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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4일 토요일

코로나19 시국의 교육: 과감한 선택으로 무리한 운영을 예방해야

코로나19 시국에 교육의 현장에서 종종 보이는 것은 오프라인 강의를 최대한 모방하려는 운영의 경향이다. 그러나 이는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어렵고, 여러가지 무리한 일들이 따를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이버강의의 이점을 전면적으로 살리도록 준비하기엔 이번 사태가 지나치게 급작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강의의 운영방침은 준비 부족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라기보다는, 굳이 없었어도 될 다소 인위적인 제한사항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예로 수업시간 외에는 각종 자료(수업 영상, 강의ppt 등)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출석률과 참여도를 확보하기 위함일테다. 그러나 이는 강의를 몇 번씩이라도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사이버강의의 가장 큰 이점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물론 충분히 정제되지 않은 강의가 학생들에게 배포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사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수업시간에 해야 하는 일은 공지 전달과 질의응답 위주이므로 그 내용들을 정리해서 글로 올리는 식으로 할 예정이다). 그러나 다소 정제되지 않은 강의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것보다 학생들에게 더 낫다는 면도 분명히 있다.

또한 강의자의 얼굴이 나오도록 하는 것, 그리고 출석체크 및 집중 여부 확인을 위해 학생들의 얼굴이 나오도록 하는 것 또한 문제적이다. 학생들이 집에서 부스스한 상태로도 마음껏 수강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이버강의의 이점인데, 집에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한다는 것은 현 시국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또한 디지털 매체의 특성상 무단으로 저장 유포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도 여러 방면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집중하는지 여부의 확인을 다른 식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뿐더러, 사이버강의에서 그걸 반드시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관건은 강의자의 수강생들에 대한 통제력이다. 그 통제력이 사이버강의에서도 현장 강의 수준으로 확보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가지고 현장 강의의 방식을 사이버강의에 억지로 이식하려다 보면 여러가지 무리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왕 사이버강의를 하게 된 바, 현장 강의와의 어쩔 수 없는 차이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매체의 이점을 살려 강의컨텐츠가 효과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자원이 많이 드는 적극적인 실험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굳이 없어도 되는 제한사항이 인위적으로 추가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편 의무교육에서 통제력 확보가 안 되는 것은 공적 책임의 측면에서 고등교육과 그 의미가 현저히 다른만큼 그 나름의 고민의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대학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이고 기존과 완전히 다른 발상이 필요할 것 같다. 개별 가정에 지나친 관리책임을 지우는 것은 공교육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깨워서 학교 보내는' 것에 준하는, 비교적 간단한 관리만으로도 의무교육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할 묘안이 없을지 궁금하다.

입시도 문제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너무 많은 게 결정되는 지금의 입시체제에는 이런 비상상황이 생겼을 때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역량이 근본적으로 없다. 사람별로 놓인 상황에 따라 유불리가 여러모로 갈리면서 엄청난 논란과 원한(?)이 발생할 것이며, 사교육이 가져 온 과도한 영향은 기존보다 더 커질 것이다.

일단 현행 체제 하에서 오래 준비해온, 입시가 임박한 학생들을 위해서는 상황에 맞게 연착륙을 시키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그리고 좀 더 장기적으로, 이번 사태처럼 변동이 조금 생기더라도 학생들이 크게 동요하거나 원한을 갖지 않을만한 튼튼한 입시제도가 필요하다.

여러모로 코로나19 사태는 비상상황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능력을 테스트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일상적인 작동방식마저 전면적으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가 매 순간 비상 체제일 수 없으므로, 재난은 그 극복 과정에서 많은 비일상성과 불편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재난에 의해 지나치게 손상되지 않는 제도라면, 대체로 일상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이고 스트레스를 덜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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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4일 화요일

가시화되는 반지성주의의 국회 입성

당에서 영입한 핵융합 국제전문가는 18번이고, 핵융합을 지구에서 구현하는 건 비현실적인데 왜 하냐고 어떤 현황도 이해하지 않은 채 주장하는 사람은 시민사회 몫으로 9번으로 당선권이구나. 비록 시민사회 및 군소정당이랑 같이 하다보니 이렇게 된 거긴 하지만, 전혀 다른 메시지 내는 두 사람이 비례후보 명단에 공존하는 것 자체가 확실한 방향성 없는 몸집 불리기로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투표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에 아쉬움이 크다.

늘 이렇게 말로만 언급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밀려나는 과학기술 쪽에서도 그렇고, 국회에 성평화, 이퀄리즘 세력이 확정적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이며 보수 종교계도 진입 시도하는 상황에서 내가 관심이 있는 또 다른 주제 중 하나인 젠더문제 및 소수자 문제에서도 그렇고, 21대 국회의 모습이 대체 어떨지 정말 걱정된다.

이와 비슷한 무력감의 문제에 대해 근 몇 년 간 느낀 바는 다음과 같다: 나를 완벽하게 대변해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릴수록, 더욱 더 이상한 사람들만이 내게로 온다. 그런 기다림의 정서가 극단주의적, 반지성주의적 정치담론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다. 결국 영역의 적극적인 확보와 개척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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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1일 토요일

세상의 절반을 생각한다: 'N번방 사건'과 그 경악스런 일반성을 보며

끔찍하고 초현실적이다. 읽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N번방 사건'에 대한 글들을 의무감에 꾸역꾸역 읽었다. 특정 범죄자 몇 명이 아니라, 한 나라 전체에서 유의미한 비율의 불특정 대중들이 참여하는 여성들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 직접적이고 심각한 폭력이 그동안 있어 왔다.

불법 음란물을 아무렇지 않게, 혹은 재미있게 여기고 남성들끼리의 유머 소재로 소비해 온, 그 유서깊은 잘못된 분위기가 이 사건에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아니, 이 사건이 바로 그러한 분위기의 아주 극단적이면서도 솔직한 귀결 그 자체이며, 그러한 분위기가 견제받지 않을 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휴대폰 조작 몇 번에 불과한 아주 일상적인 일도,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에 영향을 줄 만큼 아주 비일상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이것이 불법적인 성적 착취와 디지털성범죄의 아주 무서운 점이다.

26만 명은 중복 집계가 있으므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들을 많이 본다. 물론 그것보다 수가 더 적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방의 회원 수만 해도 2만여 명이었다고 하며,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이 숫자만 생각하더라도 매우 높은 비율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텔레그램과 같은 비주류적 디지털 매체 사용에 익숙할 연령층이 어디까지일지 생각해 보면, 비율을 따질 때 분모에 들어갈 숫자는 훨씬 더 줄어든다. 이 정도 비율이면 위에서 말했듯 특정 집단을 넘어 사회 전체의 불특정 다수가 이 체계적 억압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말이다. 게다가 사건이 드러난 이후로 (디지털성범죄 사건에서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 범죄적 자료들에 대해 여러 경로로 관심을 갖는 이들의 게시물들이 속출했음을 고려하면 그 일반성은 더욱 확장된다.

그런데 26만명이라는 숫자가 왜 계속 강조될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있기는 하겠으나, 사건의 끔찍함에 공감하기보다 숫자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먼저 지적하면서 선 긋기, 심각성 축소하기부터 시도하는 그런 소위 '합리적' 태도를 본다면, 그 반대급부로 '결코 일부가 아니다'를 강조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자가 몇 명이냐 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반성이라는 질적인 문제와, 그에 따른 철저한 반성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이런 얘기도 해보겠다. 음란물 금지, 성매매 금지 등에 대한 대중적인 반대 의견은, 주로 그 금지의 근거가 성을 엄숙하게 보는 전근대적 관점 하에 수립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리고 판례 및 현행법의 논리 상으로는 그것이 옳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주장들이 다소 허수아비 때리기처럼 느껴진다. 남성중심적인 환경에서의 성 산업 발달이 가져올 결과를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전망하지 못하고 우려하는 이유가 정말 과연 그것뿐인가?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현대사회로 나아가자는 관점에서 그런 의견들을 비판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사건에서 극단적으로(그러나 매우 일반적으로) 드러났듯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에 대한 실질적인 성적 착취, 속임수, 폭력이 매우 일상적인 수준에서조차 만연하고, 또한 그것이 'N번방'과 같은 형태로 간단히 연결되는 지금의 환경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 전체에서 성적 관계맺음의 전면적인 비폭력적 재구성, 그리고 성 담론의 탈-남성중심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 이 상태에서 성 산업의 발달이 가져올 것은 자유와 권리의 확대가 아닌 명백한 축소일 것이 아닐까 한다. 산업의 양지화를 통해 그런 비폭력적 재구성이 알아서 유발될 것이라는 기대는 그 근거가 미약하다. 오히려 비폭력적 재구성의 가능성에 대한 확실하고 정교한 근거와 사회 전체적인 추진 의지가 충분히 확보됨이 우선이고, 그에 따라서 그걸 진행하든 말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원래 얘기로 돌아오자. N번방 착취 사건, 그리고 남초 집단이 그 사건을 대하는 왜곡된 관점의 '일반성'을 고려할 때, 이 쯤 되면 여성들이 겪는 매우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성적 폭력에 대해 호모소셜 대중들의 자발적 태도변화와 동료 시민으로서의 연대는 딱히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지금 느껴지는 솔직한 심정이다. 그저 여성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연대를 구성하고, 권력과 언어를 더 많이 획득하고, 더 많은 사실들을 찾아 폭로하고, 더 많은 호모소셜을 해체하고,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를 기억한 채 새로운 시대를 치열하게 열어 가는 방법밖에 없겠다.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찰하며 미약하게나마 보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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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1일 수요일

전염된 윤리적 둔감성: 상대편의 비인격화로부터

코로나19 시국과 관련해서 지자체장 대응을 비판하는 것이나, 무슨무슨 담당 공무원이 신천지였더라, 진짜 뭐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가능하며 유의미하다. 그런데, 대구라는 지역 자체를 신천지에 점령된 곳이라는 식으로 희화화하는 분위기를 은근히 내비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본인들은 아니라고 할 것이고,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법도 없다. 그렇지만, 투표 성향이 본인과 다르다는 이유로 막말에 대한 '필터'가 묘하게 무뎌지고, 굳이 없어도 될 조롱의 뉘앙스가 섞여 들어가는 그런 거, 확실히 있다.

심지어 대구경북 지역이 투표를 잘못 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유명 작가, 총선 예비후보 등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보수 우세 지역이라서 욕했다는 건 오해이며 지자체장 한 명에 대한 이야기였다라고 해명하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공감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었다면 그런 식으로 오해(오해라고 해 두겠다)를 살 표현은 절대로 안 나오지 않았을까. 표현 한 마디 한 마디가 줄 수 있는 오해의 여지에 누구보다 신경써야 하고 또한 실제로 그래 왔을 사람들이 바로 작가, 정치인 아닌가. 그런데도 그렇다.

혼란에도 불구하고 질서 있는 대구의 모습을 보도하는 기사에도, 중앙정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면서 조롱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특정 지역을 중앙정부와 분리해서 보는 건 반대쪽에서 쓰던 악의적인 프레임인데, 그새 배운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인간적인 격려와 위로의 효과를 갖는 그런 기사를 조롱하지 않으면서도, 정부여당 때리기에 나선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조국 교수 논란을 겪으면서, 존경해 온 분들, 나랑 비슷한 진영이라고 여겨 온 분들이 이상한 말을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다. 안 그래도 전염병 사태와 인프라 부족으로 고통받는데, 위로와 격려, 지원은커녕 그런 식의 말들을 들으면 그야말로 뽑으려다가도 안 뽑고 싶겠다.

해도 될 말일지 아닐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의외로 다들 알고 있다. 요새는 성희롱, 여성혐오 등 문제있는 발언을 할 때도 '요새 이런 말 하면 큰일난다던데'로 운을 띄운다고 하지 않는가. 다들 아는 것이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도의에 어긋나는 사고와 언동을 제발 자제해야 한다. 투표를 잘 하라고 훈계할 시간에, 지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찾아 실천하고,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보건, 공공의료, 방역이 잘 돌아가기 위해 뭐가 필요할지 고민하고 공부하고 개발해야 한다.

물론 특정 지역 차별에 편승하며, 없애기는커녕 재생산해 온 어떤 다른 정당에서는 공천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호남에 차출시키겠다는 이야기도 나온 것을 보면, 상대방 진영을 동등한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묘한 재미까지 느껴 버리는 것은 한쪽만의 일이 아니긴 한가보다. '선택적 공감능력'이라는 말은 진보진영을 비판한답시고 오남용돼온 말인데다 약자 혐오의 맥락도 있어서 아주 싫어한다. 근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그 단어가 머리에서 자꾸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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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6일 금요일

내가 본 천만 관객 영화들(스포일러 있음)

Facebook에서 유행한 #천만영화리스트 해시태그를 달아서 썼던 글(링크)을 옮김.
27개 중 13개를 보았으며, 감상여부와 함께 간단한 평들도 남겨 보았다.

1. 명량(X)

2. 극한직업(O): 유튜브로 결제해서 봄. 비교적 깔끔하고 시원한 코미디 영화.

3. 신과함께-죄와 벌(X)
4. 국제시장(X)

5. 엔드게임(O): 극장에서 두 번 봄. 장르적으로 일반적인 영화라고는 보기 힘들며, 팬들을 초청해놓고 MCU를 마무리하는 클로징 이벤트? 행사?에 해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딱히 부정적 평가는 아님. 말하자면 이 영화 전체가, '파 프롬 홈' 영화 초반에 나온 PPT와 메타적으로 동등한 것임(여담이지만 나는 파프롬홈을 엄청나게 좋아함). 누구도 안 해본 대규모의 일을 했고 그것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던 듯. 통시적 짜임보다는 개별 장면에 환호하는 방식으로 감상하는 와중에, 여성캐릭터 희생은 그 목적이 설득되지 않아 아쉬웠음.

6. 겨울왕국 2(X): 봐야 하는데 하다가 결국 못 봄. 곡들 모르는 채로 보고 싶었는데 설입 할리스에서 인투디언노운 주구장창 나와서 실패... 내용은 아직 모름.

7. 베테랑(X)

8. 아바타(O): 극장에서 보긴 봤는데, 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좀 급이 떨어지는 3D로 봄. 그래서 당시 찬미받던 그래픽의 진수를 느끼진 못한 점이 꽤 아쉬움. 그래도 대단하다 느끼긴 했던 기억.

9. 괴물(O): 학창시절 학교에서 보고, 최근에(불과 몇 주 전) 다시 봄. 너디한 학생답게 괴수의 생김새와 스펙, 그래픽 같은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그런 게 뛰어나게 표현되었음에도 전면에 내세워지진 않아서 아쉬웠음. 최근에 다시 볼 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여서 재밌었고, 기생충과의 색깔 차이에도 주목하게 됨.

10. 도둑들(X)

11. 7번방의 선물(O): 아버지와 극장에서 봄. 울리려고 만들었네~ 하면서 울긴 욺.

12. 암살(X)

13. 알라딘(O): 어머니랑 누나랑 봄. 화려하고 유쾌한 춤 장면 같은 걸 원래 오글거려서 잘 못 보는데, 원작 만화영화가 상기되어서 그런지 그럭저럭 괜찮게 봄. 원작 스토리를 바꾼 부분은 재밌었지만 정교하기보다는 거칠고 솔직했음.

14. 광해, 왕이 된 남자(X)
15. 왕의 남자(X)
16. 신과 함께- 인과 연(X)
17. 택시운전사(X)
18. 태극기 휘날리며(X)

19. 부산행(O): 친구들끼리 봄. 오락적인 좀비영화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데, 그런 영화들에도 종종 있는 딜레마적 순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재해석해서 연출한 듯.

20. 해운대(X)

21. 변호인(O): 고교 때 친구랑 같이 봄. 그렁그렁하면서 봄.

22. 인피니티 워(O): 극장에서 봄. Endgame 대사를 못 이해해서, '가망 없음' 번역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음. 영화 속에서 각자의 배경을 가진 수많은 히어로들이 합류하는 거랑, 현실에서 저작물로서 각자의 지위를 가진 캐릭터들이 복잡한 계약을 통해 한 영화로 합류하는 것 사이의 필연적인 유사성이 흥미롭다는 따위의 생각을 함. 사실 쉴드의 본체는 작품 속 기관이 아니라 현실의 마블영화 생산 체계 그 자체 아닐까. 한편 엔드게임과 달리 그 기능과 필연성이 매우 분명하긴 했지만 여성캐릭터의 희생 방식이 여기서도 꽤 외상적이었음.

23. 실미도(X)

24. 에이지 오브 울트론(O): 넷플릭스로 봄. 예고편이 소름돋아서 최근까지도 즐겨 보고, 본편은 개그 장면들이 맘에 들어서 클립을 즐겨 봄. Language 드립이 엔드게임에도 나왔더라면 좋았을 듯.

25. 인터스텔라(O): 서사는 상대론 관련해서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것들을 보여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 Stay 장면 비롯한 연출은 다소 숨막혔지만 멋졌음.

26. 겨울왕국(O): 고등학교 동기랑 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노래하는 엘사의 캐릭터가 매우매우 마음에 들었음. 렛잇고도 아주 좋아하는 곡.

27. 기생충(O): 개봉한 지 얼마 안돼서 봄.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외국 상 받을려고 작정하고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었고 결국 후일 아카데미까지... 문제의식 자체가 특별히 급진적이거나 새롭진 않지만, 비교적 전형적인 주제를 아주 잘 다듬어서 비평의 여지가 많도록 잘 전달했다고 생각. 영화 내외적으로 기택 가족의 가난이 별로 존엄하지 않은 방식으로(...) 소비되는데 사실 비판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것조차 영화 주제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냄새', '계단'(으로 대표되는 수직적 짜임구조), '계획' 정도일 텐데, 그 중 '계획'의 극중 기능은 아직도 사실 잘 모르겠음.

2020년 2월 29일 토요일

새소년 예찬

밴드 '새소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18년 초의 동아리 MT에서 누군가가 '긴 꿈'(2017)을 틀어 주었을 때부터였다. 실은 그 이후로 1년 넘게 이 밴드를 알고만 있었다가, 리더 황소윤의 솔로 앨범을 친구의 소개로 듣고, 우연히 접한 아리랑TV I'm Live 영상 및 EBS 스페이스 공감 영상을 보면서 2019년 후반의 1, 2달 사이에 새소년, 그리고 황소윤의 활동들에 급격히 매료되어 버렸다.

근래 유행하는 복고적 분위기와도 통해 있으며 그러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새로운 음악을 하며 새로운 물결을 창출하는 새소년만의 특성은 그들이 가진 탄탄한 음악적 배경과, 그 위에 올리기에 걸맞는 전복적 사유 덕분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 특히 '고양이'(2019, '시인과 촌장' 원곡) 리메이크에서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원곡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새소년스러움 가득한 편곡, 전복적이고 감각적인 뮤직비디오 연출은 새소년의 팬임을 자랑스럽게 느끼게까지 한다.



밴드 새소년의 음악과 함께 리더 황소윤의 유니크한 보컬, 악기 연주 그리고 스타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컴플렉스였다고 언급하기도 한 황소윤의 목소리는 그의 특유한 표현 방식과 결합되어 무대를 가득 채우는 보컬이 된다.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황소윤이 작곡자 김현철의 피아노 반주 하에 노래한 이소라의 <난 행복해>에서 그러한 보컬의 매력과 역량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여기에 더해지는 황소윤의 스타일, 퍼포먼스 등을 보면 노래과 연주를 아주 잘 하는 데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무대 위에서 공연이라는 형태로 어떻게 더욱 멋스럽게 전달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구체적인 신체적 표현과 동작의 레벨에서 발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황소윤과 밴드 새소년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구하러 온 것 같은 따뜻한 카리스마는 그들에 대한 현장의 열광적인 반응과, 유튜브 영상에 남겨지는 '주접' 덧글들의 선명한 원인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새소년과 황소윤의 좋은 곡들이 정말 많지만, 특별히 내 마음에 들었던 곡은 바로 황소윤의 솔로 앨범 <So!YoON!>(2019)에 수록된 'FOREVER dumb(feat. SAM KIM)'이다. 원래 음악을 들을 때 가사에 잘 몰입하지는 못하는 편인데, 이 곡은 이상하게도 처음 듣자마자 가사 한 줄 한 줄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정확한 뜻을 말해 내기는 어려움에도 왜인지 모르게 주파수가 맞아 버린 그러한 신선한 경험이 좋았고, 멜로디도 너무나 좋아서 자주 듣고 연주하며 부르는(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곡이다. 2020년을 맞이하는 순간, SNS에 '올해의 첫 곡'을 골라서 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나의 '올해의 첫 곡'은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이 곡이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EP <비적응>(2020)도 인상적이다. 타이틀곡인 '심야행'을 비롯한 수록곡들은 귀에 익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척 재미있게 듣고 있다. 황소윤 본인이 언급했듯이 황소윤의 솔로 앨범에서는 주로 보컬이 앨범을 관통하는 데 비해, 새소년의 <비적응> EP에서는 밴드 연주가 각 곡의, 그리고 앨범 전체의 몰입감 강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이끌어가는 면이 있다.

특히 타이틀곡인 '심야행'은 그 제목과 가사가 주는 이미지가 함께 작용하는 탓도 분명히 있겠으나, 곡 자체도 무언가 질주하는 느낌(그 때문인지 말 그대로 '달리는' 곡이 될 가능성도 많이 보인다)과, 빛 덩어리가 부유하는 느낌(?)을 상상해 볼 때 무척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평소에 미디어를 다소 관성적,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편이고 적극적으로 디깅하는 편은 아니어서,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이 팬심의 단계에 이른 것은 손에 꼽는다. 그래서 새소년 덕분에 오랜만에 경험하고 있는, 자꾸만 그들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게 만드는 팬심의 감각이 신선하다. 그러나 나의 미약한 언어로 그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경험의 가능성을 어떻게 충분히 담아낼 수 있겠나. 전부터 알았지만 뒤늦게서야 - 앞으로 이들이 만들어낼 물결에 비해서는 뒤늦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 빠져든 만큼, 앞으로도 이들의 활동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보다 실질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재키와이와의 'FNTSY' 합동 무대도 언젠가는 보고 싶다.


*산발적으로 쓴 팬심의 기록들을 합치고 일부 내용을 추가한 것임.
Facebook에서 보기: 링크1, 링크2, 링크3

2019년 12월 14일 토요일

어르신 짤: 아우라의 귀환과 공적 권위의 인식

  어제 청와대 SNS에 '어르신 짤' 양식으로 예산안 홍보물이 게시된 것을 보고 단순히 키치적 유행에의 때늦은 영합인 줄 알았는데, 청와대 공식 유튜브에 따르면 이는 실제 그 밈의 유래가 된 방식으로 어르신들이 복지관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외형적으로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문화적 산물들도 그 생산의 과정이 다름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맥락으로 수용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배경 일화는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대중적인 것, 사적인 것, 공적인 것이 이 일화에서 서로 묘하게 겹쳐서 드러나므로 종합적으로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 짤' 밈은 그것과 외형상 비슷하면서도 결이 상당히 다른 '망한 PPT 밈'과 함께, 키치적 유행 중에서도 특히 실패하기 쉬운 종류에 속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에는 어김없이 권력 혹은 권위의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만약에 위와 같은 배경을 몰랐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듯이, 어르신 짤 밈에 SNS 담당자가 단순히 영합하였을 뿐이라고 (잘못) 가정해 보자. 키치적인 것 중에서는 공적 권위에 의해 추인됨으로써 더욱 빛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는데 그러할 경우는 전형적인 후자의 사례로써 사람들에게 실소를 유발할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실패는 공적 권위의 최종 심급에 위치한 청와대에 의한 것이므로 한국 내에서 원리적으로 가장 강력한(...) 실패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 링크된 기사에서 보듯, 실제로는 달랐다. 일단 청와대 홍보 담당자가 이러한 '어르신 짤'들이 밈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채로 기획을 했다는 것을 전제하자. 그렇다면 이러한 기획은 공적 권위라는 측면에서 끝판왕 급인 청와대 스스로가 그러한 유행의 원조를 추적하여, 사실은 그러한 키치적 유행의 원조는 임의의 대중이 아니라 특정한 프로그램들에 있는 것이었고, 그것도 다른 게 아니라 어르신들 대상의 복지 프로그램이라는 지극히 공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아우라를 귀환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복지관 현장에서의 생산 행위와 결부된 아우라가 귀환할 때, 복지관으로 대표되는 복지 제도를 유지하고, 또한 그러한 제도를 홍보할 수 있는 정부라는 공적 주체의 거대한 힘에 대한 인식 역시 은은하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논할 점은 결국 위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도출되는, 궁극적인 구분 가능성의 문제이다. 위에서 전제하였듯이 밈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인지한 채로 진행된 것이라면 결국 키치적 유행을 공적 권위에 의해 전유하는 점은 다를 바 없는데, 그 유행의 근원이 사실 공적인 것에 있었다는 점에 의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진 것뿐이다. 과연 대중적 유행에 맞서 있는 모멘트로서 아우라를 복귀시킨 행위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공적인 것들도 사실 처음에는 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했다는, 언뜻 잊기 쉬운 사실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봐야한다.

  나는 어르신들이 짤을 만들면 자동으로 이러한 양식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사들의 강의 내용, 축적된 샘플, 그리고 어르신들의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러한 양식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체계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식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연히' 공적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 어디까지나 '특정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식별하기 쉬운 이러한 양식의 존재를 통해, 결국 공적 권위라는 것은 처음부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특정한 무엇인가가 공적 권위에 의해 선택되어 제도의 틀 속에 편입되는 데 성공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선택행위는 홍보 담당자의 홍보 방식 선택행위와도 겹쳐 보인다. 권위에 의한 선택에 따라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으로 추인되는 사태가 한 번은 공적 권위의 말단인 복지관 현장에서, 한 번은 공적 권위의 최종 심급인 청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중화된 구조인 것이다.

  공적 영역은 언뜻 생각했을 때 '상징'이라는 키워드와 거리가 멀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청와대 정도 되면 모든 활동 하나하나에 타의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므로, 상징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상징들을 자의적으로 스스로의 내부에 포섭함으로써 적재적소에 메시지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공적 가치일 수도 있다. 현대 국가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권력에게 기대하거나 권력이 자처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감하지만 그것은 의례 행위 그 자체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의례에 활용되는 양식의 선택과 공적 영역으로의 포섭 과정이 사실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문제의식의 총화와도 같음을 고려할 때 권력이란 어떤 면에서 여전히 현대에도 어느 정도 제사장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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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6일 금요일

만물상 예찬


금강산에는 만물상이라고 이름붙여진 일군의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

높이 솟은 복잡다단한 기암괴석들이 마치 세상의 만물을 다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곱씹어 볼수록 무척 마음에 드는 작명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산이 존재한다는 상상은 그 풍광의 장엄함을 보면서 느껴지는 숭고감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인 동시에,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동양적 숭고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걸 조금 비틀면 보르헤스적인 발상이 연상되기도 하며, 또 다르게 비틀면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이토 준지(!)스러운 기묘한 상상력과도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여러모로 풍광에 대한 즉물적 감탄 그 이상의 많은 영감을 주는, 절경에 걸맞는 멋진 찬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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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유진박에 대한 생각

마미손의 신곡 <별의 노래>에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이 피처링을 한 것을 알고 뮤직비디오를 찾아봤다. 놀라운 아이디어이고 멋진 콜라보레이션이어서 인상깊게 들었다. 특별히 우월한 입장에서, 혹은 특별히 비참한 입장에서가 아닌, 그냥 많이 울어 본 한 명의 사람으로서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는 "괜찮아 울어"라는 가사는 마미손과 유진박의 대화 같기도 하고, 그들이 청자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하다.

유진박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많은 감정이 든다. 이것의 이유로는 그가 선보여 온 음악이 주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그의 재능과 성향, 그리고 겪어온 삶에 대하여 내가 머릿속에 만들어낸 어떤 인상이 강하게 작용함을 부정하기는 어렵겠다. 그러한 감정들이 팬심의 동력이 되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들 자체에 과도하게 집중하기보다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유진박의 행복한 삶과 멋진 음악생활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유진박에 대한 다큐멘터리, 인터뷰 등을 종종 찾아보곤 하는데, 유진박은 대체로 자신에 대해 말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추측이지만 그가 좋지 않은 일을 여럿 겪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언어 문제를 위시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느끼는 약간의 낯섦 탓에 그의 이러한 성격이 특정한 방향으로 규정되고 개념화됨으로써 부풀려져서 소비되는 점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겪었던 좋지 않은 일들을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거의 방송들을 보면 낯설고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점이 내레이터에 의해 종종 언급되곤 한다. 사람이 망가졌지 않냐, 도움이 필요하다 라는 식으로 시청자를 설득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 점이 영 편하지만은 않다. 유진박은 사건사고를 많이 겪었고 그러한 시절이 마치 긴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해 규정지어질 수도 있지만, 그는 어찌되었든 매일매일 그의 삶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것이다.

유명인에 대해 모든 종류의 답답함, 명쾌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하고 특정한 개념을 동원하여 규정짓고야 마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그러나, 정서적 문제를 겪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비록 도움을 주고자 하는 선의일지라도 캐물어 가며 너무 많이 알고자 하는 것이 도움이 별로 안 될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명인과 대중의 관계에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에게 무리가 되지 않는 방식과 수준에서 의사소통을 지속해 가는 것이 건강한 관계가 아닌가 한다.

여하튼 유진박이 매체에 하는 말의 양에 비해 그에 대한 궁금증은 너무 많다보니, 그에 대한 기억과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많은 지레짐작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략 '잊을 만 하면 방송에 나오는 비운의 천재' 정도의 이미지로만 소비되어 온 몇 년을 거치면서도 그의 음악세계는 엄연히 활발하게 살아 있으므로, 앞으로는 유진박 본인의 의사와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는 배려 있는 매니지먼트를 받으며 그러한 부분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 내가 제일 자주 듣는 유진박의 곡은 바이올린 연주만큼이나 보컬의 비중이 많은 "Do it in the dark"(링크)라는 곡이다. 애수가 느껴지면서도 솔직담백한 특유의 분위기가 일품이니 꼭 들어 보시기를 권한다. / 이번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마미손의 인터뷰(링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의 맺음을 대신한다.

"저도 처음에 유진박 형님에 대한 인상이, 안타까운 일에 대한 솔직히 동정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당연히 그런 맘이 들잖아요. 만나뵙기 직전까지도 제가 작업 제의를 하고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것도 형님께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만나 뵙고 나서 그게 굉장히 내가 오만한 생각이었고 굉장히 건방진 동정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TV나 이런 데에서 비친 것처럼 그 일 자체는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 맞잖아요? 거기에서 우리가 받는 어떤 감정만큼 형님께서는 불행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공연 어떻게 할까, 바이올린 녹음할 때 잘 했나 못 했나 이런 게 주된 고민과 걱정거리고 관심사고, 음악 안에서 너무 행복하세요, 형님은, 제가 만나서 느낀 바로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가졌던 그런 감정들이 굉장히 얄팍했다고 느꼈던 거였고, 제가 작업 같이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대중들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우리가 이렇게 얄팍한 동정심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되겠구나, 오히려 음악 안에서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더 행복해질 것 같아 보인다라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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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4일 월요일

조국 사태가 남긴 것

1. 여러모로 애매한 사퇴의 시점
  소위 '조국 사태'의 시작은 대략 지난 8월 중순부터였을 것이다. 자녀 입시 및 장학금 문제, 사모펀드 문제 등 일반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조 장관 일가의 특권들이 드러나면서 논란은 어느새 엄청나게 커졌다. 장관 후보 한 명의 인선 문제가 정권 최중요 인물 급의 거대한 논란으로 점화되어 버렸고, 전방위적 검찰 수사도 진행되었다. 서초동과 광화문에 많은 인파가 운집해서 지지 집회와 규탄 집회를 했다. 검찰개혁의 선봉장을 자처한 후보가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됨으로써,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의의 도식이 크게 꼬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쩌면 조 장관은 처음부터 검찰개혁이라는 과제를 책임지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조국의 사퇴는 한편으로는 너무 늦었다.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조국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총선 부담 등에 따른 연말 사퇴설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논란에 따른 국민적 분열을 감수하고까지 임명된 바, 상처를 감수하고 검찰개혁 특임장관(?) 느낌으로, 검찰개혁안을 어느정도 제도화 선상에 올려놓고 난 뒤에 퇴진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최선의 정국 수습방안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아직 어떤 것도 불가역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조 장관은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예상보다도 더 빠른 오늘 사퇴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의 사퇴는 너무 일렀다.


2. 검찰개혁의 딜레마: 공은 누구에게 넘어갔는가
  솔직히 검찰개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그 요체가 쉬이 잡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지금까지 법무부 개혁위 측과 검찰 측으로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조치들은 부족하나마 괜찮은 방향의 것들이니, 궤도에 잘 올려놓고 나서 사퇴하는 것이 더 책임 있는 모습일 수 있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힘든 것이야 이미 지난달부터 계속 그랬을 테니, 검찰수사 관련해서 새로운 국면이 있거나, 여당 쪽에서 사퇴 압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임명 과정에서 국론 분열은 될 대로 되고 본인과 주변 역시 망가졌는데, 숙원이었던 검찰개혁 조치를 궤도에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기한은 가진 뒤 사퇴하면 안 되었나. 검찰개혁이라는 의제 자체도 그렇지만, 국민에 대한 책임의 측면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검찰개혁의 선봉장이 바로 검찰의 전방위 수사 대상이라는 기막힌 사태에 의해 전선이 복잡하게 꼬여 버린 상황에서 조 장관의 사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장관 일가에 대한 검찰수사가 장기화되는 와중에 장관 발 검찰개혁도 계속된다면 결국 실제의 의중과 별개로, 두 가지 사안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검찰개혁이라는 보편적 의제를, 조국 수호라는 특수한 의제로 축소시켜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퇴와 같은 결단이 필요했다(이는 조 장관의 입장문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기도 하다). 다만 그 옵티멀한 시점은 지금보다 좀더 나중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아쉽다.

  서초동 집회에서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이 동시에 외쳐진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검찰개혁 필요성'이라는 보편적 의제가 '조국 사퇴 트라우마로 인한 검찰개혁 필요성'으로 인식되면서, 보편성을 잃고 세력 간의 복수와 같은 개념으로 축소될 것 같아서 나는 두렵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 개혁의 과정에서는 세력끼리 치고받으면서 승기를 점하는 구도가 어느정도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목표는 '자신들의 승리'가 아니라 제도의 올바른 구현에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 장관은 사퇴했고, 검찰개혁이라는 의제는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긍정적으로든 냉소적으로든 국민 일반에 확실하게 각인되었으니, 그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책임이 붕 뜨면서 국민 전체에 공이 넘어가 버렸다. 지금까지 나온 개혁안들은 물론이고 그 이후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국민적 논의가 충분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3. 윤석열 총장의 딜레마: 검찰개혁을 완수해야만 하는 이유
  모두가 망가지고 있는 이번 국면에서, 최근까지 그나마 제일 '정석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윤석열 검찰총장이다(물론 윤중천 관련 의혹보도는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 하겠다). 권력의 핵심인사일지라도 전방위 수사를 한다는 점, 그리고 임명 취지대로 꽤나 과감한 자체 검찰개혁 방안들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과 같은 이상한 상황에서 그런 '정석적인' 행보를 밟았기 때문에 윤 총장의 의중을 짐작하고 해석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면이 있다.

  검찰이 기존엔 이 정도로 현 정권 핵심 인사를 날카롭게 겨누어 전방위 수사를 한 적이 잘 없다는 것, 그리고 하필 윤 총장 임명 후 첫 대형 이벤트가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였다는 두 가지 우연(?) 때문에, 조국 지지자들에게 윤 총장은 적폐청산 검사에서 순식간에 적폐 검사로 낙인찍혔다(참고로 어린이들을 동원하여 윤 총장 등을 모욕하는 동요(?)를 만든 '주권TV' 채널은 조 장관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트롤러(...)라고 할 만한, 전혀 다른 성향의 채널로 보이던데 동질적으로 취급된 점이 아쉽다).

  윤석열 총장이 검찰 개혁의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검찰을 비호하고자 하는지는 본인만이 아는 일이고 시대가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윤 총장이 청와대에 조국 임명 철회를 건의하고자 시도했다는 설, 그리고 조국 수사 개시 전에 '이러다 정권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라고 사석에서 말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그 말은 현재 국면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을 어느정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엄중한 사안이고 문제가 될 사안인 만큼 검사로서 수사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합당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 장관의 혐의와 별개로, 언론에 수사정보를 흘리는 검찰의 지극히 잘못된 관행도 역시나 볼 수 있었다. 그런 일을 한 일선 검사들과, 윤 총장을 동질적인 행위자로 봐야 할지 이질적으로 봐야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전자라면 윤 총장도 결국 검찰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검사인 것일 테지만, 후자라면 검찰 수사의 잘못된 관행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것일테다. 자극적 보도는 언론의 속성이다. 그러나 그 소스를 제공하는 검찰의 수사정보 유출은 청산되어야 할 관행이다. 일반적인 수사도 정치검찰의 모욕주기로 보이게 만드는, 아니, 스스로를 실제로 정치검찰로 만드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검찰이 다른 세력,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기준을 보여준다면(그러면서도 포토라인 폐지, 수사정보 흘리기 금지 등 개혁조치는 유지된다면), 윤 총장의 행보는 모두에게 비교적 긍정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교적 건실한 정권의 핵심인사를 겨눈 전방위 수사가 이번으로 일회적인 데 그친다면,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친문 지지자들의 실망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윤 총장은 더욱더 임기 중에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야만 하게 되었다. 용의자 인권 보호와 같은 조치는 물론이고, 눈치를 봐서 수사를 안 하거나, 타겟을 잡아서 표적수사를 하는 등의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고 공명정대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4. 기타: 권력과 특권을 성찰하자
  내가 생각하는 현 정부여당 집권층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들 권력은 진짜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특유의 태도이다. 김정호 의원이 공항 직원에게 갑질하면서도,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으로서가 아닌 저항적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상징적 장면이다. 또한 김의겸 대변인 사퇴 때처럼, 중요 기관 관계자들의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들이 자꾸만 보도되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본다.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발언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최근 '조국 사태' 국면에서도 이러한 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알릴레오 인터뷰로 며칠간 화제의 중심이었던 유시민 이사장은 자신을 유튜브 언론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한테 무슨 권력이 있냐'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최성해 동양대 총장이 조국 관련 폭로를 하자 전화를 걸어서 노골적인 압박을 하면서도 그것이 압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국 장관 본인이 일가를 수사하는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걱정되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수도 있지만, 논란 당사자이자 잠재적 수사대상인 실권자로서는 결코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나치게 잘 행사하면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되지만, 자신의 권력이 권력인 줄 모르면서 행사하면 추한 존재가 된다. 다들 본인의 권력을 인지하고 자중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조국 일가에 대한 논란, 특히 입시 및 장학금과 관련되어 대두된 공정성 담론이다. 조국 자녀 논란은 웬만큼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도 상상도 못할 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명문대라고 하는 곳들에 있는 많은 기회들도 일반적으로는 제도의 형태로 포장되어서 주어지는 것이지, 조 장관의 자녀처럼 관계자로부터 특별하게 케어받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공정성' 담론은 주로 공정성에 그치며, 특권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까지 도달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겠다. 결국 공정성을 위해 입시 등의 과정에서의 각종 제한과 감시를 강화하는 것을 넘어, 입시를 물질적으로 추동하고 있는 기회 자체의 불균등함까지 해소해야 한다. 교육 기회의 확대와 동시에, 각급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들에서 특권적 색채를 지우고 공공성을 강화하여 그 기회가 분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 오세정 총장이 구성원 특혜에 대한 성찰과 공공성 강화의 일환으로, 고교와 교육청을 통해 신청할 수 있는 인턴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지인 통해 알음알음 인턴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성적 장학금을 폐지하여 소득 장학금을 강화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늦었지만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에 대한 고민은 정해진 룰 하에서 반칙이 있었는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룰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데까지 도달해야 한다.

  끝으로, 스누라이프 인용해서 기사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들인데 언론을 타면서 과대 대표되는 경향이 있으며, 눈치를 봐야 해서 싫다는 사람도 있지만 기사화가 꾸준히 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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