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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7일 일요일

다원예술 프로젝트 <다이빙 미러> 쇼케이스 '비전이 공간이 될 때' 후기 및 발제문

지난번에 포스팅한 대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창작지원사업 <다이빙 미러> 프로젝트의 쇼케이스 "비전이 공간이 될 때"가 지난 12월 10일(일요일)에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기술 미학'이라는 키워드로 지난 10월부터 이번 협업에 참여하여, <표현 재조합 기계로서 딥러닝의 기술미학적 쟁점들>이라는 제목으로 발제문을 작성하였고, 또한 이를 바탕으로 협업자의 한 명으로서 30분가량의 발표를 진행하였습니다.

과분하게도 제 발제문이 이번 쇼케이스에 전반적인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여러 의미로 아날로그 vs 디지털을 비교하면서 밀어붙인, '딥러닝의 매체성은 디지털화의 끝에서 등장한 아날로그이다 (디지털의 양적 팽창 -> emulated analog로의 질적 도약)'라는 테제가 사전미팅 때도 그렇고 본 쇼케이스 때에도 꽤 논쟁적이어서, 예상보다 활발한 논의가 있었고 저도 많이 배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뒤늦게 합류하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디스커션 하며 작업했는데도 한동석 작가님을 중심으로 여러 협업자 선생님들과 밀도있는 교류가 오간 인상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유튜브 영상 다시 보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발음/발성 연습을 좀 해야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업결과 공유 차 이번 쇼케이스에 대한 네오룩neolook 공지 게시물 (쇼케이스 진행 후 업데이트됨) 을 덧글에 링크하였습니다. 또한 네오룩 공지의 여러 링크는 12/19(화)를 끝으로 만료될 예정이라, 발제문 pdf 파일과, 저 외에도 총 5명의 협업자가 함께한 쇼케이스 녹화본 유튜브 영상들도 덧글로 직접 링크해둡니다.
발제문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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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재조합 기계로서 딥러닝의 기술미학적 쟁점들>
I. 소개 및 서론
II. 본론
1. 딥러닝의 매체성: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1) 기술매체의 미학: 복제와 재조합의 용이성
(2) 아날로그 알고리즘으로서의 딥러닝
(3) 원형 재조합 기계로서의 딥러닝: 디지털의 끝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2. 의미-기계의 기술적 조건들
(1) 고차원 공간에 임베딩되는 내부 표현들
(2) 추상성의 위계와 정보의 정량화
3. 딥러닝을 활용하는 예술, 딥러닝을 사유하는 예술
(1) 예술에서 인공지능의 이중적 지위
(2) <다이빙 미러> 프로젝트에서 탐구될 중간적 시공간들


유튜브 녹화영상 링크
1. 사업 결과
2. 쇼케이스 녹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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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음악 추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예찬

1994년에 발매되어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도입부만큼 세련된 것이 또 있을까?

이 곡의 도입부에서는 스크래치의 역할이 단순한 보조적인 효과음 이상으로 중요한데, 쓰래쉬한 헤비메탈 기타 사운드가 자칫 실제 속도에 비해서도 곡을 더 무겁고 둠하다고 느끼게 할수 있으며 리프 자체도 단순함에도, 여기에 턴테이블 스크래치가 적절하게 더해져서 무척이나 감각적이고 댄서블하게 느껴지는 듯.

특히 첫 보컬 '됐어~' 들어가기 직전의 5초 정도에 스크래치 들어간 질감이 너무 세련되어 있고, 100번 들어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 이 구체적인 질감은 라이브 공연 무대에는 잘 없고 원곡 음원 버전에만 있어서, 계속 원곡 음원을 찾아 듣게 된다.


랩댄스뮤직과 헤비메탈 기타리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하는 전작의 타이틀곡 '하여가' (1993) 와 비교해 보자면, 곡의 전반적인 컨셉의 혁신성은 하여가가 더 뛰어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구성이나 디테일이 정리가 조금 덜 된 느낌이 드는 하여가에 비해서 세부적인 터치의 센스는 교실이데아가 들을수록 탁월한 듯.

가사 면에서도 하여가는 재밌는 부분들이 있지만 주제의식 자체는 비교적 평범한 데 비해, 교실 이데아는 교육문제에 대한 노골적인 (그러면서도 분노를 과격한 감정으로 표출하지는 않는) 비판이라는 점에서 당대에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맨처음 드럼 필인 들어가기 전에도 짧은 비트박스(?) 같은 게 나오는데 이 부분부터 범상치 않은 곡임을 알 수 있다.


서태지가 은퇴해 있는 사이에 세계적으로 본격화된 누메탈 유행을 타고 다시 나온, '울트라맨이야'가 수록된 6집 (2000) 또한 뉴메탈 사운드에서 raw함을 좀 죽이고 서태지 특유의 집착적으로 갈고닦는 스타일을 결합했다 보니 편곡이나 사운드적인 완성도, 세부적인 아이디어는 탁월한 명반이지만, 수록곡들의 전반적인 독창성 면에서는 당대에 이미 피크를 찍어 가고 있던 세계적 뉴메탈 유행에 비교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게 사실이다. 이러한 랩과 메탈의 결합이라는 유행을, 미국에서 본격화되기 전에 이미 높은 완성도로 선취한 교실 이데아를 그래서 더욱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매일아침 일곱시~' 부터 시작하는 벌스 부분도 사실은 단순하고 둠한 기타리프인데, 드럼이 적절하게 들어가 줘서 거의 컴백홈 급으로 가볍고 복잡하고 신나게 느껴진다. 드럼의 중요성이다.

3집 콘서트 '다른 하늘이 열리고'에서 크래쉬랑 같이 엄청 길게 공연한 교실이데아 무대는, 물론 서태지 커리어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꼽힐 만한 명 무대이지만 오히려 전통적인 쓰래쉬 느낌으로 편곡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세련된 스크래치의 맛은 안 느껴져서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시작 전에 오글거리는 교육 비판 연설(?), 3집 특유의 발해왕자 의상 입고 댄스 하는 것, 그리고 크래쉬한테 '하고 싶은거 다 하시라'고 한 듯한, 전면에 오랫동안 내세워지는 기타연주가 조화를 이룬 아주 좋은 무대다.

이외에도 3집을 요새 다시 탐구하고 있는데, '발해를 꿈꾸며'는 남북통일이라는 메시지를 떠나서 송라이팅 면에서는 기존에 내게는 잘 와닿지 않고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서 잘 모르는 곡이었다. 그런데 요즘 다시 들어 보니 오히려 너무 매끄러워서 감흥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고, 이것도 들을수록 대단한 완성도를 가진 록 음악인 듯하다.

이 외에도 '내 맘이야', '제킬박사와 하이드' (메탈 뮤지컬(?)의 원조랄까), '널 지우려 해' 등등 각 수록곡들이 기타사운드를 통해 한 앨범이라는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제각각 개성있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영원'이랑 '아이들의 눈으로'는 록 사운드는 아니지만 뭔가 뮤지컬 느낌, 연극적인 느낌이 난다는 점에서, 사운드적으로는 상극에 있는 '제킬박사와 하이드'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접점을 이루면서 앨범에 새로운 축을 더해준다.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통일성 있는 3집이 나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좋아지는 듯하다. 시간을 투입해서 들어 보고 이 정도의 장문으로 기록해 볼 가치가 있는 음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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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6일 수요일

뮤지션 김민기에 대한 몇몇 이야기

어머니가 잊을만하면 얘기해 주시는 재미있는 일화인데, 옛날에 어느 자리에 갔는데 너무나 익숙하지만 누군지 생각이 안 나는 사람이 앉아 있더란다.

그래서 주저하던 끝에 혹시 저 아시지 않냐고, 누구셨더라 하고 물어봤는데 그분이 허허 웃으시더니 아마 무대에서 보셨을 거라고... 알고보니까 가수 김민기였다고 한다. 내 기억이 확실친 않은데, 아마 옷을 굉장히 멋있게 입었다고 하셨던 것 같다.

아마 유명인들은 이런 일화가 워낙 많을 것 같다. 혹시 TV에 나오는 분 아니냐는 질문은 물론이거니와, 그럴 거라고 생각 못한 나머지 질문하는 본인이 아는 사람 아니냐는 질문들까지 말이다.

사실 나도 몇 년 전에 우연히 본 어떤 분이 얼굴이 너무나 익숙한데 누군지 기억이 안나 나서, 어릴때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셨나? 막 이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신태용 축구 감독이었던 적이 있다. 안 물어보길 다행이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비롯해서 감동적이고 벅찬 분위기의 곡도 많이 썼지만 그의 노래극 중에서는 위트가 담긴 풍자적 가사도 많은데 그 중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깊고 재미있는 건 <공장의 불빛>의 한 수록곡에 나오는 다음의 가사다.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 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 우리들은 타이밍 약 사다 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실로 재치있으면서도 씁쓸한 가사가 아닐 수 없다.


김민기는 최근에 암투병으로 인해서인지 학전도 닫기로 하고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김민기가 한국 노래극에 기여한 바를 보면 시대의식이나 시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음악사적으로도 의미가 상당한데, 김민기 본인의 드문 매체출연은 물론이고, 노래극 관련 영상자료도 생각보다 남아있는 게 풍부하지는 않다 보니 잘 보전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음악 자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80-90년대 록밴드 뮤지션들이 열심히 활동한 것에 관해서 남아 있는 자료들도 생각보다 쉽게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이들도 당시를 직접 겪어서 잘 알고 있는 뜻있는 팬들이 더 늦기 전에 잘 수집하고 보전해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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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5일 화요일

다원예술 프로젝트 <다이빙 미러> 쇼케이스 '비전이 공간이 될 때' 홍보

2023년 다원예술창작지원사업 <다이빙 미러> 프로젝트에서 이번주 일요일에 쇼케이스를 합니다.

<다이빙 미러>는 영상매체 작업에 컴퓨터비전 기법을 도입한 다원예술 프로젝트로 저는 지난 10월 초부터 참여하였는데, 주말을 활용하여 2회의 디스커션, 그리고 1회의 내부 상영회(사전미팅)을 거쳐 '기술 미학'이라는 키워드로 쇼케이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늦게 합류한 관계로 준비 기간이 짧기도 했거니와 AI 현업에도, 미학분야에도 내세울만한 전문성은 없다보니 훌륭한 분들 사이에 참여해도 될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AI에 대한 약간의 수학적/물리학적 이해와 더불어, AI가 개입되는 새로운 예술형식에서 발생하는 매체미학적 쟁점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견해를 재미있게 봐 주셔서 그런 내용들에 대해 짧은 발표를 해 보고자 합니다.

행사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네오룩neolook에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클릭하여 네오룩neolook 링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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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재 ● 학부시절 전기공학, 물리학 및 미학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물리학전공 박사과정생(통계물리 세부전공)이다.
생체를 비롯한 여러 시스템들의 창발적 집단현상에서 나타나는 에너지 및 정보의 흐름과 그 제약 조건들에 대해 확률을 도구삼아 연구하는 '비평형 통계물리학'이 본업이며, 이러한 관심사를 인공지능 시스템의 풍부한 표현 학습과 높은 성능에 대한 이론물리학적 해명에 다각도로 접목하는 연구들도 조금씩 살펴보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에서 딥러닝 패러다임의 부상은, 데이터를 학습하여 구조화되며 고차원 공간상에서 배열되고 표류하는 '표현'들의 기하학으로써 특히 문화기술 부문에서, 그간 주관적 표현의 영역이었던 '의미'와 '질감'에 대해 우리 스스로 더 잘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엔지니어링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이렇듯 근래에 실현되고 있는 시맨틱 테크놀로지, 텍스쳐 테크놀로지로서의 딥러닝이 인간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촉발되는 새로운 종류의 미학적, 인간학적 질문들을 꾸준히 포착해 나가고자 한다.
본 프로젝트에서 여러 문화예술 부문의 협업자 선생님들이 함께하는 다원적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 설레는 마음이며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상이한 매체성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종합되면서 제공되는 새로운 시공간적 체험들과, 그러한 테크놀로지의 여백 및 틈새에서 폭로되는 시공간 지각의 매끄럽지 않은 이음매들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주관적인 것들에 관한 학으로서 미학 고유의 영역이, 테크놀로지의 인간학적 해석과 수용에 적절히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주로 텍스트작업과 컴퓨터비전 실습작업을 통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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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승욕구는 평등이 아닌 계급주의를 향해 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대체로 상승욕구가 굉장히 강하며, 이것과 발맞추어서 실제적인 경제적/문화적 계급 고착화도 여지껏 비교적 덜하게 유지되어 왔다고 흔히 얘기한다.

이러한 특징이 개인과 국가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고 발전할 거라는 믿음과 결합하여 '역동성'으로 작용하면서 (심지어 산업 및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정치 발전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상승욕구의 근원을 따져봤을때 그것이 평등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로 철저한 계급적 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즉

1.현재의 계급과 무관하게 누구나 지금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나아가서 더 성공할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2. 오히려 급을 철저하게 나누고 내가 그 위계 하에서 윗급에 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이라면
나라가 역동적으로 성장할 때는 위 두 가지가 그다지 구분이 되지 않으나 (혹은 구분 안해도 크게 상관없을 수 있으나) 나라의 성장동력이 사라지고 저성장 및 인구감소에 접어들면서 국민생활 개선 및 그에 대한 희망이 제공이 안되기 시작하면, 그래서 실질적으로 계급이 고착화되기 시작하면 위 둘은 즉각적으로 극명한 차이를 보이게 되는 듯하다.


한국사회에서의 삶의 표준모델은 아직까지 비교적 동질적인데 (현실을 떠나서 동질성을 표상하는 이념의 측면에서) 그렇다 보니 지극히 일원화된 기준 하에서 한 사람의 삶의 모든 것이 급수화, 점수화되고 이 점수가 그 사람의 성공 여부를 정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추석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어느 대학 갔냐, 어디 취업했냐 캐물어보고 하는 클리셰적인 스트레스 요인을, 가족 친지 단위에서 미시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라는 거시적인 레벨에서 마치 거대하게 확장된 단일 친척공동체 (그러나 서로 도와주기보다는 서로 비교만 하는) 처럼 다같이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동질성이 이러한 일원적 평가기준에 근거하여 수립된 탓에 사회적 갈등 의식도 높고 말이다.

즉 내 생각에 위 1, 2 중에 한국인들은 명백히 후자라는 것이고, 이러한 특질이 딱 내 또래 세대가 첫타로 얻어맞게 될 전례없는 사회변화의 국면에서 시너지로 작용하여 매우 부정적인 여파를 낳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성취지위에 대한 과도한 주목과 일원화된 평가보다는, 다원화된 각 부문에서 자기가 맡은 자리를 지키면서 역할, 책임, 그리고 직업윤리를 다하는 사람들에게 인식상의 존중과 실제적인 상승도전의 기회가 더 많이 돌아가는 모럴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는 소득과 안전을 보장해줌과 동시에, 구성원 간에 급을 나누고 비교하는 peer pressure를 완화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사실 나도 이런 peer pressure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리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계속 하고는 있는데, 회사에 다니는 동기들은 절대적인 금전 부분을 떠나 커리어적인 성장을 하며 생애주기 상의 단계에 드라이브를 거는 데 비해서, 나는 계속 학교라는 똑같은 공간에 있고, 진로가 국내일지 국외일지 불확실해서 정착준비가 불가피하게 유예되다보니, 커리어적으로 치고나간다는 느낌과 객관적인 성장의 증거가 없어서 더 그런 듯하다.

저성장, 인구감소, 계급고착화를 필두로 한국사회가 곧 마주하게 될 망국적 변화속에서 내가 진로선택과 정착 준비를 20대 5년쯤 유예하기로 한 것이 아주 부정적인 스노우볼로 돌아오지는 않을지 불안감이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졸업하고 나서 내가 역할을 발휘하면서 꾸준히 기여할 수 있는 쪽으로 잘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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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6일 일요일

노이즈 - 상상속의 너 (1995) 에 얽힌 신기한 이야기

노이즈의 <상상속의 너>(1995)는 신나는 리듬과 인트로의 뚝뚝 끊기는 듯한 독특한 효과음, 그리고 무척 시원시원한 보컬로 잘 알려진 댄스음악이다. 96년생인 내 입장으로서는 90년대 댄스곡들 중에 제목까지 확실히는 모르더라도 들으면 무조건 아는 곡들이 여럿 있는데 이 곡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곡이 아르헨티나에서 1999-2002년 동안 방영된 유명 코미디 쇼 프로그램 'todo x 2 pesos'의 오프닝 장면에 통째로 쓰여서 (유튜브에 찾아보면 방송 중간중간 전환 장면 등에도 조금씩 나온다) 아르헨티나의 중장년 세대들에게는 매우 귀에 익은 곡이라고 한다 (실제 당시 아르헨티나 방송에 삽입된 영상: 링크).


시원시원하면서 뭔가 재치있는 느낌이 이런 프로그램과 꽤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 중에 한국계가 있어서 이 곡을 알고 삽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축구스타 메시도 아는 곡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고 그냥 하는 얘기인 듯하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해서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여전히 추억삼고 있고, 무슨 곡인지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노이즈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하는 걸 보니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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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7일 화요일

힘든 청년들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시각: 위로(慰勞)에서 조롱으로의 전환?

요즈음 40~50대들이 많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나 sns에 우연히 들어가보면, 어린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 혹은 반동을 지엄하게 비판하면서, '우리는 인구도 많고 돈도 많고 똑똑하며 실력적으로도 프로페셔널한데, 너희는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부족하므로 성장해서도 우리를 이길수 없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글들이 꽤 인기있는 레퍼토리를 차지하고 있다. Facebook 유명인들의 덧글창에서도 많이 보인다.

그런 글들에서는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 확정적인 현재의 청년 세대를 상당히 불쌍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심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자신들과 같은 세대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고 결속력을 제공하면서, 우연히 그 글을 읽게 된 청년 세대들을 열받게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능이 없다.

이렇게 감정 유발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하는, 게다가 동정과 비난이 애매하게 섞여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인터넷 게시물 레퍼토리들 여럿이 대단히 의미있는 담론처럼 유통되는 것을 보면 나는 굉장히 괴상하다고 느낀다. 그 이름조차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소위 설거지론 역시 (공격의 구도는 이 글의 예시와 반대 양상이지만) 그 대표적인 예시다.


예전에는 현재의 청년세대가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는 데 대한 확고한 인식이 지금처럼 널리 자리잡고 부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에게 '너희들이 힘든 것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혹은 '청년들에게 힘든 사회를 물려주어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식으로 연대 의식을 드러내는 정서가 꽤 많이 보였는데... 글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은 레퍼토리의 유행, 위로(慰勞)에서 조롱으로의 전환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순전히 통시적인 것 같지는 않고 비중의 문제이지, 언제나 공존해 왔을 것 같기는 하다.


원전 해체산업 주장이나 러-우 전쟁 우크라이나 무능론/책임론 등 다른 맥락에서 이미 몇번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무척 공격적인 말들이나 지극히 어색한 주장도, 본인이 신뢰하는 스피커들에 의해 유통되면서 자신이 불편감을 느끼는 부분을 시원하게 설명해 준다면 '저렇게 말해도 되나보다' 하면서 합리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정보버블이 깨질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런 말들을 계속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위와 같은 종류의 글들의 유행도 이러한 경향의 한 예시라는 생각이 든다.




캡쳐된 기사의 전문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 부분만 보면 노인세대의 공로를 대우하고, 동시에 능력을 발휘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여 사회구성원으로서 계속 역할을 하게 하자는 꽤나 의미있는 담론으로 보인다. 이러한 괜찮은 담론이, 위에 말한 것과 같이 청년세대를 이상하게 후려치는 레퍼토리와 섞여서 이야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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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일 목요일

기계의 표현과 내 생각을 정렬하는 포스트휴먼적 체험

내가 아무렇게나 그렸던 그림이 그려 놓고 보니 테리어몬이랑 다루마를 섞은 것처럼 생겼다고 써 놓은 게 과거의 오늘에 뜨길래 (그림 1), 아예 테리어몬과 다루마를 섞은 걸 그려 달라고 무료 AI그림 웹사이트에 세심하게 프롬프트를 넣어 보았다.



당연히 꽤 잘 해 주며 (그림 2), 이것들을 내 그림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듯하다. 섞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실제로 그림 1과 비슷한 느낌이 조금씩 엿보이는 걸 봐서, 영 잘못 짚은 건 아닌 것 같아서 공연히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기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할 때, 즉 기계의 표현과 자신의 생각을 발맞춰 갈 때 사람들이 종종 느끼는 이런 뿌듯함 또한 일종의 포스트휴먼적인(?) 정서로서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닐까 한다.

2021년 12월에 VQGAN+CLIP 기반의 text-to-image generation을 처음 제대로 접하고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림 1에서 두 대상을 섞는다는 생각을 포스팅한 게 그 바로 직전쯤인 것 또한 흥미롭다. 그 직전만 해도 이런 걸 기계가 근시일 내에 정말로 잘 해 줄 거라고는 생각을 잘 못 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이런 생각의 경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쓸만한 생성 ai가 나왔을 때도 서로 전혀 다른 두 대상 사이의 interpolation을 시켜 보면서 내부 표현공간을 탐색해 보는 관심사를 가장 우선적으로 갖게 되었던 게 아닐까 한다.

지금도 딥러닝의 부상은 곧 '의미 엔지니어링'의 대두와 매우 밀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차원 공간상에 임베딩된 피쳐들 혹은 표현들을 조합하는 의미 기계의 출현 말이다.

그림 3, 4는 구글링해서 퍼온 테리어몬과 다루마 이미지.





[음악 추천] john0 - Rebell10n 1n neVeRland

아티스트 겸 프로듀서 john0의 정규앨범 Rebell10n 1n neVeRland가 발매되었습니다. 메탈코어 계열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고 국내 음원 사이트 및 Spotify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3번 트랙 und1SPuTed에 기타솔로 라인작업 및 녹음으로 작게 참여를 했습니다.

melon의 앨범 정보: 링크
타이틀곡 deMol1SH 뮤직비디오 Youtube: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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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일 수요일

매끄러운 설명을 경계하고 입체성을 직시하자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2)

매끄러운 설명의 요구를 경계하고 사태의 입체성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 회자되는 사기 사건은 결국 전청조라는 사람이 남현희 감독과 그 가족들을 작정하고 헤집어 놓으면서 사기를 친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가족들끼리, 혹은 가족을 넘어 펜싱업계 사람들끼리 서로간에 이간질에 의한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고 이런 것은 마이너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잘못이 전혀 없다는게 아니지만, 판을 짠 것에 말려들어서 그렇게 된 거면 당연히 제일원인은 전청조한테 있는 것 아닌가.

판단력이 흐려졌고, 계속 의심까지 했음에도 빠져나갈 계기와 용기도 부족했고, 그러면서 주변에 피해를 끼쳤고 이런 것들은 잘잘못을 가려야겠지만, 사기사건이라는 본질을 흐려 놓는 가해자의 몇마디 언사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연락도 통제하고 주변 환경까지 통제해 가며 작정하고 달려든 사기꾼한테 말려든 사람의 심리는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의심되긴 했다고 하면서도 결혼이라는 엄청 큰 선택까지 한 것이 밖에서 보면 너무 이해가 안될거고 나 역시도 그렇지만, 의심을 불식시키는 근거를 계속 제공함과 동시에 물질적 유혹과 인간적으로 조종, 통제하는 능력을 발휘하면 그 안에서 의아함을 갖더라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다.


전문가들이 흔히 언급하는 사기의 메커니즘 중에서는, 어설프더라도 속임수 내용을 '믿고 싶어서', 즉 원하는 걸 제공해줘서 믿게 된다는 것을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진의도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믿고 싶어서 믿게 된다는게, "거짓말인게 보이지만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믿어야지"라는 명시적인 악한 판단을 한다는게 아니지 않을까? 점점 의심이 안 발휘되게 되면서, 자기자신의 도식이 암시적으로 수정되면서 말려들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애초에 사태의 명백한 제일원인인, 작정하고 달려든 가해자가 있는 사기 사건인 이상 위 두 가지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한지, 혹은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그것을 애초에 처음에 안 당했거나, 아니면 중간에라도 용기를 발휘해서 빠져나갔거나 하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암튼 남현희감독한테는 무언가 이상하다, 깔끔하게 설명이 안된다며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전청조가 하는 말들이 훨씬 깔끔하고 명쾌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직업적 사기꾼의 말은 단 한마디도 귀를 기울여 들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기꾼 본인이 상황을 통제하면서 사기를 친 입장이니까 당연히 설명이 더 매끄러운 것 아니겠는가.

복잡하고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인, 본인도 잘못이 없지는 않은 어떤 사람의 여러 입체적인 면모에 대해 꼭 '합리적 판단'을 하려 하지 말고 사태 자체로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단순명쾌하고 매끄러운 설명만을 원하다 보면 오히려 사기에 취약해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피해자 찾는 것의 거울쌍인 것 같다.

(뱀발로, 이전 글에서는 사람이란 게 피차 별거 없는걸 너무 심오하고 대단하게 생각할 때에 사기에 취약해진다고 했는데, 이 글과 얼핏 반대되어 보이지만 모순되지 않는 듯. 단순화/합리화된 이해와, 입체적인 판단중지를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오갈 줄 아는 것이 메타적인 합리성인 것 같음)


전청조는 남현희 감독을 위해서 돈을 쓴 것이고 자신은 얻은 게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애초에 왜 재벌3세를 사칭하고, 임신 여부도 속이는 등 온갖 속임수를 써서 접근한 것인가? 명백히 거짓말과 설정놀음으로 판을 깔고 자기 자신한테 돈이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어서 그 설정을 현실로 만들려고 한 것이지, 그것이 어떻게 남 감독을 위한 것이 되며 사람들도 그런 주장에 휘둘리는가.

남현희 감독을 위한 것이었다거나, 물질적인 선물을 남현희 감독도 거절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은 표면적으로 '깔끔한 설명'은 될수 있을지언정, 전청조라는 가해자 본인이 애초에 판을 깔아서 주변 환경까지 통째로 바꾸어 놓고 조종, 통제하고 한 것은 쏙 빼놓으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한 아전인수격 발언들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고 처벌받겠다는 등의 말들은, 사기행위가 이미 들통난 상황에서 누구나 그냥 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언설들이고 말이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정이나 이익관계를 통해 심리적으로, 일적으로 얽히다 보면 공동 책임이 생기는 부분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지점을 부각해서 '어쨌든 당신도 다 오케이하지 않았나' 하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책임회피 수법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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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도서 소개]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 - 다슌 왕,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우리 비평형 통계물리 분야의 옆집인 복잡계 물리학 분야에서 이번에 교양서 번역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공유해 봅니다.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 다슌 왕,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이은, 노다해 옮김, 도서출판 이김(2023).

도서 링크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0778375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은 이 책의 제목이면서, 저자인 Dashun Wang이 연구하는 '분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학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광의의 메타과학 내지는 과학학으로서 과학인문학(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사회학)과 공통점이 많이 있으나, 과학 활동을 분석하기 위해서 인문사회학이 아니라 네트워크 과학을 필두로 한 복잡계 과학 및 데이터 사이언스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인문학과도 방법론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h-index 등을 비롯한 과학 연구 실적지표를 제안하고 개발하는 '과학계량학(scientometrics)'과는 어떤 관계일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저자인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Reka Albert, 정하웅 교수님과 함께 인터넷 연결망의 구조 분석, 신진대사 네트워크 분석 등으로 scale-free network라는 개념을 데뷔시킨, 네트워크 이론 및 복잡계 물리학 분야의 거장이기도 합니다.

주로 네트워크 분석 방법으로 사회 동역학과 다양한 사회현상을 연구하시는 이은 교수님과, 역시 네트워크이론 전공으로 과학대중화 및 커뮤니케이션에 힘쓰고 계시는 노다해 선생님이 번역을 했습니다.

과학에 관심이 있는 제너럴한 독자뿐만 아니라 과학을 업으로 삼는 연구자들이 얻어갈수 있는 팁들도 많이 있다고 하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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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미래지향적 연금제도를 바란다: 국가 체질변화의 총체적 과도기를 앞두고

연금개혁은 하기는 해야 한다. 방향성을 전문가들이 잘 정하긴 하겠지만 꼭 지켜져야 할 것이 있는데, 미래 세대까지 실제로 수혜를 잘 입을 수 있는 쪽으로 개혁이 되어야 할 테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할 얘기가 없으니 나랏일(?) 얘기를 자연스레 하게 될 때가 있는데, 얘기해 보면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는 이상 딱 우리 세대쯤부터 국민연금을 내기만 하고 노후에 못 받지 않냐고, 너무 아까운거 같다고 기정 사실화된 분위기가 있다. 이는 근거 없이 팽배한 불신이 아니고 심지어 국민연금 측에서도 공식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금제도는 나라가 다 책임을 지고 운용하는 건데 설마 고갈이 되겠냐고, 그럴 일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앞으로 인구문제와 지방소멸, 산업경쟁력 상실을 포함해서 국가 성장이 총체적으로 꺾이게 될,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총체적 과도기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주장인 듯하다.


여러가지 커다란 문제를 애매하게 타협적으로 끌고 가지 말고, 인식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조기에 확실하게 방향을 정해서 개혁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이민정책이나 가족제도 같은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못하면 나라에 하나둘씩 구멍이 날 수 있고, 또 그게 이미 예정되어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아무튼 국민연금이라는 것에 대해 좀 알아보니, 국민들한테 믿음을 주고 가입률을 높게 유지해야 실제로 나중에도 다들 잘 받을 수 있고, 다들 못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입률이 떨어지면 실제로도 받기 어렵게 되는 구조가 있는 것 같다. 물론 표준에 가깝게 받아들여지는 노동의 형태이며 실제 생산가능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근로소득자의 경우 애초에 의무가입이기도 하니, 여건 변화에 따라 납부율과 소득대체율을 잘 조절하는 지혜가 훨씬 중요하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지속가능하게 유지가 된다면야 내가 지금 내는 돈을 내가 미래에 받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가 낸 돈은 윗세대에 가고 나는 미래 세대가 낸 돈으로 수혜를 입는 구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한다면 연금제도가 대체로 잘 작동할 것이므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데, 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들면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정말 커지게 된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나라가 마주하고 있는 망국적 저출생에 의한 인구 감소가 크리티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이다.


여하간 우리 세대부터는 나라가 제공하는 여러 사회보장 제도나 안전 및 건강 환경이 지금처럼 계속 그럭저럭 돌아갈 거라는 근거없는 신뢰를 접고, 여러가지 리스크들 (그리고 이미 예정된 문제들) 을 치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우리보다 더 미래 세대에게는 어떻게든 변화한 상황에 맞는 국민 인식의 변화와 제도적 체질개선이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세대야말로 그야말로 과도기이다 보니, 나라가 처음으로 겪는 총체적 체질 변화를 아무 안전장치 없이 정면으로 맞아서 정말 힘든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왜 하필 나라가 고점을 찍고 성장세가 꺾일 때 태어났는가 억울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이런 근본적 불안감을 다른 세대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위에도 말했지만 어느 쪽으로든 확실하게 방향을 정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예정되어 있는 문제들을 우리 세대 중심으로 직접 미리미리 제기하지 않는 한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국민연금은 근로소득자만 의무 가입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생 신분인 나도 임의가입 형태로 가입을 할 수는 있고 주변에서도 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개혁의 방향이나 강도가 어떻게 되는지 좀 더 지켜보고 정하려고 한다. 다만 어차피 가입할 거라면 일찍 가입해 둘수록 나쁠 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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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심리 해킹을 경계하라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1)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감정 소모와는 별개로 정신세계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건드려질 일은 잘 없고, 설령 건드리더라도 거기에는 피차 아주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불완전하고 얕은 면모와, 심연같고 신비로운 면모를 다들 피차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테다.

근데 만약에 그리 친밀하지 않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내밀한 부분이 사정없이 건드려지는 느낌이 든다면, 혹은 지나치게 고양되거나 푹 빠지는 기분이 든다면 (상대방이 의도했든 아니든) 사실은 상당히 무례한 일을 당하고 있는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대화를 통해 뭔가 인간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 특별한 시각을 체험했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걸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잘 디자인된 허풍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진짜로 우리네 심리구조의 어떤 의미있는 영역을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사람 사이에서 그게 굳이 끄집어내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며... 만약 그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례한 악취미라고 생각해 버려도 크게 나쁠 게 없는 듯.


꼭 의도하지 않더라도, 대화하는 질감이 남들과 약간 다른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뭔가 남다르고 깊은 게 있다거나, 상대방을 꿰뚫어본다는 느낌을 주기가 쉽고, 말을 하는 본인까지 이것을 자각해서 활용하다 보면 위처럼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렇게 언변이 지나치게 좋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발언이나 그럴듯한 거짓말 같은 걸 일삼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해킹하기에 용이하게끔 타고난, 혹은 어디서 배운 몇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적인 사기를 기획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도 결국 믿음의 영역을 건드려서 해킹하는 것이다 보니 사이비종교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일테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을 꿰뚫어볼줄 아는 것'이나, '사람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식의 말들을 확실한 컨텐츠 없이 모호하게 강조하면서 중요시하는 사람들, 혹은 인간의 내밀한 심리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타인한테든 자신한테든 그러한 영역을 심오한 것인 양 뜯어보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바로 그러한 관심사 때문에 사기나 컬트에 매우 취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그런 영역까지 건드릴 일이 없다는걸 기억하고, 사적으로 잘 관리하면서 자기 할 일을 잘 하면 되는 것 같다. 사적이라는 게 꼭 혼자 힘으로 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건 공부든 예술이든 체육이든 자기 할일을 잘 하는 능력과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나이를 먹다 보면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 혹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과 지내면서 물러지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잘 파고드는 사람을 주변에 계속 두고 있다 보면 하나둘씩 그리 권할 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되는 듯하다.

근데 그러면서도 자기 하는 일의 영역에서는 변함없이 멀쩡하게 잘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남들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혹은 알아채더라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도 하고... 참 어려운 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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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음악 지휘 행위의 흥미로운 점: 비언어적으로 명령화되는 동작적 계기로서

예술활동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요체를 이루는 감각에 대한 기본적 체험조차 해 보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인 것 같다.


물론 지휘라는 것이 오직 지휘현장에서의 손의 움직임만으로 환원되는 건 아니고,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감독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곡 해석을 바탕으로 평소에 단원들과 연습하고 교감하는 것이 아주 많이 작용할테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연 현장에서의 지휘행위에 일단 집중해보기로 한다.


위계 하에서의 협동으로 진행되는 예술활동은 물론 지휘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지휘의 경우는 신체의 동작적 계기와 그 연속적 질감이 단원들에 대한 명령으로서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해서, 단원들에게 언어 이전에 감각의 레벨에서 수용되고, 그 결과가 '연주'라고 하는 피드백 겸 예술실현의 결과로 시시각각 돌아오는데, 이는 다른 예술활동에는 잘 없는 요소인 듯하다.


그 이전에, 이미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들이 누군가의 지휘를 받기 위해 굳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야 하는데, 실제 음악경력을 바탕으로 지휘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럴 일 자체가 없기도 하다. 지휘라는 기회는 이만큼 주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에서의 행동 중에 그나마 지휘와 연관될 수 있는 계기를 굳이 찾아보자면, 다름이 아니라 음악을 청취하면서 박자에 맞게 손과 발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흔드는 등의 행동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행동들, 혹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싶게 되는 심적 경향을 '동작적 계기'라고 부를 수 있겠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경우는 대체로 누구나 예측 가능하게 레귤러한 박자로 연주를 이어가지만, 가끔가다가 그러지 않고 점점 빨라지거나 느려질 때, 혹은 갑자기 연주를 중단하거나('잡는다'고 종종 표현됨), 모든 악기가 다같이 한번에 긁어서 청자의 집중을 유도할('깬다'고 종종 표현됨) 때, 그 곡에 대해 청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해석을 바탕으로 그 순간을 올바르게 '맞추게' 되면, 특히 그것을 동작적 계기와 성공적으로 연결짓게 되면 이는 청자에게 상당한 쾌감을 유발하게 된다. 물론 레귤러한 박자에 맞게 신체를 움직이는 것 자체도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작적 계기가 오케스트라 지휘에 있어서도 기초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다만 지휘는 위의 예시와 달리, 청자와는 무관하게 이미 잘 연주되고 있는 곡을 동작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서, 이미 대략적인 얼개가 정해진 연주들에 동작적 계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개입해서 세부적 질감을 조직해 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게 지휘 행위와 비슷한 일을 해 볼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위의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기술매체의 발전에 따라, 이렇게 지휘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체험해볼수 있는 반응형 컨텐츠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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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 일요일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 맛집 'Radio Cafe'에 얽힌 역사적, 정치적 이야깃거리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Jagiellonian University,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움 "36th Marian Smoluchowski Symposium"에 참여하기 위해 다녀온 이번 폴란드 출장에서,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단순히 출국 항공편 때문에 들른 거라 저녁에 딱 한 끼 먹을 시간만 있었다. 그런데 바르샤바 중앙역 앞에서 랩 동료가 우연히 찾아서 함께 들어간 식당 'Radio Cafe'가 상당히 역사적, 정치적인 이야깃거리가 많은 장소였다. 이 식당이 국내 인터넷에서 바르샤바 맛집으로는 나름 유명함에도,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인터넷상에 한국어로 소개된 자료가 거의 없는 것 같아 한번 소개해 본다.


이 식당은 바르샤바 중앙역 역전앞에서 큰길을 건너면 바로 있는데,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달리 우리가 앉은 자리 옆에 푸틴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길래 범상치 않은 식당이구나, 그리고 폴란드 사람들도 현재의 러시아를 커다란 위협으로 느끼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잠깐 건네주는 읽을거리를 보니 이 식당에는 과연 그럴 만한, 그러나 일반론을 넘어선 훨씬 구체적인 배경이 있었다.




RFE(Radio Free Europe)이라고 해서 마치 한국의 대북방송처럼, 서구권 국가들이 냉전시기에 동구권에 송출했던 선전 방송이 있는데, 우리가 들른 식당 Radio Cafe가 다름이 아니라 RFE의 전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폴란드에서 나중에 대통령을 하게 되는 레흐 바웬사도 이 RFE를 들으면서 국제적 대립과 동구권이 놓인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기자를 하실 적에 젊은 시절의 바웬사와 직접 인터뷰를 하셨다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때쯤이 아닐까 한다).


이 식당은 바르샤바의 대학생들과, 최근에 이주해온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주로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RFE 직원들이라는 배경에 의해 형성된 그들의 사회적, 국제정치적 신념을 실천하는 나름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진의 일러스트에서도 보이듯이,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우리가 뚫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지금의 푸틴도 갈수록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하고 전면전까지 일으키면서 주변국들과 서구사회를 위협하고 있기에, 이들에게는 과거의 소련 혹은 그 이상으로 대단히 경계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는 듯했다.

이렇듯 정치적 요소가 있었지만 손님한테 부담을 주는 부분은 없었고 전반적인 음식 맛과 식당 분위기는 정말 훌륭했다. 특히 비록 메인메뉴 나오기 전의 에피타이저 같은 거였긴 하지만, 서양권 문학에서 가족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종종 등장하는 따뜻한 닭고기 수프를 여기서 처음 먹어 보았다.

메인메뉴였던 슈니첼도 커다랗고 맛있게 요리되어서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약간 매운맛이 있는 자우어크라우트 (빨간 김치와 비슷한 포지션일텐데 한국인 입장에서는 전혀 맵지 않은 정도) 도 잘 어울렸다.






식당으로 가는 과정에서 본, 바르샤바 중앙역의 역전앞에서 가장 존재감이 큰 두 건물은 바로 삼성과 LG 건물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서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럴 수밖에 없게끔 위치해 있다. 특히 LG 건물에 쓰여진 future is here 라는 문구는 정말 잘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면 소련의 스탈린이 1950년대에 바르샤바에 지어 준, 2020년까지도 폴란드 최고층 건물이었던 문화과학궁전이 있다. 참 웅장한 건물이다.




바르샤바의 복합적인 역사성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인상적인 스카이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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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4일 일요일

[음악 추천] Native Construct - 'Mute'

최근에 스포티파이를 시작한 이후로 좋은 곡들을 자동으로 추천받아서 듣고 있다. 특히 해외에 많다 보니 정보를 잘 찾아보기 어려운 프로그레시브 메탈/재즈퓨전 밴드들을 스포티파이가 잘 추천해 준다.

그런데 오늘은 Native construct의 Mute라는 굉장히 독특한 곡을 알게 되었다 (Youtube 링크: Native Construct - Mute (OFFICIAL VIDEO)). 이걸 듣고나니 다른 좋은 추천곡들이 다 심심해져 버렸다.


이 곡은 처음에는 거의 심포닉 블랙메탈을 연상케 하는 스트링을 얹은 블라스트비트로 시작하더니 (단 이때도 선율은 꽤 복잡하게 쓰고 있음) 갑자기 뮤지컬(!?) 내지는 디즈니영화(?!) 같은 부분이 나오고.... 그런데 이게 흉내만 낸 게 아니라, 노래-연기의 '대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반주 자체가 시시각각 바뀌어 주는 뮤지컬 특유의 편곡을 아주 잘 살렸다.

그 다음에는 좀더 프록메탈/재즈퓨전에서 많이 들리는, 지극히 차분하고 정제되어 있는 정교하고 복잡다단한 연주가 한동안 진행이 된다. 그러면서도 뮤지컬스러운 스트링 등을 조금씩은 계속 가지고 가다가... 그런 요소가 점점 고조되면서 앞에 나온 모든 스타일들이 종합되는 클라이막스로 곡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각각 별개의 곡을 붙여둔것처럼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메탈의 범주 내에서 잘 통합되어 어우러지면서 비교적 무리없이 한 곡처럼 들리게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프록메탈/재즈퓨전 음악들은 너무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는 나머지 나머지 그 음악적 성취에 비해 너무 편하게 흘러가듯이 듣게 되어서, 각 잡고 듣지 않는 한 곡에 집중을 잘 못 하게 되는 점이 있는데.. 이 곡은 오히려 인간적인 요소들을 많이 복귀시켜서 매 순간 재미있게 들을 수 있게끔 하는 듯.

전반적으로 소위 아트록이라고도 불리곤 하는 70년대식 프로그레시브 록을 의식한달까 리스펙한달까... 아무튼 그런 요소들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것들에 21세기 헤비 뮤직의 성과를 흡수시켜서 한 30배는 더 현대화한 느낌이다.

7년 전 곡이라고 하는데 간만에 정말 충격적으로 즐거운 청취 경험이었음.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이 많이 있는지 아니면 이 곡이 유니크한 건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스타일이고 대단히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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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 일요일

수완사회: 소비자 보호의 상업윤리

최근에 '수완사회'라는 키워드로 한국 사회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해 보고 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시스템의 가치가 다소간에 낮게 평가되거나, 혹은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더라도 실제로는 작동을 못 하고 유명무실화되어 있는 상황이 많다고 생각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완'을 검색해 보면 '일을 꾸미거나 치러 나가는 재간'이라고 해설되어 있다. 위와 같이 시스템이 부재한 영역에서, 이러한 인간적인 '수완'이 여전히 고평가되며 또한 실제로도 무척 중요한 면이 많은 듯하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은 이런 '수완사회'의 면모가 비교적 덜한 사회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 보고 듣고 생활하는 나라에 대해 굳이 다른 나라와의 상대적 비교를 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야기해 보는 것이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잘 작동하는 시스템 뒤에도 사실은 언제나 '사람'들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잘 작동하는 시스템 뒤에 사람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과,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서 개인과 개인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수완사회'의 대표적인 단면은 바로 상업 부문에서 나타난다. 나는 정해진 금액을 내면 정해진 물건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현대 상업사회에서 소비자들이 누릴 수 있는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러한 기본적인 상업윤리(?)에 대한 신뢰를 잃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 업종들에서 암묵적으로 돈을 추가로 받거나, 고객들한테 단순히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성들인 편지 내지는 선물을 받는 것, 혹은 공간에서 지켜야 하는 행동과 관련된 과도한 규칙들을 관행처럼 만들어 둔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많이 들려서 그렇다.

특히 (1)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며 콘셉트가 선명한 소규모의 공간 (식당, 카페 등) 이나, (2) 이사, 미용, 웨딩, 촬영 및 각종 이벤트 관련 업계 쪽에서 그런 현상들이 많은 것 같다.


(1)의 경우 한때 꽤 화제였던 레터링케이크 가게 운영방침 관련 갈등들도 어찌보면 이것의 연장선일 수 있다. 또한 극히 최근에는 일부 식당들을 시작으로 북미의 팁 문화를 한국에 이식해 오려는 게 아니냐는 논쟁이 생겨 언론에 보도까지 되기도 했다.

이런 게 요즘 실제로 많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는데 요새 나한테 많이 들릴 뿐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대중의 구매력 및 소비 욕구가 높아지면서 소비형태가 변화하고, 또한 소셜 미디어를 통한 홍보효과가 커진 상황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 아닐까 한다. 사장님들이 공간과 고객경험을 독창적으로 디자인하는 데에 갈수록 수고를 많이 들이게 되고, 그에 따른 충분히 많은 금전적 보상과 인간적인 존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왕이면 가게에서 원하는 공간의 콘셉트나, 업무의 편의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규칙들을 기본적으로 고객들이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걸 존중하며 지키는 것을 참 재미있고 예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왕이면 돈만 내면 기분을 상하게 해도 된다는 태도 대신, 가게에서 일하는 분들이 직업적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좋은 고객이 되자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중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가게 입장에서 보편적인 고객이 지키기 힘든 규칙들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사람 가려 가며' 서비스나 가격을 달리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례들도 실제로 존재하다 보니, 일괄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보다는 매 경우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애매한 영역들이 생기는 듯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게들에서는 사실 가게 측의 문제보다는, 손님들의 각종 갑질과 민원이 훨씬 많고 심각한 문제이기는 할 테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는 잘 없는 것 같다. 이상적으로는 두 문제는 경합하는 관계가 아니고, 둘 다 해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돈만 내면 다 된다, 혹은 돈을 못 내겠다 하는 갑질 고객들이 워낙 많다 보니, '고객이 잘못한 거다 vs 사장이 잘못한 거다'로 싸우는 상황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또한 더 크게 보면, 공론장(?)의 자원도 한정되어 있고 그 안에서 어떤 논점이 얼만큼의 비중으로 형성되느냐도 중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두 문제가 경합하는 양상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해 두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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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위 (2)의 경우, 즉 이사, 미용, 웨딩 및 각종 이벤트 관련 부문에서 대금 지불을 깔끔하지 않게 하는 구조가 생기는 것에 대해 다루어 보자. 사실 이쪽은 (1)의 경우보다 여파가 더 심각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오가는 금액의 액수가 훨씬 크기도 하고, 서비스의 질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웨딩 준비에 관여되는 여러 부문의 사람들이 수고비나 식사비 등의 명목으로 사전에 예고되지 않은 추가 현금 입금을 요구하는 경우, 혹은 요구하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금액이 아니라, 손으로 예쁘게 꾸민 편지를 쓰는 것이 암묵적 관행으로 자리잡아 있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최근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한 홍보와 결합해서 썩 놀라운 사례도 보았다. 고객님들이 비싼 선물을 가지고 오셨다며 인스타그램에 고급 간식 사진 같은 것을 올린다. 그러면 고객들은 관행인가보다 하면서 그런 선물들을 가지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처음에 올린 사진은 실제 고객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도용한 사진이다. 이런 식으로 '대접받는' 구조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밴드 활동을 하다 보니 미용, 의상, 촬영 등 여러 사람들이 단계별로 관여되는 일에서의 대금 지불을 수차례 해봤었다. 반면에 개인적인 성격상 업계의 여러 암묵적 관행들은 잘 파악하고 대처를 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듣고 나니,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받기 딱 좋겠다, 혹은 그동안 그런 일이 이미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내가 서비스를 받는 입장임에도 암묵지를 캐치하고 인간적인 수완을 발휘해야만 적당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들이 많다면, 구매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피곤하고 솔직히 공포감(?)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런 구조가 생기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프로세스에 워낙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단계적으로 관여를 하는데 그 사람들이 각자 돈을 받아가야 하다 보니, 사전에 정확한 금액을 얘기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일의 난이도도 높다: 고객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매번 다르게 해야 하고, 한나절 넘게 함께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정해진 공간이 아니라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잘 정의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고객과의 밀접한 소통이 필요하고, 또한 단순 금전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적인 감사 표현도 아무래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여기서 돈만 내면 됐지 하는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상당히 인간미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고객들도 아무래도 특별한 순간을 위한 거니까 조금 무리하다 싶은 요구를 받아도 좋게좋게 하자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일이 돌아가는 구조가 너무 복잡하다 보니 일일이 따지기 어려운 상황들도 있을테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미리 얘기해서 정확하게 표시된 가격으로 지불을 해야지, 암묵적으로 추가금을 받는게 당연시되는 건 전혀 좋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돈과 별개의 감사 표현도 각자가 진심으로 하면 되지, 이상하게 관행처럼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 역시 참 별로인 것 같다.

약간 별개의 얘기일 수도 있지만, 가격 자체에서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최근에 보도된 것으로는, 산후조리원을 이용할 때 국가에서 100만원을 지원하기로 하자, 산후조리원들에서 일괄적으로 금액을 100만원씩 올렸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자본주의라고 해도 이러한 행태는 제대로 된 가격의 결정방식이 아니므로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고, 국가와 국민을 조롱하는 행태이므로 규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그래도 사람들이 결혼, 출산, 육아 등에 시간적, 금전적 부담을 무척 많이 느끼는데, 이러한 부문들에서 사람들이 소비자 단체 같은 거라도 만들면 어떨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객들이 철저한 개인으로서 직접 복잡한 대금지불을 파악하고 감당하는 일이 줄어들게끔, 또한 무리한 요구가 오가는 일을 줄어들게끔 해서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업체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일이 현대화, 시스템화 되고 신뢰를 받는 셈이므로 장기적으로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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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필자의 관점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 상업, 특히 서비스업에서 '수완'이 발휘될 여지를 줄이고 시스템적으로만 하자는 주장, 그리고 소비자에 대한 보호 요구가 과도해진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얘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가격과 서비스가 표준화되어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상업거래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철저한 불확실성 속에서의 흥정에 있다. 또한 유통의 말단에 있는 일반 소비자 레벨에서 잘 표준화된 소매를 제외하면, 지금 현재도 수많은 야생(?)의 흥정과 인간적 수완에 의해 전 세계 상업과 무역의 많은 부분이 작동하긴 할 것이다 (나도 사고 싶은 옷 같은 걸 찾아서 사느라 그런 걸 아주 약간은 해 봤다).

그러나 뭔가 대단히 특별한 상품 내지는 한정된 서비스를 거래하거나 아예 직업상 상업 자체에 깊게 관여하는 게 아닌, 비교적 보편적인 범주의 소비 (이사, 웨딩 등 일회적인 것도 포함) 를 할 때까지 소비자들이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다. 현대사회의 등장이란 결국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과 집단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완화하는 과정이니까 말이다. 만약에 그것들이 보편적인 소비가 아니므로 표준화와 보호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더욱더 사람들이 꺼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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