하고 제도적 해결을 보는 김에 이런 점도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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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8일 화요일

'내로남불'의 논리학과 화용론

  나는 소위 '내로남불'에 대해서 전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인 일관성보다는 정치적 지형 상에서의 일관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논리적 오류가 존재하더라도 그 교정의 가능성은 언어 속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반면, 머릿속에서 정치 지형을 실제와 전혀 다르게(혹은 매번 다르게) 설정해 놓고, 제대로 된 조준 없이 자신의 주장을 '난사'한다는 것은 그 의제가 논의되고 있는 도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므로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기 어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내로남불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생각보다 그 근거가 미약하며, 논리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신뢰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내로남불을 대략 도식화해 보자면 "상대방은 A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A를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딱히 '논리적 오류'라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주장은 하나의 당위명제일 뿐, 그 안에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저지른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성하고자 한다면 그 시도의 결과물은 얼마든지 논리학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타당할 수도,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논리는 구성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된 논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반드시 하나 이상의 당위명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로남불은 정당하지 않다'라는 결론(당위명제)을 유도하고자 할 때, 당위명제가 아닌 사실명제들만을 전제로 하여 그러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간에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리적 정당화의 시도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침묵하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사과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내로남불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의 시도,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의 시도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위의 내용을 반대로 말하면, 논리는 어차피 구성하기 나름이므로 내로남불의 정당화에 대한 논리적 비판도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은 것이 된다. 보다 강력한 비판을 위해서는 결국은 사회적 계기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로남불은 심지어 '수행적 모순'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수행적 모순이란 화행(speech act)의 타당성이 부정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는 그 자체로 솔직하고 투명한 주장이며, 그 내부에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수행하는 A'와 '내가 수행하는 ~A'는 엄밀히 말하면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표출적 진술)가 아닌, 내로남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발화(규범적 진술)는 그 타당성 요구에 대한 거부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따라서 내로남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발화는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규범적 진술에 대한 타당성 요구 주장을 검토하는 작업에는 사회학의 영역이 개입되어야 하고, 언어만을 분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분석이 유보된다.

  요약하자면, 흔한 오해와 달리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는 그 안에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수행적 모순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규범적 진술로서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발화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논리적으로 비판될 가능성이 있으며, 수행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내로남불의 문제점은 그저 그것이 노골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상호주관성의 측면에서 발화자에 대한 신뢰를 깎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뿐이다. 무언가를 노골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며, 내로남불의 정당화 시도는 수행적 모순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사람이 비판받자 '그그같'('그거랑 그거랑 같냐?')이라고 반문하는 클리셰가 설정되어 희화화되곤 하는데, '그그같?'에 대한 반박은 위와 같은 이유로 생각보다 어렵다. 실제로 모든 경우에 그거랑 그거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수행하는 A와 내가 수행하는 ~A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그같'이 내로남불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기계적 판단은 사실 그 근거가 미약하며, 그거랑 그거랑 비록 다르지만, 어느 정도 동질적인 성격의 것이라서 같은 잣대를 적용 가능하지 않냐고 주장함으로써 내로남불 정당화 시도의 수행적 모순을 입증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그거랑 그거랑 표면적으로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동질적인 성격의 것이 아닐 경우에는, 내로남불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과감하게 돌파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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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일 수요일

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2)

  국가폭력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실존의 문제 앞에서 정치적, 도덕적 의식은 얼마든지 '한갓된' 것일 수 있다. 정치적 의식에 부합하는 선택과 스스로의 고통을 경감할 것으로 기대되는 선택이 서로 대립될 경우에,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가 전자를 택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모두가 위의 대립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견주어 보면서 선택을 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가 중점을 두어 비판해야 할 것은 다수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징병에 의해 행사되는 국가폭력이 대외를 향하지 않고 대내를 향하도록 일부 전환하여 일상적으로 시민들과 충돌하도록 판을 벌여 놓고, 그 선택지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사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에 호소하여 투쟁을 어렵게 만들고 국가 폭력을 은폐하는 상황 그 자체이지,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선택을 한 개별 주체들이 아니다.

  꾸준히 언급해 온 점이지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개별 주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들 개인에 대한 공적인 자리에서의 비난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오해와 달리, 내가 즐겨 쓰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에서 '인간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정서적인 편안함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비정해서는 안 되고 무턱대고 관용을 가져야 한다는 따위의 상투적인 표현이 당연히 아니다. 그 의미는 선택의 주체인 인간이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서 작용하는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자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군 복무 이행의 형태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 문장은 잘 적용된다.

  징병제라는 국가폭력 하에서 누군가는 위와 같이 견주어 보는 과정을 통해 의경을 선택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같은 과정을 통해 반대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자가 의경을 선택한 자들에 대해 혐오발언을 자행하는 모습은 모순적이고 희극적이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지 않고 개인을 본 것은 과연 누구인가?

  + 추가로 드는 생각은, 애초에 SNS 상에서 일어나는 몇 줄의 의견 교환으로는 서로의 논지를 확인하는 것부터가 어려울 만큼 전제의 차이가 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정치에서 기본적으로는 국가권력이 온건하고 민주적으로 행사되도록 감시하고 그렇게 행사되는 국가권력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국가권력과 분리된 영역에서의 의식화를 통해 사회 전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반민주적이니까 말이다. 개인들의 주체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들의 개별적인 선택에 도덕적 의무론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대중은 설득의 대상이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면 나는 엄격한 의미에서 진보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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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1)

  나의 페이스북 이용 방식은 수동적인 편이다. 나의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포스팅하기보다는, 들려오는 이슈들에 대해서 답답한 지점이 있으면 내 나름의 관점으로 그것에 대해 글을 써 보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군대와 국가폭력'에 대한 얘기를 유독 자주 쓰게 된다.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이나 징병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보에 위협이 되는 불온한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는 반동적인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군대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만족스럽지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국가폭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우파의 전형적 방식도 잘못되었고, 국가폭력에 대해 정교한 성찰 자체를 거부하는 좌파의 전형적 방식 역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나의 관점이, 대단히 조심스럽게 발화되지 않는 한 어디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관점이라는 뜻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최근에 페북 친구를 맺은 어떤 분이 의경을 강하게 비난한 것을 캡쳐본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대략 말하면 의경 복무자들을 자기 몸 편하려고 대중을 압제하는 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목숨을 잃어도 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1) 징병제는 국가폭력이다 (2) 그러므로 부당하다 (3) 그 중에서도 의경 제도는 특별하게 부당하다는 세 가지의 명제가 모두 입증되어야 한다. 각각의 단계의 입증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중대한 문제를 우선 차치하고 셋 모두를 비판 없이 전격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복무 방식의 선택은 온전히 자발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징병제라는 국가폭력의 압박 하에서 개인에게 그나마 선호되는 환경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상적인 시공간, 일상적인 과업들로부터 유리되어 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복무자 개인에게 대단히 큰 실존적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그나마 선호하는 의경이라는 환경을 선택했고, 그 환경이 시위대에 대응하는 역할이라고 해서 그 개인에게 국가폭력에 대한 정치적인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며, 그러한 정치적 의식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고 독단이다.

  이렇게 보면 설령 의경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의경으로의 전환복무를 선택한 개인이 아니라 징병 제도, 혹은 의경 제도의 운용 자체에 있게 된다. 좀더 구체화해 보자면, 다양한 틀이 있겠지만 예컨대 대외를 향한 폭력을 담당하여야 할 군 인력을 대내를 향한 폭력으로 '전환'하는 것의 법적, 제도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 등이 가능할 것이다.

  유명한 페이스북 페이지 '헬조선 늬우스'가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에 이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의경들을 비난해서 일어난 큰 논란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좌파 일각에서 관찰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나이브한 보이콧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징병제의 당사자들에게만 2차 피해를 입히게 된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개인을 보고, 개인을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는 행태는 책임 소재를 흐리고 문제를 불명확하게 할 뿐이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지 자체도 논쟁거리가 되는 판에서, 부상을 입어도 싸다거나, 호적에서 파야 한다는 단순한 정념 표출에 불과한 발언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국가폭력에 대해 가장 정교하게 성찰해야 할 좌파를 자처하면서 정작 국가폭력의 말단에 위치한 개인들에 대하여 정념에 기반을 둔 노골적인 혐오를 자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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