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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7일 일요일
다원예술 프로젝트 <다이빙 미러> 쇼케이스 '비전이 공간이 될 때' 후기 및 발제문
2023년 12월 13일 수요일
[음악 추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예찬
1994년에 발매되어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도입부만큼 세련된 것이 또 있을까?
이 곡의 도입부에서는 스크래치의 역할이 단순한 보조적인 효과음 이상으로 중요한데, 쓰래쉬한 헤비메탈 기타 사운드가 자칫 실제 속도에 비해서도 곡을 더 무겁고 둠하다고 느끼게 할수 있으며 리프 자체도 단순함에도, 여기에 턴테이블 스크래치가 적절하게 더해져서 무척이나 감각적이고 댄서블하게 느껴지는 듯.
특히 첫 보컬 '됐어~' 들어가기 직전의 5초 정도에 스크래치 들어간 질감이 너무 세련되어 있고, 100번 들어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 이 구체적인 질감은 라이브 공연 무대에는 잘 없고 원곡 음원 버전에만 있어서, 계속 원곡 음원을 찾아 듣게 된다.
랩댄스뮤직과 헤비메탈 기타리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하는 전작의 타이틀곡 '하여가' (1993) 와 비교해 보자면, 곡의 전반적인 컨셉의 혁신성은 하여가가 더 뛰어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구성이나 디테일이 정리가 조금 덜 된 느낌이 드는 하여가에 비해서 세부적인 터치의 센스는 교실이데아가 들을수록 탁월한 듯.
가사 면에서도 하여가는 재밌는 부분들이 있지만 주제의식 자체는 비교적 평범한 데 비해, 교실 이데아는 교육문제에 대한 노골적인 (그러면서도 분노를 과격한 감정으로 표출하지는 않는) 비판이라는 점에서 당대에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맨처음 드럼 필인 들어가기 전에도 짧은 비트박스(?) 같은 게 나오는데 이 부분부터 범상치 않은 곡임을 알 수 있다.
2023년 12월 6일 수요일
뮤지션 김민기에 대한 몇몇 이야기
어머니가 잊을만하면 얘기해 주시는 재미있는 일화인데, 옛날에 어느 자리에 갔는데 너무나 익숙하지만 누군지 생각이 안 나는 사람이 앉아 있더란다.
그래서 주저하던 끝에 혹시 저 아시지 않냐고, 누구셨더라 하고 물어봤는데 그분이 허허 웃으시더니 아마 무대에서 보셨을 거라고... 알고보니까 가수 김민기였다고 한다. 내 기억이 확실친 않은데, 아마 옷을 굉장히 멋있게 입었다고 하셨던 것 같다.
아마 유명인들은 이런 일화가 워낙 많을 것 같다. 혹시 TV에 나오는 분 아니냐는 질문은 물론이거니와, 그럴 거라고 생각 못한 나머지 질문하는 본인이 아는 사람 아니냐는 질문들까지 말이다.
사실 나도 몇 년 전에 우연히 본 어떤 분이 얼굴이 너무나 익숙한데 누군지 기억이 안나 나서, 어릴때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셨나? 막 이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신태용 축구 감독이었던 적이 있다. 안 물어보길 다행이었다.
김민기는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비롯해서 감동적이고 벅찬 분위기의 곡도 많이 썼지만 그의 노래극 중에서는 위트가 담긴 풍자적 가사도 많은데 그 중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깊고 재미있는 건 <공장의 불빛>의 한 수록곡에 나오는 다음의 가사다.
"사장님네 강아지는 감기 걸려서 포니 타고 병원까지 가신다는데 / 우리들은 타이밍 약 사다 먹고요 시다 신세 면할 날만 기다리누나"
실로 재치있으면서도 씁쓸한 가사가 아닐 수 없다.
2023년 12월 5일 화요일
다원예술 프로젝트 <다이빙 미러> 쇼케이스 '비전이 공간이 될 때' 홍보
2023년 다원예술창작지원사업 <다이빙 미러> 프로젝트에서 이번주 일요일에 쇼케이스를 합니다.
<다이빙 미러>는 영상매체 작업에 컴퓨터비전 기법을 도입한 다원예술 프로젝트로 저는 지난 10월 초부터 참여하였는데, 주말을 활용하여 2회의 디스커션, 그리고 1회의 내부 상영회(사전미팅)을 거쳐 '기술 미학'이라는 키워드로 쇼케이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늦게 합류한 관계로 준비 기간이 짧기도 했거니와 AI 현업에도, 미학분야에도 내세울만한 전문성은 없다보니 훌륭한 분들 사이에 참여해도 될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AI에 대한 약간의 수학적/물리학적 이해와 더불어, AI가 개입되는 새로운 예술형식에서 발생하는 매체미학적 쟁점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견해를 재미있게 봐 주셔서 그런 내용들에 대해 짧은 발표를 해 보고자 합니다.
행사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네오룩neolook에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클릭하여 네오룩neolook 링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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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승욕구는 평등이 아닌 계급주의를 향해 있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대체로 상승욕구가 굉장히 강하며, 이것과 발맞추어서 실제적인 경제적/문화적 계급 고착화도 여지껏 비교적 덜하게 유지되어 왔다고 흔히 얘기한다.
이러한 특징이 개인과 국가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고 발전할 거라는 믿음과 결합하여 '역동성'으로 작용하면서 (심지어 산업 및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정치 발전에 있어서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상승욕구의 근원을 따져봤을때 그것이 평등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로 철저한 계급적 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즉
2023년 11월 26일 일요일
노이즈 - 상상속의 너 (1995) 에 얽힌 신기한 이야기
노이즈의 <상상속의 너>(1995)는 신나는 리듬과 인트로의 뚝뚝 끊기는 듯한 독특한 효과음, 그리고 무척 시원시원한 보컬로 잘 알려진 댄스음악이다. 96년생인 내 입장으로서는 90년대 댄스곡들 중에 제목까지 확실히는 모르더라도 들으면 무조건 아는 곡들이 여럿 있는데 이 곡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곡이 아르헨티나에서 1999-2002년 동안 방영된 유명 코미디 쇼 프로그램 'todo x 2 pesos'의 오프닝 장면에 통째로 쓰여서 (유튜브에 찾아보면 방송 중간중간 전환 장면 등에도 조금씩 나온다) 아르헨티나의 중장년 세대들에게는 매우 귀에 익은 곡이라고 한다 (실제 당시 아르헨티나 방송에 삽입된 영상: 링크).
시원시원하면서 뭔가 재치있는 느낌이 이런 프로그램과 꽤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 중에 한국계가 있어서 이 곡을 알고 삽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축구스타 메시도 아는 곡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고 그냥 하는 얘기인 듯하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해서 말 그대로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이 여전히 추억삼고 있고, 무슨 곡인지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노이즈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하는 걸 보니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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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7일 화요일
힘든 청년들을 대하는 기성세대의 시각: 위로(慰勞)에서 조롱으로의 전환?
요즈음 40~50대들이 많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나 sns에 우연히 들어가보면, 어린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 혹은 반동을 지엄하게 비판하면서, '우리는 인구도 많고 돈도 많고 똑똑하며 실력적으로도 프로페셔널한데, 너희는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부족하므로 성장해서도 우리를 이길수 없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글들이 꽤 인기있는 레퍼토리를 차지하고 있다. Facebook 유명인들의 덧글창에서도 많이 보인다.
그런 글들에서는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 확정적인 현재의 청년 세대를 상당히 불쌍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심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자신들과 같은 세대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고 결속력을 제공하면서, 우연히 그 글을 읽게 된 청년 세대들을 열받게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능이 없다.
이렇게 감정 유발 외에 별다른 기능이 없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지 못하는, 게다가 동정과 비난이 애매하게 섞여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인터넷 게시물 레퍼토리들 여럿이 대단히 의미있는 담론처럼 유통되는 것을 보면 나는 굉장히 괴상하다고 느낀다. 그 이름조차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소위 설거지론 역시 (공격의 구도는 이 글의 예시와 반대 양상이지만) 그 대표적인 예시다.
예전에는 현재의 청년세대가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될 것이라는 데 대한 확고한 인식이 지금처럼 널리 자리잡고 부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에게 '너희들이 힘든 것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혹은 '청년들에게 힘든 사회를 물려주어서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식으로 연대 의식을 드러내는 정서가 꽤 많이 보였는데... 글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은 레퍼토리의 유행, 위로(慰勞)에서 조롱으로의 전환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순전히 통시적인 것 같지는 않고 비중의 문제이지, 언제나 공존해 왔을 것 같기는 하다.
원전 해체산업 주장이나 러-우 전쟁 우크라이나 무능론/책임론 등 다른 맥락에서 이미 몇번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무척 공격적인 말들이나 지극히 어색한 주장도, 본인이 신뢰하는 스피커들에 의해 유통되면서 자신이 불편감을 느끼는 부분을 시원하게 설명해 준다면 '저렇게 말해도 되나보다' 하면서 합리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정보버블이 깨질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런 말들을 계속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위와 같은 종류의 글들의 유행도 이러한 경향의 한 예시라는 생각이 든다.
2023년 11월 2일 목요일
기계의 표현과 내 생각을 정렬하는 포스트휴먼적 체험
내가 아무렇게나 그렸던 그림이 그려 놓고 보니 테리어몬이랑 다루마를 섞은 것처럼 생겼다고 써 놓은 게 과거의 오늘에 뜨길래 (그림 1), 아예 테리어몬과 다루마를 섞은 걸 그려 달라고 무료 AI그림 웹사이트에 세심하게 프롬프트를 넣어 보았다.
당연히 꽤 잘 해 주며 (그림 2), 이것들을 내 그림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듯하다. 섞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실제로 그림 1과 비슷한 느낌이 조금씩 엿보이는 걸 봐서, 영 잘못 짚은 건 아닌 것 같아서 공연히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기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할 때, 즉 기계의 표현과 자신의 생각을 발맞춰 갈 때 사람들이 종종 느끼는 이런 뿌듯함 또한 일종의 포스트휴먼적인(?) 정서로서 인문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닐까 한다.
2021년 12월에 VQGAN+CLIP 기반의 text-to-image generation을 처음 제대로 접하고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림 1에서 두 대상을 섞는다는 생각을 포스팅한 게 그 바로 직전쯤인 것 또한 흥미롭다. 그 직전만 해도 이런 걸 기계가 근시일 내에 정말로 잘 해 줄 거라고는 생각을 잘 못 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이런 생각의 경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쓸만한 생성 ai가 나왔을 때도 서로 전혀 다른 두 대상 사이의 interpolation을 시켜 보면서 내부 표현공간을 탐색해 보는 관심사를 가장 우선적으로 갖게 되었던 게 아닐까 한다.
지금도 딥러닝의 부상은 곧 '의미 엔지니어링'의 대두와 매우 밀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차원 공간상에 임베딩된 피쳐들 혹은 표현들을 조합하는 의미 기계의 출현 말이다.
[음악 추천] john0 - Rebell10n 1n neVeRland
아티스트 겸 프로듀서 john0의 정규앨범 Rebell10n 1n neVeRland가 발매되었습니다. 메탈코어 계열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고 국내 음원 사이트 및 Spotify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3번 트랙 und1SPuTed에 기타솔로 라인작업 및 녹음으로 작게 참여를 했습니다.
2023년 11월 1일 수요일
매끄러운 설명을 경계하고 입체성을 직시하자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2)
매끄러운 설명의 요구를 경계하고 사태의 입체성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 회자되는 사기 사건은 결국 전청조라는 사람이 남현희 감독과 그 가족들을 작정하고 헤집어 놓으면서 사기를 친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가족들끼리, 혹은 가족을 넘어 펜싱업계 사람들끼리 서로간에 이간질에 의한 갈등이 일어나고, 서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고 이런 것은 마이너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잘못이 전혀 없다는게 아니지만, 판을 짠 것에 말려들어서 그렇게 된 거면 당연히 제일원인은 전청조한테 있는 것 아닌가.
판단력이 흐려졌고, 계속 의심까지 했음에도 빠져나갈 계기와 용기도 부족했고, 그러면서 주변에 피해를 끼쳤고 이런 것들은 잘잘못을 가려야겠지만, 사기사건이라는 본질을 흐려 놓는 가해자의 몇마디 언사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연락도 통제하고 주변 환경까지 통제해 가며 작정하고 달려든 사기꾼한테 말려든 사람의 심리는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의심되긴 했다고 하면서도 결혼이라는 엄청 큰 선택까지 한 것이 밖에서 보면 너무 이해가 안될거고 나 역시도 그렇지만, 의심을 불식시키는 근거를 계속 제공함과 동시에 물질적 유혹과 인간적으로 조종, 통제하는 능력을 발휘하면 그 안에서 의아함을 갖더라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다.
2023년 10월 31일 화요일
[도서 소개]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 - 다슌 왕,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우리 비평형 통계물리 분야의 옆집인 복잡계 물리학 분야에서 이번에 교양서 번역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공유해 봅니다.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 다슌 왕,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이은, 노다해 옮김, 도서출판 이김(2023).
도서 링크 (교보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0778375
<과학의 과학(Science of science)>은 이 책의 제목이면서, 저자인 Dashun Wang이 연구하는 '분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과학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광의의 메타과학 내지는 과학학으로서 과학인문학(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사회학)과 공통점이 많이 있으나, 과학 활동을 분석하기 위해서 인문사회학이 아니라 네트워크 과학을 필두로 한 복잡계 과학 및 데이터 사이언스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인문학과도 방법론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습니다.
h-index 등을 비롯한 과학 연구 실적지표를 제안하고 개발하는 '과학계량학(scientometrics)'과는 어떤 관계일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미래지향적 연금제도를 바란다: 국가 체질변화의 총체적 과도기를 앞두고
연금개혁은 하기는 해야 한다. 방향성을 전문가들이 잘 정하긴 하겠지만 꼭 지켜져야 할 것이 있는데, 미래 세대까지 실제로 수혜를 잘 입을 수 있는 쪽으로 개혁이 되어야 할 테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할 얘기가 없으니 나랏일(?) 얘기를 자연스레 하게 될 때가 있는데, 얘기해 보면 국민연금을 개혁하지 않는 이상 딱 우리 세대쯤부터 국민연금을 내기만 하고 노후에 못 받지 않냐고, 너무 아까운거 같다고 기정 사실화된 분위기가 있다. 이는 근거 없이 팽배한 불신이 아니고 심지어 국민연금 측에서도 공식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금제도는 나라가 다 책임을 지고 운용하는 건데 설마 고갈이 되겠냐고, 그럴 일은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앞으로 인구문제와 지방소멸, 산업경쟁력 상실을 포함해서 국가 성장이 총체적으로 꺾이게 될,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총체적 과도기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주장인 듯하다.
여러가지 커다란 문제를 애매하게 타협적으로 끌고 가지 말고, 인식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조기에 확실하게 방향을 정해서 개혁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이민정책이나 가족제도 같은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못하면 나라에 하나둘씩 구멍이 날 수 있고, 또 그게 이미 예정되어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아무튼 국민연금이라는 것에 대해 좀 알아보니, 국민들한테 믿음을 주고 가입률을 높게 유지해야 실제로 나중에도 다들 잘 받을 수 있고, 다들 못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입률이 떨어지면 실제로도 받기 어렵게 되는 구조가 있는 것 같다. 물론 표준에 가깝게 받아들여지는 노동의 형태이며 실제 생산가능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근로소득자의 경우 애초에 의무가입이기도 하니, 여건 변화에 따라 납부율과 소득대체율을 잘 조절하는 지혜가 훨씬 중요하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지속가능하게 유지가 된다면야 내가 지금 내는 돈을 내가 미래에 받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가 낸 돈은 윗세대에 가고 나는 미래 세대가 낸 돈으로 수혜를 입는 구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한다면 연금제도가 대체로 잘 작동할 것이므로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데, 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들면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정말 커지게 된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나라가 마주하고 있는 망국적 저출생에 의한 인구 감소가 크리티컬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이다.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심리 해킹을 경계하라 - 전청조 사기 사건을 보며 (1)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대인관계에서 감정 소모와는 별개로 정신세계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건드려질 일은 잘 없고, 설령 건드리더라도 거기에는 피차 아주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불완전하고 얕은 면모와, 심연같고 신비로운 면모를 다들 피차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테다.
근데 만약에 그리 친밀하지 않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런 내밀한 부분이 사정없이 건드려지는 느낌이 든다면, 혹은 지나치게 고양되거나 푹 빠지는 기분이 든다면 (상대방이 의도했든 아니든) 사실은 상당히 무례한 일을 당하고 있는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대화를 통해 뭔가 인간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 특별한 시각을 체험했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런걸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잘 디자인된 허풍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설령 진짜로 우리네 심리구조의 어떤 의미있는 영역을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사람 사이에서 그게 굳이 끄집어내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며... 만약 그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기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례한 악취미라고 생각해 버려도 크게 나쁠 게 없는 듯.
꼭 의도하지 않더라도, 대화하는 질감이 남들과 약간 다른 사람들이 있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뭔가 남다르고 깊은 게 있다거나, 상대방을 꿰뚫어본다는 느낌을 주기가 쉽고, 말을 하는 본인까지 이것을 자각해서 활용하다 보면 위처럼 안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렇게 언변이 지나치게 좋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막연한)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발언이나 그럴듯한 거짓말 같은 걸 일삼는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해킹하기에 용이하게끔 타고난, 혹은 어디서 배운 몇가지 스킬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적인 사기를 기획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도 결국 믿음의 영역을 건드려서 해킹하는 것이다 보니 사이비종교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일테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을 꿰뚫어볼줄 아는 것'이나, '사람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식의 말들을 확실한 컨텐츠 없이 모호하게 강조하면서 중요시하는 사람들, 혹은 인간의 내밀한 심리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타인한테든 자신한테든 그러한 영역을 심오한 것인 양 뜯어보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거나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바로 그러한 관심사 때문에 사기나 컬트에 매우 취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그런 영역까지 건드릴 일이 없다는걸 기억하고, 사적으로 잘 관리하면서 자기 할 일을 잘 하면 되는 것 같다. 사적이라는 게 꼭 혼자 힘으로 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건 공부든 예술이든 체육이든 자기 할일을 잘 하는 능력과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나이를 먹다 보면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 혹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과 지내면서 물러지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잘 파고드는 사람을 주변에 계속 두고 있다 보면 하나둘씩 그리 권할 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되는 듯하다.
근데 그러면서도 자기 하는 일의 영역에서는 변함없이 멀쩡하게 잘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남들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혹은 알아채더라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도 하고... 참 어려운 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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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음악 지휘 행위의 흥미로운 점: 비언어적으로 명령화되는 동작적 계기로서
예술활동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요체를 이루는 감각에 대한 기본적 체험조차 해 보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인 것 같다.
물론 지휘라는 것이 오직 지휘현장에서의 손의 움직임만으로 환원되는 건 아니고,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감독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곡 해석을 바탕으로 평소에 단원들과 연습하고 교감하는 것이 아주 많이 작용할테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연 현장에서의 지휘행위에 일단 집중해보기로 한다.
위계 하에서의 협동으로 진행되는 예술활동은 물론 지휘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지휘의 경우는 신체의 동작적 계기와 그 연속적 질감이 단원들에 대한 명령으로서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해서, 단원들에게 언어 이전에 감각의 레벨에서 수용되고, 그 결과가 '연주'라고 하는 피드백 겸 예술실현의 결과로 시시각각 돌아오는데, 이는 다른 예술활동에는 잘 없는 요소인 듯하다.
그 이전에, 이미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들이 누군가의 지휘를 받기 위해 굳이 같은 시공간에 모여야 하는데, 실제 음악경력을 바탕으로 지휘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럴 일 자체가 없기도 하다. 지휘라는 기회는 이만큼 주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에서의 행동 중에 그나마 지휘와 연관될 수 있는 계기를 굳이 찾아보자면, 다름이 아니라 음악을 청취하면서 박자에 맞게 손과 발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흔드는 등의 행동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행동들, 혹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싶게 되는 심적 경향을 '동작적 계기'라고 부를 수 있겠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경우는 대체로 누구나 예측 가능하게 레귤러한 박자로 연주를 이어가지만, 가끔가다가 그러지 않고 점점 빨라지거나 느려질 때, 혹은 갑자기 연주를 중단하거나('잡는다'고 종종 표현됨), 모든 악기가 다같이 한번에 긁어서 청자의 집중을 유도할('깬다'고 종종 표현됨) 때, 그 곡에 대해 청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해석을 바탕으로 그 순간을 올바르게 '맞추게' 되면, 특히 그것을 동작적 계기와 성공적으로 연결짓게 되면 이는 청자에게 상당한 쾌감을 유발하게 된다. 물론 레귤러한 박자에 맞게 신체를 움직이는 것 자체도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작적 계기가 오케스트라 지휘에 있어서도 기초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다만 지휘는 위의 예시와 달리, 청자와는 무관하게 이미 잘 연주되고 있는 곡을 동작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서, 이미 대략적인 얼개가 정해진 연주들에 동작적 계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개입해서 세부적 질감을 조직해 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게 지휘 행위와 비슷한 일을 해 볼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위의 모든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
기술매체의 발전에 따라, 이렇게 지휘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체험해볼수 있는 반응형 컨텐츠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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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 일요일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 맛집 'Radio Cafe'에 얽힌 역사적, 정치적 이야깃거리
크라쿠프의 야기에우워 대학(Jagiellonian University,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움 "36th Marian Smoluchowski Symposium"에 참여하기 위해 다녀온 이번 폴란드 출장에서,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단순히 출국 항공편 때문에 들른 거라 저녁에 딱 한 끼 먹을 시간만 있었다. 그런데 바르샤바 중앙역 앞에서 랩 동료가 우연히 찾아서 함께 들어간 식당 'Radio Cafe'가 상당히 역사적, 정치적인 이야깃거리가 많은 장소였다. 이 식당이 국내 인터넷에서 바르샤바 맛집으로는 나름 유명함에도,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는 인터넷상에 한국어로 소개된 자료가 거의 없는 것 같아 한번 소개해 본다.
이 식당은 바르샤바 중앙역 역전앞에서 큰길을 건너면 바로 있는데,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달리 우리가 앉은 자리 옆에 푸틴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길래 범상치 않은 식당이구나, 그리고 폴란드 사람들도 현재의 러시아를 커다란 위협으로 느끼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기 전에 잠깐 건네주는 읽을거리를 보니 이 식당에는 과연 그럴 만한, 그러나 일반론을 넘어선 훨씬 구체적인 배경이 있었다.
RFE(Radio Free Europe)이라고 해서 마치 한국의 대북방송처럼, 서구권 국가들이 냉전시기에 동구권에 송출했던 선전 방송이 있는데, 우리가 들른 식당 Radio Cafe가 다름이 아니라 RFE의 전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폴란드에서 나중에 대통령을 하게 되는 레흐 바웬사도 이 RFE를 들으면서 국제적 대립과 동구권이 놓인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기자를 하실 적에 젊은 시절의 바웬사와 직접 인터뷰를 하셨다고 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때쯤이 아닐까 한다).
이 식당은 바르샤바의 대학생들과, 최근에 이주해온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주로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RFE 직원들이라는 배경에 의해 형성된 그들의 사회적, 국제정치적 신념을 실천하는 나름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진의 일러스트에서도 보이듯이,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우리가 뚫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2023년 9월 24일 일요일
[음악 추천] Native Construct - 'Mute'
최근에 스포티파이를 시작한 이후로 좋은 곡들을 자동으로 추천받아서 듣고 있다. 특히 해외에 많다 보니 정보를 잘 찾아보기 어려운 프로그레시브 메탈/재즈퓨전 밴드들을 스포티파이가 잘 추천해 준다.
그런데 오늘은 Native construct의 Mute라는 굉장히 독특한 곡을 알게 되었다 (Youtube 링크: Native Construct - Mute (OFFICIAL VIDEO)). 이걸 듣고나니 다른 좋은 추천곡들이 다 심심해져 버렸다.
이 곡은 처음에는 거의 심포닉 블랙메탈을 연상케 하는 스트링을 얹은 블라스트비트로 시작하더니 (단 이때도 선율은 꽤 복잡하게 쓰고 있음) 갑자기 뮤지컬(!?) 내지는 디즈니영화(?!) 같은 부분이 나오고.... 그런데 이게 흉내만 낸 게 아니라, 노래-연기의 '대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반주 자체가 시시각각 바뀌어 주는 뮤지컬 특유의 편곡을 아주 잘 살렸다.
그 다음에는 좀더 프록메탈/재즈퓨전에서 많이 들리는, 지극히 차분하고 정제되어 있는 정교하고 복잡다단한 연주가 한동안 진행이 된다. 그러면서도 뮤지컬스러운 스트링 등을 조금씩은 계속 가지고 가다가... 그런 요소가 점점 고조되면서 앞에 나온 모든 스타일들이 종합되는 클라이막스로 곡이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각각 별개의 곡을 붙여둔것처럼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메탈의 범주 내에서 잘 통합되어 어우러지면서 비교적 무리없이 한 곡처럼 들리게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프록메탈/재즈퓨전 음악들은 너무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는 나머지 나머지 그 음악적 성취에 비해 너무 편하게 흘러가듯이 듣게 되어서, 각 잡고 듣지 않는 한 곡에 집중을 잘 못 하게 되는 점이 있는데.. 이 곡은 오히려 인간적인 요소들을 많이 복귀시켜서 매 순간 재미있게 들을 수 있게끔 하는 듯.
전반적으로 소위 아트록이라고도 불리곤 하는 70년대식 프로그레시브 록을 의식한달까 리스펙한달까... 아무튼 그런 요소들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것들에 21세기 헤비 뮤직의 성과를 흡수시켜서 한 30배는 더 현대화한 느낌이다.
7년 전 곡이라고 하는데 간만에 정말 충격적으로 즐거운 청취 경험이었음.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이 많이 있는지 아니면 이 곡이 유니크한 건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스타일이고 대단히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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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 일요일
수완사회: 소비자 보호의 상업윤리
최근에 '수완사회'라는 키워드로 한국 사회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해 보고 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시스템의 가치가 다소간에 낮게 평가되거나, 혹은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더라도 실제로는 작동을 못 하고 유명무실화되어 있는 상황이 많다고 생각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완'을 검색해 보면 '일을 꾸미거나 치러 나가는 재간'이라고 해설되어 있다. 위와 같이 시스템이 부재한 영역에서, 이러한 인간적인 '수완'이 여전히 고평가되며 또한 실제로도 무척 중요한 면이 많은 듯하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은 이런 '수완사회'의 면모가 비교적 덜한 사회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 보고 듣고 생활하는 나라에 대해 굳이 다른 나라와의 상대적 비교를 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야기해 보는 것이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잘 작동하는 시스템 뒤에도 사실은 언제나 '사람'들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잘 작동하는 시스템 뒤에 사람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과,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서 개인과 개인이 직접 충돌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수완사회'의 대표적인 단면은 바로 상업 부문에서 나타난다. 나는 정해진 금액을 내면 정해진 물건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믿음이 현대 상업사회에서 소비자들이 누릴 수 있는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러한 기본적인 상업윤리(?)에 대한 신뢰를 잃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 업종들에서 암묵적으로 돈을 추가로 받거나, 고객들한테 단순히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성들인 편지 내지는 선물을 받는 것, 혹은 공간에서 지켜야 하는 행동과 관련된 과도한 규칙들을 관행처럼 만들어 둔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많이 들려서 그렇다.
특히 (1)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며 콘셉트가 선명한 소규모의 공간 (식당, 카페 등) 이나, (2) 이사, 미용, 웨딩, 촬영 및 각종 이벤트 관련 업계 쪽에서 그런 현상들이 많은 것 같다.
(1)의 경우 한때 꽤 화제였던 레터링케이크 가게 운영방침 관련 갈등들도 어찌보면 이것의 연장선일 수 있다. 또한 극히 최근에는 일부 식당들을 시작으로 북미의 팁 문화를 한국에 이식해 오려는 게 아니냐는 논쟁이 생겨 언론에 보도까지 되기도 했다.
이런 게 요즘 실제로 많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는데 요새 나한테 많이 들릴 뿐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대중의 구매력 및 소비 욕구가 높아지면서 소비형태가 변화하고, 또한 소셜 미디어를 통한 홍보효과가 커진 상황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 아닐까 한다. 사장님들이 공간과 고객경험을 독창적으로 디자인하는 데에 갈수록 수고를 많이 들이게 되고, 그에 따른 충분히 많은 금전적 보상과 인간적인 존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왕이면 가게에서 원하는 공간의 콘셉트나, 업무의 편의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규칙들을 기본적으로 고객들이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걸 존중하며 지키는 것을 참 재미있고 예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왕이면 돈만 내면 기분을 상하게 해도 된다는 태도 대신, 가게에서 일하는 분들이 직업적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좋은 고객이 되자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중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가게 입장에서 보편적인 고객이 지키기 힘든 규칙들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사람 가려 가며' 서비스나 가격을 달리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례들도 실제로 존재하다 보니, 일괄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보다는 매 경우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애매한 영역들이 생기는 듯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게들에서는 사실 가게 측의 문제보다는, 손님들의 각종 갑질과 민원이 훨씬 많고 심각한 문제이기는 할 테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는 잘 없는 것 같다. 이상적으로는 두 문제는 경합하는 관계가 아니고, 둘 다 해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돈만 내면 다 된다, 혹은 돈을 못 내겠다 하는 갑질 고객들이 워낙 많다 보니, '고객이 잘못한 거다 vs 사장이 잘못한 거다'로 싸우는 상황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또한 더 크게 보면, 공론장(?)의 자원도 한정되어 있고 그 안에서 어떤 논점이 얼만큼의 비중으로 형성되느냐도 중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두 문제가 경합하는 양상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해 두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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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위 (2)의 경우, 즉 이사, 미용, 웨딩 및 각종 이벤트 관련 부문에서 대금 지불을 깔끔하지 않게 하는 구조가 생기는 것에 대해 다루어 보자. 사실 이쪽은 (1)의 경우보다 여파가 더 심각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오가는 금액의 액수가 훨씬 크기도 하고, 서비스의 질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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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필자의 관점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다: 상업, 특히 서비스업에서 '수완'이 발휘될 여지를 줄이고 시스템적으로만 하자는 주장, 그리고 소비자에 대한 보호 요구가 과도해진다면 그것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얘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가격과 서비스가 표준화되어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