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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4일 일요일

귀염론

<귀여움을 다루는 방식: 불화의 가능성을 전제한 일회적 사태로서>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점점 더 빈번하게 언급되며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귀여움은 흔히 아기나 반려동물이 갖는 특성, 혹은 그러한 대상들이 촉발하는 감정으로 대표하여 묘사된다. 이와 관련하여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필요한 감정이라는 등으로 진화적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많다. 

어떤 포착되는 순간들은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우리로 하여금 무해함과 그 영속성을 상정하게 한다.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BFNekjEgvuk , Thumbnail image, 2023.03.18.)


특히 오리들이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닌다는 각인(imprinting) 효과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 (Konrad Lorenz)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연원, 목적론적 설명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귀여워함이라고 불리는 어떤 심정상태가 명백히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을 위주로 다뤄본다.

귀여움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상태라기보다는 주관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다. 즉 엄밀히 말해 우리가 일관성 있게 개념화하여 주목할 수 있는 사태는 '귀여움'보다는 '귀여워함'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촉발하기에 대체로 용이한 어떤 상태나 속성들의 범주가 있기는 한 것 같고, 이를 귀여움이라고 실용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이처럼 귀여워함은 주관의 내부에 촉발되는 것이지만 상호주관성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지향한다. 즉 귀여워함은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실제로는 성립되지 않고 있는 상호주관성을 가상적으로 형성하기까지 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갖게끔 한다.

단적인 예로, 사물의 외형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귀여움을 느낄 수 있으며 이 때 사람들은 그 사물에 가상적으로 인격을 부여하여 그것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동 챗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입력에 대해 어떤 의인화하기에 용이한 반응을 보였을 때에, 그것은 때때로 귀여운데 여기서 우리는 은연중에 그 반응을 인격에 유비한다. 또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자동차의 앞모습을 사람의 얼굴 표정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러한 표정은 차종에 따라 귀엽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 등에게서 귀여움을 발견한다면 그를 실제로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인상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해당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외형, 혹은 특정한 언행 및 장면으로부터 유발되곤 한다. 가상적인 상호주관성과 그에 따른 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여움은 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귀여워하는 감정은 순전한 존중의 태도와는 꽤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귀여워하는 감정이 일으키는 가상적인 상호주관성은 '나를 해치지 않는 인격을 대할 때의 상호주관성'에 가깝고, 적절히 관리되지 않는다면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결국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나보다 미숙한 인격체에 대한 보호, 한편으로는 통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양면성에 의거하면 귀여워함의 감정은 주관으로 하여금 비인격적 대상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인간과 같이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복잡한 대상을, 오로지 무력하고 저항하지 않는 대상으로 평면화하여 조심스럽지 못하게 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예컨대 사물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생명체를 대하듯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 반면 인간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은연중에 무해함에의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될 수 있다. 인격에 대한 순전한 존중심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두려운 행동을 볼 때에도 그 행동이 정당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후에도 반드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반면, 귀여워하는 감정은 대상이 우리의 기대를 위반하면서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시켜 줄 때에 실망을 안기면서 비교적 쉽게 사라지므로 순전한 존중과 다르다.

따라서, 귀여움의 감정만을 관계 형성의 동기로 삼는 것은 일방적이며 아슬아슬하다. 그러한 관계에서 기대가 위반되었을 때 발생하는 실망의 감정이 일차적으로는 상대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일방적으로 가졌던 기대 때문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귀여움에 대한 기대가 위반되며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상황은 그러한 점검의 계기가 된다. 물론 기대를 위반한 상대방의 행동 자체가 적절치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 상술한 점검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귀여워하는 감정을 꺼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간에 의젓한 태도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일회적으로 수립되는 귀여움은 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며 나도 그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개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충만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양쪽 모두 불만을 갖지 않는 귀여움은 인간관계의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빈번할 수는 있을지언정) 본질상 일회적인 것이므로 나중에 돌아볼 때 오글거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하겠다.

만약 귀여움 또한 미학의 대상으로서 미적 범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이러한 일회성은 사실 꽤 자연스럽다. 무언가가 귀엽다는 판단은 취미판단의 범주로서,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우리의 인지적 도식이 잠깐 동안 특별히 조화롭게 작동하면서 산출하는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진실이 도출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이것이 혼동된다면 상술한 것처럼 잘못된 기대로 이어진다.

또한 전형성에서 벗어난 전복적인 귀여워함은 문화적 변혁력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귀여움의 대상이 되지 않던 것에서 귀여움 촉발의 가능성이 문화적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그것을 재확인하는 효과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귀여움의 특성은 귀여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귀여운 대상의 행동을 (혹은 일반적으로 귀엽다고 여겨지는 행동의 범주들을) 종종 모방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위에서 밝힌 가상적으로 형성된 상호주관성 하에서 수행되는 일종의 역할극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역할극은 귀여움 상황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제3자를 의아하게 하거나, 드물게는 제3자까지 그 상황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러한 귀여움의 역할극만으로 고도의, 또한 여러 단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을 짓자면, 귀여움 너머에 있는 온갖 불화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그 위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인 귀여움을 조심스레 애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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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9일 화요일

취향 논쟁은 차이의 확인에 그칠 뿐이다: 고양이 애호가에 대한 비판을 보며

결국 이런 글도 '비평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고양이가 잔혹한 맹수이며 개체수 증가 시 생태계에 영향이 있는 것을 다 알면서도 귀엽다고 느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고양이 애호가들 입장에서 데미지가 전혀 없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의 표면에는 비평의 의도만 드러나 있지만, 마지막 줄에서는 고양이가 귀엽다는 세간의 판단과, (그것과 직결되지는 않는) 밥 주는 행위를 비판하는 서술이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특정한 실천적 방향을 가리키는 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고양이의 생태라는 자연 현상에 비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귀여움이라는 주관적인 취미판단을 논박하려는 시도라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총체적 비합리일 것이다. 「판단력비판」을 100회 필사 시켜야 한다.

일부 덧글은 더 문제적이다. 이견은 있겠으나, 길고양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중성화 등 개체 수 관리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협조하는 경우도 많은데, '귀여우므로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라는 단편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상을 가상적으로 설정해 두고 그것을 공격하는 건 혐오감만을 재생산하는 공허하고 악의적인 양성피드백일 테다.

결론적으로, 귀엽다는 판단 자체에 대한 반론(?)은 설득보다는 차이의 끝없는 확인에 그칠 것이며, 생태 균형 고려 없이 밥 주는 것을 줄이고자 한다면 개별 행위의 동기에 대한 비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 자체를 현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현실적, 정책적 논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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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7일 일요일

Criticism on 'All Lives Matter': 정치구호의 의미를 몰라내지 말자

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는 그 맥락이 시작된 곳에서 실질적으로 BLM에 대한 반동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모든 삶이 소중하다는 말 자체가 맞는 말이라는 이유로 일부 한국인들이 그 말을 쓰겠다는 것은 정치적 구호의 의미가 사전적, 원론적인 의미 바깥에서 획득되는 사회적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정당화될 수 없는 처사이다. 해당 구호 자체를 인종차별 철폐의 맥락으로 전유하려는 전복적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설령 그런 전복의 의도여도 마땅한 전선 위에서 이뤄져야 말이 되는데, 현재 국면에서는 뜬금없는 말일 뿐 설득이 되지 않는다), 서구에서 흑인에 대해 적대적으로 발화되는 all lives matter와 그 발화 의도가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실 이퀄리즘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것이어서, 이렇게 길게 얘기해야 할 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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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일 화요일

과학인들의 정치를 향해: 정치의 본령에 먼저 충실하자

과학인들이 정치사회적 열망을 풀어나가면서 집단적 영향력을 갖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과제이고 나도 관심이 많은데...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적 감수성과 기성 정치문법을 성실하게 훈련받지 않은 채 발언을 하려다 보니 의도와 메시지가 자연스레 전달되지 못하고, 사지 않아도 될 비웃음을 사는 일이 꽤 잦아서 유감스럽다. 합리성을 강조하며 그 가치에 자기 자신을 굉장히 이입하지만 정작 딱히 합리적이지는 않은 희극적 장면들 말이다. 발언의 영향과 사회적 의미까지 고려해서 발언하는 게 합리성 아니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정치뿐 아니라 과학의 작동원리에도 그다지 충실하지 않다. 정치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 기본에 충실해야 신뢰가 확보되고 공간이 열린다.

이미지: 사람 1명, 서 있음, 사람들, 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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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7일 수요일

인터뷰 후기: 결국 하고픈 한 마디

개강 전인 2월 말 경에 전문연구요원 지망생으로서 서울대저널 기자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정신이 없어서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가, 2건의 기사에 쓰여 나온 것을 지금에서야 봤다. 다소 중언부언했던 인터뷰였는데, 인터뷰에서 제일 하고 싶던 얘기를 잘 넣어 주셔서 감사하다.

<현재 전문연을 지망하고 있는 오용재(물리천문학부 석박사통합과정) 씨 역시 "당시 전문연에 대한 누군가의 발언이 나오면 그렇게 확정된 것처럼 기사가 나왔다"면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도만 쏟아지면서 진로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4년 가까이 지속됐다"고 말했다.>

기사 1: 밑 빠진 독에 전문연 붓기 - 전문연구요원 존폐 논란 너머의 문제들 (링크)

기사 2: 갈등과 논란 속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전문연 제도 존폐를 넘어 폭넓은 논의 필요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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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4일 금요일

정치적 의도라는 낙인에 급진적으로 맞서자

정치인에 의한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폭로를 총선 이후에 하기로 했다는 것은 존중받아야 할 결정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지 않고 당시에 폭로했다고 해도 그것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결정일 수 있었어야 할 것이다. 말들과 생각들의 묘한 지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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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1일 화요일

꿈에서의 무력한 불쾌감

내가 기억하는 꿈들은 주로 장면 없이 설정만 주어지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일상적인 꿈이거나, 아니면 서사 없이 구조화된 공간들만 나오는 꿈이다. 그 중 전자의 하나로서 종종 나오는 레파토리는 수업들 중 한 개의 존재 자체를 계속 잊어버려서 아 또못갔네.... 하는 그런 내용이다. 심지어 은근히 있을법한 일이고 뭔가 실제 학기랑 연동돼서 꿈이 계속 연결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꿈을 생각하다 보면 현실이랑 잘 분간도 안가고 마음 한구석에 슬픈 느낌이 생긴다. 해결하긴 해야 하는데 정작 계속 잊어버려서 늘 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으면서 파국을 예고하는, 무력하고 일상적인 불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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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6일 목요일

21대 총선에 대한 단상

1. 선거 제도 개편에 따른 혼란에 더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들이 많이 나와서 솔직히 말하면 의욕이 들지 않는 선거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정당투표는 결국 더불어시민당에 했다.

당에서 육성해온 인사들이 아닌, 외부 군소정당이나 시민사회 인사들에 대해서는 검증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분들을 앞쪽 순번에 배치시켜 놓은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시민당에 표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표를 주지 않아도 그 분들은 어차피 되실 분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핵융합 과학자 출신의 이경수 후보를 포함해서, 내가 좋게 봤던 뒤쪽 순번 인사들의 당선을 돕겠다는 심정으로 투표했다. 방송의 예측치를 보면 대다수가 16, 17번에서 끊길 것으로 예상하는데, 조금 더 파이팅해서 18번인 이경수 후보가 꼭 당선되면 좋겠다. 보다 진보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정당에 투표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이 문제가 내게 어쩔 수 없이 크게 다가왔다.


2. 사실 현재 주민등록된 관악갑 쪽 판세보다는, 본가 쪽 동네인 강동, 송파 쪽 민주당 여성의원들의 당선여부에 더 신경이 많이 쓰인다. 자취하기 전 지역구였던 송파병의 남인순 의원, 치과의사이자 변호사인 강남갑 전현희 의원, 명성교회 영향력 하에서도 힘들게 노력 많이 한 진선미 의원 등 좋게 봤던 의원들이 많다. 이번에도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현재 개표 상황을 보면 진선미 의원과 전현희 의원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3. 민주당과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동일시하고 동시에 적대하는 소위 청년극우의 탄생은 여전히 우려되는 점이다. 특히 국민의당 4번 후보가 당선될 경우 안티페미 청년극우의 중앙 정계 진출은 세간의 비웃음과 달리 매우 이른 시점에 이뤄지는 셈이다.

4. 내가 해 본 첫 투표는 20대 총선이었다. 비록 내가 특정 진영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난번 총학생회 선거(...)를 제외하면 '진 선거'는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굳이 따지면 '이긴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찝찝한 느낌이 있기는 하다.

결국은, 새로운 가치를 찾아 미래로 나아가는 선거보다는, 20대 총선과 박근혜 탄핵 이후 혼란상이 정리되고 힘의 구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더 강성, 퇴행적인 측면 역시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선거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우려와 다르게, 진영을 떠나 미래적인 가치가 자리잡을 공간이 생기는 4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민주당에서도 역대급으로 많은 의석을 가졌으니, 좀 여유를 가지고 그런 공간을 열어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사실 선의를 기대하는 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며, 들어 줄 수밖에 없도록 목소리를 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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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8일 수요일

시민의식을 박탈하는 엘리트교육은 귀족주의일 뿐이다

트위터에서 고소득층이지만 힘들다고 말하는 플로우가 있었다고 한다. 학원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중고등학생들인 듯한데, 학원비가 월 수백만원씩 나간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고소득층도 사실 힘들다'의 근거가 되나? 어떻게든 그럴 여건이 되니까 그렇게 보내는 것 아닌가. 차라리 세금 많이 떼어 간다는 얘기를 하면 정치적 견해로서 존중이 될 텐데, 학원에서 내용적으로 우수한 학습컨텐츠는 제공받겠지만, 그러한 환경이 학생들로 하여금 필수적인 시민적 덕목을 결여하게 하고 오히려 시야를 좁히는 면이 있는 듯하다.

돌이켜 보면 학원과 특목고를 중심으로 한 기형적 엘리트교육 환경에서 학생들이 듣는 이야기들과 서로 주고받는 얘기들이, 이런 종류의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강화시키는 면이 꽤 있었다. 특히 학부모들도 '내가 너한테 돈을 얼마나 들이는데' 류의 말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말들이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다. 동질적인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의식을 체계적으로 박탈시키는 엘리트교육은 21세기 귀족주의에 불과하다.

더 문제적인 것은 중고등학생들의 트위터뿐 아니라 서울대 대나무숲에도 이러한 종류의 개복치 글(?)이 참 많다는 사실이다. 9, 10분위 학생이 70% 이상이라고 하던데 그러한 환경과 결부지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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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4일 토요일

코로나19 시국의 교육: 과감한 선택으로 무리한 운영을 예방해야

코로나19 시국에 교육의 현장에서 종종 보이는 것은 오프라인 강의를 최대한 모방하려는 운영의 경향이다. 그러나 이는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어렵고, 여러가지 무리한 일들이 따를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이버강의의 이점을 전면적으로 살리도록 준비하기엔 이번 사태가 지나치게 급작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 강의의 운영방침은 준비 부족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라기보다는, 굳이 없었어도 될 다소 인위적인 제한사항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예로 수업시간 외에는 각종 자료(수업 영상, 강의ppt 등)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출석률과 참여도를 확보하기 위함일테다. 그러나 이는 강의를 몇 번씩이라도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사이버강의의 가장 큰 이점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물론 충분히 정제되지 않은 강의가 학생들에게 배포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사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수업시간에 해야 하는 일은 공지 전달과 질의응답 위주이므로 그 내용들을 정리해서 글로 올리는 식으로 할 예정이다). 그러나 다소 정제되지 않은 강의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것보다 학생들에게 더 낫다는 면도 분명히 있다.

또한 강의자의 얼굴이 나오도록 하는 것, 그리고 출석체크 및 집중 여부 확인을 위해 학생들의 얼굴이 나오도록 하는 것 또한 문제적이다. 학생들이 집에서 부스스한 상태로도 마음껏 수강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이버강의의 이점인데, 집에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한다는 것은 현 시국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또한 디지털 매체의 특성상 무단으로 저장 유포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것도 여러 방면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집중하는지 여부의 확인을 다른 식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뿐더러, 사이버강의에서 그걸 반드시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관건은 강의자의 수강생들에 대한 통제력이다. 그 통제력이 사이버강의에서도 현장 강의 수준으로 확보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가지고 현장 강의의 방식을 사이버강의에 억지로 이식하려다 보면 여러가지 무리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왕 사이버강의를 하게 된 바, 현장 강의와의 어쩔 수 없는 차이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매체의 이점을 살려 강의컨텐츠가 효과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자원이 많이 드는 적극적인 실험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굳이 없어도 되는 제한사항이 인위적으로 추가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편 의무교육에서 통제력 확보가 안 되는 것은 공적 책임의 측면에서 고등교육과 그 의미가 현저히 다른만큼 그 나름의 고민의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대학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이고 기존과 완전히 다른 발상이 필요할 것 같다. 개별 가정에 지나친 관리책임을 지우는 것은 공교육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깨워서 학교 보내는' 것에 준하는, 비교적 간단한 관리만으로도 의무교육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할 묘안이 없을지 궁금하다.

입시도 문제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너무 많은 게 결정되는 지금의 입시체제에는 이런 비상상황이 생겼을 때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역량이 근본적으로 없다. 사람별로 놓인 상황에 따라 유불리가 여러모로 갈리면서 엄청난 논란과 원한(?)이 발생할 것이며, 사교육이 가져 온 과도한 영향은 기존보다 더 커질 것이다.

일단 현행 체제 하에서 오래 준비해온, 입시가 임박한 학생들을 위해서는 상황에 맞게 연착륙을 시키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그리고 좀 더 장기적으로, 이번 사태처럼 변동이 조금 생기더라도 학생들이 크게 동요하거나 원한을 갖지 않을만한 튼튼한 입시제도가 필요하다.

여러모로 코로나19 사태는 비상상황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능력을 테스트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일상적인 작동방식마저 전면적으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가 매 순간 비상 체제일 수 없으므로, 재난은 그 극복 과정에서 많은 비일상성과 불편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재난에 의해 지나치게 손상되지 않는 제도라면, 대체로 일상에서도 비교적 합리적이고 스트레스를 덜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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