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철학은 아주 원론적인 의미에서 삶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의 저서 속 특정한 문구를 그의 철학 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탈맥락적으로 인용하여, 그 문구가 직접적으로 삶에 대한 어떤 교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철학도에게 최우선적으로 경계되어야 한다.
나는 인문학이 고담준론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 변화에 따른 현재적 인간상(소위 포스트휴먼)을 해명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과감하게 변화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변화하는 흐름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별개로, 나는 2010년대 초반부터 발생한 소위 인문학 열풍을 타고 출판된 수많은 인문학 베스트셀러들, 그리고 CEO를 위한 인문학 강연 같은 것들에는 매우 비판적이다. 아카데미를 떠나 그러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인문학을 나는 '인싸 인문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매우 신시대적이나, 내용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기는커녕 우리를 퇴행적인 사고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싸 인문학은 주로 철학적 개념들의 체계와 역사를 경시하고 표면적 문구에만 천착하여 자의적으로 교훈을 찾아내려고 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이러한 소비 행태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학 과잉', '도덕 과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과잉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철학의 영역을 축소시킬 뿐 아니라 문학과 도덕까지 왜곡시킨다. 이에 대해 이하에서 자세히 해명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철학자가 마치 종교의 Guru와 같은 방식으로 삶의 지침 내지는 지혜를 한 문장 속에 함축해서 제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철학자의 유명한 문구를 마치 종교 경전의 특정 문구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인다(요새는 심지어 문자주의자가 아닌 한 진짜 종교 경전조차도 이렇게 읽지는 않는다).
예컨대 칸트 철학에서 매우 유명한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보자. 이 말은 엄격한 의미의 인식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칸트의 해명이 잘 요약되어 있는 분석적인 문구로, 굳이 말하자면 '차가운' 쪽에 속하는 문구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싸 인문학'은 모든 것을 '뜨거운' 방식으로 해독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칸트 철학의 본래 내용이 무시되고 해당 문구만이 탈맥락적으로 인용되어, "크...... 역시 삶을 건실하고 충만하게 살아야지"라는 식으로, 마치 직접적으로 삶에의 지침을 제공하는 문구인 것처럼 도덕주의적으로 독해된다. 한편, 문구 속에 함축된 삶에의 교훈이 있을 거라고 믿고 그것을 그 철저히 문구 속에서만 나름대로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학적인 독해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독해 방식들은 완전한 오독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소비되는 인싸 인문학이 본래 인문학의 내용에 비해 왜곡되기 쉬운 이유는, 주 소비층의 직관 속에서 이상하게도 철학에 해당하는 영역이 매우 작고, 문학 그리고 규범 도덕에 해당하는 영역이 비대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철학 텍스트에도 마치 문학을 대하듯, 혹은 규범 도덕을 대하듯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철학을 왜곡시킬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학과 도덕조차 왜곡시킨다. 현대에 문학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이며, 세계에서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아주 좁은 단면을 날카롭게 증언하여, 인간의 사유가 게을러져서 퇴행적으로 흐르지 않고 끊임없이 세계에 대해 세심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보편성의 확장).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여전히 그 스스로가 보편성을 자임하는 것, 거대 서사를 통해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수구적 보편성의 전시).
한편 도덕은 상호 관계, 그리고 다자간의 관계라는 계기를 포함하여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도덕이 상호적인 예의의 측면에서 검토되기보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따라야 하는 상징적인 문화적 규범의 형태로 주로 나타난다.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 윤리학은 물론이거니와, 정언명령으로 대표되는 칸트적인 규범 윤리학에 비해서도 퇴행적인 토테미즘적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문학 과잉과 도덕 과잉의 경향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교훈 위주의 사고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일부 중장년들의 삼국지 신봉이다. 삼국지라는 특정한 작품에 삶에 대한 최고도의 도덕적 진리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고 그 책이 제공하는 교훈들이 교육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서양에 비유하자면 장르의 미분화와 문자 기술의 부재로 인하여 원시종합예술을 통해서만 지식이 교육될 수 있었던 고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와 같은 소위 인문 고전을 현실적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한 최고의 참고서인 양 신봉하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무리한 주장을 해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기까지 하다. 거대한 서사(narrative)와 그 속의 상징(symbol)에 의존하여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컬트에 불과하며 공적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컬트를 신봉하는 이들의 국가는 현실 속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닌 이념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양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내 직관에 따르면 위와 같은 현상에는 리더의 덕목만을 강조하는 동양권의 입신양명 서사, 그리고 중화로부터 비롯된 유교 문화권의 지적 전통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주류적인 분위기 하에서는 분석적이고 건조한(?) 철학의 영역이 축소되어 있고 문학의 영역 및 규범도덕의 영역이 과잉되어 있으며, 후자의 두 영역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한국 특유의 '교훈' 개념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규범도덕도 왜곡된다. 그리고 시장의 수요에 맞추어야 하는 인싸 인문학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왜곡되어 독해되며, 결국 그 주류적인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데 복무하게 된다. 그리고 약간 무리하게 확장하자면 이것은 반민주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이 오직 한국만의 경향이라고 단정지어 자국혐오를 자행할 생각은 없으나, 굳이 해외와의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문제라고는 생각된다.
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