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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8일 목요일

사회적 존재로서의 과학기술

  2018년 정부 예산안에 대한 환경운동연합의 의견서에서 양이원영 처장이 핵융합에 대해 남긴 코멘트가 그 실소를 자아내는 내용으로 인해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당사자인 양이원영 처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대응하면서 '핵융합 지지자'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일각에서 "과학기술은 지지/반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응하곤 하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1) '된다 / 안 된다'의 문제를 미리 말할 수 없고 일단 해 봐야 아는 것일진대(그것도 그 특정한 구현방식에 대해서만), 그것에 대해 실제로 (2) '해 보자 / 하지 말자'의 여부를 정하는 것이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일 테다. 적어도 후자의 차원에서는 과학기술을 지지/반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은 아닐 수 있다. 양이원영 처장의 문제는, 가히 자연신론적이라 할 만한 비과학적 주장을 근거로 (1)의 차원에서 '안 된다'의 쪽을 부당하게 채택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2)의 차원에서 '하지 말자'의 쪽을 채택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부당한 주장을 공문서에 수록하여 운동가로서의 공적 책임을 방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내 페친이신 전명환 씨가 이전 글에서 댓글로 탁월하게 지적해 주셨듯(Facebook 게시글 링크), 과학 예산과 에너지 예산을 잘 구분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현재 단계의 핵융합 연구는 (우리의 머리 속에서) 분명 과학에 속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에너지기술 관련 예산으로 책정이 되어 있다면 에너지기술 관련 예산인 것이다. 원래 권력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개념을 뒤틀어서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 아니겠나. 머리 속의 개념을 원하는 대로 사회 속에 구현하려면 어찌되었든 권력이 필요하다.

  지극히 정당한 주장을 하는 이공학도들을 자신의 진영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적폐 취급하는 행동은 매우 적폐스러우나, 그러한 행동에 대응하는 입장에서도 과학기술은 진공 속에 놓여 있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구현되는 것임을 늘 염두하여야 할 것 같다. 양이원영 처장은 이러한 측면을 무척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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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6일 화요일

집단에는 의식이 없다: 타자화의 징후

특정 집단에 대한 타자화의 징후 중 하나는, 그 집단 내에서도 서로 상호적으로 대립하는 다양한 견해와 갈등이 있다는 것이 무시되고 마치 그 집단 전체가 단일 인격체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당 집단에게는 모순을 일으키면서까지 이익을 좇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또한 이것은 집단을 부당하게 대표하는 어떠한 고정된 단일 상을 만들어서 소비하려는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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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의 무책임한 공적 판단을 규탄한다

핵융합 관련 예산 전액 삭감 의견을 주장하는 자료(아래 캡쳐. 출처는 Facebook '물리학과 무관합니다만,' 그룹 게시물)를 보고 경악했다가, 담당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끄덕끄덕했다. 나는 이것이 시스템을 원자론적으로(?) 들여다보지 않고 언어적인 차원에서 비약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며, 과학지식에 대한 접근성 부족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기본적인 논리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미 예전부터 수 초 이상 핵융합 반응 유지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그렇다 치고, 설령 '전력 생산에 실용화 가능할 만큼' 핵융합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선해한다고 해도, 저 말이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어찌 한낱 인간이 재현해 내겠느냐"는 자연신론적 예언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시민참여가 확대되는 것, 정치적 목적으로 비전문가에게 권력을 주는 것 등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며, 국민을 냉소하고 불신해 버리는 과도한 전문가주의를 경계한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정책 결정과 연관되는 권력이 주어진다면 전문가들이 참여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치적 목적으로 상징성 있는 비전문가를 등용하는 것이, 그 사람과 얽히게 된 이해관계를 반영하거나 혹은 어떤 메시지로서 기능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상징성으로만 기능하면서 정책 추진의 중심을 잡아 주거나, 혹은 휘하에서 생산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성실하게 하거나 해야 할 텐데 이런 경우는 정말로 납득하기 힘들다.

심각한 악순환이다. 전문가들이 정치참여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진 문제도 있겠으나(그러다 보니 점점 코너에 몰리고, 결국 자유한국당과 함께하게 되어서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집단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그 탓만 할 수 있을까? 이공계 인력 풀을 확보하려는 정부의 의지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 캡쳐 상단 때문에 양이원영 씨가 어느 새 아예 산업부로 가 계시고 산업부에서 이런 자료를 생산한 것으로 보아서 경악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자료는 환경운동연합 처장으로서 산업부에 전달한 자료인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악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다. 이 단체는 공론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정부 부처와의 채널도 확보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 문서는 예산안 평가에 대한 의견서로서 정부에 실제로 제출한 의견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 단체는 분명히 실제로 중요한 위치에서 권력(즉 공적 권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위의 논지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019년 3월 18일 월요일

작가의 작품개입이 부당해지는 순간



작품이 완성되고 독자들에게 수용되면 그때부터는 작가의 손을 떠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작품을 향유한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그 작품은 텍스트 그 자체라는 공통된 기반을 가진 채로, 그러나 각기 다른 형태로 수용되고 해석되면서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작가는 기존에 작품 내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사항들을 트위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언급하면서, '사실은 이러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한 마디씩 던진다. 그런 말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작품세계는 작품에서 표현된 오직 그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작품의 배후에서 실제 세계에 준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음을 가정하고 그것을 상상하는 일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창작 당시에 표현되지 않았던 설정이나 사건을 작가가 한 마디씩 끊임없이 추가하는 것은 무의미를 넘어 TMI이며,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들에게 수용되어 있는 작품에다 다시금 작가적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는 부당한 시도로밖에 달리 평가하기 어렵다.




물론 작품세계 밖 실제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국면이 드러나도록 설계된 작품, 혹은 자기 자신의 외연을 그 텍스트 자체에 한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작품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애매하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구체적인 예시를 알거나 스스로 제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독자와 소통하며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가는 과정 자체에서 농도 짙은 예술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창작 당시에 무언가를 설정해 두고 있었다는 '창작 비화'의 형태라면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좋다. 설령 그것이 독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모종의 이유로 '깨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작품의 이해와 평가, 새로운 지평의 발견에 도움이 되는 이러한 '창작 비화'가 아닌, 그저 탈맥락적으로 내용을 추가할 뿐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상당히 난감하다. 그것이 실제로 작가가 창작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인지, 혹은 이후에 추가한 생각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해당 작품의 오래된, 그러나 매우 라이트한 팬인 나의 입장에서, 혹시 이러한 행동들에 팬들이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다른 예술적 의도(혹은 예술 외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부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만약 작품의 세계관 아래에서 나올 후속 작품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탈맥락적으로 제시되기보다는, 해당 후속 작품들 내에서 충분히 표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저 미감의 문제일 뿐이다. 지금처럼 무언가가 멋지지 않다는 주관적 인상을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한 언어로 풀어내고자 할 때는, 늘 윤리적 규정성에 의해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으로 읽힐까 걱정스럽다. 만약 그렇게 읽힌다면 그것이 내 글쓰기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이 미감의 차원이라고 해서, 윤리적 차원에 비해 진지하지 않은 것도 결코 아니다.



2019년 3월 13일 수요일

연예계 성범죄 연쇄 보도: 사회적 반성이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무척이나 익숙했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룹인 빅뱅을, 최근 일련의 사태 때문에 절대로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은 비단 승리 한 명뿐 아니라 그의 소속사, 다른 연예인들 등 굉장히 여러 방향과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것은 남성 연예인들 및 주변인들이고 이들은 처벌받아야 하겠지만, 일반 대중인 우리의 입장에서도 이 일은 그저 충격받고 욕하는 것만으로 끝낼 일이 분명히 아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소문들이 더 일찍 알려졌으면 어땠을까, 누군가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것을 누군가는 알았을 것인데 그동안 알려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반성되어야 할까, 심지어 알려져 놓고도 오히려 무고 취급을 받았던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방송 등에서도 미약한 단서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자주 있었는데 눈치챌 방법은 없었을까, 범죄와 약간이라도 연관이 있는 내용을 거리낌없이 웃으며 방송에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그들의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누구인지부터 궁금해하는 대중과 언론의 반응들, 그것들에 실제로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주가, 그리고 핀트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그 자체로 2차 가해에 해당하는 반응들을 보면서 환멸이 많이 들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보면 결국 남성중심적 사회와 그 속에서 성장한 연예계 전체의 책임이 있다는 말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연예계와 대중문화 전반의 체질이 더욱 여성친화적으로 변화하고 남성들 중에서도 그 변화에의 동조자들이 다수가 되어야만, 누가 무엇을 하는데 어떠한 측면에서 문제적인 것 같다는 등의 이야기가 보다 많이 오가는 등 다양한 미시적 작용들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연예인들이 그런 행동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분위기의 문제뿐 아니라 실제로 특정가능한 범죄의 연결고리들도 수사해서 일소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할 것이다. 사안이 많이 커질 것 같은데, 연예계와 대중문화에 얼마나 큰 여파를 끼치든간에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 여파는 처음부터 아예 불필요했다면 좋았을,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서는 진작에 있었어야 하는 여파이다.

2019년 3월 11일 월요일

오독되는 담론: 그는 왜 유효타를 내지 못했나

  소위 '정체성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텍스트들이 여럿 존재한다.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대통령선거 전후로 그러한 글들이 특히 집중적으로 생산되었는데, 정체성 정치와 관련된 담론 전체에 공포감을 가지는 대안우파뿐 아니라 일부 전통적 보수진영,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도 이러한 성찰적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물론 진보진영에도 정체성의 정치 자체에 부정적인 이들은 많다). 이들은 주로 정체성 정치가 궁극적으로는 정체성 너머를 사유하여야 함을 보다 성실히 염두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나 역시 사회문화적 문제에서 신좌파가 갖는 현재적 파급력을 바람직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우는 흐름들 중 언어적 상징과 비유에 천착하는 일부의 경향을 경계하여야만 이러한 비판에 대해 강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러한 비판들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 중에는 유효한 지점을 타격하지 못하는(때로는 그러면서 대안우파적 사고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공허한 비판의 글들이 여럿 존재한다. 며칠 전에 우연히 접한, 페이스북 페이지 '카이스트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온 글(Facebook 링크) 역시 그 한 사례로, 유효한 비판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 글이 단순히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잘못되지조차 않은(not even wrong), 유효성이 결여된 비판이라고 직관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글 후반부에 제시된 여성우대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 때문이라기보다는, 글 전반부에 제시된 모종의 '생각의 방법' 때문에 그렇다.

차라리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의 차원에서 의견이 갈린다면, 오히려 적확하다고 판단되는 비판의 지점을 추출하여 나의 생각과 견주어 보면서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 정확히 무엇이라고 지칭하기는 어렵지만(한 분께서 말씀해주신 '방법론'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가까운 것 같다) - 이러한 '생각의 방법'의 차원에서 잘못된 지점이 발견된다면, 합을 맞추어 의사소통을 시작하는 것 자체에 상당히 많은 정신력이 소모된다. 왜냐하면 유효한 지점을 타겟팅하고 있는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과적인 견해가 같을 때에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개별 사회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립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논의의 과정 자체에서 발생하는 애매모호한 지점들을 나름대로 명료한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더욱 좋아한다.

  그렇다면, 담론에 대한 비판의 유효성 여부는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내가 직관적으로 느낀 바를 반추해 보면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비판의 유효성은, 담론지형을 얼마나 성실하게 캐치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채 작성한 글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듯하다. 이 글의 사례에 대입하여, 위 문장의 의미를 보다 상세하게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 상술하였듯 정체성 정치의 현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체성 정치 그 너머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종국에는 분열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은 무척 합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렇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 시간적 의미가 아닌 담론의 단계의 의미에서 - 의 정체성 정치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follow up하지 못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글의 앞부분에서 글쓴이는 "(전략) 이렇게 생각을 해야하는게 아닌가요?"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략)
왜 본인의 성별에 대해 소속감을 느끼고 사회문제를 해당 성별에 대입해서 공감하는지 진짜 .
(중략)
그 "원인"이 "사람를 남자 여자로 나누었을 때"
그때 주로 여성들에게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야하는게 아닌가요?
대체 왜 사람을 여자 남자로 나눠 놓은 통계에 미쳐가지고 남자는 이런데..여자는 이렇네..이러고 있나요 진짜.
해당 원인을 파악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는게 우선이지,
"여성" "남성" 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 원인파악을 못하고 성별 싸움으로 다투는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무래도 해당 원인을 파악하는것 보다 그냥 "그래 여자니까..여성이니까.." 라고 생각하는게 편해서 그런건가요?
(후략)

  그런데 문제는, 담론 참여자들이 이미 당연히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쓴이는 성별 갈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그 중에서 특히 여성주의 진영)이 두 성별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취급하고, 원인을 구체적으로 찾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서" 미쳐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해이자 허수아비 때리기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단어에 사로잡혀서" 원인을 찾지 않고 '성별 갈등' 프레임을 적용하는 쪽은 전통적 남녀 성역할을 강조하는 진영이지 않은가? 결론은 정체성 정치를 한다고 비판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이 당연한 것을 성실하게 염두하지 않고 있거나, 혹은 정체성 정치의 이와 같은 비판자들이 오독을 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체성에 매몰되는 것이 분열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늘 염두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데에는 상당 부분 동의하며, 그런 비판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근데 정체성 기반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과연 현재의 단계에서 이 글에서 우려하고 있는 정도로 정체성에 매몰돼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허수아비 때리기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정체성 정치에 대한 꽤 많은 비판들이 담론을 이처럼 오독하고 있다. 만약 담론의 내용을 다수가 오독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담론지형이 형성된다면, 그 담론지형은 엄연한 사실이 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며 넘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경계하면서 방어하고 설득하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 3월 9일 토요일

한국적 토양에서의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 적대성이 아닌 공공성을 향하여

* 이 글은 본 블로그 운영자가 Medium 페이지 'Skeplog'에 발행한 글(한국적 토양에서의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 적대성이 아닌 공공성을 향하여, 링크)을 옮긴 것입니다.

한국적 토양에서 무신론 및 자유사상의 다음 국면을 위한 이론적, 전략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역사적 기원과 시공간적 맥락의 문제>

자유사상(Freethought)이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교리, 전통, 권위 등을 거부하고 논리, 이성, 과학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과학적 회의주의, 세속적 인본주의, 무신론 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 왔다. 이러한 자유사상 개념은 서구권에서 유래했는데, 그 배경이 된 서구권의 정치적∙문화적 토양에는 기독교가 무려 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강력한 제도종교로서 강력한 권력과 억압을 행사해 온 역사가 있다. 따라서 무신론 및 자유사상은 종교가 갖는 비합리적 요소에 대한 철학적인 반대 신념임과 동시에, 권력을 가진 제도종교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성이 강한 운동이기도 했다. 하필 기독교가 강력한 제도종교로 기능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이유로 인해, 자유사상 운동은 종교의 대표자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성을 띤 채 저항적인 움직임을 도모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무신론자 및 자유사상가들은 종교 계열에서 생산되는 지식과 믿음들 중 비합리적이라고 간주되는 것들과 그에 따른 사회적 폐단을 다소의 유머와 조롱을 포함하는 형태로 지적하면서 결집을 도모했다. 특히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무신론적 철학자보다는 도킨스와 같은 과학자 출신의 무신론자들이 각종 선언들과 교양 서적들을 통해 부각되면서, 무신론자와 자유사상가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러한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적 측면에 있어 한국의 문화적 토양은 서구권과 많이 다르다. 한국의 대중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비종교적 사고가 꽤나 잘 정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 영역에서 종교가 일으키는 문제점이 다른 사회 문제들에 비해 눈에 띄게 큰 것 같지도 않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 문제는 사회 전면에 부각되기보다는 주로 대형 종교집단 내부의 분쟁 및 이에 대한 개혁적 종교인들의 탄식에 머무르며, 비종교인들 사이에서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주변인들의 소식을 통해 어렴풋이 전해져 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반 대중이 종교 자체를 분쟁의 대상 혹은 공적 대화의 주제로 삼을 일이 많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무신론자들처럼 기독교를 — 그 중에서도 삼위일체, 예수 부활, 천지창조 등의 가장 유명한 믿음들을 굳이 찾아서 과학적으로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며 — 조롱하는 것은 그 비판으로서의 진지함이 결여되기 쉬우며, 신자 개인들에 대한 비난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진지한 담론을 생산하며 공공의 이익에 유의미하게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집단이, 종교인들을 비웃는 집단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권력이 공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 한국적 토양에서 이것은 비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을, 과학 전공자들이 호기심 넘치는 비전공자들을 조롱하는 적대적인 양상으로 이어진다.

<자유사상: 은밀한 종교정치의 비판자로서>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한국에서 무신론 및 자유사상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개신교 대형 교회의 보수 정치 유착, 금전적 횡령, 권위를 이용한 성범죄 등의 폐단들이 존재한다. 덜 부각되지만 여타 종교에서도 유사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꽤나 공고하게 정착한 것처럼 보이는 세속주의는 종교의 공적 영향력에 대한 경계라기보다는 단순히 종교에 대한 무개입 혹은 무관심, 즉 ‘소극적’ 세속주의로서의 비종교에 가까우므로, 이러한 종교 내부의 폐단에 대한 공적인 가시화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반동성애 운동, 차별금지법 반대, 각종 가짜뉴스, 태극기 집회 등은 보수 개신교 대형교회의 동원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이들 운동을 보도할 때 보수 개신교와의 상관관계를 딱히 밝히지 않는다(이는 종교계열의 언론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교회 내부에서 진보적, 개혁적 성향을 가진 신자들뿐이다.
따라서 종교집단 내부의 반사회적인 부분들, 종교가 세력을 동원하여 정치적 문제에 비가시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누군가는 특별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종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공적 영역에서 논의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종교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비종교인들, 즉 세속주의의 적극적 실천자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사상: 과학적 회의주의 및 과학문화의 친구로서>

한편, 단지 종교적 극단주의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의료, 건강, 교육, 역사, 언어 등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도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언어적 사변과 비약에 따라 임의적으로 창작되어 맹목적으로 믿어지는 지식들이 일으키는 폐단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이들 ‘유사-지식’의 원천은 광신적 신념과 연결되는 것일 수도, 돈벌이와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유사상의 오랜 친구인 과학적 회의주의의 역할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회의주의는 유사-지식들을 검토하고 폭로하는 학술적차원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러한 유사-지식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추적하여 축적하는, 적극적이고 불온한 사회적 활동이 될 때에야 튼튼하게 정초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별 지식들이 틀린 이유 — 정확히는, ‘틀리지조차 않은’ 기괴한 주장인 이유 — 만을 지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런 유사-지식들을 학계에서 생산된 지식들과 같은 링 위에 올려 주는 것이 되며, 대중 일반이 원자론적, 실증적 태도를 체화하고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링에서 승리할 수 있는(즉 대중에 호소하고 설득하여 유사-지식들을 배제하는 데 성공하는) 방법은 빠르게 생산되는 유사-지식들의 모순점을 일일이 지적하거나, 혹은 과학의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뿐이기 때문이다. 유사-지식들이 생산되는 사회적 구조를 직접 추적하여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폭로해야만 학계에서 생산된 지식들이 유사-지식에 비해 차별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들과 달리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과학적 회의주의는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종교 및 철학에 대응하여 과학에 기반한 세계관을 건설해 보는 것, 그리고 과학적 용어나 개념들을 친숙하게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것과 같은 문화적 대안으로서의 과학문화와 협력하는 차원에서 노력을 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경우 과학과 과학문화를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를 탄복하게 만드는 물질, 천체, 혹은 시공간 그 자체와 같은 경이로운 물리적 대상들과 그것들에 대한 놀라운 이론들을 소개하는 글들은 그 자체로 과학이라기보다는 과학자의 ‘수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과학 지식과 논리, 발상의 전환을 기반으로 인류, 혹은우주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글들 역시 그 자체로 과학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낯설게 보기 기법을 활용하여 서술된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문화의 형성은 분명히 필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나, 만약 이러한 과학문화의 세계관이 뭔가 과학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다른 세계관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간주되거나, 그 자체로 과학인 것처럼 혼동되는 일이 만성화되지 말아야 하며, 과학과 과학문화가 서로 분리되되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이러한 과학문화와 의미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보다 좁게 사용함과 동시에, 과학지식의 인식적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과학지식의 생산과정, 즉 과학활동의 특성을 분석하여 그 인식적 성공요인을 설득하겠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유사상: 세속적 인본주의의 친구로서>

한편, 성차별주의, 반동성애, 계급주의 등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시도는 주로 교리, 철학적 논증, 지엽적 연구결과, 심지어 개인의 ‘뇌피셜’ 등을 바탕으로 해서, 명백히 실존하는 인격체들의 정체성과 권리를 부정하는 혐오적 신념이다. 누가 보아도 비과학적인 교리에 기반한 차별주의뿐 아니라, 진화론, 적자생존, 공리주의 등을 인용하여 일견 ‘과학적’이어 보이는 유사-철학적 차별 정당화 논증들도 충분히 이에 해당하며, 과학의 껍질을 빌려 쓰고만 있으므로 똑같이 비과학적이다. 이들에 대응하여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자유사상의 또다른 오랜 친구인 세속적 인본주의의 역할이 요구된다. 세속적 인본주의에서 역시 위와 마찬가지로, 차별주의에 대한 개별적 명제 차원에서의 반박과 함께, 사회적 혐오 및 차별의 본질과 그것이 종교집단에서 생산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하는 데까지 이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학적 회의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가 내세우는 취지들은 원론적으로는 좋아 보인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이들이 경계하는 대상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는 적극적 지양보다는 소극적 무관심의 행태만을 보여 왔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특별히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구체적인 활동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들 분야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 오면서 나름대로의 독립적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담론이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 놀이를 넘어, 공공성을 향해>

정리하자면, 각종 비합리적 믿음에 의해 일어나는 폐단에 대응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려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무신론자 및 자유사상가들로서 정체화하고 결집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초기에는 그들의 담론이 한국적 토양에 적응하여 성숙하기 이전 단계로서 서구권의 코드를 수입하여 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종교에 대한 과학주의적 검토에 놀이의 형태로 집중하면서 스스로의 공적 잠재력을 다소 저해하는 모습도 종종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은 한국적 토양에서 시간을 갖고 성숙하고 있으며, 과학적 회의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라는 친구들과 함께 스스로의 가치를 공공성 속에 녹여내면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으로의 성찰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적대성이 아닌 공공성을 향하여, 서로 신념이 다르더라도 상호 존중 하에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하여 무신론 및 자유사상 담론이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2019년 3월 7일 목요일

기독보수의 시혜적 성평화론: 그들은 왜 정상가정을 잃지 못하나?


  가장들이 나서서 여성을 공격하지 않고 여성의 지지를 받는 남성운동을 하겠다는 취지의 단체 아빠의 약속의 창립준비 행사(크리스천투데이 기사 링크 보기)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난무했다. 개신교 인사들이 중심이 된 이 운동은 결국 여성 권리 신장이 아닌, 가정 내에서 여성들이 주로 문제제기하는 요소들을 시혜적인 입장에서 제거함으로써 정상가정을 유지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가부장적 역할론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태도에 불과하다. 자기성찰과 절제를 통해 좋은 태도를 보여주겠다는 점에서 성평화연대보다 약간은 낫지만(그래서 늘 이야기하듯 보수적인 기성세대가 청년들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 페미인 면도 조금은 있다), 그저 개인적 양보의 수준에서 갈등을 대략만 봉합해서 현상유지를 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결국은 똑같다. 게다가 가부장적 책임감을 디폴트로 놓고 있는데 그 책임감이 결국 결정권으로 귀결된다는 점, 그리고 역시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인 매우 심각한 성소수자 혐오가 난무한다는 점은 덤(사실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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