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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2일 금요일

구시대적 관제 동원 시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구시대적 관제 동원 시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전부터 폭력 논란, 관변단체 의혹 등으로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보수적 시민단체의 대명사가 된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와 관련해서인데, 최근 탈북단체 동원설, 청와대 지시설, 전경련 자금지원설 크게 세 가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시사저널의 단독 보도로 드러난 청와대 지시설에서 등장한 청와대 ㅎ사무관이 탈북단체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최고책임자이자 민주적 원리에 따라 국가를 통치할 의무가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건과 비슷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사에 나름대로 처음 관심을 가진 이래로,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들은 모든 시사 이슈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2012년 대선국면에서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에 의한 댓글작업이다. 이것을 여론 면에서, 법적인 면에서 꼬리자르기를 잘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다. 새누리당의 SNS미디어본부장이었던 윤 모 목사가 소위 십자군알바단이라는 댓글부대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윤 모 목사가 '나를 지원하는 분이 국정원이랑 연결이 돼 있어' 라고 말하는 녹취록이 존재한다. 또한 윤 모 목사는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와 직접 보고하고 지시받는 관계였다는 것 역시 드러났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도 국가정보원에 의해 진행된 이 여론조작의 책임소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버이연합의 정치적 집회가 누군가에게서 자금 지원을 받아서 진행될 거라는 단순 의혹 자체는 자주 제기되었으나, 그 주체가 바로 청와대라는 시사저널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정원 댓글작업 사건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중들의 눈에 띄는 어버이연합 시위를 기획하는 데 청와대가 일부라도 참여하여 지시했다는 것은, 국민들이 방해하여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데서 나오는 발상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운영 원리조차 이들이 내재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2012년 국정원 댓글작업 사건이 그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충분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마무리되었고, 결국 '게이트'라는 칭호를 대중적으로 얻지는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입장으로서, 이번 청와대 지시설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게이트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만 하고, 성역 없이 철저히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쯤 되면 국가수반을 보좌하는 청와대인지, 국가수반을 보위하는 친위대인지 알 수가 없다.

  관제 동원 시위는 민주국가의 시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기만이며, 여론조작 행위이다. 권위주의 통치의 회귀의 징조이다. 청와대가 이러한 관제 동원 시위에 깊이 개입해 온 의혹이 있다면 명명백백히 밝혀야 하며, 의혹이 사실일 경우 최고 책임자가 직접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

  또한 이번 논란을 계기로 정부기관에서, 그리고 군대 사상교육 현장에서 탈북자들을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도 (공공연히 막연하게 알려져 있는 것 같긴 하더라만) 낱낱이 밝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폭압적인 권위주의 정권에서 살다가 목숨 걸고 탈출해서 나온 사람들을,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정의롭고 따뜻하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옳다구나 하고 관제 동원에 이용함으로써 국민 분열을 조장하고, 결과적으로 또다른 권위주의 정치에 이용하고 있는 행태는 반드시 중단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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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1일 목요일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 개념 비판

  한국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주로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 상기할 때마다 대단히 안타깝다. 자유라는 단어를 내건 사람들이 헌정 민주주의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한국에서 자유 개념의 쓰임이 현재와 같이 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주로 소위 주류집단에서 그러한 것을 조장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고, 그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분석해 본다. 두 파트로 나누어서 쓰겠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정치적 및 경제적 이념지형에 대해 깊이 이해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아닌데, 읽어주시는 분들의 많은 지적을 통한 공부가 앞으로 필요할 것 같다.

  첫번째는 보수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자유'의 개념이다. 자유에 대한 낡은 관념이 충분한 반성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특히 한국 사회 기득권층 내에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주변부의 의미만을 취한 채로 맹목화되었는데, 그 잘못된 관념이 불행하게도 권력자들이 헤게모니를 쥐는 데에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계속 조장되고 사용되어져 온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란, 냉전시대 '공산진영'과 대립한 '자유진영'에서의 그 '자유'가 본래적 의미를 잃고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사용되기 시작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독재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자유와,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모두 포괄하긴 하나, 후자는 이후 문단에서 논하고 여기에서는 전자에 포커스를 맞추겠다.

  물론 자유를 추구한다는 말 자체는 현재에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의할 만한 좋은 일이나, 그 실상을 본다면 '자유진영'에서 그 반대 진영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사상교육과 인권침해를 강행했던 일들이 너무 많았고, 이것이 진정으로 자유 개념을 잘 수호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주 큰 무리가 있다. 현재에도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실태 및 정부기관과 보수단체에서 탈북자들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면, 공산진영 및 북한 독재정권에 반대되는 의미로 보수 진영에서 사용하는 자유라는 단어가 그 본래 의미대로 잘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렇게 자유 개념을 왜곡시키지 않고도, 자유권 침해 관련해서만으로도 북한에 대해서는 수많은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 개념의 왜곡은 딱히 '분단관계라는 특수상황에서 불가피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자유의 본질과는 매우 떨어져 있었던 것들을 자유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함으로써 보수적 헤게모니가 힘을 얻게 된 것은 비판당해 마땅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한창 논란이 되었을 때 진행된 TV 토론에서도 나는 이러한 '자유' 개념에 대한 시각차를 보았다. 국정화 반대 측에서 말한 자유가 내가 지지하는 것에 가깝고, 찬성 측에서 주장한 자유는 사실 그 본질과는 많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잘 봐 줘야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고 충돌이 잦던 시절,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남한 정권에서 국민들에게 감내하도록 한 희생(?) 정도이지, 전혀 진정한 자유의 수호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 남한 정권마저도 반공을 명분삼아 독재체제로 이행되어 국민들을 탄압하는 등, 높은 수준의 자유를 결국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조치에 찬성하면서 이런 식의 자유 개념을 다시 꺼내든 것은 오히려 자유를 침해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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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는 재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자유의 개념이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의 자유와 현대 민주주의에서 보장하는 '자유권'에서의 자유 개념은 사실 불평등이 이슈인 21세기에 와서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전자와 후자의 혼동은 매우 잦다. 비록 이 둘은 계몽주의를 위시한 그 근대적인 거대한 흐름에서 함께 출발해서 오랫동안 같이 흘러온 것들이긴 하나, 전자의 경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로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오히려 후자의 자유를 침해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러한 면에서 두 자유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경우에 후자의 자유가 이미지가 좋기 때문에 그 구분을 흐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즉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능력이 없어서 도태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며, 불평등이 성장을 촉진하므로 그러한 것들을 일부러 없애자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주장들이다. 이들은 자유 경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한 사람이 무한이기주의를 펼치는 순간 더이상 자유경쟁은 없다는 그런 역설은 고려하지 않고 래디컬하게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자유롭게 추구하되,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추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하라'는 자유의 대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의 '자유'가 힘을 얻을수록 경제적 이익을 얻는 이권단체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이 조장되는 면이 상당하다고 본다. 자유경제원이 전경련 산하단체로 출발한 것에서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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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오독된 자유'가 교묘하게 결합되고 보수 헤게모니로 작동하면서, 현대 민주국가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권 개념과는 다소 떨어진,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가 탄생한다. 바로 그래서 자유경제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아스트랄한 일이 가능한 것이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의 가치가 이 사회에 잘 아로새겨지는 날은 언제쯤 올까? 각 개인 스스로가 하고 싶은 바대로 추구하되, 타인이 하고 싶은 바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자는 건데, 이걸 실현시키는 길이 참 쉬운 길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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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2일 화요일

20대 총선을 앞두고: 투표행위의 의미에 관한 생각

  투표의 일차적인 목적은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를 당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는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거나, 안 되거나로 이분법적이며, 후자가 유력할 경우엔 어차피 유권자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는 당선이 안 될 텐데 뭐하러 투표를 하느냐는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심지어, 소위 정치판 자체에 대해 잘 모르는 유권자의 경우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거나, 결국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표 의지를 잃기가 더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투표 행위의 가치는 단순히 '내 후보가 당선되느냐 마느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거가 끝나면 다음날 뉴스에 나오는 것 중에 하나가 '투표율'이다. 정확한 숫자와, 퍼센티지와 함께 지역별, 연령별 투표율이 쭉 나온다. 이 투표율엔 내 한 표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투표율이다. 20대 투표율이 높다면 정치인들은 이 전 4년보다 이 다음 4년 동안 20대의 목소리에 더 많이 집중해 줄 거라는 것이다.

  투표권 행사, 참정권 행사의 의미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금 달리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내 투표는 아주 미약하나마, 진짜로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국민들의 정치 참여 의지가 높을 때만이 잘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들의 투표의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치인들이다. 거시적으로는 정치인들이 발의한 정책들에 의해 국민들의 삶에 활력과 여유가 생겨 투표하러 가는 것이 가능하고, 미시적으로는 정치인들의 디테일한 면모들을 보고 이에 열광하여 투표하러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정치인들의 행태가 바람직하지 못하여 국민들이 정치 참여 의지를 잃는다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지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고, 정치인들의 행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악순환이다. 나는 이런 악순환을 깨고, 국민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생적인 힘에 의해 활발한 정치 참여가 이루어져 정치인들을 좀 놀래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인 믿음을 잃지 않고 싶다.

  효과적인 투표 참여 독려를 위한 참신한 설득 전략들이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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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7일 월요일

지능, 감정, 의식 - part 1. 지능

<주제 소개>
  매우 잘 발달된 강한 인공지능은 감정이나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input과 output으로만 봤을 때 감정과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해도, 그게 '실제로' 갖고 있는 것인지는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많이 이야기되는 주제이다.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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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적 고찰>

  나는 생명체의 지능, 감정, 의식 등은 온전히 뇌 속 신경세포의 연결성(그리고 연결 강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조절 요소)으로부터 창발되는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물질적인, 신비한 '영혼이 깃드는' 것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좀 더 확장시켜서, 세상 모든 걸 '대상자'(대부분의 물체)와 '판단자'(컴퓨터, 인간, 동물 등)로 대충 나눠 보자. 대상자와 판단자의 차이는 판단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이 때 철저히 논리적으로 따져서 뭔가를 결정하는 것, 감정에 치우쳐 뭔가를 결정하는 것 둘 다 '판단'이다.'지능'이라고 부르면 감정이 배제된 느낌을 주기에, 약간 생소하지만 '지능, 감정, 의식' 등을 포괄해서 판단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대상자와 판단자는 하늘과 땅처럼 딱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경계가 불분명하고 연속적이다. 예를 들어, 매우 고전적인 기계장치 중에서도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할 것 아닌가? 우리는 무언가를 그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 그 무게가 A보다 크면 a1이라는 소리를 내고, A보다 작으면 a2라는 소리를 내는 저울을 구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만들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이 한 가지 간단한 판단밖에 못 하는 기계 장치('단위 판단 기계'라고 부르자)를 '판단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판단 능력이 '있다/없다'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절대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판단 능력은 '정도'의 문제로, 아무 판단도 못 하는 바위 같은 것부터, 약간의 판단을 할 수 있는 단위 판단 기계, 미사일의 경로를 계산할 수 있는 초기 컴퓨터, 그리고 스스로의 본질과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인간의 뇌까지, 실로 다양한 '정도'의 복잡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 식물은 판단자일까? 일단 포괄적인 의미에서 판단자가 맞다고 본다. 확실히 식물은 앞서 언급한 '단위 판단 기계'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시스템이다.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서 꽃을 피워서 자손을 퍼뜨리고 하는 과정을 봤을 때 기본적으로 식물은 외부 자극을 받고 피드백을 통해 반응하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얼마 전에 화제가 된, 구글의 스마트홈 진출의 시작을 알린 난방 조절 장치(Nestlab이었나?)는 식물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단순하다. 그러나, 식물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양상은 의외로 정말 간단하게 재현이 된다. 유튜브의 '무니무니교수'의 영상을 보면, '더 높아지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면 좋다'는 것, 그리고 '위에서 봤을 때의 면적이 더 넓어지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면 좋다'는 두 가지 조건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을 봐서 가지가 뻗어나가는 프로그래밍을 하면 놀랍도록 실제 식물과 똑같은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여튼, 내 기준에 따르면 식물은 판단자가 맞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능력들의 근저에는 과학이 말해주는 것 말고 어떤 '신비한 요소'도 없다고 본다. 컴퓨터도, 동물도, 인간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고도로 발달한 판단능력이 '신비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도 뇌 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단위 판단 기계, 컴퓨터, 동물, 인간 등은 처리할 수 있는 input의 종류가 각기 다르며, 같은 형태의 정보라도 output이 나오는 양상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인간이라도 사람에 따라 output이 다르다. 이 모두가 서로 다른 것은, 매우 당연하게도, input을 처리하여 output으로 내보내는 회로가 서로 다르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전기 회로를 통해 수많은 0과 1을 다루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숫자 계산을 통한 논리적 판단'에 특화되어 있으며, 동물은 신경망 회로를 통해 수많은 외부적 자극을 종합하는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어떤 근육을 어디로 얼마나 움직일지에 대한 판단'에 특화되어 있으며, '인간'이라는 동물의 한 종은 앞의 2개 둘 다 적당히 잘 함과 동시에,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수량적이지 않은 논리적 추론', 즉 '학문'에도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이 글의 기본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이제 이 관점에 기반하여 '지능', '감정', '의식'(이 역시 명확히 나눠진 것은 아니다)이 컴퓨터에게, 동물에게, 인간에게 '실제로' 있는가에 대해 논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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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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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우선 '지능'(수량적,수치적 지능, 형식논리적 추론 지능, 학문적 지능 모두 포괄한다)에 관해선 꽤나 쉽게 결론이 날 것 같다.

  아주 기초적인 c언어 프로그램을 가지고도 컴퓨터가 수치해석적으로 적분을 계산하도록 만들 수 있으며, wolframalpha 등의 프로그램은 수치해석적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는 방식대로 식을 통해 '정확히' 적분을 계산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에겐 수량적, 수치적 지능이 명확하게 있다.

  다만 문장으로 된 명제들을 다루는 '형식논리적 추론' 지능의 보유 여부는 컴퓨터마다 다르며, 아마도 기호논리학적 지식과 인간의 통사규칙을 정교하게 프로그래밍해 두면(그리고 통사규칙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문장을 input으로 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형식논리적 추론 지능 역시 크게 어렵지 않게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순히 형식논리의 내적인 완결성을 통해 참/거짓을 판별하는 게 아니라, '이 말이 실제로 맞는 말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학문적 지능'은 컴퓨터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

  우선 컴퓨터의 내적인 계산 능력만으로는 절대 안 되며, 외부 세계의 상호 작용이 필수적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통계 데이터이든, 물리적 세상을 측정할 수 있는 센서이든,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학과 논리학이 아닌 많은 분야의 경우, '분명히 틀린' 것은 있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맞는' 것은 별로 없다(특히 인문학의 경우). 따라서 '이게 과연 맞는 소리인가'의 판단은 간혹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갖는 경우도 있지만, 각종 '상식'들, 그리고 학술 세계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그런 상식과 합의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컴퓨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올해 1인당 GDP가 2만 5000달러이다'와 같은 말은 컴퓨터도 쉽게 할 수 있다. 비록 문장의 형식을 빌리고 있긴 하지만, 저 문장은 그냥 계산식을 말로 간략하게 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통계 데이터를 주고 GDP의 정의를 주면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좀 더 엄밀하게 쓴다면 '이 통계 데이터에서,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고 모두 더하고...(그렇게 구한 값을 1인당 GDP라고 한다) 어찌저찌 명령대로 해 봤더니 2만 5000달러가 나왔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물론 그걸 'GDP'라고 뭉뚱그려서 쓴 건 인간이 그렇게 print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며, 이 문단의 논의에서는 벗어난다. 후술한다.) 이건 수량적, 수치적 지능의 범주이다.

  그런데, 그 통계 데이터가 과연 맞게 산출된 것인지에 대한 검토는 좀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우선 통계 데이터 자체에서 좀 이상함을 감지할 수도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어, N이 이렇게 큰데도 제대로 된 분포가 안 나오는데요?'같은 것 말이다.

  좀 더 고차원적으로 가면, '상식에 맞지 않는 데이터'의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식은 역시 인간이 주입해 주는 것이다. 역시 난 전혀 모르지만, 대충 말하자면 '어라, 주인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좁은 구역에서 각 가구마다 소득이 들쭉날쭉할 수는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를 보세요. 뭔가 이상해요'와 같은 것 말이다.

  이제 좀 더 고차원적으로 가면, 데이터의 입력만으로 컴퓨터 스스로 상식을 갖게 할 수 있는데, 이건 최근 크게 발달하고 있는 학문 분야인 것 같다. 이를테면 '어라, 그동안은 이런 식의 패턴은 한 번도 안 나왔는데, 이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보고해야겠어.' 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렇게 인간 언어로 사고한다는 건 아니고, if문, for문 등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언어를 통해서(좀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0과 1의 처리를 통해서)사고할 것이다.) 이건 최근 발달한 핀테크(Fintech) 분야에서, '뭔가 이상한' 거래를 감지하여 차단하고 보고하는 기술을 통해 이미 실현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3분 전에 결제된 카드로 중국에서 결제가 이루어지거나, 터무니없는 소액, 터무니없는 거액의 결제가 이루어질 때 컴퓨터 시스템은 그것을 감지하여 차단할 수 있다.

  가장 고차원적인 건 이를테면 '과연 이 GDP라는 지표가 한 국가의 발전상을 온전히 나타내 주는 기술일까? 더 좋은 지표는 없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아니, 질문을 던지는 것까진 안 가더라도 그런 질문이 들어왔을 때 이해하고 답을 내놓을 수라도 있는 능력이다. 이건 말 그대로 '학문적 지능'이다.

  이러한 '학문적 지능'엔 더 다양한 비정형 데이터 처리 능력, 더 많은 데이터, 더 복잡하고 더 좋은 학습 알고리즘 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전기회로는 전혀 다르기에, 인간이 내리는 판단과 컴퓨터가 내리는 판단은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컴퓨터가 '학문적 지능'을 갖게 하려면 되도록 인간을 닮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단히 파격적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기에 너무나도 기괴하고 이상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아니 당장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기괴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냉전 시대를 살아가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학습된 사람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사람들에겐 모든 게 그 관점에서밖에 파악될 수 없고,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우리 세대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판단들을 하곤 한다. 아마 다음 세대가 보기에도 우리 세대의 판단 체계 중에선 언뜻 이해가 안 가는 기괴한 부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더욱 극단적인 예로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만 받으며 자라온 사람이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학습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일반인이 볼 때 기괴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판단은 '형식논리적으로 합당하며, 나름의 이론체계도 갖춘' 것일 수도 있다. 고지능 범죄자들의 개똥철학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하물며 같은 사람 안에서도 타고난 두뇌회로가 다르고 학습한 내용이 달라서 각자가 내리는 판단이 이렇게 다른데, 사람의 뇌와는 그 근본부터가 전혀 다른 컴퓨터가 내리는 판단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선량한' 판단을 내리게 하기 위해 인간을 닮은 컴퓨터를 만드는 게 좋다. 그러나 아무리 뇌를 닮았어도 그 근본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시뮬레이션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도 그렇다. 설령 원자 수준에서 bottom up 방식으로 뇌를 시뮬레이션하더라도 실제 원자들이 조합된 뇌와는 전혀 다르다. 물리적으로 근사가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뇌와 완전히 같은 것은 뇌 자체뿐이다. 또한, 설령 정말로 뇌와 비슷한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해도, 학습이 약간만 이상하게 되어도 돌이킬 수 없이 너무나 기괴한 판단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기괴함'의 이슈는 이 글의 part 3. 감정 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시 한번 다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게 이런 걸 시키고 싶어하는(과학자든, SF 소설가이든) 이유는 인간이 갖지 못한 엄청난 데이터 처리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인간과 똑같은 구조로 선량하게 사고하는데, 데이터 처리 능력은 엄청 좋은 컴퓨터'는 오로지 '인간 뇌를 그대로 시뮬레이션하되, 계산 능력에 해당하는 부분만 엄청나게 비대하게 한, 뇌 시뮬레이터'에 가까울 것이다. rough하게 말하자면 '사람 뇌에 컴퓨터 달고 인터넷선 꽂아 둔' 것 말이다.

  뭐 어쨌든, 내 개인적으로는 그냥 각 분야에 locally 전문화된 인공지능들을(굳이 인간 뇌를 닮지 않더라도 각자의 영역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발달시키는 게 좋다고 보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 같지만, 사람들이 많이들 우려하는, 그리고 꼭 우려해 보아야 하는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에 대해서 좀 길게 써 봤다.

  어쨌든 결론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더 크고, 더 복잡해진다면 뇌에 준하는 '학문적 지능'(꼭 그 판단 양상이 인간과 닮진 않더라도)을 가지게 될 수 있으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을 닮도록 하거나, 아니면 굳이 인간을 안 닮더라도 그 판단 결과를 세상에 실행하는 것만큼은 충분히 사려깊은 인간 관리자에게 맡기도록 해야 사회가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어쨌든 '학문적 지능'은 아직 달성은 안 되었지만,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닌 듯하며(주지하였듯이, 인간에게 컴퓨터와 다른 '신비로운' 것은 없다) 많은 컴퓨터 공학자들과 미래학자, 소설가들은 그런 지능을 이미 상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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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의 경우엔 수량적, 수치적 지능이 아주 초등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먹이가 많다, 적다를 한눈에 보고 판단하는 건 수량적, 수치적 지능이 아니다.) 종별, 개체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원숭이 정도 되면 거의 확실히 숫자를 셀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Alex라는 기록적인 천재 앵무새의 경우에도 숫자를 셀 수 있었다. 사칙연산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질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니며,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뇌 구조가 매우 특별한 outlier 개체가 있다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경우도 대체로 사칙연산을 할 수 있지만 일부 outlier의 경우 사칙연산을 못 하지 않는가? 뇌 구조가 달라서 말이다.

  동물의 경우에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은 과연 존재할까? 일단 이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 모든 개체에서 유의미한 수준으로 관찰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관찰되었다면 크게 화제가 되어서 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원숭이들이 우가우가 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일종의 사회적 신호를 통해 꽤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건 원숭이들의 세계 속에서 합의된 일종의 실천적 '학문'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을까? 그 전체상을 파악하여 정리하고 있는 원숭이들은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뇌를 black box로 보고 input-output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단은 학문 비슷한 걸로는 취급할 수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인지과학적 발견이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어쨌든 현재까지는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개체나 종은 없는 것 같은데,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고, 돌연변이나 진화에 의해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의 경우는 수량적,수치적 지능,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형식논리적 지능은 대체로는 '절대적으로 맞다'고 인정되는 것 같지만 (3단논법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상한 3단논법들도 있지만 그것은 각 명제들의 숨겨진 의미를 고려 안 해서 그렇고, 3단논법 자체가 내적으로는 '맞는' 것이다), 대체 뭐에 비추어서 맞다고 할 수 있는 거냐 하면, 신기하게도 딱히 답을 못 하겠다. 저것이 어떤 분야의 질문일지부터가 궁금하다. 그리고 학문적 지능의 경우는 '맞는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며, '비수량적 추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식물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수량적,수치적 지능, 형식논리적 지능, 학문적 지능 모두 없다. 근데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은 잎 안에 들어간 벌레가 특정 털(?)을 두 번 건드리면 잎을 닫는데, 이 경우는 매우 초등적인 수량적 지능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로써, 인간, 동물, 컴퓨터라는 각각의 판단자가 '지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논해 보았다. 다만 계속 강조하듯이, 여기에서 설명한 것들은 딱딱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며, 개체마다 다를 수 있고,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나는 지금 현재 시점에서의 컴퓨터, 동물, 인간의 stereotype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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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의식 - preview>
흔히 말하는 '의식'이란 '내가 나로써 있음/내가 나임'(be)을 인지하는 것일 텐데, 이를 과학적으로 해부해 본다면 아마 수많은 감각 요소들을 종합하여 사고함과 동시에, '내가 감각하고 사고한다는 것을 감각하고 사고함', 즉 '메타-감각, 메타-사고'가 바로 의식의 실체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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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3일 토요일

중력파 측정

"Ladies and gentlemen, we have detected gravitational wave. We did it."

  두 블랙홀의 충돌에서 나오는 중력파를 LIGO로 측정했다는 듯 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에 의해 시공간이 왜곡되는데(그리고 그게 바로 중력인데), 블랙홀의 충돌로 시공간이 크게 왜곡되면 공간상에서의 '거리'가 달라질 거니까, 그 거리 변화를 간섭계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측정된 것.

  일반상대론은 수성의 근일점 이동 등을 이론적으로 잘 설명하면서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이번 중력파 발견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통합해서 모든 전자기 현상을 전기장, 자기장에 대한 4개의 식으로 집대성했을 때, 전자기장이 진동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하는 현상인 '전자기파'가 Hertz에 의해 실제로 검출됨으로써 전자기 '장'이라는 것이 단순 편의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임을 밝힐 수 있었다.

  이번 발견도 꽤나 비슷한 것 같다.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중력장이 심각하게 변화하는 게 '실제로' 시공간의 왜곡을 유발함을 증명한 것이므로, 즉 중력파 라는 게 물리적 실체이고 그건 다름아닌 시공간 자체의 요동임을 보인 것이므로.

  아직 먼 얘기라고는 하지만 중력파를 이용한 망원경이 개발되면 아직 빛과 물질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38만 년이던가?)의 초기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힉스입자 관측부터 해서 20세기 물리학의 중요한 과제들이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것 같다. 뭐 표준모형의 수정 필요성 제기, 상대론과 양자역학 통합 시도 등(이런 거 학부 수준에서라도 이해해 볼 기회는 없으려나...)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그런 과제들이 하나하나 해결되다 보면 패러다임 시프트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해서, 이대로 물리학자들의 할 일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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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아름이'에 대한 좋은 글을 읽고




열심히 읽어보자. 새터에선 이런 얘기 안 하려나 ㅋㅋㅋ

복잡하고 진지한 얘기까지 안 가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 관점에서만 생각해 봐도 이건 많이 나아져야 정상이다. 말하기 전에 한번씩만 더 생각하기!

'본능인데 왜 문제삼느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실제로 가끔 듣는 말) 동료 학우들이 대숲에 저렇게 글 쓴 걸 보면 그렇게 말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 분위기가 있긴 있나보다. 좀 돌아보고 신경들 씁시다' 로 가는 게 올바른 두뇌회로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한창 사회화가 진행될 시기에 남/여 중고교 분리해 놓는 게 참 안 좋은 듯. 성급한 일반화를 하면 안 되겠지만, 내 주위에선 이런 면에서 '예의' 감각이 없는 학우들은 남고 또는 과고 출신들인 경우가 많아서... 남초 과라는 환경이 그걸 확대 재생산 하는 것 같기도 하고 ㅠㅠ 이건 성별을 바꿔 봐도 마찬가지일 것.

글이 지나치게 겁주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소위 찝적충(본문에서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들을 안 겪어 봐서 그런 걸 거다. 그런 경우들뿐 아니라 평범하고 선량한 공대생(?) 들도 보다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다.

서로 배려하는 아름다운 캠퍼스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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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6일 화요일

'허언증 갤러리'의 미학

  디시인사이드 허언증 갤러리(이하 '허갤') 출처의 드립들이 캡쳐되어 페북에 자주 올라오는데, 뻘짓들이지만 굉장히 재밌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 성취되기 힘든 높은 목표 등과 관련해서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는 건 언제나 엄청나게 재밌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이입으로 가히 인간의 본성적 욕구라고 할 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겉으로 이야기되기는 힘든 것들이다.

  소설과는 좀 다른 것이, 소설은 비록 가상이지만 사실적인 갈등구조 속에 독자를 몰입시켜서 감명을 주는 것인데 반하여 허갤의 기획은 어차피 거짓말이라는 게 합의된 어떤 '우월한 상태'에 자신과 독자를 이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갤의 드립들이 유저들에게 재미를 주는 방식을 세 단계로 구조화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해당 '허언'의 참신함(소위 드립력)에 대한 인정의 의미에서 나오는 웃음이며, 둘째는 그 허언에서 묘사하는 우월한 상태에 자기이입이 되어 실실 웃게 되는 웃음이며, 마지막 셋째는 그 허언이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허위의 것에 그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묘한 파토스이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허갤의 개드립들이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과 잘 맞닿아서 강력한 재미를 주는 이유가 잘 해명된다. 아마 두번째 단계에서 이것이 하나의 놀이에 그치지 못하고 현실로 믿어져 버린다면 허언증이라는 정신적 질환이 되는 것일 테다.

  그런 면에서, 가상의 우월한 상태를 자랑하기로 합의하여 판을 깔아 준 허갤이라는 공간의 속성은 다른 사이버 공간과 비교해도 매우 독특하다. 만화 캐릭터나 유명인으로 코스프레를 하고 참여하는 '코스튬 파티'와 매우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존재론과 관련해서는 이화여자대학교 김선희 초빙교수의 <사이버 공간이 다중자아 현상을 일으키는 존재론적 구조>(哲學 제74집, 2003.2, 171-191 (21 pages))를 참고하라.)

  요약하자면, 허갤은 '거짓 자랑'이라는 형태의 드립을 치기로 합의된 장으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드립력을 인정받는 놀이가 행해진다는 점과, 그러한 놀이를 통해 '우월한 상태'에 자기이입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어, 다른 드립들과는 차별성을 갖는 심층적인 재미를 유저들에게 제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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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6일 수요일

'9 lights in 9 rooms' 전시 관람 후기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관람한
Spatial Illumination - 9 lights in 9 rooms
공간 구성에 있어 '빛'을 적극 활용한 아홉 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자는 서로 다른 아홉 개의 공간을 돌면서, 보이드 공간에 빛이 여러 방식으로 첨가될 때 각각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 체험하게 된다.

볼 만 했다! 특히 빛이 단순히 조형예술로서 거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의 구성 요소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작품이 있는 공간과 없는 공간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 것이다.

사진은 떠밀려서 못 찍었지만(사람 많습니다) 마지막에 지극히 단순한 도형들의 반복으로 빨려들어가는 효과를 내는 건 마치 CG가 없던 시절 20세기 초반에 영사기로 만들어 낸 추상영화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다만 전시 주제와는 달리 음향 캐리인 측면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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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한국 정부가 일본 측에 진정성 있는 사과, 법적 책임 인정, 배상 등을 요구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진정성 있는 반성이란, 자국 정부가 과거에 행한 전체주의적 폭력을 적극적으로 밝혀내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교육을 자국민들에게 시킬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단순히 두 정부 간의 외교적 갈등이라고 인식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러나, 합의 내용에 대한 홍보를 보면, '금번 합의를 통해 앞으로 갈등을 안 겪을 수 있어서 잘 된 일'이라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합의 내용을 보면, 진정성 있는 반성과 법적 책임 이행은 일본 측에 요구되지 않았고, 일본 총리가 짧게 사과하는 것(그 날도, 총리의 부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다)과,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질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단에 일본 측에서 자금을 출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사과를 받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다. 문제로 인한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문제를 천으로 덮어 버린 것에 불과하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는 국제무대 등에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합의는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본질적으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다. 후대에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그냥 제기하는 것이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선언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은 일본에 영원한 면죄부를 주고, 향후 문제 제기에도 철면피로 일관할 수 있게 하므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이다.
이 합의 과정에서, 주체인 피해 국민들은 완벽히 배제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대리자로서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할 정부가, 독단적으로 매듭을 지어 버렸다. 갈등을 해소했다기보단, 갈등이 보이지 않도록 땅 속에 묻어 버린 것에 가깝다.

과연 누구를 위한 합의였나. 대승적 관점에서 이해를 바란다고 하는데, 그 대승적이란 거 아무래도 '사사로운 이익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식의 전체주의적 발상을 돌려 말한 것 아닌가.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대리자 아닌가.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말로 매듭을 지어 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통탄할 노릇이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6.25 및 베트남전 당시에 국군에 의해서 유사한 일들이 이뤄졌다는 것도 더 이상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덮어 버리지 않고 적극적인 논의를 통해 실질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진정으로 과거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간, 민족간의 문제라는 추상적인 워딩으로 왜곡하지 말고, 현현히 실존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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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일 목요일

정치적 발화를 둘러싼 어떤 부조리에 대하여

[ 처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 - 함께하고 싶은 집회를 위하여 (by 박현우, Nov 30. 2015) ]

  말해져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져야 하기에, 오히려 말해지기 힘든 주제들이 있다.

  어떤 것에 찬성하면서도, '이런 단점이 있긴 하다'고 지적하면서 개선을 권유함으로써 보다 나은 찬성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반대하면서도, '이런 장점도 있긴 하다'고 하면서 맹목적인 반대가 아님을 천명함으로써 보다 나은 반대의견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들은 점차 다면화되는 반면에, 우리가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오히려 심도있는 비판이 사라지고, 일차원적으로 이데올로기화되고, 진영논리로 고착되고, 단편적인 인상들만이 흥행하고 있다. 그에 따라,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을 하려면 마치 사상검증 하듯이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내가 물론 전체적으로 반대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하게 밝혀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든다. 그래서 말을 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찬성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반대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고
역으로,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반대논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찬성논리에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일(따라서 실제로 찬성논리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링크한 글과 같이 더 나은 집회를 위한 코멘트로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군을 동원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시민의 당연한 권리인 집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페이스북 페이지 '국민의힘'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더 나은 집회를 위해 '집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집회 자체를 부정하는 측에 힘을 실어 주는 효과를 내는 것을 배격하려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비생산적인 양비론 역시 경계하려면 또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까. 너무 어렵다.

  비단 이 주제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려다가 포기한 일은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다룰 주제 자체는 너무나 다양한 맥락,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는 복합적인 주제인 반면에, 그 주제에 대한 어떠한 의견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어떻게 나눠졌는지도 알 수 없는 일차원적 대결 구도의 양쪽 편 중 한 쪽을 추켜세우고 한 쪽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를, 그렇지 않을 거면 차라리 존재하기 말기를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도 의견이 사실상 '거의' 양분되어 있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대결 구도 없이 모두가 각자의 맥락 속에서만 주장한다면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상술한 사회적 강요 속에서 양분적인 대결 구도 자체에 매몰되는 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하는 현상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서, 더 좋은 말, 더 좋은 글을 생산한다면 그러한 현상을 피해갈 수 있을까? 그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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