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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3일 토요일

사진집 「조춘만의 중공업」 - 서평

  조춘만의 사진과 이영준의 글을 엮은 「조춘만의 중공업」에서는 거대한 괴물 같은 기계들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경외감에 대해 잘 해설해 주고 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한 경외감을 꽤 강하게 가지고 그 정체를 해명할 필요성을 느껴 왔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조적이고 감상적인 미의식에만 머무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 왔기 때문에 '기계비평가' 이영준의 다른 글들도 방학 동안 읽어 보려 한다.

  기계는 가히 근대의 신이라고 할 만하다. 엄청난 밀도와 힘을 가진 강철 괴물들로부터 느껴지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경외감은 적어도 내게는 중세의 신 이상으로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신은 태초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은 그 기계들 속에서 살며 일하고 다친다.

  중공업 사진이 산업화 이념의 프로파간다로서 사람들을 '눈멀게' 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애호에 기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를 '보도록' 하는 조춘만·이영준의 기획은 분명히 의미 있는 전환이다. 그러나 기계의 시각적인 숭고와 경외감에 집중할 때, 힘차고 긍정적인 노동자를 강조한 70-80년대의 프로파간다와는 정반대의, '음각적인' 방법으로 진실이 다시 한 번 배제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다.

  나는 공학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관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기계들을 보는, '보기만 하는' 나의 태도가 객관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타인을 설득 가능한 '학문'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영준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비평적' 태도로 쓴 글은 그래서 내게 매우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말한 점 때문에 기계에 대해 조금 더 통합적인 관점을 추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극히 일부만 여기에 소개해 본다.

"여기서 중심적인 가치는 '애호'이다. 국가에 중요하거나 근대화의 상징이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다는 것, 내 눈에 저 괴물이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국가 발전이나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사소해 보인다. 국가나 근대화가 작은 개인인 '나'보다 훨씬 크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1970, 80년대의 중공업을 이용한 프로파간다는 '보게' 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릇된 국가관에 눈멀게 하는 이미지였을 뿐이다. 이제 조춘만은 우리로 하여금 괴물을 보게 해준다. '애호'라는 가치에 기초해서 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19p.

"기계비평적 관심이란 물질계의 속을 들여다보고 어떤 얼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모든 사람은 바삐 역을 빠져나와 제 갈 길을 간다. KTX를 다 소비했으니 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사람들이 다 내린 KTX가 그 다음에는 어디를 가느냐가 궁금하다. KTX는 계속 달려서 경기도 고양에 있는 행신차량기지로 간다. 거기서 검수도 받고 편성도 바꾸고 한다. 거기서는 KTX 차량을 들어 올려서 차체와 대차를 분리해낸다. 그러고는 차륜을 따로 떼어내 검사고 하고 필요하다면 절삭하기도 하고 너무 낡았으면 교체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KTX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가 실행된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그런 얼개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물의 외관에 만족하지 않고 속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해부학적 관심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1p.

"(전략) 지나친 밀도가 일상을 파고들면 짜증이 난다. 버스나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일상의 스케일을 초과한 거대한 밀도를 보다 보면 미적인 쾌감이 생긴다. 그것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조춘만은 밀도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밀도를 뿜어내는 괴물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선원근법을 벗어난 사진 속에서 조춘만이 해내는 것은 우리를 산업의 밀도에 훈련시키는 것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5p.

"(전략) 우리를 위해 있는 생산에 우리가 참견할 수도 없고 우리들 삶의 과정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생산의 소외다. 조춘만의 사진은 소외 너머에 있는 바로 그 생산을 보여준다. 그것은 소비자인 우리들에게 우리 존재의 기초인 사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향은 푸근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살벌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외돼 있던 생산의 풍경이 당장 푸근하게 다가올 거라고 기대하면 그것도 지나친 것 아닌가?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듯이, 우리는 생산의 고향을 만나고서도 정작 반가워하지 않는다. 조춘만은 기계 사물의 이미지를 억지로 미화하여 고향으로 꾸미지 않는다. 산업의 밀도를 우리들 앞에 던져놓을 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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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화요일

'좋은 경험'이라고? 우리의 일상적 고통을 소비하지 말라

  심신의 고통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 '고통받는 느낌'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가난한 동네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며 관광지처럼 돌아다니거나, 정신질환에 대해 로망을 갖고(?) 현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결여된 채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유형화하여 특별한 것인 양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는 분노와 모멸감을 부르기 충분하다.

  비슷한 이유로, 힘든 생활도 한번쯤 겪어 보는 게 좋다면서 사서 고생하기를 종용하는 세태 역시 싫어한다. 자신의 실제 삶을 그 바깥에 두고 있는 자만이 일회적인 체험으로서의 고생을 공적으로 권유한다. 어쩐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가 예전같지 않게 되면서 학술이나 사회참여 등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가 붕괴하고 실제로 대학생들이 모여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그놈의 "좋은 경험"을 추구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한다.

  누군가에게 이것들은 한낱 현학적 유희거리이거나, 동정의 대상이거나 혹은 인생에서 한 번쯤 해 보면 좋은 경험 정도일 것이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매일 아침마다 맞이하는, 구체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 달동네가 포토존? 그곳 주민은 입을 닫았다 (2015.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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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월요일

랜선진단: 세 가지 장면

[ 링크: [특파원 리포트] 미 트럼프 대통령 "정신 질환" 논쟁 (2017.02.21) ]

<랜선진단: 세 가지 장면>

첫 번째 장면. 한 전직 심리학과 교수가 김연아 선수, 박근혜 대통령 등의 유명인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여 간혹 논란이 되곤 했다. 그는 김연아 선수와 박근혜 대통령 등을 대상으로 ‘기분 조절이 안 된다’, ‘주위 사람과 어려움을 겪게 되고 정신병을 호소할 수 있다’, ‘ 정신연령 17세 수준’과 같이 심리학에 대한 본인의 전문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발언들을 이어 나갔다. 이런 발언들의 여파에 따른 김연아 선수와의 공방 등이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공방 중에 그의 대응은 상당히 감정적이었으며, 어디까지가 전문성의 영역이며 어디부터가 김연아 선수에 대한 공격인지 그 경계를 스스로 흐렸다는 점에서 일단 비판의 소지가 명백하다. 그런데, 마치 ‘진단’처럼 보이는 그러한 발언들은, 과연 전문성의 영역에 속해 있기는 한 것일까? 비록 그의 전문 분야가 심리학 중에서도 온라인 게임세계 연구, 정치인 이미지 연구 등 매체라는 주제와 관련이 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특정 유명인에 대한 ‘진단’의 성격이 강한 발언이 과연 적절할지에 대해 사실적 정당성, 윤리적 정당성의 (서로 연결된) 두 측면에서 비판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장면. 미국 대선 기간부터 트럼프 당선 이후 현재까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종의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갖추어야 하는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국가안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소견’이고 어떤 것이 정치적 공격인지는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소견’처럼 보이는 발언들이 의학적으로 유의미한지조차 밝혀진 바 없다. 대면한 채 진행되는 여러 검사가 없었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는 분석이 있으며, 오히려 검진과 같은 통제된 상황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을 볼 때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검진 상황, 일상적 상황, 그리고 미디어 앞에 섰을 때의 상황은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설령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이뤄졌다고 할지라도, 그 분석 결과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서 공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이 가지고 있는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세 번째 장면. 과거 <무한도전>에 출연해서 한 출연자의 정신적 위험을 예견해서 화제가 되었던(실제로 해당 출연자는 공황장애로 방송을 중단했다) 한 정신과 의사가 트위터 상의 설전으로 연일 화제를 낳고 있는 배우 유아인에 대해서 정신적으로 위험하다며 여러 가지 전문 용어를 거론하면서 우려를 표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 호응하며 유아인을 한편으로는 희화화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위 사례들과 같이 어떤 인물의 TV, SNS 등 미디어에 비추어진 모습을 바탕으로 심리학자나 의사가 그 인물에 대한 정신의학적 ‘소견’처럼 보이는 발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잊을 만하면 화제가 되는 이러한 '랜선진단'들의 사실적, 윤리적 정당성은 전문가와 대중의 관계 문제까지 엮여서 꽤 중요한 문제이고, 그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링크된 기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길잡이로서 꽤나 탁월하다.

  과연 진단이 가능하긴 한지에 대한 사실적 정당성의 문제에 더하여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 역시 중요하게 제기된다. 이러한 발언들이 전문 지식을 갖춘 심리학자 혹은 의사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획득하고 대중에 소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들은 타겟이 된 인물에 대한 대중적인 낙인을 일으키며, 정신질환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한다.

  종합하자면, 위의 사례들과 같이 의사가 특정 인물에 대해 퍼블릭하게 진단명을 휘두르는 것은 왜곡된 전문가주의를 강화할 공산이 크므로 오히려 전문성의 부족으로 보인다. 대중이 그 진단명들을 신뢰하면서 그 진단명들을 바탕으로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을 비판하고, 유아인의 트위터 설전을 희화화하는 것은 과연 정신병자라는 단어를 욕설로 사용하는 것과 얼마나 구분될 수 있을는가.

“핵무기 사용을 결정할, 미국 대통령의 정신적 건강 여부는 자체로도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렌 프란세스의 지적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이런 논란이 가중돼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정치적 해법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기사 원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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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일 토요일

애호박 게이트

애호박 게이트에 대한 생각. 서론이 길다.

  페미니즘은 균질한 움직임이 아니며,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이론적, 실천적 방법론들이다. 그들은 당연히 완벽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들은 때에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 상에서 최근 유행하는 화법 및 운동의 양상에 대해 과격하다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에 어느 정도는 동감하기도 한다(나는 메갈리아가 미러링 등으로 화제가 되면서 언어라는 무기를 획득한 ‘직후’에 조금 더 기민하게 새로운 전략으로 이행하여 운동의 형태로 끌고 갔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유아인을 포함한 유명인의 발화에 대한 단순 비판을 넘은 직접적 인격모독에 반대한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 문제점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주장,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하라’ 내지는 ‘페미니즘이 아닌 진정한 성 평등주의를 하라’는 주장 등은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에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대안적 이론을 만들고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면, 그것 역시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안을 정립하려는 그런 시도들은 주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방향보다는 단순하게 페미니즘의 이름을 부정하는 시도로 실현되어 왔고, 따라서 성평등 담론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방향이 아닌 반동적인 방향으로 실현되어 왔다. 따라서 학문의 계보 상에서 소위 이퀄리즘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사상이 실제로 차지하는 위치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평등 속에 부분집합으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일 사상이 덩그마니 있고 나머지 부분에 ‘진짜 페미니즘’, ‘이퀄리즘’의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식의 세계관은 이퀄리스트들의 대안적 도식일 뿐이다. 성평등이라는 큰 목적의식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길이 페미니즘이며 그 속에서 전략적, 윤리적으로 잘못된 선택들이 있을 수 있다는 모델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그 선택들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로서 운동의 방식과 전략에 대한 내부 비판을 하고자 할 때, 그러한 비판이 여성혐오적 반동의 득세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내부 비판 글을 공유해 가서 “이런 문제들이 있지. 역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야!” 하고 넌씨눈 코멘트 달아 놓은 것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꽤나 강력하게 먹히는 듯 보인다.

  이것을 막으려면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신뢰를 확보하고,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당신들 편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내부 비판을 하면서도 안티페미니즘에 힘이 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특정 조류들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성평등을 향한 인식과 실천을 분명하게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다 보면 그 비판을 지극히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하게 되며, 해당 발화와는 별개로 평소에 각종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 왔을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의무감은 페미니스트에게 거의 ‘본능적’인 것이며, 지극히 페미니즘적인 실천이다.

  애호박 게이트 초반에 유아인은 분명히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예의 페미니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선긋기를 시도하기는커녕 ‘메퇘지’ 등의 단어까지 사용해 가면서 그는 한때 그를 군 면제자라고 극렬하게 비난하던, 그리고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극렬히 외치던 남성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더욱 커진 그들로부터 그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있다. 설령 그가 실제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페미니즘에 대해 이보다 큰 실례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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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히오스로 보는 디지털 매체철학: 요약과 소개

- 인간은 기호적 존재이므로 매체 속 가상을 실재와 다름없이 소비한다.

- 매체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성장함으로써 세계를 확장시킨다.

- 디지털 매체는 서로 다른 전통매체들로부터 온 컨텐츠들의 질적 차이를 지우고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다.
- 따라서 디지털 매체 속에서는 서사성이 약해지고, 컨텐츠들은 본래의 서사에서 벗어나 탈맥락적으로 조합된다.

- 디지털 매체에서의 이와 같은 서사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서사가 매번 자유롭게 재창조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게임성'과 직결된다.
- 히오스에서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시공의 폭풍으로 빨려들어가, 그의 본래 배경과는 관련없이 탈맥락적으로 등장한다. 서사가 붕괴된 그 공간에서 그들은 영원히 전투를 벌이며 매번 새로운 서사를 창조한다.
- 이런 면에서 시공의 폭풍은 현대 매체에 의해 실현된 '게임성'의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며, 히오스는 '게임에 대한 게임', '게임 중의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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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6개월: 지지와 비판 그리고 촛불정신

  물론 문재인 정부가 소위 촛불정신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반영한다면 좋은 일일 것이며, 나 역시 그러길 바란다. 70퍼센트대의 지지율을 가진 정부와, 대선 당시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역량을 보여준 민주당이 그 능력을 좋은 데 활용해서 바람직한 방향의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을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그 촛불 정신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허지웅 평론가가 문재인 정부가 '혁명 정부'라는 특수성을 가지므로 정부의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서사적 미의식을 정치영역에 투사해서 나온 부당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로 표출된 강력한 여론에 의해 뒷받침된 일련의 정교한 민주적 절차에 따른 박근혜의 탄핵은 그 정치사적 의미가 대단히 크다. 촛불을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으로 귀속시키지 말고 개별 정부를 초월해 있는 무엇으로 보되(한국의 민주주의 환경을 볼 때, 촛불 개념을 이렇게 잡는 건 토템 같은게 아니라 나름 실체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그 정신의 실현을 위해 잘 노력하고 성과도 거두고 했다는 식으로 회자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오히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제일 좋은 그림일 것이다. 실제로 촛불에 대한 청와대의 오피셜한 인식도 오히려 이 쪽에 가깝다. 진보세력에게 '촛불 도둑'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비난하는 일부 지지자들과는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좋은 그림을 위해서는 강성 지지자들이 좀더 비판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비판은 실패를 바라고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사전적 의미로도 그렇다. 지금보다는 지지자들이 좀 더 수용적이어야 한다. 정권 힘빼기를 위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터놓고 따져 보자는 취지의 비판이라면 말이다. 물론 본래 취지는 후자였는데도 전자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일을 적확하게 견제하는 게 바로 지지자의 역할이다. 그리고 적절한 비판은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야 진짜 발목잡기식의 비난을 효과적으로 걸러낼 수 있다. 지지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잘못된 부분, 여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빠르게 개선하여 좋은 정부로 남아야 할 것 아닌가.

  진보진영과의 반목,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 그리고 정점을 찍은 MB정권의 망신주기 등에 따른 노무현 트라우마를 이해하며, 나부터가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정서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언급하며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막는 것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끄러운 비탈길의 오류이다. 나도 이런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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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일 일요일

과학기술 이슈에서 시민참여적 민주주의의 가능조건: 원전 공론화위를 둘러싼 최근의 잡음과 관련하여

[ "사실왜곡" 신고리 건설재개측 반발...흔들리는 공론화 (2017.09.30) ]

  신고리원전 5, 6호기 건설 여부를 논의하는 공론화위원회에서 원전 관련 정부출연기관 전문가를 배제할 것을 건설 반대 측이 요청했다고 한다. 사실왜곡이라고 수 차례 지적된 건설 중단 측의 자료가 시민참여단을 위한 자료집에 결국 수정 없이 그대로 수록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너무나 답답하다. 500여명의 시민참여단이 내린 결론이 건설 여부 결정으로 직접 이어지게 되므로 신중하게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텐데, 그 출발이 될 자료집 제작 단계부터 건설 중단 측의 위와 같은 행동이 드러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후쿠시마 사태 및 MB정부 원전 비리 등을 통해 쌓인 원자력에 대한 불신의 벽의 존재를 납득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며, 그러한 불신을 타파하고자 하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러한 노력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원자력 종사자 전체를 마피아라고 취급할 정도의 거대한 불신을 그저 '자연스러운 일', 심지어 '원자력계의 업보'라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나이브하다. 건설 반대 측에서는 자료의 기본적인 사실왜곡에 대한 지적을 수용하지 않고 공론화 자료집에 그대로 수록하기까지 하는데, 정작 원자력 분야 종사자는 세부 영역에 무관하게 소위 '핵피아'로 취급되면서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말살당하는 것은 명백하게 부당하다. 이러한 분위기가 탈핵 진영에 의해 조장된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원전 관련 고위직에 있으면서 큰 금전적 이득을 취할 가능성을 발견하고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넘어서서, 과학기술, 에너지정책, 산업정책 등 각 영역의 원자력 전문가 전체에 대해 탈핵 진영에서 ‘핵피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낙인을 찍고, 심지어 공론화위에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을 제외하라는 당황스러운 요구까지 하는 것은, 건설 중단 쪽에 당위가 있다고 강력하게 전제하고, 따라서 혹시라도 건설이 재개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건설 재개 측이 뭔가 발언권을 얻는 것 자체를 큰 위협으로 여겨서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원자력 관련 종사자, 특히 과학기술 쪽에서 연구해온 원자력 공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문제를 은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원전과 방폐장이 가질 수 있는 잠재적 리스크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공학적인 관점에서 원전과 방폐장의 안전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제적인 연구 성과를 발표해 온 경우가 많다. 현대의 정밀 공학에 대해 흔히 갖는 오해와는 달리, 리스크가 없는 시스템은 없다. 그러나 - 역시 오해와는 달리 - 이러한 리스크를 예측 가능한 범주에 넣고자 하는 작업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건설 반대 측이 이러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들을 공론화위에서 배제하도록 요청하고, 왜곡된 내용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자료집에 수록한 등의 일련의 행동은, 물리적 세계에 실재하면서 작동하고 있는 원전이라는 공학적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접근 시도를 차단하고, 나아가 그러한 과학기술적 영역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며, 오로지 사회적 맥락에서 사람들의 관념상에 존재하는 ‘정책적 대상’으로서의 원전에 대한 논의만으로 공론화를 매듭짓고 결론을 도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지극히 우려된다.

  잘 조직된 시민사회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정치참여가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시민주의자이자 일종의 진보주의적 공동체주의자로서, 신고리원전 건설 여부를 공론화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시민참여적 민주주의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참여적인 공론장은 논의에 있어 적절한 근거를 선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첫째로는 학술적인 사실관계, 경제적인 효율성 등을 판단하는 ‘목적합리성’, 둘째로는 담론의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을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런데, 공론화위에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을 배제한 것은 학술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검토가 차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목적합리성을 결여한 조치이며, 특정 집단의 담론 참여가 부당하게 제한된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역시 결여하고 있다. 시민참여단을 위한 자료집에 건설 반대 측의 왜곡된 자료가 수록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관계 측면에서의 목적합리성과, 담론의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 차원에서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시민참여적 숙의민주주의가 본래의 이상대로 잘 이루어져야 할 텐데, 이 두 가지 사항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이번 공론화가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하고 모범적인 사례로 남는 것을 에너지 정책의 차원과 민주주의의 차원 양쪽 모두에서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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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8일 월요일

누구를 위한 인권센터인가 - 인권 개념의 기만적인 활용을 규탄한다!

  총학 산하기구인 학소위가 SNU 인권주간에서 '교수-학생간 권력관계에 의한 인권침해'를 다루려는 기획안을 제출하였는데, 인권주간을 주관하는 인권센터에서 '교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 및 명예훼손'의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지적하다가 결국은 일방적으로 학소위를 인권주간에서 퇴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건을 접하고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개인 자격으로 자보를 작성하였습니다.
  본 건과 관련한 보다 자세한 경위는 다음에 링크된 <학소위 인권주간 배제 통보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snuhumanrightscouncil/posts/1440346112715026

  이하는 자보 내용입니다. 이미지 파일로도 첨부합니다.

이미지: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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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인권센터인가
- 인권 개념의 기만적인 활용을 비판한다 -

  최근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에서 주관하는 ‘인권주간’ 행사의 기획단으로 참여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이하 ‘학소위’)가 인권주간에서의 퇴출을 통보받는 일이 있었다. 학소위가 인권센터 측에 송부하고 학내 구성원에게 공개한 질의서에 따르면, ‘교수-학생간 권력관계에 의한 인권침해’를 다루겠다는 학소위의 기획안을 ‘교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을 이유로 인권센터가 반복적으로 문제 삼았고, 학소위 측에서는 인권센터에 협조적인 기조를 유지하며 이러한 피드백을 최대한 반영하였으나, 결국은 모호한 설명만을 동반한 퇴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인권센터는 교수-학생간 인권침해의 문제가 가시화되어 실질적으로 해결되고, 예방 및 재발 방지를 위한 담론 및 제도적 장치가 효과적으로 형성되도록 관리하고 지원할 책임이 있다. 교수-학생간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학소위의 관심을 ‘교수의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으로 반복적으로 규정한 인권센터의 인식을 개탄한다. 오히려 그러한 관심은 교수가 학생을 인격체로, 학생들이 교수를 스승으로 존중함으로써 학교 구성원 간의 신뢰를 형성하고, 배려가 깃든 대학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말이다.

  물론 섣부른 공동체적 대응 과정에서 교수의 발언권이 과도하게 제한되고 명예가 부당하게 실추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역시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 과거에 다른 학교에서 있었던 소위 ‘독이 든 사과’ 사건(서○○ 교수 무고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학내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대응은 신중하고 공정해야 하며, 혹시 다수의 예상과 다른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수용되어야 한다. 실제와 다르게 단정지어진 바에 의해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 인권침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기본적인 전제로 하여, 각각의 구체적인 사안별로 조정해 나가면 될 일이다. 인권센터의 기본적인 방침은 학내 인권침해 사안을 가시화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지원하는 방향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 과정에서의 피해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문제의 가시화 자체를 막는 방향을 향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서는 특정인의 피해 가능성이 발생한 것도 아니며, 교수-학생간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일반론적인 소개를 하고자 했을 뿐이므로, ‘교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을 근거로 한 인권센터의 학소위 퇴출 조치는 더욱 납득이 어렵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할 때, 인권센터의 이번 조치는 인권 개념의 기만적인 활용임에 다름 아니다. 인권센터는 교수-학생간 인권문제를 조명하겠다는 학소위의 기획을 교수의 인권침해를 근거로 문제 삼아 결국 학소위를 인권주간 행사에서 배제했다. 이렇게 인권 개념을 기만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왜곡된 이해를 유발하여 그 개념을 오염시키고, 결과적으로 인권침해의 문제를 은폐한다고 비춰질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은 상당수의 학내 구성원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인권센터는 학내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최종적 보루이다. 서울대학교 인권주간에서 교수-학생간 인권침해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이 누군가의 심기를 해칠 수 있으나, 그것을 이유로 문제의 가시화 자체를 막는 것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의 피해자에게 현실적인 위협이다.

  인권센터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본 건의 당사자이자 총학생회 산하기구로서의 학소위가 송부한 질의서에 충실하게 답변하여야 한다. 인권센터의 존재 목적을 고려할 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조치가 이루어졌던 것을 인정하고, 그 이유와 관련하여 사실관계와 입장을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 만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내 구성원들의 인권센터에 대한 추가적인 비판은 정당할 것이다.

전기∙정보공학부 14학번 오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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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5일 금요일

정체성 판타지 비판

  누군가 그저 자기 기분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가볍게 소비하는 일은 꽤 흔하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성적 소수자성, 드문 출신 배경, 특정 정신질환 병력 등에 대한 왜곡된 판타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겉보기에 호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것은 차별주의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 판타지'와 관련해서 개인의 책임을 규명하는 데에는 다소 난점이 있으나 적어도 미디어와 사회에 대해서는 명백히 비판이 가능해 보인다.

  좀 더 넓혀 보자면 학력, 소속, 전공, 직종 등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많은데, 대면한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결여된 채 그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발생한 편견)만을 가볍게 소비한다면, 위 문단과 비슷한 이유로 상황에 따라 그를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이런 부류 중 최악인 것은, 권력 차에 의한 억압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정체성 판타지가 작동하는 경우이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가장 중대한 예 중 하나는 젠더권력일 것이다. 신체를 다루는 직종들에 대한 유서깊은(...) 성적 대상화도 이러한 맥락에서 조명할 수 있다.

※ 거시적인 정치사회학도 아니고 미시적인 언어생활을 다루는데, 그것을 위해 적용하는 개념들이 본문같은 경우에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물론 개념체계가 언어직관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비추어 보는 것도 학술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것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내기' 위한 거의 유일한 개념체계이며, 더 나아가 일상언어 역시 미시적이긴 하나 분명히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꽤 매력적인 개념체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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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 금요일

왁싱샵 살인 사건

https://news.joins.com/article/21815022?fbclid=IwAR2rpokbcRc2H5IaXBcfVB8D-a40HaP7-hUnYS-4bpKMp8RLGvM078N53_g
[ "담배 피며 유유히" 왁싱숍 여주인 무참히 살해한 남성 (2017.08.03) ]

최악의 사건이다.

  사후적인 해석이지만, 왁싱이라는 업종과 관련하여 무언가 터질 징조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것을 특징 삼아 인기를 끈 각종 개인방송 채널에서 너도나도 왁싱 샵 체험기를 업로드하였는데, 왁싱샵의 특수성에서 모종의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남성 중심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부적절하게 왁싱샵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그러한 풍조가 폭로되었다. 해당 방송의 BJ는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은 느낀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사회에서 성적 코드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전부터 간호사, 승무원 등의 일부 직종은 남성들에게 성희롱적 발언이나 요구 등을 많이 받아 왔다. 최근에는 이것이 대중매체를 타고 확산되면서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은유적인 성적 코드가 부여되어 소비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왁싱샵 건도 특정 직종에 대해 성적인 함의를 부여하여 대중적으로 은밀하게 소비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터질 게 터졌다는 느낌이다. 참담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에 더욱더 참담하다.

  더구나 왁싱샵은 아직 많은 이에게 다소 낯선 서비스이면서도 자기관리의 측면에서 꽤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서비스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비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미디어에 소개되면 문제가 생길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남성중심적 매스미디어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건 절대로 ‘거리낌 없고 개방적인’ 게 아니다. 한 성별이 다른 성별에 대해 아무 말이나 막 한다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본의 대중문화 컨텐츠가 성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으로 소비되는 것이기에 개방적이기는커녕 극도로 보수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개방적이라고 하는 건 남성과 동등한 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중매체, 특히 규제가 없는 개인방송 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잘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성적 긴장감을 형성하려고 하는 부적절한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풍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성인지교육의 혁신적인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세대가 지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성교육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실제 성관계하는 법도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고 돌려 말한다고 불만들을 많이 제기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전에 일단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간으로 보는 법이나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권의식의 부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과 관련된 주제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비틀린 내면이 유독 특별히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영역이라서 남들과 얘기해 볼 기회가 없으니까, 더구나 이성과는 더욱더 성에 대해 얘기해볼 기회가 없으니까 부적절한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개선의 기회가 없이 속에서 계속 곪는 게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에는, 무턱대고 ‘개방적으로 터놓고 얘기하자!’ 해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성들과 함께 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면 일단 서로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이것은 젠더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한 선언이 아닌 꾸준한 실천을 통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증명함으로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젠더권력이란 스스로를 보다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지만, 지극히 설명력이 좋은 개념이기도 하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젠더권력에서 기인한 비인간화와 대상화의 문제로 소급시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여성혐오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성혐오는 스스로를 엄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설명해 내는 개념이다(우에노 치즈코의 설명 참조). 비록 이 개념이 스스로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비판될 필요가 있는 개념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통찰을 현재 단계에서 ‘말해내기’ 위해 현 단계에서 활용해 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개념이기도 하다.

  작년 5월에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가? 사건 당시 나는 여성혐오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확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몇몇 어려운 단계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해야만 여성혐오의 연관성이 조심스레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망상장애의 구체적 내용은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므로 그의 여성혐오적 망상에는 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 가해자가 여성을 두려워해서 피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살해한 것은 그의 망상이 다른 망상이 아닌 여성에 대한 망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왁싱샵 사건의 경우는 여성혐오적 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남성중심적 대중문화 속의 기괴한 면이 그 어느 사건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까지, 여성혐오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작용한 것이 절대 아니라고 애써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나 설득을 시도해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막막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당시에 예쁜 통역사를 구한다고 공고했던 것에 대해 JTBC의 손석희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이미 들켜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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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1일 목요일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보며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 따른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방금 8시 9분을 기해 임기가 개시되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한 소회 및 앞으로의 기대와 함께 평소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보려 한다.

>> 내가 정치에 최초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2년 국가정보원 및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 개입이었다. 경악할 만한 이 사건은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은폐되었다. 이렇게 그 출범부터 실망스러웠던 박근혜 정부는 그 이후로도 국민 분열만을 획책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어버이연합과 같은 보수 단체의 관제 시위 동원, 자유경제원 같은 단체의 어용화된 운영 등이 그 예이며, 그 중 압권은 김기춘의 "세월호 유가족들에 국민적 비난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라는 지시이다. 그들은 헌정 민주주의를 심대하게 침해하면서 비겁한 방식으로 국민 위에 군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이후인 지금 돌아보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악몽을 꾼 것 같은 4년이었다.

한편, 그것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자들을 민주주의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지지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출발점 삼아 정치적 전략을 구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악마화하며 적대시하고, 좀비처럼 취급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물론 어용 단체들에 의한 관제 여론은 철저히 기획된 허위의 것이기에 인정될 수 없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헌정 민주주의의 중요성, 그 가치와 한계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래에서 추동하는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에서 역시 무엇이 민주적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활발한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개인 대 개인으로 충돌하며 갈등하기보다는 공론의 영역에서 소통하며 발전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도록 돕는 것이 곧 민주 사회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토양 위에서 형성되는 여론과 제도권 정치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사회적 합의 내용의 제도적, 정책적 검토 및 반영이 이루어지는 5년이 되었으면 한다.

>> 정치인 중에서도 특히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대통령은 더 이상 그 담백한 개인으로 남기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인물은 각종 계층의 이해관계,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정무적 역학관계 등에 의해 그 모든 것의 총화로서 형성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역학관계의 위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말과 제시할 수 있는 방향성은 어느 정도 범위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다소 찬물 끼얹는 것 같은 소리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이 선명하게 의견을 밝히며 영웅적으로 개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에 비추어 봤을 때 맞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장 '뒤탈이 없는' 방식인 민주주의적 방식을 앞장서서 준수하면서, 대통령이라는 리더가 크게 볼 때 개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참여하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주의에 대해 잘 이해하고 국민을 적대시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그러한 정치적 환경에서 관심있는 주제들에 대해 미약하나마 참여할 수 있다면 보람된 일일 것이다.

>> 홍준표 후보의 선전으로 인하여 자유한국당의 기세등등함을 약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쉽다. 나는 자유라는 단어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자유경제원, 자유대학생연합 등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단체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강 상으로는 몰라도 실질적인 정치 행보에 있어서 자유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당이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다. 현실로 돌아가면 자유한국당은 100석이 넘는 거대 정당이고, 이번 선거에서 확인되었듯이 그 자금과 조직, 밑바닥 지지세는 상당하다. 그리고 총선은 2020년이다.

자유한국당의 높은 지지세의 배후에는 그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보수 개신교와의 유착관계가 꽤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와 그 동생은 신도들을 태극기 집회에 버스로 조직적으로 동원했으며, 홍준표에게 TV토론에서 동성애 관련 질문을 꺼내도록 제안한 것은 다름아닌 '빤스 목사' 전광훈이다. 비리로 얼룩진 보수 개신교의 최대, 최강의 보수정당과의 이러한 유착은 정교분리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 되며, 국민 전체로 따지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번 5년 동안에 세속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그런 위협이 해소되기를 바란다.

>> 국민의당도 기존의 경직된 양당체제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면서도 범 민주 계열의 외연확장과 새누리당에 축소에 기여하고, 의회정치에서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 준 분명한 공로가 있다. 내 개인적 호감도가 높았던 안철수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너무 일찍 가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차기 정부가 통합적 행보를 보이면서 포용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된다면 안철수가 정치적이든, 정치 외적이든 나름의 역할을 하며 국가에 기여를 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국민의당이 앞으로의 의회정치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해 주어야 할 것이다.

>> 내가 중요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소수자의 인권이다. 인권은 그 가능성이 '발견된' 이래로 때로는 투쟁, 때로는 설득에 의해 실질적으로 획득되어 오고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권은 타협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당연한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현실 정치에서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작용한다.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과 법안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면서, 반대세력(?)도 설득해 나가는 방향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권과 관련하여 노력을 많이 하면서 이슈들을 선도적으로 제시해 온 정의당, 인권 관련 사안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의원들이 꽤 포진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드라이브를 걸어, 인정받아야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인권 상황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 이번 선거 국면에서 하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것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보수주의적 이슈들이 이번 대선을 크게 휩쓸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로 요약되는 선진국에서의 신보수주의적 경향의 발로를 분석하자면, 2차 대전 이후로 선진국들이 스스로 가진 힘을 많이들 내려놓고 합의에 의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행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거시적으로는 전통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미시적으로는(즉, 생활세계에서)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왜 우리가 이걸 내려놓아야 하지? 그냥 기득권을 유지하면 안 되나"라고 느낀 뒤, 그냥 막 나가도 별 상관이 없고 그게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PC(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것이 피로하다며 역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결론은 사회의 파편화, 사회적 신뢰의 붕괴에 따른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약화'와 연결된다.

신보수주의적인 모멘텀을 상술한 바와 같이 진단한다면 한국이 그것을 잘 제어하고 해소한 국제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 이슈에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 TV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 반대한다고 말하니까 많은 수의 지지자들이 차별주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만큼, 이런 이슈에 있어서 리더 개인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럼프도 당선 직후에 거시적으로 소외되었으나 미시적으로는 여전히 강자인 사람들이 기가 세져서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예방하고 민주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차기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쓰다 보니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냥 내가 정치권에 기대하는 일반론적인 내용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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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7일 일요일

한스 오브리스트 "Do It" 전시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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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오브리스트 등이 기획하여 전세계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Do It" 전시를 관람했다. 본 전시의 핵심 아이디어는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뭔가를 시키는 '지시문'을 발표하는 것이며, 그 지시문의 내용이 미리 모집한 일반인 참여단에 의해 해석되고 실현되어 전시된다는 것이다. 한스 오브리스트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진행될 이 전시에서 각 도시의 특성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도 기대한다고 했다. 이번 서울 전시는 광화문역 근처 일민미술관에서 하고 있다.

  '이념의 감각적 현시'로서의 예술 작품을 분석하는 헤겔의 이론적 틀은 바로 내용과 형식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소쉬르와 퍼스 등이 제시한 기의와 기표라는 기호학적 틀을 택해도 된다. 어쨌든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예술가는 예술 작품에 뭔가를 담으려고 할 텐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가 예술에서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생각을 일일이 풍부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간결하게 암시하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이 주로 순수미술 쪽에서 많이 나타났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색채, 도형 등의 감각적 형태만으로 완벽히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추상화되어, 차라리 '암시'라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때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예술작품,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예술작품 등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에서 암시되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끌어내는 것은 물론 모든 감상자의 작업이지만, 예술제도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예술계에서 공유하는 공통 기반에 대한 숙련을 거친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다. 예술비평가들은 예술계에서 공유되는 미의식에 의존하여, 예술가의 작업과 그에 첨부된 컨텍스트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서 구체적으로 '말해낸다'. 이는 현대미술이 어렵다거나 불친절하다고 말해지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본질적인 불편함이 있다. 과연 나는 맞게 해석했는가? 예술의 해석은 자유라고들 하지만, 감상자와 비평가들은 나의 해석의 수준이 지나치게 낮은 것은 아닐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하고 움츠러들게 된다. 마치 범죄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탐정처럼, 감상자는 조심스러워진다.

  "Do It" 전시에서도 예술가의 작업은 오직 텍스트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그 텍스트가 그냥 텍스트가 아닌 '지시문'이라는 간단한 차이점 때문에 의해 위에서 말한 불편함이 의외의 지점에서 해소되고, 상당한 수준의 공공성이 획득된다. 일반인 참여단이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전시를 구성하고, 그 다양한 해석 자체가 전시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존중되기 때문이다. 오브리스트의 기획 의도가 완전히 성공한다면, 여기서는 일반인 참여단의 해석의 퀄리티가 낮아서 유발되는 웃음마저도 비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일 것이다. 여기서 남들보다 좀 더 멋있게 발상해야 할 텐데, 남들보다 좀 더 전위적으로 해야 될 텐데 하고 걱정하게 되면 지는 거다.

  즉, 이 전시의 진짜 관객은 사실 지시문을 최초로 읽고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는 일반인 참여단이고(예술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이 '일차적 관객'들과 같은 입장에서 비평한다), 그 결과로 실현된 개별 작품들은 이차적 산물, 곧 '이런 기획을 했다는 기록'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 전시 자체와 각 지시문들에 대한 평가(이것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이 될 것이다)와, 일반인 참여단들에 의해 실현된 작품 개별에 대한 평가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그 이차적 산물로서의 전시를 관람하는 나 같은 사람은 지시문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일차적인 관객과, 해석의 결과물을 보는 이차적인 관객으로 분열된 채 작가와, 또 다른 일차적 관객들과 간접적으로 소통한다. 예술가의 지시문 / 참여단의 실현이라는 이중화된 구조로 인하여 관람 행위에서의 관계맺음이 훨씬 다층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화된 구조는 관객에게 내적 분열을 유발하여, 현대미술 작품의 관객들이 겪는 본질적 불편함의 해법을 모색한다.

  물론 그러한 이차적 산물들이 결과적으로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전시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대중문화적이지는 않다. 실제로는 위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고 쿨하게 임하면서도 정작 높은 퀄리티로 해석을 해 낸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되긴 할 것이다(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예술비평가들의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주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는 미술관 밖에서 일어나는 대중문화와의 강한 연관성을 맺고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아직까진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여지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그 창문을 보다 넓게 열고 공공 영역과 우호적으로 관계맺음을 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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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6일 토요일

대선후보 자녀 성희롱피해 사건 관련

  유승민 후보의 딸이 어제 선거 지원 중에 겪은 일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자면, 대중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해 온 방식,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여성성이 일방적으로 소비되어 온 방식을 보았을 때 이미 이런 일은 예견되었다. 참담하다.

  직접적으로는 이 일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이다. 그는 응당한 책임을 지고 형사적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 개인의 형사적 책임과는 별도로 사회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전자를 적용하되, 근본적인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후자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는 그 표현만 '책임'으로 동일하며 사실상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함으로써 가해자가 면책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한다.

  첫째는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유명인의 가족인 여성은 그 유명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성적인 맥락으로 사회적으로 소비되곤 한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성희롱성 발언을 일삼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발언들로부터 자기가 그를 지켜 주겠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에도 이것은 적용된다. 기사도 정신 역시 그를 성적 쟁취의 대상처럼 상정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 대한 인간적 안타까움과는 명백하게 구별될 수 있다.

  가해자는 정신장애 3급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작년 이맘때쯤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의 머릿속에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여성들이 감히 자신을 무시한다는 망상이 형성되었던 것에는 사회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input들의 영향이 없을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외계인의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외계인이 자신을 조종한다는 망상이 생길 수 없지 않겠는가. 이번 건에서도 비슷하게, 해당 가해자가 '하필 그런' 기이한 행동을 한 데 대해서 사회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물론 반대로, 여성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사회의 단면이 그에게 확실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 역시 상당히 조심스러운 주장이기는 하다. 사회의 한 단면과,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부에 형성되는 관념이 갖는 역학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된 바는 아직 없다고 알고 있다(이는 경우에 따라 매우 다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소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만약에 여성이 남성에 대해 평가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여성의 권위와 사회적 지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미디어가 여성의 시각을 대변하여 일방적으로 남성을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사회였다면 가해자가 그런 행동을 할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을 것 아닌가? 다소 원론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이 사건에 있어 사회의 책임을 묻는 주장은 검토될 이유가 충분하다.

  사회의 책임이 지적되어야 하는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유 후보의 딸이 유명세를 획득하여 선거 유세에 참여하고 있는 과정 전체가, 여성의 외모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사회적 세태를 빼고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의 자녀가 그 자의에 따라 후보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 후보의 경우에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 딸이 유달리 외모와 연관지어 화제가 되었고, 급기야 '국민 장인'이라는 별명으로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른다. 사람의 존재와 그 사람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 유 후보의 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가 외모를 중심으로 사회적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사회적 주목은 개인에게 피해가 되는 파국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주목해서 유명세를 부여하고 유세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결국 사회의 힘이고, 그 주목의 포인트는 바로 외모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이 부분 역시 다소 조심스러운 주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가 하필 그런 방식으로 가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모가 주목받음으로써 유명세를 얻은 사람이 웃음을 지으면서 대중들과 사진을 촬영해 주는 환경은, 그렇지 않은 환경에 비해 가해자가 그런 행위를 하기에 유의미하게 우호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본 사건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 하는 두 번째 책임이 발생한다. 그것은 유승민 후보 캠프 측의 책임이다. 여성의 외모가 일방적으로 소비되어서 여성 개인에게 성희롱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며, 또한 어제와 같은 직접적인 물리적 성희롱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등에서 그러한 작용은 이미 차고 넘쳤다. 물론 편지, 현장유세 등의 다른 방식으로도 유 후보의 딸은 유권자들을 마주했으나, 사회의 힘은 그의 외모가 가장 부각되게 만들었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소비했다. 유 후보는 이전에 분명히 딸이 유명세를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고, 그 부담 역시 이러한 예견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 후보의 캠프 측은 여성의 여성성이 이 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후보의 딸의 유명세가 갖는 정확한 성격에 대해 이해한 뒤 그에 대한 경계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언에 뒤따르는 구체적인 대책은 다양하게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 경계심에 따라 강력한 대응을 예고했다면 네티즌들이 후보의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의 외모에 집중하며 유 후보를 '국민 장인'이라고 부르는 여론보다 그것을 비판하는 여론이 더욱 우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제 현장의 분위기가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어서 그러한 사건을 방지했을 수 있다. 반대로 그 경계심에 따라 후보자 딸의 유세 참여 자체를 포기했어도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행태를 사후적으로 보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예견하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구어 낸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 멋진 일일 것이고, 언젠가는 그러한 일이 가능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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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2일 토요일

재미있는 액체질소

  액체질소를 처음으로 다뤄 보고 있다. 일단 안전을 위해 고글과 장갑은 필수이다. 방울방울 조금씩 손에 닿는 건 체감 데미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무슨 사고가 있을지 모르다보니 주의하는 게 상책이다.

  액체 물이 고온에 노출될때 나타나는 현상이, 상온 하의 액체질소에서도 비슷하게 관찰되는 게 많다. 일단 당연하게도 튀어오르면서 끓고, 상온의 금속 판이 액체질소 입장에서는 엄청 뜨거운 온도다 보니까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도 나타난다. 방울을 뜨거운 판 위에 떨어뜨리는 순간 방울의 하부가 증발하여 생긴 기체 층 때문에 마찰 없이 미끄러져 다니는 현상.

  또한 깔때기에 붓는 도중 튀어올라서 갈 곳이 없어진 액체질소는 보통 그냥 바로 기체가 돼 버리지만, 그 양이 좀 많을 때는 미처 기체로 다 변하지 못하고 주위 바닥에 철벅 하고 떨어지는데, 철벅 소리는 나는데 바닥이 젖는 것도 아니고 해서 여러모로 낯설고 흥미롭다.

  긴 하루를 보낸 후 오금역에서 베스킨라빈스를 사서 귀가할 때 그토록 설레는 것은, 아이스크림 자체뿐만 아니라 한동안 드라이아이스를 갖고 놀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액체질소도 정기적으로 공급받을 일을 만들어서 집에서 갖고 논다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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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9일 수요일

윗공대(301동) 식당 유감

  301동 식당에서는 직원 한 명이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같다. 돈까스를 안 매운 소스로 시켰는데, 주문을 받고는 뒤에서 한참 동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오셔서 매운소스로 잘못 주셨다. 기존에도 이런 비슷한 이유로 꽤 오래 기다린 적이 많은데, 별 거 아니긴 하지만 아예 잘못된 메뉴를 받은 건 처음인 것 같다.

  301동에서 학생식당을 보면 농식이나 학식 등 다른 곳에 비해 직원의 수가 눈에 띄게 적다. 그럴수록 한 사람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여러 개의 일을 처리해야 해서 착오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게 직원들의 업무과중 및 서비스 질의 저하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물론 음식 자체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건 또 별개의 문제가 겹쳐 있을 것으로 본다).

  계속 말하는 거지만, 교수식당과 학생식당에 이 정도로 퀄리티의 차이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상 의도적인 것으로 본다. 가격이 1000원 정도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 1000원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준의 큰 차이가 난다. 운영 주체는 CJ의 TOOGOOD으로 동일하니까, 교수식당에 좀 더 많은 비용을 쓰고 학생식당은 낮은 질을 유지하면서 굴릴 수 있다. 그렇게 해도 학내의 조직적 문제제기가 없으니 계속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01동과 다른 곳의 차이는, 301동에서는 지리적인 문제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운영해서는 진작에 경쟁에서 도태됐을 것이다. 매일같이 편의점 음식만 먹을 수도 없고, 매일같이 퀴즈노스만 먹을 수도 없으니까 꾸준히 수요가 나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퀴즈노스도 할인정책도 자기 맘대로고 재료 관련해서도 안 좋은 말 좀 있었어서 그리 호의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러니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매일같이 편의점 음식만 먹으면서 식당 측에 꼬장부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교수식당과 학생식당의 음식 질의 차이 좀 줄이고, 더 많은 직원들을 고용하여 서비스 질도 높이는 등 수많은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주말에 거기서 밤 새고 있는 사람이 몇인데 주말에 열지 않는 것도 개선이 필요하다. 301동의 '유일한' 식당이란 걸 알고 제대로 운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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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6일 목요일

시흥캠퍼스 사업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시흥캠퍼스 실시협약이 기습적으로 체결되었을 때부터 본부는 항상 일방적이었다. 학생사회와 협의할 것을 분명히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학생 대표들과의 논의 없이 시흥캠퍼스 계획에 대해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자료를 냈다. 학교 측의 언질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미 각종 이권이 얽히고 설켜 있을 신문 광고들도 많이 나왔다.

  이 중 압권인 것은 학생사회와 일절 협의 없이 반쯤 기정사실화되어 신문 광고로까지 나오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 내용들이다. 서울대 시흥캠 내 위탁 어린이집, 서울대 시흥캠 주변의 대형 스터디센터 등의 사업이 광고되는 것은 학벌주의의 정점이라는 서울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러한 학벌주의에 영합하는 본부 측의 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언론의 보도 논조에도 유감을 표한다. 일각에서는 기득권으로서의 서울대생들이 지방 캠퍼스라는 점에 거부감을 가져서 이기적으로 본부점거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학우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언론 보도들로 인해 정작 당사자인 우리 학우들은 그러한 인식에 대한 시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서울대 학생사회에서는 고려조차 된 적 없는 그러한 상상력의 산물들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깔린 그림자를 역으로 드러낸다.

  시흥캠퍼스 사업은 이와 같은 학생사회에 대한 기만과, 사회에서 대학이 장기적으로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고민의 부재라는 두 궤도 위에서 달려가고 있다.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대학교가 수십 년 간 형성해 온 모습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큰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학생들의 자리는 일체 없었다.

  대학이란 어떤 공간인가?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는 어떻게 해야 상술한 그림자를 해소하고 진정으로 박수를 받는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서울대학교 구성원 전체가 책임 의식을 가지고 고민하여야 하는 문제이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누구보다 학교 측에서 가장 앞장서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흥캠퍼스 사업은 상기한 두 궤도를 타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학교 측은 학생들의 정당한 우려를 '현실'이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기각하고 있다.

  3월 11일에는 본부를 점거하고 있는 학우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한때 음식물 반입을 차단하고 점거 학생을 고립시키려 하는 등의 비인간적 조치까지 고려되었다. 학우들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향해 소화전을 분사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감전의 위험이 컸던 것은 교직원들이 아닌 학생들이었는데도 마치 그 반대인 것처럼 해명하기도 했다. 학우들의 안경이 부러지는 등의 일도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교직원들은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으며, 사태 내내 학생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언행을 지속했다. 또한 학교 측은 사태 이후에도 일부 사실관계에 대해 납득되지 않는 해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 4층에 남아 있는 12인의 학우들은 점거를 해제하고 퇴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본부점거가 해제된 것은 학교 측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안전을 위협한 데 따른 점거 인원들의 철수일 뿐이며, 시흥캠퍼스 사업을 마음대로 진행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생사회의 의견 수렴과는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을 시흥캠퍼스 사업에 대해, 학생사회는 학생총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다.

  인간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지속 가능한 학문 공동체로서의 서울대학교가 되기 위해서, 학생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중대한 결정에 있어 학교 측은 그 진행 상황을 학생사회에 충분히 공유할 책임을 가지며, 이러한 책임 이행이 결여된 채 진행되고 있는 시흥캠퍼스 사업과 관련해서는 현재 제기되고 있는 각종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합의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만일 시흥캠퍼스에 예정된 각종 사업들이 재정을 확충하여 자립적인 학교 운영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본부가 학생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제공했던 자료들에서는 왜 그러한 사업 진행 사실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해명이 요구된다. 또한, 그 사업들이 대학 존재 목적의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현재 상태에서는 대학기업화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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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5일 수요일

탄핵 이후 친박세력의 미래는?

박근혜는 파면되었지만, 공작정치의 대가인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국무총리는 비서실장을 비롯한 박 대통령의 주요 참모진들의 사표를 반려했다. 그리고 친박 국회의원들은 박근혜 개인을 보좌하고 있다. 비록 그들의 말대로 단순히 박근혜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정치와 분리하여 해석하기를 요청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참모진에 의해 증거 인멸 작업, 기록 봉인 작업 등이 진행 중일 수 있을 뿐더러, 자연인 박근혜를 돕는다는 공통 지향점은 친박 세력이 그 진영을 재편성할 수 있는 명분으로 기능한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아 암군으로 만들고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을 방조하여 범죄집단의 수뇌부로 전락한 참모진들과 친박 세력은 이제 자연인 박근혜를 중심으로 꽤나 안정적인 연착륙을 꾀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됨으로써 3개월 간의 은신을 끝내고 수구 세력의 정치적 구심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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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28510491491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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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1일 토요일

박근혜 탄핵 선고를 앞두고: 기각은 끝이고 인용은 시작이다!

  가장 밝아야 할 권력 핵심부가 그 어디보다도 깜깜했던 지난 몇 년이었다. 다행히 몇 개의 집요한 불빛에 의해 그 이유가 일부나마 밝혀졌다. 비선권력이 개입된 비정상적 통치 구조라는 초유의 상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것으로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국민적 신뢰를 전적으로 잃었다.

  집권 정당성이 지극히 약한 상황에서 혹시나 탄핵이 기각되고 직무에 복귀한다면, 박 대통령은 국정 현안을 챙기기보다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우선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비정상적 관제 여론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탄핵 인용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 온 정치권은 전에 없는 혼란을 겪을 것이며, 정권의 자기보신을 위한 국정원, 청와대 등의 관제 여론 조성 공작은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게다가, 232만 명의 국민이 무섭도록 조용한 시위를 진행한 것은 사실 그 안에 하나의 목표를 향한 거대한 총의가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대의제 민주주의 하의 정치인들이 그 국민적 요구를 제도적으로 달성하는 데 실패한 이상 그 잠재적인 총의가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정권의 억압적 태도를 극복하고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는 데에만 모든 사회적 비용을 쏟아도 모자라게 될 것이다.

  반대로,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관제 보수 단체들이 한동안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들을 단지 돈 받고 시위에 나오는 사람들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안일한 것이다. 신념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고, 일부 대형 보수 교회 신자들의 경우는 동원되면서도 동원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신념체계와 외적 요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어찌 그저 일방적인 동원이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들은 단지 깜깜했던 박근혜 정권의 단말마가 아니며, 신흥 극우의 집결을 통한 정치세력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20세기의 단말마가 지극히 21세기적인 트럼피즘과 융합하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흥 극우 세력의 탄생을 방지하려면 탄핵 반대 단체에 대한 배제와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한 뒤에 그들의 상실감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물론 국정원과 청와대의 관제 여론 형성을 무력화하여, 그들을 실질적 정치적 주체로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다시 관제 여론에 기만당할 수는 없다). 또한, 탄핵 인용 이후에 정치인들이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올바로 담아낼 수 있도록, 따라서 탄핵 회의론의 발생 및 극우 세력의 편승을 방지하도록 시민사회의 공론장이 명민하게 작동하면서 제도권 정치인들과 상호작용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최대 장점 중 하나인 역동적인 민주정치가 한 순간에 극단적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되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책임 있는 판단을 기대한다. 기각은 끝이고 인용은 시작이다. 선고 이후에는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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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8일 토요일

젠더 이퀄리즘 날조 사건

  실체가 없는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단어가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진정한' 성 평등주의인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주 이야기되길래 분명히 인터넷 어딘가에서 문헌오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퀄리즘이라는 상대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를 빌려서 '역차별의 우려가 있는 페미니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성평등을 위한 이론으로 둔갑시키고, 실체가 없는 이론을 나무위키 문서로 게재하여 소개한 것이다. 비겁한 일이다.

  물론 성평등을 추구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상이 "없으면 만듭시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하고자 했다면 실체가 없는 사상을 상정해 놓고 거짓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펼칠 것이 아니라, 타당하고 건전한 논거를 갖춘 '선언'을 했어야 한다. 혹은 새로운 이론을 직접 세웠어야 한다. 없는 이론을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있는 논의들을 참고하고 스스로의 새로운 논의를 더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도 성차별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페미니즘에는 문제가 있다' 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실제로 성차별을 잘 발견하고 있는 것일지 알기란 상당히 어렵다. 페미니즘과 성평등 자체에 적대적이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평등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최근 몇 달간 있었던 젠더 이퀄리즘 해프닝은 이러한 신뢰를 지극히 위태롭게 만드는 기만적인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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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