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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빛은 빠르지 않다: 한계로부터 오는 고독

  빛은 지구를 1초에 7바퀴 반 돌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간단히 역산해 보면, 1바퀴 도는 데 15분의 2초가 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빛이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데에는, 즉 빛이 지구의 한 지역에서 정반대 지역으로 전달되는 데에는 아무리 빨라도 15분의 1초가 걸린다.

  이제, 광통신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우선, 광섬유 케이블 속에서는 빛의 속도가 진공에 비해서 느려진다.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를 광섬유의 굴절률 n으로 나누면 된다. 따라서, 완전히 이상적인 경우라고 해도 15분의 1초보다 n배 오래걸리게 된다.(물리적 요인)

  그런데, 광섬유 케이블이 정확히 최단거리로 뻗어 있을 리도 만무하다. 대륙과 해양 등 여러 가지 지리적 요인들이 있을 뿐더러, 애초에 여러 지역의 네트워크이 모여들어서 하나의 큰 해저케이블을 이루는 식으로 통신망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을 선택하더라도 그 정반대편 지역과의 광통신 경로는 전혀 최단 거리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광섬유 케이블 안에서도 빛은 지그재그로 반사되어 가면서 이동하기 때문에 실제 빛의 경로의 길이는 광섬유 케이블 자체의 길이보다도 더욱 길다.(기하적 요인)

  여기에 더하여, 네트워크의 말단까지 오로지 광섬유로만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실제적인 통신에 소요되는 시간은 더욱 느려지며, 심지어 한 채널에서 혼자만 통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송수신자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기 때문에 통신 자원을 적절히 배분해야 한다는 것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통신공학적 요인)

  따라서, 지구의 한 지역와 정 반대편 지역 사이에 광통신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15분의 1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 지구 반대편까지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는 데는 아마도 1초보다도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당연하게도 메신저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와 실시간 온라인 게임을 함께 플레이할 수는 없다. 15분의 1초만 지연이 되어도 실시간 게임플레이에 큰 지장이 있을 텐데, 위에서 밝혔듯이 실제로는 지연이 훨씬 더 길 테니까 말이다. 카드게임 같은 것은 정해진 순서와 절차대로 진행되니까 괜찮지만, 속도와 순발력이 핵심인 FPS 같은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곤란한 문제이다(혹시나 이것이 내 착각이며 실제로 통신 속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특수한 기법 없이 지구 반대편 친구와의 실시간 게임 플레이에 문제가 없게 할 수 있다면, 댓글로 지적 부탁드린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의 요구에 비해 광속은 정말 느리다!

  물론, 휴먼 스케일에서 빛은 매우 빠르다. 따라서 우리는 빛 정보가 '즉시' 전달된다고 느낀다. 우리의 선험적 인식 틀 역시, 빛은 즉시 전달된다는 관념을 본유적으로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마치 상대론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이지 않고 속도에 따라 변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시간과 길이가 당연히 모두에게 절대적이며 불변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직접 연관이 있다). 그런데, 스케일을 지구 규모로만 키워 봐도, 빛이 즉시 전달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따라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다. 빛이 '충분히 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빛 전달의 즉시성이라는 본유관념을 가진 인간은 이 때 큰 혼란에 빠진다. 글로벌 시대에, 이런 의미에서, 휴먼 스케일에서 빛은 매우 느리다. 기막힌 역설이다.

  이것은 엄청난 난점이다. 우주 개발과 관련하여 많은 이들이 논의와 상상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논의하려 하더라도 이 점이 문제가 된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천체인 달까지는 광속으로 1.3초가 걸리며, 태양까지는 광속으로 490초가 걸린다. 우리의 문명이 우리의 행성을 넘어 달과 태양 등의 범위까지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면, 실시간 게임 플레이는 못 할 수도 있겠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체제의 작동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수십 초 이하의 단위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대응해야 하는 비상 상황은 각 지역에서 알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대응 시스템을 빼곡히 갖추어 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스케일이 조금 더 커진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우리 태양계와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은 알파 센타우리인데, 지구에서 알파 센타우리까지는 광속으로 4.3년이 걸린다. 이 정도 스케일에 건설된 문명에서는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 체제가 작동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비상 상황은 각 영역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면 된다지만, 한 국가나 기업의 체제가 중앙 집권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관리를 할 수 있는 범위가 그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모든 국가는, 국경에서의 전쟁 결과를 몇 달이 지나서야 받아들 수 있었던 고대 제국의 황제들처럼 되는 것이다.

  또한, 직업 때문에 멀리 떠나 버린 사람이 그의 가족과 제대로 된 한 두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수 년이 걸리게 된다. 대화는 상호적인 것이므로, 새로운 정보를 받고 이에 대해 답신을 하는 상호적 의사 소통은 오로지 번갈아가면서만 진행될 수 있으며, 여기에 편법은 없다.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일방적으로 받는다고 해도, 상호성은 확보되지 않는다.

  산업 혁명 이래 교통과 통신의 발전을 통해 모든 곳이 가까워지고 모든 것이 빨라져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한편, 인간의 욕망이 뻗는 범위, 인간이 진출할 수 있는 범위 역시 엄청나게 넓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후자가 무한한 데에 비해 전자는 유한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러한 고속화, 근거리화의 흐름의 끝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저속성과 원거리성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지구와 달, 태양 정도의 크기 스케일에서는 모든 사람과 간단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상의 범위로 가면 그 교류는 갑작스레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알파 센타우리와 태양 사이에 연속적인 구조물을 건설하여 그 구조물의 모든 부분에 사람이 살도록 하는 게 아닌 바에야, 태양계와 알파 센타우리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태양, 지구, 달 사이의 통신은 휴먼 스케일에서 '의사 소통'이라고 충분히 여길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의 통신은 휴먼 스케일에서 '의사 소통'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하염없는 기다림만이 인간들에게 있을 뿐이다.
(알파 센타우리에서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과학 데이터를 수집해서 우리에게 계속 보내 준다면, 최초에 '알파 센타우리까지 인류가 우주선을 타고 가는 시간 + 4.3년'만큼만 기다리면 되고, 그 이후로는 연속적으로 받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사진을 계속 받아 보는 것만 해도 아주 고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우주 개발 초기 단계에서의 연구 데이터 전송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개발이 잘 되어서 이미 지구와 알파 센타우리 간의 교류가 존재하는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는 상호적인 의사 소통이 매우 중요해지며,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 때 고독감이 밀려온다. 나는 지식 습득이 아닌, 상호적 의사소통에 기반을 둔 '관계맺음', '함께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체 개조를 통해서 수명을 비약적으로 늘린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알파 센타우리의 답신을 기다리는 8.6년 동안에는, 태양계의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태양계 내부에서만 서로 교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매 순간순간 확실하게, 지금의 우리와 다름없이 느끼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8.6년에 익숙해지고 시간 감각이 무뎌져서 아무렇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아예 모든 사람의 시간 감각을 바꾸어서, 그 8.6년이 딱히 길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태양계 내에서의 많은 일들은 그들에겐 매우 빠르게 일어나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되어 버리므로, 태양계 내에서의 일들은 신경쓸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8.6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도록 새로운 시간 관념을 갖고, 기존의 일상이었던 시간 스케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 쓰게 되어 버린다면, (단순히 외부 행성들에 대한 호기심 충족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우주 개발의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마치 온 우주의 모든 것이 2배 커지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말이다. 주지하였다시피, 나는 지식 습득이 아닌, 상호적 의사소통에 기반을 둔 '관계맺음', '함께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에, 일상에서의 시간 감각(A)과, 8.6년을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 있는 시간 감각(B) 사이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어떤 이가 B 모드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A 모드의 사람들과 '동일 시공간에' 존재할 수는 있지만, '함께' 존재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가 B 모드를 끝내고 A 모드로 돌아가면, B 모드에 돌입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A 모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이 모두 파괴되어 있음을 그는 알게 된다.

  우리 인간은 정말로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았다. 인간은 동족들의 공동체가 그 넓은 세계로 진출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넓은 세계에서 동족들과 동시에 존재함을 알지만,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홀로됨은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럿 사이에서 홀로됨은 외로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속도를 통해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그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그 때문에 인간은 외로운 것이다.

- 시공간의 물리적 특성 및 인간 관계맺음의 상호성 테제에 의한 우주적 고독의 해명 -
  이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결부지어 주는 속도라는 물리량에 299792458m/s라는 -결코 빠르지 않은- 상한선이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빛 전달의 즉시성이라는 허위적인 본유관념을 가진 채 넓은 시공간에 퍼져 생활하고 있는 인류의 상호성에 기반한 관계맺음이 본질적으로 제한됨을 밝히고, 그로부터 현대인과 미래인의 '우주적 고독'이 산출되는 원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해명하였다. 까마득한 고대인들에게도 이러한 우주적 고독감은 널리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온 세상이 과학과 이성의 빛으로 가득하다고 믿던 근대를 지나, 그 과학의 연구 성과들에 의하여 우주적 고독감이 더욱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시 제시되면서 팩트 폭력을 가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고독은 현대인들에게는 수많은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면서, 우주 개발 시대의 미래인들에게는 일상적으로 겪게 될 현실적인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이 우주적 고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이해를 증진하여 미래에 있을 다양한 논의들에 대한 예비적 작업으로서 기능하기를 감히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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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3일 수요일

캠퍼스에서의 위협적 플러팅 사건

  너무나 이상한 일이 있었다. 밤길에서 찝적충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외국인에게 무례하게 말을 걸려다가 거절당하니까 위협적으로 돌변했고, 지나가던 분들이 있어서 다행히도 제압이 되었지만 아니었으면 어땠을지 모른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중이 지켜지는 것은 이런 걸 보면 아직 먼 얘기 같아 보인다. 외국인을, 그리고 여성을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보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 때문에 flirting 같은 게 많은데, 심지어 거절했을 때의 물리적 폭력의 위험까지 있다.

  자기 기분 나쁜 것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인간으로 안 보는 것 같다. 하긴 그러니까 애초에 저렇게 무례하게 말을 걸었겠지... 이런 건 정말 어디에나 만연한 것 같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꾸준히 있어 왔을 거다. 저 학생이 직접적인 사과를 하고 합당한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며, 이런 일이 생겼을 때에 학내 공동체가 뭔가를 확실하게 할 수 있도록 방안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 Open Letter to SNU Student who Harassed Me | 나를 괴롭힌 서울대학교 남학생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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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4일 월요일

사적 자유와 공적 책임에 관한 소고

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사회적 역할에 따른 공적 책임과 구분하지 못하는 게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아닐까? 사람들의 공적 책임의식이 더욱 강화됨과 동시에,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유도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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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규모 집회 그 이후는? - '평화집회'에 대한 단상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사람들 실외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한 전무후무한 국정농단 사태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데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100만 명의 국민이 운집했고, 11월 12일의 집회는 '평화집회'로 진행되었다.

  물론 최전선 일부의 대치상황도 있었으며 이것은 현재의 밤샘집회에서도 지속 중이다. 이번 집회에서 그러한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위대 내에서 성추행을 했다는/당했다는 증언이 꽤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지워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폭력 없는 평화로운 집회'와 같은 기술적 표현보다는, 자주 쓰이는 '평화집회'라는 말을 인용하여 고유명사처럼 간주하며 사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평화집회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며 칭찬하는 말을 근래 자주 볼 수 있다. 최대 인파가 집결한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그것은 적어도 시위의 원인이자 시위의 대상인 집권세력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폭력시위가 일어나는 순간 프레이밍을 통해 우위를 점해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폭력이 발생하는 순간에 역풍이 불어올 것을 국민들은 알기에, 평화집회 현장은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긴장 상태이기도 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부 아슬아슬한 대치상황을 유발한 시위자들에 대해 "그 사람들은 모두 프락치일 거에요"라며 배제해 버리려는 모습도, 그런 보이지 않는 비대칭적 긴장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본다.

  100만의 인파가 몰렸음에도 큰 규모의 혼란이나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움에는, 외부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덕목에 의해 평가'된' 것이라는 측면이 필시 어느 정도 있을 수밖에 없다. 폭력이 발생하는 즉시 자랑스러움이 깨어지도록 프레이밍을 하여 시위 전체의 정당성을 상실시킬 수 있는 힘이 정권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안타깝다. 자랑스럽다고 말할 때, 프레이밍이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 프레이밍에 당하는 것처럼 되는 데 대한 찝찝함이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애초에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 마이너스 상태에서 그것을 해결하고자 해서 시위대가 집결한 것이지, 자랑스러움을 느껴서 플러스 상태가 되고자 집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찝찝함 없이, 오롯이 국민들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자율적으로 자랑스러움을 재구성해 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오늘 오전에, 몇 시간 후 시작될 집회를 예고한 기사의 제목은 "100만 명 운집... '정국 분수령' 될까?"였다. 분수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 정도 되는 규모의 집회라면 그 곳에서 드러나는 민의가 실제로 중앙 정치의 방향을 정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평화집회를 한 뒤 해산한 것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반 쪽짜리 해석인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주권자인 국민 100만 명이 모여 거대한 민의를 드러낸 뒤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간 것은, 주권행사의 대리인인 제도권 정치인들에게 그 거대한 민의를 반영하여 뭔가를 확실하게 이뤄 내라고 요구한 거라고 봐야 한다. 그러한 기대를 못 할 정도로 희망이 전혀 없었다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일상으로 복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의는 100만 명의 집회를 통해 현시되었고, 그에 따른 실천은 일단은 제도권 정치의 역할로 위임되었다. 제도권 정치인들은 그 책임을 짊어지고 확실하게 실천을 해내야 한다. 여, 야, 청 가리지 않고 자주 나오는 발언은 '겸허히 민심을 경청한다'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큰 갈림길이 있을 때, 민심은 경청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로 반영되고 피드백이 돌아와야 만족한다.

  만약에 민의가 반영되고 실현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그들에게 민의를 끊임없이 다시 보여주어 주권자로서 정치인들에게 위임한 역할을 끊임없이 다시 상기시켜야 한다. 또한 그 역할을 회수하여 스스로 집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끊임없이 내비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국민들 스스로가 주권을 가짐을 의식하고, 국가의 중대한 국면에서 그 주권이 어떻게든 행사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단계까지 간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성숙한 시민의식'이며, 국민 스스로가 오롯이 세운 자율에 의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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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2일 토요일

트럼프 당선

해는 어김없이 오늘 아침에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 세계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빈곤과 불평등의 해소, 군사적 긴장 완화, 인권 개선과 차별 철폐 등 범지구적 인류공영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시대정신이 그 효력을 너무나도 빨리 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두렵다.

우리가 마주하던 한계와 억압을 타파하여,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사람이 안전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인류가 나름대로 가시권에 두고 진전해 오던 것이 지난 수십 년이다. 우리 모두는 그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진전은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데, 벌써 동력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는 일탈적인 후퇴일 뿐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삶과 직접 결부된 물리적 현실조차 정치 경제 제도와 미디어에 의해 제어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예고된 불안정성은 더욱 우려할 만하다.

이전에 썼던 글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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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30일 일요일

시공의 폭풍 : 서사성의 붕괴와 탈맥락적 조합

<현대 대중문화와 디지털 매체>
- 시공의 폭풍 : 서사성의 붕괴와 탈맥락적 조합 -

이미지: 밤

  현대 대중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문화를 구성하는 고전적인 요소들이 그 본래의 맥락과는 거의 무관하게 등장하여 서로 자유롭게 조합된다는 것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되어 온 고전적인 문화 요소들이 RPG 게임 제작자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세계관 속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동시에 조합되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근간에서는 디지털 매체의 발달이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의 물리적 세계에서는 각각의 대상이 질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예컨대 음악 작품은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각 작품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 둘은 상호간에 변환될 수 없다. 반면, 그러한 대상들이 디지털로의 변환을 거쳐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매체에 편입되면서 구현된 가상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0과 1의 비트로 환원되어 일원화되며, 모든 대상들의 질적인 차이가 지워지고, 비트라는 동일한 물리적 근간을 가진 채 저장되어 있게 된다.

  우리는 매우 간단히 mp3 파일을 jpg 파일로 변환해 버릴 수 있다. 비록 그 결과물에서 인간에게 유의미한 -즉 실제 세계의 대상을 지시하는- 시각적 정보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두 파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0과 1의 비트로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파일 확장자를 바꾸는 행위는, 나열된 비트들이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게 하는 장치(연결 프로그램)들을 기만함으로써 디지털 세계가 물리적 대상들과 다르다는 것을 폭로하고, 디지털 세계가 기반을 두고 있는 컴퓨터라는 물리적 대상을 상기하고자 하는 한 고전적 인간의 선언으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령과 같은 디지털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빠르게 익숙해져 물리적 현실과의 구분 없이 디지털 세계를 수용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애초부터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던 것은 이 세계 자체가 아니었으며, 세계의 요소들이 우리의 두뇌 속에서 조합되면서 발생하는 ‘의미’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창조해 온 소설, 회화, 애니메이션 등의 수많은 의사소통 형식에서 이는 이미 확인되어 온 점이다. 인간은 의미를 소비하는 생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체 속의 가상을 실제 세계와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 미디어를 통해 무한대로 복제되어 전파됨에 따라 원본에 종속되어 있던 복제물들은 원본과 분리되며,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져 세상을 채우게 되고(explosion), 복제물들 간의 질적인 차이 역시 지워진다(implosion). 그리고 그 복제물들은 확고한 물리적 기반을 가진 원본들보다도 오히려 더 선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복제물들을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부른다. 이 시뮬라크르들은 비록 복제물이지만, 실재하는 원본보다도 더욱 선명한 초실재(Hyperreality)이다. 이것은 현대성의 본질과도 통해 있는 면이 있다. 현대성은 모든 양식을 흡수하고, 그로 인해 성장함으로써 그 양식들을 확산시켜 주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대성의 본질이 경제에서는 자본주의로, 문화에서는 매체로 그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디지털 매체를 읽어내는 작업에서, 위와 같은 보드리야르의 논의가 적극적으로 도입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세계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기술 수준도 상승하면서, 우리는 세계를 매우 작은 기본 요소들로 환원하여 이해한 뒤 그들을 재조합함으로써 현실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이론가 Vilem Flusser는 디지털 매체가 매우 발달한 지금과 같은 시대에 가상과 실재는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비트의 밀도' 차이일 뿐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3d 프린터를 보면 이 분석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매체는 세계의 단면을 자기 속에 끌어들여 0과 1의 비트로 일원화하는 데에서 시작했지만(implosion), 이제 그 일원화에서 오는 힘을 바탕으로 세계 자체를 새롭게 쌓아올릴 수 있게 되었다(explosion). 건축 등을 통해 주변 환경을 커스텀해 온 것이 인류 문명의 발전사 그 자체이기는 하지만, 디지털 가상(Digitaler Schein)은 그 어느 때보다 뿌리깊은 수준에서 우리 실제 삶의 양식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 속에서 0과 1의 비트로 환원된 대상들은 그 복제물의 생성을 매우 쉽게, 무한정적으로 허용한다. 그리고 그 복제물들은 원본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있다. 따라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추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인간의 삶에는 가치에 대한 새로운 지침이 요구된다. 엄숙한 세계는 유희적 세계로 전환되며, 실제 세계의 한계 체험이라는 패러다임은 가상 세계에서의 한계 극복 체험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된다.

  중세의 마술성을 극복하고 명료성으로 나아갔던 근대적 세계관 속에서, 세계는 그 기본 요소들을 단위로 하여 잘게 쪼개어져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끝에서, 역설적으로 다시 마술적 세계가 탄생한다. 모든 것이 밑바닥까지 해체된 상태에서 새롭게 구성되어 쌓아올려진 디지털 세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다. 근대 과학이 엄숙하고 무한한 중세적 마술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한계, 우주의 한계를 탐구하였던 것은, 사실 더욱 더 풍부하고 선명한, 새로운 시대의 마술성을 향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디지털 매체 속에서는 문화 요소들의 신화적 아우라가 붕괴하고 역사성, 서사성이 약해진다. 물리적 실체에 근간을 둔 오리지널리티를 향한 추구는 구시대의 것이 된다. 오로지 이미지만이 남아서 마음껏 자유롭게 조합된다. 이러한 디지털 세계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매체는 다름아닌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게임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의 작중 배경인 ‘시공의 폭풍’에서는 기존 블리자드 게임에서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그들의 원래 세계관과 무관하게 마구 등장한다. 시공과 차원을 초월해 세계와 세계가 부딪히는 ‘시공의 폭풍’이란, 사실 단적으로 드러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세계관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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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본부점거파티 및 본부스탁 취소 유감

  오늘 예정되어 있었던 본부점거파티와 28일, 29일에 예정되어 있었던 본부스탁이 연기 및 취소되었다. 기획 측에서 짧은 시간이라는 조건 하에서 많은 노력을 들여 가며 기획하셨을 것이고, 참가를 위해 많은 분들이 계획하고 연습하셨을 텐데 안타깝다.

  학생사회의 행동들에 대한, 또한 페미니즘에 대한 스누라이프 등의 이상하리만치 강한 반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것을 넘어 개탄스러운 입장이다. 그러나 본부점거파티와 본부스탁의 취소가 오로지 그들의 그런 반감 때문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행사 자체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서 시국까지 이렇게 되다 보니, 주최측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참가자 분들의 의견도 수렴하면서 정말 어려운 결정 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학생사회의 의제 집중 필요성, 그리고 학외 여론 등을 고려하여 본부점거파티와 본부스탁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시흥캠퍼스 문제와 관련하여 이들 활동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은 그 동력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폄하와 억측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며, 문제의식, 기획, 그리고 연기 및 취소에 이르는 여러 가지 결정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할 것이다. 누구를 탓하기보다는, 취소까지 이르게 된 여러가지 상황이 안타깝다.

  안팎으로 너무나 정신없이 흘러가는 며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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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14156271260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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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의 전개

201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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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초월

1. 최순실 PC에 청와대 자료
이른바 청와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 사무실 PC에서 청와대 관련 자료가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특히 수정 논란이 제기된 대통령 연설문 40여 개를 대통령이 연설하기에 앞서 받아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 작성자 아이디는 '핵심 참모'
최순실 씨는 연설문 뿐만 아니라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국무회의 등의 자료도 회의 이전에 받아봤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 문서의 작성자 아이디를 확인한 결과 대통령 핵심 참모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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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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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틀 만에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 드러나는데......
최순실씨는 자녀의 입시 관련 정보를 청와대를 통해 받는 등 역사상 최고 수준의 온갖 개인적 특혜를 받음에 더하여, 대선 및 당선 후 국정 운영의 전 영역에 걸친 매우 민감한 자료들을 꾸준히 받아 보았다고 한다(김종인 등 대선에 기여한 자들에 대한 평가, 일본 외교관들 만나서 박근혜당선자가 할 말을 정리한 문서 등등). 오늘 JTBC 뉴스룸에 보도된 대로 국정운영 전반에 그런 식으로 개입하는 최순실씨에게 청와대 행정관들까지 쩔쩔매고 그랬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비정상국가. 나로서는 상상조차 잘 되지 않으며,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고 막장드라마 소재고갈되면서 망해가는 걸 보는 느낌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 등 일각에서는 사이비 종교 교주로 활동했던 고 최태민 씨의 배경을 보았을 때, 박근혜대통령이 최순실 씨의 영향 하에 있어 온 것에는 무속적, 종교적 동기가 끊임없이 개입되어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앞으로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이 지점에도 초점을 맞추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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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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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가 가장 잘 지켜져야 할 권력 핵심부에서 정작 법치주의가 정말 허무하게 붕괴되어 있고 생판 뜬금없는 사람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게 알려지다 보니 국민 입장에서 심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 같다. 참담하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할 것이다. 그동안 법에 따라 정해진 기관들에 의해 돌아가는 권력시스템 자체를 전제하고, 그 아래에서 정치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래 온 건데 그 시스템 자체를 초월하면서 자기 맘대로 할수 있는 존재가 권력 핵심부에 당당하게 있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밀려오는 이 허망함은 기술적 언어로는 결코 담아낼 수가 없는 성격의 것이다. 법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최순실의 존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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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 보도를 보며 우리가 해야 할 일

  이런 기사를 읽으면서 해야 할 것은 "일부드립을 치는 페미니스트들 vs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사람들"의 구도를 설정하여 실제 사회의 구조를 왜곡하고 페미니즘 자체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폭력에 대한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일, 페미니즘을 외치면서도 성폭력을 저질러 온 위선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일,
성폭력은 어디에서든지(심지어 페미니즘을 외치던 사람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알고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성폭력을 더욱 더 경계하는 일,
지난번 웹툰작가 건이나 문학계에서 최근에 많이 폭로되었던 바와 같은, 페미니스트라던 사람이 성폭력을 저지르는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사회학적/심리학적으로 파악하는 일 등이다.

  성폭력을 근절하고 성차별적 요소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에 위선적으로 임해서는 안 되며, 성평등 의식의 체화와 실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사에 소개된 인물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폭력 자체가 죄인 것과 더불어, 위선과 언행불일치가 실망스럽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남성이 페미니즘에 주도적 역할로 참여하는 게 가능한지 등에 대해 오랜 논쟁이 있어 온 것으로 안다. 나는 성평등을 위한 논의와 실천에 성별 및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가 권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이 계속될수록 그런 분위기는 형성되기 힘들 것이다.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성평등을 향한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 의식을 일상 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말로는 페미니즘을 외쳤으나 실제로는 성폭력을 행해 온 것이 밝혀진 최근의 문학계 등에서의 여러 충격적인 사례들에 대해 우리가 접근해야 할 태도는 페미니스트로서 활동하면서 실제로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였던 위선자들을 규탄하고 법적/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며, 그런 일들이 왜 생길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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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4일 월요일

최순실 게이트의 서막

  최순실 등의 인물이 정권 수뇌부를 등에 업고 저지른 수많은 전횡들이 요즘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 최순실의 전 남편인 정윤회를 중심으로 한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된 바 있으나, 별달리 밝혀진 내용들이 없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매우 구체적인 증언들이 트럭 단위로 쏟아져 나오면서 비선실세들의 실체가 꽤나 명확해지고 있다.

  비리 사건은 항상 있어 왔지만 이것은 기존의 다른 비리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사건이다. 권력의 핵심부 중의 핵심부에 있는 청와대의 특수성을 일반인들이 등에 업고, 본인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휘둘렀다. 최순실 일가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두 재단은 사실상 청와대의 큰 기획 하에 기업들에게서 자금을 갹출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졸속적으로 진행된 자금 출연 과정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기록한 글이 존재한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수십억 원씩을 출연받아, 고작 3일 만에 졸속으로 심사를 완료받을 만한 주체가 도대체 누구런 말인가? 게다가 미르재단 회의록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야 할 사람이 K스포츠재단 회의록에 올라가 있는 등, 정상적인 과정이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류들도 다수 발견된 바 있다.

  또한 최순실의 딸이 재학 중인 이화여대는 최순실이 딸의 성적 등과 관련해서 이대를 방문하여 저지른 갑질 등에도 불구하고, 마치 귀족을 대하는 듯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특별 대우를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해 왔음이 드러났다. 대한민국은 계급 국가 가 아닌데, 청와대를 등에 업고 특수 계급처럼 특혜를 받아 온 것이다. 극단적인 불공정성이다. 계속되고 있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에 교수협의회까지 함께하여 마침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이화여대 총장은 사퇴하였다. 앞으로 사태의 전모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면 단순 사퇴 이상의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어버이연합 게이트에서처럼 청와대의 권한이 반대파를 향한 억압 등을 위해 '정치적'으로 남용된 것만 해도 충격적인 것이었는데(그리고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개인이 정권 수뇌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엄청난 사적 이득을 취한 것이 밝혀진 것으로써, 충격적인 것을 넘어서 기이하고 기괴하다. 말 그대로 국정농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태민(최순실의 부친) 일가와 수십 년 간 가까이 지냈고, 그 과정에서 재단 등을 운영하면서 최태민 일가가 엄청난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8~90년대 당시부터 수많은 증언이 확보되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형제자매조차 이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여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따라서, 최순실의 각종 전횡에서 빚어진 논란에 대해 최종적으로 책임지고 해명하여야 할 사람은 다름아닌 박근혜 대통령이다. 단순히 지도자로서의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게 아니라, 최순실의 국정농단 자체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의혹 제기에 대해서, "의혹이 확산되고 도를 지나치게 인신공격성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한류 문화 확산과 기업의 해외 진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적반하장 식의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도 "의혹을 잠재워 줘야지 계속 증폭시키면 국민에 게 손해가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 이런 걸 두고 아무말 대잔치라고 하는 것 같다.

  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드러났으니, 대한민국은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서의 이 사건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각종 증언들로부터 사실관계가 확실하게 재구성되어 언론과 시민사회에 의해 기억되어야 하고, 둘째, 검찰과 법원이 이 사건에 대해 충분히 정확하게 조사하고, 공식적인 판단을 해서 정리를 해 주어야 한다. 셋째, 대통령을 포함한 관련자들은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은 공식적인 대통령기록물 등으로 남을 성격의 것이 아닌 만큼, 타이밍을 놓치면 그렇게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난 너무 걱정된다. 이번 정권 하에서 이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잘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정권 교체 직후에라도 즉시 이러한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음모론에나 등장할 것 같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게 너무나 실망스럽고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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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시흥캠퍼스 본부점거를 보며

  시흥캠퍼스 추진은 다방면에서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말과 달리 본부가 갑작스럽게 실시협약을 체결하는 등의 기만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흥캠퍼스 사안은 학생사회에서 긴급하게 다루어졌다. 10월 10일 학생총회는 의결권자의 1/10을 수백 명 상회한 수가 출석함으로써 성사되었고, 그 자리에서 현재와 같은 시흥캠퍼스 추진에 대한 전면 반대와 본부 점거가 의결되어 현재 많은 학우들이 밤을 새어 가며 본부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학대위(시흥캠퍼스 전면 철회를 위한 학생대책위원회)를 기초로 중앙총회기획단이 구성되어 시흥캠퍼스 관련 업무가 총학생회로부터 상당수 위임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중립성 문제를 제기한다. 시흥캠퍼스 사안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수렴하는 최대 의결기구인 학생총회를 기획하는 주체가 시흥캠퍼스 전면 철회라는 특정 주장을 해 오던 단체라면, 그 주장에 대해 반대하던 학우들의 목소리가 학생총회에 반영되기에 어려운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난 9월 22일 공과대학 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고, 총학생회 측에서 이를 수용하여 홍보 문구를 보다 중립적으로 수정하는 등의 변화를 보인 바 있다. 그 이후에도 주변의 학우들으로부터 중립성 문제와 관련된 의견을 수 건 이상 접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지만 이러한 의견들에도 공감한다. 학대위를 기초로 구성된 중앙총회기획단에 업무가 위임된 것에 대해 학우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부재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불필요한 학내 갈등이 증폭되어 비판자들에게 조소를 사거나,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 나중에라도 의문이 제기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추후에 있을 학내의 또다른 중대한 사항의 의결에 있어서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중립성에 대한 각종 우려에도 불구하고 학생총회에서는 시흥캠퍼스 찬성 의견 역시 제시되었고, 매우 당연하게도 그러한 찬성 의견들 역시 직접민주주의 현장에서의 당당한 의견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학생총회에서의 직접민주주의적 의결 절차는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학우들은 현재와 같은 시흥캠퍼스 계획의 전면 철회 요구라는 총의를 의결하고, 이것을 본부에 요구하기 위한 본부점거라는 수단을 의결하여 추위와 각종 불편, 징계 위험 등에도 불구하고 수행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응원한다. 시흥캠퍼스 문제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단순 형식상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보장받기 위한 학우들의 행동을 지지하며, 실제로 본부가 그것을 보장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산출하고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침에는 초콜릿 봉지라도 사 들고 본부에서 밤을 샌 학우들을 방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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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1일 화요일

시흥캠퍼스 관련 학생총회 성사

학내 최대 의결기구이자 직접민주주의의 장인 학생총회가 정족수를 수백 명 초과하여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석하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 총회를 성사시킨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내며, 총회의 의결사항을 바탕으로 시흥캠퍼스 계획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전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사람들, 농구장 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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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6일 월요일

백남기 농민 건에 대하여: 공권력 집행자의 책임

최대한 후퇴하여 원론적으로만 주장하더라도, 시위 현장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그 국민이 시위대이건, 경찰관과 의경들이건, 지나가던 사람이건)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권력의 집행자인 경찰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하다. 하물며 백남기 농민 건에서는 어떤가? 신중론으로 위장한 정권발 면책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경찰 수뇌부와 정권의 뻔뻔함은 도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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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4일 일요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좋은 글을 읽고

어딘가에서 특징적인 양식이 발견되면 이내 그 '문화'는 '문화 상품'이 되어 개발되고 소비된다. 이것은 인터넷 상의 유행어부터 물리적인 공간에까지 널리 일어나는 일이다. 공유한 글의 주제인 샤로수길이라는 '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모든 양식들을 스스로 포섭하며 성장함으로써 그 양식들을 확산시키는 현대적 체제의 단면이다.

비록 그 작동이 악의에 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러한 경향은 결국 문화의 생산자들과 향유자들을 그 문화로부터 떠나도록 강제한다. 수단화된 문화는 이렇게 붕괴된다. 문화는 삶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보완책은, 결국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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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둥지내몰림은, 정부가 낙후된 지역, 혹은 중심에서 밀려난 지역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사업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은 목적이 될 수가 없다. 도구로 전락하기가 일쑤다.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곳에 젊음이 있고, 젊음이 있는 곳에 자본의 유입이 있으며, 자본이 유입되는 곳에 지역 발전이 있다는 것은 일련의 공식처럼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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