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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8일 토요일

남북 평화국면에서 집중하여야 할 지점은?

  거시적이고 복잡다단한 남북관계 문제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평화 선언을 넘어서, 이행 여부의 검증이 가능한 과제들을 설정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과제는 남북의 이해관계를 잘 조정하여 그것을 보편적인 가치 속에 녹여낼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정권 수뇌부 간의 서면 합의에 의한 일시적이고 기만적인 평화 상태를 넘어, 북한의 대외, 대내를 막론한 총체적인 변화를 통하여 실질적인 평화 상태가 천천하게나마 수립되기를 기원한다. 비록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전향적인 태도와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북한이 여전히 정상국가가 아니며, 선언만으로는 정상국가에 돌입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쪽도 급변사태는 원하지 않을 터이니, 합의된 국제 공조 하에 완전한 신뢰 상태도, 완전한 불신 상태도 아닌 판단중지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한 단계씩 비가역적인 변화가 이뤄지도록 주시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발표될 공동선언문의 내용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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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월요일

상징과 관념 너머: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성찰하기

  며칠 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학생회에서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논란이 발생했다.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고 진행이 강제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이 발생한 이유는, 학생회 운영위원회 내에서 사업을 진행하지 않게 된 사유로 논의된 것 중에 하나가 “국가 폭력에 부당하게 동원되는 학내 구성원을 위한 저항활동의 일부라고 하면 온전히 설득이 되는데, 1) 강제 동원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편의만을 위한 사업임에도 극히 소수만을 대상으로 함”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사유가 해당 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만 논의되고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아마 비공식적 경로로 유출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글을 쓰는 첫번째 이유는 이 사유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 운영위원회 내에서 없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극적 동의들이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이유는 이 논란에 대한 나의 비판적 평가가 내가 평소에 늘 하고 싶은 말과 맞닿은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와 사회적 규약에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매우 정확하며 중대한 사회학적 통찰이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모든 현상은 원자들의 상호작용에 불과하다’라는 말만큼이나 원론적인 말이다. 그 말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 말을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집단 사이에서는 그 말을 반복하는 것 자체로는 개별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거나, 실천적 대책이 제시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나 행위, 대표적으로 학내 인권폭력 사건 등에 대하여 ‘이것은 폭력’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원론적인 선언에 불과함에도 사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을 공적으로 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대응을 하겠다는(혹은 그 대응을 지지하겠다는) 의도가 동반되어 있는 실천적인 선언이기 때문이다. 선언에는 구체적인 실천의 가능성이 동반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어떤 행위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 가능성(나는 이것을 ‘사건성’이라고 부른다)을 상상할 수 없고 그것이 폭력이라는 선언 자체만 가능하다면, 그 폭력은 그 정도의 중대성만 가지는 것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중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이것은 폭력’이라는 선언에만 그친다면, 그 발화자는 그 문제의 ‘사건성’을 부정하고, 원론적인 수준의 인식만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총장선거 출마자가 학내 인권폭력 사건에 대해 ‘이것은 폭력’이라고 원론적으로 말하는 데에 그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못할 거라면 조용히 하라’는 억압적인 말과는 거리가 멀다.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모든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밀접한 문제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과, 오직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은 그 전제와 접근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크다는 뜻이다. 이것은 언어가 가진 상징과 서사 기능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구조주의를 내가 경계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깊다.

  군대와 폭력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순히 전쟁을 상징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제 근대적 국민국가의 핵심 원리가 군대의 폭력 독점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군대 내에서 실제 폭력이 매우 농축되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서 군대는 분명히 폭력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 (그리고 또한 자주 폭력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은 언어 속에서만, 그리고 언어 행위를 통해서만 폭력적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면서 사람들에게 강제력을 발휘하는 군대라는 집단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군대를 실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담지한 상징으로 보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군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폭력적'인 사유 방식이다. 우리는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상술한 학생회 운영위원회의 논의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우선 버스 대절 사업이 ‘강제 동원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편의만을 위한 사업’이라는 전제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은 분명히 군대가 학우들에게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학우들이 보다 적은 비용으로 보다 편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응원하는 의미를 가지는 사업이다. 그것을 국가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의미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며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물론 학생회의 인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동원 대상자가 군대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대한민국의 환경에서,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운영하면서 군대가 국가 폭력이라는 인식을 학생회가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면 사업 참여에 대한 학우 일반의 부담이나 거부감이 엄청나게 가중될 수밖에 없으므로, 또한 그것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군대는 폭력이다’는 선언 자체만으로는 개별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거나, 실천적 대책이 제시되지 않는다.

 만약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이 국가 폭력에 대한 순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 국가 폭력에 대한 일종의 보이콧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콧의 의미는 ‘보이콧을 한다’는 선언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대상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입히는 데 있다. 그러나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음으로써 병무청에, 혹은 군대라는 동원체제 자체에 끼칠 수 있는 손해는 전혀 없다. 버스 대절을 진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는, 동원 당사자인 학우들이 제공받을 수도 있었던 편의를 제공받지 못하고 원래대로 비용과 수고를 들이게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효과조차도 갖지 못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안보 문제와 관련한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동의하는 편이며, 군대에 대한 거대담론을 전개할 때에는 (그 필요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당연히 포함하여) 그런 측면까지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내가 진보적 담론 일각의 나이브한 평화주의를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불편함과 동시에 이러한 문제점까지 경험한 예비군 대상자 학우들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이념적인’ 이유로 사업이 무산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이유로는 학생회의 행정력 투입이 어려운 상황이고 다른 사안과 비교하여 중심적인 의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업 진행을 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가 더 솔직하며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개 전의 최종 단계에서 해당 사유를 삭제한 해당 학생회 운영위원회의 조치는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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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추가

오용재 사과문은 적어도 사과문 자체로서는 잘 쓰여졌다고 생각했는데 댓글에서 많이 비난받길래, 자세히 봤더니 역시나 '국가 폭력'이라는 워딩을 문제삼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군대가 국가 폭력이라는 진술 자체가 군인을 무시하고 깔보는 의도라고 인식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정서가 상당수 작용하는 것 같다(그리고 이번 논란과 같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런 정서는 강화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반대급부 식의 정서 역시 국가 폭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하는 태도는 아니다. 군대의 본질이 국가 폭력이냐 아니냐로 논쟁한다면 너무 당연히 폭력이 맞다는 쪽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폭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무슨 효과를 의도하는지가 중요하다. 폭력에 대해 관념적으로만 접근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치기어린 보이콧을 시도하는 진보의 방식도 폭력적이며, 안보를 언급하며 폭력의 불가피성만을 주장하는 보수의 방식도 폭력적이다.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걸 보면, 군대에 대해 좌우 막론하고 '스위치 눌리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만 군대에 대한 좌파와 우파 사이의 깊은 골짜기가 메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내무부조리 개혁과 월급 인상, 개인시간 보장 등의 조치가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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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4일 토요일

과학적 회의주의의 입지에 관하여

사람들이 <물은 답을 알고 있다>와 같은 유사과학을 피식 웃으면서 마음껏 조롱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사이비적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서 합의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새로운 폭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회의주의의 궁극적 역할이 그러한 키치한 조롱을 필두로 한 놀이문화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놀이문화는 분명히 매우 재미있는 일이며, 공통적인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류하고 결집하도록 돕는 긍정적인 영향이 있으나, 그 문화는 어디까지나 분명히 '특정한' 무엇이므로 그것이 과도할 경우에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주류적인 마인드로 자리잡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주류에서 벗어난 컬트로 취급되기를 거부하고 진지한 영항력을 발휘하기를 원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상당한 크기의 권력이나 자본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체계가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폭로하는 '불온한' 역할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과학적 회의주의는 제 위치에서 안주하지 않고 성실할 것을 영구하게 요청받을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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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680270745397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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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3일 화요일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개의 바퀴

  우연적이고 유한한 세계 속에서 필연성과 무한성을 표상하는 능력과, 그 능력을 바탕으로 비약이 동반된 서사를 구성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만족 불가능한 충동이야말로 인간사의 가장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이며, 사태의 일회성/고유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한쪽 바퀴와의 모순적인 결합을 통해 인간을 작동시키는 두 번째 바퀴이다.

  예컨대 내가 지금처럼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할 때, 잠시 후에 있는 시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유일한 기회이며, 시덥지 않은 우연들에 의해서 결과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대비를 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첫 번째 바퀴). 반면에,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자의적인 그림 속에서 이 시험이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중요성을 차지하는지를 상상함으로써, 시험을 잘 보아야만 내가 상정한 필연대로 삶이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두번째 바퀴).

  이러한 충동은 일상에서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에서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늘 잠재하면서 우리를 움직이며, 조금만 생각해 보면 헛된 것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지식과 문화의 풍부함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충동을 잘 인지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스스로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고, 독단적인 사상누각을 세워서 스스로 속아넘어가거나 타인을 속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서사적 본능', '우연과 필연 사이의 투쟁'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술(description)과 규범(prescription)을 분리하면서도 양쪽 모두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과학에 대한 지식과 특유의 양적 방법에 대한 이해가 꽤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조만간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써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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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4일 토요일

보수정권의 댓글공작과 대선개입을 잊지 말자

  국정원 및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공작을 통한 대선개입은 내가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자 현재까지도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 중에 하나이다. 2012년 대선 당시 김용판 경찰청장은, 국정원의 댓글작업 혐의가 분명히 포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격적으로 은폐하고 '무혐의' 기자회견을 무려 "대선 3일 전에" 직접 진행하여 대선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경찰 관계자들이 혐의를 포착했으나 은폐하겠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영상이 존재한다). 사실상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인 김용판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탈락하고 부정경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박근혜는 당선 이후 2013년 내내 국정원과 사이버사에 의한 부정선거 의혹에 시달렸고, 대중의 관심도가 시간에 따라 점차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모는 차차 밝혀져 갔다. 윤석열 검사가 황교안과 검찰조직으로부터 체포된 국정원 직원들을 돌려보내라는 등의 외압을 받아 정상적인 수사 진행이 어려웠다는 것을 법사위 국감에서 폭로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한편,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에서는 대선개입을 위한 댓글공작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를 홍보하고 좌파를 비난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물이 국민들의 사상적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대내 심리전이라는 차원에서 다수 제작 배포되었다는 것도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오늘은 정보기관, 군부대 뿐만이 아닌 김용판의 경찰조직까지 이러한 댓글공작을 적극적으로 (그것도 독보적인 규모로) 진행했음이 드러났다. 진작에 밝혀졌어야 할 일들이 그동안 박근혜 정부에 의해 은폐되다가 늦게나마 서서히 드러나는 데에 안도감을 느끼지만, 지속적인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체상이 확실하게 드러나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 기사출처: "경찰 댓글 공작 '압도적 1위' 였네" (2018.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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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0일 화요일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칸트미학적 접근 가능성

  소위 말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칸트미학의 체제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전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 논의가 다소 얼기설기하지만 일단 간단하게 메모해 본다.

  논의의 출발은, 수학 공부를 하다 보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직관의 형식(대충 말하면 시공간에 대한 직관)에 근거한,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통합적이고 근본적인 이해를 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수학적 직관'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 직관 자체는 명료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명료한 수학적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명백하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직관을 새롭게 얻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선형대수학을 공부하다가 '이게 뭔지 알겠다'는 느낌이 들 때 기분이 좋은 것 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나는 대수적 구조에 대한 지식으로는 고등학교 수학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직 그걸 많이 느껴 보지는 못했다. IR^n도 극도의 겉핥기로만 알고 복소공간 C도 거의 다룰 줄 모른다).

  이 통합적인 이해(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아름답다는 느낌, 지적으로 충만한 느낌)가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수학적 개념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어 이해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머리가 팽팽 돌면서 마치 '전체를 보는', '현상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명료하게 논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내 머릿속에 있는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엄밀한 의미의 '인식'은 없지만, '인식능력의 활발한 작동'은 있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미학적 과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학적 직관'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적 예시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수학은 예술이나 공학과는 달리 '이미 뭔가 정해져 있고 내가 그걸 발견할 뿐'이라는 느낌이 강함을 고려할 때 (칸트적 언어로 말하자면, 수학적 명제가 선험적 종합판단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든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든 이것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통합적 이해의 순간에는 '전체를 보는' 듯한 오만한 느낌이 들겠지만, 보다 추상화된 수학을 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여, 예전에 내가 전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 단면에 불과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인식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인식적 확장의 단서들은 내가 아는 것들 속에 모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수학적 지식이 선험적 종합판단인 이유이다. 보다 '덜 당연해 보이는', '김새지 않는', 그러면서도 단순히 '신기하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관을 확장시켜 주는' 논증이 재미있는 논증인 것 같다.

  그러나 수학적 아름다움이 자연물 혹은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 등과 구분될 수 있는 근거는, 후자의 경우에 우리로 하여금 머리가 팽팽 돌아가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인식 일반' 혹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는 결국 일종의 주관적인 '비유'에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므로 '주관적 보편성'에 그치지만, 수학의 경우에는 여기에 '객관적 보편성'까지 확보되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설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각자의 수학적 직관이 '동일한지' 여부를 알기 어렵다. 개별 수학적 명제는 명석 판명하게 논증이 가능하지만, 각각의 수학적 명제들이 개인의 머릿속에서 이해되는 '직관'적인 방식은 명석 판명하게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예시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다. 칸트 미학에서 공통감이 '논증'되지 못하고 '전제될 근거를 얻는' 정도에 그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수학에서의 공통감에는 약간 다른 국면이 있다. 수학적인 명제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성격을 가지므로, 원리적으로는 누구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면밀하게 생각만 해 보면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적 아름다움은 미학의 과제이지만, 오로지 미학의 과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수학은 왜 다른 학문과 차원이 다르게 성공적인가'라는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칸트가 수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에 속한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수리철학적 물음을 던진 바 있으나 칸트에 반대하는 수리철학적 의견도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칸트적 기획의 장점은 수학과 아름다움을 보다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수리철학과 미학의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결합이, 칸트가 제시한 간단한 인지도식 상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해명된다.

  물론 수학의 엄밀성과, 수학적 개념들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직관/아름다움은 별개로 가야 하며, 이상한 비유를 붙여서 유사과학을 만들면 안 된다.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이 부드러운 유체를 다루므로 여성적이라서 남성중심적으로 고안된 수학 체계에서 안 풀리는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당장 칸트부터가 이것을 싫어할 것이다. 수학의 발전사가 수학자들의 직관과 주관적 편향의 영향을 받는 것과 별개로, 수학적 명제에는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객관성이 있다. 한 치의 '비약' 및 '서사적 접근' 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착상을 떠올리는 데 있어서 '비약' 및 '서사적 접근'이 작용한다는 점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여겨지던 과학마저(특히 생물학 및 사회과학) 성차별적 편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수학의 경우에는 과학과도 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 물론 수학자 사회에서 수학적 지식이 생산되는 구조,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 수학적 지식이 교육되고 소비되는 구조가 성차별적일 수는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끊임없이 비판해나가야 한다.

  나는 펜로즈가 '실체에 이르는 길'에서 거칠게 제시한, 물리적 세계도 아니고 인간의 정신도 아닌 제 3의 영역에 수학적 구조들이 있다는 존재론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결국 수학을 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 수학적 구조들을 엿보며 밝혀내는 것이 인간의 정신이기 때문에 칸트철학과의 보완적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밝혀낸다'는 표현이 대단히 마음에 든다. 수학적 작업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전체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이 (혹은 스타크래프트에서 새롭게 도달한 영역이 지도 상에 추가되듯이) 조금씩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리적 탐험은 반드시 발자국을 남긴다. 아메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 표면의 모습을 폭력을 동원하여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그들의 발자취이다. 그러나 수학이라는 행성의 표면은 '무한히' 단단하고 치밀하여 탐험자들에게 발자국을 허용하지 않으며, 누가 어떻게 탐험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수학에서 다루는 무한을 제외하고, 내가 인정하는 무한성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오직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 지도 상에서 탐험된 영역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수학자들이 어떤 착상을 하여, 수학사적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지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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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8일 목요일

인권센터와 평의원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성 소수자 관련 내용을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인권교육에 포함시킬 수 없다면, 교육이란 사회의 모습을 무비판적으로 반영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인권교육은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반영하고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 근거하여 그것의 개선을 꾀해야 하며, 사회적 합의를 선도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사회적 합의의 부재를 이유로 성소수자 관련내용을 문제삼은 평의원회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인권교육의 '대상자'이다.

  성소수자 인권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차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어떤 내용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그것을 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별개이다(이를테면 기벡처럼...). 그러나 전자의 합의는 명확한 주체가 없고, 후자의 합의는 결정권자들이 주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결정권이 있으면 책임도 있다. 결정권자들이 전자의 합의가 없음을 근거로 후자의 합의에 반대하는 것은 수동적인 태도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능동적으로 소수자를 배제하는, 책임이 결여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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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8일 수요일

내가 생각하는 합리성이란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우선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도구를 택함에 있어 구조와 개인, 과학과 윤리학 등의 영역을 잘 분별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개별 사안에 대해 어떤 확증을 내리는 데 있어 신중을 기하되, 신중함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유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양한 도구를 적용해 보면서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포착해 내고 그 가능성들 간에 '교통정리'를 해 주는 것이 합리성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에 대한 과신도 극복되어야 하며, 반대로 구조라고 불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애써 부정하는 소위 '구조맹'도 극복되어야 한다. 필요에 따라 구조와 개인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들 수 있어야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고 구체성과 면밀함에 도달할 수 있다.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한계를 지속적으로 극복하기: 올림픽 기록경기를 보며

  올림픽 기록경기를 볼 때마다 신기한 건 전 세계 각국의 아웃라이어들이 모여서 시합하는데 마치 어떤 상한선이 있는 것처럼 서로의 기록이 단 1초의 차이도 안 날 만큼 다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결승과 결승을 비교하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전반적으로 기량 차이가 난다. 그리고 십수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그 상한선이 점점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걸 보면 천부적인 재능과 무수한 노력으로 탄생한 최상위 기량의 선수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물리적 한계 끝에 서서 그 한계를 함께 넓혀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득점을 위한 체계적인 방법론이 확립될수록, 혜성처럼 등장해서 독보적으로 잘 하는 낭만주의적 천재가 출현할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낭만주의를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혹시 그것은 인간이 아직 한계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얘기에 불과하고, 실제로 인간이 한계를 꾸준히 극복하도록 해 주는 것은 오히려 체계적인 방법론에 근거한 '인간미 없는' 노력과, 그 방법론을 서로서로 배우며 협력적으로 경쟁하는 태도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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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1일 일요일

평창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인면조의 밈화가 가지는 함의에 대하여

이미지: 사람 1명, 밤

'엄숙함'은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처럼 톱니바퀴 돌아가듯 설계된 서사로부터 정교하게 도출된다. 서사에서 약간의 허점이 발견된다면 엄숙함은 즉시 그 힘을 잃는다. 이러한 엄숙함은 텍스트 시대의 가치이다. 텍스트는 정해진 흐름대로 선형적으로 독해된다.
반대로, '웃음'은 여러 엄숙한 서사의 구성요소들을 원래 서사의 맥락으로부터 최대한 분리해 내어 자유롭게 재조합하는 데에서 온다. 이러한 웃음은 탈텍스트 시대, 이미지 시대의 특성에 매우 잘 부합하는 가치이다. 디지털 매체의 발전은 사이버 세계를 구성했고, 사이버 세계 속 이미지들의 바다에서 우리는 부유하며 유희한다.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개최국의 역사 상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수많은 상징들이 동시에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역사적 단절로 인해 단일한 거대서사를 구성하기 어려운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수많은 역사적 상징들을 탈맥락적으로 재조합하여 동시에 보여주면서 예의 엄숙함을 연출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시도이다. 이러한 재조합의 방식은 그 본질상 엄숙함보다는 웃음 쪽에 가깝게 닿아 있으며, 따라서 약간의 '깨는' 점만 있더라도 바로 웃음으로 향하게 된다. 엄숙함을 의도한 상황에서 웃음이 유발된다면 이 웃음은 비웃음이다.

  그러나 만약 애초에 엄숙함이 아닌 웃음을 의도한 것이라면, 그 웃음은 즐거움의 웃음이 된다. 예컨대 드라마의 한 장면인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가 과도한 국뽕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반면, 네티즌들이 박지성, 김연아, 싸이, 이세돌 등을 마구 합성하여 장난식으로 만드는 '국조디아'(국뽕+엑조디아) 짤은 진심으로 즐겁게 생산되고 소비된다(그리고 앞과 같은 진지한 국뽕에 대한 풍자의 의미마저 획득한다).

  평창올림픽 개회식의 총감독인 송승환은 유쾌한 비언어극 '난타'를 기획한 사람이다. 이러한 그가 평창올림픽 개회식에서 기괴한 비주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인면조를 어떤 의도로 삽입했을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의도와 관계없이, 개회식 중에 갑자기 등장한 인면조의 기괴한 도상을 본 사람들은 그것을 사이버 세계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한껏 웃으며 패러디하는, 유쾌한 방식으로 소비했다. 내가 보기에 개회식 자체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뤄두더라도, 네티즌들의 이러한 소비 방식은 어쨌든 '긍정적인 의미로 한국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은 특정 국가가 문화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적 상징들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국가의 어떤 역사적 상징이든지 디지털적인 인프라 위에서 그 엄숙한 아우라가 파괴되고 무한히 마음대로 재조합되며 유쾌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게 하는 문화적 토양, 즉 문화의 '형식'이 아닐까. 각종 문화제에서도 대중의 위와 같은 특성을 고려하여, 자칫하면 웃겨지는 아슬아슬한 엄숙함보다는 마음놓고 웃을 수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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