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춘만의 사진과 이영준의 글을 엮은 「조춘만의 중공업」에서는 거대한 괴물 같은 기계들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경외감에 대해 잘 해설해 주고 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한 경외감을 꽤 강하게 가지고 그 정체를 해명할 필요성을 느껴 왔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조적이고 감상적인 미의식에만 머무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 왔기 때문에 '기계비평가' 이영준의 다른 글들도 방학 동안 읽어 보려 한다.
기계는 가히 근대의 신이라고 할 만하다. 엄청난 밀도와 힘을 가진 강철 괴물들로부터 느껴지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경외감은 적어도 내게는 중세의 신 이상으로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신은 태초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은 그 기계들 속에서 살며 일하고 다친다.
중공업 사진이 산업화 이념의 프로파간다로서 사람들을 '눈멀게' 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애호에 기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를 '보도록' 하는 조춘만·이영준의 기획은 분명히 의미 있는 전환이다. 그러나 기계의 시각적인 숭고와 경외감에 집중할 때, 힘차고 긍정적인 노동자를 강조한 70-80년대의 프로파간다와는 정반대의, '음각적인' 방법으로 진실이 다시 한 번 배제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다.
나는 공학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관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기계들을 보는, '보기만 하는' 나의 태도가 객관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타인을 설득 가능한 '학문'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영준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비평적' 태도로 쓴 글은 그래서 내게 매우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말한 점 때문에 기계에 대해 조금 더 통합적인 관점을 추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극히 일부만 여기에 소개해 본다.
"여기서 중심적인 가치는 '애호'이다. 국가에 중요하거나 근대화의 상징이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다는 것, 내 눈에 저 괴물이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국가 발전이나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사소해 보인다. 국가나 근대화가 작은 개인인 '나'보다 훨씬 크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1970, 80년대의 중공업을 이용한 프로파간다는 '보게' 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릇된 국가관에 눈멀게 하는 이미지였을 뿐이다. 이제 조춘만은 우리로 하여금 괴물을 보게 해준다. '애호'라는 가치에 기초해서 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19p.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19p.
"기계비평적 관심이란 물질계의 속을 들여다보고 어떤 얼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모든 사람은 바삐 역을 빠져나와 제 갈 길을 간다. KTX를 다 소비했으니 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사람들이 다 내린 KTX가 그 다음에는 어디를 가느냐가 궁금하다. KTX는 계속 달려서 경기도 고양에 있는 행신차량기지로 간다. 거기서 검수도 받고 편성도 바꾸고 한다. 거기서는 KTX 차량을 들어 올려서 차체와 대차를 분리해낸다. 그러고는 차륜을 따로 떼어내 검사고 하고 필요하다면 절삭하기도 하고 너무 낡았으면 교체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KTX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가 실행된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그런 얼개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물의 외관에 만족하지 않고 속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해부학적 관심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1p.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1p.
"(전략) 지나친 밀도가 일상을 파고들면 짜증이 난다. 버스나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일상의 스케일을 초과한 거대한 밀도를 보다 보면 미적인 쾌감이 생긴다. 그것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조춘만은 밀도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밀도를 뿜어내는 괴물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선원근법을 벗어난 사진 속에서 조춘만이 해내는 것은 우리를 산업의 밀도에 훈련시키는 것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5p.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5p.
"(전략) 우리를 위해 있는 생산에 우리가 참견할 수도 없고 우리들 삶의 과정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생산의 소외다. 조춘만의 사진은 소외 너머에 있는 바로 그 생산을 보여준다. 그것은 소비자인 우리들에게 우리 존재의 기초인 사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향은 푸근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살벌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외돼 있던 생산의 풍경이 당장 푸근하게 다가올 거라고 기대하면 그것도 지나친 것 아닌가?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듯이, 우리는 생산의 고향을 만나고서도 정작 반가워하지 않는다. 조춘만은 기계 사물의 이미지를 억지로 미화하여 고향으로 꾸미지 않는다. 산업의 밀도를 우리들 앞에 던져놓을 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7p.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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