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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1일 화요일

과학친화적 세계관을 철지난 계급주의로부터 적극 분리해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진화론의 수호자이며 합리성의 옹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생학이랑 별로 다를 바 없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게 꽤 많이 보인다. 설령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능동적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사회의 변천을 유전자 풀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결국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월-열등 개념 (특히 지능이나 외모 관련) 을 바탕으로 한 '낯설게 보기'만이 남는 그런 아티클들 말이다.


최소한 우생학은 지금 와서는 윤리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적절히 비판받고 사장되었지만 당시에는 수리통계학을 만들다시피 한 사람들까지 적극 참여하는 정상과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기라도 했던 반면에, 한국 인터넷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러한 우월-열등 설왕설래는 동시대의 나무위키 주석에서조차 극우주의로 규정되고있는 실정이다.


만약에 이를 집단유전학을 비롯한 진화생물학 및 사회과학의 세련된 정량적 연구방법론, 그리고 과학연구가 인간 사회에 대해 말해줄수 있는/없는 것에 대해 실제로 잘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본다면 뒷목 잡을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작 저들은 자신의 계급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엉뚱하게도 진화론에 대한 도전, 내지는 좌파적인 상대주의로 잘못 간주하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지독한 농담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는 담론지형을 꼬이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 한해선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런 잘 훈련된 학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이론에 비판적일테고, 정치적 동기를 가진 지적 상대주의를 경계할 것이므로 과학의 적법한 옹호자일텐데 말이다.


진영을 오독하고 스스로 진화론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면서 불필요한 분란을 촉발하는, 그러면서도 과학 및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인 이러한 과학주의적-계급주의는, 유사과학 비판 및 광의의 과학커뮤니케이션에 관심있는 실력있는 연구자들에게 곤혹스럽기 그지없을테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진화생물학을 인용하는 아티클이나 영상컨텐츠들 중에 과도하게 '썰 풀기 식으로만' 되어있는, 혹은 개별 과학지식의 전달을 넘어 어떤 이념 내지는 '세계관'의 구축에 몰두하는 것들은 일단은 의심하고 보기 시작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권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한 냉정한(?) 과학주의적 주장들뿐만 아니라, 자연의 연결성과 총체성을 중시하며 주로 진보적 의제를 서포트해주는 과학기반 담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좁은 지성계 및 출판계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나마 주류로 등장하는 이쪽의 계보를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작업도 꽤 의미가 있을테고 언젠가는 취미삼아 해 봐야 하는데 아직 문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해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내생각엔 비과학 및 유사과학에 대응해서 과학적 합리성을 적극 전파하려는 사람들 ㅡ소위 말하는 스켑틱 진영ㅡ은 이렇게 인간학과 생물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특유한 유사-학술적 주장들과의 디커플링을,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천명해야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얘기지만, 외부에서 보기에 스켑틱진영은 이러한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와 오히려 비슷하게 여겨질 때가 많으며, 스켑틱진영 스스로도 이들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명시적으로 설정해두진 않을때가 많다. 나는 나름 내부자인 입장에서 그러한 동일시가 대부분 오해라고 생각하지만, 적극적 선긋기가 부족하다면 100퍼센트 그렇다는 보증은 못 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의 연원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그냥 가설이다. 김정희원 선생님의 최근 Facebook 포스팅(전체공개가 아니어서 링크하지 않음)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약간 나왔는데, 소위 명문고 및 명문대 재학생들 중에 지능 및 학업성취 관련해서 과몰입한 경우엔 우열에 대한 얘기를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나도 노골적 우월-열등이라는 개념까지는 거부감을 느껴서 안 다다르긴 했지만, 학창시절 소수 고지능자들의 사례를 보며 지능이 높느니 낮느니 하는 것에 과몰입한 시기가 길었던 건 사실이다. 경쟁하며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의 시야에서 이것이 자연스러울듯하며, 다만 적절한 교육을 통해 조기에 또다른 시야들도 경험하고 선택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튼 이렇게 머리가 좋다 나쁘다와 관련된 설왕설래가 오가며 '끕'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고착시키는 대치동 학원 내지는 오르비 마인드셋에, 고교와 학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학습한 과학지식,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느끼는 돈 및 외모 등에 대한 관념 같은 게 절묘하게 결합해서 위와 같은 세계관이 형성되는 듯하다. 물론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지 꼭 이렇다는 건 아니다.


세계관 얘기를 더 해보자. 학부수준의 과학지식 및 교양과학지식 학습,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가 모종의 과학 친화적 세계관 (기계론적, 원자론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을 유발하는 면은 분명히 있는 듯하며 나 또한 그런 세계관을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만큼 당연히 가지고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들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지식을, 그리고 과학에 대한 애정을 갖고있지 않을 거라고 잘못 가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비교적 지적/실천적으로 건전하게 쓰일만한 과학친화적 세계관에, 자꾸만 자신들의 차별적 생각을 덤으로 끼워넣고자 시도하게된다.


아무튼 사람들이 살아가고 공부해나가면서 형성한 세계관과 인지도식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인식의 층위를 분별하여 세계관과 개별 지식을 잘 구분하고, 각각을 적재적소에 꺼낼 줄 아는 훈련은 이공학도들 및 과학 애호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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