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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4일 월요일

상황적 우연에 따른 언어이해의 오류는 인간, 언어, 세계 사이의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다

'황망하다'는 말은 슬프다기보다는 정신없다는 뜻인데, 장례식을 치르는 상주들이 보통 '혜량해 달라'라는 말과 함께 주로 이 황망하다는 말로 소식을 전하다 보니, 슬프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서 종종 그렇게 쓰이는 것 같다.

이 얘기를 함께 나누던 다른 분의 보충적 의견에 따르면, '허망하다' 등의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다 보니 여기에 이끌려서 더 그런 점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단순한 어감, 몇 가지 상황적 우연, 다른 단어 및 형태소들과의 유사성 등이 겹쳐서 단어의 뜻이 사전적인 것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곤 하는 것이 나는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 같다(나는 이런 것을 '이끌린다'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이런 언어 현상들 관련해서 위키 등에서 많이 본 표현이라서 그런 듯). 의미와 기표는 서로 별개의 층위인데, 실제로 언어가 구사될 때는 언어들간의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나, 세계의 필연적 구조의 영향 하에 그 층위를 활발하게 넘나들면서 다채로운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연과 혼동에 의해 쓰임이 변화하더라도 언어정책은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와 정확한 어법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등 보수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현상들은 세계와 인간의 지극히 다채로운 상호작용이므로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황망하다'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얘기했던 또다른 예시로는 '억하심정'이 있다. 사전적으로 보면 억하심정은 사람의 마음 중에서 꾹 눌러 놓고 겉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속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 중에서는 부정적이고 억울한 마음이 아무래도 많게 되어 있다 보니, 억울하고 한이 맺혔다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용하는 듯하다. 물론 사전적인 뜻대로, 꼭 한이 맺힌 느낌이 아니라도 뭔가 음침한 속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것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은 것 같기는 하다.

또한, 답답하고 북받친다는 의미의 '억하다'라는 단어가 존재하므로 '억한 심정'이라는 표현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런 표현과도 상호작용하는 것 같다. 다만 '억하다'라는 말이 '억한 심정' 외에 거의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억하심정' 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덕분에 그 영향을 받아서 (예컨대 억하심정이라는 말이 머리속에 떠오르긴 했는데 그게 알맞지 않은 쓰임새임을 인지하고 있어서 바로 수정할 때) '억한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위 내용과 약간 관련될 수도 있는, 2017년경 별다른 목적 없이 간단히 작성해 본 글을 하나 첨부한다 (아래에 임베드). 여기에서는 언어로부터 우연하게 유발되는 감각인상(편의상 '언감 현상'이라고 칭함)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님에도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인식 구조상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언감 현상은 감각과 의미가 직접 맞닿아 상호작용하므로 아주 세련된 예술적 계기까지는 아니지만 주관적 보편성을 가지므로 미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위키위키 류 사이트 이용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떡밥 중에 하나인 Bouba-Kiki 효과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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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1일 금요일

미술과 음악에서 균일성에 대한 왜곡된 인지와 이를 보정하는 표현법

디자인 분야에서 정사각형과 원의 폭이 같으면 원이 더 작아 보이기 때문에, 원의 크기를 일부러 더 키워 주어야 두 도형의 크기가 똑같아 보인다거나 하는 여러 노하우들이 있다 (여기서 크기가 같다는 것은 면적이나 길이 등 정량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람이 딱 보기에 같은 크기라고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사진 출처: medium 포스트 (링크))


그런데, 음악에도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다. 한 마디 내에서 앞쪽이나 뒤쪽에 가사 음절들이 쏠려 있거나, 멜로디의 상승감 및 하강감이 두드러지면, 분명 박자가 정확히 맞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저는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그런 효과가 덜 느껴지도록 송라이팅 자체를 잘 하거나, 아니면 가창을 할 때 살짝 밀거나 끌어서 부르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이런 것들이 음악 프로듀싱 하는 업계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이슈가 아닐까 싶다.

왜 이 생각을 갑자기 했냐면,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aespa의 Whiplash 음원 레코딩이 어느 정도 후자처럼 디렉팅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음방 영상을 처음으로 봤는데, 박자가 잘 맞는데도 음원과 차이가 좀 난다.

보컬이나 악기를 녹음할 때 박자 퀀타이즈를 너무 칼같이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컨텍스트도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박자가 나갔을수도 있지만, 감각이 뛰어나고 숙련된 연주자는 이런 것을 잘 고려해서 표현하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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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0일 목요일

국제질서 급변과 인구 급감을 앞두고... '평범한' 과학 커리어란 가능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이 추진하는 일들의 귀결은, 지금까지 빚과 지출을 늘리며 대내, 대외적으로 확장되어온 미 연방을 어떤 의미에서 한 번 청산하는 것과, 더욱 노골적인 부자들만의 나라를 만드는 것인 듯하다. 큰 정부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어떤 평균적 의지(별로 정합적으로 작동가능한것 같지는 않은)가 이런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셈인데, 그 의지를 표명하는 개인들조차 지금의 이런 사태까지 속속들이 예상하거나 의도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경제 및 외교통상 관련 조치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언론, 시민, 외국인들의 비판을 막고, 기후, 다양성 등의 의제를 시민운동과 학술연구 양쪽에서 완전히 죽여놓다시피 하는 걸 보면 순식간에 유럽보다 중·러에 가까운 나라가 된게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다. 이게 회복이 가능할까?

특히 학계조차 컷을 당하고 탄압을 받고 있는걸 보니 참으로 무서운 일인 것 같다. 안그래도 우리나라 기초과학은 일본과 달리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생태계가 돌아갈 만큼의 볼륨은 아직도 안 되는 것 같아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협력이 지극히 중요할 텐데... 이는 한국인 연구자들에게도 상당히 안 좋은 시그널이다.


한국이건 세계이건, 왜 내가 어렸을 때까지는 그런대로 좋다가 하필 내가 커리어를 꾸려나가고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살아가야 될 시기부터 이렇게 흉흉하게 되는가를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다. 이것은 어릴 때의 순진함에 의한 착각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세계가 바뀌고 있는 것임이 명백하다. 앞으로 어떻게 삶을 꾸려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데,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고, 결국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차라리 한국 내에서 가능한 커리어패스가 충분히 있다면 몸도 편하고 좋을 텐데, 세계를 유랑해야 하는 한국 과학도의 삶이란... 과학도들은 미국유학에 대한 흔한 한국적 관념처럼 '급'을 높이려는 욕심 때문에 해외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초과학계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디폴트로 굉장히 국제화되어 있는데다, 한국인 연구자들의 경우 해외 아니면 커리어패스를 만들어갈 수 있는 자리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몸이 힘들고 정착이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해외를 돌아다니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를 알아야 한다.


내가 박사 졸업을 할 시점에도 미국의 상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말년 만화에서 유래된 유행어인 '명예로운 죽음'처럼 '명예로운 미국못감(?)'을 하고 유럽, 일본, 심지어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고자 시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다시 군비증강과 전쟁의 시대로 돌입하는 지금의 국제정세로 보면 과연 유럽 혹은 다른 나라라고 해서 안전할지... 그 이전에 한국은 멀쩡할지?


앞으로 인구의 급감으로 인해 대학이랑 연구소의 자리들도 점점 줄어들 텐데, 내 실력을 보니까 나는 개인적인 안정성을 포기한다면 평범하게 자리를 지키는 연구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늦지 않은 나이에 학계에 정규직으로 정착이 가능할 정도로 좋은 연구 업적을 쌓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인 팔자만 생각한다면, '명예로운 학계포기(?)'와 함께 빠른 취업을 생각하고 과학은 애호가로만 남는 것이 사실 제일 좋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수학, 물리학 하는 학생들 중에 일부 자존심 세고 소명의식 높은 부류는 취업하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난 공과대학 출신이다 보니 이런 면에 있어서는 생각이 유연한 편이기도 해서 그런 생각까지는 없다. 사실 그럴 입장 자체가 못되는 게, 요새 박사 취업도 굉장히 어렵고 (신진 기업들뿐 아니라 전통의 삼성만 봐도... 과거 전기전자/물리학쪽 박사 삼성취업은 과장 많이 섞어서 럭키 티맥스 느낌이었다고 하지만 작년엔 박사 채용이 거의 없었고 특히 하반기 삼전은 박사채용 0명이었다는 말이 있음), 실제 혁신은 인더스트리에서 훨씬 많이 일어나니까 말이다.


후과를 생각하면 사실 이런 글도 올리면 안 되기는 할테다. 과학도로서도, 한 명의 시민으로서도 참 갑갑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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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9일 일요일

기본값의 왜곡, 헌법재판의 개념, 가벼움이라는 착각

결국 원조 내란수괴인 전두환 일가까지 등판해서 윤석열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윤석열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다. 무려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퇴행적, 미래적(?) 극단주의 모두를 적극적으로 띄워 줘 버린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전국민의 관심이 쏠린 최고로 권위 있는 채널에서 공식 발언으로 부적절한 인식이 나가게 되면, 우리 사회의 기본값이 되는 합의의 선 자체를 확 낮춰 버린다. 그러면 음지에서나 머물러야 할 온갖 극단주의적 주장,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져야 하는 군사독재의 그림자가 함께 수면 위로 떠올라서 제도권에 안착하게 된다.

이건 비상계엄 사태 이전에도, 윤석열 정부 내내 역사관을 중심으로 한 이런저런 문제들 관련해서 계속 그래 왔다. 그래서 5.18 부정론을 비롯해서 역사관 관련한 온갖 이상한 주장들이 기세등등해져서 함께 튀어나와서 정상을 참칭하게 된다. 이것이 제때 비판되지 못하고 장기화되면 말 그대로 정상, 흔히 말하는 뉴 노멀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비상 계엄선포 및 탄핵심판에서 윤석열 및 그 대리인단이 온갖 짓을 다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나는 이를 기본값 조정에 의한 인지 왜곡이라고 부르고 싶다. 정치 관련한 기계적 중립 및 양비론으로의 압력이 심한 편인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되면 정치 중도층과 무관심층들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어느새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반대로 문제가 아닌 걸 문제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지도자가 뻔뻔할 대로 뻔뻔해지면 이렇게나 악영향이 크다. 정치권력의 책임성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다.

2020년대의 세계를 보면 헌정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합의를 부정하는 극우의 정치세력화가 어느정도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통령 본인이 이에 진심으로 심취해서 찬동해 버리는 바람에 그 속도와 규모가 대단히 가속화되어, 순식간에 세계 어느 제대로 된 민주국가보다도 심각하게 제도권에 올라가 버렸다.

거기에다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국가행정조직 중에서도 굉장히 특수한, 군경이라는 국가폭력의 유일한 합법적 담지자를 위헌적, 불법적으로 동원해서 국민들 앞에 대치까지 시키면서, 폭력적인 헌정 부정세력들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이번에 새로 발표된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가 결함있는 민주주의로 떨어졌던데, 내란 옹호의 세력의 주류화를 조기에 떨쳐내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일시적인 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급기야는 40년 전의 원조 내란수괴도 뻔뻔하게 다시 기어나와서 저러고 있으며, 지난 몇 주 동안 보았듯이 거대 여당 중진들도 광장정치에 고무된 나머지 옹호해서는 안 될 것까지 옹호하고, 찬동해서는 안 될 것까지 찬동해 버리고 있다. 이게 우리나라의 정치에 아주 안 좋은 여파를 장기간에 걸쳐서 남길 것이다.

전재국 씨가 시공사 돈 떨어져서 나오는 거다... 이런식으로 가볍게 치부할 게 아니다. 극우 기독교 광장정치도 돈으로 동원하는 거니까 무시하면 된다고 가볍게 치부하다가 순식간에 이렇게 와버렸지 않은가 (물론 MB랑 박근혜 때 국정원과 청와대가 진짜로 우파 단체에 나랏돈 줘 가면서 집회 동원하고 했던 것은 그것대로 또 추적하고 기억하고 비판해야 함). 마르코스가 기어이 재집권해 버린 사태가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 상태에서 정말 혹시나 탄핵이 기각되기라도 하면, 헌정체제 파괴를 획책한 내란이 광장정치의 힘까지 더해져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고, 정말 문자 그대로 나라가 망한다. 이미 적당한 정치적 화해로 끝날 수가 없게 갈 데까지 가버린, 야당과 일부 헌법기관을 돌이킬 수 없게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버린 인물이 윤석열이다. 헌법재판소도 외부로부터의 여러 정신적, 물리적 압박이나 정치여건에 좌고우면하지 말고, 헌법 위반사항을 공정하게 따져서 탄핵심판 선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본질적으로 고도의 정치적 판결을 하는 기관이라는 언설도 꽤 많이 보이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에도 동의가 안 된다. 쟁점이 갈릴 만한 통상의 위헌법률심판 등에서는 헌법에서 근거를 찾되 재판관들의 개인 성향, 국민 여론, 사회상규 등이 반영될 수 있고 여기에 정치성이 개입될 수는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말그대로 헌법의 규범력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판정을 내리는 기관이지, 그 외의 다른 개념규정은 부차적이거나 아예 불필요하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의 경우 헌법 위반사유가 명확하고 피청구인의 헌법 수호의지가 부재한데다, 위반 사항이 단순히 문언 상의 디테일에 대한 절차적인 부분도 아니고, 헌법정신 그 자체를 정면으로 파괴하려 했던 상황이다. 이럴 때에는 정치나 여론이 아니고 오직 헌법에서 근거를 찾으면 '정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오히려 그 정답이 아닌 외부 여건에 좌고우면해서 판결이 내려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치적 판결일테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체제 파괴를 선동하고 있는 내란범(형사 판결 안 나왔는데 내란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지적은 받지 않겠다)을 다루는데 있어서 절대로 안이해서는 안 된다. 속 편한 소리들 좀 그만 보고 싶다.

워낙 요즘이 해체주의의 시대, 가벼움의 시대인 만큼, 이게 '옛날의 그' 진짜 계엄령, 진짜 내란, 진짜 군사쿠데타와는 다른, 뭔가 가벼운 것이라고 사람들이 계속 착각하는 경향도 있다. 나는 심지어 윤석열 본인도 어느 정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계엄이 (너무 다행히도) 일찍 해제된 덕분에 사람들이 더 그렇게 느끼는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한국에서 국민들의 기본권이 순식간에 제한되고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훼손될 수 있는 순간이었고, 국민들과 국회의원 및 보좌진들이 그날 밤 용기있게 막아냈다.

그리고 광장에서 내란을 옹호하는 전광훈, 손현보, 전한길이나 그에 영합하는 여당 중진 의원들도, 속으로 계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돈이나 정치 여건 때문에 잠깐 그런다는 식으로 평가절하(?)를 당하곤 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심각한 사안 앞에서, 아무리 잠깐의 정치 여건 때문에 파면 전까지만 그런다고 해도, 그 악행의 무게는 그 행위 하나하나로 조목조목 정확하게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계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당연한 일이지만, 여당의 분위기 자체가 위처럼 박살나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그런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윤석열과 명확히 선긋기를 하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평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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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8일 토요일

윤석열 구속취소를 보며: 직무정지의 실효성, 그리고 대통령 직속기관 개편 제안

다시 힘든 시간을 마주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에 따른 직무 정지 이후로도 대통령실은 작동하고 있으며 회의도 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여도 행정관료 조직을 동원한 통상적인 범위의 '나랏일'을 못 하는 것뿐이지, 훨씬 정무적인 보좌의 성격을 갖는 대통령비서실 고위 인사들이랑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접촉해서 정치적, 비정치적, 법적, 비법적 헛공작을 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직무정지 때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대통령비서실의 기능을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이미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신뢰 배반의 끝을 한번 본 사람이라, 안 되더라도 쓸 것 같긴 하지만). 그 사람들 다 관료적/자기보신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한몸인 사람들이지 않나. 그나마 특활비 삭감 해놔서 좀 제한되려나.

지금의 상황은 대통령이 정상적인 헌정의 틀 내에서 나랏일을 잘 했냐 못 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선을 한참 넘어가서, 아예 다른 헌법기관을 무력으로 건드리면서 직접 헌정위기를 초래한 상황이라는 점을 아무리 반복하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사람이 직무정지든 아니든 석방된 것 자체가 너무 걱정이 된다.

나랏일은 대행한테 맡기고 정국 대응 구상할 시간만 엄청 많은 상태인 거니까 나랏일 안 해도 되는 게 오히려 꿀이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석방돼 있는 사람이니까 사실은 나랏일에도 그의 의중이 작용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이고.

대통령이 최측근 동원해서 주요 라인 장악한 상태에서 선을 넘으려면 거하게 넘을 수 있다는 게 드러나 버리고, 상대진영이나 일부 헌법기관을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적대시하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 직무정지조차 그 실효성에 한계가 크다고 느껴져서 솔직히 절망감이 크다. 나는 대통령제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제대로된 민주국가에 대통령중심제가 은근히 드물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을 정도다. 지금은 정말 exceptional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보완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폭주했을 때 어떻게 막을 것인지 앞으로 국가적으로 많은 고민과 디테일한 보완이 필요할 것이고, 그 핵심으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통치구조 자체를 바꾸는 큰 일인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개헌 등을 안 한다면) 대통령 직속기관 개편을 통한 권력의 분산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하는 대통령실과 국가 행정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입장에서의 느슨한 상상일 뿐으로, 불가능하거나 말이 안되는 얘기가 많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지난번에도 썼듯이, 경호처는 정무적 성격을 빼고 철저히 대통령 개인의 물리적 안전을 위해 경호하는 조직으로 다시 축소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경호처장(혹은 경호실장)에 최측근이 임명되고 경호처가 정치화되면서 헌정위기가 생긴 게 이번을 포함해서 벌써 몇번째인가. 이미 김영삼 정부나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이전 정부들에서 몇 번 했던 것처럼, 그야말로 '원래부터 직업이 경호원인' 사람을 공채를 하거나, 경호처에서 내부승진으로 발탁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정착시켜야 될 듯하다.

대통령비서실도 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군사 안보 관련된 기능이 대통령비서실이 아닌 국가안보실, 국정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일단 다행이지만, 대통령의 개인 품위유지나 일정 관련된 '비서' 기능과 정치/경제/정책현안에 대한 보좌기능은 대통령비서실이라는 조직 아래에 여전히 하나로 합쳐져 있는데, 이것도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지금 정부에서도 대통령비서실 밑에 '대통령비서실장'이랑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둘다 장관급으로 동등하게 이원화되어 있기는 하다. 그럴거면 아예 실을 나눠서 더 확실하게 분리하면 어떻냐는것.

그럼으로써 위에 경호처장에 대해 말한 것처럼, 대통령비서실장도 정무적 최측근의 성격을 제거하고 그야말로 생활, 품위유지, 일정 등과 관련된 비서 역할 위주로만 하게 하는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더 나아가서, 홍보, 정무, 민정수석실의 역할도 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정책실은 대통령이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일을 할지를 보좌해서, 국무회의를 중심으로 현안관련 국정이 돌아가게 한다던지.

물론 국가원수라는 위치상 개인적인 보좌와 업무 관련 보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이 많을 수밖에 없고, 비서라는 건 그 모든 걸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자리인지라, 비서실을 위처럼 쪼개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할수도 있다. 동의가 되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너무 강한 권한을 생각하면 불편이 따르더라도 이런 식으로 분산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방송통신위원회는 왜 대통령 직속기관인지도 사실 모르겠다. 윤석열 당선되고 나서 MB 때랑 똑같이 (심지어 이동관은 그 때랑 아예 같은 사람임..) 문제 많은 인사들을 방송 쪽에 등용해서 노골적으로 방송장악을 시도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사들을 괴롭히는 꼴을 봤으니... 보다 독립성을 기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할 듯하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현재진행형으로 지극히 위험한 인물이 돼버린 상황인데, 구속기간에 대한 지극히 이례적인 해석까지 근거로 들면서 구속취소 판결을 한 재판부도 이 점에서는 너무 안이하다고 생각이 든다. 사실 잘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수사권 갈등이나 서부지법 영장청구에 대한 논쟁이 많은데, 이미 다른 재판부에서 문제없다고 판단이 이뤄진 부분들임은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권 관련된 게 상급심 등에서 문제가 돼서 사건이 파기환송되거나 재심될 수 있으니 더 정리가 필요하다는 재판부의 입장은 이해가 되는 면도 없지는 않다. 결국 이 부분은 내란죄 수사를 제외해 놓은 이상한 공수처법과, 출범 이후 수사기관 간에 수사권 관련 세부사항의 정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던 상황의 원죄라고밖에... 2년 반 만에 고위공직자의 내란죄 혐의가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냐만 말이다.

아무튼 또 다시 너무 힘든 시간일듯하다. 국민 앞에 군을 동원해서 대치시킨 반헌법적 계엄을 목도한 것 자체가 충격인데, 집권여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광장정치에 고무돼서 기세등등한 바람에, 적당히(?)하지를 못하고 옹호해선 안 될 것까지 옹호해 버리고 있다. 현실적 정치여건 상 정당해산심판까지는 아마 하기 어렵겠지만, 일부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정당해산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지금 상황이 그냥 고위직들끼리 싸움 좀 붙은 정치 갈등이나 흔한 비리 정도가 아닌, 헌정 위기 상황이며 대통령이 초 중대 범죄혐의자라는 점을 다들 잊지 않아야 하겠다.

여론 봐 가면서 광장정치에 영합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데 여당 정치인들이 자기 발언의 무게를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대통령이 석방까지 돼서 활동이 자유로워졌으니, 탄핵심판에서 설령 파면 선고가 되더라도 장기적으로 너무너무 안 좋은 영향이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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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일 월요일

메탈 및 메탈근처 앨범 10선

지하철에서 Spotify를 켰다가 심심해서 꼽아 보는 메탈 및 메탈근처 앨범 10선.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들은 일단 빼고, 폭넓게 알지는 못하다보니 상징성, 대표성보다는 내가 아는 범위에서 지금 현 시점에 끌리는 앨범들 위주로 골랐다. 전반적으로 연주가 복잡다단하면서도 어느정도 직선적인 야마가 분명하게 잡혀서 비교적 쉽게 이해가능한 곡들, 그리고 어두움의 틈에서 서정성이 스며나오는 곡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1. Nine Inch Nails - The Downward Spiral (1994)

시기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아래 다른 앨범들과는 꽤 이질적이지만 개인적으로 대중음악 전체에서 딱 한 개 음반만 꼽자면 이것임. 악보에 표기하기 곤란한 전자음과 효과음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소리의 텍스쳐가 대단히 강조되면서, 그 결과물도 실험적인 가치를 넘어 악곡 그 자체로도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음반으로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와서 선구자 역할을 한 듯. 2010년대에 한창 일렉트로닉 유행하던 시절에 어두운 전자음악이 뭐가 있나 많이 찾아봤었는데 내 마음에 충분히 드는 건 없었고 오로지 NIN이 오래 전에 매우 탁월하게 선취했다고 생각함




2. Have Heart - Songs to Scream at the Sun (2008)
하드코어펑크 중에서도 straight edge라고 해서 술이나 약물 같은 쾌락에 젖는 대신 올바르고 깨끗한 삶을 추구하는 펑크 무브먼트라고 하던데 그건 잘 모르겠고 곡들이 굉장히 좋다. 앨범커버가 좀 깜놀계다.



3. Decrepit Birth - Polarity (2010)
테크니컬 데스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멜로디가 강화된 앨범. 둔탁하면서도 빠른 박자와 맞물리는, 쉴새없이 찌르는 하이프렛의 기타를 듣고 있으면 모든 세포를 기계장치로 대체한 새가 지저귀는 느낌이 든다. 곡들이 그리 길지 않아서, 귀가 피곤해질 때쯤 다음 곡으로 전환된다. 수록곡 중에서 조금 조용한 편인 Sea of Memories가 제일 마음에 듦.




4. Revocation - Chaos of Forms (2011)
다양한 장르를 적당히 결합시키면서도 메탈이라는 구심점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여낸 놀라운 테크니컬 스래쉬. 듣다보면 언뜻 당황스럽지만 이내 적응하고 즐기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레코딩도 굉장히 선명하게 이뤄져 있다.




5. Periphery - Periphery II: This Time It's Personal (2012)
날카롭게 깎인 미국스러운 젠트 앨범. Make Total Destroy로 처음 접하고 풀앨범은 나중에 다 들어봤는데 특히 Scarlet은 딱 들어도 이해할수 있는 정도의 대중성까지 확보한 희대의 명곡인 것 같음. 앨범의 프로듀싱은 중후하다기보다는 날카롭게 이루어졌고, 이와 어울리게도 컨셉과 가사가 미묘하게 유치한 덕분에 (페리페리 전반적인 특징이긴 함) 오히려 너무 무게잡는 느낌이 안들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는 점도 평가할만한 부분.




6. Native Construct - Quiet World (2015)
심포닉블랙스러운 블라스트비트부터 디즈니 뮤지컬(?!)스러운 파트까지 섞인 굉장히 특이한 트랙 Mute가 있음. 다른 곡들도 Mute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꽤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별도의 포스트로 소개한 바 있다.




7. Plini - Handmade Cities (2016)
섬세한 프록메탈/재즈퓨전의 대표주자. Electric Sunrise로 대표되는 이 앨범은 송라이팅도 프로듀싱도 꽤 부드럽게 된 편이라 (연주 순수체급을 바탕으로;) 재즈 듣는 사람들한테 들려줘도 좋아함.




8. Vektor - Terminal Redux (2016)
한국 메탈팬덤에서도 엄청 화제가 됐던 앨범. 다양한 스타일의 영향이 묻어나지만 그게 일관된 색깔 안에 잘 통합되어있고, 송라이팅과 구성이 너무 좋다보니 언급이 덜 되지만 보컬의 사용도 탁월하고 유니크하다.




9. Between the Buried and Me - Colors II (2021)
Colors I에 이어서 십수년만에 나온 정신적 후속작. 맘에 드는 부분들이 많지만 구린 부분도 많고 정리가 좀 덜된 느낌이 들어서 넣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전반적으로 즐겁게 들었기 때문에 선정함. 앨범 커버 때문일수도 있는데 이 앨범을 듣다보면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카메라가 가지각색의 연회장을 빠르게 훑으며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10. Asunojokei - Island (2022)
Blackgaze 장르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앨범. 극도의 서정성이 인상깊다. 짧은 연주곡인 Tidal Lullaby가 기승전결이 확실하면서도 이 앨범의 스타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별도의 포스트로 소개한 바 있으며 덧글에 링크.




Honourable mention
나를 입문시켜준 양대 앨범인 Arch Enemy의 Burning Bridges와 서태지 6집 울트라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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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5일 토요일

보수우익의 이상한 불만: 민주화세력의 도덕적 우위를 끝내려면 제대로 인정부터 하라

윤석열 옹호 전사로 순식간에 떠오른 전한길 강사가 광주에서 진행된 탄핵 반대 집회에서 '이게 진정한 5.18 정신 계승'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

이 사람만 이러는 게 아니다. 전한길이 뜨기 전부터도 탄핵 반대 집회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그냥 지금 상황에 맞는 자신들의 주장을 해도 될 텐데, 그러지 않고 20세기 민주화운동을 엄청나게 의식해서 발언한다. 우리도 4.19 한번 해보자, 우리가 진정한 5.18 정신 아니냐는 식이다.

전한길 강사의 발언 장면. 동의해서 가져왔다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대각선을 그었다.


나는 보수 여당 지지자들이 나타내는 이런 현상이, 20세기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끝나가고 보수 여당도 함부로 폄하 못하는 헌법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 내지는 불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 세력에 대한 호오를 떠나 군사쿠데타로 수립된, 혹은 군사쿠데타가 기도된 당시의 여당은 늘 한쪽이었고 (3당합당 및 전향 등으로 복잡해지긴 했지만 대충), 그에 대항해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어쨌거나 그 반대세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대체 뭐가 불만이고 뭘 더 어떡하라는 것인가?

그 불만을 뜯어봐도 정작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 없다는 게 정말 이상한 점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인걸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뭔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의심할 자유를 달라고 주장해온 청년극우들과 굉장히 닮았다.

더불어민주당이 자꾸 민주화운동 가치를 독점하고 관성적으로 정치를 하려는 것 같아서 불만이면, 이렇게 우리도 우리 손으로 우리세력의 민주화운동을 만들자고 억지를 부릴 게 아니라, 보수세력 자신들 내에서 기존의 민주화운동들을 괜히 불편하게 여기고 딴 소리 하는 분위기부터 먼저 해결을 해서 보편 가치로의 추인에 협조하면 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민주당이 민주화운동 지지만으로 기본적인 도덕적 우위를 깔고 가는 상황이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자꾸 자유라는 가치를 보수적 구호로 생각하고 불편해하고 배제하려는 걸 보고 이건 정말 상대 프레임에 말리고 스스로 기반을 좁히는 일(링크, 2021.07.01.)이라고 여러 번 지적했었는데... 보수도 민주화운동 가지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극히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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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6일 목요일

임명묵 작가 기고문을 읽고: 극우의 세대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임명묵 작가와는 학부를 다닌 시기가 거의 겹치고, 스터디도 한두 차례 같이 하기는 했었다. 이미 20대의 나이에 책도 수 권 쓰고 여러 지면에 기고도 하며 이름을 알려서 내가 상당히 부러워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지만, 아마 그 분은 내 존재 정도만 아실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고된 탄핵 반대 집회 체험기(링크)는 평소보다 큰 논쟁을 촉발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이야기를 얹을 수 있게 여러 가지 사유의 결을 풍부하게 깔아 놓았다는 점에서 그 글은 무척 성공적이다. 그러나 현상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진단할 뿐이라는, 우호적 독해에 근거한 팬들의 옹호가 어쨌거나 필요해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글이다. 글의 의도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독해가 대립하는 셈인데,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났는가? 한 가지 이유는 언론 기고문이라는 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논쟁을 촉발한 글의 내용과 행간을 찬찬히 보면, 동조보다 진단에 더 가까운 면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언론기고의 경우 내용 및 행간뿐만 아니라 글이 게재되는 매체, 글이 소비될것으로 기대되는 방식, 글이 주로 소구하는 대상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독해되어야 하고 글쓴이도 이를 고려해야 한다.


관련된 또 다른 요인은 스펙타클에 근거한 글쓰기다. 내가 임 작가의 글에 대해 예전부터 느낀 인상은, 국내 및 국제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정치적 평가를 다소간에 비우는 대신에, 그 대신 거기서 연출되는 상징적 장면들 자체를 위주로 심미적(?)으로 접근해서 어떤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고자 하는 특유의 스타일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정치적 결론을 내리는 대신에 한발 물러나서 그 스펙타클 자체를 감상하며 관조하듯이 평하게 되고, 자연히 서로 다른 여러 독해가 생겨날 공간이 늘어나게된다.

문화적 코드에 집중해서 '스펙타클한 장면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정치, 시사 등에 관심이 있는 페이스북 유저들에게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상당히 익숙한 글쓰기 방식이고, 나도 종종 즐기는 편이다 (특히, 웅장한 대륙적 아우라를 자랑하는 장면들을 다룰 때에는 유독 더 그러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식으로 쓰인 글은 언론 지면에 바로 나가기에는 좀 적절하지가 않을 수 있다.

스펙타클에 대한 관조적 향유와 동조적 열광은 언론 지면에서 구별되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스펙타클의 힘이고 언론지면의 힘이다. 그래서 '미적'으로 쓰인 글이더라도 정치 고관심층들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독해하게 된다. 그 결과는 덧글창에서 드러난다.


동조가 아닌 진단일 뿐이라고 하면, 그 진단이 과연 적절한지도 물을 차례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이번 글에서는 진단 자체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현장에서 노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화합이 발생하는 장면은 기독교 보수 세력의 역할을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번 글에서는 그 얘기가 아예 없어서 의아했다. 현장에 갔을 때 정말로 기독교적 코드가 느껴지지 않았는지는 나야 알 수 없지만... 각종 매체 보도와 뉴미디어 중계를 보면, 기독교 기반의 집회참가자들이 2030도 탄핵반대로 돌아섰다면서, 청년들을 기특해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언급해 줘야 한다고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정서에 편승하여, 청년구독자 위주 채널인 배인규는 가급적 선남선녀들(아마 외모 얘기일 것이다)을 발언대에 올려보내야 해서 고생했다고 하기도 했다. 내가 거의 6-7년 전부터 강조하며 우려했던, 국가주의 기독보수와 안티페미 청년보수의 접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셈이다 (링크, 2018.11.26).

그런 강박에도 불구하고, 집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 화합과, 그 안에서 청년을 챙겨 주어야 한다는 분위기 자체는 상당부분 '진짜'로 인간적인 화합일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화합이 꼭 정치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갈등과 불화를 금기시하고 인간미있는 연대의 힘으로 눙치며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일을 화합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화합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반대하겠다. 상대방이 일으키는 불화에 대해서는 뿔달린 도깨비 취급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사회에 더한 불화를 일으키고 있지 않나. 증오와 음모론에 근거한 화합은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게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나도 산업화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세대화합 및 전통적 가족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뿔달린 좌파가 되나?

지금 국면에서 내가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계엄 사태의 중대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제대로 선긋기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게, 순순히 정권을 헌납하라는 뜻이 아니다. '탈윤'을 확실히 하고 철저하게 절치부심만 한다면 보수가 재집권해도 원칙적으로 아무 상관 없다 (계엄 사태에 대해 확실히 선긋기를 해준다는 전제 하에, 어디까지나 계엄에 대한 책임 여부에 한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당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계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많이들 이야기는 하는데, 그게 정말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한 인식과 표현, 불법적으로 행사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경계심이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면서 계엄 할 만 했다는 식의 얘기가 계속 섞여들어가고 있다. 여당 주요 정치인들의 행보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중진의원들도 계속 대통령 접견을 하고, 당협위원장들은 단체로 가서 구치소 앞에서 아예 공개적으로 설 세배 인사까지 했다. 대통령 측이 자기가 다 안고 가겠다는 식으로 하지 않고 계엄을 옹호하는 세력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여당의 이러한 행보 하나하나가 그러한 극렬 지지층에게 힘을 실어준다는걸 어떻게 모른 체 할 수가 있겠나.

언론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지금 조선일보는 계엄사태에 대해 선긋기를 철저하게 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강조하고 잔머리를 굴리는 보도들을 쏟아내면서 사법 불신을 과도하게 조장하고있다. 지금은 아직 조기대선 국면이 아니고 파면이 되냐 마냐의 국면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입장에서, 나라면 정치적인 주제, 그중에서도 탄핵반대 집회를 주제로 하는 글은 이 시점에서는 조선일보에 기고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서로 의견이 다를지라도 공통점을 넓혀나가는 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는 군을 불법적으로 동원한 계엄사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비판적인 인식을 유지한 채로, '계몽령' 따위의 언설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긋기가 이뤄진 판 안에서 이뤄져야한다. 많은 우파 스피커들이 명시적으로는 계엄에 확고히 반대한다고 얘기하며 아마 실제 생각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부수적, 지엽적 논거들이 계엄 옹호와 탄핵반대 움직임에 실질적으로 연료를 공급해주고 있는 점도 보아야 한다.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공수처의 입법결함 지적, 야당의 패악질이 계엄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 등의 모든 부수적인 것들은 탄핵 인용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아주 복잡하고 특이한 성정에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추적해 온 입장에서,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번 사태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면 역시 있다. 다양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고 요리 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권위적인 보스 행세를 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조인트를 그렇게 심하게 깔수 있는가. 이는 의대증원, 수능킬러문제, R&D삭감, 홍범도 흉상 등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윤석열 정부 특유의 뜬금없고 자폭적인 졸속정책추진의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링크, 2023.08.30). 또한 노무현을 좋아하고 김기춘이 부끄럽다는 사람이 어떻게 야당이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극우인사들을 기관장에 임명해서 대립을 격화하고 기관을 망쳐놓는 행위를 반복할수가 있는가.

윤석열은 자신의 직을 걸면서까지 '일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다소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관철하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특유의 방식으로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이를 통해 인지도를 쌓았다 (링크, 2021.03.05). 이러한 태도가 대부분은 (적어도 국민의 절반 이상에게 한번씩은) 원칙주의적 면모로 드러났지만, 때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절제되지 않은 행보로 나타났으며, 비상계엄 사태에서는 후자의 면모가 정점을 찍었다. 책임있는 민주정치를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는 이러한 도박적 태도가 얼마나 안맞았는가.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거시적인 정치 여건 그 자체보다도 대통령 개인의 아주 이례적인 성정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일어난 사건으로, 국민들이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윤석열의 인간적 면모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역시, 그가 12월 3일에 저지른 비상계엄사태,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도 극우개신교에 소구하며 헌정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것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물은 이후의 얘기다. 여기서도 이후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인 순서일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순서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10년 안에 한국이 기독교극우 국가가 될 위험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세속의 논리와 별개로 돌아가는 신념체계를 신봉하면서도 그 논리가 세속에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수의 음모론자들을 굳이 언급해서 키워줄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겠지만, 나는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본다. 2020년경 황교안대표 체제의 미래통합당 시기를 거치면서 보수정당 적극 지지층의 질이 너무 안좋아졌다. 극우목사 유튜브들의 수익모델이 확립되면서 세력이 커졌고, 급기야는 엄청난 발화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그의 변호인단이 그런 음모론적 생각들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아 반헌법적 계엄사태를 일으켜 버렸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헌법재판소 심판정에서까지 재생산하면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면에 이를 견제해야 할 사람들은 거대야당의 지리멸렬한 일극체제 하에서 대체로 무기력하거나 분열되어있고, 이를 타겟한 양비론의 힘도 너무 크다.

요즘 보면 어이없게도 제일 끈끈한 공동체가 바로 극우교회다. 마음을 기댈 공동체가 없는 사람들이 갈수록 분열하는 것과 대조된다. 보수교회에 위임된 복지 및 커뮤니티기능을 재정확장을 통해 국가와 지자체가 회수해서 집행해야한다. 그리고 극우목사는 처벌하고 돈줄을 끊어야한다. 퍼블릭한 성격을 갖는 공동체를 복원해서 극단주의에 대응할 역량을 키워야한다.

단지 일부 소외된 노년층만의 일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들의 지분이 크다). 위에서 말했듯이 대통령 및 변호인단과 보수교회가 논거를 공유하며 서로 지지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형 보수교회들은 심지어 미인가 대안학교까지 다수 운영하면서 성전을 치를 전사들을 양성하고 후속세대를 재생산하고있다. 이걸 쉬쉬하고 무시할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하고 적극적으로 경계해야한다. 이쪽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언뜻 볼때 종교적 색채가 지워진 채로 유통되더라도, 그 생산기제 및 행간으로부터 종교적 동기를 읽어내어서 적확하게 추적, 비판할줄 아는 적극적 세속주의자들의 실천과 표명이 필요하다.

보수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 헌법이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제정되었으며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을 자신들끼리 공공연하게 얘기한다 (윤석열 대통령 “성경이 헌법 근간” 주장에 법학자들 “반헌법적 발언” (법보신문 김민아 기자)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6044). 이런 날조된 역사가 미래세대의 정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으며, 그게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더 널리 알려져야한다.

2030 청년이 기특하다는 말은 많은데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청년에서는 중국에 선동당한 청년, 탄핵에 반대하는 청년, 계엄을 통한 윤대통령의 뜻을 깨닫지 못한 청년들 등이 배제되어있다. 이런 종류의 기특함에 의거한 화합은 공동체를 복원하고 세상을 구하는 원리가 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 걱정이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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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일 일요일

초가속하는 세상을 구할 방법은 다정한 생활감각의 실천뿐인가

기술과 자본과 밈컬쳐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며 주체할 수 없는 규모로 질주하고, 국제사회의 원칙과 질서라고 믿었던 것들이 그 최심부가 해킹되면서 너무나 쉽고 빠르게 형해화되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건짓는 기후와 생태의 비가역적 파괴가 촉진되고있는 2025년의 세상을 일일이 파악하고 이해하려 든다면 제정신을 차리고 살기가 오히려 더 어렵지 않을까.

말하자면 수 세기 동안 쌓아온 코드들이 매 해마다 더 누적된다는 감각보다는, 오히려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감각이 훨씬 많이 느껴지는, 구토감이 들 정도로 가속되는 세상이다. 어떤 건 어이없을 만큼 빠르고 쉽지만 어떤 건 지칠 만큼 느리고 어려운데, 앞의 것이 초가속하면서 뒤의 것을 압도하고 은폐하는 느낌도 있다. 기존의 약속들이 희화화되면서 그 자리에는 굉장히 가상적이고 희극적인 약속들을 끌어모아서 쌓아올렸지만, 그 무엇보다도 실물과 밀접하고 중대하게 결부되어있는 강력한 벽과 같은 약속들이 파괴적으로 귀환하고있다. 그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이러한 형국을 보고 있자니 피부에 와닿는 일상에서의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하루하루의 치열함과 다정함을 챙기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지엄한 가치와 약속들이 쉽게 쓸려나갈 수 있다는 게 목격되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소중한 건 오히려 개인 차원에서 어느정도 통제하고 추구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몸과 마음으로 내 자신과 주변의 치열함과 다정함을 유지하려는 책임감뿐인 것 같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에서 가치를 찾게 된다. 그런 생활감각과 따분한 힘들이 모여 결국 세상의 변화를 집합적으로 process해 내고 대응도 하면서 세상의 sanity를 작게라도 유지해나갈 수 있다면 그게 나름대로 세상을 구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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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반드시 단순하지도, 반드시 입체적이지도 않다

'진실은 간단하고 거짓은 복잡하다'는 식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무언가를 주장할 때 '말이 길어질' 경우, 옹호할 수 없는 걸 옹호하느라 변명이 길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서 나오는 말인 것 같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잘 보면 이와는 정반대로 진실이 복잡다단하고 거짓이 매끄러운 경우도 무척 많은 것 같다. 그냥 경우마다 다르다고 봐야 한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모든 걸 설명해주는 '매끄러운' 세계관을 접하게 되면, 이렇게 매끄럽고 간명한데 이게 진실이 아닐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예컨대 요즘 인터넷에 유통되는 유사 젠더·사회·진화 이론(?)들이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그런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러나 간명하고 단순하다고 해서, 복잡해보이는 걸 쉽게 꿰뚫는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념과 다른 것, 복잡한 것, 불편한 것에만 매료되는 습관도 좋지 않다. 어떤 정설과 통념이 자리잡아 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 복잡하고 불편한 진실을 결코 모르지 않고 오히려 이미 다 검토했음에도 그 검토의 결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왜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까 하고 잘못된 의문을 가지면 퇴행적인 담론을 추종하게 된다.

결국은 몇몇 격언이나 사례에 경도되어서 진실은 반드시 간명하다, 혹은 반대로 진실은 무조건 불편하고 복잡하다 라는 자의적인 경험칙(?)을 만들지 말고, 각 사안별로 판단을 올바르게 해야 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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