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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7일 월요일

지능, 감정, 의식 - part 1. 지능

<주제 소개>
  매우 잘 발달된 강한 인공지능은 감정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input과 output으로만 봤을 때 감정과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해도, 그게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인지는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이다.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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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적 고찰>

  나는 생명체의 지능, 감정, 의식 등은 온전히 뇌 속 신경세포의 연결성(그리고 연결 강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조절 요소)으로부터 창발되는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물질적인, 신비한 '영혼이 깃드는' 것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좀 더 확장시켜서, 세상 모든 걸 '대상자'(대부분의 물체)와 '판단자'(컴퓨터, 인간, 동물 등)로 대충 나눠 보자. 대상자와 판단자의 차이는 판단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이 때 철저히 논리적으로 따져서 뭔가를 결정하는 것, 감정에 치우쳐 뭔가를 결정하는 것 둘 다 '판단'이다.'지능'이라고 부르면 감정이 배제된 느낌을 주기에, 약간 생소하지만 '지능, 감정, 의식' 등을 포괄해서 판단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대상자와 판단자는 하늘과 땅처럼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경계가 불분명하고 연속적이다. 예를 들어, 매우 고전적인 기계장치 중에서도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할 것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를 그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 그 무게가 A보다 크면 a1이라는 소리를 내고, A보다 작으면 a2라는 소리를 내는 저울을 구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만들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이 한 가지 간단한 판단밖에 못 하는 기계 장치('단위 판단 기계'라고 부르자)를 '판단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판단 능력이 '있다/없다'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절대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판단 능력은 '정도'의 문제로, 아무 판단도 못 하는 바위 같은 것부터, 약간의 판단을 할 수 있는 단위 판단 기계, 미사일의 경로를 계산할 수 있는 초기 컴퓨터, 그리고 스스로의 본질과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인간의 뇌까지, 실로 다양한 '정도'의 복잡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 식물은 판단자일까? 일단 포괄적인 의미에서 판단자가 맞다고 본다. 확실히 식물은 앞서 언급한 '단위 판단 기계'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시스템이다.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서 꽃을 피워서 자손을 퍼뜨리고 하는 과정을 봤을 때 기본적으로 식물은 외부 자극을 받고 피드백을 통해 반응하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얼마 전에 화제가 된, 구글의 스마트홈 진출의 시작을 알린 난방 조절 장치(Nestlab이었나?)는 식물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단순하다. 그러나, 식물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양상은 의외로 정말 간단하게 재현이 된다. 유튜브의 '무니무니교수'의 영상을 보면, '더 높아지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면 좋다'는 것, 그리고 '위에서 봤을 때의 면적이 더 넓어지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면 좋다'는 두 가지 조건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을 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프로그래밍을 하면 놀랍도록 실제 식물과 똑같은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여튼, 내 기준에 따르면 식물은 판단자가 맞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능력들의 근저에는 과학이 말해주는 것 말고 어떤 '신비한 요소'도 없다고 본다. 컴퓨터도, 동물도, 인간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고도로 발달한 판단능력이 '신비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도 뇌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단위 판단 기계, 컴퓨터, 동물, 인간 등은 처리할 수 있는 input의 종류가 각기 다르며, 같은 형태의 정보라도 output이 나오는 양상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인간이라도 사람에 따라 output이 다르다. 이 모두가 서로 다른 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input을 처리하여 output으로 내보내는 회로가 서로 다르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전기 회로를 통해 수많은 0과 1을 다루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숫자 계산을 통한 논리적 판단'에 특화되어 있으며, 동물은 신경망 회로를 통해 수많은 외부적 자극을 종합하는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어떤 근육을 어디로 얼마나 움직일지에 대한 판단'에 특화되어 있으며, '인간'이라는 동물의 한 종은 앞의 2개 둘 다 적당히 잘 함과 동시에,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수량적이지 않은 논리적 추론', 즉 '학문'에도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이 글의 기본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이제 이 관점에 기반하여 '지능', '감정', '의식'(이 역시 명확히 나눠진 것은 아니다)이 컴퓨터에게, 동물에게, 인간에게 '실제로' 있는가에 대해 논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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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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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우선 '지능'(수량적,수치적 지능, 형식논리적 추론 지능, 학문적 지능 모두 포괄한다)에 관해선 꽤나 쉽게 결론이 날 것 같다.

  아주 기초적인 c언어 프로그램을 가지고도 컴퓨터가 수치해석적으로 적분을 계산하도록 만들 수 있으며, wolframalpha 등의 프로그램은 수치해석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는 방식대로 식을 통해 '정확히' 적분을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에겐 수량적, 수치적 지능이 명확하게 있다.

  다만 문장으로 된 명제들을 다루는 '형식논리적 추론' 지능의 보유 여부는 컴퓨터마다 다르며, 아마도 기호논리학적 지식과 인간의 통사규칙을 정교하게 프로그래밍해 두면(그리고 통사규칙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문장을 input으로 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형식논리적 추론 지능 역시 크게 어렵지 않게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순히 형식논리의 내적인 완결성을 통해 참/거짓을 판별하는 게 아니라, '이 말이 실제로 맞는 말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학문적 지능'은 컴퓨터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

  우선 컴퓨터의 내적인 계산 능력만으로는 절대 안 되며, 외부 세계의 상호 작용이 필수적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통계 데이터이든, 물리적 세상을 측정할 수 있는 센서이든,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학과 논리학이 아닌 많은 분야의 경우, '분명히 틀린' 것은 있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맞는' 것은 별로 없다(특히 인문학의 경우). 따라서 '이게 과연 맞는 소리인가'의 판단은 간혹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각종 '상식'들, 그리고 학술 세계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그런 상식과 합의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컴퓨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올해 1인당 GDP가 2만 5000달러이다'와 같은 말은 컴퓨터도 쉽게 할 수 있다. 비록 문장의 형식을 빌리고 있긴 하지만, 저 문장은 그냥 계산식을 말로 간략하게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통계 데이터를 주고 GDP의 정의를 주면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좀 더 엄밀하게 쓴다면 '이 통계 데이터에서,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고 모두 더하고...(그렇게 구한 값을 1인당 GDP라고 한다) 어찌저찌 명령대로 해 봤더니 2만 5000달러가 나왔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물론 그걸 'GDP'라고 뭉뚱그려서 쓴 건 인간이 그렇게 print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며, 이 문단의 논의에서는 벗어난다. 후술한다.) 이건 수량적, 수치적 지능의 범주이다.

  그런데, 그 통계 데이터가 과연 맞게 산출된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좀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우선 통계 데이터 자체에서 좀 이상함을 감지할 수도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어, N이 이렇게 큰데도 제대로 된 분포가 안 나오는데요?'같은 것 말이다.

  좀 더 고차원적으로 가면, '상식에 맞지 않는 데이터'의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식은 역시 인간이 주입해 주는 것이다. 역시 난 전혀 모르지만, 대충 말하자면 '어라, 주인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좁은 구역에서 각 가구마다 소득이 들쭉날쭉할 수는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를 보세요. 뭔가 이상해요'와 같은 것 말이다.

  이제 좀 더 고차원적으로 가면, 데이터의 입력만으로 컴퓨터 스스로 상식을 갖게 할 수 있는데, 이건 최근 크게 발달하고 있는 학문 분야인 것 같다. 이를테면 '어라, 그동안은 이런 식의 패턴은 한 번도 안 나왔는데, 이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보고해야겠어.' 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렇게 인간 언어로 사고한다는 건 아니고, if문, for문 등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언어를 통해서(좀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0과 1의 처리를 통해서)사고할 것이다.) 이건 최근 발달한 핀테크(Fintech) 분야에서, '뭔가 이상한' 거래를 감지하여 차단하고 보고하는 기술을 통해 이미 실현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3분 전에 결제된 카드로 중국에서 결제가 이루어지거나, 터무니없는 소액, 터무니없는 거액의 결제가 이루어질 때 컴퓨터 시스템은 그것을 감지하여 차단할 수 있다.

  가장 고차원적인 건 이를테면 '과연 이 GDP라는 지표가 한 국가의 발전상을 온전히 나타내 주는 기술일까? 더 좋은 지표는 없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아니, 질문을 던지는 것까진 안 가더라도 그런 질문이 들어왔을 때 이해하고 답을 내놓을 수라도 있는 능력이다. 이건 말 그대로 '학문적 지능'이다.

  이러한 '학문적 지능'엔 더 다양한 비정형 데이터 처리 능력, 더 많은 데이터, 더 복잡하고 더 좋은 학습 알고리즘 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전기회로는 전혀 다르기에, 인간이 내리는 판단과 컴퓨터가 내리는 판단은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컴퓨터가 '학문적 지능'을 갖게 하려면 되도록 인간을 닮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단히 파격적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기에 너무나도 기괴하고 이상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아니 당장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기괴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냉전 시대를 살아가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학습된 사람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사람들에겐 모든 게 그 관점에서밖에 파악될 수 없고,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우리 세대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판단들을 하곤 한다. 아마 다음 세대가 보기에도 우리 세대의 판단 체계 중에선 언뜻 이해가 안 가는 기괴한 부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더욱 극단적인 예로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만 받으며 자라온 사람이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학습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일반인이 볼 때 기괴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판단은 '형식논리적으로 합당하며, 나름의 이론체계도 갖춘' 것일 수도 있다. 고지능 범죄자들의 개똥철학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하물며 같은 사람 안에서도 타고난 두뇌회로가 다르고 학습한 내용이 달라서 각자가 내리는 판단이 이렇게 다른데, 사람의 뇌와는 그 근본부터가 전혀 다른 컴퓨터가 내리는 판단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선량한' 판단을 내리게 하기 위해 인간을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게 좋다. 그러나 아무리 뇌를 닮았어도 그 근본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시뮬레이션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도 그렇다. 설령 원자 수준에서 bottom up 방식으로 뇌를 시뮬레이션하더라도 실제 원자들이 조합된 뇌와는 전혀 다르다. 물리적으로 근사가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뇌와 완전히 같은 것은 뇌 자체뿐이다. 또한, 설령 정말로 뇌와 비슷한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해도, 학습이 약간만 이상하게 되어도 돌이킬 수 없이 너무나 기괴한 판단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기괴함'의 이슈는 이 글의 part 3. 감정 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시 한번 다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게 이런 걸 시키고 싶어하는(과학자든, SF 소설가이든) 이유는 인간이 갖지 못한 엄청난 데이터 처리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인간과 똑같은 구조로 선량하게 사고하는데, 데이터 처리 능력은 엄청 좋은 컴퓨터'는 오로지 '인간 뇌를 그대로 시뮬레이션하되, 계산 능력에 해당하는 부분만 엄청나게 비대하게 한, 뇌 시뮬레이터'에 가까울 것이다. rough하게 말하자면 '사람 뇌에 컴퓨터 달고 인터넷선 꽂아 둔' 것 말이다.

  뭐 어쨌든, 내 개인적으로는 그냥 각 분야에 locally 전문화된 인공지능들을(굳이 인간 뇌를 닮지 않더라도 각자의 영역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발달시키는 게 좋다고 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 같지만, 사람들이 많이들 우려하는, 그리고 꼭 우려해 보아야 하는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에 대해서 좀 길게 써 봤다.

  어쨌든 결론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더 크고, 더 복잡해진다면 뇌에 준하는 '학문적 지능'(꼭 그 판단 양상이 인간과 닮진 않더라도)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을 닮도록 하거나, 아니면 굳이 인간을 안 닮더라도 그 판단 결과를 세상에 실행하는 것만큼은 충분히 사려깊은 인간 관리자에게 맡기도록 해야 사회가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어쨌든 '학문적 지능'은 아직 달성은 안 되었지만,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닌 듯하며(주지하였듯이, 인간에게 컴퓨터와 다른 '신비로운' 것은 없다) 많은 컴퓨터 공학자들과 미래학자, 소설가들은 그런 지능을 이미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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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의 경우엔 수량적, 수치적 지능이 아주 초등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먹이가 많다, 적다를 한눈에 보고 판단하는 건 수량적, 수치적 지능이 아니다.) 종별, 개체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원숭이 정도 되면 거의 확실히 숫자를 셀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Alex라는 기록적인 천재 앵무새의 경우에도 숫자를 셀 수 있었다. 사칙연산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질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니며,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뇌 구조가 매우 특별한 outlier 개체가 있다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경우도 대체로 사칙연산을 할 수 있지만 일부 outlier의 경우 사칙연산을 못 하지 않는가? 뇌 구조가 달라서 말이다.

  동물의 경우에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은 과연 존재할까? 일단 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 모든 개체에서 유의미한 수준으로 관찰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관찰되었다면 크게 화제가 되어서 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원숭이들이 우가우가 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일종의 사회적 신호를 통해 꽤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건 원숭이들의 세계 속에서 합의된 일종의 실천적 '학문'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전체상을 파악하여 정리하고 있는 원숭이들은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뇌를 black box로 보고 input-output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단은 학문 비슷한 걸로는 취급할 수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인지과학적 발견이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어쨌든 현재까지는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개체나 종은 없는 것 같은데,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고, 돌연변이나 진화에 의해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의 경우는 수량적,수치적 지능,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형식논리적 지능은 대체로는 '절대적으로 맞다'고 인정되는 것 같지만 (3단논법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상한 3단논법들도 있지만 그것은 각 명제들의 숨겨진 의미를 고려 안 해서 그렇고, 3단논법 자체가 내적으로는 '맞는' 것이다), 대체 뭐에 비추어서 맞다고 할 수 있는 거냐 하면, 신기하게도 딱히 답을 못 하겠다. 저것이 어떤 분야의 질문일지부터가 궁금하다. 그리고 학문적 지능의 경우는 '맞는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며, '비수량적 추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식물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수량적,수치적 지능,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 모두 없다. 근데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은 잎 안에 들어간 벌레가 특정 털(?)을 두 번 건드리면 잎을 닫는데, 이 경우는 매우 초등적인 수량적 지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로써, 인간, 동물, 컴퓨터라는 각각의 판단자가 '지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논해 보았다. 다만 계속 강조하듯이, 여기에서 설명한 것들은 딱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며, 개체마다 다를 수 있고,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현재 시점에서의 컴퓨터, 동물, 인간의 stereotype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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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의식 - preview>
흔히 말하는 '의식'이란 '내가 나로써 있음/내가 나임'(be)을 인지하는 것일 텐데, 이를 과학적으로 해부해 본다면 아마 수많은 감각 요소들을 종합하여 사고함과 동시에, '내가 감각하고 사고한다는 것을 감각하고 사고함', 즉 '메타-감각, 메타-사고'가 바로 의식의 실체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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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3일 토요일

중력파 측정

"Ladies and gentlemen, we have detected gravitational wave. We did it."

  두 블랙홀의 충돌에서 나오는 중력파를 LIGO로 측정했다는 듯 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에 의해 시공간이 왜곡되는데(그리고 그게 바로 중력인데), 블랙홀의 충돌로 시공간이 크게 왜곡되면 공간상에서의 '거리'가 달라질 거니까, 그 거리 변화를 간섭계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측정된 것.

  일반상대론은 수성의 근일점 이동 등을 이론적으로 잘 설명하면서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이번 중력파 발견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통합해서 모든 전자기 현상을 전기장, 자기장에 대한 4개의 식으로 집대성했을 때, 전자기장이 진동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하는 현상인 '전자기파'가 Hertz에 의해 실제로 검출됨으로써 전자기 '장'이라는 것이 단순 편의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임을 밝힐 수 있었다.

  이번 발견도 꽤나 비슷한 것 같다.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중력장이 심각하게 변화하는 게 '실제로' 시공간의 왜곡을 유발함을 증명한 것이므로, 즉 중력파 라는 게 물리적 실체이고 그건 다름아닌 시공간 자체의 요동임을 보인 것이므로.

  아직 먼 얘기라고는 하지만 중력파를 이용한 망원경이 개발되면 아직 빛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38만 년이던가?)의 초기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힉스입자 관측부터 해서 20세기 물리학의 중요한 과제들이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것 같다. 뭐 표준모형의 수정 필요성 제기, 상대론과 양자역학 통합 시도 등(이런 거 학부 수준에서라도 이해해 볼 기회는 없으려나...)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그런 과제들이 하나하나 해결되다 보면 패러다임 시프트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해서, 이대로 물리학자들의 할 일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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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아름이'에 대한 좋은 글을 읽고




열심히 읽어보자. 새터에선 이런 얘기 안 하려나 ㅋㅋㅋ

복잡하고 진지한 얘기까지 안 가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 관점에서만 생각해 봐도 이건 많이 나아져야 정상이다. 말하기 전에 한번씩만 더 생각하기!

'본능인데 왜 문제삼느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실제로 가끔 듣는 말) 동료 학우들이 대숲에 저렇게 글 쓴 걸 보면 그렇게 말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 분위기가 있긴 있나보다. 좀 돌아보고 신경들 씁시다' 로 가는 게 올바른 두뇌회로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한창 사회화가 진행될 시기에 남/여 중고교 분리해 놓는 게 참 안 좋은 듯. 성급한 일반화를 하면 안 되겠지만, 내 주위에선 이런 면에서 '예의' 감각이 없는 학우들은 남고 또는 과고 출신들인 경우가 많아서... 남초 과라는 환경이 그걸 확대 재생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ㅠㅠ 이건 성별을 바꿔 봐도 마찬가지일 것.

글이 지나치게 겁주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소위 찝적충(본문에서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들을 안 겪어 봐서 그런 걸 거다. 그런 경우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선량한 공대생(?) 들도 보다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서로 배려하는 아름다운 캠퍼스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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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6일 화요일

'허언증 갤러리'의 미학

  디시인사이드 허언증 갤러리(이하 '허갤') 출처의 드립들이 캡쳐되어 페북에 자주 올라오는데, 뻘짓들이지만 굉장히 재밌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 성취되기 힘든 높은 목표 등과 관련해서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는 건 언제나 엄청나게 재밌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이입으로 가히 인간의 본성적 욕구라고 할 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겉으로 이야기되기는 힘든 것들이다.

  소설과는 좀 다른 것이, 소설은 비록 가상이지만 사실적인 갈등구조 속에 독자를 몰입시켜서 감명을 주는 것인데 반하여 허갤의 기획은 어차피 거짓말이라는 게 합의된 어떤 '우월한 상태'에 자신과 독자를 이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갤의 드립들이 유저들에게 재미를 주는 방식을 세 단계로 구조화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해당 '허언'의 참신함(소위 드립력)에 대한 인정의 의미에서 나오는 웃음이며, 둘째는 그 허언에서 묘사하는 우월한 상태에 자기이입이 되어 실실 웃게 되는 웃음이며, 마지막 셋째는 그 허언이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허위의 것에 그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묘한 파토스이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허갤의 개드립들이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과 잘 맞닿아서 강력한 재미를 주는 이유가 잘 해명된다. 아마 두번째 단계에서 이것이 하나의 놀이에 그치지 못하고 현실로 믿어져 버린다면 허언증이라는 정신적 질환이 되는 것일 테다.

  그런 면에서, 가상의 우월한 상태를 자랑하기로 합의하여 판을 깔아 준 허갤이라는 공간의 속성은 다른 사이버 공간과 비교해도 매우 독특하다. 만화 캐릭터나 유명인으로 코스프레를 하고 참여하는 '코스튬 파티'와 매우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존재론과 관련해서는 이화여자대학교 김선희 초빙교수의 <사이버 공간이 다중자아 현상을 일으키는 존재론적 구조>(哲學 제74집, 2003.2, 171-191 (21 pages))를 참고하라.)

  요약하자면, 허갤은 '거짓 자랑'이라는 형태의 드립을 치기로 합의된 장으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드립력을 인정받는 놀이가 행해진다는 점과, 그러한 놀이를 통해 '우월한 상태'에 자기이입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어, 다른 드립들과는 차별성을 갖는 심층적인 재미를 유저들에게 제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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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6일 수요일

'9 lights in 9 rooms' 전시 관람 후기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관람한
Spatial Illumination - 9 lights in 9 rooms
공간 구성에 있어 '빛'을 적극 활용한 아홉 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자는 서로 다른 아홉 개의 공간을 돌면서, 보이드 공간에 빛이 여러 방식으로 첨가될 때 각각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 체험하게 된다.

볼 만 했다! 특히 빛이 단순히 조형예술로서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의 구성 요소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작품이 있는 공간과 없는 공간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떠밀려서 못 찍었지만(사람 많습니다) 마지막에 지극히 단순한 도형들의 반복으로 빨려들어가는 효과를 내는 건 마치 CG가 없던 시절 20세기 초반에 영사기로 만들어 낸 추상영화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다만 전시 주제와는 달리 음향 캐리인 측면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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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한국 정부가 일본 측에 진정성 있는 사과, 법적 책임 인정, 배상 등을 요구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진정성 있는 반성이란, 자국 정부가 과거에 행한 전체주의적 폭력을 적극적으로 밝혀내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교육을 자국민들에게 시킬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단순히 두 정부 간의 외교적 갈등이라고 인식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러나, 합의 내용에 대한 홍보를 보면, '금번 합의를 통해 앞으로 갈등을 안 겪을 수 있어서 잘 된 일'이라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합의 내용을 보면, 진정성 있는 반성과 법적 책임 이행은 일본 측에 요구되지 않았고, 일본 총리가 짧게 사과하는 것(그 날도, 총리의 부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다)과,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단에 일본 측에서 자금을 출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사과를 받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문제로 인한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문제를 천으로 덮어 버린 것에 불과하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는 국제무대 등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합의는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본질적으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후대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냥 제기하는 것이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선언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은 일본에 영원한 면죄부를 주고, 향후 문제 제기에도 철면피로 일관할 수 있게 하므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이다.
이 합의 과정에서, 주체인 피해 국민들은 완벽히 배제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할 정부가, 독단적으로 매듭을 지어 버렸다. 갈등을 해소했다기보단, 갈등이 보이지 않도록 땅 속에 묻어 버린 것에 가깝다.

과연 누구를 위한 합의였나. 대승적 관점에서 이해를 바란다고 하는데, 그 대승적이란 거 아무래도 '사사로운 이익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식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돌려 말한 것 아닌가.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대리자 아닌가.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말로 매듭을 지어 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통탄할 노릇이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6.25 및 베트남전 당시에 국군에 의해서 유사한 일들이 이뤄졌다는 것도 더 이상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덮어 버리지 않고 적극적인 논의를 통해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진정으로 과거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간, 민족간의 문제라는 추상적인 워딩으로 왜곡하지 말고, 현현히 실존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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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일 목요일

정치적 발화를 둘러싼 어떤 부조리에 대하여

[ 처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 - 함께하고 싶은 집회를 위하여 (by 박현우, Nov 30. 2015) ]

  말해져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져야 하기에, 오히려 말해지기 힘든 주제들이 있다.

  어떤 것에 찬성하면서도, '이런 단점이 있긴 하다'고 지적하면서 개선을 권유함으로써 보다 나은 찬성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반대하면서도, '이런 장점도 있긴 하다'고 하면서 맹목적인 반대가 아님을 천명함으로써 보다 나은 반대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들은 점차 다면화되는 반면에, 우리가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오히려 심도있는 비판이 사라지고, 일차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되고, 진영논리로 고착되고, 단편적인 인상들만이 흥행하고 있다. 그에 따라,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을 하려면 마치 사상검증 하듯이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하게 밝혀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그래서 말을 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찬성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반대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고
역으로,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반대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찬성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찬성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링크한 글과 같이 더 나은 집회를 위한 코멘트로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군을 동원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페이스북 페이지 '국민의힘'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더 나은 집회를 위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집회 자체를 부정하는 측에 힘을 실어 주는 효과를 내는 것을 배격하려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비생산적인 양비론 역시 경계하려면 또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너무 어렵다.

  비단 이 주제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려다가 포기한 일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다룰 주제 자체는 너무나 다양한 맥락,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복합적인 주제인 반면에, 그 주제에 대한 어떠한 의견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어떻게 나눠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차원적 대결 구도의 양쪽 편 중 한 쪽을 추켜세우고 한 쪽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그렇지 않을 거면 차라리 존재하기 말기를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도 의견이 사실상 '거의' 양분되어 있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 모두가 각자의 맥락 속에서만 주장한다면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상술한 사회적 강요 속에서 양분적인 대결 구도 자체에 매몰되는 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현상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더 좋은 말, 더 좋은 글을 생산한다면 그러한 현상을 피해갈 수 있을까? 그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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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21세기적 극단주의 추세에 대한 진단: 보편 가치를 통한 문제의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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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 이후에 근대 국가가 탄생하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모더니티의 모순성이 전체주의, 2차 세계대전, 핵폭탄 등을 통해 극단적으로 분출된 이후, 탈식민지화가 진행되고 민주주의, 평화, 다원성, 인본주의, 환경보호 등의 가치가 정착되면서, 세계는 꾸준히 위대한 보편적 인류애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이행되었다고 나는 믿어 왔다.

  문명이 도래하고 천여 년 만에 드디어 인간이 인간처럼 대우받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런 세상을 사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국가가 국민들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일이나, 영토 싸움, 종교 싸움, 이념 싸움에서 비롯된 국가 간의 전면전에 국민들이 희생되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가?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이룩되었는가? 위와 같은 면에선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문제가 터지고 있다. 새로운 문제인지, 아니면 가려져 있다가 비로소 분출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세계 각국을 막론하고 유의미한 수준으로 상당히 일관되어 있는 바, 우리는 그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결과 그 '일관된 문제'들이란 바로, 산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일상을 위협하는 테러리즘, 보편 가치 추구자들의 맹목화, 개인 사이의 증오, 인종이나 성별 등으로 나뉘는 집단 사이의 혐오, 정보화 및 글로벌화에 의해 정교하게 내재화된 인간 소외 현상, 갈수록 공고해져서 해답이 안 보이는 선진국과 빈곤국의 격차와 난민의 발생 등이다.

  국외에서는, 웬만한 국가 규모로 급성장해서 중세적인 방식으로 시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극단주의 종교 세력 및 그에 경도된 개인들에 의해 호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에서 반인륜적인 테러가 일어나고 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외국인이나 특정 종교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 및 증오 범죄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의 무덤인 아프리카, 전체주의의 무덤인 북한 같은 지역은 심지어 이러한 논의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어 극도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일단 위의 '일관된 문제' 이전에 권위주의적 군사 문화, 국가주의, 종교적 맹목성 등부터가 아직 극복되지 못했고, 심지어 더욱 심해지고 있다(이 내용 역시, 어찌보면 이 글보다 더욱, 정말 중요하지만, 별개의 글에서 다루어야 하므로 일단 보류한다). 또한 위의 '일관된 문제'에 속하는 성별 집단, 인종 집단 등에 대한 각종 혐오 언행, 개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증가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이 꼭 필요한 움직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맹목화되어 퇴색되고 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글로벌한 규모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사유와 담론은 도태되고 말초적 자극만이 힘을 키워 가고 있다.

  신기하게도, 가장 사회성숙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국가에서 차별 발언 및 증오 범죄가 가장 광기어린 형태로 빈번하게 나타나며, 마찬가지로 시민의식이 높다고 평가되는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극단주의적 테러리즘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 호주 등과 같이 선진국이지만 사회구조 및 시민의식이 성숙하는 과정 중에 있는 국가들에서는 차별 발언 및 증오 범죄도, 테러리즘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도 이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이 갖는 함의는, 이러한 '일관된 문제'들은 모더니티의 결여 및 불완전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티 달성 이후에 생기는 '새로운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관된 새로운 문제'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할 (시도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진국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범국가적 연대를 통한 극단주의의 종식인가? 민주시민교육 빛 비판적 사고능력 함양 교육의 강화인가?

  또한,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를 이식해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미디어를 활용한 약자들의 글로벌하고 평화적인 연대를 통한 보편 가치의 추구인가? 사회민주주의적 모델인가? 지역사회의 역할 증대인가? 아니면 어떠한 가치를 이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인가?

  물음표만이 계속된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들이, '일관되게' 발생하는 데에는 분명히 어떤 원인이 존재할 것인데, 그러한 원인에 대한 검토와 진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 초반에 언급한 민주주의, 평화, 다원성, 인본주의, 환경보호 등의 보편 가치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우리가 무언가 다함께 놓치고 있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인 만큼, 이에 대한 진단은 굉장히 그 규모가 큰 담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조사하고 끊임없이 사유하여,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사람을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존재하게 해 주는 사회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그러한 해결책들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적용해 보아야 한다.

  그 과정은 어쩌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며, 극단성이 분출될 위험 역시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20세기에 그러한 혼란과 극단성 분출을 겪은 바 있다. 오히려,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기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리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여 점진적으로 가치지향을 재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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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8일 일요일

국가의 반민주적 퇴행에 대한 국민 책임론에 반대한다

  최근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그리고 그 추진 배경 및 절차에서 폭넓게 드러나는 현 정부의 반민주성과 권위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지적해 온 바 있다.

  그런데, 현재 이슈의 진단에 있어 '국정화 반대율이 높은 청년층이 정작 투표율은 낮기 때문에 난 사달'로 규정하는 것을, 국정화 지지 측은 물론이고 반대 측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젊은이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정작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일련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국민 책임론 내지는 '20대 책임론'이라고 일컬음과 동시에,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함을 선언한다(본래 '20대 책임론'은 민주화 이래 뿌리깊은 세대갈등론에서 청년세대의 각성을 촉구해 온 진보진영의 견해를 폭넓게 일컫는 단어이나, 여기에서는 현재의 이슈와 관련지어 보다 협의의 의미로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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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로, 백 번 양보하여, 민주 정치가 이상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에서의 일상적인 정치적 의결사항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하는 국민들에게는 '표로 이야기했어야 한다'라고 성토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선거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몇 년 동안 국가를 운영하며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러한 성토는 모든 정치인들이 수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오로지 본인의 선거 공약대로만 정치 활동을 한다는 아주 비현실적인 가정 하에서나 유의미한 것이다. 선거 공약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정책을 추진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국정화 논란도 그 예 중 하나이다.

  또한, '표로 이야기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헌법에 명시된 원리에 기초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정치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국민들의 역사관을 일원화시키는 시도로서 사상의 자유 침해 및 학계 침체 유발 우려가 매우 크고, 정상적인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비밀 TF팀을 조직하고 예비비를 편법으로 집행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급기야는 군 당국까지 월권하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겠다고 나서는 등 헌정 민주주의의 가치를 침해할 소지가 매우 크다.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인 이상, 반대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가치에 반하는 정책 추진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즉, 민주 국가에서 반민주주의적인 정책이 추진되는 데 대한 본질적인 책임은 반민주주의적인 위정자에 있는 것이며, 반대자들의 책임은 위정자들을 견제하는 데 실패한 책임 정도로 되는 것이 적절하다(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에서 후술한다). '20대 책임론'은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 데 돌리는 주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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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선거 때 어느 후보가 민주주의 침해 소지가 있는지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았냐는 비판, 예상을 했다면 왜 투표하지 않았냐는 비판, 심지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발표하고 확정고시한 지금도 인터넷으로나 반대하고 왜 딱히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는 비판 등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데,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문장으로 거칠게 요약해 볼 수 있다. 국민의 주권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민주성이 어느 정도 침해되어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문장을 바탕으로 성급하게 국민 미개론을 주장하기 이전에, 그러한 국민 '수준'의 형성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5000만 가짓수의 너무나도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라는 추상적인 집단에 일률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로서, 사실상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다. 그렇게 다양한 가정 환경적, 지적, 지역적, 시대적, 사상적 배경을 가진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정치적 무관심',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낮은 민감도'라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민주시민이라는 의식이 부족해서이며, 이는 바로 민주시민교육의 부재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관념적 추론이 아닌 실증적인 측면에서도 민주시민교육이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20세기 말까지 계속되어 온 군사 독재 시절 국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헌법은 무시되어 왔고 심지어 아예 바뀌어 버린 적도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민주시민교육은 잘 이루어질 수 없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시민교육은 사회 시간에, 일반적인 학교 공부와 같은 레벨에서 잠깐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왔다.

  따라서 국민 수준을 언급하며 정부의 반민주주의적 처사에 대해 '국민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계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주장하는 것 역시 적반하장격인 주장이 된다. 공교육에서 적극적 반민주주의는 아니더라도(일선 교사들이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긴 하지만), 민주시민교육을 소극적으로만 해 온 탓에 국민의 주권의식이 부족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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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론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우선 문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여, 어떠한 후보에 대해 20대 전체가 반대하고 60대 대다수가 찬성하며, 그 모두가 투표권을 행사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도 20대 유권자 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인구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유권자 수의 격차는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를 오랫동안 체험하지 못한 고령 인구의 비율이, 민주주의를 체험한 청년 인구(적극적 민주시민교육은 여전히 거의 부재하지만)의 비율과는 대조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 구조상 청년 세대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득표 수에 따라 움직이는 민주주의 정치가들의 입장에서는 청년 세대의 목소리가 작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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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심각하여 정치 참여율이 매우 낮으며,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민감도 역시 매우 낮다는 것이 우려할 만한 점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율이 낮다'는 것을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반민주적 사태의 '원인'인 것으로 진단할 수는 없다. 사태의 원인은 학계와의, 일반 국민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국정화를 강행하고 있는 정부와 여당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 낮은 정치 참여율이 우리에게 현실로 주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청년들을 향한 지적은 '참여율을 높이면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태의 원인이 아닌 '해결'을 위한, 참여 독려로의 구호로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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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5일 목요일

군인권 토크콘서트 참여 후기

2015.11.01(월) 서울대학교 사회대신양에서 열린 군인권 토크콘서트에 청중으로 참여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 김종대 정의당 국방개혁기획단장,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님이 연사로 나오셨습니다.

군대 문제에 대해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니 어쩔 수 없다'라는 만연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또한 그러한 인식은 국민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개혁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데 대한 국민들의 냉소가 고착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으로부터 격리된 군대가 아닌 국민이 만들어가는 군대, 국민이 감시하는 군대가 될 때 군인이 그의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으며, 군의 예산집행 및 인력동원의 효율, 작전력과 전투력도 향상될 것으로 봅니다.

좋은 행사를 추진해 주신 사회대 학생회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미지: 사람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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