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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금요일

아닌 건 아닌 거다: 무리한 자기정당화를 경계하며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지식(처럼 보이는 것)의 이름을 빌려서 차별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그러면서도 진지한 목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종국에는 모든 걸 진보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로 귀결시키는 우파세력의 행태를 비판해 왔다. 나 역시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미약하게나마 지적해 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러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자 본질적으로 정확히 똑같은 종류의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 보인 현장은 참으로 희극적이다. 손아람 작가가 페이스북에 최근에 쓴 글이 댓글로 많은 지적을 받자, 그 글을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손 작가에 대한 옹호에 나선 그 현장에 대한 이야기다(손작가님 Facebook 게시물 링크).
그들은 과학지식(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주장의 확고하고 든든한 근거로 쓰이기를 바라며 직접 인용하거나, 혹은 '그 인용이 사실 이런 의미였지 않겠냐'라고 애써 선해하여 정당화하면서, 정작 그러한 옹호가 무리한 것임이 드러날 때에는 '웃고 넘기면 되는 주장인데 왜 달려드느냐'며, 순식간에 그 지식들을 그냥 편한 대로 쓰다가 버리면 되는 썰풀이 소재 정도로 전락시키기도 하는 모순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옹호자들의 상당수는 손 작가의 글에 대한 비판자들이 '버튼 눌려서'(트리거가 걸려서) 부들부들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들의 태도는 이와 반대로 맥락과 의도를 읽을 줄 아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이 그 글을 유익하게 읽었다는 이유로, 글 속의 문제적인 대목들을 억지스럽게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네를 학습하는 유전 알고리즘을 '문화의 유전'과 결부짓는 주장을 포함하여) 그들이 실제로 '과학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들뿐 아니라, 흔히 반 농담조로 '사이언스'라고 불리는, 일상에서 도출한 귀납적 결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손 작가의 골상학 언급은, 최근에 남성 연예인 성범죄 연쇄보도 이후로 유행하는 '역시 관상은 사이언스다'라는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일종의 유머 내지는 수사로 이해하자고 옹호되었다.
그러나 정작 손 작가 자신이 쓴 댓글들에는 단순히 재치있는 수사에 대한 것으로 보기에는 그 무게감이 심히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진지한 변호가 들어 있다(심지어 손 작가는, 자기 자신은 진화론을 지지하고 진화를 이해하고 있으나 비판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완전히 거꾸로 된 생각마저 내비치면서 비판자를 '창조론자'라고 비꼬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아슬아슬한 희화화의 수사들은 만약 탁월하게 구사될 경우 전복적인 언어구사로서 결집을 돕는 강력한 힘을 갖지만, 이런 식으로 한 번 진지하게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힘을 잃게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손 작가의 옹호자들은 그가 한국인들의 전형적 외모 등을 희화화하며 언급한 대목에 대해서도, 그 역시 한국인이므로 당사자인데 무엇이 문제냐며, 유머러스한 서술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레이시즘적 계기로 연결될 여지를 애써 차단하기도 한다. 물론 한국인의 특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상정하여 한국인과 비교하는 레이시즘적인 계기가 직접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준 동양계 서양시민', '문화적 교정' 등의 표현은 만약 우파진영 스피커에 의해서 나왔다면 가히 우리를 아연실색케 할 만한 표현으로, 그 타겟이 내집단인지 외집단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포비아적 뉘앙스로 얼마든지 읽힐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옹호자들의 위와 같은 태도는 '어쨌든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면 되지 않느냐', '재미있지 않느냐'라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지적 안이함, '나는 재밌게 읽었는데 반응이 왜 이렇지'라는 심리적 당혹감, 그리고 '적들이 꼬투리를 잡아서 욕하는 상황을 모면하도록 돕겠다'는 사회적 정의감이 결합해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비판적 독해를 잠깐 접어두고 애써 선해해야만 간신히 옹호가 가능한 대목, 적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만한 대목이라면 그냥 애초부터 글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던 것 아닐까? 그런 대목들이 비유 내지는 수사일 뿐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면 되었던 것 아닐까? 그 대목들에 대한 무리한 옹호를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유머일 뿐이지 않느냐고 일축하는 분열적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정의감을 잠시 유보하고 당혹감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지적 안이함을 비껴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비록 이 상황이 온전히 손 작가가 의도하고 통제한 범위 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스스로도 약간의 당혹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논쟁을 만들어내어 페북 상의 수많은 네임드 분들을 '참전'시킨 손아람 작가의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뛰어나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글 속에 세부적인 결을 많이 설정해 놓음으로써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무언가 논평을 할 여지를 잔뜩 제공하는 글을 쓰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글에 무리한 주장들이 있었다면(실제로 '골상학'을 언급한 대목은 지적이 있자 수정하셨다), 그러한 지적들에 대해서는 비꼬지 않고 책임 있게 대응하여야 마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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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으로부터 포착되는 정신세계

  단지 깨어났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가끔가다 꾸는 내 꿈들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이 별로 없고, 스스로가 가진 건축적 구조를 통해 내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말없이 조건짓는 '공간'들이 부각되어 등장하는 편이다.

  보다 자세히 묘사하자면, 내 꿈에서는 현실에서 경험한 공간들 중 인상에 남은 공간들이 상당히 웅장하게 과장되어, 그리고 때로는 서로 조합되어 등장한다. 그런 공간들 중 특히 자주 등장하는 것들로는, 긴 복도에 작은 공간들이 나뭇잎처럼 달려 있는 전형적인 학교 형태의 공간, 롯데월드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 틀림없는 거대한 실내 놀이공원, (어릴 때 자주 갔던 다양한 콘셉트를 갖춘 찜질방의 이미지가 반영된 듯한) 깊이 들어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들을 보여주는 모험적인 선형적 공간, (중고등학교 때 다녔던 학원 건물들의 구조에 대한 표상으로 추정되는) 좁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직적으로 연결된 각기 다른 테마의 공간들, 건축 자재와 제어설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복잡한 환승 구조를 가진 지하철역 등이 있다.

  이런 꿈 속 공간들에 대한 매우 신기한 점은, 이들이 몇 개월 혹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꿈 속에 계속 재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 각각의 공간들이 현실 세계로부터 떨어진 어딘가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크게 변하지 않은 구조를 가진 채 말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명시적 의도와는 상관 없이 형성되는, '정신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어떤 형태로든지 분명히 있긴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정신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지, 그리고 단순히 꿈 속에서 갑작스레 일방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탐사하면서 시험하고, 나아가 특정 목적으로 활용해 볼 방법은 없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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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7일 월요일

강요되는 근본주의: 그들의 악의적 독해에 위축되지 말자

최연소 연예부장으로서 여러 연예인들에 대하여 비하성, 논란성 기사들을 써서 연예인 팬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김용호 기자는, 최근에 우파 싱크탱크를 자처하는 김세의, 강용석의 '가로세로연구소' 유튜브에 출연하면서 배우 정우성이 중졸이므로 변호사 연기를 못 한다는 등의 비하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정우성이 상당수의 진보적 국민들에게 모범적이라고 간주될 만한 사회참여적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에 관심 있는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김 기자가 이번에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을 대표적인 좌파 감독이라며 자신의 채널에서 비난한 모양이다. 우파 진영은 파괴력 있는 컨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대로라면 '문화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외치는 그의 위기감 넘치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페친 분들이 탁월하게 지적해주신 바 있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지점은 바로 김 기자의 봉준호 감독 비난에서 엿보이는, 좌파사상에 대한 특정한 악의적 독해법이다. 그는 봉준호 감독이 미국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어 왔으나(아마 <괴물>에서의 비판적 묘사 등을 염두한 것 같다), 정작 대표적인 미국 기업인 넷플릭스에서 투자를 받아 <옥자>를 만들었다며, 이것이 좌파들의 이중성이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현대의 영화라는 것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현대적 체제를 완벽히 벗어난 대안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예술과 인간성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대중문화 장르의 저력 아니겠는가. 이것은 현실과 신념의 중간 어디쯤에서 신념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식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을 실천하되 어떠한 방식으로 실천하는지와 관련된 '양태'의 문제이다.

즉 김 기자의 이러한 비난은 좌파사상에 대한 '근본주의적' 독해를 악의적으로 취함으로써 발생하는 잘못된 비난이다. 조금 확장해 보자면, 이것은 최근에 청년보수 진영과 극우개신교 진영 등에서 다수 생산되는, 좌파, 운동권 등을 비판하는(그러면서 문재인 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칭하며 좌파세력과 동일시하는) 뉴미디어 컨텐츠들이 높은 비율로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좌파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알고 있는 전통적, 전형적인 좌파의 모습(주로 90년대까지 융성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지하조직 중심으로 작동했던 '운동권')에 시대착오적으로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요소 자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그 요소를 충분히 강력하게 취하지 않는 좌파에 대해서는 또 위선적, 이중적이라며, 혹은 이득에 따라 비일관적으로 행동한다며 비난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 신념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특정한 신념체계 전체를 문자 그대로 추종하며, 충돌하는 것들을 전적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만이 진정한 실천이라고 여기는 '근본주의'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아마 극우진영에서 유달리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 좌파진영에서 매우 강경한 목소리를 내다가 소련 붕괴 이후 전향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미제의 산물인 콜라를 먹지 말자고 할 정도의 강성 좌파였으나, 나중에는 박근혜 정권에서 어버이연합 등의 극우단체를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주도한 허현준 청와대 행정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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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3일 목요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기억: 서거 10주기를 맞으며

  10년 전 오늘의 기억을 회고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흔치않은 10의 배수인지라 오늘은 나도 그 집단기억에 두서없는 몇 자를 보태 보고자 한다.

  나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침에 방에서 쉬고 있던 중 친구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문자를 받고 처음에는 그 친구의 짖궂은 거짓말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으나, 매우 갑작스럽고 놀랍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 친구가 재차 사실이라고 얘기해 주었고, 방에서 나가 봤더니 가족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참여정부 대통령인수위와 행정부에서 몇 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나는 노대통령에 대해 기본적으로 공연히 친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정치를 잘 몰랐음에도 인터넷상에 대운하 등으로 이명박을 조롱하는 밈이 많았던지라 역으로 민주당계열 정부에 막연하게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별개의 얘기지만 당시에 극우매체 뉴데일리를 보고 충격받았던 게 내 지금의 성향에 많은 영향을 준 듯하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그 사건이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현재적'일 것으로 보이므로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하여 학술적 객관성을 추구하는 조명작업은 아직 수월하지 않아 보인다. 증언과 일화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의 영역보다는 현실정치와의 연관 하에서 수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런 증언과 일화들은 정치를 떠나서도 역사적 기록으로서 틀림없이 소중하므로 끊임없이 찾아보고 기억하게 되는 면이 있다(다르지만 비슷하게, 얼마전에 박근혜정부 말기의 내부 상황을 옹호적, 동정적으로 기록하여 신동아에 실린 글도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청와대 내부의 기록들뿐 아니라, 국민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참여정부 시기의 각종 정책들이 어떻게 수립되고 수행되었는지, 또한 그러한 과정 중 소위 '노무현 정신'의 구현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어디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끝없이 길어질 테니 내 개인적 평가를 간추려 보자면, 말과 글을 도구로 하는 민주적 통치,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적 기록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실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좋은 모습 중 하나였으며, 이는 말과 글에 있어서 무척이나 능했던 대통령 개인의 '스탯'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합리적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늘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지만 정작 '말을 잘 못한다'라는 컴플렉스가 아주 강한 내 입장에서 부러운(?) 점이기도 하다. 무엇을 하던지 언어적 표현을 갈고닦아 적시에 꺼낼 수 있는 능력은 높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는 다들 알다시피 순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보수언론을 필두로 한 소위 기득권층의 공격뿐 아니라 '약자'에 해당하는 계층의 대표세력과의 대립도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민주당 계열과 진보세력의 대립이 더욱 공고해지기도 했다. 노무현을 지지했으나 실망한 이들, 그리고 아주 복잡한 마음을 갖게 된 이들도 많다. 여담이지만 노무현이 비판했던 보수언론의 무서움을 나는 상당히 최근에야 체감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 시기는 소위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었으며 글 쓰는 사람들끼리 상당히 생산적으로 싸웠던 시기이기도 한 것 같다. 물론 나의 직접적 경험이 아닌 기록을 통한 유추이지만,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흥미로운 논쟁과 사건들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독 참여정부 시기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아마 인터넷이 발달했으나 소위 뉴미디어가 대중적으로 자리잡지 않은 기술적 환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글 쓰는 사람들 중심으로 자주 이야기된 '시민사회'는 그들의 의도나 자기인식과는 관계없이 엘리트적인 면이 없지 않았고 높은 수준의 정치성을 지속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이것은 내 경험의 한계상 철저히 온라인공간 상에서의 파급력을 중심으로 한 편협한 평가일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결과적으로, 여러모로 '한국적 리버럴'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주장하며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하지만, 혁명이 아닌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소위 '좌파'와는 어느정도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확고하게 탄생하게 된 시기가 참여정부 시기가 아닌가 한다.

  과학기술과 관련해서도 양면적인 평가가 있을 것 같다. 컴퓨터에 상당히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고, 인터넷의 잠재력을 인식했으며 대통령 재임시절 프로그래밍 능력을 바탕으로 이지원시스템 개발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기술에 대한 관심이 있던(그리고 이것들을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결부짓고자 했던) 대통령이었으나, 과학정책에 있어서는 황우석 사건이라는 두고두고 회자될 '흑역사'격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과학 연구 내용 그 자체를 정치의 영역과 과도하게 결부짓는 과정에서의 여러 오판이 단적으로 드러난 이 사건을 주도한 '황금박쥐'는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십수 년 후 문재인 정부에서까지 잊을 만하면 등장하곤 한다.

  결론짓자면, 노무현 개인이 여러 가지 면에서 가졌던 유능함은 매우 탄복할 만한 것이나, 대통령으로서 그의 정치적 한계 역시 오직 외적 여건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엔 여전히 새로운 것이었던) 대통령 선출의 민주적 정당성, 대통령 개인의 카리스마, 개혁론자들의 기대와 실망, 재임기간 내내 어려웠던 외적 여건 등은 아직까지도 정치에 관심 있는 사회구성원 상당수에게 트라우마라고 할 만한 기억이 되었으며 입체적 평가를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앞으로는 대통령의 훌륭했던 점이 보편적인 민주 정치의 가치와 결부되어 계승되어야 하고, 한계를 보였던 점은 솔직하게 조망하며 분석되어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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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월요일

사이비단체의 뇌과학분야 침식, 오래된 현실이다

2005년도의 기사(사진1, 링크)를 보면, PET(양전자 단층촬영)의 세계 최초 발명자인 조장희 박사님도 이승헌이 거느리는 사이비집단의 행사에서 특별강연을 했으며, 개신교계열 합작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에 깊게 관여한 박찬모 포스텍 전 총장도 축사를 했다. 특히 조장희 박사님의 경우는 2017년에도 이들 사이비집단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등 꾸준히 이들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사진1: 조장희 박사, 박찬모 총장 등 학계 유력인사가 참여한 사이비집단의 행사.


그리고 놀랍게도 유명 뇌과학자인 IBS(기초과학연구원)의 신희섭 단장 역시 2006년에 이승헌과 함께 책을 냈고(사진2, 링크), 2018년에도 관련 인터뷰를 하는 등, 슬프지만 이 사이비집단과 연관이 있는 분으로 간주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미지: 사람 2명, 웃고 있음, 텍스트
사진2: 사이비집단의 수장인 이승헌이 유명 뇌과학자인 신희섭 박사(현 IBS 단장)와 공동저술한 책.


지난번에도 썼듯, 고려대, 서울대, 연대, 카이스트, 포스텍 등 각 대학의 뇌과학, 인지과학 연구소에서 후원하며 과학고 학생들도 많이 참여하는 '한국 뇌 캠프'(과거명 한국뇌과학올림피아드) 역시 매우 정상적인 내용의 대회이지만, 정작 '뇌교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명백한 사이비단체에서 후원하고 있다(사진3, 링크). 그리고 이 단체의 장은 서유헌 서울의대 명예교수이다.
(추가: 단순히 이름에 뇌교육이 들어가서 사이비라고 단정한 것이 아니다. 서교수님과 이승헌이 함께 검색되는 문서들이 매우 많고, 위키백과에 있는 서교수님 저술 목록에도 단월드 관련 내용이 많다. 이렇게 내용상 지극히 정상적인 행사까지 이승헌과 연관되어 있다는 정황이 있기에 오히려 더욱 주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적은 것이다.)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사진3: 사이비집단이 주최 및 주관하는 한국 뇌 캠프(과거명 한국뇌과학올림피아드).


이렇게 한국 뇌과학계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까지 포섭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뇌과학분야 전체가 사이비집단에 침식될 수도 있다는 지난번 글(https://bit.ly/2Gq5A9Z)에서의 내 언급은 우려 정도가 아니라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단체는 앞에서는 실제 뇌과학 분야를 후원해서 정당성을 얻으면서, 뒤에서는 사이비 행사를 하는 식으로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를 흐리면서 영향력을 더욱 넓혀가고, 뇌과학 분야의 대중화에도 '물주' 역할을 지속하려고 할 것 같다. 돈이 걸려 있고 유명 과학자들까지 포섭되어 있는 문제이다 보니 결코 쉽진 않겠지만, 이 사이비단체를 과학계에서 몰아내려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뇌과학 분야를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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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8일 목요일

과학고에서의 기억, 그리고 단월드



뇌교육 등의 키워드를 내세운 단월드의 행사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후원을 받는 것이 드러나 충격을 자아내고 있다.

이승헌의 사이비단체 단월드는 그야말로 사회 곳곳에 '깃들어' 있으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넘어서 이처럼 공적 영역까지 보란 듯이 침투해서 예산과 사회적 자원을 갉아먹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 외연도 명상, 상담, 교육, 뇌과학 등으로 지극히 다양하다.

다수의 방송에 출연하고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강연하기도 한 '임마뉴엘 페스트라이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단월드 계열의 사람임은 이미 이전에 밝힌 바 있다(https://bit.ly/2Pg582m). 아래의 포스터에서 두 번째 사진에 있는 '이만열'이 바로 페스트라이쉬 교수와 동일한 인물이다.



비단 이 행사뿐일 것 같은가? 사이언스 라이프의 원문에서는 '제대로 된' 뇌과학을 하는 분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에 매우 동의하긴 하지만, 과연 과학자의 눈이 아닌 행정과 법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단월드를 '제대로 된' 뇌과학과 분리시킬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충격적이게도, '제대로 된' 뇌과학 분야에도 단월드 계열의 단체가 이미 후원자 등의 자격으로 귀신같이 들어와 있다.

내가 과학고등학교 재학 시절 겪은 일 중 가장 쎄했던 일은, 4대강 사업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연사가 강연을 온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갔던, 훨씬 더 문제적인 일이 있었음을 최근에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생물 분야를 지망하는 과학고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참여했던 뇌과학올림피아드라는 대회는, 적어도 그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제대로 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찾아본 결과, 그 대회의 홈페이지에서도 명백한 단월드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 대회는 여전히 과학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다, 단월드 계열이 아닌 실제 각 대학교 연구소들도 참여하고 있는 대회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그 외연을 어디까지 떨치고 있는지 아찔하기까지 하다.

약간의 비관적 상상을 곁들이자면, 이들이 뇌과학 분야의 후원자를 자임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도미넌트한 역할을 하게 되어, 해당 분야에서 한국 학계의 위상이 실추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에서 '비과학이 과학을 참칭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온 단월드라는 단체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사회적 자원을 갉아먹고, 정상적인 단체들과의 구분을 흐리면서 사회 각계에 자연스럽게 진출해 있는 현재의 상황은 명백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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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2일 금요일

[논문 소개] 복잡계 제어이론 관점에서의 뇌 연구들

Complex network에 대한 control theory 관점에서의 뇌 연구가 요새 종종 눈에 들어와서 흥미롭다. 오늘만 해도 페이스북 뉴스피드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돌아다니는 논문 링크 두 개를 봤는데 키워드 때문에 처음에 언뜻 보고 똑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UPenn에서 나온 리뷰논문(The physics of brain network structure, function, and control)인데 차근차근 읽어 보면 트렌드를 follow하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될 것 같고, 다른 것은 KAIST 바뇌과에서 나온 논문(The Hidden Control Architecture of Complex Brain Network)으로,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겹쳐 있는 뇌의 특수한 제어 구조 덕분에 제어의 강인성이 보장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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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쟁점에서 종교적 신념이 개입할 자리는 없다

  종교단체가 자신들의 교리를 어떤 사회적 변화 상황에 적용하여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자체는 매우 존중할 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 내부적으로 그 문제에 대하여 입장을 정리하려 할 때에나 그렇다는 것이지, 낙태죄 폐지를 바라보는 지금의 천주교 교회와 같이 그 세속 사안에 직접 개입하여 절충안을 마련하겠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헌재 판결 등의 공적 결정에서는 종교 단체의 특정 교리, 그리고 그것이 믿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들이 어떤 결정의 당사집단이 되는 특수한 경우라면 그런 것이 간접적으로 고려될 수야 있겠으나, 당사집단이 아닌 사안에 대해 그들이 외부에서 '훈수'를 두는 형태라면 그런 개입의 정당성은 단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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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환영하며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동안 여성들이 겪어온 어려움은 제도적인 측면 때문인 게 컸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문제로 인하여 여성들이 삶의 계획에 대한 응당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적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던 지금까지의 구조는 명백한 불합리이다(부조리와 불합리를 구분할 필요를 느껴 수정함). 이번 판결이 그런 불합리함을 대폭 해소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낙태죄라는 법조문을 바꾸는 차원의 문제가 지극히 중요한 쟁점이었다면, 앞으로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뒤로는 보건 인프라와 그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 등을 확충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를 것 같다.


  이렇게, 헌법불합치 판결에도 불구하고 특정 세력으로부터 소극적 개정입법을 향한 압력은 지속될 것이므로 우리는 안심할 순 없으며,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도 그들만의 사안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관심 가질 만한 사안이다 보니, 조금은 더 대응이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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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8일 목요일

사회적 존재로서의 과학기술

  2018년 정부 예산안에 대한 환경운동연합의 의견서에서 양이원영 처장이 핵융합에 대해 남긴 코멘트가 그 실소를 자아내는 내용으로 인해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당사자인 양이원영 처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대응하면서 '핵융합 지지자'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일각에서 "과학기술은 지지/반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응하곤 하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1) '된다 / 안 된다'의 문제를 미리 말할 수 없고 일단 해 봐야 아는 것일진대(그것도 그 특정한 구현방식에 대해서만), 그것에 대해 실제로 (2) '해 보자 / 하지 말자'의 여부를 정하는 것이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일 테다. 적어도 후자의 차원에서는 과학기술을 지지/반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은 아닐 수 있다. 양이원영 처장의 문제는, 가히 자연신론적이라 할 만한 비과학적 주장을 근거로 (1)의 차원에서 '안 된다'의 쪽을 부당하게 채택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2)의 차원에서 '하지 말자'의 쪽을 채택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부당한 주장을 공문서에 수록하여 운동가로서의 공적 책임을 방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내 페친이신 전명환 씨가 이전 글에서 댓글로 탁월하게 지적해 주셨듯(Facebook 게시글 링크), 과학 예산과 에너지 예산을 잘 구분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현재 단계의 핵융합 연구는 (우리의 머리 속에서) 분명 과학에 속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에너지기술 관련 예산으로 책정이 되어 있다면 에너지기술 관련 예산인 것이다. 원래 권력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개념을 뒤틀어서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 아니겠나. 머리 속의 개념을 원하는 대로 사회 속에 구현하려면 어찌되었든 권력이 필요하다.

  지극히 정당한 주장을 하는 이공학도들을 자신의 진영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적폐 취급하는 행동은 매우 적폐스러우나, 그러한 행동에 대응하는 입장에서도 과학기술은 진공 속에 놓여 있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구현되는 것임을 늘 염두하여야 할 것 같다. 양이원영 처장은 이러한 측면을 무척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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