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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2일 목요일

워마드의 가톨릭 성체훼손 사건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5분 넘게 스크롤한 것 같은데 거의 모든 게시글이 워마드의 성체훼손 관련 글이다. 무언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주 화제가 되는 워마드라는 커뮤니티에 대한 논의와, 하필 이번에 모욕된 것이 종교적 상징이라는 사실에 대한 논의가 겹쳐져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개인적 관심 때문에 후자를 언급하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전자라고 주장해 볼 것이다.

  성체는 실제 육신이 아니지만 육신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인데, 상징이 아니라 실제 육신이라고 주장하는 교인에게는 그렇게 믿는구나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믿음이 바로 상징작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기의 위반을 긍정하는 종류의 삶이 아닌, 금기를 실천하며 정신적 수양을 하는 종류의 삶이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굳이 그 상징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인들을 화나게 하는 것 외에는 큰 효과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상징이 허위이긴 하지만 굳이 그걸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라는 일각의 시혜적(?) 입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언어 분석을 잘 하기만 한다면, 상징 효과 자체는 허위가 아닌 분명한 사실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며 종교인을 비난하기 이전에,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부터 성찰해야 한다.

  나는 여러 사안에서 상징 효과를 의도적으로 걷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따라서 대중이 웬만한 금기 위반에는 정신적으로 끄떡하지 않고 그 위반의 가능성을 덤덤하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을 실질적으로 철폐하고자 함이 아니라, 상징인 것과 아닌 것을 인지적으로 잘 구분하기 위함이다. 상징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풍요로운 문화 현상과 그 향유자들을 마음 깊이 존중하되, 그 현상을 딱히 부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메타적인 고찰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이라는 것이 작동하는 한, 무신론자 및 세속주의자는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희망하고 추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현실적으로 누군가에게서 작동하는 상징작용을 하찮게 여기는 것 그 자체에서 자부심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상징에 영향을 덜 받는 자신의 성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해서 상징이라는 것의 강력함을 사유하고, 원한다면 상징작용을 비판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상징 훼손에 대해 분노하는 교인들을 깔보는 데에서 그치는 반응은 그냥 성체 훼손 글의 게시자가 정확히 의도한 바에 다름 아니다.

  워마드에서 태극기를 폄하한 것이 논란이 되었을 당시엔, 나의 페친 풀에서는 이것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다며 국가주의의 철폐를 주장하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사실 그것이 이번 건에 대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상충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나는 국가 상징물에 대한 온건한 수준의 애정은 괜찮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한 번 변호를 해 보자면, 현실적으로 종교적 상징에 투사되는 종교권력에 비해 국가 상징물에 투사되는 국가권력이 더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만약 해외의 종교국가든 혹은 국내의 소규모 커뮤니티든, 종교권력이 정말로 무섭게 작동하는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생겨서 게시자가 위협을 받았다면 나 역시 그 게시물에 대한 논평보다는 종교권력의 철폐를 우선적으로 주장했을 것 같다. 또한 이번 일에서도 혹시 앞으로 게시자의 신상이 밝혀져서 실질적인 위협을 받는다면 그 게시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주장할 것이다. 사실 가톨릭에 의한 위협보다는 과격한 반페미니즘 측에 의한 위협이 더 우려되기는 한다(...). 상징 작용은 풍요로운 문화적 자산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존중되어야 하지만, 실질적 권력이 부여되어 억압으로 작동한다면 가차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상징이 권력이 되면 그 집단은 제대로 된 공동체라기보다는 이념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무언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주 화제가 되어 온 워마드라는 커뮤니티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가장 먼저 상기해야 할 점은 워마드는 단일 대오를 이루는 단체가 아니며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구체적인 정치적 테이스트 등에 관계없이, 그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2010년대 초반부터 많은 어그로를 끈 일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인터넷 문화 그 자체인 디시인사이드를 정확하게 모방하고 있다. 그런 공간들에서는 혐오할 대상을 선택하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금기시하여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겟팅하여 희화화하는 놀이가 벌어진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것에 대해 금기를 위반했다며 엄격, 근엄,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을 짜릿하게 즐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마치 기자의 취재와 같은 방식으로 진지하게 반응하면 마찬가지로 조롱의 대상이 되어 '지는 거'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역시 이러한 전형적인 ‘혐오 놀이’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가 정치적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밖에 답할 수 없다. 예컨대 코미디 프로그램이 정치적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 꿀잼일 수도 노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두 축에서 형성되는 4개의 케이스 중 꿀잼인 정치풍자 코미디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인정되는 집단에 한정하여) 정치적 유효성을 갖겠지만, 나머지 케이스는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그 정치성을 선언하는 것과, 실제 정치성이 인정되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번 성체훼손 건의 경우에는 정치성을 선언했는지 여부는 매우 애매하다. 혐오 놀이의 특성상 논란이 될 가능성을 당연히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정치적 목적이라고 간주하기보다는 놀이로 간주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실적 유효성과 규범적 유효성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규범적으로 봤을 때 유효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치적 논란을 낳는다면 그것은 정치성을 가진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별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뿐이다. 예컨대 종교 지도자의 성범죄 등을 나열하여, 혹은 낙태에 대한 구시대적 인식을 드러내는 발언들을 나열하여 종교에 대한 혐오를 자극했다면,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어떠한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고는 있다. 그러나 이번 성체 훼손 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진지하게 종교에 대한 공격이 될 거라고 믿은 거라면 그냥 저주인형에 못을 박는 토테미즘적 행위일 뿐이고, 그렇지 않다면 짜릿한 혐오 놀이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성을 선언했는지의 여부가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다루어질 여지가 많다. 혐오를 바탕으로 논란을 야기한 사건이고, 이 혐오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난민 논란에서 보았듯, 혐오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강력하며, 관계의 섬세한 형성이 아닌 관계의 단절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반대의 스탠스에 놓인 사람들도 같은 대상을 혐오한다면 일시적으로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혐오가 아닌 연대의 논리라면 그럴 수 없다). 그러나 혐오의 타겟은 이렇듯 어디로든 쉽게 향할 수 있으므로, 혐오를 특정한 방향성을 갖도록 해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그 의도대로 정밀하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인 타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논의로서, 현대의 가장 큰 의제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나는 혐오 놀이에 기반을 둔 사회 운동이 장기적으로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령 혐오감을 바탕으로 출발해 버렸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방향대로 잘 이끌기 위해서는 즉각적으로 양질의 이론을 공급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를 지난 2~3년간 우리는 반복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이번 건이 이렇게 큰 논란이 된 이유는 종교를 조롱한 것 자체보다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와 결부된 사회적 관심에 더하여 혐오에 기반을 둔 자극성까지 더해져 네티즌들과 기자들의 시선이 이중으로 많이 쏠려 있는 워마드라는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유'라는 단어의 의미를 규범의 영역보다는 사실의 영역에서 볼 때 더 좋은 결론이 나온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각종 반종교 커뮤니티 등에서 예수에 대한 이 정도 수위의 조롱이 과연 없었을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고로 이 사건은 분명히 종교적 상징의 민감성과 결부되어 발생한 사건이기는 하고 이런 측면에서도 통찰해 볼 면이 있으나, 어차피 다른 것을 모욕해도 비슷하게 논란이 되어 왔으므로 ‘굳이’ 사건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자면 종교적 상징의 민감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혐오의 자극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누군가는 이상주의적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적 개인들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방지하고 폭력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혐오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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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9일 월요일

반감의 희롱적인 표출에 지혜롭게 대응하자: '보이루'와 관련하여

학교에서 남성 청소년들이 '보이루'라는 단어를 명백히 동료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맥락으로 쓰면서, 정작 문제삼으면 '보겸하이루일 뿐이야~'라며 기만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고 한다. 단어 자체보다는, 어떤 의도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느냐가 문제인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올리고 수치감을 유발시키면서 곤란하게 하는 상황을 뜻하는 '놀리다(희롱하다)'라는 단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성적인 것이 결부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도 덜도 말고 성희롱이다.

인과관계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만약에 혹시나 '보이루'를 그런 뜻으로 처음 해석한 것이 페미니즘 진영의 과잉된 우려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보이루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그 사용자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정말로 벗고자 한다면 그런 희롱적 의미로 쓰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양하면 되지, 진짜로 용례를 만들어 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 동기가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이전의 남성중심적 분위기 때문이든, 아니면 페미니즘 등장 이후에 그것에 대해 생긴 반감 때문이든, 그러한 희롱을 실제로 즐기는 이상 이 둘은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반감을 덜 갖게 하는 것을 페미니즘에서 전략적으로 고민할 수도 있기는 하겠으나, 그 고민 때문에 위축되어 이러한 희롱 자체에 대응하는 동력이 약해질 필요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 진영이 언어를 통제하려고 함으로써 남학생들의 반감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최근에 많다. 그리고 위와 같은 희롱이 유행하는 것 역시 그러한 반감에 의한 것이라고 일각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들이 간과하는 심각한 문제점은, '페미니즘이 좀 더 잘 했다면' 이라는 가정은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가정이라면 원리적으로는 못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페미니즘이 반감을 사는 것은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고, 반감을 사는 것이 근본적 문제가 아니라,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이 근본적 문제다.

따라서 페미니즘적 실천, 즉 성폭력에 대한 비판 및 인식 환기 노력이, 페미니즘이 유발하는 반감에 대한 지적보다 당연히 우선해야 한다. 이 우선한다는 것은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양적으로 더 많아야 한다는 것도 (일단 여기서는) 아니다. 뭐랄까, 늘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주의, 무신론, 세속주의: '공적인 것'을 중심으로

무신론 및 세속주의에 있어서 도킨스처럼 과학을 과도하게 찬미하여 종교의 대안처럼 설정하는 형태,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처럼 나름대로 독창적인 타협안을 제시하는 형태 모두 끌리지 않는다. 전자는 과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유난스럽다고 느껴지고, 후자는 굳이 영적인 것을 향유하는(혹은 그러한 척하는)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입장에서 유난스럽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둘 모두 영적인 것을 중시하는 서구(특히 미국)적 전통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신론도 결국 종교성을 갖는 것 아니냐'는 종교인들의 물귀신 작전식 비난에 대단히 취약하고 때로는 그 비난을 별로 부당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자유주의를 주장한 아인 랜드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컬트처럼 신봉되는 희극적인 사태에서 이러한 미국적 정신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서구 무신론의 이러한 '유난스러운' 면모는 아마도 강력한 제도종교가 천 년 넘게 군림해 오면서 그들의 정신문화를 뿌리깊게 형성해 온 상황에서 그 안티테제를 급진적으로 제시하려다 보니 발생한 것일테다. 이러한 면모는 완화될 필요가 있다. 요즘은 다름아닌 동북아시아 특유의 세속주의가 정치적으로 훨씬 더 성숙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대로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고, 많은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 정도이다. 세속주의는 결국 사적인 견해가 공적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경계하고 '공적 이성'에 대한 감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과학과 우호적인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도 컬트로 전락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가치 있는 의제를 다루는 집단이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해 공적으로 인정되는 주류가 아닌 사적 컬트가 되어 그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만은 막고 싶다. 이 목표는 비단 무신론 및 세속주의뿐 아니라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속주의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면서, 이 목표가 실현됨으로써 지켜지길 바라는 개별 가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이 문제를 몇 년 단위로 고민해 온 내 나름대로의 중간점검 결과이다. 지금까지 고민한 내용들을 써 놓은 글 조각들은 이것저것 있으나 하나의 체계적인 글로 엮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보니, 앞으로 꽤 긴 시간에 걸쳐 부족한 점은 공부도 해 가면서 창조과학 등에 대한 견해부터 '공적인 것'에 대한 견해까지 찬찬히 풀어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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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27일 수요일

페미니즘과 교육

  다른 문제 역시 마찬가지겠으나, 교육 문제만큼은 특히나 단편적인 뇌피셜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판단을 항상 유보해 왔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얘기를 어느 정도는 해 볼 수 있겠다.

  다소 박정희스러운 사고일 수 있으나, 나는 공교육 기관으로서의 학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유년기 동안 이질적인 환경에서 성장해온 전국의 학생들이 공교육을 통해 한 데 모여 최소한의 표준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다(그래서 교육의 획일화가 심각한 문제라는 데에 동의함에도, 각종 진보적 대안교육도 무모하게 시도될 만한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예의 표준적인 체험을 하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각종 역량을 향상시키기도 하고,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학교 내지는 교사를 대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일종의 '정치적'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교육 현장에서의 표준적인 체험에는 교육 과정의 이수, 즉 학업적인 것뿐만 아니라 계량되기 어려운 사회적인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일련의 표준적인 체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수많은 관점에는 당연히 성인지적 관점도 중요하게 포함된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성교육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을 뿐더러 원리적으로도 광의의 성교육에 있어서 개별 가정을 전혀 신뢰할 수 없으므로 그 역할은 공교육에 위임되어야 하며, 공교육은 그 역할을 잘 해낼 책임을 갖는다.

  교육 현장에서의 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교육 현장에서 세부적인 요소들이 성평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경험,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러한 변화를 일궈내는 데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 보는 경험은 학생들에게 전혀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 변화에는 출석번호 체계를 바꾸는 것 같은 제도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공유한 양현고의 사례에서의 급식 불평등처럼 암묵적 관례로 되어 있는 것 등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자율 배식이었어서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댓글 등을 보니 성별에 따른 차등 배식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성별이 다른 학생들끼리 서로를 마치 다른 종족을 보듯이 대하지 않고 보다 세련된 방식의 관계맺음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 등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교사의 보호 및 중재가 없는 교실은 사회라기보다는 정글이므로, 이러한 과정 전체에서 교사의 역할은 아주 아주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표준적 체험의 의의를 고려할 때, 공교육은 교사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여 사적인 견해가 반영된 자의적인 교육을 하도록 하기보다는, 꾸준한 재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양된 전문적 능력에 따른 교육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육 현장에 대한 페미니즘적 접근이 현재는 교사 개인 및 임의단체의 관심에 따른 각종 창의적인 시도에만 의존하는 것처럼 조명되면서 논란을 낳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겠으나 교육의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논의들 중 광범위한 설득력을 갖춘 내용들이 교육학적 검증을 거쳐 교사용 연수 자료 등에 빠르고 효과적으로 흡수되도록 함으로써, 교사에 대한 꾸준한 재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초등성평등연구회 등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각종 페미니즘적 시도들도 그러한 방향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은 교사가 딱히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전문성에만 충실하다면 페미니즘의 긍정적 성과들이 반영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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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3일 수요일

정치성향 테스트 결과 및 소감

  정치성향 테스트를 해 볼 때 늘 고민되는 지점은 질문에 답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라는 것이다. 질문이 의도하는 바에 대해 몆 단계를 넘겨짚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넘겨짚어야 하는지가 아주 다양할 수 있다.

  제시되는 문장이 즉물적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오는지 불쾌하게 다가오는지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 그 문장과 같은 의도를 갖고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었을 때 예상되는 전형적인 결과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한편, 내 개인적 신념을 기준으로 할 수도 있고, 사회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신념을 가졌을 때 예상되는 전형적인 결과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다.

  나는 기준을 달리해 가며 총 두 번 테스트했는데, 일단 질문에 대한 즉물적인 인상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결과를 줄 것 같아서 어느 정도의 숙고는 기본으로 하고, 숙고의 방향을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1) 현실 정치 지형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제시된 문장 자체에 대한 호불호를 평가

(2) 제시된 문장을 매우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가상의 정치인을 상정해서, 그 정치인을 지지할 마음이 드는지의 여부를 평가

  결과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두 번의 테스트에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축에서는 정확히 같은 결과가 나왔으나, 좌파/우파 축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두 사진 중에 어느 쪽이 무슨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페친 분들께서 댓글로 맞추어 보시면 재미있을 듯).

  이 결과의 절반 정도는 나의 정치적 의식이 미숙한 탓일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내가 관심있는 의제가 정치인들에 의해 선택되고 다루어지는 주된 방식에 대한 불만 탓일 것이다.

  그리고 이 테스트의 결과 자체뿐 아니라,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테스트했을 때의 결과 차이 역시 나의 정치 성향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정치에 있어서 내용뿐 아닌 형식의 문제도 보고 싶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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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5일 화요일

철학에 대한 '교훈적' 독해를 경계하기 : 한국인의 정신적 토양에서


  모든 철학은 아주 원론적인 의미에서 삶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자의 저서 속 특정한 문구를 그의 철학 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탈맥락적으로 인용하여, 그 문구가 직접적으로 삶에 대한 어떤 교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철학도에게 최우선적으로 경계되어야 한다.

  나는 인문학이 고담준론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 변화에 따른 현재적 인간상(소위 포스트휴먼)을 해명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과감하게 변화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변화하는 흐름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별개로, 나는 2010년대 초반부터 발생한 소위 인문학 열풍을 타고 출판된 수많은 인문학 베스트셀러들, 그리고 CEO를 위한 인문학 강연 같은 것들에는 매우 비판적이다. 아카데미를 떠나 그러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인문학을 나는 '인싸 인문학'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매우 신시대적이나, 내용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기는커녕 우리를 퇴행적인 사고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이러한 인싸 인문학은 주로 철학적 개념들의 체계와 역사를 경시하고 표면적 문구에만 천착하여 자의적으로 교훈을 찾아내려고 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이러한 소비 행태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학 과잉', '도덕 과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과잉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철학의 영역을 축소시킬 뿐 아니라 문학과 도덕까지 왜곡시킨다. 이에 대해 이하에서 자세히 해명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철학자가 마치 종교의 Guru와 같은 방식으로 삶의 지침 내지는 지혜를 한 문장 속에 함축해서 제공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철학자의 유명한 문구를 마치 종교 경전의 특정 문구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인다(요새는 심지어 문자주의자가 아닌 한 진짜 종교 경전조차도 이렇게 읽지는 않는다).

  예컨대 칸트 철학에서 매우 유명한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보자. 이 말은 엄격한 의미의 인식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칸트의 해명이 잘 요약되어 있는 분석적인 문구로, 굳이 말하자면 '차가운' 쪽에 속하는 문구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싸 인문학'은 모든 것을 '뜨거운' 방식으로 해독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칸트 철학의 본래 내용이 무시되고 해당 문구만이 탈맥락적으로 인용되어, "크...... 역시 삶을 건실하고 충만하게 살아야지"라는 식으로, 마치 직접적으로 삶에의 지침을 제공하는 문구인 것처럼 도덕주의적으로 독해된다. 한편, 문구 속에 함축된 삶에의 교훈이 있을 거라고 믿고 그것을 그 철저히 문구 속에서만 나름대로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문학적인 독해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독해 방식들은 완전한 오독이다. 요컨대, 한국에서 소비되는 인싸 인문학이 본래 인문학의 내용에 비해 왜곡되기 쉬운 이유는, 주 소비층의 직관 속에서 이상하게도 철학에 해당하는 영역이 매우 작고, 문학 그리고 규범 도덕에 해당하는 영역이 비대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철학 텍스트에도 마치 문학을 대하듯, 혹은 규범 도덕을 대하듯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철학을 왜곡시킬뿐만 아니라 심지어 문학과 도덕조차 왜곡시킨다. 현대에 문학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이며, 세계에서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아주 좁은 단면을 날카롭게 증언하여, 인간의 사유가 게을러져서 퇴행적으로 흐르지 않고 끊임없이 세계에 대해 세심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보편성의 확장).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문학은 여전히 그 스스로가 보편성을 자임하는 것, 거대 서사를 통해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수구적 보편성의 전시).

  한편 도덕은 상호 관계, 그리고 다자간의 관계라는 계기를 포함하여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나, 한국 사회에서는 도덕이 상호적인 예의의 측면에서 검토되기보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따라야 하는 상징적인 문화적 규범의 형태로 주로 나타난다.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 윤리학은 물론이거니와, 정언명령으로 대표되는 칸트적인 규범 윤리학에 비해서도 퇴행적인 토테미즘적 사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문학 과잉과 도덕 과잉의 경향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교훈 위주의 사고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일부 중장년들의 삼국지 신봉이다. 삼국지라는 특정한 작품에 삶에 대한 최고도의 도덕적 진리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고 그 책이 제공하는 교훈들이 교육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서양에 비유하자면 장르의 미분화와 문자 기술의 부재로 인하여 원시종합예술을 통해서만 지식이 교육될 수 있었던 고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와 같은 소위 인문 고전을 현실적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한 최고의 참고서인 양 신봉하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 무리한 주장을 해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기까지 하다. 거대한 서사(narrative)와 그 속의 상징(symbol)에 의존하여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컬트에 불과하며 공적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컬트를 신봉하는 이들의 국가는 현실 속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 아닌 이념의 전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양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내 직관에 따르면 위와 같은 현상에는 리더의 덕목만을 강조하는 동양권의 입신양명 서사, 그리고 중화로부터 비롯된 유교 문화권의 지적 전통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주류적인 분위기 하에서는 분석적이고 건조한(?) 철학의 영역이 축소되어 있고 문학의 영역 및 규범도덕의 영역이 과잉되어 있으며, 후자의 두 영역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한국 특유의 '교훈' 개념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철학뿐 아니라 문학과 규범도덕도 왜곡된다. 그리고 시장의 수요에 맞추어야 하는 인싸 인문학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왜곡되어 독해되며, 결국 그 주류적인 분위기를 강화시키는 데 복무하게 된다. 그리고 약간 무리하게 확장하자면 이것은 반민주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이 오직 한국만의 경향이라고 단정지어 자국혐오를 자행할 생각은 없으나, 굳이 해외와의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개선이 필요한 문제라고는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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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9일 수요일

대학생 장터 주류판매 금지 관련

  국세청 및 교육부에서 대학생들이 장터에서 주류를 판매하는 것이 (면허가 없다면) 주세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는 공문을 각 대학에 보냄에 따라 근래 며칠 동안 학생사회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처음 소식을 듣고 나는 개별 부스가 아닌 주최측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허가 받아서 토큰제를 시행하는 것을 상상했었는데, 공유한 POSTECH의 사례가 이것과 비슷한 방향으로 잘 해결을 본 것 같다.

  학생회와 동아리 등이 장터를 운영하면서 사회운동 등을 위한 자금 마련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그래서 사회진출한 선배들이 방문해서 팔아주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역사적 기원에 가깝고, 현재 장터의 주된 모습은 주로 수입 자체보다는 구성원들 간의 친목과 재미에 그 의의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류 판매는 사실 하지 않으면 그만이긴 한데, 학생들의 요구가 많다면 학생회가 이렇게 책임지고 해결하는 것이 학생들의 법익을 보호하면서도 캠퍼스 문화를 활성화한다는 면에서 모범적인 모습인 것 같다. 물론 모든 학생회에 이것을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음주 때문에 발생하는 학내의 소음 및 추태로 인한 항의도 많다는데 이왕 찝찝한 탈법의 영역을 해소하고 제도적 해결을 보는 김에 이런 점도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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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8일 화요일

'내로남불'의 논리학과 화용론

  나는 소위 '내로남불'에 대해서 전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인 일관성보다는 정치적 지형 상에서의 일관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논리적 오류가 존재하더라도 그 교정의 가능성은 언어 속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반면, 머릿속에서 정치 지형을 실제와 전혀 다르게(혹은 매번 다르게) 설정해 놓고, 제대로 된 조준 없이 자신의 주장을 '난사'한다는 것은 그 의제가 논의되고 있는 도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므로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기 어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내로남불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생각보다 그 근거가 미약하며, 논리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신뢰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내로남불을 대략 도식화해 보자면 "상대방은 A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A를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딱히 '논리적 오류'라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주장은 하나의 당위명제일 뿐, 그 안에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저지른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성하고자 한다면 그 시도의 결과물은 얼마든지 논리학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타당할 수도,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논리는 구성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된 논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반드시 하나 이상의 당위명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로남불은 정당하지 않다'라는 결론(당위명제)을 유도하고자 할 때, 당위명제가 아닌 사실명제들만을 전제로 하여 그러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간에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리적 정당화의 시도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침묵하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사과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내로남불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의 시도,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의 시도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위의 내용을 반대로 말하면, 논리는 어차피 구성하기 나름이므로 내로남불의 정당화에 대한 논리적 비판도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은 것이 된다. 보다 강력한 비판을 위해서는 결국은 사회적 계기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로남불은 심지어 '수행적 모순'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수행적 모순이란 화행(speech act)의 타당성이 부정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는 그 자체로 솔직하고 투명한 주장이며, 그 내부에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수행하는 A'와 '내가 수행하는 ~A'는 엄밀히 말하면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표출적 진술)가 아닌, 내로남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발화(규범적 진술)는 그 타당성 요구에 대한 거부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따라서 내로남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발화는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규범적 진술에 대한 타당성 요구 주장을 검토하는 작업에는 사회학의 영역이 개입되어야 하고, 언어만을 분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분석이 유보된다.

  요약하자면, 흔한 오해와 달리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는 그 안에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수행적 모순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규범적 진술로서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발화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논리적으로 비판될 가능성이 있으며, 수행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내로남불의 문제점은 그저 그것이 노골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상호주관성의 측면에서 발화자에 대한 신뢰를 깎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뿐이다. 무언가를 노골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며, 내로남불의 정당화 시도는 수행적 모순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사람이 비판받자 '그그같'('그거랑 그거랑 같냐?')이라고 반문하는 클리셰가 설정되어 희화화되곤 하는데, '그그같?'에 대한 반박은 위와 같은 이유로 생각보다 어렵다. 실제로 모든 경우에 그거랑 그거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수행하는 A와 내가 수행하는 ~A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그같'이 내로남불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기계적 판단은 사실 그 근거가 미약하며, 그거랑 그거랑 비록 다르지만, 어느 정도 동질적인 성격의 것이라서 같은 잣대를 적용 가능하지 않냐고 주장함으로써 내로남불 정당화 시도의 수행적 모순을 입증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그거랑 그거랑 표면적으로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동질적인 성격의 것이 아닐 경우에는, 내로남불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과감하게 돌파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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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일 수요일

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2)

  국가폭력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실존의 문제 앞에서 정치적, 도덕적 의식은 얼마든지 '한갓된' 것일 수 있다. 정치적 의식에 부합하는 선택과 스스로의 고통을 경감할 것으로 기대되는 선택이 서로 대립될 경우에,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가 전자를 택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모두가 위의 대립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견주어 보면서 선택을 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가 중점을 두어 비판해야 할 것은 다수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징병에 의해 행사되는 국가폭력이 대외를 향하지 않고 대내를 향하도록 일부 전환하여 일상적으로 시민들과 충돌하도록 판을 벌여 놓고, 그 선택지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사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에 호소하여 투쟁을 어렵게 만들고 국가 폭력을 은폐하는 상황 그 자체이지,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선택을 한 개별 주체들이 아니다.

  꾸준히 언급해 온 점이지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개별 주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들 개인에 대한 공적인 자리에서의 비난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오해와 달리, 내가 즐겨 쓰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에서 '인간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정서적인 편안함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비정해서는 안 되고 무턱대고 관용을 가져야 한다는 따위의 상투적인 표현이 당연히 아니다. 그 의미는 선택의 주체인 인간이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서 작용하는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자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군 복무 이행의 형태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 문장은 잘 적용된다.

  징병제라는 국가폭력 하에서 누군가는 위와 같이 견주어 보는 과정을 통해 의경을 선택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같은 과정을 통해 반대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자가 의경을 선택한 자들에 대해 혐오발언을 자행하는 모습은 모순적이고 희극적이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지 않고 개인을 본 것은 과연 누구인가?

  + 추가로 드는 생각은, 애초에 SNS 상에서 일어나는 몇 줄의 의견 교환으로는 서로의 논지를 확인하는 것부터가 어려울 만큼 전제의 차이가 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정치에서 기본적으로는 국가권력이 온건하고 민주적으로 행사되도록 감시하고 그렇게 행사되는 국가권력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국가권력과 분리된 영역에서의 의식화를 통해 사회 전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반민주적이니까 말이다. 개인들의 주체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들의 개별적인 선택에 도덕적 의무론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대중은 설득의 대상이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면 나는 엄격한 의미에서 진보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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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1)

  나의 페이스북 이용 방식은 수동적인 편이다. 나의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포스팅하기보다는, 들려오는 이슈들에 대해서 답답한 지점이 있으면 내 나름의 관점으로 그것에 대해 글을 써 보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군대와 국가폭력'에 대한 얘기를 유독 자주 쓰게 된다.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이나 징병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보에 위협이 되는 불온한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는 반동적인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군대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만족스럽지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국가폭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우파의 전형적 방식도 잘못되었고, 국가폭력에 대해 정교한 성찰 자체를 거부하는 좌파의 전형적 방식 역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나의 관점이, 대단히 조심스럽게 발화되지 않는 한 어디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관점이라는 뜻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최근에 페북 친구를 맺은 어떤 분이 의경을 강하게 비난한 것을 캡쳐본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대략 말하면 의경 복무자들을 자기 몸 편하려고 대중을 압제하는 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목숨을 잃어도 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1) 징병제는 국가폭력이다 (2) 그러므로 부당하다 (3) 그 중에서도 의경 제도는 특별하게 부당하다는 세 가지의 명제가 모두 입증되어야 한다. 각각의 단계의 입증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중대한 문제를 우선 차치하고 셋 모두를 비판 없이 전격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복무 방식의 선택은 온전히 자발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징병제라는 국가폭력의 압박 하에서 개인에게 그나마 선호되는 환경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상적인 시공간, 일상적인 과업들로부터 유리되어 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복무자 개인에게 대단히 큰 실존적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그나마 선호하는 의경이라는 환경을 선택했고, 그 환경이 시위대에 대응하는 역할이라고 해서 그 개인에게 국가폭력에 대한 정치적인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며, 그러한 정치적 의식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고 독단이다.

  이렇게 보면 설령 의경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의경으로의 전환복무를 선택한 개인이 아니라 징병 제도, 혹은 의경 제도의 운용 자체에 있게 된다. 좀더 구체화해 보자면, 다양한 틀이 있겠지만 예컨대 대외를 향한 폭력을 담당하여야 할 군 인력을 대내를 향한 폭력으로 '전환'하는 것의 법적, 제도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 등이 가능할 것이다.

  유명한 페이스북 페이지 '헬조선 늬우스'가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에 이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의경들을 비난해서 일어난 큰 논란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좌파 일각에서 관찰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나이브한 보이콧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징병제의 당사자들에게만 2차 피해를 입히게 된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개인을 보고, 개인을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는 행태는 책임 소재를 흐리고 문제를 불명확하게 할 뿐이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지 자체도 논쟁거리가 되는 판에서, 부상을 입어도 싸다거나, 호적에서 파야 한다는 단순한 정념 표출에 불과한 발언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국가폭력에 대해 가장 정교하게 성찰해야 할 좌파를 자처하면서 정작 국가폭력의 말단에 위치한 개인들에 대하여 정념에 기반을 둔 노골적인 혐오를 자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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