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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8일 수요일

내가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우선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도구를 택함에 있어 구조와 개인, 과학과 윤리학 등의 영역을 잘 분별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개별 사안에 대해 어떤 확증을 내리는 데 있어 신중을 기하되, 신중함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유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양한 도구를 적용해 보면서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포착해 내고 그 가능성들 간에 '교통정리'를 해 주는 것이 합리성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에 대한 과신도 극복되어야 하며, 반대로 구조라고 불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애써 부정하는 소위 '구조맹'도 극복되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 구조와 개인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들 수 있어야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고 구체성과 면밀함에 도달할 수 있다.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한계를 지속적으로 극복하기: 올림픽 기록경기를 보며

  올림픽 기록경기를 볼 때마다 신기한 건 전 세계 각국의 아웃라이어들이 모여서 시합하는데 마치 어떤 상한선이 있는 것처럼 서로의 기록이 단 1초의 차이도 안 날 만큼 다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결승과 결승을 비교하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전반적으로 기량 차이가 난다. 그리고 십수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그 상한선이 점점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걸 보면 천부적인 재능과 무수한 노력으로 탄생한 최상위 기량의 선수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물리적 한계 끝에 서서 그 한계를 함께 넓혀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득점을 위한 체계적인 방법론이 확립될수록, 혜성처럼 등장해서 독보적으로 잘 하는 낭만주의적 천재가 출현할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낭만주의를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혹시 그것은 인간이 아직 한계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얘기에 불과하고, 실제로 인간이 한계를 꾸준히 극복하도록 해 주는 것은 오히려 체계적인 방법론에 근거한 '인간미 없는' 노력과, 그 방법론을 서로서로 배우며 협력적으로 경쟁하는 태도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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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1일 일요일

평창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인면조의 밈화가 가지는 함의에 대하여

이미지: 사람 1명, 밤

'엄숙함'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톱니바퀴 돌아가듯 설계된 서사로부터 정교하게 도출된다. 서사에서 약간의 허점이 발견된다면 엄숙함은 즉시 그 힘을 잃는다. 이러한 엄숙함은 텍스트 시대의 가치이다. 텍스트는 정해진 흐름대로 선형적으로 독해된다.
반대로, '웃음'은 여러 엄숙한 서사의 구성요소들을 원래 서사의 맥락으로부터 최대한 분리해 내어 자유롭게 재조합하는 데에서 온다. 이러한 웃음은 탈텍스트 시대, 이미지 시대의 특성에 매우 잘 부합하는 가치이다. 디지털 매체의 발전은 사이버 세계를 구성했고, 사이버 세계 속 이미지들의 바다에서 우리는 부유하며 유희한다.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개최국의 역사 상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수많은 상징들이 동시에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역사적 단절로 인해 단일한 거대서사를 구성하기 어려운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수많은 역사적 상징들을 탈맥락적으로 재조합하여 동시에 보여주면서 예의 엄숙함을 연출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시도이다. 이러한 재조합의 방식은 그 본질상 엄숙함보다는 웃음 쪽에 가깝게 닿아 있으며, 따라서 약간의 '깨는' 점만 있더라도 바로 웃음으로 향하게 된다. 엄숙함을 의도한 상황에서 웃음이 유발된다면 이 웃음은 비웃음이다.

  그러나 만약 애초에 엄숙함이 아닌 웃음을 의도한 것이라면, 그 웃음은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예컨대 드라마의 한 장면인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가 과도한 국뽕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반면, 네티즌들이 박지성, 김연아, 싸이, 이세돌 등을 마구 합성하여 장난식으로 만드는 '국조디아'(국뽕+엑조디아) 짤은 진심으로 즐겁게 생산되고 소비된다(그리고 앞과 같은 진지한 국뽕에 대한 풍자의 의미마저 획득한다).

  평창올림픽 개회식의 총감독인 송승환은 유쾌한 비언어극 '난타'를 기획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가 평창올림픽 개회식에서 기괴한 비주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인면조를 어떤 의도로 삽입했을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의도와 관계없이, 개회식 중에 갑자기 등장한 인면조의 기괴한 도상을 본 사람들은 그것을 사이버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한껏 웃으며 패러디하는, 유쾌한 방식으로 소비했다. 내가 보기에 개회식 자체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네티즌들의 이러한 소비 방식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미로 한국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은 특정 국가가 문화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징들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국가의 어떤 역사적 상징이든지 디지털적인 인프라 위에서 그 엄숙한 아우라가 파괴되고 무한히 마음대로 재조합되며 유쾌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게 하는 문화적 토양, 즉 문화의 '형식'이 아닐까. 각종 문화제에서도 대중의 위와 같은 특성을 고려하여, 자칫하면 웃겨지는 아슬아슬한 엄숙함보다는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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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9일 금요일

갈등선을 직시하며 연대를 지속하는 법: 배제가 아닌 상호이해의 젠더정치로


  내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와 관련된 논란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작년 말 한국여성철학회가 다른 학회와의 공동 학술대회에서 유민석을 발표자에 포함시켰다는 이유로 TERF 활동가들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고 해당 학술대회에서 빠지기로 결정한 사건 때문이었다. 비록 유민석의 하차가 요구된 직접적인 근거가 그의 정체성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하차 요구가 주로 TERF 활동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한국여성철학회가 해당 학술대회에 참여를 포기한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 점 등은 현재 TERF가 페미니즘 담론에서 가진 중대성을 보여준다.

  그 후에 전통 있는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리뉴얼하여 설립된 출판사 ‘이프북스’에서 국지혜를 포함하여 인터넷 상에서 퀴어포빅, 트랜스포빅한 언사를 행하고 그것을 정당화해 온 사람들의 글을 모은 서적인 ‘근본 없는 페미니즘’을 출간하기로 한 일이 있었다. 필진들의 인터넷 상에서의 언행들이 논란이 되면서 그 서적의 출간은 ‘사건성’을 획득했고, 페미니스트 가수의 축하 공연 논란, 필진 간의 불화, 원고의 미수합 등을 거치며 현재는 책 출간이 불투명해졌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는 출판사 ‘열다북스’에서 쉴라 제프리스의 저서를 출판하기로 하고 동성애자 남성에 대해 차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쉴라 제프리스의 문구를 수록한 홍보 자료를 페이스북에서 공개하여 논란이 되었다. “동성애자 남성은 남성우월주의 체제의 순응자로 볼 수 있다”로 시작되는 그 문구는 이하에서 언급할 TERF 이론의 대표적인 오류인, ‘생물학적∙심리학적 측면의 부정’과 ‘정치성으로의 무한 환원’이라는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프의 책임자들은 그들의 서적이 논란이 되자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소개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으며, 스스로 ‘인터넷에 관심을 끊은 지 몇 년이 됐다’고 하면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인터넷 위주로 유명세를 얻은 필진들을 옹호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현실에 근거해야 하는 학자적 태도가 결여된 행동이었다. 책을 ‘읽고 까라’고 주장하려면, 본인들부터 그들의 인터넷상의 행적을 ‘읽고 옹호해야’ 했다.

  열다북스 측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이미 과거에 논의되어 많은 비판을 받은 주장이므로 출간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 말만 보면 마치 학술적 연구 목적으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출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홍보자료에서는 쉴라 제프리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소개한다는 뉘앙스를 전혀 느낄 수 없으며, 그의 퀴어포빅한 주장만이 크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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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현재 기성 페미니즘 학계에 있는, 즉 90~00년대 초반쯤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학자 및 활동가들 사이에서 트랜스배제적인 분위기의 맹아가 어느 정도 있었고(과거 이프의 하리수 인터뷰에서 보듯이), 그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요즈음 인터넷을 위주로 TERF 계열에서 생산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혐오에 대해 막연하게 묵인하거나, 심지어 동조하며 이론적 정당화를 돕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00년대 초∙중반까지 축적된 페미니즘적 논의들은 사회적 수용성의 미비로 인해 몇몇 무리한 주장들을 위주로 인터넷 상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회자되면서 대중들에게 충분히 계승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페미니즘이 다시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대중적인 담론이 형성되며 기성 학계 및 활동가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해진 상황에서, 관념론 혹은 진영논리에 천착하지 않고 구체적인 현상들을 보며 기존에 축적된 양질의 논의가 대중화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 왔는지 반성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굉장히 때늦은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TERF 이론을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이들의 이론이 그 기저에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심리학적 측면의 부정’과 ‘정치성으로의 무한 환원’이라는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 이들이 페미니즘에서 가진 문제성이 페미니즘과 퀴어 간의 ‘연대’와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이며, 페미니즘과 퀴어 사이에 잠재하고 있는 갈등선을 TERF처럼 배제의 논리가 아닌 상호이해의 논리로 활용하여 높은 수준의 연대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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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RF가 트랜스젠더, 그리고 퀴어 전반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게이와 트랜스여성 등이 그들이 가진 남성성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공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직관적으로는 메일바디를 가진 비수술 트랜스여성의 여자화장실 출입 예시, 그리고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 예시 등을 통해 정당화하며, 이론적으로는 트랜스여성이 어쨌든 ‘남성’이라고 설득함으로써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트랜스여성을 여성이 되고 싶어서 여성의 특징을 따라하는 ‘남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신체적으로 메일바디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피메일바디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주장은 트랜스여성들이 여장을 하는 등의 실천이 전통적인 이분법적 성역할에 복무하므로 여성혐오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분법적 성역할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기표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그들이 그 문화 속에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대로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그러한 기표들을 활용한다는 측면을 볼 필요가 있다. 한 페이스북 친구분이 사진찍어 주신 이름 모를 책에서 본 말대로, “그들에게 여성성은 과잉 수행해야만 얻어”진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TERF의 오해는, ‘만약 성별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아예 없어진다면 그 때는 트랜스젠더가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그들의 의문 속에 집약되어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여장’이라는 개념이 없을 것이므로, 현재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기표를 취할 필요는 없게 된다. 그러나 매우 당연하게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젠더 디스포리아(성별 불일치감)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TERF의 이론은 순전히 의지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생물학적∙심리학적 영역에서의 젠더 디스포리아를 부정하며, 트랜스여성이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것을 순전히 의지에 의한 선택인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성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트랜스여성들이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상징들을 애써 취하지 않는 것이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그 존재가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비수술 트랜스여성이 ‘여성적’ 기표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냥 남성으로 인식되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젠더수행은 ‘여성적’ 기표를 취하는 것이다. ‘여성적’ 기표를 정해 놓고 여성이 되기 위해 그것을 취하는 젠더수행이 궁극적으로는 해소되는 게 이상적이지만, 그 책임을 트랜스여성 개인들에 부과하기보다는 (1)트랜스젠더의 존재가 가시화되어 있지 않고, (2)확고한 이분법적 성역할이 강요되고 있는 전통적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심지어 해석하기에 따라, 비수술 트랜스여성은 메일바디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적’ 기표를 취한다는 점에서, 이분법적 성역할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의 타파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잘못은 이분법적 성역할을 바탕으로 여장을 희화화하는 전통적 사회의 호모소셜에 있는 것이다. 더욱이, 비수술 트랜스여성이 ‘여성적’ 기표마저 취하지 않는다면, TERF는 전통적 사회에서와 같이 그들을 그냥 남성으로 취급하여 더욱 배척할 가능성이 높다. 생물학적∙심리학적인 젠더 디스포리아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이 이해될 여지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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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에서 보듯 트랜스여성, 나아가 퀴어 전반에 대한 TERF의 문제제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일차적으로는 여성성의 공간에 침투하여 불안을 일으키는 남성성에 대한 경계이며, 보다 심층에서 그러한 직관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작용하는 개인의 생물학적∙심리학적인 측면을 간과하고 오로지 정치적∙사회적인 것으로 무한히 환원하는 사고 방식이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있어 ‘후천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의지에 의해 선택된다’의 세 가지는 매우 다른 것이지만 TERF는 그 차이를 간과하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젠더수행에서 비롯될 수 있는 ‘정치적’ 문제성을 바탕으로 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한다.

  트랜스젠더의 젠더 디스포리아는 TERF에서 흔히 감정의 문제,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곤 한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는 것이니까 생물학적으로 ‘진짜’가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젠더 디스포리아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들을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물학과 심리학이 분명하게 작용하며, (설령 후천적일지라도) 오로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TERF는 생물학적 신체를 매우 중요시하며 선천적 피메일바디만이 ‘진짜 여성’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트랜스젠더를 배제할 때에는 그들의 생물학적 신체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문제성을 철저하게 간과하고, 그들이 문화적 상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관련된 정치적∙사회적 측면에만 집중한다. 이것은 모순적이다.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은 2세대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정치적 레즈비어니즘과 그 내용 및 주요 인물에 있어서 상당 부분 교집합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특징은 표면적으로는 남성성에 대한 경계, 심층적으로는 정체성의 ‘생물학적∙심리학적 측면의 부정’과 ‘정치성으로의 무한 환원’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인간관계(특히 연애관계) 형성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지만, 레즈비언을 오직 정치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처럼 환원함으로써 정작 그 존재를 지울 잠재성이 있다. 정치적 레즈비언이 대체로 레즈비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인 이러한 잠재적인 갈등선의 존재를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100% 의지에 의해 선택 가능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의 위험성은 우호적인 대상에 대해 그렇게 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적대적인 대상에 대해 그렇게 할 때에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TERF 계열에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그러면 나도 ㅇㅇ젠더겠네?’라고 조롱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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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을 갖는 TERF를 과연 ‘사이비’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TERF에 대한 이우창 선생님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TERF를 ‘사이비’ 페미니즘보다는 일종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TERF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학의 관계, 사이비과학과 과학의 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사이비과학은 학술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갈등을 허구적으로 만들어 내어, 본인들이 엄연히 과학의 한 이론으로서 다른 과학 이론들과 동등한 지위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거나, 심지어 그들의 권위로부터 부당한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TERF는 페미니즘과 퀴어 간에 엄연히 잠재하는 갈등선을 (바람직하지 않은) 특정한 방향으로 활용하여 페미니즘 내에서 역사적으로 발생하여 실질적으로 다른 페미니즘 분야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하나의 분파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담론 내의 정치적 실패에 의한 어떤 ‘징후’로 이해되어야 한다. 거시적 정치에서도 극우의 득세를 단순히 그들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존 질서의 실패로 보듯이 말이다.

  TERF를 ‘사이비’로 인식하는지 ‘극단주의’로 인식하는지에 따라, 그에 대한 대응은 굉장히 많이 달라진다. 후자를 택할 경우에, 우리는 TERF가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과학적, 사회학적으로 부정확한 이해에 근거하여 보편적 인권을 부정하는, 그러나 여전히 페미니즘의 한 분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에서는 TERF의 이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되, 오로지 TERF를 비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에서 그러한 징후가 왜 나타났을지에 대해 (안티페미니즘 쪽에서 TERF를 핑계로 페미니즘 전체를 비판하기 이전에) 누구보다 먼저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3세대 페미니즘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연대’의 문제와 정확하게 동일한 문제로서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아예 적극적으로 퀴어에 대한 혐오를 생산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TERF는 물론 페미니즘 내에서 소수의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시스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퀴어 담론이 낯설 수 있고, 소위 ‘누구를 먼저 챙길지’와 관련된 이해관계에 있어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자체는 조금 더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맨 위에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보듯이, 그러한 이유들에 의해 TERF가 정당화되는 듯한 최근의 모멘텀은 페미니즘과 퀴어에서 추구하는 보편적 인권의 확대와는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퀴어와 페미니즘은 결코 필연적으로 단일하게 합쳐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며, 쟁점의 가시화를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그 둘 사이에 모종의 갈등선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갈등선을 직시하되, 정체성을 가지고 실존하는 상대방을 보편인권의 담지체로 인정한 상태에서, 그 갈등선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소수자가 이전에 비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이 아닌가. 위와 같이 트랜스여성의 젠더수행이 이분법적 성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파할 가능성을 보는 것 등이 그 갈등선을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일 것이다. TERF와 같이, 그 갈등선을 이용해서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비단 페미니즘과 퀴어 사이에서뿐만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모든 사회 운동에서는 ‘누구를 먼저 챙기는지’의 문제가 어느 정도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러한 갈등 요소를 해소하고, 기존의 사회가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차이점을 바탕으로 서로의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공통점을 바탕으로 보편 인권을 향한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퀴어가 이론적 차원에서 단순한 접합을 넘어 완전히 융합되어야 마땅하다거나, 실천적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연대는 수많은 잠재적인 갈등선 위에서 세워지는 고도의 사회적인 상호작용이며, 그 본성상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보편 인권의 담지체로서의 상대방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아야 하며, 혐오와 폭력을 생산하는 행위를 지양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의 라잇온미 단톡방 사태로 대표되는 게이 커뮤니티의 여성혐오 역시 당연히 비판되어야 하며,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도 연대를 해치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언사를 적극적으로 지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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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하자면, TERF는 퀴어와 페미니즘 간에 잠재하고 있는 갈등선을 상호이해의 단초로 사용하지 않고 배제의 단초로 사용하여 상대방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방향으로 활용한다. 갈등선은 이해관계에 따른 것으로 순전히 정치적인 것이나, 정체성은 순전히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개인의 생물학적∙심리학적인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무엇이다. 그러나 TERF는 이러한 정체성이 100% 사회적으로 구성되거나 혹은 의지적으로 조절 가능한 것인 양, ‘순전히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들의 혐오를 정당화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금언을 오독한 결과이다. 개인적인 것에는 정치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고, 우리는 철저히 그것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의 젠더정치를 해야 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생물학적∙심리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런 작업을 진행해야만 그것에 대한 정치∙사회적 담론이 극단주의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정치성 너머에 있는 것을 사유해야만 높은 수준의 정치성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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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7일 수요일

단월드의 실체 바로알기: 페스트라이쉬 교수 유감

[ 기사출처: "학문의 상아탑에서 지구경영으로" (2018.01.04) ]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교수' 같은 포지션으로 상당히 많은 대중적 인기를 끌고 대한민국 외교부의 행사에서도 강연을 한 바 있는 임마뉴엘 페스트라이쉬 교수가 '단월드' 계열의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이번에 경희대학교를 나와서 단월드의 이승헌이 세운 대학교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로 옮겼다고 한다.

  이승헌이 창시한 단월드는 겉으로는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정상적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깊게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납에 금을 도금한 가짜 건강제품을 다단계식으로 강매하는 등 전형적인 사이비종교의 모습을 보여 왔으며, 신도들에 대한 이승헌의 성범죄 역시 수 건 폭로된 바 있다. 이 추악한 면모는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날 것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특징적인 컨텐츠가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를 자극해서 그런지 미국 땅에서 이 단월드는 단순한 컬트 이상으로 꽤 먹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려 동양학 분야 박사과정이던 97년 당시의 페스트라이쉬 교수까지 그들에게 포섭되어, 종국에는 그들의 새로운 자금줄이자 사실상의 사이비 신도 양성 기관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에 임용까지 될 정도이니 말이다.

  링크된 인터뷰에서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전 지구의 시민들을 연결하여 문화를 변화시키고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번영을 추구한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 동양학 분야의 권위있는 교수가 하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거창하지만 아무런 뜻도 없는 이러한 말들은 전형적인 단월드식 문장이다.

  우리가 통학할 때 자주 이용하는 관악02 마을버스 내부의 광고에도 한동안 이들의 명상 광고가 붙어 있어서 볼 때마다 기함하였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예 버스 외부에 이승헌의 새 책인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가 크게 광고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의학적 최대 수명이 120살인데, 자신들의 명상이나 뇌교육 등에 참여하면 그 수명을 달성할 수 있다고 광고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홍보 방식으로 인해, 몸이 크게 아팠던 사람들이 단월드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모 유명 웹툰 작가도 그 중 한 명이다. 안타깝고 끔찍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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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4일 일요일

학내 성폭력의 공동체적 해결에 관하여

  학내 성폭력 문제의 '공동체적 해법'은 원론적으로만 따지자면 사적 제재와 구분되기 어렵지만, 피해자의 의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에 경종을 울리고 추후 유사 사건의 발생을 예방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사적 제재와 구별되는 함의가 인정될 수 있다. 특히 성희롱의 경우 대체로 법적인 해결이 쉽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의 분위기를 쇄신해서 예방하는 방향의 해법이 현재로선 거의 유일하다는 점도 있고 말이다.

  이 때 공론화에 의한 공동체적 해법과 단순한 사적 제재가 구분될 수 있는 지점은 나름대로의 시스템과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공론화의 의사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학생회 산하기구와 같은 중재책임자에 의해 철저하게 마련된 가이드라인을 따라서 신속하고 빈틈없는, 그러면서도 2차 피해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식의 공론화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공유한 글의 사례(+댓글까지)는 이런 면에서 상당히 모범적인 사후대처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다만 이런 해결방식은 중재책임자가 존재하는 공동체 내부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이라는 본질적인 한계점 역시 존재한다. 같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 간에 사안이 발생했거나, 사안 발생 당시에만 같은 공동체에 속했고 현재에는 해당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인 등의, 어떠한 중재자도 존재하지 않는 raw한 사회에서는 사법적 처벌과도, 사적 제재와도 구분되는 공론화가 과연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그 구체적인 목적과 방식은 어때야 할지에 대해 정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며,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회 곳곳에 양성(?)하여 사안별로 적합한 중재자를 자율적으로 설정할 수 있도록 우호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즉 '시민사회의 자기교육'만이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그러면서도 '작은 사회'화를 경계해야 하고, 사법 체계와의 공조 그리고 사법체계에 대한 견제가 필요할 것이다. 원론적이고 이상론적인 이야기지만 전혀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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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의 사회학

  나는 설령 교수의 자식인 중고등학생들이 양육자의 연구 분야에 '실제로' 재능과 관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그 분야를 선택해서 연구에 참여하고 싶어할지라도, 어쨌든 양육자의 연구실에서는 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물론 연구윤리의 경종을 울리고 현실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자는 관점에서 이런 식의 원칙 설정이야 필요한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실제로 관심이 있었는지' 어쨌는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공정함을 판별하려는 것 자체가 어쩐지 지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고 진짜 문제를 은폐한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 관심 여부, 양육자의 영향 등을 계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연구실의 구성원 중 누가 봐도 공정하지 못한 일임에도 그게 기어코 실행될 수 있게 했던 교수의 권력에 있다. 우리는 '연구실의 사회학'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과학의 제 문제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은 언제나 여기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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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일 금요일

진보단체 '언더조직' 폭로 사건

  대외적으로 숨겨진 '언더조직'이 알바노조를 포함한 몇몇 유명 청년단체의 배후에 있으면서 고압적인 의사결정과 비인간적·반여성적인 처우를 해 왔음을 폭로하는 알바노조 3기 위원장님의 용기있는 글이다. 엄혹한 시대의 영향으로 많은 운동 조직들이 이런 식으로 운영된다는 것이 암암리에 알려져 있으나, 어쨌든 이 단체에서 문제점이 폭로되었고 책임도 이들이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환경에서 사회운동 조직, 학생회, 학술 모임 그리고 심지어 취미활동 동아리까지, 대기업의 후원, 금전적 보상, 스펙 같은 단어들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 - 넓은 의미로 '불온한' - 모든 청년활동은 오늘날 기실 공통된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이 사건에서는 특정 사회운동조직에서 그 위기가 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2018년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엄혹한 시대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고민해야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조직을 굴리고 책을 읽으며 목소리를 내는가. 솔직함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말해낼 수 있으려면 우리 청년들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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