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게시물 목록

2017년 8월 4일 금요일

왁싱샵 살인 사건

https://news.joins.com/article/21815022?fbclid=IwAR2rpokbcRc2H5IaXBcfVB8D-a40HaP7-hUnYS-4bpKMp8RLGvM078N53_g
[ "담배 피며 유유히" 왁싱숍 여주인 무참히 살해한 남성 (2017.08.03) ]

최악의 사건이다.

  사후적인 해석이지만, 왁싱이라는 업종과 관련하여 무언가 터질 징조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것을 특징 삼아 인기를 끈 각종 개인방송 채널에서 너도나도 왁싱 샵 체험기를 업로드하였는데, 왁싱샵의 특수성에서 모종의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남성 중심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부적절하게 왁싱샵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그러한 풍조가 폭로되었다. 해당 방송의 BJ는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은 느낀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사회에서 성적 코드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전부터 간호사, 승무원 등의 일부 직종은 남성들에게 성희롱적 발언이나 요구 등을 많이 받아 왔다. 최근에는 이것이 대중매체를 타고 확산되면서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은유적인 성적 코드가 부여되어 소비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왁싱샵 건도 특정 직종에 대해 성적인 함의를 부여하여 대중적으로 은밀하게 소비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터질 게 터졌다는 느낌이다. 참담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에 더욱더 참담하다.

  더구나 왁싱샵은 아직 많은 이에게 다소 낯선 서비스이면서도 자기관리의 측면에서 꽤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서비스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비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미디어에 소개되면 문제가 생길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남성중심적 매스미디어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건 절대로 ‘거리낌 없고 개방적인’ 게 아니다. 한 성별이 다른 성별에 대해 아무 말이나 막 한다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본의 대중문화 컨텐츠가 성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으로 소비되는 것이기에 개방적이기는커녕 극도로 보수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개방적이라고 하는 건 남성과 동등한 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중매체, 특히 규제가 없는 개인방송 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잘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성적 긴장감을 형성하려고 하는 부적절한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풍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성인지교육의 혁신적인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세대가 지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성교육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실제 성관계하는 법도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고 돌려 말한다고 불만들을 많이 제기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전에 일단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간으로 보는 법이나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권의식의 부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과 관련된 주제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비틀린 내면이 유독 특별히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영역이라서 남들과 얘기해 볼 기회가 없으니까, 더구나 이성과는 더욱더 성에 대해 얘기해볼 기회가 없으니까 부적절한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개선의 기회가 없이 속에서 계속 곪는 게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에는, 무턱대고 ‘개방적으로 터놓고 얘기하자!’ 해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성들과 함께 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면 일단 서로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이것은 젠더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한 선언이 아닌 꾸준한 실천을 통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증명함으로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젠더권력이란 스스로를 보다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지만, 지극히 설명력이 좋은 개념이기도 하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젠더권력에서 기인한 비인간화와 대상화의 문제로 소급시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여성혐오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성혐오는 스스로를 엄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설명해 내는 개념이다(우에노 치즈코의 설명 참조). 비록 이 개념이 스스로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비판될 필요가 있는 개념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통찰을 현재 단계에서 ‘말해내기’ 위해 현 단계에서 활용해 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개념이기도 하다.

  작년 5월에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가? 사건 당시 나는 여성혐오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확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몇몇 어려운 단계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해야만 여성혐오의 연관성이 조심스레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망상장애의 구체적 내용은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므로 그의 여성혐오적 망상에는 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 가해자가 여성을 두려워해서 피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살해한 것은 그의 망상이 다른 망상이 아닌 여성에 대한 망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왁싱샵 사건의 경우는 여성혐오적 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남성중심적 대중문화 속의 기괴한 면이 그 어느 사건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까지, 여성혐오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작용한 것이 절대 아니라고 애써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나 설득을 시도해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막막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당시에 예쁜 통역사를 구한다고 공고했던 것에 대해 JTBC의 손석희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이미 들켜버렸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5월 11일 목요일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보며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 따른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방금 8시 9분을 기해 임기가 개시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한 소회 및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평소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보려 한다.

>> 내가 정치에 최초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2년 국가정보원 및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이었다. 경악할 만한 이 사건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은폐되었다. 이렇게 그 출범부터 실망스러웠던 박근혜 정부는 그 이후로도 국민 분열만을 획책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어버이연합과 같은 보수 단체의 관제 시위 동원, 자유경제원 같은 단체의 어용화된 운영 등이 그 예이며, 그 중 압권은 김기춘의 "세월호 유가족들에 국민적 비난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라는 지시이다. 그들은 헌정 민주주의를 심대하게 침해하면서 비겁한 방식으로 국민 위에 군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인 지금 돌아보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악몽을 꾼 것 같은 4년이었다.

한편, 그것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자들을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지지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출발점 삼아 정치적 전략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악마화하며 적대시하고, 좀비처럼 취급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물론 어용 단체들에 의한 관제 여론은 철저히 기획된 허위의 것이기에 인정될 수 없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헌정 민주주의의 중요성, 그 가치와 한계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래에서 추동하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에서 역시 무엇이 민주적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활발한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개인 대 개인으로 충돌하며 갈등하기보다는 공론의 영역에서 소통하며 발전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도록 돕는 것이 곧 민주 사회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토양 위에서 형성되는 여론과 제도권 정치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 합의 내용의 제도적, 정책적 검토 및 반영이 이루어지는 5년이 되었으면 한다.

>> 정치인 중에서도 특히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대통령은 더 이상 그 담백한 개인으로 남기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인물은 각종 계층의 이해관계,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정무적 역학관계 등에 의해 그 모든 것의 총화로서 형성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역학관계의 위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과 제시할 수 있는 방향성은 어느 정도 범위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다소 찬물 끼얹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이 선명하게 의견을 밝히며 영웅적으로 개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에 비추어 봤을 때 맞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장 '뒤탈이 없는' 방식인 민주주의적 방식을 앞장서서 준수하면서, 대통령이라는 리더가 크게 볼 때 개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참여하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고 국민을 적대시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그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관심있는 주제들에 대해 미약하나마 참여할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일 것이다.

>> 홍준표 후보의 선전으로 인하여 자유한국당의 기세등등함을 약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쉽다. 나는 자유라는 단어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자유경제원, 자유대학생연합 등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단체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강 상으로는 몰라도 실질적인 정치 행보에 있어서 자유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당이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 현실로 돌아가면 자유한국당은 100석이 넘는 거대 정당이고, 이번 선거에서 확인되었듯이 그 자금과 조직, 밑바닥 지지세는 상당하다. 그리고 총선은 2020년이다.

자유한국당의 높은 지지세의 배후에는 그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보수 개신교와의 유착관계가 꽤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와 그 동생은 신도들을 태극기 집회에 버스로 조직적으로 동원했으며, 홍준표에게 TV토론에서 동성애 관련 질문을 꺼내도록 제안한 것은 다름아닌 '빤스 목사' 전광훈이다. 비리로 얼룩진 보수 개신교의 최대, 최강의 보수정당과의 이러한 유착은 정교분리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되며, 국민 전체로 따지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번 5년 동안에 세속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그런 위협이 해소되기를 바란다.

>> 국민의당도 기존의 경직된 양당체제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면서도 범 민주 계열의 외연확장과 새누리당에 축소에 기여하고, 의회정치에서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 준 분명한 공로가 있다. 내 개인적 호감도가 높았던 안철수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너무 일찍 가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차기 정부가 통합적 행보를 보이면서 포용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된다면 안철수가 정치적이든, 정치 외적이든 나름의 역할을 하며 국가에 기여를 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국민의당이 앞으로의 의회정치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해 주어야 할 것이다.

>> 내가 중요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소수자의 인권이다. 인권은 그 가능성이 '발견된' 이래로 때로는 투쟁, 때로는 설득에 의해 실질적으로 획득되어 오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권은 타협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당연한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현실 정치에서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작용한다.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과 법안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면서, 반대세력(?)도 설득해 나가는 방향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권과 관련하여 노력을 많이 하면서 이슈들을 선도적으로 제시해 온 정의당, 인권 관련 사안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의원들이 꽤 포진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드라이브를 걸어, 인정받아야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인권 상황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 이번 선거 국면에서 하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이슈들이 이번 대선을 크게 휩쓸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로 요약되는 선진국에서의 신보수주의적 경향의 발로를 분석하자면, 2차 대전 이후로 선진국들이 스스로 가진 힘을 많이들 내려놓고 합의에 의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행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거시적으로는 전통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미시적으로는(즉, 생활세계에서)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왜 우리가 이걸 내려놓아야 하지? 그냥 기득권을 유지하면 안 되나"라고 느낀 뒤, 그냥 막 나가도 별 상관이 없고 그게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PC(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것이 피로하다며 역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결론은 사회의 파편화, 사회적 신뢰의 붕괴에 따른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약화'와 연결된다.

신보수주의적인 모멘텀을 상술한 바와 같이 진단한다면 한국이 그것을 잘 제어하고 해소한 국제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 이슈에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 TV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 반대한다고 말하니까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차별주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만큼, 이런 이슈에 있어서 리더 개인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도 당선 직후에 거시적으로 소외되었으나 미시적으로는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기가 세져서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예방하고 민주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차기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쓰다 보니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냥 내가 정치권에 기대하는 일반론적인 내용이 된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5월 7일 일요일

한스 오브리스트 "Do It" 전시 관람 후기

자동 대체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스 오브리스트 등이 기획하여 전세계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Do It" 전시를 관람했다. 본 전시의 핵심 아이디어는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뭔가를 시키는 '지시문'을 발표하는 것이며, 그 지시문의 내용이 미리 모집한 일반인 참여단에 의해 해석되고 실현되어 전시된다는 것이다. 한스 오브리스트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진행될 이 전시에서 각 도시의 특성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도 기대한다고 했다. 이번 서울 전시는 광화문역 근처 일민미술관에서 하고 있다.

  '이념의 감각적 현시'로서의 예술 작품을 분석하는 헤겔의 이론적 틀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쉬르와 퍼스 등이 제시한 기의와 기표라는 기호학적 틀을 택해도 된다. 어쨌든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예술가는 예술 작품에 뭔가를 담으려고 할 텐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가 예술에서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생각을 일일이 풍부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간결하게 암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이 주로 순수미술 쪽에서 많이 나타났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색채, 도형 등의 감각적 형태만으로 완벽히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추상화되어, 차라리 '암시'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예술작품,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예술작품 등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암시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끌어내는 것은 물론 모든 감상자의 작업이지만, 예술제도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예술계에서 공유하는 공통 기반에 대한 숙련을 거친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다. 예술비평가들은 예술계에서 공유되는 미의식에 의존하여, 예술가의 작업과 그에 첨부된 컨텍스트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서 구체적으로 '말해낸다'. 이는 현대미술이 어렵다거나 불친절하다고 말해지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불편함이 있다. 과연 나는 맞게 해석했는가? 예술의 해석은 자유라고들 하지만, 감상자와 비평가들은 나의 해석의 수준이 지나치게 낮은 것은 아닐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하고 움츠러들게 된다. 마치 범죄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탐정처럼, 감상자는 조심스러워진다.

  "Do It" 전시에서도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텍스트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그 텍스트가 그냥 텍스트가 아닌 '지시문'이라는 간단한 차이점 때문에 의해 위에서 말한 불편함이 의외의 지점에서 해소되고, 상당한 수준의 공공성이 획득된다. 일반인 참여단이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전시를 구성하고, 그 다양한 해석 자체가 전시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존중되기 때문이다. 오브리스트의 기획 의도가 완전히 성공한다면, 여기서는 일반인 참여단의 해석의 퀄리티가 낮아서 유발되는 웃음마저도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일 것이다. 여기서 남들보다 좀 더 멋있게 발상해야 할 텐데, 남들보다 좀 더 전위적으로 해야 될 텐데 하고 걱정하게 되면 지는 거다.

  즉, 이 전시의 진짜 관객은 사실 지시문을 최초로 읽고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는 일반인 참여단이고(예술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이 '일차적 관객'들과 같은 입장에서 비평한다), 그 결과로 실현된 개별 작품들은 이차적 산물, 곧 '이런 기획을 했다는 기록'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 전시 자체와 각 지시문들에 대한 평가(이것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 될 것이다)와, 일반인 참여단들에 의해 실현된 작품 개별에 대한 평가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그 이차적 산물로서의 전시를 관람하는 나 같은 사람은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일차적인 관객과, 해석의 결과물을 보는 이차적인 관객으로 분열된 채 작가와, 또 다른 일차적 관객들과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예술가의 지시문 / 참여단의 실현이라는 이중화된 구조로 인하여 관람 행위에서의 관계맺음이 훨씬 다층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화된 구조는 관객에게 내적 분열을 유발하여, 현대미술 작품의 관객들이 겪는 본질적 불편함의 해법을 모색한다.

  물론 그러한 이차적 산물들이 결과적으로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전시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대중문화적이지는 않다. 실제로는 위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고 쿨하게 임하면서도 정작 높은 퀄리티로 해석을 해 낸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되긴 할 것이다(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주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는 미술관 밖에서 일어나는 대중문화와의 강한 연관성을 맺고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아직까진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여지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그 창문을 보다 넓게 열고 공공 영역과 우호적으로 관계맺음을 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5월 6일 토요일

대선후보 자녀 성희롱피해 사건 관련

  유승민 후보의 딸이 어제 선거 지원 중에 겪은 일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자면, 대중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해 온 방식,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여성성이 일방적으로 소비되어 온 방식을 보았을 때 이미 이런 일은 예견되었다. 참담하다.

  직접적으로는 이 일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이다. 그는 응당한 책임을 지고 형사적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개인의 형사적 책임과는 별도로 사회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전자를 적용하되, 근본적인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후자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는 그 표현만 '책임'으로 동일하며 사실상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함으로써 가해자가 면책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첫째는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유명인의 가족인 여성은 그 유명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성적인 맥락으로 사회적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성희롱성 발언을 일삼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발언들로부터 자기가 그를 지켜 주겠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에도 이것은 적용된다. 기사도 정신 역시 그를 성적 쟁취의 대상처럼 상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 대한 인간적 안타까움과는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다.

  가해자는 정신장애 3급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작년 이맘때쯤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의 머릿속에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여성들이 감히 자신을 무시한다는 망상이 형성되었던 것에는 사회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input들의 영향이 없을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외계인의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외계인이 자신을 조종한다는 망상이 생길 수 없지 않겠는가. 이번 건에서도 비슷하게, 해당 가해자가 '하필 그런' 기이한 행동을 한 데 대해서 사회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물론 반대로, 여성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사회의 단면이 그에게 확실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 역시 상당히 조심스러운 주장이기는 하다. 사회의 한 단면과,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부에 형성되는 관념이 갖는 역학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된 바는 아직 없다고 알고 있다(이는 경우에 따라 매우 다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소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만약에 여성이 남성에 대해 평가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여성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미디어가 여성의 시각을 대변하여 일방적으로 남성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사회였다면 가해자가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을 것 아닌가? 다소 원론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이 사건에 있어 사회의 책임을 묻는 주장은 검토될 이유가 충분하다.

  사회의 책임이 지적되어야 하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유 후보의 딸이 유명세를 획득하여 선거 유세에 참여하고 있는 과정 전체가, 여성의 외모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사회적 세태를 빼고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의 자녀가 그 자의에 따라 후보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 후보의 경우에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 딸이 유달리 외모와 연관지어 화제가 되었고, 급기야 '국민 장인'이라는 별명으로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른다. 사람의 존재와 그 사람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유 후보의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가 외모를 중심으로 사회적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사회적 주목은 개인에게 피해가 되는 파국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주목해서 유명세를 부여하고 유세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결국 사회의 힘이고, 그 주목의 포인트는 바로 외모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 부분 역시 다소 조심스러운 주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가 하필 그런 방식으로 가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모가 주목받음으로써 유명세를 얻은 사람이 웃음을 지으면서 대중들과 사진을 촬영해 주는 환경은, 그렇지 않은 환경에 비해 가해자가 그런 행위를 하기에 유의미하게 우호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본 사건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 하는 두 번째 책임이 발생한다. 그것은 유승민 후보 캠프 측의 책임이다. 여성의 외모가 일방적으로 소비되어서 여성 개인에게 성희롱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며, 또한 어제와 같은 직접적인 물리적 성희롱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등에서 그러한 작용은 이미 차고 넘쳤다. 물론 편지, 현장유세 등의 다른 방식으로도 유 후보의 딸은 유권자들을 마주했으나, 사회의 힘은 그의 외모가 가장 부각되게 만들었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소비했다. 유 후보는 이전에 분명히 딸이 유명세를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고, 그 부담 역시 이러한 예견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 후보의 캠프 측은 여성의 여성성이 이 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후보의 딸의 유명세가 갖는 정확한 성격에 대해 이해한 뒤 그에 대한 경계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언에 뒤따르는 구체적인 대책은 다양하게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 경계심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다면 네티즌들이 후보의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의 외모에 집중하며 유 후보를 '국민 장인'이라고 부르는 여론보다 그것을 비판하는 여론이 더욱 우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제 현장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어서 그러한 사건을 방지했을 수 있다. 반대로 그 경계심에 따라 후보자 딸의 유세 참여 자체를 포기했어도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행태를 사후적으로 보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예견하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구어 낸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 멋진 일일 것이고, 언젠가는 그러한 일이 가능해지기를 바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4월 22일 토요일

재미있는 액체질소

  액체질소를 처음으로 다뤄 보고 있다. 일단 안전을 위해 고글과 장갑은 필수이다. 방울방울 조금씩 손에 닿는 건 체감 데미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무슨 사고가 있을지 모르다보니 주의하는 게 상책이다.

  액체 물이 고온에 노출될때 나타나는 현상이, 상온 하의 액체질소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되는 게 많다. 일단 당연하게도 튀어오르면서 끓고, 상온의 금속 판이 액체질소 입장에서는 엄청 뜨거운 온도다 보니까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도 나타난다. 방울을 뜨거운 판 위에 떨어뜨리는 순간 방울의 하부가 증발하여 생긴 기체 층 때문에 마찰 없이 미끄러져 다니는 현상.

  또한 깔때기에 붓는 도중 튀어올라서 갈 곳이 없어진 액체질소는 보통 그냥 바로 기체가 돼 버리지만, 그 양이 좀 많을 때는 미처 기체로 다 변하지 못하고 주위 바닥에 철벅 하고 떨어지는데, 철벅 소리는 나는데 바닥이 젖는 것도 아니고 해서 여러모로 낯설고 흥미롭다.

  긴 하루를 보낸 후 오금역에서 베스킨라빈스를 사서 귀가할 때 그토록 설레는 것은, 아이스크림 자체뿐만 아니라 한동안 드라이아이스를 갖고 놀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액체질소도 정기적으로 공급받을 일을 만들어서 집에서 갖고 논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4월 19일 수요일

윗공대(301동) 식당 유감

  301동 식당에서는 직원 한 명이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돈까스를 안 매운 소스로 시켰는데, 주문을 받고는 뒤에서 한참 동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오셔서 매운소스로 잘못 주셨다. 기존에도 이런 비슷한 이유로 꽤 오래 기다린 적이 많은데, 별 거 아니긴 하지만 아예 잘못된 메뉴를 받은 건 처음인 것 같다.

  301동에서 학생식당을 보면 농식이나 학식 등 다른 곳에 비해 직원의 수가 눈에 띄게 적다. 그럴수록 한 사람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여러 개의 일을 처리해야 해서 착오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게 직원들의 업무과중 및 서비스 질의 저하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물론 음식 자체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건 또 별개의 문제가 겹쳐 있을 것으로 본다).

  계속 말하는 거지만, 교수식당과 학생식당에 이 정도로 퀄리티의 차이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상 의도적인 것으로 본다. 가격이 1000원 정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1000원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준의 큰 차이가 난다. 운영 주체는 CJ의 TOOGOOD으로 동일하니까, 교수식당에 좀 더 많은 비용을 쓰고 학생식당은 낮은 질을 유지하면서 굴릴 수 있다. 그렇게 해도 학내의 조직적 문제제기가 없으니 계속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01동과 다른 곳의 차이는, 301동에서는 지리적인 문제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운영해서는 진작에 경쟁에서 도태됐을 것이다. 매일같이 편의점 음식만 먹을 수도 없고, 매일같이 퀴즈노스만 먹을 수도 없으니까 꾸준히 수요가 나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퀴즈노스도 할인정책도 자기 맘대로고 재료 관련해서도 안 좋은 말 좀 있었어서 그리 호의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러니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매일같이 편의점 음식만 먹으면서 식당 측에 꼬장부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교수식당과 학생식당의 음식 질의 차이 좀 줄이고, 더 많은 직원들을 고용하여 서비스 질도 높이는 등 수많은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주말에 거기서 밤 새고 있는 사람이 몇인데 주말에 열지 않는 것도 개선이 필요하다. 301동의 '유일한' 식당이란 걸 알고 제대로 운영하면 좋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3월 16일 목요일

시흥캠퍼스 사업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시흥캠퍼스 실시협약이 기습적으로 체결되었을 때부터 본부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학생사회와 협의할 것을 분명히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학생 대표들과의 논의 없이 시흥캠퍼스 계획에 대해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자료를 냈다. 학교 측의 언질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미 각종 이권이 얽히고 설켜 있을 신문 광고들도 많이 나왔다.

  이 중 압권인 것은 학생사회와 일절 협의 없이 반쯤 기정사실화되어 신문 광고로까지 나오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 내용들이다. 서울대 시흥캠 내 위탁 어린이집, 서울대 시흥캠 주변의 대형 스터디센터 등의 사업이 광고되는 것은 학벌주의의 정점이라는 서울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러한 학벌주의에 영합하는 본부 측의 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언론의 보도 논조에도 유감을 표한다. 일각에서는 기득권으로서의 서울대생들이 지방 캠퍼스라는 점에 거부감을 가져서 이기적으로 본부점거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학우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언론 보도들로 인해 정작 당사자인 우리 학우들은 그러한 인식에 대한 시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서울대 학생사회에서는 고려조차 된 적 없는 그러한 상상력의 산물들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그림자를 역으로 드러낸다.

  시흥캠퍼스 사업은 이와 같은 학생사회에 대한 기만과, 사회에서 대학이 장기적으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고민의 부재라는 두 궤도 위에서 달려가고 있다.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대학교가 수십 년 간 형성해 온 모습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큰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학생들의 자리는 일체 없었다.

  대학이란 어떤 공간인가?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는 어떻게 해야 상술한 그림자를 해소하고 진정으로 박수를 받는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서울대학교 구성원 전체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고민하여야 하는 문제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누구보다 학교 측에서 가장 앞장서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흥캠퍼스 사업은 상기한 두 궤도를 타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학교 측은 학생들의 정당한 우려를 '현실'이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기각하고 있다.

  3월 11일에는 본부를 점거하고 있는 학우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한때 음식물 반입을 차단하고 점거 학생을 고립시키려 하는 등의 비인간적 조치까지 고려되었다. 학우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향해 소화전을 분사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감전의 위험이 컸던 것은 교직원들이 아닌 학생들이었는데도 마치 그 반대인 것처럼 해명하기도 했다. 학우들의 안경이 부러지는 등의 일도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교직원들은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으며, 사태 내내 학생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언행을 지속했다. 또한 학교 측은 사태 이후에도 일부 사실관계에 대해 납득되지 않는 해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 4층에 남아 있는 12인의 학우들은 점거를 해제하고 퇴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본부점거가 해제된 것은 학교 측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안전을 위협한 데 따른 점거 인원들의 철수일 뿐이며, 시흥캠퍼스 사업을 마음대로 진행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생사회의 의견 수렴과는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을 시흥캠퍼스 사업에 대해, 학생사회는 학생총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다.

  인간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지속 가능한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대학교가 되기 위해서, 학생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중대한 결정에 있어 학교 측은 그 진행 상황을 학생사회에 충분히 공유할 책임을 가지며, 이러한 책임 이행이 결여된 채 진행되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과 관련해서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각종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합의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만일 시흥캠퍼스에 예정된 각종 사업들이 재정을 확충하여 자립적인 학교 운영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본부가 학생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제공했던 자료들에서는 왜 그러한 사업 진행 사실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해명이 요구된다. 또한, 그 사업들이 대학 존재 목적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현재 상태에서는 대학기업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3월 15일 수요일

탄핵 이후 친박세력의 미래는?

박근혜는 파면되었지만, 공작정치의 대가인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국무총리는 비서실장을 비롯한 박 대통령의 주요 참모진들의 사표를 반려했다. 그리고 친박 국회의원들은 박근혜 개인을 보좌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말대로 단순히 박근혜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정치와 분리하여 해석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참모진에 의해 증거 인멸 작업, 기록 봉인 작업 등이 진행 중일 수 있을 뿐더러, 자연인 박근혜를 돕는다는 공통 지향점은 친박 세력이 그 진영을 재편성할 수 있는 명분으로 기능한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아 암군으로 만들고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을 방조하여 범죄집단의 수뇌부로 전락한 참모진들과 친박 세력은 이제 자연인 박근혜를 중심으로 꽤나 안정적인 연착륙을 꾀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됨으로써 3개월 간의 은신을 끝내고 수구 세력의 정치적 구심점이 된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285104914914544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3월 11일 토요일

박근혜 탄핵 선고를 앞두고: 기각은 끝이고 인용은 시작이다!

  가장 밝아야 할 권력 핵심부가 그 어디보다도 깜깜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다행히 몇 개의 집요한 불빛에 의해 그 이유가 일부나마 밝혀졌다. 비선권력이 개입된 비정상적 통치 구조라는 초유의 상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으로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국민적 신뢰를 전적으로 잃었다.

  집권 정당성이 지극히 약한 상황에서 혹시나 탄핵이 기각되고 직무에 복귀한다면, 박 대통령은 국정 현안을 챙기기보다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우선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비정상적 관제 여론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탄핵 인용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 온 정치권은 전에 없는 혼란을 겪을 것이며, 정권의 자기보신을 위한 국정원, 청와대 등의 관제 여론 조성 공작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게다가, 232만 명의 국민이 무섭도록 조용한 시위를 진행한 것은 사실 그 안에 하나의 목표를 향한 거대한 총의가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대의제 민주주의 하의 정치인들이 그 국민적 요구를 제도적으로 달성하는 데 실패한 이상 그 잠재적인 총의가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정권의 억압적 태도를 극복하고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는 데에만 모든 사회적 비용을 쏟아도 모자라게 될 것이다.

  반대로,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관제 보수 단체들이 한동안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들을 단지 돈 받고 시위에 나오는 사람들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안일한 것이다. 신념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고, 일부 대형 보수 교회 신자들의 경우는 동원되면서도 동원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신념체계와 외적 요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어찌 그저 일방적인 동원이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들은 단지 깜깜했던 박근혜 정권의 단말마가 아니며, 신흥 극우의 집결을 통한 정치세력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20세기의 단말마가 지극히 21세기적인 트럼피즘과 융합하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흥 극우 세력의 탄생을 방지하려면 탄핵 반대 단체에 대한 배제와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한 뒤에 그들의 상실감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물론 국정원과 청와대의 관제 여론 형성을 무력화하여, 그들을 실질적 정치적 주체로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다시 관제 여론에 기만당할 수는 없다). 또한, 탄핵 인용 이후에 정치인들이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올바로 담아낼 수 있도록, 따라서 탄핵 회의론의 발생 및 극우 세력의 편승을 방지하도록 시민사회의 공론장이 명민하게 작동하면서 제도권 정치인들과 상호작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최대 장점 중 하나인 역동적인 민주정치가 한 순간에 극단적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책임 있는 판단을 기대한다. 기각은 끝이고 인용은 시작이다. 선고 이후에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7년 1월 28일 토요일

젠더 이퀄리즘 날조 사건

  실체가 없는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단어가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진정한' 성 평등주의인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주 이야기되길래 분명히 인터넷 어딘가에서 문헌오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퀄리즘이라는 상대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를 빌려서 '역차별의 우려가 있는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성평등을 위한 이론으로 둔갑시키고, 실체가 없는 이론을 나무위키 문서로 게재하여 소개한 것이다. 비겁한 일이다.

  물론 성평등을 추구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상이 "없으면 만듭시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하고자 했다면 실체가 없는 사상을 상정해 놓고 거짓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펼칠 것이 아니라, 타당하고 건전한 논거를 갖춘 '선언'을 했어야 한다. 혹은 새로운 이론을 직접 세웠어야 한다. 없는 이론을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있는 논의들을 참고하고 스스로의 새로운 논의를 더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도 성차별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페미니즘에는 문제가 있다' 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실제로 성차별을 잘 발견하고 있는 것일지 알기란 상당히 어렵다. 페미니즘과 성평등 자체에 적대적이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평등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최근 몇 달간 있었던 젠더 이퀄리즘 해프닝은 이러한 신뢰를 지극히 위태롭게 만드는 기만적인 시도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