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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7일 월요일

디지털 아트의 발전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생성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서, 나는 단순히 여러 물체를 retrieval해서 이산적으로 병치시키는 아이디어 suggestion, 혹은 ppt처럼 논리적 관계를 표현하는 다이어그램의 편리한 생성 정도가 제일 먼저 대중화 될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것보다 아예 학습 데이터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조합하여 회화를 그려주는 생성모델이 더 먼저 대중화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생성모델들의 기초원리의 중심에는 다름아닌 '확률분포'라는 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가능성을 GAN 등에서 이미 실제로도 봤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사실은 예상을 했어야 맞겠다.


그리고 맨 위 문단에 말한 것들도 그 개념증명은 오버스펙으로 되어버린 셈이라, 금세 서비스들이 대중화되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이건 아직 많이는 안 보이긴 하는데, 언어모델인 ChatGPT로도 프롬프팅을 잘 하면 논리적인 시각적 다이어그램을 그릴 수도 있다).


점, 선, 면 같은 단순한 도형들을 조합한 컴퓨터 아트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70년대이며 (80년대 록밴드 앨범 커버들을 보면 초보적인 디지털 아트가 많이 보인다), 내 심리적 거리는 그 시절에 한땀한땀 컴퓨터를 배워가며 작업한 선구자들에 대해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50년도 안 된 2020년대 초반에 아예 프롬프팅으로만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려주는 컴퓨터 기술이 나온 것은, 정말 곱씹을수록 괴상한 일이다. 이것은 휴먼스케일에선 이해가 어렵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기여하면서 누적이 빨리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50년의 격차는 엄청 큰데, 앞으로 만약에 인류문명이 오래갈수 있다면 이 50년간의 발전이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지 궁금하다. 생산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면 아마 멀지 않은 시대에 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기술 = 인공지능서비스 기술 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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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4일 금요일

대학원 생활에서 불안감의 요인: 사회적 계약의 부재와 유예되는 진로선택

대학원생은 대학생이 아니라서 장학금도 드물고, 인건비도 근로소득이 아닌 기타소득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받는 여러 혜택이나 연금 같은 것들, 그리고 대출심사 같은 것에도 해당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분명히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대학생도 근로자도 아닌, 말하자면 이중적으로 배제되는 입장인 것이다.

(특히 전문연구요원은 많은 장학사업이나 펀딩에서 예외이고 학내 근로도 불가능함. 복무 시간을 준수하면 학내 근로는 당연히 불가능한 것이니 그렇다고 치는데, 장학 같은 경우는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장학 수혜 자체가 스펙이 되는 경우도 있는지라 더 아쉬운 부분이고... 암튼 이 부분은 이번에 장관님이 개선 의지가 있으시다고 들었다.)


이렇다 보니, 분명히 일도 열심히 하고 있고 BK 및 과제 인건비 등도 챙겨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사회의 엄연한 구성원으로서 삶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듯하다. 이러한 유예에서 오는 불안과 불확실성이 큰 시기(개인적)이고 또한 그러한 세대(사회적)이다보니 좀더 이런 게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대학원생들한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교육과 사회에 좀더 직접 기여할 책무를 부여해서라도, 고도화된 사회계약의 참여자로 약간 더 적극적으로 포함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귀찮아할 사람도 많겠지만...


아무튼 나 정도면 무척 괜찮은 환경에서 다니는 것일텐데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현대 국가에서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정확하게 제도 상에 인지되고 라이프사이클에 맞게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학원생이라는 신분이 유독 이런 면에서 구멍이 있는 것 같다.

대학원생 인건비가 근로소득으로 인정되거나, 평균값이 대폭 오르거나 하는건 여건상 무리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마땅한 지향점인지조차 불분명하긴 하다. 다만 회사 근로자에 준하는 이런저런 제도적 관심과 지원을 대학원생들도 어떤 방법으로 받을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다.

사실은 방법이 있는데 결혼하면 각종 혜택이 있다고 한다. 힘들고 결혼 안하는 시대라지만 이런 걸 감안하면 역시 상대에게 확신이 들면 끝없이 미루기보다는 주저말고 선택을 하는 것도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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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7일 금요일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한승혜 외)>을 기대하며

출간 예정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한승혜 외, 문예출판사 (교보문고 해당 도서 링크))는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어릴 때 유명하다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보다 보면 다소 뜬금없고 과도한 성적인 메타포, 그리고 여성 인물 재현 및 신체묘사의 폭력적 방식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곤 했다. 예컨대 인간성의 정수를 표현하거나 그 상실을 개탄하는 진지한 내용을 덤덤하게 다루는 부분에서도, 거의 작가의 포르노그라피적 애호에 가까워보이는 여성묘사가 끼워져 있는 그 언밸런스함 탓에 말하자면 '깬다'는 것이다.


그때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시적 메타포로 사용될 경우에는 그래도 지체높은 문인들이 쓴 것이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니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혹은 폭력에 대한 리얼리즘적 서술에서의 충분한 이유 없는 성적 묘사는 사회적 비참함을 표현하기 위해 특수하게 용인되는 것인가보다 했다. 그래도 깬다는 생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 현재에 알게 된 여러가지를 바탕으로 그 당시로 외삽해 보면, 그것들 중에서 꽤 많은 것들을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였구나 싶다. 요악하자면 다른 어떤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메타포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독자에게 보편적 설득력을 갖출수 있다. 그리고 퍽 많은 독자 집단에게서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깎아먹는 요소는 보통은 보편적으로도 실패한 요소이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던 친구들과 얘기해봐도 대체로 비슷한 의견이다.


물론 정신분석학 및 그것에 근거한 문학비평 이론 등에서 성적인 메타포가 중요하고 특수하게 다루어지는 것에는 상당부분 진실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머리속에서 분명히 약간 더 특수하고 뿌리깊은 영역이 관여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들 자체가 남성중심적으로 서술되거나 사용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는 전복적 재구성을 꾀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재구성의 시도들도 원본과 거의 패러렐하게 전개되며 이미 상당부분 정착한 듯하다.


또한 문학작품과 문학비평의 양방향적 상호작용을 감안할 때, 비평론에서 그러한 메타포들에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혹은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개별 문학작품들의 그러한 스타일이 더 강화되었을 수 있다.


본서에서는 개별 유명 문학작품들에 대한 애호를 잃지 않은 채로 이들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외설과의 거리두기를 암묵적으로 선언하는 지체높은(?) 작품들에서도 여성성이 당연하다는 듯이 폭력적으로 다뤄져온 기제를 해명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분들도 유명한 분들이 많이 참여를 했다.


물론 예술작품이 성윤리의 멸균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폭력을 보거나 상상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보다는, 폭력을 자신의 관점 속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켜 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치론적으로 더 바람직한 도덕적 태도를 가졌을뿐더러, 작품 감상에 있어서도 더 '충만한' 독자라고 생각한다.


예술작품에서의 부적절한 여성 묘사에 대한 비판이 적절히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를 폭력 이해에 취약한 성윤리의 멸균실이 아니라, 폭력에 대해 세심하게 다루고 생각해볼 줄 아는 맷집이 있는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 '금기'에 대해 썼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되 폭력에 대한 얘기로 이식하면서 끝맺자. 내가 생각하는 '맷집 있는' 사회는 금기가 일방적으로 위반되어도 (혹은 폭력적 태도가 드러나도) 문제삼을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금기에 대한 감수성이 높고 그것이 적절한 방식으로 정교하게 위반될 때에 (혹은 폭력이 충분한 작품 내적 맥락을 가지고 묘사될 때에) 다들 괜찮아하는 사회이다. 만일 이것이 혼동된다면, 작품 속에서 시뮬레이션된 위반과 실제의 위반이 그 구별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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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1일 토요일

이론물리학의 변방에서: 기초학문 위기 속 진로 고민과 개인적 푸념

명지대 물리학과 폐지 예정 보도가 이번주 내내 소소한 이슈였다.


연구 꿈나무들 사이에선, 국내에서 학계 근처에 자리를 잡는 게 점점 더 급속히 어려워진다는 비관적인 (그리고 거의 확실한) 예상이 이미 공기처럼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도 막상 명지대 정도로 이름 있는 학교에서 물리학과 (그리고 수학과, 철학과, 바둑학과) 를 없앤다는 보도가 나오니 상당히 마음이 건드려지기는 한다. 물론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반대가 우세하다고 하니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이지만, 컨설팅을 받고있는 재단쪽이 의지가 강력한 모양이다.


앞으로 학생 인구 감소 때문에 이런 일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순수학문으로 분류되는 수학, 물리학 그리고 소위 문사철 쪽이 제일 취약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의견인 듯하다. 대학의 본령은 순수학문인데 어떻게 이걸 없앨 수 있냐는 주장은 지금 아무것도 아닌 내 위치에서 하기엔 너무 거창한 것 같고... 그냥 통계물리학이라는 방법론적 배경을 진로에 충분히 활용하면서 내 한몸 건사하고 사회적으로 1인분 몫을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씁쓸함이 우선 든다.

오히려 순수학문도 순수학문이지만, 수학 및 물리학과를 폐과함으로써 공학을 비롯해서 산업에 보다 직결된 분야 학생들의 기초역량 교육이 장기적으로 대단히 힘들어질 것이 더 실질적인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새로운 것을 창출하거나, 새롭지 않더라도 기존 것들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킬수있는 혁신력이 한국의 산업생태계에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혁신력은 트렌드를 따라가는 융합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기초적인 방법론적 역량에 대한 확실한 훈련, 그리고 기초적 윤리에 대한 인식 제고에서 나오는 면도 많다고 본다.

또한 다시 개인적 푸념으로 돌아오자. 이공계생 전반에 대한 기초역량 교육을 넘어서 물리학이라는 분야 자체로 봤을때도, 나는 이론물리학, 그 중에서도 특히 통계물리 분야가 비록 순수학문에 속할 수 있지만 약간만 옆으로 틀면 사회적 트렌드 주도와 이익창출에 기여해온 부분이 무척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사람들이 잘 몰라주는 것 같아서 늘 아쉽다 (오히려 수학의 경우에는 금융계 잘 간다거나, 인공지능에 중요하다거나 하면서 이런 게 나름 알려져있는 것 같더라).

사실 요즈음은 우리 분야는 딱히 순수 이론물리에 속하는지도 잘 모르겠음. 이론물리학자들이 보면 너무 practical해서 변방에 속할 것이고, 즉각적인 산업응용을 염두에 둔 쪽에서 보면 또 너무 이론적이고. 그런 중간적 특성이 약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분야가 등장하고 성장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아무튼 기업이든 학교든, 국내든 국외든 우리 통계물리 분야의 강점을 잘 알아주는 곳이 많이 있다면 좋을 것 같고, 나도 잘 찾아봐야겠다.

오히려 부모님은 주변을 보니 결국 공부 오랫동안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자리를 얻었었다며, 벌써부터 힘 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너가 하고 싶으면 계속 해 보라고 권장하시기는 한다. 근데 그때와 지금은 또 많이 다를 텐데 싶기도 하고... 너 졸업할때면 교수님들이 많이 은퇴하시지 않냐고 하는데 이미 그 시기는 거의 끝났다고 알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아카데미든 아니든, 물리학 백그라운드를 구체적으로 살릴 수 있는 커리어패스에 대해 encourage하는 얘기가 거의 아무데서도 들리지 않다 보니 나라도 적극적으로 틈날 때마다 여러 재밌는 포지션들을 찾아보고 소개하고 그러는데, 그래도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예전부터 가졌던 내 고질적 문제점이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건 많은데도 계속 하던것만 하려고 해서 정작 실제 선택의 폭이 좁고 질투와 불안감만 커진다는 건데... 이게 장기적으로 별로 안 좋은 것 같고, 좀더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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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4일 화요일

세포 자동자와 능동 물질: 비교하고 접점을 탐색하기

콘웨이의 생명 게임으로 가장 잘 알려진 Cellular automata (세포 자동자) 에서는 그 규칙과 초기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 멋진 집단현상들이 보고된다. 자기 혼자서만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패턴, 무언가를 계속 멀리 쏘아보내는 패턴, 마치 영양분이 충분한 균들처럼 무한 증식하는 패턴 등이 있다.

이러한 세포 자동자를 이산적인 격자가 아니라 연속적인 공간에서 정의하기도 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들로는 S Rafler가 만든 SmoothLife와, Bert Chan이 만든 Lenia 등이 있다 (아래 그림). 이들은 연속적인 공간에서 정의되다 보니, 정말로 동글동글한 원시적 생명체처럼 생긴 것들이 서로 다양한 모양으로 결합해서 구조를 이루는 등 무척이나 신기하다. 후자의 Lenia를 만든 Bert Chan의 경우 구글브레인 도쿄 캠퍼스에 계신 분이고, 지금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visiting하고 계신 듯하다.

expanded version of Lenia - 연속적 공간에서의 세포자동자 예시. 출처: Bert Wang-Chak Chan. "Lenia and expanded universe." (링크).

Lenia - 연속적 공간에서의 세포자동자 예시. (출처: Bert Wang-Chak Chan. "Lenia-biology of artificial life." arXiv preprint arXiv:1812.05433 (2018)).


한편, 현재 내 연구 주제인 능동물질(active matter)도, 에너지를 소모해서 스스로를 평형으로부터 멀게 유지하며 자기조직화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집단현상들을 나타낸다. 이들이 그 상호작용 규칙과 파라미터 범위에 따라 보여주는 여러가지 패턴은, 어떤 순간의 물질 분포와 미리 정해진 동역학적 규칙 그리고 확률적으로 더해지는 노이즈값에 따라서, 그 다음 순간의 물질의 밀도분포 (혹은 입자기반 모형일 경우 각 입자들의 위치) 가 정해지는 방식으로 업데이트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러한 능동물질은 세포자동자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지어질 수 있어 보인다. 둘 다 공간 속에서 외부 입력 없이 에이전트들끼리의 상호작용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비자명한 패턴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포자동자에서 보고되는 수많은 패턴들이, 생각보다 우리 통계물리학 분야의 능동물질 패러다임에서 그다지 적극적으로 탐구되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분야의 발전사와 관련된 역사적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그 가장 큰 이유는, 세포 자동자의 변화 규칙을 실제로 implement할 수 있는 "물리적으로 구현가능한 메커니즘"이 무엇인지가 모호하다는 점이 큰 것 같다.

즉 능동물질은 어디까지나 물리학 모형이기 때문에 물질 혹은 신호가 국소적으로, 즉 한 점에서 바로 인접한 다른 점으로 잇따라 전달되어야 한다거나, 실제 물리계 혹은 생체계에서 구현 가능한 메커니즘이어야 하는 등 여러 제약들이 존재한다. 반면 세포자동자의 경우에는 세포가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것도 가능한 등, 업데이트 규칙의 설정이 능동물질의 경우보다 훨씬 자유로운 듯하다. 주로 컴퓨터 아트 및 정보과학의 문화예술 응용 쪽 (정확히 어떻게 묶어 불러야 할지 모르겠음. 아무튼 미디어 아티스트들이나, Bert Chan 같은 분들) 에서 그 패턴형성 및 형태형성을 많이 탐구하는 듯하다.

이 두 가지 분야의 잠재적인 접점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실현하려면 두 가지 방향이 가능할 것이다. 세포자동자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physics-grounded된 모형을 보거나, 아니면 반대로 능동물질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능동입자들의 상호작용 규칙을 약간 더 자유분방하게 세팅해주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경우 단순히 국소적인 역학적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주변을 인식하고 제어하는 일종의 intelligence를 개별 입자 수준에 주는 것이다.

첫 번째 방향에 해당하는 것을 지난번에 최승준 교수님께서 알려주셨다 (물리학전공자 출신으로 미디어아트 쪽에 계시면서 최신 과학기술을 적극 접목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 DeepDream으로 유명했던 알렉산더 모드빈체프 (Alexander Mordvintsev) 는 그 이후로는 neural cellular automata라고 해서, 세포자동자를 마구 흩뜨려 놓은 상태에서 출발시켜도 원하는 이미지로 수렴하도록 상호작용 규칙을 학습하는 매우 신기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이미지 생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봤을법한 초록색 도마뱀 그림이 바로 그거다 (Growing neural cellular automata: 링크). 이러한 neural cellular automata는 전기정보공학부 김영민 교수님 연구실에서 생성적 산업디자인에 응용하기도 했다 (아래 그림).

Neural cellular automata를 이용한 모양 완성 (shape completion), 전기정보공학부 김영민 교수님 연구. (출처: https://iclr.cc/virtual/2021/poster/2914, Zhang, Dongsu, et al. "Learning to generate 3d shapes with generative cellular automata." arXiv preprint arXiv:2103.04130 (2021).



그런데 이 모드빈체프가 최근에는 세포자동자가 아니라 입자 기반 시뮬레이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그 동기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추측으로는 아마도 위에서 말한 내 문제의식대로, 단지 컴퓨터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 물리계, 이를테면 살아있는 세포들 혹은 나노머신들로 실현 가능한 상호작용 규칙을 원해서가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인공적/자연적 신경망 쪽에 인상깊은 기여를 하신 분들이 living matter 쪽에도 관여하는 경우가 유난히 많아서 신기하다. 지난번에 Hopfield의 볼츠만 메달 수상소식에 대해 포스팅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뉴럴네트워크는 결국 여러가지 패턴을 표현가능하고 심지어 일반화까지 가능한 커다란 비선형 시스템이다보니, 생체 패턴형성 및 형태형성 쪽이랑 그 방법론적 출발점은 달라 보이지만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뭔가 비슷한 종류의 관심사로 분류되는 듯하다.)


다음으로 그 반대 방향, 즉 능동물질의 상호작용 규칙을 약간 더 sophisticated하게 디자인하는 방향을 보자. 예컨대 주변을 인식하고 주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운동 능력도 매우 뛰어난 intelligent한 나노머신을 대량 만들어서 뿌려뒀다고 생각하면 되므로, 그리고 능동물질이 애초에 그런 것의 가장 단순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안 될 것은 없다. 물론 상호작용의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되도록 단순한 규칙에 따른 집단현상을 선호하는 통계'물리학'에서 멀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아무튼 '물리적'으로 구현은 가능하다.

실제로 지난 11월에 참석했던 학회에서 Igor Aranson 교수님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분이 연구하신 것은 signaling (혹은 communicating) active matter인데, 능동물질의 구성 입자들이 단순히 자체 추진 및 상호간에 역학적 충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서 화학물질의 밀도파를 통해 신호를 원거리까지 전달한다는 개념이다. 이렇게 파동에 의한 원거리 신호전달이 존재하면, 파라미터 선택에 따라서 기존 능동물질 분야에서는 흔히 본적이 없고 마치 콘웨이의 생명게임에서 나올 법한 매우 다채로운 집단현상이 나타난다. 이미지로 첨부한다. 화학적 신호가 아닌 음파 신호, 즉 입자들 자체의 진동을 서로 주고받을 때에 나타나는 패턴들도 소개해 주셨는데 (acoustic signaling), 구글 스콜라에 뜨지 않는 걸 봐서 bulletin으로만 있고 아직 논문으로 나오지는 않은 듯하다.

신호를 주고받는 능동물질 (communicating active matter) 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집단 현상들 1. 우측 상단은 입자 시뮬레이션 기반 모형, 우측 하단은 밀도함수 기반의 모형인데 서로 잘 대응되는것이 보인다.(출처: https://www.nature.com/articles/s41467-022-34484-2)



신호를 주고받는 능동물질 (communicating active matter) 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집단 현상들 2. (출처: https://www.nature.com/articles/s41467-022-34484-2)



만약에 이런 양방향적 탐구들을 통해 세포 자동자와 능동물질 분야의 접점이 넓어진다면, 능동물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아진다. 예컨대 세포 자동자에서는 튜링 머신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잘 연구되어 있다. 크기만 충분히 크다면 세포자동자가 유니버셜한 컴퓨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능동물질을 이용해서도 노이즈에 대해 강인한 튜링머신을 만들 수 있다면, 현재의 반도체 기반 디지털컴퓨터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unconventional computing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Herbert Jaeger의 리뷰논문에도 living system을 컴퓨터로 사용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과도 관련지을 수 있어 보인다. 이러한 unconventional computing은 저전력 컴퓨팅의 발전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개인적으로는 특히 오차를 허용하는 딥러닝 패러다임과 궁합이 좋을거라는 상상을 하게된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도,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들과 약간 관련이 있다. 머리속 혹은 컴퓨터 속에 존재하면서 매우 고도화된 집단현상들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모형들도, 결국에는 국소성, 보존법칙,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역학법칙 등 여러 물리학적 제약을 받는 물리적 시스템으로써 실현될때 더욱 의미가 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나는 통계물리학 전공이다 보니 열역학적 원리에 관심이 많다. 물론 나 혼자 하고 있는 상상이고, 학위과정 동안에, 혹은 학위과정 이후에 이러한 방향의 커리어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는 내 능력과 주변 상황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내 관심사 자체가 바뀔 수도 있고.

특히 국소적인 역학적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원거리 신호 전달 같은 게 있을 경우, 에너지 출입을 다루는 전통적인 열역학뿐만 아니라, 맥스웰의 악마 개념을 포함하여 정보 출입까지 다룰 수 있도록 일반화된 '정보열역학'을 적극 도입해서 새로운 결과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각각의 집단현상들에 underlying하는 열역학적 비용을 밝히고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면, 생명체 및 생체모방 인공시스템들의 패턴형성 및 형태형성, 그리고 컴퓨팅 (특히 머신러닝) 구현의 새로운 패러다임 등에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에너지를 아끼는 것, 혹은 필요하다면 에너지를 써서라도 원하는 기능을 달성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적절한 판단을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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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0일 금요일

외교 실언 대응을 보며: 대통령 무오류설은 사태를 더 키울 뿐이다

이전에도 몇 번 썼듯이, 현재 대통령은 경제사안이나 국제문제 등에 대해 본인의 사적인 (즉 공식적 보좌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을 선명하게 가져가는 타입인 것으로 보이며,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로 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출발언이나 실언이 많은 편이다.


대통령이 UAE를 방문 중이라는 상황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란이 UAE의 적이라고 강하게 규정하는 발언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상상은 해 볼 수 있다. 아마 시아파-수니파 차이를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고, 이란이 북한처럼 국제무대에서 공인된 소위 '악의 축'이므로,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 상황과 관련지어서 얘기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상세는 발언자인 대통령이 직접 밝히지 않는 한 불명이다.


대통령은 외교무대에서 상징성을 갖는 행동들과 적절한 의례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 맥락에 맞는 자료와 적절한 보좌를 제공받아, 각각의 상황에서 기대되는 내용을 준비해서 발언하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다. 물론 즉흥적인 쇼맨십이나 임기응변도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번 발언은 국제무대에서 흔히 나오는 종류의 발언이 아니기에 모종의 합리적 의도가 추론되지 않고 불안감을 조성하게 되며, 전형적인 윤 대통령 특유의 사적 신념에 따른 돌출발언에 해당하는듯하다.


여러 후속보도들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UAE와 이란은 비록 삐걱삐걱하지만 최근에 잘 지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관계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란이 UAE의 '적'이라는 단정적 발언은 일단 사실 자체로 틀렸을 뿐더러, 모종의 합리적 의도를 추론해 내기 힘든 기괴한 발언이다. 아시아대륙 반대편 나라의 수장이, 두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고 서로 '싸움 붙이는(?)' 발언을 대체 왜 한단 말인가?


여러가지 외교 실언 논란의 전례에 비추어봤을때도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의 돌출적 발언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돌출적 발언이 한국 주도의 외교 새판짜기가 아니라 오히려 해명을 계속해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으로 이어진것으로 보아, 스트롱맨 타입의 지도자들이 종종 하는 의도된 강경발언이라기보다는 단순 실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솔직한 해명을 하는것이 제일 깔끔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정치인들의 무리한 옹호가 오히려 사태를 더 키워서 상황을 더 어렵게 꼬아 놓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아예 대놓고 거짓말인, '이란과의 관계에 대해 대통령은 언급하지 않았다' 같은 무마용 발언은 그렇다고 치자. 오히려 더 걱정되는 것은 지나치게 거창한 옹호들이다.


특히 한국-이란 관계, 나아가 국제 무대에서 이란의 위치 등을 언급하는 큼직큼직한 발언들이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여러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으로 보인다.


이란의 인권탄압국이자 테러지원국이라는 면모를 무시하자거나, 이란은 한국한테 중요한 나라니까 쩔쩔매자거나 하는게 당연히 아니다 (위의 '거창한 옹호자'들이 주로 저렇게 매도한다). 외교현장에서 일반적으로 발화되지 않는 종류의 발언이 나왔으니 그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란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국제무대 전체가 지켜보는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포인트를 짚자면, 이란에도 적절한 정보와 판단능력을 갖춘 외교 전문가들이 없지 않을 테니, 이번 발언이 단순히 우리 대통령 개인의 돌출적 실언인지, 아니면 양국관계 규정의 근본적 변화를 시사하기 위해 의도된 외교적 사건인지 정도는 구분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웬만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낸시 펠로시 패싱 사건 때 결례의 수준이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이 그냥 넘어간 것은 당시 사건이 철저하게 의도된 결례가 아니라, 정권이 메시지를 적절한 수준으로 잘 조직해서 발신하는 데에 서툴러서 일어난 사고에 불과(?)하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유지하는것이 우선이므로, 한국정부의 당시 외교 의전 역량 부족을 굳이 들춰내서 언급할 이유가 없으니 모른척 연기하는 것이다.


이란은 반미 국가이고 심지어 한국의 적인 북한을 지원한다고 단골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나라인데도, 경제 교류가 있어서 그런지 신기하게도 한국-이란 양국은 노골적 외교 갈등을 피하고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가 국제정세 변화와 대이란 제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요즈음, 우리 대통령의 실언은 이란 쪽에서 꺼낼수 있는 하나의 좋은 '패'가 된다. 그쪽이 뭔가 수틀리면, 돌출발언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모른 체하고 유리하게 이용할 수가 있다. 당장 사건 직후에 해명하라고 압박하거나 대사를 초치한 것도 넓게 보면 그 일환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위와 같은 발언이 돌출발언에 불과했다는 점을 우리 정치권 스스로도 인정을 못 해 버리면, 그건 이란이 사용하는 '패'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므로 결국 상대방 좋은 일만 해주는 셈이다. 또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한국정치권의 외교역량에 대해 국제 사회의 의구심이 발생할 수 있어 보인다.


한편 이란은 어차피 빌런 같은 국가인데 왜 그들의 카드놀이 패에 대해 눈치를 봐야 하냐는 주장도 종종 보인다. 이 역시 위의 내용들로 충분히 반론이 되리라 본다. 그러한 주장은 대통령의 발언을 옹호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서, 대통령의 당초 의도에도 없었을, 눈치를 안 보고 소신을 얘기하는 일종의 '강짜' 내지는 '사이다' 외교를 대통령이 수행한거라고 선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맥락상 어색할 뿐더러 한국이라는 나라의 기존 외교 행보, 그리고 품위와 체급에 맞지 않다. 또한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번 발언을 통해 한국이 얻는 것이 딱히 없고 계속 해명을 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만 처하게 되고 있으므로 그 효과 또한 의문이다.


국내 정치인들이 마치 대통령 발언의 무오류성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을 내비치듯, 외교관계에 대한 민감한 발언들을 트럭단위로 쏟아내며 대통령 철통방어에 복무시키는 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이라고 하겠다. 외교에서 여러 예상치 못한 사건이야 늘 생길 테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여당의 외교적 역량은 실시간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되며 이는 잠재적으로 각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수있는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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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3일 화요일

[유우머] 어느 갑각류 연구소

어느 갑각류 연구소에서는 인위적 조치를 통해 게들의 여러 신종과 중간종을 만들어내었다.

이 게들은 특징에 따라 식용, 애완용 등으로 쓰였으며, 유용한 물질대사 산물이나 해조류 수분 매개자로서의 특성 등에 착안한 생명공학적 이용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처럼 인위적 개량으로 생명체를 수단화하는 것에 윤리적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게들이 방생되고 기존 게들과 유전자 및 서식지가 섞이면서 생태계 파괴도 일어났다. 보다못한 한 원로 학자는 연구자 스스로 연구의 파급효과를 예상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책임 의식을 요구했다. 노학자가 충고하기를...

"한계 두게. 세계 내 게 다 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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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2022년을 마무리하며: 기술매체에 대한 단상들 (방탈출, 아바타, 그리고 생성 AI)

어쩌다보니 이번 12월 31일엔 기술매체를 활용한 인터랙티브하거나, 실감나거나(immersive), 생성적인(generative) 문화 컨텐츠들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할 계기가 참 많았다.


먼저 하루의 시작부터 신촌에서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서 방탈출을 했다. 방탈출은 거의 이 친구들 만날 때에만 하는데, 처음 접했던 몇 년 전에 비해서도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 퍼즐 풀이부터 시작해서 여러 소품들을 이용한 키치하면서도 인터랙티브한 테크놀로지적 체험, 다양한 콘셉트로 예술적으로 연출된 시공간에 참여하기,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친목 다지기까지, 거의 놀이공원 어트랙션을 능가하는 종합적인 엔터테이닝한 경험을 도심 한가운데에서 제공해 주는 훌륭한 컨텐츠로 발전한 듯하다.


저녁에는 <아바타 2: 물의 길> 4DX를 관람했다. 3시간이 길긴 했는데 거의 5-6시간 분량의 체험을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밀도 높은 장면들이 실감나게 이어진 덕분에 몰입해서 단숨에 볼 수 있었다.


또한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탓인지 올 한 해에 세상에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조금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오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주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내가 늘 꿈꾸고 있던,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뜰 거라고 생각하며 팔로우업하고 있던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의 조수로서의 생성 AI'가 내 막연한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전격 대중화된 것이다.

이런걸 보면서, 내가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주제,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반드시 잘 될 거라고 확신이 드는 주제에는 조금 더 과감하고 빠르게 직접 dive in 해 보아야 후회가 없이 흐름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기의 변동이, 대단히 도전적인 선택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저 적당히 평화롭고 싶은 개인들의 일상과 진로 선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한 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도 일상과 건강과 인간관계를 유예해버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할듯하다. 그러려면 시간을 더 밀도있게 써야 하고, 이를 위해 계획을 더 잘 지키고 더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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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7일 토요일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의 레이저 핵융합 성과 관련 포스팅 모음 (3건)

 1. 2022년 12월 13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LLNL 핵융합 중대발표가 한국시간으로 오는 새벽 12시쯤 (즉 두 시간쯤 후) 이라고 하는데 무척이나 기대된다. 내일 아침 출근이고 준비해야할 발표도 있지만 중계 보고 잠들어도 괜찮겠다.

미국 에너지부 홈페이지에서 중계가 된다고 한다. 에너지부 장관이 나올지 바이든 대통령이 나올지도 궁금하고, 어떤 내용의 발표일지도 무척 궁금하다. 기사들에서는 제법 구체적인 숫자들까지 제시하며 스포일러가 꽤 있었는데, 해당 내용 그대로여도 충분히 많은 의미가 있는 breakthrough일테고, 혹시 something more가 있는지도 기대해보게 된다.


다만 12년 전인 2010년에 NASA에서 우주생물학 관련 중대발표라며, 지구에서 발견한 비소 박테리아를 소개해서 대중들을 꽤 실망시킨 전례가 있기는 하다. 물론 충분히 의미는 있지만 아무튼 외계생물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기대를 일부러 낮추고 들어보려 한다 (생각보다 별 게 아니면 실망을 덜 해서 좋고, 생각보다 놀라운 거라면 그만큼 많이 놀라워서 좋고). 암튼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JWST) 이후로 금방이라면 금방,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세계인의 이목이 쏠릴 만한 과학 이벤트인 듯.


태양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핵융합은 꿈의 기술 취급받는데, 사실은 핵융합 그 자체는 이미 지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혁신적인 발전 방식으로서의 실용화를 위해서는 안정성을 높여서 지속시간을 늘리는 것, 그리고 에너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게끔 하는 게 남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그런데 에너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아야 한다는 건 뭔가 근본적인 제약을 돌파해야 한다는 느낌을 줘서, 내 기준에서 핵융합을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꿈의 기술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러 군데에서 듣기로는, 사실은 이게 근본적인 물리학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효율 점점 올리면 되는 느낌에 가깝다고 한다. 당연히 아예 없던 에너지를 만들순 없으니까, 저기서 말하는 투입량이라는 게 핵자간 에너지를 무시하고 우리가 직접 투입한 에너지만 따지는거겠지.

(물론 말이 그냥이지, 여기엔 엄청난 엔지니어링이 들어갈 것이다. 그치만 여전히 '원리적' 장벽은 아니라는 것)


그래도 뭔가 너무 단점이 없어 보이는 청정 발전 방식이다 보니, 어떤 이유로든 기술적으로 실현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론이 많은 게 사실이다. 만약 이번에 LLNL이 실제로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은 것을 미미하게라도 보여준 거라면, 그런 회의론이 어느정도 불식되고 더욱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해질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과학기술은 순전한 진공속에서 그 실현 가능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변화하며 발전하는 명백한 가능세계의 사회적 구성물이다. 만약 그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면서, 미미하게라도 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면 필요에 따라 투자해서 비용을 낮추고 실현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오게 할수 있다.

이미 비가역적으로 발생하고있는 기후변화의 명백한 위협 앞에서, 핵융합 발전이 약간이라도 더 가시적인 범위에 들어온다면 작금의 인류에게 오랜만에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얘기가 될수 있을 듯...


물론 기술 독점 혹은 기술 유출의 문제, 국가별 불평등의 문제, 성장주의의 근본적 지속불가능성 문제 등등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얘기들이 산적해있겠으나... 이것은 현재와 같은 개념증명 시도의 단계에서는 다소 이른 얘기일 수 있다. 실현 가능한 발전방식으로서 가시적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쟁점들이 자연스럽게 구체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 개념과 사유의 고속도로를 미리 깔아두고 미리 합의해두는 사상적, 국제정치적 작업들 역시 너끈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정 과학기술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실현되어 가느냐에 따라 그러한 사유와 합의의 고속도로들이 꼭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건설해보는 경험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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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년 12월 14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히어로 영화 <스파이더맨 2>의 빌런인 닥터 옥토퍼스의 핵융합로는 KSTAR 같은 자기장 속 플라즈마를 사용하지 않고 무슨 레이저를 쓰길래 상상의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핵융합 발전방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번 LLNL의 발표가, 바로 이렇게 작은 연료 펠릿에 레이저를 쏜 방식이라고 한다.


핵융합의 에너지 효율과 관련된 여러가지 개념들이 언론에서 잘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므로 아침에 잠깐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관계를 정리해 봤는데, 아래의 각 조건들이 서로 모두 다른 것인 듯하다. 아마 위로 갈수록 더 어려운 조건인것 같다.


* 점화조건(self-sustaining, burning, fusion ignition): 무한대의 Q factor에 해당. 아주 좋은 조건으로, 핵융합의 경제성있는 실용화에 꼭 필수는 아니라고 함.

: 근데 DOE(미 에너지부) 공식 아티클에서는 fusion ignition을 달성했다고 써 있는데... reddit에서는 ignition 아니라는 설명도 있다. 아래의 Q=1.54 얘기를 보면 이번 연구 결과가 fusion ignition은 아닌 듯.


* 연소조건(Combustion): 경우별로 다르나, Q가 약 5~10보다 큰 것에 해당. 플라즈마가 cooling되는 속도와 관련이 있음. 실질적으로 경제성있는 실용화의 조건은 이쪽에 제일 가까운 듯.


* Net energy gain = Q factor가 1보다 큰것 = scientific breakeven

: 이번에 처음으로 달성했다는 게 이것인 듯. Q=1.54 정도라고 한다.


(기존의 다른 연구들에서 Q가 1보다 큰걸 달성 했다는걸 몇 개 볼수 있는데, 아마 그것들은 여기서 말하는 진짜(?) Q가 아니라, 에너지 투입량의 일부를 무시하거나 해서 extrapolated breakeven이라고 하는, 좀 다른 양인것 같다. 위키백과 fusion energy gain factor 문서에 있다.)

(별개: Lawson criterion = 위의 여러 figure of merit들, 혹은 핵융합반응 발생 자체의 조건 등을 플라즈마의 밀도, 온도, 압력과 같은 구체적인 물리적 조건과 연결지어 계산한 것)

원리를 모르다보니 말로만 찾아봐서 힘들다. 틀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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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22년 12월 17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내가 이해하기로는 연료에 가해진 레이저 에너지보다, 연료에서 핵융합에 의해 나온 에너지가 많다는 것이 이번 Q>1 실험의 의미이다.


일각의 지적대로 end to end로 모든 에너지투입을 고려하려면 레이저 발진 자체의 효율까지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히 맞고, 그러면 합산 효율은 꽤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실제 청정하고 효율적인 발전원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따지는것도 이쪽 기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치 당장 청정에너지가 실현될 것처럼 보도가 이뤄졌다면 그런것들은 명백히 과장된 보도이기는 할 테다.

그러나 연료펠릿을 중심으로 한 apparatus에만 스코프를 맞추고, 그 안에서 energy conversion이 어떤지 보는 작업 역시 핵융합 실현의 한 마일스톤이 되는 선결과제이다. 에너지 투입은 이루어졌다고 치고, 그 연료펠릿이라는 apparatus가 Q>1을 달성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직접 보여주는건 정말 중요한 이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Q>1을 실증함으로써 핵융합 발전의 실현이 한걸음 더 가시적으로 다가왔다는건 전혀 과장된 보도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효율을 정의하는것은 전혀 trivial한 이슈가 아니고, 정답이 없다. 숨겨진 에너지 출입을 정말로 모두 고려하려면 레이저 발진의 효율뿐 아니라, 생성물인 헬륨보다 반응물인 D+T의 핵력 퍼텐셜에너지가 높게끔 형성되어 마련되어 있는 것 그 자체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건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모든 시스템은 여러가지 에너지 출입에 따른 복잡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걸 어느 단계에서 끊어서 '계'와 '주변'을 나누게 된다. 이렇게 나눠 둔 상황에서 둘 사이의 에너지 출입을 빠짐없이 추적해서 효율 식을 쓰기만 한다면, 어디서 끊었느냐에 상관없이 열역학 제 2법칙에 부합하는 올바른 효율 식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심지어 에너지 출입이랑 별 상관도 없는 수많은 다른 efficiency measure들도 유익할때가 많다. 예컨대 kWh당 사망자 수라던지...)


Make sense하는 발전원으로서의 가치를 따질때는, 지구에 이미 준비돼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출발했을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적절할 것이다. 다만 그런 재료들이 그냥 바로 쓸 수 있게 준비된 게 아니며 채굴하고 가공하고 운송해야 한다는 점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부품이나 각 연료 같은 걸 채굴하고 생산하는 체제가 총체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연구실을 벗어나 현실의 산업 망에 연결된 상황에서 어디서 끊어서 효율을 정의할지는 여전히 debate 해보아야할 점이다.


아무튼 이번 발표에 대해 언론 플레이이다, 혹은 심지어 사기극이다 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는 과잉된 비판이라고 본다. 거대과학이 국가의 역량 과시와 관련이 깊고 군사 부문과도 종종 연관이 되어 있는 걸 대중들이 모르지 않으며, 그런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지구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이게끔 다같이 비판적 관심을 가져야 하는 셈이다.

핵융합은 비록 아직 기초연구 단계이지만, 무슨 초대칭입자 찾는 것마냥 불확실한 가능성에 걸고 원리적인 장벽을 돌파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명백히 원리가 밝혀진 현상에 대해 효율을 높이면 되는 문제라서 (그렇다는 근거가 이번 실험에서 더욱 강화된 것이고),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될수록 그 노하우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예컨대 토카막 방식에서 제일 큰 문제가 플라즈마 안정성인데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이걸 잘 제어해주는 연구들이 최근에 여러가지 나오고 있다. 핵분열과 달리 낮은 확률로 제어에 실패해도 큰일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기계학습을 적용하기에 상당히 적절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냥은 잘 안 되는 걸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쥐어 짜내는 식으로 최적화를 해야 한다면 뭔가 믿음이 안 갈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직관적으로 그러한 '쥐어 짜내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런 것 없이도 안정적으로 잘 되는 게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건 신재생에너지와 연결된 스마트 그리드 및 에너지 저장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미 너무 커져 버린 인류문명을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감당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물적/비생물적 행위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떠받쳐지고, 그런것이 없다면 하루 만에 무너지는 성격의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고출력 레이저를 이용해 연료펠릿을 집중적으로 가열하는건 Q>1이 가능하다는 개념증명에 가깝다고 보고, 실제 발전원으로서 의미있게 효율을 높이는 작업, 그리고 상시적, 지속적으로 운전하며 발전 가능한 반응로 개념에 좀더 가까운 설계는 여전히 토카막 쪽에서 나오지 않을까 한다. 이건 해당분야를 잘 모르는 관계로 순전한 뇌피셜이긴 하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한 점이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청정 에너지가 나오기만 하면 문명의 규모가 무한히 성장할수 있다는 욕망 내지는 믿음은 개인적으로 비관론보다도 훨씬 두렵다. 아무리 효율을 쥐어 짜내더라도, 아무리 부작용을 줄이더라도 지구라는 물리적 한계에 의해서 지속적 성장이 근본적으로 제한되는 현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한계에 당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물론 꼭 필요하지만 아직 기초연구인 핵융합보다도 우리가 더욱 시급하고 명확하게 인식, 대응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 끝 -

2022년 12월 1일 목요일

중력현상의 시뮬레이터로서의 양자컴퓨터: AdS-CFT 대응의 이용

양자컴퓨터로 웜홀을 구현했다는 따끈따끈한 네이쳐 논문이 기사로 나왔다 (네이쳐 논문 링크, 국문기사(뉴시스) 하이퍼링크, 영문기사(quanta magazine) 하이퍼링크). 매우 네이쳐스러운 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주제들은 나도 교양수준으로만 알고 수식들은 거의 모르는데, 대략 이해한 내용을 써본다. '어려운 저차원 양자다체계 현상'과, '쉬운 고차원 중력현상'의 대응이라는 틀을 기억하면 읽기에 용이하다.


먼저 '양자전송'은 양자얽힘 현상에 의해 정보를 원격 전송하는 것으로, 양자암호(양자기반암호화, 양자내성암호)와 함께 양자통신이라는 큰 카테고리를 이루고 있다. 양자암호가 각국의 정부 및 산업계에서 상용화 관련 논의가 될정도인 것과 달리, 양자전송은 아직은 실험실 내의 기초과학 연구에 머무르고있다.


양자전송은 국소성 (대충 말해서, 물리적 현상은 공간상에서 정보가 잇따라 전달되면서 나타나며, 한번에 여기서 저기로 점프하진 않는다는 믿음) 을 위배한다. 이것이 직관적으로는 매우 이상하므로 해명이 필요한 역설이라고까지 생각되기도 했는데, 우리 학부 김석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상하긴 해도 국소성이 깨지는 게 그냥 사실이라고 한다. 그것이 양자세계의 비직관성이며 양자전송의 놀라운 점이다.


양자전송을 하려면 양자상태들 사이의 얽힘(entanglement)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양자컴퓨터는 여러 양자상태의 얽힌 상태를 유지하며 제어해서 한꺼번에 커다란 계산을 해내는 장치이므로 얽힘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많이 들어가있다. 그렇기때문에 양자컴퓨터는 얽힘 실험을 하기에 최적의 시스템이다. 이번 논문에서도 9 큐비트짜리 양자컴퓨터 위에서 양자얽힘을 활용해서 실험을 했다.


이 논문도 기본적으로 양자전송을 실험적으로 구현한 여러 논문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 논문의 재밌는 점은 바로 홀로그래피 원리, 더 정확히는 AdS-CFT correspondence (반 드 지터 공간 - 등각 장론 대응성) 를 이용해서, 흔한(?) 양자통신을 넘어서 훨씬 멋있는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AdS-CFT 대응성이란 홀로그래피 원리의 일종이다. 간단히 말해서 (1) 높은 차원 공간에서 정의되며 상호작용의 크기가 약한 이론 (주로 양자 중력이론의 후보인 끈 이론) 과, (2) 그 고차원공간의 '경계면'인 낮은차원공간에서 상호작용의 크기가 강한 이론 (주로 응집물질 계에 대한 양자 장론) 이 형식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고차원공간의 정보가 그 경계면인 저차원 공간에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홀로그램을 연상시켜서 그렇게 부른다.


이 대응을 이용하면, 우리가 사는 차원에서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다체계 (쉽게말해 양자컴퓨터 내지는 고체 및 반도체 같은 응집물질들) 의 풀기 어려운 문제를, 고차원에서의 끈 이론의 풀기 쉬운 문제로 대신해서 쉽게 풀 수 있다. 더 멋있게 말하면, 물질 속의 집단현상 문제를 우주 속 중력 문제로 대신해서 풀 수 있다. 이것이 홀로그래피의 강력함이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는 위와는 정반대 방향의 접근을 한다. 둘 사이에 그런 대응이 있다면, 실험으로 만들기 힘든 웜홀 같은 양자중력현상을, 실험으로 어느정도 구현가능한 저차원의 다체계현상으로 대신해서 실험할 수 있다는 재밌는 접근이다.


먼저 우주에 있(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웜홀에서 양자전송이 가능한것처럼, 실험실 속의 양자 다체계에서도 양자전송이 가능하며 이는 이미 꾸준히 실험으로 확인이 되고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양자정보의 전송이라는 점에서 통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별개의 물리현상이다. 전자는 양자중력 현상이고 후자는 중력과 상관이 없다.


이 논문에서는 양자컴퓨터의 설비로 sparsified SYK 모델이라는 양자다체계를 구현해서 실제로 양자전송을 했다. 그런데 이 모델은 흥미롭게도 AdS-CFT 대응에 의해, 웜홀에 대한 중력이론과 같은 방정식으로 기술이 된다. 이렇게 웜홀의 양자전송과 양자다체계에서의 양자전송이 (형식적으로) 연결되게된다.


따라서 양자컴퓨터를 양자중력현상에 대한 적절한 시뮬레이터로 쓸수 있다는 개념증명을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실제로 웜홀에서 있어야 하는 여러가지 성질들이, 이 논문에서 연구한 시스템에서의 양자전송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다만 이 (가상의) 웜홀은 아주아주 짧은 거리 사이의 웜홀이라고 한다.


마지막 질문은, 어떤 양자다체계랑 웜홀이 같은 이론으로 기술이 된다고 해서, 그 양자다체계 실험장치 속에 정말로 웜홀이 생긴 것인가? 이는 굳이 따지자면 따질 수 있는 과학철학적 문제인데, 보통은 상식적으로는 'No'라고 답할 것 같다. 실제로 논문에서도 웜홀을 실제로 만들었다 라고 무리하게 주장하기다는, 실험실 속에서 양자중력을 간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쭉 쓰고 나서 생각해 봐도 정말로 네이쳐스러운 논문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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