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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2일 토요일

재미있는 액체질소

  액체질소를 처음으로 다뤄 보고 있다. 일단 안전을 위해 고글과 장갑은 필수이다. 방울방울 조금씩 손에 닿는 건 체감 데미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무슨 사고가 있을지 모르다보니 주의하는 게 상책이다.

  액체 물이 고온에 노출될때 나타나는 현상이, 상온 하의 액체질소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되는 게 많다. 일단 당연하게도 튀어오르면서 끓고, 상온의 금속 판이 액체질소 입장에서는 엄청 뜨거운 온도다 보니까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도 나타난다. 방울을 뜨거운 판 위에 떨어뜨리는 순간 방울의 하부가 증발하여 생긴 기체 층 때문에 마찰 없이 미끄러져 다니는 현상.

  또한 깔때기에 붓는 도중 튀어올라서 갈 곳이 없어진 액체질소는 보통 그냥 바로 기체가 돼 버리지만, 그 양이 좀 많을 때는 미처 기체로 다 변하지 못하고 주위 바닥에 철벅 하고 떨어지는데, 철벅 소리는 나는데 바닥이 젖는 것도 아니고 해서 여러모로 낯설고 흥미롭다.

  긴 하루를 보낸 후 오금역에서 베스킨라빈스를 사서 귀가할 때 그토록 설레는 것은, 아이스크림 자체뿐만 아니라 한동안 드라이아이스를 갖고 놀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액체질소도 정기적으로 공급받을 일을 만들어서 집에서 갖고 논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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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9일 수요일

윗공대(301동) 식당 유감

  301동 식당에서는 직원 한 명이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돈까스를 안 매운 소스로 시켰는데, 주문을 받고는 뒤에서 한참 동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오셔서 매운소스로 잘못 주셨다. 기존에도 이런 비슷한 이유로 꽤 오래 기다린 적이 많은데, 별 거 아니긴 하지만 아예 잘못된 메뉴를 받은 건 처음인 것 같다.

  301동에서 학생식당을 보면 농식이나 학식 등 다른 곳에 비해 직원의 수가 눈에 띄게 적다. 그럴수록 한 사람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여러 개의 일을 처리해야 해서 착오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게 직원들의 업무과중 및 서비스 질의 저하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물론 음식 자체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건 또 별개의 문제가 겹쳐 있을 것으로 본다).

  계속 말하는 거지만, 교수식당과 학생식당에 이 정도로 퀄리티의 차이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상 의도적인 것으로 본다. 가격이 1000원 정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1000원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준의 큰 차이가 난다. 운영 주체는 CJ의 TOOGOOD으로 동일하니까, 교수식당에 좀 더 많은 비용을 쓰고 학생식당은 낮은 질을 유지하면서 굴릴 수 있다. 그렇게 해도 학내의 조직적 문제제기가 없으니 계속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01동과 다른 곳의 차이는, 301동에서는 지리적인 문제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운영해서는 진작에 경쟁에서 도태됐을 것이다. 매일같이 편의점 음식만 먹을 수도 없고, 매일같이 퀴즈노스만 먹을 수도 없으니까 꾸준히 수요가 나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퀴즈노스도 할인정책도 자기 맘대로고 재료 관련해서도 안 좋은 말 좀 있었어서 그리 호의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러니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매일같이 편의점 음식만 먹으면서 식당 측에 꼬장부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교수식당과 학생식당의 음식 질의 차이 좀 줄이고, 더 많은 직원들을 고용하여 서비스 질도 높이는 등 수많은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주말에 거기서 밤 새고 있는 사람이 몇인데 주말에 열지 않는 것도 개선이 필요하다. 301동의 '유일한' 식당이란 걸 알고 제대로 운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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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6일 목요일

시흥캠퍼스 사업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시흥캠퍼스 실시협약이 기습적으로 체결되었을 때부터 본부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학생사회와 협의할 것을 분명히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학생 대표들과의 논의 없이 시흥캠퍼스 계획에 대해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자료를 냈다. 학교 측의 언질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미 각종 이권이 얽히고 설켜 있을 신문 광고들도 많이 나왔다.

  이 중 압권인 것은 학생사회와 일절 협의 없이 반쯤 기정사실화되어 신문 광고로까지 나오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 내용들이다. 서울대 시흥캠 내 위탁 어린이집, 서울대 시흥캠 주변의 대형 스터디센터 등의 사업이 광고되는 것은 학벌주의의 정점이라는 서울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러한 학벌주의에 영합하는 본부 측의 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언론의 보도 논조에도 유감을 표한다. 일각에서는 기득권으로서의 서울대생들이 지방 캠퍼스라는 점에 거부감을 가져서 이기적으로 본부점거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학우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언론 보도들로 인해 정작 당사자인 우리 학우들은 그러한 인식에 대한 시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서울대 학생사회에서는 고려조차 된 적 없는 그러한 상상력의 산물들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그림자를 역으로 드러낸다.

  시흥캠퍼스 사업은 이와 같은 학생사회에 대한 기만과, 사회에서 대학이 장기적으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고민의 부재라는 두 궤도 위에서 달려가고 있다.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대학교가 수십 년 간 형성해 온 모습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큰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학생들의 자리는 일체 없었다.

  대학이란 어떤 공간인가?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는 어떻게 해야 상술한 그림자를 해소하고 진정으로 박수를 받는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서울대학교 구성원 전체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고민하여야 하는 문제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누구보다 학교 측에서 가장 앞장서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흥캠퍼스 사업은 상기한 두 궤도를 타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학교 측은 학생들의 정당한 우려를 '현실'이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기각하고 있다.

  3월 11일에는 본부를 점거하고 있는 학우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한때 음식물 반입을 차단하고 점거 학생을 고립시키려 하는 등의 비인간적 조치까지 고려되었다. 학우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향해 소화전을 분사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감전의 위험이 컸던 것은 교직원들이 아닌 학생들이었는데도 마치 그 반대인 것처럼 해명하기도 했다. 학우들의 안경이 부러지는 등의 일도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교직원들은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으며, 사태 내내 학생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언행을 지속했다. 또한 학교 측은 사태 이후에도 일부 사실관계에 대해 납득되지 않는 해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 4층에 남아 있는 12인의 학우들은 점거를 해제하고 퇴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본부점거가 해제된 것은 학교 측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안전을 위협한 데 따른 점거 인원들의 철수일 뿐이며, 시흥캠퍼스 사업을 마음대로 진행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생사회의 의견 수렴과는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을 시흥캠퍼스 사업에 대해, 학생사회는 학생총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다.

  인간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지속 가능한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대학교가 되기 위해서, 학생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중대한 결정에 있어 학교 측은 그 진행 상황을 학생사회에 충분히 공유할 책임을 가지며, 이러한 책임 이행이 결여된 채 진행되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과 관련해서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각종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합의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만일 시흥캠퍼스에 예정된 각종 사업들이 재정을 확충하여 자립적인 학교 운영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본부가 학생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제공했던 자료들에서는 왜 그러한 사업 진행 사실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해명이 요구된다. 또한, 그 사업들이 대학 존재 목적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현재 상태에서는 대학기업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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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5일 수요일

탄핵 이후 친박세력의 미래는?

박근혜는 파면되었지만, 공작정치의 대가인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국무총리는 비서실장을 비롯한 박 대통령의 주요 참모진들의 사표를 반려했다. 그리고 친박 국회의원들은 박근혜 개인을 보좌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말대로 단순히 박근혜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정치와 분리하여 해석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참모진에 의해 증거 인멸 작업, 기록 봉인 작업 등이 진행 중일 수 있을 뿐더러, 자연인 박근혜를 돕는다는 공통 지향점은 친박 세력이 그 진영을 재편성할 수 있는 명분으로 기능한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아 암군으로 만들고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을 방조하여 범죄집단의 수뇌부로 전락한 참모진들과 친박 세력은 이제 자연인 박근혜를 중심으로 꽤나 안정적인 연착륙을 꾀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됨으로써 3개월 간의 은신을 끝내고 수구 세력의 정치적 구심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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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28510491491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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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1일 토요일

박근혜 탄핵 선고를 앞두고: 기각은 끝이고 인용은 시작이다!

  가장 밝아야 할 권력 핵심부가 그 어디보다도 깜깜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다행히 몇 개의 집요한 불빛에 의해 그 이유가 일부나마 밝혀졌다. 비선권력이 개입된 비정상적 통치 구조라는 초유의 상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으로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국민적 신뢰를 전적으로 잃었다.

  집권 정당성이 지극히 약한 상황에서 혹시나 탄핵이 기각되고 직무에 복귀한다면, 박 대통령은 국정 현안을 챙기기보다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우선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비정상적 관제 여론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탄핵 인용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 온 정치권은 전에 없는 혼란을 겪을 것이며, 정권의 자기보신을 위한 국정원, 청와대 등의 관제 여론 조성 공작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게다가, 232만 명의 국민이 무섭도록 조용한 시위를 진행한 것은 사실 그 안에 하나의 목표를 향한 거대한 총의가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대의제 민주주의 하의 정치인들이 그 국민적 요구를 제도적으로 달성하는 데 실패한 이상 그 잠재적인 총의가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정권의 억압적 태도를 극복하고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는 데에만 모든 사회적 비용을 쏟아도 모자라게 될 것이다.

  반대로,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관제 보수 단체들이 한동안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들을 단지 돈 받고 시위에 나오는 사람들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안일한 것이다. 신념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고, 일부 대형 보수 교회 신자들의 경우는 동원되면서도 동원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신념체계와 외적 요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어찌 그저 일방적인 동원이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들은 단지 깜깜했던 박근혜 정권의 단말마가 아니며, 신흥 극우의 집결을 통한 정치세력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20세기의 단말마가 지극히 21세기적인 트럼피즘과 융합하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흥 극우 세력의 탄생을 방지하려면 탄핵 반대 단체에 대한 배제와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한 뒤에 그들의 상실감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물론 국정원과 청와대의 관제 여론 형성을 무력화하여, 그들을 실질적 정치적 주체로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다시 관제 여론에 기만당할 수는 없다). 또한, 탄핵 인용 이후에 정치인들이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올바로 담아낼 수 있도록, 따라서 탄핵 회의론의 발생 및 극우 세력의 편승을 방지하도록 시민사회의 공론장이 명민하게 작동하면서 제도권 정치인들과 상호작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최대 장점 중 하나인 역동적인 민주정치가 한 순간에 극단적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책임 있는 판단을 기대한다. 기각은 끝이고 인용은 시작이다. 선고 이후에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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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8일 토요일

젠더 이퀄리즘 날조 사건

  실체가 없는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단어가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진정한' 성 평등주의인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주 이야기되길래 분명히 인터넷 어딘가에서 문헌오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퀄리즘이라는 상대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를 빌려서 '역차별의 우려가 있는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성평등을 위한 이론으로 둔갑시키고, 실체가 없는 이론을 나무위키 문서로 게재하여 소개한 것이다. 비겁한 일이다.

  물론 성평등을 추구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상이 "없으면 만듭시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하고자 했다면 실체가 없는 사상을 상정해 놓고 거짓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펼칠 것이 아니라, 타당하고 건전한 논거를 갖춘 '선언'을 했어야 한다. 혹은 새로운 이론을 직접 세웠어야 한다. 없는 이론을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있는 논의들을 참고하고 스스로의 새로운 논의를 더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도 성차별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페미니즘에는 문제가 있다' 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실제로 성차별을 잘 발견하고 있는 것일지 알기란 상당히 어렵다. 페미니즘과 성평등 자체에 적대적이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평등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최근 몇 달간 있었던 젠더 이퀄리즘 해프닝은 이러한 신뢰를 지극히 위태롭게 만드는 기만적인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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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빛은 빠르지 않다: 한계로부터 오는 고독

  빛은 지구를 1초에 7바퀴 반 돌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간단히 역산해 보면, 1바퀴 도는 데 15분의 2초가 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데에는, 즉 빛이 지구의 한 지역에서 정반대 지역으로 전달되는 데에는 아무리 빨라도 15분의 1초가 걸린다.

  이제, 광통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우선, 광섬유 케이블 속에서는 빛의 속도가 진공에 비해서 느려진다.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를 광섬유의 굴절률 n으로 나누면 된다. 따라서, 완전히 이상적인 경우라고 해도 15분의 1초보다 n배 오래걸리게 된다.(물리적 요인)

  그런데, 광섬유 케이블이 정확히 최단거리로 뻗어 있을 리도 만무하다. 대륙과 해양 등 여러 가지 지리적 요인들이 있을 뿐더러, 애초에 여러 지역의 네트워크이 모여들어서 하나의 큰 해저케이블을 이루는 식으로 통신망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을 선택하더라도 그 정반대편 지역과의 광통신 경로는 전혀 최단 거리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광섬유 케이블 안에서도 빛은 지그재그로 반사되어 가면서 이동하기 때문에 실제 빛의 경로의 길이는 광섬유 케이블 자체의 길이보다도 더욱 길다.(기하적 요인)

  여기에 더하여, 네트워크의 말단까지 오로지 광섬유로만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실제적인 통신에 소요되는 시간은 더욱 느려지며, 심지어 한 채널에서 혼자만 통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송수신자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기 때문에 통신 자원을 적절히 배분해야 한다는 것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통신공학적 요인)

  따라서, 지구의 한 지역와 정 반대편 지역 사이에 광통신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15분의 1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 지구 반대편까지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는 데는 아마도 1초보다도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당연하게도 메신저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실시간 온라인 게임을 함께 플레이할 수는 없다. 15분의 1초만 지연이 되어도 실시간 게임플레이에 큰 지장이 있을 텐데, 위에서 밝혔듯이 실제로는 지연이 훨씬 더 길 테니까 말이다. 카드게임 같은 것은 정해진 순서와 절차대로 진행되니까 괜찮지만, 속도와 순발력이 핵심인 FPS 같은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곤란한 문제이다(혹시나 이것이 내 착각이며 실제로 통신 속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특수한 기법 없이 지구 반대편 친구와의 실시간 게임 플레이에 문제가 없게 할 수 있다면, 댓글로 지적 부탁드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의 요구에 비해 광속은 정말 느리다!

  물론, 휴먼 스케일에서 빛은 매우 빠르다. 따라서 우리는 빛 정보가 '즉시' 전달된다고 느낀다. 우리의 선험적 인식 틀 역시, 빛은 즉시 전달된다는 관념을 본유적으로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마치 상대론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이지 않고 속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시간과 길이가 당연히 모두에게 절대적이며 불변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직접 연관이 있다). 그런데, 스케일을 지구 규모로만 키워 봐도, 빛이 즉시 전달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따라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다. 빛이 '충분히 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빛 전달의 즉시성이라는 본유관념을 가진 인간은 이 때 큰 혼란에 빠진다. 글로벌 시대에, 이런 의미에서, 휴먼 스케일에서 빛은 매우 느리다. 기막힌 역설이다.

  이것은 엄청난 난점이다. 우주 개발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논의와 상상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논의하려 하더라도 이 점이 문제가 된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천체인 달까지는 광속으로 1.3초가 걸리며, 태양까지는 광속으로 490초가 걸린다. 우리의 문명이 우리의 행성을 넘어 달과 태양 등의 범위까지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면, 실시간 게임 플레이는 못 할 수도 있겠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체제의 작동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수십 초 이하의 단위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대응해야 하는 비상 상황은 각 지역에서 알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대응 시스템을 빼곡히 갖추어 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스케일이 조금 더 커진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우리 태양계와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은 알파 센타우리인데, 지구에서 알파 센타우리까지는 광속으로 4.3년이 걸린다. 이 정도 스케일에 건설된 문명에서는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 체제가 작동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비상 상황은 각 영역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면 된다지만, 한 국가나 기업의 체제가 중앙 집권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관리를 할 수 있는 범위가 그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모든 국가는, 국경에서의 전쟁 결과를 몇 달이 지나서야 받아들 수 있었던 고대 제국의 황제들처럼 되는 것이다.

  또한, 직업 때문에 멀리 떠나 버린 사람이 그의 가족과 제대로 된 한 두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수 년이 걸리게 된다. 대화는 상호적인 것이므로, 새로운 정보를 받고 이에 대해 답신을 하는 상호적 의사 소통은 오로지 번갈아가면서만 진행될 수 있으며, 여기에 편법은 없다.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받는다고 해도, 상호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산업 혁명 이래 교통과 통신의 발전을 통해 모든 곳이 가까워지고 모든 것이 빨라져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한편, 인간의 욕망이 뻗는 범위, 인간이 진출할 수 있는 범위 역시 엄청나게 넓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후자가 무한한 데에 비해 전자는 유한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러한 고속화, 근거리화의 흐름의 끝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저속성과 원거리성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지구와 달, 태양 정도의 크기 스케일에서는 모든 사람과 간단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상의 범위로 가면 그 교류는 갑작스레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알파 센타우리와 태양 사이에 연속적인 구조물을 건설하여 그 구조물의 모든 부분에 사람이 살도록 하는 게 아닌 바에야, 태양계와 알파 센타우리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태양, 지구, 달 사이의 통신은 휴먼 스케일에서 '의사 소통'이라고 충분히 여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의 통신은 휴먼 스케일에서 '의사 소통'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하염없는 기다림만이 인간들에게 있을 뿐이다.
(알파 센타우리에서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과학 데이터를 수집해서 우리에게 계속 보내 준다면, 최초에 '알파 센타우리까지 인류가 우주선을 타고 가는 시간 + 4.3년'만큼만 기다리면 되고, 그 이후로는 연속적으로 받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사진을 계속 받아 보는 것만 해도 아주 고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우주 개발 초기 단계에서의 연구 데이터 전송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개발이 잘 되어서 이미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 간의 교류가 존재하는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는 상호적인 의사 소통이 매우 중요해지며,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 때 고독감이 밀려온다. 나는 지식 습득이 아닌, 상호적 의사소통에 기반을 둔 '관계맺음', '함께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체 개조를 통해서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린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알파 센타우리의 답신을 기다리는 8.6년 동안에는, 태양계의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태양계 내부에서만 서로 교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매 순간순간 확실하게, 지금의 우리와 다름없이 느끼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8.6년에 익숙해지고 시간 감각이 무뎌져서 아무렇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아예 모든 사람의 시간 감각을 바꾸어서, 그 8.6년이 딱히 길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태양계 내에서의 많은 일들은 그들에겐 매우 빠르게 일어나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되어 버리므로, 태양계 내에서의 일들은 신경쓸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8.6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도록 새로운 시간 관념을 갖고, 기존의 일상이었던 시간 스케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 쓰게 되어 버린다면, (단순히 외부 행성들에 대한 호기심 충족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우주 개발의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마치 온 우주의 모든 것이 2배 커지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말이다. 주지하였다시피, 나는 지식 습득이 아닌, 상호적 의사소통에 기반을 둔 '관계맺음', '함께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에, 일상에서의 시간 감각(A)과, 8.6년을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시간 감각(B) 사이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어떤 이가 B 모드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A 모드의 사람들과 '동일 시공간에' 존재할 수는 있지만, '함께' 존재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가 B 모드를 끝내고 A 모드로 돌아가면, B 모드에 돌입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A 모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이 모두 파괴되어 있음을 그는 알게 된다.

  우리 인간은 정말로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았다. 인간은 동족들의 공동체가 그 넓은 세계로 진출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넓은 세계에서 동족들과 동시에 존재함을 알지만,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홀로됨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럿 사이에서 홀로됨은 외로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속도를 통해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그 때문에 인간은 외로운 것이다.

- 시공간의 물리적 특성 및 인간 관계맺음의 상호성 테제에 의한 우주적 고독의 해명 -
  이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결부지어 주는 속도라는 물리량에 299792458m/s라는 -결코 빠르지 않은- 상한선이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빛 전달의 즉시성이라는 허위적인 본유관념을 가진 채 넓은 시공간에 퍼져 생활하고 있는 인류의 상호성에 기반한 관계맺음이 본질적으로 제한됨을 밝히고, 그로부터 현대인과 미래인의 '우주적 고독'이 산출되는 원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명하였다. 까마득한 고대인들에게도 이러한 우주적 고독감은 널리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온 세상이 과학과 이성의 빛으로 가득하다고 믿던 근대를 지나, 그 과학의 연구 성과들에 의하여 우주적 고독감이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시 제시되면서 팩트 폭력을 가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고독은 현대인들에게는 수많은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면서, 우주 개발 시대의 미래인들에게는 일상적으로 겪게 될 현실적인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이 우주적 고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이해를 증진하여 미래에 있을 다양한 논의들에 대한 예비적 작업으로서 기능하기를 감히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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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캠퍼스에서의 위협적 플러팅 사건

  너무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 밤길에서 찝적충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외국인에게 무례하게 말을 걸려다가 거절당하니까 위협적으로 돌변했고, 지나가던 분들이 있어서 다행히도 제압이 되었지만 아니었으면 어땠을지 모른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중이 지켜지는 것은 이런 걸 보면 아직 먼 얘기 같아 보인다. 외국인을, 그리고 여성을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보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 때문에 flirting 같은 게 많은데, 심지어 거절했을 때의 물리적 폭력의 위험까지 있다.

  자기 기분 나쁜 것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인간으로 안 보는 것 같다. 하긴 그러니까 애초에 저렇게 무례하게 말을 걸었겠지... 이런 건 정말 어디에나 만연한 것 같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꾸준히 있어 왔을 거다. 저 학생이 직접적인 사과를 하고 합당한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며, 이런 일이 생겼을 때에 학내 공동체가 뭔가를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방안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 Open Letter to SNU Student who Harassed Me | 나를 괴롭힌 서울대학교 남학생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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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4일 월요일

사적 자유와 공적 책임에 관한 소고

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사회적 역할에 따른 공적 책임과 구분하지 못하는 게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아닐까? 사람들의 공적 책임의식이 더욱 강화됨과 동시에,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유도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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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16488307027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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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규모 집회 그 이후는? - '평화집회'에 대한 단상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사람들 실외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한 전무후무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데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100만 명의 국민이 운집했고, 11월 12일의 집회는 '평화집회'로 진행되었다.

  물론 최전선 일부의 대치상황도 있었으며 이것은 현재의 밤샘집회에서도 지속 중이다. 이번 집회에서 그러한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위대 내에서 성추행을 했다는/당했다는 증언이 꽤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지워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폭력 없는 평화로운 집회'와 같은 기술적 표현보다는, 자주 쓰이는 '평화집회'라는 말을 인용하여 고유명사처럼 간주하며 사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평화집회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며 칭찬하는 말을 근래 자주 볼 수 있다. 최대 인파가 집결한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그것은 적어도 시위의 원인이자 시위의 대상인 집권세력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폭력시위가 일어나는 순간 프레이밍을 통해 우위를 점해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폭력이 발생하는 순간에 역풍이 불어올 것을 국민들은 알기에, 평화집회 현장은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긴장 상태이기도 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부 아슬아슬한 대치상황을 유발한 시위자들에 대해 "그 사람들은 모두 프락치일 거에요"라며 배제해 버리려는 모습도, 그런 보이지 않는 비대칭적 긴장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본다.

  100만의 인파가 몰렸음에도 큰 규모의 혼란이나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움에는, 외부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덕목에 의해 평가'된' 것이라는 측면이 필시 어느 정도 있을 수밖에 없다. 폭력이 발생하는 즉시 자랑스러움이 깨어지도록 프레이밍을 하여 시위 전체의 정당성을 상실시킬 수 있는 힘이 정권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안타깝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때, 프레이밍이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 프레이밍에 당하는 것처럼 되는 데 대한 찝찝함이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애초에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 마이너스 상태에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해서 시위대가 집결한 것이지,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플러스 상태가 되고자 집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찝찝함 없이, 오롯이 국민들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자율적으로 자랑스러움을 재구성해 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오늘 오전에, 몇 시간 후 시작될 집회를 예고한 기사의 제목은 "100만 명 운집... '정국 분수령' 될까?"였다. 분수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정도 되는 규모의 집회라면 그 곳에서 드러나는 민의가 실제로 중앙 정치의 방향을 정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평화집회를 한 뒤 해산한 것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반 쪽짜리 해석인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주권자인 국민 100만 명이 모여 거대한 민의를 드러낸 뒤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간 것은, 주권행사의 대리인인 제도권 정치인들에게 그 거대한 민의를 반영하여 뭔가를 확실하게 이뤄 내라고 요구한 거라고 봐야 한다. 그러한 기대를 못 할 정도로 희망이 전혀 없었다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일상으로 복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의는 100만 명의 집회를 통해 현시되었고, 그에 따른 실천은 일단은 제도권 정치의 역할로 위임되었다. 제도권 정치인들은 그 책임을 짊어지고 확실하게 실천을 해내야 한다. 여, 야, 청 가리지 않고 자주 나오는 발언은 '겸허히 민심을 경청한다'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큰 갈림길이 있을 때, 민심은 경청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로 반영되고 피드백이 돌아와야 만족한다.

  만약에 민의가 반영되고 실현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그들에게 민의를 끊임없이 다시 보여주어 주권자로서 정치인들에게 위임한 역할을 끊임없이 다시 상기시켜야 한다. 또한 그 역할을 회수하여 스스로 집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끊임없이 내비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국민들 스스로가 주권을 가짐을 의식하고, 국가의 중대한 국면에서 그 주권이 어떻게든 행사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단계까지 간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성숙한 시민의식'이며, 국민 스스로가 오롯이 세운 자율에 의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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