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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31일 목요일

중앙일보 '우유당번' 인터뷰 기사를 보며


남성이 겪는 차별의 예시로 학창 시절의 우유당번을 제시한 중앙일보의 20대 남성 인터뷰 기사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나는 전반적으로 웃기다기보다는 조금 소름이 돋게 느껴졌다. 원내정당의 청년대변인까지 했으며 구독자 1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꽤나 유명한 청년보수 스피커를 유력 언론인 중앙일보가 불러서 임의의 일반인인 것처럼 해 두고 이 주제에 대해 이 정도의 논조로 인터뷰 기사까지 썼다는 사실이 말이다.


따라서 지금 터져나오는 조롱과 비웃음 섞인 반응들의 포인트를 그 개인에 대한 집단적 조리돌림이라기보다는 기만적인 언론권력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해학적인 반응으로 본다면, 이러한 반응은 정당하게 정초될 수 있을 것 같다. 기사 전체에 우유당번 내용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 와중에 가장 임팩트가 큰 대목이 우유당번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해학적으로 회자되는 것이다. 물론 그 양상이 우유당번 발언을 한 개인에 대한 조롱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해당 인물이 엄연히 정치인인 만큼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체적인 의도를 보았을 때 이 기사는 우유당번이나 생수통 같은 맨박스를 남녀가 함께 연대해서 개선을 하자는 방향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공격하면서 20대 남성들을 반페미니즘적 우파세력으로 끌어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쓰여진 것이 명확하므로, 이 기사를 읽을 때는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면서 지적해야 한다. 우유당번 발언을 한 인터뷰이는 20대 남성 개인이기도 하지만 보수언론이 자신들의 논조에 적합하도록 선택한 스피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기사에 대하여 "그래, 우유당번도 맨박스 맞다. 그러니까 함께 연대해서 해결하자"라는 이상적인(?) 반응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반응은 20대 남성 개인들에게 던져야 할 메시지이지, 젠더이슈에 특정한 방식으로 개입하여 판을 짜려고 시도하는 보수언론에게 던질 메시지는 아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유당번도 결국 페미니즘으로 타파하여야 할 맨박스이기 떄문에 함께 페미니즘으로 연대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설득의 측면에서 보리수 청년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페미니즘을 공격하고자 하며, 결국 남성들의 군 문제나 정책에서 소외되는(것처럼 느끼는) 문제 등이 페미니즘에서 부가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학(?) 같은 별도의 분야로 정립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나 역시 적어도 군대 문제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적 시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점이 아주 많다는 데 공감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남성들의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싶다면 해 보자고, 그러나 문제의식을 세밀하면서도 정직하게 해야 한다고, 없는 사상을 있다고 하지 말자고, 보수언론에 편승해서 쉽게 가려 하지 말자고, 보수언론이 이런 식으로 갈등 구도의 판을 짜서 부추기는 것에 당신들이 편승하는 순간 당신들의 문제의식은 반동적인 것이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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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7일 일요일

'성평화'란 없다: 이퀄리스트들의 반복되는 실수

2년쯤 전에 '젠더 이퀄리즘'의 개념적 공허함이 폭로되었음에도, 이퀄리즘은 그 이름만 '성평화'로 바꾼 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나무위키가 아닌 위키백과에 '성평화'문서가 만들어져 있다(위키백과 '성평화' 문서 링크. 내용이 부실하여 삭제 토론이 걸려 있다). 또한 한국성평화연대의 첫 워크숍 장소는 청년우파의 아지트 [라운지리버티]였으며, 몇몇 정당에서 한국성평화연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 오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들 이퀄리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점 두 가지가 있다. 그 문제점들은 '이퀄리즘'이라는 이름보다 '성평화'라는 새로운 이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첫번째 문제점은, 이들이 내세우는 평화는 다름이 아니라 그저 겉보기에 싸움이 발생하지 않는 '기만적이고 억압적인 평화 상태'라는 것이다. 둘째, 이들이 하는 모든 활동은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을 비판하는 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성차별의 개선이라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렇게 되면 성차별 타파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를 뿐이라고 누가 믿어 주겠는가? 성차별의 타파를 향한 사회문화적 실천을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들 이퀄리스트들의 주장을 '내부 비판'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외부의 적'으로 봐야 할지는 명약관화하다.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함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실질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을진대, 이들의 행보는 그런 방향과는 정반대되며, 오히려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형태만을 주로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바로 개념적인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사실 이걸 지적하는 것은 순전하게, 없는 개념인데 있는 척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 개인적 성향 때문이다. 아래의 이퀄리즘 글에서도 지적했듯, '지금까지 없었지만, 선언을 했으니까 이제 있는 거 아니냐'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아래의 글에서 '이퀄리즘'을 '성평화'로 바꾸어 보자. 2년 전 글이지만 현재의 상황과 완벽하게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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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1일 월요일

신선놀음 설화와 시간적 숭고의 가능성

  알고 있는 설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을 낳은 설화이다. 산에 나무 하러 들어간 나무꾼이 신선들의 바둑놀음을 잠깐 구경하는 사이에 어느새 가지고 온 도끼의 자루가 썩어 있었고, 이에 갸웃거리며 산을 내려와서 마을로 가 보니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 설화는 연출 및 스토리텔링에 따라 희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며, 시간을 멍하니 보내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설화를 생각할 때 왜인지 모를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가장 많이 받는 것 같다. 각종 설화들에서 괴물들이나 신적 존재들의 크기가 이렇게나 컸더라, 이렇게나 복잡하게 생겼더라 할 때는 그 숭고감이 사실 그렇게 잘 와닿지는 않았는데(나의 상상력 부족 탓일지도 모른다), 이 설화에서는 시간축 상에서의 간단한 조작만으로 인물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시간성을 마주하도록 함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방식의 '시간적' 숭고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러한 시간적 숭고가 내게는 상당히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숭고감이 기본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큰 규모의 대상 혹은 양태를 뜬금없이 대면하게 될 때의 불쾌감으로부터 유발된다고 보는 입장에서(이는 칸트의 견해를 나름대로 수용한 결과이다), 시간적 숭고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종종 한다. 예를 들어서 시간에 따라 극도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조형물은 그 공간적 크기가 작더라도 양적으로 지극히 많은 것을 담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숭고감을 유발할 수 있다(이에 따라, 시간성을 도입한 조형물에서는 '아기자기함'과 숭고함이 한끝 차이인 것도 가능해진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 이후로 밝혀진 시간여행의 가능성들 역시 이러한 종류의 시간적 숭고를 낳기도 한다. 빠르게 움직였다가 멈추었을 뿐인데 바깥 세상에선 극도로 많은 시간이 지나 버렸고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불쾌하면서도 경이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를 설정에 도입한 작품 중 대단히 유명한 것으로 <인터스텔라>를 꼽을 수 있겠다.

  설화들에서 나타나는 설명을 거부하는 숭고감(아무튼 그랬대!)과 현대의 스페이스 오페라 류의 잘 설계된 장엄함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많은 작품을 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후자에서는 큰 규모의 대상이나 양태를 납득 가능하고 인과적인 설명으로 풀어내면서 극중 장치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던데, 이로써 작품의 장엄함은 획득되지만 그 대상들 자체의 아우라는 제거되곤 한다. 사실 나무꾼이 들어간 동굴은 숨겨진 우주선의 입구였고,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동안 우주선이 광속의 0.9999999999배의 속력으로 움직였을 뿐인 게 아닐까? 장르 자체가 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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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9일 수요일

뉴스타파 전문연 보도 유감: 문제는 합리적인 정량평가 방식의 부재이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에서 전문연구요원 대체복무 현장을 비판적으로 취재한 기사가 나왔다.

기사 보기: '가짜출근에 대리출근'....카이스트 병역특례 난맥상

연구자의 성실함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논문 실적으로 평가하자니 분야 및 연구주제에 따라 논문이 나오는 주기가 다르기 때문에 연구자 개인에게도, 그리고 제도의 취지 상으로도 부당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근무시간으로 평가하자니, 비록 극단적인 가상적 사례이긴 하지만 그냥 3년 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다른 이들의 대체복무 기회를 뺏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결국 연구자의 성실함을 평가하는 것은 전문연구요원 대체복무 제도의 공정함을 유지하고 제도의 설득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라는 척도로 성실함을 평가하는 것은, 연구라는 활동에서 성실함을 측정하는 마땅한 방법이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된 미봉책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평가 방식이 대학원생이라는 삶의 형태와 매우 상성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각각의 연구실에서 학생들이 놓여 있는 조건은 모두 다르다. 실험 진행 및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때때로 철야를 해야 하는 연구실도 많을 것이며, 과제 및 학위논문 등으로 바쁜 시기에 철야를 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굳이 철야근무 문제가 아니더라도, 정시 출퇴근 여부와 성실성이 상대적으로 상관관계가 적은 분야들 또한 분명히 있다.

대학원이라는 조직에서의 대체복무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일체의 저널리즘적 탐사내용 없이, 출퇴근 시간으로 평가하는 현재의 기준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 기준에 따라 대학원생 개인들을 비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번의 기사는 매우 유감스러우며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다. 편견 없이 현상의 원인을 첨예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를 기사 내에서 적극적으로 밝혀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우수한 인적자원으로서 병역특례를 받는 대신 이공학 계통에서 연구하면서 실적을 내도록 모종의 국가적 책무를 부여받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고 책임감을 갖는 것 역시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밤을 새서 아침에 출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기사의 방점이 잘못 찍혀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개인들의 준법정신과 책임의식은 그것들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공정한 평가환경 속에서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

차라리, 생활패턴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인권 침해이므로 그런 연구들에 규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이것도 별로 상상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뉴스타파의 이런 주장으로는 학생들 개인만 엘리트이자 적폐라는 식으로 비난받게 되고, 필요한 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만 양산될 뿐이다. 기사 원문에 첨부되어 있는 '병역비리' 태그가 눈에 밟힌다.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양심적 병역거부 용어변경 유감


  이 나라가 세속국가가 맞는지 의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민의 보편적 권리가 되어야 하며 특정 종교만의 전유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종교를 강조하는 네이밍은 꽤나 부적절하다. 게다가 이 이름은 양심적 병역거부 자체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면서 국민들한테 잘못된 시그널을 줄 가능성도 높다. "특정 소수종교 신도들의 특혜가 아닌 국민 모두의 권리입니다"라는 식으로 설득해야 그나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식이 나아질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부처간 협의과정에서 국방부가 제도의 인권 측면에서의 취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여론을 의식한 미봉책을 내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특정 종교에서 국민 일반으로의 대체복무의 확산을 원하지 않는 정부부처의 입장과, 그런 조건 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정적 특혜로 간주하여 반감을 가지는 국민들의 입장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종의 비극적인 최적해인 것이다.

  단순 용어만 바꾸는 거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아직 헌재랑 대법원 판결 빼고는 구체적인 무죄취지 판례들도 거의 축적 안 된 상태고 양병거 자체도 제도적으로 막 도입되는 단계이다 보니, 단순 용어가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의 핵심 개념적인 부분까지 왜곡될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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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일 화요일

과학철학과 현장 과학은 대립하는가?

  과학철학에서 과학지식의 인식론적 정당화를 추구하는 시도가, 현장 과학자들이 합의하고 있는 내용을 근본없이 의심하는 유사과학적(?) 행동으로 간주되어 좋은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꽤 있다. 이 카톡 내용은 과학철학과 과학 현장의 그런 갈등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나름 예비 과학도로서, 이런 질문에 대한 반감은 분명히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 입장에서는 피아식별이 어려울 만한 것이, 이런 질문은 주로 과학 지식의 지위를 좀 더 엄밀하게 세우기 위해 이뤄지는 것일 테지만, 과학지식도 틀릴 수 있다고 세련되지 못한 회의론을 펼치면서 창조과학적 믿음이나 유사과학을 정당화하는 물귀신 작전에서도 이 질문과 외견상 동일한 질문이 이뤄지곤 하며, 과학자들은 후자를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과학도들과 철학도들 사이에 충분한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자 입장에서 틈 날 때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는 생각들인데도 불구하고 철학도에 의해 이뤄지면 마치 과학을 무턱대고 부정하려는 시도처럼 여겨지곤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럴 때 피아식별 코드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실재성 문제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첨부하자면, 나는 자연이 주는 극도의 정합성과 조밀함으로부터 그 실재성이 요청될 수 있다고 보고, 실재성에 대한 의심은 불필요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 점들을 함부로 간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요청되는 것일 뿐 증명되는 것은 아니므로 논쟁의 여지는 많이 남는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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