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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6일 목요일

합리성을 보는 두 관점: '이름붙이기'인가 '이름 지우기'인가?

Identify라는 단어에는 어떤 객체를 다른 객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고 이름을 붙이는, 사유의 보편적 기본단위와 관련되어 있는 굉장히 많은 맥락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한국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해보면 굉장히 난감할때가 많고, 여러가지 다른 뜻, 심지어는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뜻이 섞여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흥미롭다.

먼저 이 단어에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어떤 것의 특징을 잡아내서 '감별'하고, '정체를 확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마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뜻일 것 같다. 예컨대 용의자를 특정하거나, 정체불명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을 identify라고 한다.

그런 한편, identify는 서로 다른 A와 B의 공통점을 찾아서 '동일시한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듯하다. 물론 그럴 때에 equate가 더 널리 쓰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분명히 identify도 이렇게 사용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위 두 가지 의미가 정반대에 가깝지 않느냐는 거다. 서로 구별되지 않던 것 사이에서 특정한 것을 지목하여 신원을 확인하는 것과, 서로 다른 것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

철학에서도 비슷한 게 있다. 인식능력에 의해 세상을 열심히 규정하다 보면 모든 것들이 분절되고 나뉘면서 이름이 붙게 될텐데, 내 직관에서는 이를 모든 것들이 '비동일화'된다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과도한 계몽주의적(?) 합리성을 비판하고 원초적인 커다란 덩어리를 귀환시키는 작업을, 나는 '동일성'을 귀환시킨다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는 반대에 가깝다. 합리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아도르노 같은 사람의 텍스트를 읽을때, 혹은 학부 2학년 시절 김영 교수님의 <예술과 과학>을 수강할때 (이 수업에서는 레퍼런스가 일일이 제시되지 않았던지라 누구의 이론인지는 잘 모른다) '동일성'과 '비동일성'이라는 키워드가 종종 등장했는데 이것 때문에 좀 헷갈렸었다.

내 뇌피셜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음의 두 방식으로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동일성/비동일성, 그리고 보편성/특수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이 문제는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작동을 '개별자들의 특수성을 뭉개서 보편자로 이행시키는' 작업으로 보느냐, 아니면 개별자를 세밀하게 쪼개고 나누어서 '보편적으로 이해가능한 형태의 지식으로 정리하는' 작업으로 보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세밀하게 나눠볼수록 오히려 보편성을 향한다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후자 쪽으로 생각을 했었는데, 아도르노 같은 사람이 계몽주의적 합리화가 사회에 끼친 부정적 영향을 분석할때는 당연히 전자 쪽으로 생각을 했을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어떤 거시적이고 원초적인 덩어리로서의 보편성과, 미시적이되 어디에나 잠재하는 원리로서의 보편성의 차이도 작용하고 있다. 자못 신비주의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원초적인 커다란 덩어리' 같은걸 생각하고, 그것도 보편성 아닌가? 라고 생각해서 이러한 논의가 꼬이고 혼동된것이다. 그러한 덩어리를 분절하고 개념화하고 명명하는 과정을 나는 특수화라고 생각했고, 엥 근데 분절화되어 이해된, 곧 지식으로 포섭된 것이야말로 보편성 아닌가? 이렇게 된것. 이러한 도식에서는 합리성은 곧 '이름 붙이기'다.

내 전공분야에서 계산을 해서 이론을 전개할때도 identification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수식을 전개해서 여러 가지 항들을 얻었을 때, 각 항의 물리적 의미를 바탕으로 이름을 붙이고 표기를 정하는 과정을, 그 항들을 각 물리량으로 identify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합리성을 '이름 붙이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 좀더 커다랗게 봐도, 적법하게 보존되는 양에 이름을 붙여서 중요하게 다룰 때와, 그렇지 않은 애매모호한 양에 이름을 붙일 때는 이론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다. 총체적인 chaos를 특정한 규율에 따라 질서있게 통제해야만 오히려 '이름을 붙일만한' 일관된 현상들이 나온다.

반면 상술한 아도르노 같은 경우에는 합리성에 의해 포섭되지 않은 채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개별자(~특수자 -> 비동일성)로 보고, 그러한 것들이 합리성에 의해 가공되고 특징이 지워지고 보편자로 승화되는 과정을 identification 즉 동일화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에서는 합리성은 곧 '이름 지우기'다. 합리화된 규율에 따른 질서있는 통제는 존재자들의 개별성을 억압하고 이름을 지우게 된다.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원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였던, identify의 두 가지 의미 관련해서 살펴보자. 여러 가지 사물들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특정한 사물을 지목하여 '감별'하는 것은, 사실 그 특정한 사물을 무언가와 '동일시'하는 거라고 보면 위의 혼동이 해결된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어떤 사물을 그 사물의 이데아, 즉 그 사물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전형적인 특성들과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을 감별해낸다고 보는 것이다.

즉 identify의 가장 제너럴한 인식론적 의미는 '공통점'을 뽑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어떤 사물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을 '이데아와의 동일시'라고 본다면, 신원 확인 과정을 identify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반면 신원 확인 과정을 서로 관계맺고 있는 사물들 사이에서 '차이점'을 부각해서 특정한 사물만을 '떠 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면, identify라는 단어는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게 내가 느꼈던 이상함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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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3일 월요일

盧 13주기에 文정부를 되돌아본다: 열화되어 계승된 원칙주의와 탈권위주의

이제는 대선에 의한 정권 출범도 5월이고 그렇다보니 5월은 가정의 달일 뿐만 아니라 완연한 정치의 달이 된 느낌이다. 그 이유에는 5월 23일이라는 오늘의 날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지선을 앞둔 현재 민주당에서는 차세대에 어필하는 소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절치부심과 쇄신의 시도보다는 각종 무리한 입법 및 망언과 사건사고가 더 돋보이며, 총체적인 패배의 길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대통령 추도분위기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노골적 기대가 일각에서 있으나 이 역시 유의미하게 작동하지 않을것이다.


3년 전 오늘 서거 10주기 때 썼던 글(링크: https://bit.ly/3AI7ocb)에서 언급한,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개인적 행보와 정치관, 그리고 참여정부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조명작업은 현실정치와 약간 거리를 둔채로 노무현재단 같은 데에서 충실하게 이행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전임 이사장이 직을 단 채로 재단 공식 채널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여러 무리한 현실정치적 언행을 하고 송사에도 얽히면서 재단의 그런 면모가 대외적으로 퇴색된 면이 큰데... 사실 노무현재단 홈페이지나 유튜브에서 보면 노무현에 대한 그런 재조명과 기록 사업들은 상당히 충실하게 진행 되어오고 있긴 한것으로 보인다. 새로 이사장으로 선출된 정세균 의장이 이사장직에서 어떤 행보를 할지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퇴장한 문재인 정부가 가졌던 인사 및 현안 등에서의 나름의(^^;;) 원칙주의, 나름의 탈권위 (필요할때 플레이어로 거리낌없이 나서기) 역시 참여정부의 성공과 실패 경험에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충분한 설명 없는 원칙주의는 불통과 답답함으로, 일방적인 탈권위는 정권 반대자들에 대한 겁박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이와 연관된 문제지만 대통령이 원칙적 대응을 할 때냐 과감한 결단을 할 때냐의 판단이 국민이 생각하는 사안의 경중과 불일치하여, 필요할때 나서지 않는다는 인상도 풍겼다. 만약 많은 국민들이 이러저러하게 느꼈다면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이 사실이기도 할테다.


정국을 이끌만큼의 파괴력을 가진 선명한 신념을 재임중에도 풍부하게 내놓아서 과도한 솔직함에 대해 비판까지 받았던 노무현에 비해, 그 계승자로 간주되던 문재인정부는 그런 면모가 적었다. 국정 운영에서도 공격과 방어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피로한 논점들 외에, 그 자체로 파괴력있고 논쟁적인 키워드는 참여정부 때 훨씬 많았던 기억이다.


나라가 시스템에 의해 돌아간다고는 하지만 대통령실의 영향은 국정운영에 여전히 절대적이다. 대통령과 그 주변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정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많은 도움이 될것이다. 그런 것들이 팬덤만의 회고가 아니라 보편적 기록으로 연구될수 있게 하려면 팬덤에게는 내려놓음의 지혜, 반대세력에게는 냉소와 조롱에 그치지 않는 차분한 참여의 지혜가 필요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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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20일 금요일

5.18을 보는 관점: 강요되는 극복과 보편적 기념 사이에서

민주당 박지현 공동비대위원장이 임행곡 가사를 보면서 부른 것이 뭐가 문제냐는 옹호에 큰 틀에서는 동감하지만, 옹호들 사이에서도 결이 좀 나뉘는거 같다. 그 중에서 임행곡이 잊혀져야 비로소 건강한 민주주의라는 의견들은 특히나 좀 미묘한 것 같다. 특히 그것이 민주당쪽에서 나올경우 더욱 그렇다. 외웠냐 안외웠냐로 공격하며 상징자산에 대한 피로감을 유발하는 정치는 지양되어야겠으나, 몰라도 된다라는 친민주당 쪽의 옹호들 중 꽤 많은 수에도 ㅡ특히 뉘앙스에 따라서 하술할 강박적 쿨함이 느껴질 경우엔ㅡ 전적으로 동감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수 진영도 임행곡을 거리낌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취하며 신의를 확보하게 되어야한다. 민주당 진영이 5.18의 가치를 부르짖는것 그 자체로 정치적 효용을 얻을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요컨대 5.18 아픔을 지워내고 극복하고 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보편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해야한다.


보수 쪽에서 호남에 열린 태도를 취하는 분들 중에서도 5.18을 보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극복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그 미묘한 차이는, 호남이 보수정당에 표를 안 줘 온 현상을 '이상한', '비정상적인' 일로 취급하는지 여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호남뿐만 아니라 그 어디의 표심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늘 지적하듯이, 이상하다는게 사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픔을 극복해야 하는데 과거에 묶여 멈춰있다는 식의 저런 주장들은, 하루빨리 5.18 같은 정신적(?) 가치를 철회하고 자신들을 지지해 주면 좋겠다는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강요되는 망각, 강요되는 극복에의 요구는 매우 시혜적이다.


물론 일각에서 ㅡ주로 민주당을 관성적으로 옹호하기 위해ㅡ 호남인들은 5.18 정신과 같은 가치 본위의 현명한 투표를 한다 라며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나는 5.18에 대한 성역화가 있다며 과도한 불만을 토로하는 극우(내용적인 걸 떠나 성역에 대한 반감이라는 형식 면에서)적 주장을 매우 싫어한다.


그렇지만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이 5.18 정신을 자신들이 필연적으로 담지한다고 착각하고 관성적으로 외치며 활용하다가 문제를 일으킬때는, 혹은 기념의 과정에서 헛발질을 할때에는 아 저러니까 성역화라고 하는구나, 빌미를 주는구나 싶어 마찬가지로 화가 나기도 한다.


물론 그때 잘못은 그러한 정치인들에 물어야 할것이며, 그들을 지지하거나 선출한 ㅡ혹은 그렇다고 평면화되어 간주되는ㅡ 호남 유권자들을 타자화하며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테다. 늘 말하지만 이것은 나쁜 일이기 이전에,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일각에서의 불만과 달리, 호남의 유권자라는 집단을 탓하는 일의 원리적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은 성역화라고 할 수 없다.


호남정치가 꼭 이념적 가치본위의 투표냐 하면 당연하게도 그렇지도 않다. 지역조직에서 민주당이 강세라 굉장히 많은 정치적 스펙트럼이 민주당 깃발 아래 모여있는 데서 오는 특수성 같은 게 있다. 진영을 떠나 각 지역의 정치적 특색을 '보편성 속의 특수성'으로 이해해야 타자화, 희화화 없는 제대로된 관점이 수립될수 있을것이다.


아무튼 말하고 싶던 건, 민주당 지지층 일각에서 90년대생인데 뭐 어떠냐고 옹호하는 것도, 그 구체적인 뉘앙스에 따라 다소간에 강박적인 쿨함으로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박적인 쿨함은 의도치않게 위와 같은 극우로부터의 '강요되는 극복'에 동조하는 효과를 낼수 있으므로 경계해야한다.


가사를 봤느니 안봤느니 자체가 좀스럽고, 90년대 생이라면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나는 사실 생각이 좀 다르긴 하다. 난 민주당에서 박지현 위원장만큼 올바른 언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근래에 없다고 보고, 이런 논란은 부당한 공격인 측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 외부자적인 위치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겠으나 그 또한 행보와 역량에 의해 가능한 포지셔닝일테다.


그래도 (비록 마이너한 디테일이긴 하겠으나) 이런 논란이 안 생기게끔 한번더 숙지하고 불렀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다. 근데 뭐 계속 안보고 부르다가 잠깐 본것이 캡쳐된 것이라고 하니 결국 다소 좀스럽게 공격을 한 쪽에 비판의 화살을 돌리게 되기는 한다.


잠깐 내 얘기를 해보자면 나는 학부시절에 지나가는 킹반학우였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흔하다는 민중의례도 직접 참여해본적 없는것같다. 그치만 일종의 너드적 취미 + 음악 찾아듣는 취미로 소련, 미국 등의 국가를 찾아 들어 보는거랑 기본적으로 비슷한 선에서, 그러나 불과 수십년전 우리나라에서 있던 일에 대한 구체적인 맥락을 아는 입장에서 조금 더 각별한 마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여러차례 들어보고 잘 외우고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홍콩 민주화운동에서 임행곡이 불리었다길래 기억에 더욱 선명히 남아있다.


암튼 외워서 부르든 보면서 부르든, 그렇게 보편적으로 기념하게끔 추인하겠다, 혹은 추인에 협조하겠다는 정치적 태도가 훼손되지 않으면 아무렴 상관없지 않을까 한다. 특히나 반말 써가면서 고압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민주당 코어 지지층의 태도는 정말 불쾌하다. 자신들의 당 내에서 비대위원장 개인을 공격하느라 상징자산을 소모시키지 말고, 5.18의 헌법전문 수록을 비롯한 보편적 기념을 향해 묵묵히 힘써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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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8일 수요일

5.18 민주화운동 제42주년을 맞으며: 방해작전을 민주적으로 지양하고 보편적 가치로 추인하자

이번 5.18 기념식의 모습은 과거 보수정권에서 대통령은 불참하고 임행곡 대신에 방아타령을 부르게끔 하려던 것이나, 제창 대신 합창으로 하는 등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던 그런 모습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 의원 사실상 전원이 참석하고 임행곡도 제창하게끔 한 것은 일단은 긍정적으로 본다. 국민 통합의 관점에서, 그리고 지난 연말에 나왔던 전두환 관련 실언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대통령 연설문 내용이 좋아야 하는데, 며칠 전 취임사에서 파괴력있는 가치 어휘들을 내놓긴 했지만 글로서의 내용적 구체성이 다소 떨어졌던걸 생각하면 이번 5.18 연설문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없다.


한편 이번 해에도 5.18에 대해 몇가지 주요 사실들이 어김없이 새롭게 드러났다. 발포 명령권자 관련 단서가 담긴 문건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북한 개입 음모론에서 '광수 1호'로 지목되었던 사람이 간첩이나 북한군이 아닌 평범한 시민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미 생각 이상으로 많이 연구되고 기록되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새로운 사실들이 업데이트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5.18의 보편적 추인에 대한 이해할수 없는 노골적인 불만 표출과 방해 작전이 앞으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지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하루빨리 헌법 전문에도 수록되고, 한국 및 아시아의 민주화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서 국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자리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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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4일 토요일

자유와 반지성주의: 근미래 이념정치의 두 키워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를 던졌다. 둘 모두 원래대로라면 내가 관심을 크게 가질 법한 주제이다. 좀더 정확하게는 그 단어들 자체보다는, 그 단어들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어떤 싸움을 벌이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사회의 정치적 전선을 매우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두들 그 얘기를 열심히 하니깐 나로서는 특별히 추가로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어져 버린 것이 괜히 아이러니하고 아쉽다.


내 생각에 저런 것들이 재밌는 이유는, 합리성이라는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극단주의적 오용이 무척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 실현이 쉬운 것은 언제나 후자 쪽이다.


물론 이것들만이 합리성이라는 주제와 필연적, 근본적으로 연관된다고 신봉(?)해서는 안될 것이며, 요즘 자주 언급되는 가치들 중 저런 것들이 합리성에 대한 내 관심사와 연관되는 것 같다고 소박하게만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자유는 수 차례 지적했듯이 보수 진영에서는 적극적으로 취하고 싶어하는 가치인데, 난 자유에 대한 그쪽의 이해 역시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 민주당 진영에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가치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관심 자체가 그다지 없는 듯해서 무척 아쉽다. 이 둘 모두,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이를 정치권력에 반영하는 수단으로서의 공적 이성과는 꽤나 떨어져 있는 처사겠다.


한편 반지성주의 같은 경우는 상대진영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로의 다소 넓은 쓰임도 있는 반면, 어떠한 정치적 경향의 구체적인 연원과 기능을 지적하는 개념으로서의 좁은 쓰임도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 둘이 경합하면서 유의미한 한국적 맥락의 담론이 탄생한다면 재밌을 것 같다.


미국정치의 성공과 실패, 통합과 분열의 역사가 이 자유와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들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담론 중 이념중심(?)적인 것들은 좌우를 불문하고 미국의 상응하는 담론들에서 영적인(?) 부분만 조금 탈색시킨 채로 그것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런 키워드들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감있게 얘기할 수. 있는 역량이 앞으로의 한국의 이념정치에서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근데 각 진영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가치를 담지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싸움이 성립되고 한국적 맥락이 변증법적으로 발전 하는 것인데... 민주당이 이러한 단어들에는 일관적으로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게 무척 아쉬운 점이다. 5년동안 실천적 이론가(?)라고 할수있는 사람들이 그런 빌드업을 게을리 한 결과, 자유와 반지성주의를 오남용하는 정치적 극단주의에 대응할 사회적 역량이 많이 떨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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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2일 목요일

(쪽글모음) 약탈적 학술지, 연구윤리, 대학입시

한동훈 장관후보 자녀의 약탈적 학술지 게재 논란에 대해 쓴 짧은 쪽글들을 이곳에 모아 올린다.


고등학교 측의 책임

(2022.05.08, Facebook 게시물 링크)

각종 논문대회 수상이나 저널 논문 같은게 심심치 않게 나오는 고등학교의 경우는 대필, 표절, 약탈저널 등의 문제가 있을때 징계 및 생기부 기재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논문게재 사실은 학교의 경사(?)인 만큼 당연히 파악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논문 쓸 수는 있는데, 문제가 드러났을 때 학교 소관으로 책임 지울 방법과 선례가 마땅히 없으니 윤리의 아노미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드러났을 때 단순히 철회하고 끝난다면 제대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논란이 되는 경우에도 학교에서 마련된 징계 절차가 작동하면 되니까, 어떻게든 책임을 지우고 고통받게 만들겠다는 사적 조리돌림 또한 덜해지지 않을까 싶다.


이유 있는 직업윤리는 보편윤리다: 학계 내의 규칙이 무슨 상관이냐는 자들에게

(2022.05.08, Facebook 게시물 링크)

부문별 직업윤리를 타부문에 대한 잣대로 적용하는건 근본적으로 '비유적'일 수밖에 없고 보편윤리라고 보기 어렵다. 반면, 누군가가 자신의 부문에서 이유 있는 직업윤리가 위반된 사실을 발견하고 호소할 때에 남들이 그러한 호소를 존중하고 들어보는 건 명백히 보편윤리의 영역이라고 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떤 개인도 사회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지 못한' 현대사회의 가치체계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합의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과학에서 '정설'이 형성되고 소비되는 과정을 단순히 권위에 의존한 논증으로 취급할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보편윤리 감각의 결여를 자랑삼아 얘기하는 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미국 명문대 입시의 현실: 검증역량 부족과 신뢰기반 선발의 맹점을 파고드는 아시안들

내가 굉장히 궁금하고 긴가민가했던 지점을 짚어주는 이석원 교수님의 포스트(Facebook 게시물 링크)을 보았다.

결론은, 미국 명문대들도 입시 과정에서 약탈적학술지 같은 스캠성 실적들 일일이 검증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에 가까운듯. 그 틈을 파고들어 신뢰를 깨면서 일해온게 스캠에 의존하는 입시컨설팅인거고.

전에도 말했지만 한국이든 미국이든 입학본부가 더 많은 질적, 양적 노력을 들여서라도 그런걸 적극적, 구체적으로 걸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면 아예 최근에 발의된 법안처럼 국가차원에서 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게 보통 큰 일은 아닌가보다.

2022년 5월 10일 화요일

김풍 작가의 재밌어보이는 인생

매체를 통해서만 접하지만, 유명 웹툰작가인 김풍 작가의 여러가지 행보와 면모는 알면 알수록 가슴이 웅장해진다. 본인이 직접 한 것들만 해도 그런데, 서로 다른분야의 톱 사람들 주변에서도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뭔가 취미로 하고 싶거나 만나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고민 없이 지르는 스타일이신 듯.


굳이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90년대에 캠코더 취미로 여행이나 노래방 등에서 UCC 촬영

대학시절 클럽 네임드죽돌이

다듀 개코 대학선배. 개코가 흑인음악 동아리 만들었으니 들어봐달라 하고 패션도 물어보고 그랬지만 당시에는 서울권 클럽 다니던 부심 있어서 실력 잘 몰랐는데 나중에 엠넷 나온거보고 놀랐다고함

한국 웹툰 최초 개척, 디시인사이드 폐인문화 주도

정성일이 창립한 영화잡지 키노를 전신으로 하는 인터넷매체 엔키노에서 기획자로 일함

김은희작가, 장항준감독 절친한 동생. 장항준감독 라디오 듣고 너무 만나고싶어서 엔키노 인터뷰 명분으로 삼고초려해서 만났다고함. 윤종신과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장항준감독 인싸력이 대단했으니 그쪽 모임에서 알게된 사람들도 많을듯

싸이월드 초기에 미니홈피 꾸미는 그림 그리는걸로 회사 설립해서 돈 많이범. 이때 20대 중후반이었는데 사장님이었으니 본인표현을 빌리면 뭐라도 된듯한 뽕에 차있었다함

연극 극단 생활, 영화 출연

2010년대 이후로는 냉장고를 부탁해 등 메이져 예능인 반열로, 모르는사람이 더 적을 정도.

각종 유사과학체험(?) 안해보신게 없음


등등... 이것들은 나무위키에도 잘 안 나와 있는 얘기들이고 여러 방송에서 파편적으로 들은것만 직접 대략 모아봤는데 이 정도로, 이게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궤적인가 싶을 정도다. 감수성과 감각이 뛰어난데 순진한 인싸력까지 겸비하셔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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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5일 목요일

특권적 스펙잔치를 막으려면: 기재 제한이 아닌 대학본부의 검증역량 확충으로

특권적 스펙잔치를 막으려면: 기재 제한이 아닌 대학본부의 검증역량 확충으로

(2022.05.05, Facebook 게시물 링크)

- 스펙 기재에 대한 끊임없는 제한은 오히려 편법을 조장하고 정보격차를 강화한다

- 대학 측과 소관 정부부처에서 입학본부의 검증 역량을 적극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한동훈 법무장관 후보의 자녀가 고교생 신분으로 약탈적 학술지에 수 편의 논문을 게재한 것이 논란이다.


심사 엄격한 곳도 아니고 사실상 약탈적 저널 같은 데에 논문 여러개 실었다고 해서 한국이든 미국이든 대학입시에 그게 어필이 되기는 하는 것인가 싶어서 의문이다. 어필이 되면 그 대학들이 더 문제가 있는거 아닌가 싶다. 만약에 컨설턴트라는 사람이 있는거면 구색 갖추고 한몫 더 땡기려고 쓸데없는거 시킨거 같기도 하고... 암튼 입시 및 관련 사교육 프로세스를 모르니 자세히 말을 얹기가 어렵다.


지난 정권에서는 조국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 장관 후보도 자녀가 출판한 책에 개인적 인연으로 무려 인도 대통령의 추천사를 받아서 대입에 활용하질 않나... 새로 들어설 정권의 장관 후보들 중에서도 몇 주째 보도되듯이, 말해봤자 입만 아플 정도로 자녀 입시 편법과 각종 부모찬스가 한 두. 건이 아니다.


정호영은 사퇴해야 한다고 보고 (사실 사퇴를 넘어 수사받아야 할 정도같은데... 암튼 국민의힘 일각에서도 사퇴압박 기류가 있는듯한데 당선인쪽에서는 아직인듯), 한동훈은 자녀가 아직 대입에 활용하지 않은데다 윤 당선인 입장에서 워낙 힘준 인사였을거라 사퇴같은 걸로까지 이어지진 않을거같다.


하여간 이 나라에서 고위인사들이 대학입시를 계급재생산 과정으로 인지하고 편법적인 방식으로 잔치 벌인것은 내가 분명히 알겠다. 수시스러운 것들이 건전한 방식으로 확대돼서 양질의 고등교육 기회 확대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실상이 그런 식이었으면 결국 수시제도를 어떻게 신뢰하겠나...


편법의 철폐에 더해서, 편법 및 부모찬스가 아니라 철저히 정당한 제도의 외양을 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도 알고보면 정보와 기회의 격차가 무비판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부문들이 꽤 많을테고 그런 것들도 앞으로 반성되고 완화되어야 하겠다.


나같은경우는 스스로는 억지스펙 없이 흥미본위, 자기주도적으로 했다고 믿지만 부담스럽게 무리하게 안해도 어느정도 자신 있어서 그런거고... 먼 발치에서 보면 그런 정보격차 구조에서 수혜를 입는 쪽의 말단 정도에는 위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도 요즘 보도되는 스카이캐슬 급의 딴세상 얘기를 보면 정작 진짜로 반성 많이 해야할 사람들이 안하는구나 라는 꼬인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정치권과 소관 행정부서에서도 해결 도모해야하는 이슈겠지만 결국 스캠성 스펙과 부모찬스로 만들어진 스펙을 서류와 면접에서 못/안 걸러내는 대학 입학본부들의 역량문제도 있다. 이런식이면 편법적으로 안한 사람만 바보 되고 못한사람만 억울해지는거 아닌가. 


지금까지는 스펙관련 불균등 논란 생길때마다 앞으로는 반영 안할테니 쓸데없는거 하지말라 라고 계속 줄여나간걸로 알고있다. 조국사태뿐만 아니라 이미 훨씬 예전에 올림피아드 반영 안한다 할때부터 그런식이었다.


의미값이 떨어지는 단어긴 하지만 전형적인 관료적(?) 대책인듯하다. 그렇게 할수록 오히려 어떻게 해야 입시에 반영되는 스펙을 만들수 있는지 관해서 정보격차가 더 커지고, 더 괴이쩍은 입시전략이 난립할것이다. 이건 사교육뿐만 아니라 사립학교 심지어 공립학교 같은 퍼블릭섹터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고있는 일이라고 알고있다. 사교육은 속성상 어쩔수 없는 면이 있으니 후술하듯이 간접적으로 유도해야 하고 후자가 오히려 더 문제다.


스펙 기재 자체는 비교적 넓게 인정하되 지원자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이고 빡센 서류검토와 면접을 해서 스캠과 부모찬스를 걸러낼수 있는 대학교의 역량이 더 강조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대학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수 있는게 아니고... 한국 대학의 경우는 정석적인게 통하고 편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메시지와 사례를 축적시켜서 그게 사교육계에도 정설로 통하도록 만들어둬야 한다. 유능한 교직원들이 충분히 채용되어 충분한 시간을 쓸수 있도록 대학이랑 소관 행정부처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면 좋겠다.

2022년 5월 3일 화요일

밴드 토토(Toto) 멤버들의 세션으로서의 족적

어제 본가에 갔을때 엄마가 틀어두신 플레이리스트에서 밴드 시카고(Chicago)의 'Hard to say I'm sorry'라는 곡이 나왔다. 그런데 예전에 동아리의 음악감상 모임에서 알게된 밴드 Toto의 곡들('Africa' 등)과 그 느낌이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얘기를 했더니 귀가 참 좋다며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고 하셨다.


토토 멤버들은 뛰어난 연주자로서 다른 팀의 세션 같은것도 많이 했다 보니, 혹시나 해서 해당 곡의 세션을 누가 했는지도 찾아보았다. 위키백과를 보니 과연 예상대로, 토토 멤버들인 스티브 루카서와 스티브 포카로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토의 색깔이 들어간 트랙들은 사운드와 연주가 특출나게 세련되었다 보니 사전 정보 없이도 비교적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해서 대중음악 역사의 레전드 앨범인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도 토토 멤버들이 비중 있게 연주하고 프로듀싱한 것이라고 알려드렸더니, 듣고보니 그 스타일이 느껴진다고 재밌어하셨다. 스릴러 앨범의 엄청난 영향력을 감안하면 토토의 사운드가 마이클 잭슨이라는 전설적인 아티스트이자 퍼포머의 감각을 통해 대중음악 연주와 프로듀싱의 세련됨을 재정의했다고까지 볼 수도 있겠다.



이 유튜브 영상은 'Get away'라고 이름붙은 후반부 화려한 연주가 더해진 버전인데 정말 들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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