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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9일 토요일

테넷 - 후기 (스포일러 있음)

체계적으로 정리는 못 하겠어서 러프하게 나열만 해둠.

스포일러(?)가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줄거리를 디테일하게는 이해하지 못한 상태여서 크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음.

 

1. 과학적 소재 및 설정에 대해

먼저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에서 늘 큰 떡밥이 되는, 소재 및 설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뭐 아래에서 길게 쓰긴 할 테지만, 사실 마이너 디테일이다. 영화 관람은 물리학적 원리 그 자체보다는 시간역행이 가능하다는 것만 알면 되고, 그 나름의 시간여행 설정이 일관적이면 된다고 생각해서, 디테일한 고증(이를테면, 시간을 역행하는데 순행자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게 일관성있게 정당화 가능한가 등)을 하고 싶은 욕구는 별로 들지 않았다.

사실 소재 자체(인버젼의 물리학적 원리)는 영화 감상에 그렇게까지 큰 진입 장벽은 아니었다고 본다. 만약 엔트로피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치를 통과하면 시간을 역행해 갈 수 있다는 그 점만 소개되었다고 해도 작품 이해에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재미가 떨어졌겠지만...). 어려웠던 것은 오히려 설정보다는 스토리였던 것 같다. 테넷이라는 조직과 사토르의 조직이 펼치는 작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려면, 물리학적 원리를 공부하는 것보다는, 복잡한 시간선을 잘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큰 얼개는 알겠는데 최종 작전의 디테일은 아직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밟혔던 점은, 역행과정 중에 순행과정 속의 '나'와 접촉해야만 소멸한다는 설정이다. 애초에 '나'의 경계가 애매하지 않은가? 역행과정 중의 '나'가 반물질이라면, 실제로는 '나'든 아니든, 그냥 순행과정 속의 아무 물질과 만나도 소멸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소멸을 막으려면 방호복으로 감싸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장 같은 것으로 진공 속에 띄워져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영화상의 여러 작전 장면들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뭐 상술했듯 이 정도야 그냥 설정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나무위키에서는 시간역행 중에 산소호흡기가 필요한 것이 시간이 거꾸로 가므로 호흡이 곧 산소를 뱉는 것이 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역행자는 반물질인데 순행과정의 산소는 물질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외에 뭐... 열의 흐름이 반대로 된다거나 하는 디테일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역행자 입장에서는 평범한 온도였다가 불에 닿으니 추워지는 것인데, 순행자 입장에서 그 장면을 보면 차갑던 애가 불에 닿아서 평범해지는 것이니 말이 된다.


2. 영화 내용에 대해: 첩보영화적 특성과 수렴적 구조에 주목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은 근본적으로 범죄 영화, 첩보 영화 감독이구나 싶었다. 인셉션 및 다크나이트 3부작에서는 내용상 직접적으로 그러했으며, 놀란의 초창기 작품도 그런 장르였다고 알고 있다.

본작은 '세상을 구하는' 영화이며 과학적 설정이 대거 채용되었음에도, 모험적 색채가 있었던 <인터스텔라>와는 달리 그러한 범죄 및 첩보영화의 색채가 짙다. 아마도 영화의 핵심 사건에 있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시적인 이유 역시 제시되기는 하지만) 사토르라는 개인의 동기가 강력하게 부각되기 때문인 것 같다.

범죄, 첩보 영화에서는 주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소수의 인물들이 극을 주도하며, 그 결과 역시 바깥에 공표되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러한 특성을 유지하면서, 한 술 더 떠서 그 인물들 역시 결국은 거대한 설정과 서사의 도구로 복무한다. 

역행과정의 실현이 가능해지고 그것이 순행과정과 상호작용하는, 새롭게 발견된 현상이 영화를 성립시키는데, 영화에서 펼쳐지는 작전은 그 새로운 현상을 활용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일으킬 파국을 방지하고 존재를 은폐하여 기존의 것들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영화의 구체적인 흐름 역시 열린 구조라기보다는 닫혀있는 수렴적 구조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보였던 몇몇 장면들이, 후반부의 자기 자신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확히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미래세대의 일은 미래세대의 몫이다'라는 대사들에서도 묘하게 그런 색깔이 느껴진다. 놀란 특유의 시대관, 세계관이 영화 속에서 '과학적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 혹은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영화의 근본적인 성립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자연화된 한계인 것이다.

사실 <인터스텔라>도 그러한 면이 있다. 물론 <인터스텔라>의 주요 소재인, 갑자기 등장한 웜홀은 파국이 아닌 구원을 향하고 있으므로 <테넷>의 인버젼과는 다르다. 그러나 강한 중력 하에서는 시간이 엄청나게 왜곡되어 흐르고, 그것을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주인공의 딸이 주인공보다 훨씬 늙게 되는 것은 상술한 자연화된 한계에 해당한다. 테서랙트를 통한 과거로의 신호 전달이 가지는 수렴적 구조도 <테넷>과 비슷하다. <인터스텔라>에서는 구원을 향한 모험서사가 주는 발산적 숭고감과, 이러한 자연화된 한계가 주는 수렴적 숭고감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반면 <테넷>은 훨씬 더 수렴적이다. 경고된 파국은 세계 전체가 멸망하는 것인데 설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특히 모험장르가 아닌 첩보장르의 특성상 그런 식으로 가면 긴장감을 유지하기 쉽지않다), 그렇다면 (큰 틀에서 예상가능한 방식의) 문제의 해결은 반쯤 보장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디테일에 집중하여, 기존의 영화들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서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볼 때 시간여행이 소재라고 주워들었기 때문에, 쥐가 버튼을 눌러 앤트맨을 복귀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미래의 히어로들이 과거로 가서 쥐를 조종해서(...) 앤트맨을 복귀시키는 것인 줄 알았다(물론 실제로는 그런 식이 아니었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간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시간의 흐름은 순행이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에서 그러할 것이다. 반면에 이번 <테넷>에서는 시간이 아예 역행하며, 이러한 대담한 설정 속에서 장면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이 설정 속에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야 일관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유의미한 장면을 만들지를 머리 싸매면서 고민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서 '아 이건 뭔가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오슬로 프리포트에서 등장한 괴한들의 정체, 배에서 어떤 여성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영화 후반부에서 어김없이 떡밥 회수가 되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여러모로 (지극히 복잡하긴 해도) 스토리상으로 떡밥을 남기기보다는, 깔끔하게 매듭짓고 끝내는 듯한 영화였다. <인셉션>처럼 해석이 분분한 결말도 아니고, <인터스텔라>처럼 그 정체가 해명되지 않는 존재가 개입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미래의 인류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고차원 외계인 같은 존재가 맞다는 내용을 본 것 같다). 물론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미회수 떡밥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테넷>에서도 역시 놀란 감독 특유의 차갑고 비인간적인 영상미(...)는 유지된다. 대표적인 것이 예고편에도 등장한, 바다 위에 풍력발전기가 쭉 깔려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액션 씬과 전투 씬도 상당히 다이나믹하게 연출되며, 특히 시간 역행을 이용한 비교적 소규모의 신기한 장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때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가 대단히 좋아하는 구성방식이 있다. 지구적인(?) 운명이 한두 사람의 삶의 장면과 근본적으로 얽혀서, 그 장면이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대표적인 것이 <트랜센던스>이다). 이 영화에서는 바로 사토르와 캣이 등장하는 배 위에서의 장면이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애틋하고 운명적인 사랑과는 정반대로, 불화와 긴장이 극대화되는 내용이긴 했지만 말이다. 전지구적인 운명이 한두 사람이라는 좁은 창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이런 식의 연출은 묘한 숭고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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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6일 수요일

극우적으로 동원되는 종교와 과학: 부당하게 자연화된 가치명제로서

 '차이를 인정하고 살라'는 주장은 우생학스럽고 차별적인 것인데도, 나름의 논리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서 찾아볼 때마다 놀란다. 예전에는 그 메시지를 나름대로 감추려 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아예 저 문장을 직접 말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박근혜정부 때 권력과 결탁했던 청년단체 쪽에서 좌파를 욕하던 맥락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차이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걸 부당하게 전복하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한때 관심을 모으던 성평화라던가, 보수 유튜버들이 패시브로 깔고 가는 안티페미니즘(이는 사실 보수뿐 아니라 반대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그것을 선명하게 극우담론에 복무시키는 매체 위주로만 다룬다)도 그렇다. 많은 청년 대안우파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핵심은 결국 저 메시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건 전통적인 성역할을 자연적인 것으로 강조하고 뉴에이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하는 극우 개신교 논리와 통해 있다.

물론 디테일한 차이점은 있다. 먼저 기독교 보수주의에서는, 상술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세계관 상에서의 모종의 질서가 붕괴될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우려한다. 반면 청년 대안우파는 주로 과학과 이성을 내세워서 차이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과학 중 꽤 많은 것들은 사실 부정할 수 없는 '과학지식'이라기보다는, 환경과 사회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회적 선호 같은 것을 과학적 진리라고 본인들 마음대로 생각한 것이거나,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함량미달의 과학을 인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부당하게 자연화된 가치명제로서, 종교에서 말하는 자연의 섭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다.

물론 모범사례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과학지식과 종교적 신념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과도한 신봉에서 오는 폐해를 비판하는 취지에는 동감할지라도) 그 차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외곽지대에서 왜곡된 형태로 극우논리에 동원되는 방식은 서로 별로 다르지 않다. 극우 개신교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이 기독교에 기반을 두었다는 등 자신들의 세계관과 세속국가인 한국의 국가관을 얼토당토않게 동일시한다. 이들은 심지어 국가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보수주의에 친화적이지 않은 국가권력은 제대로 된 권력으로 인정을 안 한다. 한편 청년 대안우파에서도 나름의 논리를 기반으로 좌파이념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이질적으로 출발한 저 둘은, 자연스러운 차이가 지워짐에 따른 사회(혹은 국가)의 붕괴를 우려하는 보수주의라는 한 몸체의 양쪽 바퀴로 귀결된다.

이 양쪽 바퀴가 향하고 있는 길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먼저 청년 대안우파의 경우 크게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따른 공포, 문화컨텐츠에 대한 PC로 요약되는 좌파적 개입에 대한 반감, 그리고 군대문제가 핵심으로 보인다. 앞의 두 개는 사실 잘못 흘러간 케이스가 분명히 없지는 않았던데다(그러나 잘못이 없다고 잘못 알려진(...) 케이스 역시 분명히 있다), 기존에 디폴트로 존재해온 잘못된 인식이 뿌리깊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다 보면 헛발질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으므로 정말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문제성은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대응하지만, 디폴트로 존재해온 문제적 인식은 별로 인정하지 않고, 타개하는 데 협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문화컨텐츠에서 여성 소비자들의 발언권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길게 봐야 하고, 더욱 시급한 것은 군대문제가 아닐까 한다.

군대 문제는 근본적으로 어처구니 없이 심각한 것이 맞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실질적인 개선을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평상시 복무환경뿐 아니라 의료시스템이나, 사고 발생 시 대처 역시 매우 열악하며, 단순히 열악함을 넘어서 '할 수 있는데도 안 해서' 문제가 터지는 군대 특유의 뭣같음이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잘만 한다면 정치적 효능감을 건전하게 발휘할 기회도 있을 것이나, 적어도 현재와 같은 식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보수정권이 아닌 현 정권에서 군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점이 많은데 이에 대한 홍보 역시 필요하다고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개신교 극우주의에 대한 대응 문제다. 먼저 극우 개신교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여러 '이상한' 주장들이 비과학적이며, 나아가 종교적 신념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 자체가 우려스럽고 위험하다는 식의 비판은 많은 비종교적인 이공학도의 입장에서 꽤나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있는 종교적 경향을 지나치게 타자화시켜 오히려 그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고, 종교에 대해 인류가 기존에 쌓아 온 '문과적' 학술지식과의 접점이 많지 않아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정작 필요한 곳에 잘 가 닿지를 않는다. 예컨대 소위 신무신론의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밈 이론'은 방법론적으로 학술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 유비적인 낯설게 보기에 가까우며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인다. 극우 개신교의 이상한 주장들이 가진 문제점을 링 위에 올리려면, 그 주장들이 생산되고 소비되며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구조를 사회학적으로 따지는 구체성이 필요하다.

현재 코로나19 재확산 국면에서 나타나는 반사회적, 음모론적 태도를 포함하여, 한국 극우개신교에서 이상한 지식이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는 것은 현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현상의 '원인'에 보다 가까운 것은 공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지역사회 커뮤니티 기능과, 노인과 탈북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심지어 교육 기능 일부까지 과도하게 종교단체에 위임(극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되어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책임을 위임하는 대가로, 세속사회와는 다른 인지도식이 신도들에게 체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떠한 반사회적 신념이 침투할지는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그 중 일부가 정치적으로 동원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위임된 공적기능을 집행하는 종교활동 현장에서 사적 신념이 설파되는 것 자체를 국가가 신경써서는 안 되고, 게다가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종교의 직접적인 정치동원만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만 해도 위험할 수 있다. 한편 비종교적 민간영역은 복지를 굴릴 유인이 없다. 따라서 이렇게 종교단체에 과도하게 위임되어 있는 사회적 기능을 비용을 들여서라도 국가가 어느정도 회수하여 집행할 필요가 있다. 공적 프로그램에서라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통한 감시와 의견표출이 비교적 자유롭고, 조직 역시 종교지도자와 같은 특정인으로 소급되지 않기 때문에 보다 건전한 운영이 가능하다. 한편 세속적 민간영역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각종 복지프로그램에 대한 진심어린 참여 및 감시와 함께, 컬트적이지 않은 지식을 공적 영역, 특히 교육 등에 효과적으로 공급하는 것 역시 절실히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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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0일 목요일

전문연구요원, 학위취득 늦어지면 현역입대 처분?

(기사 링크: 연합뉴스 최평천 기자, "'대체복무' 전문연구요원, 박사학위 취득 못하면 현역 입대")


 정책이라는 것은 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국민들의 법익이 보호되도록 짜여야 한다. 국방부의 이번 입법예고대로라면 최악의 경우까지 갈 것도 없이, 아주 일반적으로 예상가능한 경우에 대해서조차 보호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불합리를 조장하고 제도의 근본적 취지를 훼손할 위험성이 크다.

대학원에서 풀타임 학위과정을 제대로 밟고 연구를 잘 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수료 후 5년을 넘기는 경우는 전혀 희귀하지 않다. 게다가 실적이 좋고 요건이 충족된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지도교수가 졸업을 제 때 시켜주지 않는 경우 역시 심심치 않게 존재한다. 학위취득 노력을 안 하고 대체복무 시간만 때우는 (실제 있기나 할지 의문인) 극단적 사례를 방지하려고, 실제로 존재하는 수많은 떳떳한 케이스들을 잠재적 불이익으로 몰아넣는 조치는 합당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수료 후 5년이라는 기간을 인위적으로 정해두고, 해당 기간 내에 학위 취득 못할 시 현역입대 시키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알려면 기존 전문연 제도, 혹은 다른 대체복무 제도에서 무슨 잘못을 했을 때 편입취소 및 현역병 변경 처분이 이뤄지는지 살펴보면 된다(사실 산업기능요원 등 다른 대체복무제도의 편입취소 및 현역처분도 문제조항이 많긴 하다). 국방부의 이번 입법예고는 학위취득이 늦어지는 것을 심각한 수준의 '부정', '부실 복무', '복무의무 위반' 취급하는 부당한 징벌적 사고방식이자, 제도취지 및 현장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탁상공론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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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9일 수요일

강력한 민간감시와 보호만이 한국군을 정상화한다

 한국 군대는 사건 조작하고 은폐하기, 속임수로 내부고발자 회유해서 조지기 전문 집단인가? 김영수 소령님이 공유해 주신 아래의 글을 보니, 심지어 병사한테만 저러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부당하게 수감되어 있는 당사자는 얼마나 속이 탈까 싶다.

군대의 특수성과는 상관 없이 그 자체로 명백하게 불합리한 이런 일이 더는 없도록, 군대라는 집단은 민간의 보편적 상식에 발맞춰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심과 용기가 있는 훌륭한 군인들의 양성과 더불어, 그들이 권력과 책임을 가진 위치에 가서도 헛짓을 하지 못하고 순리대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감시 및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군이 사건사고에 막장으로 대응할수록, 민간으로부터 더욱 많은 시정요구를 받는 상식적인 구조가 자리잡는 것이 건강한 군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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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7일 월요일

행정주체 간의 일관성 확보 역시 정부의 책임이다

나는 카페에서 일을 많이 하는 편이며, 1-2월경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이후로도 그렇게 해 왔다(마스크는 늘 음료 취식하는 순간만 제외하면 착용했다). 그러나 카페에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얼마전부터 거의 가지 못하고 있다. 나도 위험해질 뿐더러, 혹시 모를 전파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광복절 즈음한 8월 중순부터 수도권에서 급격한 확산이 일어날 것 같으니 앞으로는 더욱 갈 일이 없겠다. 바이러스가 미세먼지도 아니고, 도대체 왜 밖에서 쓰고 안에서 벗는 것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밖은 덥고 안은 시원한데 말이다. 심지어 말할 때 답답하고 숨이 차서인지, 오히려 서로 대화 나누는 사람들일수록 착용을 안 하는 모습도 있었다.

상술했듯 지난 학기 동안 카페에 자주 갔지만, 그땐 다들 마스크를 썼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안 쓰고 있다는 것을 내가 처음 인식한 건 지난 8월 8일 강남 스타벅스에서였다. 극우 개신교 교회에서 이미 집단감염이 발생했음에도 음모론적 인지도식을 바탕으로 비협조하면서 계속 위험 증폭시키는 것도 당연히 문제지만, 이런 것을 보면 그동안 불특정 다수에서 알게 모르게 전파가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방역당국이 꾸준히 경고해온 바이기도 하다. 사실 당연한 것이, 바이러스라는 것도 결국 바깥의 어딘가로부터 교회 사람들한테 들어간 것 아니겠는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광화문 집회가 집단감염의 결정적 계기가 되더라도, 이런 은밀한 감염이 (결과론적으로) 충분히 관리되지 못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개인 차원에서야 불특정 다수의 경각심이 없어진 것과, 전광훈 목사의 교회가 비난받아 마땅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욕하고 말며, 이 둘 모두 정당하다. 그러나, 종종 얘기하듯이, 국가 입장에서는 불특정 다수 탓을 하는 게 원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으며, 일반인들의 경각심 부족도 결국 고려해서 정책을 짜야 한다(솔직히 전광훈 목사의 경우처럼 영향력 가진 개인이 반쯤 고의적으로 방역망을 파괴하는 것은 강제력 없이는 어떻게 대처할까 싶다). 그러나, 경각심을 갖자는 꾸준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물론, 방역이 1순위긴 해도 유일한 목표는 아닌 상황에서 각 기관마다 고유의 역할이 있고, 소비 진작 정책과 코로나 재유행 사이에 시차라는게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방역이란 방역당국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아니라 종합적인 것인데, 깜깜이 감염이 많다는 등의 꾸준히 지적되어 온 위험을 고려해서 일관성 있는 메시지가 나왔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정책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경각심을 조기에 강화시킬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는 지적도 많다.

행정의 주체가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뭉개는 듯한 주장들을 보고 혹세무민하는 것 같아서 다소 짜증났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그런 주장들에도 경청하고 반성해야 할 일말의 진실은 있어 보인다. 각 행정주체가 상반되는 메시지를 던질 때는, 사람들이 그 중간 선에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쪽 얘기를 듣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를 고려하면 메시지의 일관성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것 역시 정부의 책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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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5일 수요일

관짝밈 재현 블랙페이스 논란을 보며

블랙페이스가 사회적 금기에 해당한다는 것을, 나는 작년 이맘때쯤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과거에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찍었던 사진이 논란이 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의정부고 졸업사진에서 관짝밈을 재현한 것이 블랙페이스로 논란이 되고 있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행위 자체는 어찌보면 별로 구체적이지 않으며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상당히 일반적인 행위이다. 또한 이번에 논란이 된 의정부고 졸업사진도 흑인을 희화화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밈을 그대로 따라한 것뿐인데 하필 그 밈에 등장하는 인물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흑인의 외양을 재현하겠다는 것도, 블랙페이스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일반적으로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즉, 흑인 분장을 하게 된 계기가 마치 일베처럼 금기를 위반하는 짜릿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금기라는 사실을 몰라서였다고 추측해본다(물론 아닐 수도 있다). 이는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개연적으로 그럴 수 있겠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할 경우 세간의 이러한 반응에 거부감이 들거나 당혹스러울 수 있다.

찾아보니 블랙페이스는 19-20세기 연극 같은 데에서 실제로 흑인의 모습을 희화화하며 조롱하는 기능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비흑인이 검은 얼굴과 두꺼운 입술 등으로 분장하여 흑인을 모방하는 것, 나아가서 굳이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 그 자체가 금기시되게 된 모양이다. 몇몇 사람들이 진공 속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금기가 아니라, 여느 금기와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다(사실 자연/인위의 구분이 있다기보다는, 금기로 정착되는 배경이 된 갈등이 어느 정도로 널리 문제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겠지만).

게다가 흑인에 대한 차별은 현재진행형이며 여전히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기에 대한 교육과, 구성원 개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금기를 늘 염두에 둔 채 행동하도록 부과되는 제약, 그리고 그것이 위반되었을 때 생기는 갈등은 사회가 짊어져야 할 일종의 업보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다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것은 미국 등 서구권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행동은 글로벌한 맥락 속에 놓여 있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흑인에 대한 백인 주류사회의 인종차별이라는 맥락 속에 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규준을 요구하는 것이 억지스럽다는 의문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고실험을 해 보자. 평생 동안 어떤 적극적인 인종차별행위도 하지 않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도 전혀 차별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상의 아주 훌륭한 백인이 있다고 하자. 개인 차원에서는 흑인에 대한 어떠한 업보도 쌓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흑인과의 교류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면, 모종의 변화로 인해 그가 흑인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을 경우, 무지 상태에서의 개인적 선량함만으로는 그의 무결함이 담보될 수 없다. 의도치 않은 금기 위반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다양성과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성될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 한 개인을 매개체로 해서 드러난 것이다. 만약 흑인들과 실질적인 교류를 하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려면, 오히려 금기들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면서도 그 금기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일부 잘못된 인식과 달리, 선량함이라는 가치는 나쁜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이해할 때만 성취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백인과 흑인의 문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인종갈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가시화조차 안 될 정도로 다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문화적, 외연적으로 유독 균질적인 환경 같은 것이 작용하기는 하며(요새는 꼭 그렇지도 않은데 균질성이 강요되는 것 같지만...), 그러한 환경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분명히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그리고 추세 역시 그렇다. 다양한 외양과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을 대할 가능성이 갈수록 늘어가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발맞춰가야 한다. 조금 더 강하게 주장하자면, 그러한 가능성의 실현 여부와는 별개로 그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만 하더라도, 금기를 존중하자는 주장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기본적인 우위는 깔고 간다고 생각한다.

블랙페이스의 기원이 된,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 맥락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단순 재현한 것일 뿐인데 왜 마음대로 상처를 받느냐 하면, 우선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고 단언할 수 없으며, 문화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답하고 싶다. 상처받는 이유의 정당성(?)은, 상처를 주게 된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블랙페이스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혹은 비흑인끼리의) 생활양식을 불필요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에 대한, 흑인을 향한 사회의 태도를 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의제가 사회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는 한국사회에까지 블랙페이스 금기가 이식되는 것에 대해, 단순히 사변적으로 설정한 도덕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앞으로 얼마든지 마주하게 될 매우 실질적인 문제를 위한 덕성의 연마이자, 향후 부끄러울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한 예방조치라고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이해가 되지 싶다.

노라조가 <카레>에 대해 최근에 사과를 한 것 역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떠나 꽤나 인상적으로 보았다. 외국문화 희화화에 대한 국내 인식이 부족했고 케이팝의 저변도 지금처럼 넓지 않았던 10년 전 일이라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사적 당혹감보다는, 불쾌감을 느끼는 당사집단이 존재하는 한 발맞춰가야 한다는 것을 우선시한 바람직한 태도였다고 본다.

타자를 재현하는 것, 잠시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은 이렇듯 여러모로 간단치 않은 일이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즉 누구나 쉽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행위인데도, 광의의 예술의 영역에 속하며, 모방을 하고 나면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한 시간적, 정신적 자원을 들여 고민을 하는 것은, 행위하는 이와 그것을 관리하는 이의 기본적인 책임이다.

문화라는 것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하면 안 되는 그런 사항들이 많다. 답답하고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금기들을 인식하고 존중해 보는 것은 다른 문화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굳이' 위반하는 의도가 충분히 정교하게 설득되어야 한다. 예컨대 (물론 당시 나를 포함한 청소년들 위주로만 그랬을 수도 있으나)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몇몇 표현은 2010년대 초중반을 중심으로 상당히 강한 금기에 해당했다. 비극적 서거를 희화화하는 단어로서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유발하지만 누군가에겐 매우 큰 불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심의 여지 없는 정치적 동지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을 추모하는 연설에서 '야 기분좋다'라고 외친 것은 실제 의도와 실질적 파괴력과는 별개로, 저 금기와 관련하여 상당히 강한 미적 상징성이 있었다.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딱히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는 하는데 여튼... 금기의 존재 하에서 그것을 위반하는 짜릿함이 유행의 본질이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그 배경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물론 시민사회와 공교육의 영역에서 해결을 보아야 바람직할, 금기를 위반하는 일베적 짜릿함을 대통령이 이러한 퍼포먼스로 직접 회수해 버린 것이 온전히 정당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나(....) 이것은 뼈 있는 농담 정도로 해 두고 어찌되었든 그렇다.

금기의 존재 자체, 혹은 그 금기를 적극적으로 이식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술한 내용들을 감안할 때, 그러한 금기에 대한 충분한 이유 없는 위반은 더욱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비극이나 사회적 약자집단의 존재와 결부되어 형성된 금기를 일부러 위반하는 일베적 짜릿함은 물론이고, 이번 사건에서 내가 추측하듯이 금기인 줄 모르고 위반했다가 비판받을 때 가지게 되는 억울함 역시 그 존재는 인정받되, 잘 관리되고 교육되어야 할 감정들이다. 그러한 감정들을 갖는 것에 대한 지적, 인간적인 이해는 필요하지만 지탄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맷집 있는' 사회는 금기가 일방적으로 위반되어도 문제삼을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금기에 대한 감수성이 높고 그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정교하게 위반될 때에 다들 괜찮아하는 사회이다.

의정부고의 재미있는 전통은 이렇듯 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면이 있어 늘 우려가 된다. 요구되는 책임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큰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좋은 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금기인 줄 몰랐다면 문제가 되었을 때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반발하기보다는 그 문제성을 인지하면 되며(꼭 학생들 얘기가 아니라, 이 논란을 접하는 외부인들의 반응 얘기다), 이왕 할 거라면 사진이 촬영되고 퍼지기 이전에 교사들이 그러한 교육의 역할을 잘 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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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일 일요일

과학지식은 공적 관심사가 될 수 있는가: 이공학도들의 불만에 관하여

환경운동 단체의 과학기술 인식을 비판하는 소위 과학주의자들이 기후위기 문제에 진정성이 없을 거라고 간주되곤 하던데, 이 역시 굉장히 이분법적인 관점이라고 본다. 예컨대 나는 기후변화를 그나마 늦출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 원전 위주의 에너지 시나리오이며, 기술이란 적절한 감시 하에 적극적으로 쓸수록 더 안전해진다고 생각하므로 탈핵 기조에 부정적이다. 이에 대해선 조만간 자세히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정성 있는 환경주의적 실천과 감시활동을 해왔으면서도 원전에 대해 전향적인 의견을 가진 단체는 찾기 어려우며, 원전에 친화적인 단체들은 태생상 환경주의적 의제생산과 실천보다는 전문지식에 천착하는 양상을 보이는데다 공적인 설득력과 파괴력이 있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 지속적으로 실패하고있다. 이렇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느 진영과도 결정적인 지점에서 공감대가 안 맞다고 느낀다. 이미 도래한 비가역적 기후변화라는 컨센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이런 문제로 붕 떠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비단 원전이라는 단일 의제뿐 아니라, 과학기술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고, 동의되지 않는 주장을 볼 때 개별 논거뿐 아니라 기저에 깔린 그러한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감시자로서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대부분의 환경단체와 결정적인 공감대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게 '내가 이공학도이고 그들이 비과학적이어서'는 분명히 아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지만... 과학 vs 비과학의 단순한 도식 하에서 과학을 자처하며 비과학 쪽을 공격하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하는 과학주의적인 모습이 실제로 도처에서 보이고, 나 또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한갓된 과학주의적 의식이 종종 그러한 방향을 향함을 부정하기 힘들므로 딱히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대개 이공학도로서의 솔리드한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개별 과학지식, 혹은 과학분야의 내적 논리가 사회적으로 수용되기를 기대하나 그것이 실패함으로 인해 매번 실망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고립되고 방치되어왔다. 슬프게도, 사회는 이공학도들이라는 '집단 아닌 집단'이 그토록 수호하려 하는 과학지식의 정확성(?) 그 자체에 딱히 관심이 없으며 그것을 수호하는 데 별로 중대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과학적 지식과 기계론적 세계관에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판단의 주된 근거로 삼는 이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불만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공학도가 훈련받는 교과서적 과학지식들과 현장 전문지식들은, 냉정히 말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해,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 간주되)는 여러가지 기술적 산물과 그를 둘러싼 갈등 및 의사결정 구조 하에서 담론을 생산해내는 역량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시피하다(물론 그러한 담론을 서포트하는 개별 주장의 근거로서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겠다). 또한 이공학도라고 과학적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상술한 불만은 이러한 공론장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거의 다뤄지지 못하며 오히려 종종 웃음거리가 된다.

반면에 환경운동은 현실적인 갈등과 의사결정에 오랫동안 개입해왔으며 대단히 실천적이다. 또한 과학'주의'는 대체로 경계하지만 필요하다면 과학기술에 얼마든지 근거를 두는 등 상당히 다층적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말해 환경운동은 환경운동이지 과학도 반과학도 아닌데, 환경운동 전반에 걸쳐 축적된 지식과 활동에 대해, 그 프로세스를 참여하거나 따라가본 경우가 아닌 이공학도 일반의 입장에서 개별 논거에 대한 의문 제기 이상으로 어떤 파괴력있는 뭔가가 가능하겠는가. 과학지식 한 꺼풀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이며 사실 딱히 대립하는 관계조차 아닐 수 있다. 또한 이긴다 해도 그것이 그 자체로 공적으로 의미있는 실천적 대안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형태가 되기란 현재로서는 어려워보인다.

그러나 충분한 근거를 갖지 못한 말이 유통되는 걸 볼 때 견디지 못하는, 그러한 종류의 열망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으며 그것이 건강하지도 않다. 의제 생산을 안 하면서 맘에 안 드는 걸 비판하기만 한다는 지적도, 실현된 모습만 보면 그럴 수 있지만 곱씹어 볼수록 솔직히 부당하다. 의사결정의 근거가 이상하면 당연히 시정해야 하고, 그것을 위한 문제제기는 대안을 따로 가져오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그러나 그러한 한에서) 충분히 의미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상당히 일반적이고 정당한 열망이 뭔가 엉성한 시민운동 코스프레(?)로 이행하여 비웃음을 사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고 건전한 방향으로 가게 하려면, 결국 과학지식에 애정이 있는 이공학도라는 '집단 아닌 집단'의 추상적인 의지를 실질적으로 건전하게 구현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의지 자체가 거시적인 중대한 역할을 갖기 어려우며,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과학기술을 둘러싼 싸움에서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근거 정도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제 위치를 찾아가도록 할 때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를 원하면서 정작 정치문법을 거부하고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자처하는 모순적인 경향도 극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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