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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3일 토요일

사진집 「조춘만의 중공업」 - 서평

  조춘만의 사진과 이영준의 글을 엮은 「조춘만의 중공업」에서는 거대한 괴물 같은 기계들로부터 느껴지는 묘한 경외감에 대해 잘 해설해 주고 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한 경외감을 꽤 강하게 가지고 그 정체를 해명할 필요성을 느껴 왔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조적이고 감상적인 미의식에만 머무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편함을 느껴 왔기 때문에 '기계비평가' 이영준의 다른 글들도 방학 동안 읽어 보려 한다.

  기계는 가히 근대의 신이라고 할 만하다. 엄청난 밀도와 힘을 가진 강철 괴물들로부터 느껴지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경외감은 적어도 내게는 중세의 신 이상으로 매우 크다. 그러나 그 신은 태초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 기계들을 작동시키는 사람들은 그 기계들 속에서 살며 일하고 다친다.

  중공업 사진이 산업화 이념의 프로파간다로서 사람들을 '눈멀게' 했던 것과 비교하자면, 애호에 기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를 '보도록' 하는 조춘만·이영준의 기획은 분명히 의미 있는 전환이다. 그러나 기계의 시각적인 숭고와 경외감에 집중할 때, 힘차고 긍정적인 노동자를 강조한 70-80년대의 프로파간다와는 정반대의, '음각적인' 방법으로 진실이 다시 한 번 배제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다.

  나는 공학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관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기계들을 보는, '보기만 하는' 나의 태도가 객관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타인을 설득 가능한 '학문'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영준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성을 추구하는 '비평적' 태도로 쓴 글은 그래서 내게 매우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말한 점 때문에 기계에 대해 조금 더 통합적인 관점을 추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극히 일부만 여기에 소개해 본다.

"여기서 중심적인 가치는 '애호'이다. 국가에 중요하거나 근대화의 상징이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다는 것, 내 눈에 저 괴물이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국가 발전이나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보다는 훨씬 사소해 보인다. 국가나 근대화가 작은 개인인 '나'보다 훨씬 크고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중략) 1970, 80년대의 중공업을 이용한 프로파간다는 '보게' 하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릇된 국가관에 눈멀게 하는 이미지였을 뿐이다. 이제 조춘만은 우리로 하여금 괴물을 보게 해준다. '애호'라는 가치에 기초해서 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19p.

"기계비평적 관심이란 물질계의 속을 들여다보고 어떤 얼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모든 사람은 바삐 역을 빠져나와 제 갈 길을 간다. KTX를 다 소비했으니 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사람들이 다 내린 KTX가 그 다음에는 어디를 가느냐가 궁금하다. KTX는 계속 달려서 경기도 고양에 있는 행신차량기지로 간다. 거기서 검수도 받고 편성도 바꾸고 한다. 거기서는 KTX 차량을 들어 올려서 차체와 대차를 분리해낸다. 그러고는 차륜을 따로 떼어내 검사고 하고 필요하다면 절삭하기도 하고 너무 낡았으면 교체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KTX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가 실행된다. 기계비평적 관심은 그런 얼개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물의 외관에 만족하지 않고 속을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리는 해부학적 관심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1p.

"(전략) 지나친 밀도가 일상을 파고들면 짜증이 난다. 버스나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일상의 스케일을 초과한 거대한 밀도를 보다 보면 미적인 쾌감이 생긴다. 그것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조춘만은 밀도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밀도를 뿜어내는 괴물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선원근법을 벗어난 사진 속에서 조춘만이 해내는 것은 우리를 산업의 밀도에 훈련시키는 것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5p.

"(전략) 우리를 위해 있는 생산에 우리가 참견할 수도 없고 우리들 삶의 과정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생산의 소외다. 조춘만의 사진은 소외 너머에 있는 바로 그 생산을 보여준다. 그것은 소비자인 우리들에게 우리 존재의 기초인 사물들이 어디서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향은 푸근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살벌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외돼 있던 생산의 풍경이 당장 푸근하게 다가올 거라고 기대하면 그것도 지나친 것 아닌가? 수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듯이, 우리는 생산의 고향을 만나고서도 정작 반가워하지 않는다. 조춘만은 기계 사물의 이미지를 억지로 미화하여 고향으로 꾸미지 않는다. 산업의 밀도를 우리들 앞에 던져놓을 뿐이다."
조춘만·이영준, 「조춘만의 중공업」, 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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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화요일

'좋은 경험'이라고? 우리의 일상적 고통을 소비하지 말라

  심신의 고통이나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것, '고통받는 느낌'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가난한 동네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며 관광지처럼 돌아다니거나, 정신질환에 대해 로망을 갖고(?) 현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결여된 채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유형화하여 특별한 것인 양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행태는 분노와 모멸감을 부르기 충분하다.

  비슷한 이유로, 힘든 생활도 한번쯤 겪어 보는 게 좋다면서 사서 고생하기를 종용하는 세태 역시 싫어한다. 자신의 실제 삶을 그 바깥에 두고 있는 자만이 일회적인 체험으로서의 고생을 공적으로 권유한다. 어쩐지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가 예전같지 않게 되면서 학술이나 사회참여 등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가 붕괴하고 실제로 대학생들이 모여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그놈의 "좋은 경험"을 추구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게 아닐까 한다.

  누군가에게 이것들은 한낱 현학적 유희거리이거나, 동정의 대상이거나 혹은 인생에서 한 번쯤 해 보면 좋은 경험 정도일 것이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매일 아침마다 맞이하는, 구체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 달동네가 포토존? 그곳 주민은 입을 닫았다 (2015.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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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4일 월요일

랜선진단: 세 가지 장면

[ 링크: [특파원 리포트] 미 트럼프 대통령 "정신 질환" 논쟁 (2017.02.21) ]

<랜선진단: 세 가지 장면>

첫 번째 장면. 한 전직 심리학과 교수가 김연아 선수, 박근혜 대통령 등의 유명인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여 간혹 논란이 되곤 했다. 그는 김연아 선수와 박근혜 대통령 등을 대상으로 ‘기분 조절이 안 된다’, ‘주위 사람과 어려움을 겪게 되고 정신병을 호소할 수 있다’, ‘ 정신연령 17세 수준’과 같이 심리학에 대한 본인의 전문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발언들을 이어 나갔다. 이런 발언들의 여파에 따른 김연아 선수와의 공방 등이 화제와 논란을 낳았다. 공방 중에 그의 대응은 상당히 감정적이었으며, 어디까지가 전문성의 영역이며 어디부터가 김연아 선수에 대한 공격인지 그 경계를 스스로 흐렸다는 점에서 일단 비판의 소지가 명백하다. 그런데, 마치 ‘진단’처럼 보이는 그러한 발언들은, 과연 전문성의 영역에 속해 있기는 한 것일까? 비록 그의 전문 분야가 심리학 중에서도 온라인 게임세계 연구, 정치인 이미지 연구 등 매체라는 주제와 관련이 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특정 유명인에 대한 ‘진단’의 성격이 강한 발언이 과연 적절할지에 대해 사실적 정당성, 윤리적 정당성의 (서로 연결된) 두 측면에서 비판해 볼 수 있다.

두 번째 장면. 미국 대선 기간부터 트럼프 당선 이후 현재까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종의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갖추어야 하는 대통령의 정신건강은 국가안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소견’이고 어떤 것이 정치적 공격인지는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소견’처럼 보이는 발언들이 의학적으로 유의미한지조차 밝혀진 바 없다. 대면한 채 진행되는 여러 검사가 없었기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는 분석이 있으며, 오히려 검진과 같은 통제된 상황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을 볼 때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검진 상황, 일상적 상황, 그리고 미디어 앞에 섰을 때의 상황은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설령 의학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이뤄졌다고 할지라도, 그 분석 결과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서 공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이 가지고 있는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세 번째 장면. 과거 <무한도전>에 출연해서 한 출연자의 정신적 위험을 예견해서 화제가 되었던(실제로 해당 출연자는 공황장애로 방송을 중단했다) 한 정신과 의사가 트위터 상의 설전으로 연일 화제를 낳고 있는 배우 유아인에 대해서 정신적으로 위험하다며 여러 가지 전문 용어를 거론하면서 우려를 표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이에 호응하며 유아인을 한편으로는 희화화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위 사례들과 같이 어떤 인물의 TV, SNS 등 미디어에 비추어진 모습을 바탕으로 심리학자나 의사가 그 인물에 대한 정신의학적 ‘소견’처럼 보이는 발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잊을 만하면 화제가 되는 이러한 '랜선진단'들의 사실적, 윤리적 정당성은 전문가와 대중의 관계 문제까지 엮여서 꽤 중요한 문제이고, 그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링크된 기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길잡이로서 꽤나 탁월하다.

  과연 진단이 가능하긴 한지에 대한 사실적 정당성의 문제에 더하여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 역시 중요하게 제기된다. 이러한 발언들이 전문 지식을 갖춘 심리학자 혹은 의사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획득하고 대중에 소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들은 타겟이 된 인물에 대한 대중적인 낙인을 일으키며, 정신질환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한다.

  종합하자면, 위의 사례들과 같이 의사가 특정 인물에 대해 퍼블릭하게 진단명을 휘두르는 것은 왜곡된 전문가주의를 강화할 공산이 크므로 오히려 전문성의 부족으로 보인다. 대중이 그 진단명들을 신뢰하면서 그 진단명들을 바탕으로 트럼프의 대통령직 수행을 비판하고, 유아인의 트위터 설전을 희화화하는 것은 과연 정신병자라는 단어를 욕설로 사용하는 것과 얼마나 구분될 수 있을는가.

“핵무기 사용을 결정할, 미국 대통령의 정신적 건강 여부는 자체로도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렌 프란세스의 지적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이런 논란이 가중돼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정치적 해법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기사 원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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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일 토요일

애호박 게이트

애호박 게이트에 대한 생각. 서론이 길다.

  페미니즘은 균질한 움직임이 아니며,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이론적, 실천적 방법론들이다. 그들은 당연히 완벽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들은 때에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 상에서 최근 유행하는 화법 및 운동의 양상에 대해 과격하다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에 어느 정도는 동감하기도 한다(나는 메갈리아가 미러링 등으로 화제가 되면서 언어라는 무기를 획득한 ‘직후’에 조금 더 기민하게 새로운 전략으로 이행하여 운동의 형태로 끌고 갔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유아인을 포함한 유명인의 발화에 대한 단순 비판을 넘은 직접적 인격모독에 반대한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 문제점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주장,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하라’ 내지는 ‘페미니즘이 아닌 진정한 성 평등주의를 하라’는 주장 등은 성립하기 어렵다. 만약에 현재의 페미니즘 조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대안적 이론을 만들고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면, 그것 역시 페미니즘이라고 불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안을 정립하려는 그런 시도들은 주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방향보다는 단순하게 페미니즘의 이름을 부정하는 시도로 실현되어 왔고, 따라서 성평등 담론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방향이 아닌 반동적인 방향으로 실현되어 왔다. 따라서 학문의 계보 상에서 소위 이퀄리즘으로 대표되는 대안적 사상이 실제로 차지하는 위치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평등 속에 부분집합으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일 사상이 덩그마니 있고 나머지 부분에 ‘진짜 페미니즘’, ‘이퀄리즘’의 가능성이 잠재한다는 식의 세계관은 이퀄리스트들의 대안적 도식일 뿐이다. 성평등이라는 큰 목적의식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길이 페미니즘이며 그 속에서 전략적, 윤리적으로 잘못된 선택들이 있을 수 있다는 모델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그 선택들에 대한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로서 운동의 방식과 전략에 대한 내부 비판을 하고자 할 때, 그러한 비판이 여성혐오적 반동의 득세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내부 비판 글을 공유해 가서 “이런 문제들이 있지. 역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야!” 하고 넌씨눈 코멘트 달아 놓은 것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꽤나 강력하게 먹히는 듯 보인다.

  이것을 막으려면 페미니스트들로부터는 신뢰를 확보하고,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당신들 편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내부 비판을 하면서도 안티페미니즘에 힘이 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특정 조류들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성평등을 향한 인식과 실천을 분명하게 함께하고 있다는 신뢰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다 보면 그 비판을 지극히 주의를 기울여서 발화하게 되며, 해당 발화와는 별개로 평소에 각종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 왔을 것을 스스로에게 요구받게 된다. 이에 대한 의무감은 페미니스트에게 거의 ‘본능적’인 것이며, 지극히 페미니즘적인 실천이다.

  애호박 게이트 초반에 유아인은 분명히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예의 페미니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선긋기를 시도하기는커녕 ‘메퇘지’ 등의 단어까지 사용해 가면서 그는 한때 그를 군 면제자라고 극렬하게 비난하던, 그리고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고 극렬히 외치던 남성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더욱 커진 그들로부터 그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있다. 설령 그가 실제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페미니즘에 대해 이보다 큰 실례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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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0일 월요일

히오스로 보는 디지털 매체철학: 요약과 소개

- 인간은 기호적 존재이므로 매체 속 가상을 실재와 다름없이 소비한다.

- 매체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성장함으로써 세계를 확장시킨다.

- 디지털 매체는 서로 다른 전통매체들로부터 온 컨텐츠들의 질적 차이를 지우고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다.
- 따라서 디지털 매체 속에서는 서사성이 약해지고, 컨텐츠들은 본래의 서사에서 벗어나 탈맥락적으로 조합된다.

- 디지털 매체에서의 이와 같은 서사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서사가 매번 자유롭게 재창조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게임성'과 직결된다.
- 히오스에서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시공의 폭풍으로 빨려들어가, 그의 본래 배경과는 관련없이 탈맥락적으로 등장한다. 서사가 붕괴된 그 공간에서 그들은 영원히 전투를 벌이며 매번 새로운 서사를 창조한다.
- 이런 면에서 시공의 폭풍은 현대 매체에 의해 실현된 '게임성'의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며, 히오스는 '게임에 대한 게임', '게임 중의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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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6개월: 지지와 비판 그리고 촛불정신

  물론 문재인 정부가 소위 촛불정신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반영한다면 좋은 일일 것이며, 나 역시 그러길 바란다. 70퍼센트대의 지지율을 가진 정부와, 대선 당시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역량을 보여준 민주당이 그 능력을 좋은 데 활용해서 바람직한 방향의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을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그 촛불 정신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허지웅 평론가가 문재인 정부가 '혁명 정부'라는 특수성을 가지므로 정부의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서사적 미의식을 정치영역에 투사해서 나온 부당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로 표출된 강력한 여론에 의해 뒷받침된 일련의 정교한 민주적 절차에 따른 박근혜의 탄핵은 그 정치사적 의미가 대단히 크다. 촛불을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으로 귀속시키지 말고 개별 정부를 초월해 있는 무엇으로 보되(한국의 민주주의 환경을 볼 때, 촛불 개념을 이렇게 잡는 건 토템 같은게 아니라 나름 실체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그 정신의 실현을 위해 잘 노력하고 성과도 거두고 했다는 식으로 회자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오히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제일 좋은 그림일 것이다. 실제로 촛불에 대한 청와대의 오피셜한 인식도 오히려 이 쪽에 가깝다. 진보세력에게 '촛불 도둑'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비난하는 일부 지지자들과는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좋은 그림을 위해서는 강성 지지자들이 좀더 비판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비판은 실패를 바라고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사전적 의미로도 그렇다. 지금보다는 지지자들이 좀 더 수용적이어야 한다. 정권 힘빼기를 위한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닌, 터놓고 따져 보자는 취지의 비판이라면 말이다. 물론 본래 취지는 후자였는데도 전자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일을 적확하게 견제하는 게 바로 지지자의 역할이다. 그리고 적절한 비판은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야 진짜 발목잡기식의 비난을 효과적으로 걸러낼 수 있다. 지지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잘못된 부분, 여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빠르게 개선하여 좋은 정부로 남아야 할 것 아닌가.

  진보진영과의 반목,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 그리고 정점을 찍은 MB정권의 망신주기 등에 따른 노무현 트라우마를 이해하며, 나부터가 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정서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언급하며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막는 것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끄러운 비탈길의 오류이다. 나도 이런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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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일 일요일

과학기술 이슈에서 시민참여적 민주주의의 가능조건: 원전 공론화위를 둘러싼 최근의 잡음과 관련하여

[ "사실왜곡" 신고리 건설재개측 반발...흔들리는 공론화 (2017.09.30) ]

  신고리원전 5, 6호기 건설 여부를 논의하는 공론화위원회에서 원전 관련 정부출연기관 전문가를 배제할 것을 건설 반대 측이 요청했다고 한다. 사실왜곡이라고 수 차례 지적된 건설 중단 측의 자료가 시민참여단을 위한 자료집에 결국 수정 없이 그대로 수록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너무나 답답하다. 500여명의 시민참여단이 내린 결론이 건설 여부 결정으로 직접 이어지게 되므로 신중하게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텐데, 그 출발이 될 자료집 제작 단계부터 건설 중단 측의 위와 같은 행동이 드러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후쿠시마 사태 및 MB정부 원전 비리 등을 통해 쌓인 원자력에 대한 불신의 벽의 존재를 납득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며, 그러한 불신을 타파하고자 하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러한 노력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원자력 종사자 전체를 마피아라고 취급할 정도의 거대한 불신을 그저 '자연스러운 일', 심지어 '원자력계의 업보'라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나이브하다. 건설 반대 측에서는 자료의 기본적인 사실왜곡에 대한 지적을 수용하지 않고 공론화 자료집에 그대로 수록하기까지 하는데, 정작 원자력 분야 종사자는 세부 영역에 무관하게 소위 '핵피아'로 취급되면서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말살당하는 것은 명백하게 부당하다. 이러한 분위기가 탈핵 진영에 의해 조장된 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원전 관련 고위직에 있으면서 큰 금전적 이득을 취할 가능성을 발견하고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넘어서서, 과학기술, 에너지정책, 산업정책 등 각 영역의 원자력 전문가 전체에 대해 탈핵 진영에서 ‘핵피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낙인을 찍고, 심지어 공론화위에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을 제외하라는 당황스러운 요구까지 하는 것은, 건설 중단 쪽에 당위가 있다고 강력하게 전제하고, 따라서 혹시라도 건설이 재개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건설 재개 측이 뭔가 발언권을 얻는 것 자체를 큰 위협으로 여겨서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원자력 관련 종사자, 특히 과학기술 쪽에서 연구해온 원자력 공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문제를 은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원전과 방폐장이 가질 수 있는 잠재적 리스크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공학적인 관점에서 원전과 방폐장의 안전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제적인 연구 성과를 발표해 온 경우가 많다. 현대의 정밀 공학에 대해 흔히 갖는 오해와는 달리, 리스크가 없는 시스템은 없다. 그러나 - 역시 오해와는 달리 - 이러한 리스크를 예측 가능한 범주에 넣고자 하는 작업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건설 반대 측이 이러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들을 공론화위에서 배제하도록 요청하고, 왜곡된 내용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자료집에 수록한 등의 일련의 행동은, 물리적 세계에 실재하면서 작동하고 있는 원전이라는 공학적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접근 시도를 차단하고, 나아가 그러한 과학기술적 영역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며, 오로지 사회적 맥락에서 사람들의 관념상에 존재하는 ‘정책적 대상’으로서의 원전에 대한 논의만으로 공론화를 매듭짓고 결론을 도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지극히 우려된다.

  잘 조직된 시민사회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정치참여가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시민주의자이자 일종의 진보주의적 공동체주의자로서, 신고리원전 건설 여부를 공론화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시민참여적 민주주의의 모범적인 사례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참여적인 공론장은 논의에 있어 적절한 근거를 선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첫째로는 학술적인 사실관계, 경제적인 효율성 등을 판단하는 ‘목적합리성’, 둘째로는 담론의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을 추구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그런데, 공론화위에서 정부출연기관 연구원을 배제한 것은 학술적인 사실관계에 대한 검토가 차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목적합리성을 결여한 조치이며, 특정 집단의 담론 참여가 부당하게 제한된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역시 결여하고 있다. 시민참여단을 위한 자료집에 건설 반대 측의 왜곡된 자료가 수록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관계 측면에서의 목적합리성과, 담론의 진리성, 정당성, 진실성 차원에서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시민참여적 숙의민주주의가 본래의 이상대로 잘 이루어져야 할 텐데, 이 두 가지 사항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이번 공론화가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하고 모범적인 사례로 남는 것을 에너지 정책의 차원과 민주주의의 차원 양쪽 모두에서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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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8일 월요일

누구를 위한 인권센터인가 - 인권 개념의 기만적인 활용을 규탄한다!

  총학 산하기구인 학소위가 SNU 인권주간에서 '교수-학생간 권력관계에 의한 인권침해'를 다루려는 기획안을 제출하였는데, 인권주간을 주관하는 인권센터에서 '교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 및 명예훼손'의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지적하다가 결국은 일방적으로 학소위를 인권주간에서 퇴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건을 접하고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개인 자격으로 자보를 작성하였습니다.
  본 건과 관련한 보다 자세한 경위는 다음에 링크된 <학소위 인권주간 배제 통보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snuhumanrightscouncil/posts/1440346112715026

  이하는 자보 내용입니다. 이미지 파일로도 첨부합니다.

이미지: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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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인권센터인가
- 인권 개념의 기만적인 활용을 비판한다 -

  최근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에서 주관하는 ‘인권주간’ 행사의 기획단으로 참여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이하 ‘학소위’)가 인권주간에서의 퇴출을 통보받는 일이 있었다. 학소위가 인권센터 측에 송부하고 학내 구성원에게 공개한 질의서에 따르면, ‘교수-학생간 권력관계에 의한 인권침해’를 다루겠다는 학소위의 기획안을 ‘교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을 이유로 인권센터가 반복적으로 문제 삼았고, 학소위 측에서는 인권센터에 협조적인 기조를 유지하며 이러한 피드백을 최대한 반영하였으나, 결국은 모호한 설명만을 동반한 퇴출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인권센터는 교수-학생간 인권침해의 문제가 가시화되어 실질적으로 해결되고, 예방 및 재발 방지를 위한 담론 및 제도적 장치가 효과적으로 형성되도록 관리하고 지원할 책임이 있다. 교수-학생간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학소위의 관심을 ‘교수의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으로 반복적으로 규정한 인권센터의 인식을 개탄한다. 오히려 그러한 관심은 교수가 학생을 인격체로, 학생들이 교수를 스승으로 존중함으로써 학교 구성원 간의 신뢰를 형성하고, 배려가 깃든 대학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말이다.

  물론 섣부른 공동체적 대응 과정에서 교수의 발언권이 과도하게 제한되고 명예가 부당하게 실추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역시 어느 정도는 합당하다. 과거에 다른 학교에서 있었던 소위 ‘독이 든 사과’ 사건(서○○ 교수 무고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학내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대응은 신중하고 공정해야 하며, 혹시 다수의 예상과 다른 결론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수용되어야 한다. 실제와 다르게 단정지어진 바에 의해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 인권침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기본적인 전제로 하여, 각각의 구체적인 사안별로 조정해 나가면 될 일이다. 인권센터의 기본적인 방침은 학내 인권침해 사안을 가시화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지원하는 방향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 과정에서의 피해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문제의 가시화 자체를 막는 방향을 향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서는 특정인의 피해 가능성이 발생한 것도 아니며, 교수-학생간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일반론적인 소개를 하고자 했을 뿐이므로, ‘교수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을 근거로 한 인권센터의 학소위 퇴출 조치는 더욱 납득이 어렵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할 때, 인권센터의 이번 조치는 인권 개념의 기만적인 활용임에 다름 아니다. 인권센터는 교수-학생간 인권문제를 조명하겠다는 학소위의 기획을 교수의 인권침해를 근거로 문제 삼아 결국 학소위를 인권주간 행사에서 배제했다. 이렇게 인권 개념을 기만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왜곡된 이해를 유발하여 그 개념을 오염시키고, 결과적으로 인권침해의 문제를 은폐한다고 비춰질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은 상당수의 학내 구성원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인권센터는 학내 인권침해의 피해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최종적 보루이다. 서울대학교 인권주간에서 교수-학생간 인권침해 문제가 다루어지는 것이 누군가의 심기를 해칠 수 있으나, 그것을 이유로 문제의 가시화 자체를 막는 것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의 피해자에게 현실적인 위협이다.

  인권센터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본 건의 당사자이자 총학생회 산하기구로서의 학소위가 송부한 질의서에 충실하게 답변하여야 한다. 인권센터의 존재 목적을 고려할 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조치가 이루어졌던 것을 인정하고, 그 이유와 관련하여 사실관계와 입장을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 만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학내 구성원들의 인권센터에 대한 추가적인 비판은 정당할 것이다.

전기∙정보공학부 14학번 오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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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5일 금요일

정체성 판타지 비판

  누군가 그저 자기 기분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가볍게 소비하는 일은 꽤 흔하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성적 소수자성, 드문 출신 배경, 특정 정신질환 병력 등에 대한 왜곡된 판타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겉보기에 호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것은 차별주의의 또다른 얼굴일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 판타지'와 관련해서 개인의 책임을 규명하는 데에는 다소 난점이 있으나 적어도 미디어와 사회에 대해서는 명백히 비판이 가능해 보인다.

  좀 더 넓혀 보자면 학력, 소속, 전공, 직종 등에 대해서도 이런 일이 많은데, 대면한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 존중이 결여된 채 그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발생한 편견)만을 가볍게 소비한다면, 위 문단과 비슷한 이유로 상황에 따라 그를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이런 부류 중 최악인 것은, 권력 차에 의한 억압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정체성 판타지가 작동하는 경우이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가장 중대한 예 중 하나는 젠더권력일 것이다. 신체를 다루는 직종들에 대한 유서깊은(...) 성적 대상화도 이러한 맥락에서 조명할 수 있다.

※ 거시적인 정치사회학도 아니고 미시적인 언어생활을 다루는데, 그것을 위해 적용하는 개념들이 본문같은 경우에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물론 개념체계가 언어직관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비추어 보는 것도 학술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것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내기' 위한 거의 유일한 개념체계이며, 더 나아가 일상언어 역시 미시적이긴 하나 분명히 '정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꽤 매력적인 개념체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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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 금요일

왁싱샵 살인 사건

https://news.joins.com/article/21815022?fbclid=IwAR2rpokbcRc2H5IaXBcfVB8D-a40HaP7-hUnYS-4bpKMp8RLGvM078N53_g
[ "담배 피며 유유히" 왁싱숍 여주인 무참히 살해한 남성 (2017.08.03) ]

최악의 사건이다.

  사후적인 해석이지만, 왁싱이라는 업종과 관련하여 무언가 터질 징조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것을 특징 삼아 인기를 끈 각종 개인방송 채널에서 너도나도 왁싱 샵 체험기를 업로드하였는데, 왁싱샵의 특수성에서 모종의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남성 중심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부적절하게 왁싱샵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그러한 풍조가 폭로되었다. 해당 방송의 BJ는 법적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 책임은 느낀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사회에서 성적 코드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전부터 간호사, 승무원 등의 일부 직종은 남성들에게 성희롱적 발언이나 요구 등을 많이 받아 왔다. 최근에는 이것이 대중매체를 타고 확산되면서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방식으로 은유적인 성적 코드가 부여되어 소비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번 왁싱샵 건도 특정 직종에 대해 성적인 함의를 부여하여 대중적으로 은밀하게 소비하는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터질 게 터졌다는 느낌이다. 참담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기에 더욱더 참담하다.

  더구나 왁싱샵은 아직 많은 이에게 다소 낯선 서비스이면서도 자기관리의 측면에서 꽤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서비스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성적 긴장감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비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미디어에 소개되면 문제가 생길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남성중심적 매스미디어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런 건 절대로 ‘거리낌 없고 개방적인’ 게 아니다. 한 성별이 다른 성별에 대해 아무 말이나 막 한다고 성적으로 개방적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본의 대중문화 컨텐츠가 성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으로 소비되는 것이기에 개방적이기는커녕 극도로 보수적인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걸 개방적이라고 하는 건 남성과 동등한 한 인격체로서의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중매체, 특히 규제가 없는 개인방송 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잘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일방적으로 성적 긴장감을 형성하려고 하는 부적절한 성적 대상화가 만연한 풍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성인지교육의 혁신적인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세대가 지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성교육이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 실제 성관계하는 법도 제대로 소개해 주지 않고 돌려 말한다고 불만들을 많이 제기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전에 일단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간으로 보는 법이나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을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권의식의 부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과 관련된 주제에서는 인간의 이러한 비틀린 내면이 유독 특별히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영역이라서 남들과 얘기해 볼 기회가 없으니까, 더구나 이성과는 더욱더 성에 대해 얘기해볼 기회가 없으니까 부적절한 젠더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개선의 기회가 없이 속에서 계속 곪는 게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생각에는, 무턱대고 ‘개방적으로 터놓고 얘기하자!’ 해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성들과 함께 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면 일단 서로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이것은 젠더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한 선언이 아닌 꾸준한 실천을 통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증명함으로서 달성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젠더권력이란 스스로를 보다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는 개념이지만, 지극히 설명력이 좋은 개념이기도 하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젠더권력에서 기인한 비인간화와 대상화의 문제로 소급시켜 설명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여성혐오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여성혐오는 스스로를 엄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설명해 내는 개념이다(우에노 치즈코의 설명 참조). 비록 이 개념이 스스로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비판될 필요가 있는 개념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통찰을 현재 단계에서 ‘말해내기’ 위해 현 단계에서 활용해 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개념이기도 하다.

  작년 5월에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었는가? 사건 당시 나는 여성혐오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확정적인 작업이 아니다. 몇몇 어려운 단계를 정당화하는 데 성공해야만 여성혐오의 연관성이 조심스레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망상장애의 구체적 내용은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므로 그의 여성혐오적 망상에는 이 사회의 여성혐오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 가해자가 여성을 두려워해서 피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살해한 것은 그의 망상이 다른 망상이 아닌 여성에 대한 망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왁싱샵 사건의 경우는 여성혐오적 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남성중심적 대중문화 속의 기괴한 면이 그 어느 사건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까지, 여성혐오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작용한 것이 절대 아니라고 애써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나 설득을 시도해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막막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 해외순방 당시에 예쁜 통역사를 구한다고 공고했던 것에 대해 JTBC의 손석희 아나운서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이미 들켜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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