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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3일 월요일

카드캡터체리 봉인해제 컬렉션 2탄 가챠

대전역 가챠샵에서 카드캡터체리 봉인해제 컬렉션 2탄을 하나 사 봤는데, 거기서 나온 통신전화 품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인터넷 쇼핑을 통해 풀세트를 어렵게 구했다. 어릴 때에는 풀세트를 사려면 부모님 설득을 열심히 했었어야 할 텐데, 어른이 되어서 좋은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컬렉션 대부분에 움직이는 파츠나 자석 등 재미있는 기믹이 있으며, 책과 그 안의 카드 두 장이 특히 완성도가 높고 마음에 든다. 유일하게 별다른 기믹이 없는 최종 화 지팡이도 이번에 최초로 입체 제품화된 거라고 하니 꽤 의의가 있어 보인다. 조립하니 거의 볼펜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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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6일 월요일

『서사의 위기』(한병철) 서평 - 밈컬쳐의 정치적 위험성과 팩트의 국소성

이번 자율독서모임에 가져가서 읽은 책은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이다. 저자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로, 20년쯤 전에 <피로사회>로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책을 작년에 훈련소에 갔을 때 진중문고 서가에서 처음 보고는 한병철의 이름과 <서사의 위기>라는 제목만 보고 기억을 해 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눈에 띄길래 구입했다. 많은 철학사상들이 인용되어서 다소 어렵긴 하지만, 어떤 의도로 그러한 철학들을 인용하는지 잘 설명해 주는데다 책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생각보다 금방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는 사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농도짙게 가져가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적되고 전승되어 온 고맥락 리터러시가 무너지고, 즉물적인 것에 의해 지배되며 '재미'라는 가치가 과대대표되는 밈 컬쳐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의 유해성이라는 주제에 내가 최근에 관심을 갖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책의 내용은 현대 미디어가 인간의 세계 지각과 행동 양식을 바꾸어놓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내용이었다.

서사, 즉 내러티브는 누적된 경험들이 생략과 증폭을 거쳐 서로 잇따라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서사가 붕괴되고 밈, 쇼츠가 유행하고있다. 나도 밈을 굉장히 즐기기는 하지만, 밈의 특징은 ‘의미 없는 재미’에 있다. 만약에 내가 즐긴 밈을 보고 남이 ‘어 그거 아닌데’, ‘어 그거 틀렸는데’라며 훼방을 놓는다면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 들 것이고 이는 불쾌감으로 이어진다. 만약에 정치적인 의도 하에 편집된 밈이라면 이러한 불쾌감은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감으로 이어지며 이를 응집력 삼아서 사람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래서 나는 정치에서의 이러한 밈적 사고를 경계하는 편이다.

실제 책 내용 역시 밈, 쇼츠, 커뮤니티 등과 깊은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관심이 있었던 매스미디어 시대의 정치학보다는 인식론에 더 가깝다. 서사에서 경험된 것들의 생략과 증폭을 통해 얻어지는 일종의 신비로움, '생각할 틈'을 철학자들은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 미디어에서는 모든 것이 지극히 선명하고 즉각적으로 기록되며 무한히 복제되고 편집된다. 매스미디어에서 정보는 그렇게 누적되고 전승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여기서 아우라는 파괴된다.

책 표지에 있는 ‘스토리 중독 사회’라는 말에서 스토리란 언뜻 보면 서사와 똑같은 말 같다. 그러나 사실 반대로, 여기에서의 스토리란 인스타그램에 있는 바로 그 스토리 시스템에서 따온 말로,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사라지는, 맥락이 제거된 정보의 향유를 말한다. 여기에 더해서, 저자는 인간학적 의미가 없는 마케팅 기술로서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정보화사회에서 매분 매초 트럭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들도 저자는 ‘스토리’와 같은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나마 뉴스는 일방적이라면, 스토리의 경우는 소비자들이 직접 편집하고 게시하고 소비하며 밀도높은 양방향적 소통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정보화사회의 특징을 억압적이고 명시적인 지배를 대신하는 기술기반의 스마트한 지배라는 뜻에서 ‘신 지배형식’이라고 부른다. 끊임없이 정보를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가며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디지털매체 특유의 시간성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밀착되게 개입하면서 우리를 ‘압도한다’.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그대신 자유를 최대한으로 밀어붙여서 자유를 exploit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할 틈을 더 효과적으로 지워버린다.

<24시간 시대의 탄생>(김창선)이라는 책에서도 시간의 정밀한 통제와 밀도높은 사용에 대해 다룬다. 그 책이 일터(하버마스적으로 말하면 ‘체계’이려나)와 공적 공간에서 시간이 세분화되는 것의 정치성을 다루었다면, 이 책에서는 생활적인 영역(생활세계)에서 우리가 세계와 지나치게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 서사를 약화시킴을 지적한다 (물론 두 책이 속해 있는 지적 배경은 상당히 다르다). 저자는 서사야말로 과거로부터 누적된 전승이고, 우리를 생각하게 해 주고,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갖게 해 준다고 말한다. 반면 즉각적 정보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근대성이라는 얇디얇으면서도 매우 논쟁적이고 중요한 계기를 저자가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다소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근대의 야심찬 계몽적 기획이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안온함, 즉물성 등으로 귀결되면서 실패한 셈인데, 서사의 시대와 후기근대 소비사회의 사이에 있어야 할, 근대적 이성의 이중적 면모가 이 책에서는 다소 overlook된다.

내가 생각하는 근대의 실패는 소위 말하는 '팩트'의 이중적 면모와도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의적으로 탈락되고 재구성되는 서사의 불완전함을, 국소적이면서도 치밀하고 보편적인 근대적 지식들이 대체하면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대가 도래하고 보니 오히려 팩트는 개별자들을 치밀하게 보편성으로 엮어내는 힘이 부족하며 국소성이라는 계기만을 너무 크게 가지므로, 오히려 훨씬 더 자의적, 즉물적, 일회적으로 소비되고 만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인류 지성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성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이걸 꼽겠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의) 과학적 탈신비화와 (현대 소비사회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를 병치하며 다음과 같이 대비할 뿐이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 이러한 두 탈신비화를 근대의 양면성을 바탕으로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쉽다.

저자가 서사를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비약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이야기를 제공해주고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서사로서의 기억은 단순한 시공간적인 연속체가 아니다. 오히려 서사적 선택에 기반한다. 사진과 달리 기억은 자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선택된다. 또한 기억은 시간적 간격을 늘리거나 줄인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을 건너뛰기도 한다.” 이렇게 망각과 선택을 통해 구성된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삶을 우연성의 무한 연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우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희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도 이러한 자의적으로 구성된 서사로부터 종종 개인적인 동기부여를 얻고 사회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곤 하므로 이러한 지적은 꽤 와닿기는 한다.

여러 책들에서, '인류 마음의 심원한 곳에는 늘 종교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없을 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나는 다소 심술이 나곤 한다.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무리 면밀히 봐도 종교성에 해당하는 심리적 계기를 딱히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서사’를 대하는 관점도 약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술이 나기도 했다. '인간은 결국은 서사 없이는 안돼! 그래야만 해!' 밑에서 쓰겠지만 나는 서사가 인간에게 갖는 강력한 힘을 인식하되, 결국은 그 강력함 때문에 오히려 서사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라서 저자와 입장이 다르다. 이를 ‘서사의 위기’가 아니라 ‘서사라는 오래된 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까.

철학적 사유를 걷어내고 이 책의 메시지만 보자면, 약간 기성세대가 어린이들이 TV 많이 보면서 바보가 된다고 걱정하던 느낌이라서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런데 이제 그런 기성세대들도 유튜브, 쇼츠 중독에 빠지곤 한다. 현대인들이 이것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철학적으로도 벤야민의 매체미학,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 빌렘 플루서의 디지털 매체이론 등을 포함한, 어디에선가 한번쯤 봤을 이야기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막 공부하면서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각자의 문제의식과 연결지어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보인다.

그러나 뻔하지 않은 예시들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서 (1) 심박수, 혈압, 등 우리가 상시 착용하고 있는 센서들이 제공하는 숫자를 활용해서 헬스케어를 하는 것, (2) 인공지능 기반의 추천 (유튜브 알고리즘이나 광고 등)이 우리 자신들보다도 우리의 선호를 잘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보를 ‘떠먹여 주면서’ 우리를 압도하며 은밀하게 시스템에 복무시키는 현상은 확실히 좀 참신한 예시이고, 주의깊게 생각해볼 만하다.

그리고 위에서 몇 번 언급한, 서사에서 자의적인 (그러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보의 생략과 증폭이 중요하다는 지적 또한 꽤나 흥미롭다. 인류 문명에서 전승되는 지혜도 이처럼 생략을 통해 아우라를 획득하고 보편적 지혜의 지위를 얻는다. 그리고 현대인의 개인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빠짐없이 수치화되어 기록되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의 차이가 지워져서", 서사 성립에 필요한 인간적인 '기억'이란 것이 없게 된다.

저자는 더 나아가서 공동체 또한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서사를 바탕으로만 조직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서사가 위기에 처하면 공동체도 붕괴되며, 여기에서 저자의 테제가 정치사회 이슈와 연결될 계기가 발생한다. 공유와 소통이 (과도할 정도로) 늘어나는데 오히려 서사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관찰이기는 하다. 인간적으로는 점점 고립되지만 정보의 바다에는 상시 접속되어 있으면서 그 정보들에 압도되는, 말하자면 풍요 속의 빈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서사의 부재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서사가 사라진 공간에서 무엇이 새롭게 등장하는지에 더 구체적으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팩트와 재미라는 두 개 바퀴의 역설적 결합을 통해 질주하는 즉물적인 밈 컬쳐가, 시시각각 형성되었다가 해체되는 무책임한 매스미디어적 정치성을 어떻게 은밀하게 조직해내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과 상충되는 이야기는 아니긴 하다.

서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훨씬 더 많다. 사실 2018년 경에 ‘서사를 경계하라’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글을 쓰다가 만 적이 있다 (개인 드라이브에만 저장되어 있다).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들 중에서도 사실은 서사성을 가지는 것이 많다. 증언으로서의 서사는 보편성을 확장시켜주고 더 따뜻하고 포용적인 보편성을 추구하게 해주지만, 강요되는 규범으로서의 서사는 허위의 보편성으로서 폭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이 서평의 범위를 넘는다. 나중에 더 풀어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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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1일 일요일

극우세력의 전방위적 역사수정전쟁을 예고하는 리박스쿨 논란

대선 레이스의 최후반은 내란 종식과 나라의 미래에 대한 정책토론은커녕, 이준석과 유시민의 여성 발언 논란 그리고 리박스쿨 늘봄학교 의혹이 장식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미래와 당면과제에 대해 길게 글을 써 보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그냥 올리지 않으려 한다.

리박스쿨 논란은 정말 심각한듯하다. 2012년 대선 직전의 악몽 같은 상황이 생각난다. 정확한 타임라인이나 관계는 많이 잊어버렸지만, 그때도 오륜교회 윤정훈 부목사의 십자군알바단이 덧글작업 한걸로 논란이 되다가, 국정원 직원 셀프감금과 겹치면서 국정원, 국방부, 경찰청의 대선개입으로 논란이 확대됐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대선 3일 전에 성급하게 무혐의로 발표했으나 나중에 결국 다 사실로, 그것도 처음 의혹보다 훨씬 더 대대적으로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홍역을 치러 놓고 ,박근혜 정부 때도 국정원과 청와대의 관변단체 동원을 통한 정치개입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확대되었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일선 학교 방과후학교 같은 데에 단월드 등의 유사과학/사이비단체가 들어가서 자기네 사상 퍼뜨리고 이런 일들은 원래도 종종 있어온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늘봄학교 자체가 이걸 위해 만든 정책이라고까지는 일단은 의심을 안 하려고 한다.

그러나 리박스쿨의 극우 역사교육이 늘봄학교에 실제로 침투해서 프로그램으로 운영이 된 것, 그 사람들이 정치 덧글작업에도 동원된 것, 그리고 그 리박스쿨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윤석열정부에서 아주 핵심적인 인사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현직으로 직함을 받았던 것까지는 분명히 사실로 보인다.


책임 소재 애매하게시리 분명히 정부여당 인사들이랑 연관이 없지는 않은 이런 반 관변단체(?)들이 나와서 선거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2010년대부터 보수세력이 버리지 못하는 아주 안 좋은 습관이다. 선관위 디도스, 국정원 사이버사 대선개입, 어버이연합 태극기집회 국정원 지원 등등... 이번에도 MB, 박근혜 때처럼 배후에 정보기관이 있을지는 조심스럽긴 하나, 일단 가능성을 열어는 두고 합리적인 선에서 추적을 해야 할 테다.

전광훈과 손현보다 전국 곳곳에 운영하는 미인가 대안학교들뿐만 아니라, 이렇게 공교육 영역에 대놓고 침투하려는 것도 정말 잘 감시해서 막아야 할 것 같다. 전에도 썼듯이, 공동체가 갈수록 붕괴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어이없게도 제일 끈끈하고 제일 강한 공동체로 부상한 것이 다름이 아니라 극우교회이고, 이에 대응하기엔 사람들은 너무 무기력하거나 관심이 적다. 잘못하면 극우의 울타리 안에서 청소년 전사들이 양성되고 재생산되는 구조가 정착하면서 나라가 미국처럼 뒤틀린 복음화(?)가 되는건 순식간이라고 본다.


리박스쿨에서 극우개신교의 역할이 아직 확실하진 않으나, 김문수와 전광훈이 한창 행보를 함께하던 시절의 자료들을 보면 기독교가 꽤나 중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극우개신교이건 아니건, 정권 수뇌부가 정확히 인지했건 아니건, 이 사건 자체가 앞으로 한국사회에 극우세력이 일으킬 전방위적인 역사수정전쟁, 문화전쟁을 아주 선명하게 예고하고 있으므로, 당장 대선국면에서의 잘잘못은 물론이거니와 그 연원까지 끈질기게 파고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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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9일 목요일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민태기) 서평: 복합위기 앞의 우리가 경성 지식인들에게 배울 점

오늘자 우리 동네 자율독서모임에는 지난 4월 4일 서울대 이론물리학연구소 콜로퀴움에 강연하러 오신 민태기 박사님께 사인까지 받았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을 가져와서 읽고 있다.

그날 강연의 중심 내용이었던, 과학혁명 시기를 중심으로 서구 근대 과학사를 주로 다룬 책 <판타 레이>와 비슷하게, 이 책도 과학지식 그리고 과학자들이 역사의 중요 사건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아 왔는지를 중심으로, 흔히 접할 수 있는 전쟁과 정치 위주의 역사서술과는 다른 각도에서 문화사와 정치외교사의 접점을 풍부하게 서술하므로 지극히 흥미롭다.

소소하게는 안창호 선생의 호인 '도산'이 하와이 섬을 보고 지은 것이라는 점부터, 책의 제목처럼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양자 역학이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언론에 연재기사로 상당히 정확하게 소개되었고,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순회강연을 했을 때 (비록 조선 초청은 실패했지만) 조선에서도 연일 화제가 되었으며 최윤식 등이 상대론에 대한 순회 강연을 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 등등 잘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들이 이 책에서는 매 페이지마다 트럭 단위로 쏟아지며, 그런 사실들이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경성 에리뜨의 만국 유람기』라는 책처럼, 조선 후기 및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이 굉장한 수준의 국제적 감각과 실천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외 불확실성에 정면으로 노출된 채로 반세기 넘게 고도성장을 해온 대한민국에서, 세계정세 혼란과 국내 사회문제 누적으로 복합위기를 마주하고있는 현재의 우리가 오히려 배워야 할 태도가 많다고 보인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져서 학술검색엔진 Google Scholar에 검색을 해 봤는데, 우장춘 박사가 주창한 생물학 개념인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은 무려 2020년대 들어와서도 Brassica 속 식물에 대한 논문들에서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만큼 활발히 인용되고 언급되고 있다. 20세기 초중반 한국의 선구적인 과학자들이 많고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우장춘의 연구가 해당분야에서 현재까지도 상당히 활발하게 인용되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마지막으로, 민태기 박사님의 다른 저작인 『판타 레이』와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것은 근대화 시기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과와 문과의 구분이 상당히 희미했다는 점이다. 계몽운동과 정치개혁에 참여한 이들이 과학에 상당히 본격적인 수준의 관심을 표명하고 토론에 참여하거나 아예 직접 연구한 경우가 많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문/이과 분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두 문화』에서 지적되었듯이 이러한 분리는 부작용도 많으며, 한국에서도 장기간의 분리에 따라 상호이해와 교류가 부족한 면이 많다. 문이과가 다시한번 머리를 맞대고 당면한 문제들을 현명하게 해결해나가는 날이 조속히 오기를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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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4일 토요일

민주당의 기술사회학적 상상력은 왜 에너지문제 앞에만 서면 멈추나

나는 여러 정치 이슈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진영보다는 넓은의미의 민주/진보진영과 스탠스가 겹치는 편이지만, 에너지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민주당 주요 정치인들 및 지지층과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나는 현재까지의 역사와 지금의 정치지형에 비추어볼때 민주당이 잘 살릴 수 있는 강점은 지나친 기술 및 자본 낙관주의를 경계하고,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권익의 불평등과 민주성의 침해를 짚을 줄 아는 적당히 세심한 사회적 감수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에너지문제에 있어서 원전에 반대하고 신재생 위주의 포트폴리오에 지나친 낙관을 보여줄 때만큼은, 민주당은 자신들에게 잘 어울리지도 않는 경제논리(이미 원전 경제성을 신재생이 추월하고있고, 신재생으로 안만들면 해외기업이 안 사준다)로의 무한 환원, 그리고 계속 연구개발 중이니 잘 될 것이라는 기술낙관주의를 끌어온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층 다수가 이게 어색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이게 기술낙관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이라고 느낀다면 내 스탠스가 남들과 많이 다르긴 한 것 같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나타나고있는 정치적 스탠스가 내 머리속의 구획과 다르면 현실부터 인정하고 시작은 해야 되기는 하겠다.

(2025.12.08: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더 온건해졌다. 의도적으로 원전을 사양시켜서든 아니든, kWh당 태양광 경제성이 원전을 추월한 것이 이미 벌어져버린 사건이 맞다면, 또한 신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제품들이 아니고서는 판매가 어려워지는 흐름이 주류가 된다면, 그쪽으로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원전기술이 신재생에너지에 비해 가진 커다란 장점과 그 분야에서의 한국의 경쟁력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이야 민주당이 천안함 음모론에 어느 정도는 선 그으려는 태도를 보여주니 심하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은 마치 천안함 사건 당시 평소에 군사, 안보에 크게 관심도 없었을 사람들이 생존 장병들에 대해 위악적으로(?) 패잔병이라고 가혹하게 말하던 기괴한 현상이 생각나기도 한다. 자신들 상상 속의 차갑고 엄격한 지휘관처럼 그렇게 가혹한 태도를 보이면 군을 잘 아는 세력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당연히 실제와는 거리가 있고 대단히 어색하다. "나는 민주/진보 지지 성향이지만 이럴때만큼은 차가운 경제논리도 적용할줄 안다", "이건 절대로 이념에 기반한 게 아니고 차갑고 실용적인 판단의 결과이다"하고 애써서 과시하는 느낌이 든다.

이준석이 사회갈등에 대한 근본적 진단을 은폐하고 겉보기 현상의 말단에서 사회운동세력이 보이는 행동을 희화화하기 위하여 과학, 합리, 이성을 소리높여 외칠 때마다 내가 다 화끈거릴 지경이지만... 유독 신재생에너지 쪽에 대해 민주당 쪽이 보여주는 '투자하면 무조건 발전한다'하는 경제논리 및 기술낙관주의도 이와 비슷하게 화끈거리는 느낌이 있다. 이 '나이브하다'라는 말조차 우파들이 낭만주의적 진보좌파를 비난할 때 쓰는 전형적인 단어라서 별로 안 쓰고 싶은데, 이 경우에는 좀 적용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에너지 문제에 있어서 민주당에게 부족한 것은 (우파 쪽에서 사실은 자기들도 잘 모르면서 흔히 조롱하듯이) 기술의 내용적, 기능적인 면에 대한 전문성 이전에, 자신들이 가장 잘 해야 할, 기술인프라가 그 자체로 사회적 구성물이자 사람들의 삶과 산업을 조건화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을 인식하는 태도, 잘 되면 좋고 노력해야 하지만 정말 마음대로 되는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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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6일 금요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서평

독서모임 소개

나는 늘 독서를 좋아한다고 말은 하고 다니지만 정작 시간 활용을 정말 못 하고, 그때그때 주어지는 다른 일들을 하다 보면 책을 실제로 펼쳐서 읽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런데 올해 3월경부터 들어가게 된 독서모임을 통해 책 읽는 시간을 꽤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모임은 크게 자율독서모임과 지정독서모임으로 나눠지는데, 먼저 자율독서모임에서는 각자 책을 가져와서 간단하게 소개만 한 뒤에 자율적으로 읽는다. 자연스레 약간의 수다는 떨어도 되지만 서로의 신상은커녕 이름조차 모르고, 정말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지정독서모임은 두 달에 한 번씩만 있는데, 이때는 책 내용을 두고 1시간 반 정도 토론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궁극의(?) 독서모임은 2018년부터 몇 번 나가 봤던 고전연구회다. 고전연구회는 동아리다 보니 신상 소개 정도는 나누지만 그래도 서로에 대한 과도한 관심 없이 오직 문학책의 내용과 거기서 드러나는 인간관 및 세계관을 둘러싼 toxic한 발제와 토론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견주어보며 교류했다. 조용하게 책 좋아하는 문학소녀, 문학소년들이 사실은 제일가는 광인들이라는 격언을 확인할 수 있는, 이상하지만 편안한 자리랄까.

그런데 이 독서모임은, 꼭 소설이나 인문학 책만 읽는 게 아니고 주식투자, 종교, 자기계발 등의 실용서적 읽는 분들도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고전연구회처럼 독서인들끼리의 편안한 분위기가 났다. 회원분들이 부담없을 정도의 친화력으로 챙겨주시고, 가벼운 수다도 떨면서 각자의 페이스로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책을 가져가서 일주일에 한두시간쯤 집중해서 읽기에 아주 좋은, 부담없는 자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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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전 배경 조사

이렇게 자율독서모임만 참석하다가, 처음으로 가보게 된 5월의 지정독서모임에서는 지정도서로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선정되었다.

지정 말고 자율독서 시간에는 사람들이 각자 가져온 재테크 책이나 종교책, 자기계발서 같은것도 딱히 읽는 데 제한이 없는데다,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논쟁은 피하는 분위기의 모임이다보니,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2020년대에 재호출된 이 책이 선정된 것은 조금 의외였다 (관리자님도 분란이 생길까봐 걱정이 많았다고 하셨다). 예컨대 4월 지정도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는데, 이 책도 이야깃거리는 많지만 현실 문제에 대해 논쟁이 발생할 지점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쯤부터 양귀자의 『모순』이 여러 곳에서 제목이 언급되고 꽤 인기를 끄는데도 그 명확한 계기를 알기 어려워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아래의 논문(조하린, 연남경, "'양귀자 현상'을 둘러싼 페미니스트 독자 행위성 연구," 이화어문논집 64 (2024).)을 보니, 『모순』과 『나는 소망한다~』가 트위터에서 플로우를 타면서 인기를 얻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더 선행하는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논문 외에도 최근의 이러한 '양귀자 현상'을 다룬 논문이 몇 건 더 있었는데, 책을 읽기 전에 영향을 받을까봐 논문들을 자세하게 읽지는 않았다.


이 책은 장르론적으로는 추리, 범죄소설에 가까운 점이 있는데다 출판 직후(1992년)에는 오히려 페미니즘의 탈을 쓴 반페미니즘적 통속 소설이라고 평가되는 경우도 많았다는데, 최근에 페미니즘 서적으로 재호출되고 해석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이 흥미로운 듯하다. 읽으며 이 지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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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서평




이 단락에서는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작성한 두서없는 소감을, 독서모임 사람들의 토론을 마친 뒤 조금 보강해서 써본다.

일단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원래 나는 소설책을 논픽션에 비해서도 특히 잘 못 읽는다. 일단 작가가 밀도높게 직조해놓은 인물과 세계에 dive in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내용이 100% 파악되지 않으면 페이지를 잘 못 넘기고 계속 앞으로 돌아가는 강박이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 책은 생각해볼 점이 많으면서도 아주 잘 읽혔다.

나는 주인공인 강민주가 세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무리하게 발신하려는 과정에서 파국이 일어날것으로 예상했는데, 정작 그 과정은 매우 스무스했고 세상 사람들도 여기에 호응해서 열광한 점이 일단 의외였다. 강민주의 이러한 메시지 발신과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딱히 자세히 묘사되지조차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다소 평면적인, 소설의 탈을 쓴 페미니즘 교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오히려 주요 인물들 위주의 군상극으로 진행된다.

파국이 일어나는 것은, 강민주가 뜻밖에도 인간적인 매력과 연민, 개인적 관계에 물들고 그의 계획이 실패해서이다. 그런 후반부는 어찌보면 다소간에 전형적인 흥미 위주의 추리소설 내지는 범죄소설, 혹은 결말에서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자극적이지만 그런만큼 전형적인) 장치를 통해 긴장을 폭발시키곤 하는 하나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저자 또한 희곡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후반부의 주요 소재 또한 연극이다. 그래서 소설의 볼륨이 후반부로 갈수록 확 좁혀지는 기분이다.

강민주는 매우 강한 자기확신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똑똑하고 돈도 많아서 그러한 자기확신에 근거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강민주의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 또한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비범함'일 것이다. 이 인물의 성장 배경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게 되는 앞부분이 독서 과정에서 사실 제일 재미있었다. 강민주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냉소적이지만은 않다. 뛰어난 취향과 안목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은 즐길 줄 아는 강인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바깥의 것들은 가차없이 깔보는 면이 있다.

강민주에 대한 내 '비범함'이라는 해석은 독서모임에서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나는 나 자신 및 나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마치 강민주처럼 자기가 똑똑하고 자기의 안목을 신뢰할 만하다는 확신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경우(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를 많이 봐 와서, 이런 캐릭터성이 다소 과장되었을지언정 충분히 내적 모순 없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강민주의 이런 태도를 매우 생소하고 비현실적이며,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강민주에게도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본연의 어떤 모습이 억압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백승하를 통해서 회복되는 과정이 소설의 주요 줄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강민주의 비범함이 아버지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겪으며 어머니에게 강하게 키워진 결과임을 감안할 때 이 또한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비범함'이라는 내 해석을 조금 더 끌고 가 보자면, 강민주가 백승하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발휘(아들을 만나게 하면서 단서를 남기는 것)하거나, 김인수를 끊어내지 못하고 전화에 응하는 장면 등은 독자에게는 백승하와의 관계에 물들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강민주 스스로에게는 이것조차 비범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비범함 덕분에 정당화된다.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고 실패할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돼. 그러나 독자가 볼 때 그러한 행위들이 결국에는 강민주가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데 구체적으로 기여하고있다.

이는 후반부에서 강민주의 동의 하에 ‘연극 속에서’ 백승하와 강민주의 권력관계가 역전되는 것과 겹쳐 보인다. 그리고 연극 속 권력관계 역전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결국 연극 바깥의 강민주가 실제 바깥 상황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발생하는 파국과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해석에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강민주의 계획이 (심지어 대중의 호응과 관심을 얻었음에도)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와 관련해서이다. 계획이 실패한 이유가 그저 그의 비범함이 어떤 억압의 결과로 형성된 허위의 것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적 형식에 따른 권력관계 때문일까?

이는 소설이 출간 당시에 페미니즘의 외양만을 취한 상업소설이라고 비판받았던 이유와 결정적으로 관련된다. 결국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흥미, 통속 위주의 스토리로 마무리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급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비판은 일리있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화자인 강민주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되는 여성주의 담론(작가의 문제의식 없이는 불가능한)을 보았을 때 페미니즘적 재해석의 가능성은 많아 보인다. 최근에 재조명받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강민주가 개인적 관계에 물들고 감정의 변화가 묘사되면서 통속소설과 같은 전개로 끝나는 것이, 당대에는 '폭력적, 혁명적인 해결방식은 결국 끝이 안 좋다', 혹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대로) 감정에 물드는 것이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이며 그걸 계속 거부하기는 어렵다' 식의 다소간에 기만적인 평화주의나 전통주의로 해석되어 첫 출판 당시에 반페미니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아래에서 자세히 쓰겠지만, 실제로 이번 독서모임의 토론자들 중에 꽤 많은 수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이 책의 결말이 찝찝하지 않고 해피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평화주의적 독해의 가능성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이, 현대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재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면도 있어 보인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얽히면서도, 조건지워진 사회적 형식을 급진적으로 극복하고 자기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최근에 재조명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한다.

심지어 강민주는 자신의 비범함을 바탕으로 백승하를 설득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꽤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백승하는 자신이 선망받는 남자배우로서 인기를 얻어온 바로 그 방식,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분야인 '연기'를 하자고 요구함으로써, 그토록 비범하고 자신감에 차 있던 강민주를 굴복시키고 본인이 상황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상술했듯이, 이것이 ‘감정에 의해 흔들리는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단순히 재현하면서 이 작품을 통속소설에 그치게 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당대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점도 이러한 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을 통해 젠더권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방식의 재해석도 가능해보인다.

내가 느끼기엔 백승하의 부드러움은 강민주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물리적인 폭력과 반대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남성의 젠더권력을 동원하는 또다른 방식일 수 있다. 백승하는 힘든 시간을 겪지만 결국은 하나도 잃은 게 없이 끝난다. 이것도, 전통적인 마초적 남성상과는 다른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인간적 연민에 호소해서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너무나도 모범적인(?) 내용의 인터뷰를 함으로써 또 인기 남배우로서 박수를 받게되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도 남성의 부드러움과 스윗함 역시 간접적인 형태의 젠더권력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켜주었다.

결국 백승하는 실제로 강민주를 만나서 생각이 바뀌기까지 했음에도 결국은 원래 인기를 얻은 그 방식으로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작중에서 여성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강민주의 설파에 생각보다 긍정적이고 열광적인 반응들이 있었고, 백승하 본인도 생각이 바뀐 부분이 많다는 점은 재미있는 상상의 여지들을 남긴다). 여성 입장에서 태도를 급진적으로 관철하는게 쉽지 않은 것만큼, 남성 입장에서도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권력관계의 극복을 실천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들을 들어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상당히 씁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서모임에서 이야기 나눈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이 소설은 비록 강민주가 범죄를 저질렀으니 좋게 끝나기는 애초에 어려웠지만, 본질적으로 강민주와 백승하가 서로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게 된 해피엔딩이고, 남녀 갈등을 다루는 것 같지만 사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갈등을 조율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작가의 말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긴 하다고 한다). 물론 내가 백승하의 스윗한 카리스마와 연극 연습 제안이 젠더권력을 동원하는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에 동의를 표해 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두 가지 독해가 정말 다르면서도 화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게 바로 90년대와 2020년대의 서로 다른 독해와도 겹쳐 있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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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0일 토요일

국민의힘의 한덕수 대선후보 기획 추대

국민의힘 지도부의 김문수 끌어내리기와 한덕수 추대는 정말 역대급 사태인듯하다. 5월 11일까지면 잘 쳐줘야 48시간인데, 그 사이에 대선후보를 새로 뽑겠다는 게... 당원들의 의견을 구하고 정당성 부여하는 최소한의 형식을 어떻게 하려는지?


아무리 그래도 대선후보라는 게 국가적 초 중대사인데, 거대 정당이 이렇게 인스턴트하게 이틀만에 대선후보를 뽑아서 올린다는 것은 당원뿐 아니라 국민 전체에 대한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 지도부는 어차피 후보는 김문수는 단일화 용이고 최종 후보가 한덕수인 걸로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틀만에 대선후보를 정한다는 게 일반 국민들 보기에 대체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밑에도 쓰겠지만 당 지도부가 이런식으로 무리하게 하는 배경에는 이미 파면된 대통령(실)과의 교감이 있다는 설도 있다.


한덕수 총리는 비상계엄은 정말로 몰랐던 것 같지만, 알게 된 이후에 국정 2인자로서 그걸 저지하지 못한, 원론적 무한책임 이상의 구체적 책임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비상계엄 선포 및 해제 이후 국민들이 너무나 불안해하는 살얼음 같은 시국에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으면서 헌법질서를 (소극적으로가 아닌) 적극적으로 해치고 내란수괴를 사실상 돕는 행보를 보인 잘못이 너무 크다. 대선 관리와 외교 유지를 해야 할 책임을 던지고 대선후보로 나온 것 자체도 문제가 많다. 흔히 생각하는 관료적 성정은 아니어서 대단히 깜짝 놀랐다. 내 생각에, 관료적 보신주의는 흔히 절제심과 관련지어 이해되지만 사실 그 본성은 기회주의에 더 강하게 닿아 있고, 승진을 거쳐서 더 올라갈 데가 없어질 때에, 혹은 위기를 마주할 때에 그 기회주의적 면모가 본색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한다.


물론 김문수는 정당하게 선출된 후보긴 하지만 그 역시 비판받을 점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물론 전설적 노동운동가의 아우라가 이번 이번 국면에서의 곤조와 겹쳐 보이면서 밈적으로(?) 응원하게 되기도 했지만, 사실 김문수는 전광훈을 위시한 기독교 극우에 합세했을 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한 번 갔기도 하고, 지금도 극우기독교와의 결탁을 숨기지도 끊지도 않고 공개적으로 계속하고 있다. 또한 그 역시 비상계엄 자체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긴 하지만 그 이후에 계엄에 은근히 정당성을 부여하고 탄핵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잘못이 너무 크다. 혹시 당권을 먹게 된다면 망해가는 당의 일이라고 팝콘 먹으며 지켜볼 일이 절대로 아니고, 윤석열이 깔아 준 극우의 고속도로에서 본격 21세기형 극우정당이 등장하는 셈이 되며, 이는 국가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여파로 돌아올것이다.


반 년간 너무 엄중한 시국을 지나왔고, 법조엘리트들과 검찰 출신 정치인들의 지속적인 윤석열 봐주기와 이재명 때리기가 어느 정도는 의심되는 상황이다. 물론 나는 이게 모두가 결탁한 큰 그림이라기보다는 서로 공을 떠넘기다 보니 전반적으로 떠오르는 모습일 거라는 생각은 든다. 애초에 낙선자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이 열리는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도 하기는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목적이 아주 명확한 여러 무리한 법안을 내고 있는데, 지금의 분위기는 마치 문재인 정권 최후반에 검찰 손발 자르는 법률을 집중적으로 통과시킨 것, 아니 그 이상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 최후반과 달리 지금은 민주당이 정권을 곧 잃는 입장이 아니라 곧 얻을 것이 유력한 상황이고, 만약 정권이 넘어간 후에도 이러한 관성이 계속된다면 (비상계엄 선포에 비할 바겠냐만) 법질서의 형해화와 그 장기적 영향이 지극히 우려되는 것 또한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지금 시국이 극우 유튜브와 부정선거 음모론에 경도된 윤석열 개인의 심각하게 일탈적이고 망상적인 조치에서 결정적으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크게 보면 검찰과 민주당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6공화국 통치구조 내부의 심각한 권력투쟁이라는 긴 터널을 우리가 2019년부터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생각도 든다. 온갖 기괴한 실정을 저지른 윤석열 정권과 그 하에서 극우로 치달은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민주당에 대한 내 감정도, 2024년 12월 딱 한 달 가량을 제외하면 든든함보다는 대체로 걱정스러움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산업구조 혁신 및 국민 생애주기설계의 총체적 실패와 인구 급감 때문에 이미 예정되어있는, 그 어떤 나라도 겪은 적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한시라도 빨리 논의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우리나라의 여러 중대사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재명 선대위에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역시나 문제가 많은 경제참모들이 포진하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30% 내외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지지하고 있는 국민의힘이라는 제2정당이 이정도로 지리멸렬하고 이기적인 모습,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한덕수를 후보로 만들려는 모습(원래 선출된 후보가 극우개신교 부역자이자 내란수괴 탄핵 반대자 김문수인 것부터도 내용적으로 당의 민주역량의 실패지만)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신나게 팝콘을 뜯을 일만은 아닌듯하다.

하루하루가 웬만한 영화보다도 무척 박진감 있게 돌아가는 만큼, 잠시 걱정을 접어두고 이 사태의 전개 자체를 즐기는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표명은 긍정적인 것이고 존중되어야 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러나 그 귀결은 한국 정치문화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져야 하며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한덕수는 국민이 불러냈다기보다는 철저히 국힘 지도부에 의해 기획되어 추대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위에도 썼지만 그 기획의 과정에서 대통령실 사람들, 심지어 윤석열 본인과의 교감이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를 감안하면 더욱 더 그렇다. 한국 정치에 더 큰 어둠을 드리우는 일이고 철저히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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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4일 금요일

윤석열 파면 이후: 헌정질서 복원, 정치문화 복원 그리고 사회체질 개혁

위헌 위법적 비상계엄을 일으킨 대통령의 임기가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따라 조기에 종료되게 되었다. 다행스럽긴 해도, 기쁘기는커녕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비상계엄선포와 그 이후의 행보가 사회에 남긴 상처와 분열이 너무 크다.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헌 사항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아서, 탄핵소추와 파면에 이르는 상황 자체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오늘의 선고내용과 결과는 상당히 늦어지기는 했지만 순리와 상식에 부합하며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이러한 오늘이 있을 수 있도록 12월 3일 그날 밤 빠르게 국회에 나가서 비상계엄 해제에 일조한 국민과 국회의원 및 보좌진들에게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느낀다. 위헌 위법적 조치에 대한 국방장관과 일부 군 수뇌부의 동조에도 불구하고, 40여년 전 광주와 달리 더욱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지 않게 한 군경들의 민주의식도 분명히 평가되어야 한다.


그 이후의 정치적 상황 또한 대체로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 내에서 진행되어 사회의 민주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혼란상 속에서 헌정질서를 정면으로 해치는 일도 몇 사람이 마음먹으면 그냥 일어날 수 있구나, 그런 발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구나 하는 국민들의 집단경험은 대의제 권력기구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켰다. 이러한 부정적 집단경험이, 추가적인 혼란보다는 앞으로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지에 대한 지혜로 연결되었으면 한다.


먼저 확실한 책임의 추궁을 통해 헌정질서를 복원하고, 그 다음으로는 여야 할것없이 정치문화를 복원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인구감소와 성장동력 상실 등으로 예정된 어두운 미래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며 사회체질을 개혁해야 할테다.


파면 결정 후 찾아간 겐로쿠우동 홍대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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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6일 수요일

플로우(2024) 감상평

애니메이션 영화 플로우(2024)를 보러 강남역 CGV에 갔다.



귀여운 까만 고양이와, 내가 인터넷에서 알게 된 우아한 조류인 뱀잡이수리가 등장한다고 해서 기대하면서 봤다. 대사가 없는 영화인데, 하필 전날 세네 시간밖에 못 자는 바람에 틀림없이 보다가 졸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대사가 아예 없는데도 꽤나 박진감 있어서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냉혹하고 강대한 자연의 현실적인 느낌과, 뭐라 설명하기 힘든 환상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두 가지 느낌 모두 이 영화에 아주 조리있는 줄거리나, 배경이나 사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없다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터전을 제공하지만 이유없는 파괴를 일으키기도 하는, 소중하고도 두려운 존재이다. 설령 인간의 직간접적 개입을 비롯한 어떤 메커니즘이 제시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자연화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바로 내게 그런 일이 그런 순서와 규모로 일어나야만 하는 합리적 이유는 없다.

이처럼 작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흐름들 또한, 어떠한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농도짙게 디자인되었다기보다는 실제 자연이 행동하는 방식처럼 다소 두서없이 일어난다.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배경과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거의 대부분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만, 그 규모가 장대하게 표현이 되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더한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조금씩 의도를 견주어 보며 상황에 따라 협력하고, 그렇지만 때로는 미련없이 헤어지거나 냉정하게 공격하기도 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유지하는 동물들 특유의 관계맺음 방식도 무척 인상깊었다. 대사가 없어서 이런 점이 더욱 잘 표현된 것 같다. 유튜브에 뜨는 동물 영상들이나, 대사가 전혀 없는 일부 실험적인 공연예술에서도 짧지만 이러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이 영화에 기묘한 포근함을 부여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너무 피곤하게 서로 지지고 볶는 것보다는 이와 같은 담백한 관계가 좋아 보이기는 하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또한 인간으로서의 해석일 테니까 말이다.

이런 점들과 어울리게도,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동물들의 행동 역시, 어떤 상징성을 아주 농도짙게 가져가거나 고정된 메시지를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신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사건들에 대응하면서 뭉치고 흩어지는 귀여운 동물들의 모험을 보며, 삶과 존재에 대해 각자 열린 생각을 가지고 서로 나눌 뿐이다.

아트워크도 무척 아름답고 분위기도 몰입감 있어서 하루가 넘게 지났는데도 인상에 퍽 오래 남는다. 주변에 많이 추천해서 함께 소감을 나누고 싶은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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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4일 월요일

상황적 우연에 따른 언어이해의 오류는 인간, 언어, 세계 사이의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다

'황망하다'는 말은 슬프다기보다는 정신없다는 뜻인데, 장례식을 치르는 상주들이 보통 '혜량해 달라'라는 말과 함께 주로 이 황망하다는 말로 소식을 전하다 보니, 슬프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서 종종 그렇게 쓰이는 것 같다.

이 얘기를 함께 나누던 다른 분의 보충적 의견에 따르면, '허망하다' 등의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다 보니 여기에 이끌려서 더 그런 점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단순한 어감, 몇 가지 상황적 우연, 다른 단어 및 형태소들과의 유사성 등이 겹쳐서 단어의 뜻이 사전적인 것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이 나는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 같다(나는 이런 것을 '이끌린다'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이런 언어 현상들 관련해서 위키 등에서 많이 본 표현이라서 그런 듯). 의미와 기표는 서로 별개의 층위인데, 실제로 언어가 구사될 때는 언어들간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나, 세계의 필연적 구조의 영향 하에 그 층위를 활발하게 넘나들면서 다채로운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연과 혼동에 의해 쓰임이 변화하더라도 언어정책은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와 정확한 어법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등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현상들은 세계와 인간의 지극히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므로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황망하다'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얘기했던 또다른 예시로는 '억하심정'이 있다. 사전적으로 보면 억하심정은 사람의 마음 중에서 꾹 눌러 놓고 겉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속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 중에서는 부정적이고 억울한 마음이 아무래도 많게 되어 있다 보니, 억울하고 한이 맺혔다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용하는 듯하다. 물론 사전적인 뜻대로, 꼭 한이 맺힌 느낌이 아니라도 뭔가 음침한 속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것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 것 같기는 하다.

또한, 답답하고 북받친다는 의미의 '억하다'라는 단어가 존재하므로 '억한 심정'이라는 표현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런 표현과도 상호작용하는 것 같다. 다만 '억하다'라는 말이 '억한 심정' 외에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억하심정' 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덕분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예컨대 억하심정이라는 말이 머리속에 떠오르긴 했는데 그게 알맞지 않은 쓰임새임을 인지하고 있어서 바로 수정할 때) '억한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위 내용과 약간 관련될 수도 있는, 2017년경 별다른 목적 없이 간단히 작성해 본 글을 하나 첨부한다 (아래에 임베드). 여기에서는 언어로부터 우연하게 유발되는 감각인상(편의상 '언감 현상'이라고 칭함)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님에도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인식 구조상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언감 현상은 감각과 의미가 직접 맞닿아 상호작용하므로 아주 세련된 예술적 계기까지는 아니지만 주관적 보편성을 가지므로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위키위키 류 사이트 이용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떡밥 중에 하나인 Bouba-Kiki 효과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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