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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9일 수요일

어떤 일반화는 성급하지 않다: 최소한의 정치적 진술가능성을 확보하기

집단에서 어떤 좋지 않은 경향을 발견해서 언어화하고 비판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인 듯하다. 그 좋지 않은 경향은 은밀하게 인습적으로 있는 거지, 대놓고 강령에 써져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다 보니, 옹호자들이 '그래서 구체적으로 그런 사례가 있느냐'고 반론하는 것은 손쉬운 반면(저 말만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어도 반론이 간단히 성립한다), 그에 대해 다시 답변을 하는 것은 매우 번거롭다.

집단에 어떤 경향이 있다는 인식은, 객관적으로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설득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은 그런 주장이 자신들을 부당하게 싸잡아 욕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인식이 다르며, 그 다른 지점에 대한 어떤 '전형'을 만들어서 부정적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논리적 오류라기보다는, (차별주의를 성찰적으로 배제해 나가는 것 등을 비롯한) 어느 정도 선의 링 안에서는 적법한 정치적 갈등이다. 공통점을 뽑아내서 비판하는 것이다보니, 전형을 상정하지 않고는 어떤 진술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논리와는 다른 룰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 인식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성실히 축적해 놓는 것, 그에 대한 개념어들과 언어적 표현들이 설득력 있도록 갈고닦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력 있게 적재적소에서 꺼내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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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2일 수요일

잇따르는 권력형 성폭력: 대책은 근본적 체질개선뿐

2년 동안 무려 3명의 여당소속 광역단체장이 잇달아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임이 드러나면서 낙마했다. 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진정성 있는 공적 책임을 질 수 있는 가장 나은 방식은 무엇일까? 현재 성폭력 문제를 정치환경의 근본 문제가 아니라 정세를 요동치게 한 하나의 악재 정도로만 보거나, 미래통합당은 더할 거라며 억울해하고 있는 상당수 당원들의 인식, 그리고 당대표 선거 상황 등을 볼 때 실현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이지만, 내가 상상해본 시나리오를 한번 써본다.

내 생각에는 일단 성폭력 문제에 확고한 의지와 역량이 있는 여성 정치인들이 실질적, 불가역적으로 권력을 획득하여 성폭력에 대한 인식제고, 방지 및 제대로 된 사후대처를 위한 대대적인 체질개선을 시작해야 한다. 작은 위원회나 기구 만들어서 한번 권한을 줘 보되 기존 남성중심적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무력화되거나 회수될 수 있는 그런 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단기간에 되는 작업은 아니고 근본적으로 완료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긴 하다.

그리고 보궐선거에도 당선될 역량이 있는 여성후보가 출마해야 한다. 이 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 여성이니까 성폭력 문제 없겠지 같은 나이브한 생각이어서는 당연히 안 되며, 남성 정치인들의 총체적인 반강제적 반성과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후보를 내세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권력의 축이 실질적으로 균형있게 됨으로써 가능하다. 말하자면 정치권력의 우위를 통해 젠더권력을 반영구적으로 평등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 국면을 수습하고 타개하려는 것이 아닌, 성폭력 문제에 진정성 있게 대응하고 당내 권력과 지자체 행정을 실질적으로 여성이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 역사와 국민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과는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하는 것이다.

이 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당 소속 단체장이 부정부패로 퇴출될 경우 차기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당헌당규 상의 조항이다. 일각에서는 성폭력은 부정부패와 다르므로 이 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걸로 성폭력이 부정부패냐 아니냐 싸우게 되는 것은 정말로 너무나도 좋지 않은 그림이다. 조항의 취지를 광의로 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책임을 진다'는 취지로 해석해야 하고, 이 경우 조항이 저렇다면 어쩔 수 없이 후보를 안 내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도 든다. 내 생각에 이 조항은 정당의 목적과 유권자에 대한 책임을 무시한 다소 포퓰리즘적인 조항이며, 애초에 없었어야 할 조항이다.

이제 와서 당헌당규를 바꾸는 것도 치졸해 보일 수밖에 없는데, 만약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획득하도록 하면서 보궐선거 입후보도 가능한 쪽으로 개정한다면 그래도 꽤 설득력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오히려 책임을 더 제대로 지는 방식이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좋겠다. 내가 좋게 평가해온 우리동네 근처 여성 의원들이나, 이번 국면에서 누구보다도 어려웠을 소신 발언을 한 권인숙 의원에게 후원금이나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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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0일 월요일

역사의 종말: 보편의 실현인가 혹은 보편적 착각인가

아서 단토는 그의 예술 종말론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에센스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어떻게 모방/재현하느냐에 따라 그 패러다임을 달리하면서 발전되어 온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경향을 '바사리 서사'로 부른다. 이데아와 합치하는 최고도의 인간성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건강하고 활력 있는 신체를 조각한 고대 그리스와, 그림 그 자체로 담아낼 수 없는 기독교적 신성을 암시하기 위해 상징 효과를 활용한 중세를 단토는 미술 이전 시대로 분류한다.

미술가들의 관심 대상이 이러한 예지계/상징계에서 물질계로 점점 내려오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단토가 이야기한 바사리 서사가 시작된다.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바사리에 의해 자기인식된 르네상스 미술부터, 작가의 시점, 시간대 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흐물흐물한 빛 덩어리야말로 회화로 표현할 수 있는 에센스라고 생각한 인상주의, 반대로 그러한 변화를 모두 걷어낸 것이 본질이라는 입체주의, 한편으로는 삶과 사회상을 표현하는 사실주의 등 대략 20세기 이전까지의 여러 미술 사조들이 이러한 바사리 서사에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술작품은 '원본'에 해당하는 외부 대상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며,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로 정당화된다.

위 문단에서 예고되는 것은, 개별 예술창작이 특정한 철학적 신념 위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바사리 서사에서 그 신념이란 미술에서 모방해야 할, 대상들의 에센스에 대한 철학적 규정이었다. 이는 20세기 들어 특정한 외부 대상의 모방물이 아닌, 독립되고 자기완결적인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추상미술('이게 뭐야?'라고 질문할 때 '뭔가를 그린 거야'가 아니라 '미술 작품이야'라고만 답할 수 있다는 의미로)이 등장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파괴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본격화된다(왜냐하면 입체주의, 인상주의 등 바사리 서사 후반부의 미술과 그 이후에 등장한 추상미술의 사이의 관계를 단절로 파악할 수도 있는 반면, 연속으로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들의 본질이 아닌, 예술 자체에 대한 철학적 규정으로 질문의 축이 옮겨간 것이다. 이렇게 예술가가 가진 예술에 대한 규정을 작품이 스스로 실현하도록 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을 단토는 그린버그 서사로 규정한다. 다소 순환적일 수도 있지만, 예술철학이 예술생산을 추동하며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1960년에 발표된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일상 속의 공산품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작품이다(실제로는 종이박스를 그대로 갖다 놓은 것이 아니라 나무 판자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기는 한다).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강령, 강령이란 없다는 마지막 강령이 선언되고, 이것은 '예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단토가 보기에 이 시점 이후의 동시대 미술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특정한 철학적 강령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개별적이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의 어구와는 달리 이 시점 이후의 미술 창작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고 찬란해진다. 개별 미술작품들은 더 이상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도, 예술규정에 대한 철학적 사조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가치를 획득한다. 예술이 마침내 오직 스스로 정당화되기에 데 이른 것은, 미술사 속의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보편적인 종착점이며 따라서 예술의 발전사는 종결된 것이다.

한편, 직접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역사의 종언'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더 이상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시대정신을 점유하게 된 당시의 상황은 역사 속의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기보다는,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종착점이라는 것이 후쿠야마의 인식이다. 단토와 후쿠야마 모두에서 보이는 것은 바로 헤겔주의적 면모가 아닐까 한다. 자연에 잠재하던 이념이 서로 다른 모멘트들의 대립을 통해 발전하면서 스스로를 세상 속에서 점점 구체적으로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역사를 이해한 헤겔의 역사철학이, 미술분야와 정치분야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와 단토 모두, 자본주의 체제 하의 미국만을 보편으로 상정한 좁은 고찰이라는 비판을 받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처럼, 대립되는 계기들의 투쟁에 의한 역사의 발전이 언젠가 근본적으로 완결되어, 역사의 종착점에 해당하는 무시대성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며 동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라는 관념은 꽤 곳곳에서 보인다. 특히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20세기 중후반부터의 시기가, 시대적 격동기를 벗어난 제1세계 주류의 사람들에게 그런 관념을 만들어내기에 특별히 용이한 느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러한 관념을 접한 뒤 비교적 자연스레 이해하면서도, 매력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낀 이유는 이것이 내가 어릴 적 (신화를 포함한) '옛날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게 되었던 관념과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 여러 인프라와 노동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결코 완벽히 단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시기여서인지, 옛날 이야기라는 것이 실제로 구전되어 전해지던 시기와, 그것들이 인쇄/출판되어 나오는 현대 사이에는 완전하고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옛날은 뭔가 웃기거나 무서운, 부조리한 일이 많이 일어난 시기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문화재인 것과, 문화재가 아닌 것기 칼같이 구분되는 것 같았던 인식도 이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현대에도 어찌 보면 '옛날 이야기'의 구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이야기를 만들게끔 하는 기이하고 불가해한 것들도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옛날-동시대 이분법은 유아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꾸준히 남아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진정 보편적인 것은, 관념 속의 보편이 일시적, 국소적으로 달성되었을 때 그것을 역사의 종말로 판단하려는 인간의 경향밖에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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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7일 화요일

믿음직한 군을 향해: 민간 감시로 보신주의 조직문화 근절해야

또 한 명의 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재의 군대에서, 이런 일이 터지면 숨기는 데 급급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국민들 모두가 알고 있다. 다른 곳이라고 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군은 (가장 이런 것에 신경 써야 할 곳임에도) 유난히 노골적으로 문제를 숨긴다. 이쯤되면 징집대상자들을 국민 취급이나 해주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마 보신주의의 산물인 것 같은데,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서, 진정성 있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믿음직한 군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세간에 있는 '끌고갈 땐 국가의 아들, 다치면 남의 아들'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본인이 군필자이거나 친족이나 지인 중에 직업군인이 있는 등 군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본 사람들은, 군에서 터진 문제가 왜 그런 식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지를 어느정도 직감한다고 한다. 군대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래된 문제들의 해결을 얼마든지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거기에는 보신주의 조직문화의 근절을 위해 그러한 구조적인 진단을 할 수 있는 경험자들의 도움과 협조가 지극히 필수적이다.

군대는 폭력의 합법적 담지자로서 기능을 가지지만, 병영 부조리와 같은 폭력은 당연히 그러한 폭력과는 아예 다른 문제다. 군대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뭉개 온 범위가 너무 넓고, 역사가 너무 길었다.

합법적인 폭력을 제대로 준비하고 수행하며 그 자격을 국민들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군대 내부의 부당한 폭력은 효과적으로 감시되고 통제되고 처벌될 필요가 있다. 군대는 체계를 중요시하는 집단이지만, 역설적으로 병영은 어떤 이들에게, 어떤 면에서 적자생존 정글 그 자체이다. 밀어넣어 놓고 책임은 제대로 안 져서 그렇다고 본다.

인권이라는 개념은 잘 정립되고 연구되어 있으며 이것이 군인에게도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기본권 제한에 대해 모르고 쓰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 개념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교육이 아닌 권력을 통해서 가능하다. 실효적인 권한을 갖는 민간 감시기구에 의한, 강제성을 갖는 통제로만 인권을 보장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비합법적 폭력을 합법적 폭력으로 조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는 어쩔 수 없다', '거긴 원래 그렇다', '눈 딱 감고 2년 갔다 오면 된다'라는 식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관심갖고 감시하고 연구하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자라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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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5일 목요일

노력의 가치 재구축: 공정성이 아닌 책임성으로부터

학업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을 요구하는 정서에 관한 담론이 핫한 모양이다. 여러 성취지위 중에서도 특히 '등용문' 느낌이 강한 지위(대학, 고시, 공기업 등)들에 대해 그런 정서가 많이 표출되는 것 같다. 이번 인국공 논란도 (적어도 언론이 그렇게 연결짓는 방식을 따른다면) 그것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런 식의 '공정한 노력->보상 시스템' 자체가 그리 보편적이진 않다. 이런 시스템에 대해 (1) 여러 정보를 잘 알고 있고, (2) 속할 예정이거나 속해 본 적 있으며, 결정적으로 (3) 그 속에서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을 할 기본적인 여건(가정에서 기다려줄 수 있는지 등)이 되는 계층도 꽤 한정적이다.

결국 이에 관계된 주요 계층은 특정한 이익관계 속에 놓인 특정한 계층인 건데, 이게 보편적 루트라는 사회적 믿음이 있다. 글공부가 업인 부류이다 보니 실제 발화권력과 언어적 능력도 비교적 갖춘 편이다. 또한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험공부의 절대적 우선성(?)을 규범으로 체화하고 있는데다, 꼭 저런 자리들이 아니더라도 모든 성취지위에 어느 정도는 노력->보상이라는 요소가 있으므로, 저 시스템에 딱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을 여지도 꽤 있어보인다.

그러면서도 21세기 이후의 사회적 기조는 그런 루트가 보편적이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혹은 보편적이지 않도록 만들려는 방향인 경우가 많아 이들은 여러모로 당국과의 알력이 있고 실제로 그런 정책들에 대한 반동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강력함에 주목하여, 저걸 아예 시대정신으로 승격(?)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어서 요새 이런 게 핫해지고, 또 그 반작용으로 여러모로 조소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한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위와 같은 다소 거친 인상비평 이상은 못 할 것 같고, 이 글은 사실 그냥 일기 같은 건데 하필 시사이슈와 얽히길래 여기에 써보는 것이다. 나는 저런 이슈들에 대해 잘 모르고 정서적 공감대도 적은데, 바로 그렇다는 사실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반쯤은 소외감을, 반쯤은 묘한 부심을 가져 왔다. 잘 모르는 이유는 아마 위의 (1), (2)를 갖추지 못해서일 것이다. 일단 (3)을 만족하는 가정환경임에도 집에서 그런 사회적 루트들에 대해 딱히 적극적으로 알려주거나 보여주는 편이 아니었고 진로에 대한 권유도 크게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거 하지 뭐 하는, 어찌보면 유아적인(?) 생각을 오랫동안 유지한 것 같다. 노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부터 밀려난 건지, 내가 일부러 벗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비해 내가 저런 것에서 정서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리고 기질적으로도 생활을 통제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식의 노력을 해 본 경험이 많지 않기도 하다. 오죽하면 집에서도 나한테 수능이나 고시 타입은 절대 아닌 것 같다고 했겠나. 주로 매 순간 서 있는 위치에서 재밌는 걸 하고 재미없는 걸 안 하는 길을 찾기 위한 메타적인 노력만을 많이 한 거 같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상태가 됐는데, 이게 약점이 되게 많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런저런 공부 하고 싶다는 탐색전만 깔짝깔짝 많이 해봤고 정작 공부는 그리 열심히 안했다보니(...) 주변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다들 비슷한 걸 하는데 나는 그게 재밌으니까 성과가 높았던 거고, 학부에서는 아무거나 다 해도 되고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환경에 갑자기 expose되다 보니까 그런 차이점을 극명하게 체험한 게 아닐까 한다. 물론 메타적인 노력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태스크들도 충실히 뚫어낸다면 퍼포먼스가 높겠으나, 내 경우 후자가 안됐던것.

대학원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지적, 생활적으로 통제하면서 학계에 소속될 자격을 갖추는 훈련을 받는 곳이기도 하며 또한 급여를 받으면서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같은 경우 특히 병역도 얽혀 있으니, 삶에서 거의 처음으로 이런 사회적 책임의 측면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이미 말했지만, 위에서 얘기한 좁은 의미의 노력->보상 시스템 자체는 그리 보편적이지 않으나, 속하고자 하는 커뮤니티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고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descriptively, not normatively) 분야 막론 보편적인 면이 있다. 합리적 보상에의 기대라는 측면보다는, 자격의 확보와 책임의 완수라는 측면에서 노력의 의미를 정초하고 그것에 충실하게 자율적인 자기통제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꽤나 건전하고 생산적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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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4일 일요일

귀염론

<귀여움을 다루는 방식: 불화의 가능성을 전제한 일회적 사태로서>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점점 더 빈번하게 언급되며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귀여움은 흔히 아기나 반려동물이 갖는 특성, 혹은 그러한 대상들이 촉발하는 감정으로 대표하여 묘사된다. 이와 관련하여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에 필요한 감정이라는 등으로 진화적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많다. 

어떤 포착되는 순간들은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우리로 하여금 무해함과 그 영속성을 상정하게 한다. (Retrieved from https://www.youtube.com/watch?v=BFNekjEgvuk , Thumbnail image, 2023.03.18.)


특히 오리들이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인식하고 따라다닌다는 각인(imprinting) 효과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 (Konrad Lorenz)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연원, 목적론적 설명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귀여워함이라고 불리는 어떤 심정상태가 명백히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그것이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을 위주로 다뤄본다.

귀여움이라고 하는 것은 대상의 상태라기보다는 주관이 대상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다. 즉 엄밀히 말해 우리가 일관성 있게 개념화하여 주목할 수 있는 사태는 '귀여움'보다는 '귀여워함'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촉발하기에 대체로 용이한 어떤 상태나 속성들의 범주가 있기는 한 것 같고, 이를 귀여움이라고 실용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이처럼 귀여워함은 주관의 내부에 촉발되는 것이지만 상호주관성의 계기를 적극적으로 지향한다. 즉 귀여워함은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실제로는 성립되지 않고 있는 상호주관성을 가상적으로 형성하기까지 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상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갖게끔 한다.

단적인 예로, 사물의 외형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귀여움을 느낄 수 있으며 이 때 사람들은 그 사물에 가상적으로 인격을 부여하여 그것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동 챗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입력에 대해 어떤 의인화하기에 용이한 반응을 보였을 때에, 그것은 때때로 귀여운데 여기서 우리는 은연중에 그 반응을 인격에 유비한다. 또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자동차의 앞모습을 사람의 얼굴 표정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러한 표정은 차종에 따라 귀엽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 등에게서 귀여움을 발견한다면 그를 실제로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인상과 친밀감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해당 인물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외형, 혹은 특정한 언행 및 장면으로부터 유발되곤 한다. 가상적인 상호주관성과 그에 따른 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여움은 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귀여워하는 감정은 순전한 존중의 태도와는 꽤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귀여워하는 감정이 일으키는 가상적인 상호주관성은 '나를 해치지 않는 인격을 대할 때의 상호주관성'에 가깝고, 적절히 관리되지 않는다면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결국 귀여움이라는 미적 범주는 나보다 미숙한 인격체에 대한 보호, 한편으로는 통제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양면성에 의거하면 귀여워함의 감정은 주관으로 하여금 비인격적 대상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인간과 같이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복잡한 대상을, 오로지 무력하고 저항하지 않는 대상으로 평면화하여 조심스럽지 못하게 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예컨대 사물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생명체를 대하듯이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 반면 인간에게 귀여움을 느낀다면 은연중에 무해함에의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될 수 있다. 인격에 대한 순전한 존중심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두려운 행동을 볼 때에도 그 행동이 정당할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후에도 반드시 사라지지는 않는다. 반면, 귀여워하는 감정은 대상이 우리의 기대를 위반하면서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시켜 줄 때에 실망을 안기면서 비교적 쉽게 사라지므로 순전한 존중과 다르다.

따라서, 귀여움의 감정만을 관계 형성의 동기로 삼는 것은 일방적이며 아슬아슬하다. 그러한 관계에서 기대가 위반되었을 때 발생하는 실망의 감정이 일차적으로는 상대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일방적으로 가졌던 기대 때문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귀여움에 대한 기대가 위반되며 불화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상황은 그러한 점검의 계기가 된다. 물론 기대를 위반한 상대방의 행동 자체가 적절치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며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으나, 상술한 점검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귀여워하는 감정을 꺼리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간에 의젓한 태도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일회적으로 수립되는 귀여움은 관계에 좋은 영향을 주며 나도 그것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개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충만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고, 양쪽 모두 불만을 갖지 않는 귀여움은 인간관계의 가장 즐거운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빈번할 수는 있을지언정) 본질상 일회적인 것이므로 나중에 돌아볼 때 오글거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하겠다.

만약 귀여움 또한 미학의 대상으로서 미적 범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이러한 일회성은 사실 꽤 자연스럽다. 무언가가 귀엽다는 판단은 취미판단의 범주로서,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우리의 인지적 도식이 잠깐 동안 특별히 조화롭게 작동하면서 산출하는 것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진실이 도출되는 과정과는 다르다. 이것이 혼동된다면 상술한 것처럼 잘못된 기대로 이어진다.

또한 전형성에서 벗어난 전복적인 귀여워함은 문화적 변혁력을 갖는다. 전통적으로 귀여움의 대상이 되지 않던 것에서 귀여움 촉발의 가능성이 문화적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변화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그것을 재확인하는 효과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귀여움의 특성은 귀여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귀여운 대상의 행동을 (혹은 일반적으로 귀엽다고 여겨지는 행동의 범주들을) 종종 모방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위에서 밝힌 가상적으로 형성된 상호주관성 하에서 수행되는 일종의 역할극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역할극은 귀여움 상황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제3자를 의아하게 하거나, 드물게는 제3자까지 그 상황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러한 귀여움의 역할극만으로 고도의, 또한 여러 단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결론을 짓자면, 귀여움 너머에 있는 온갖 불화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그 위에서 발생하는 일회적인 귀여움을 조심스레 애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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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9일 화요일

취향 논쟁은 차이의 확인에 그칠 뿐이다: 고양이 애호가에 대한 비판을 보며

결국 이런 글도 '비평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고양이가 잔혹한 맹수이며 개체수 증가 시 생태계에 영향이 있는 것을 다 알면서도 귀엽다고 느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고양이 애호가들 입장에서 데미지가 전혀 없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의 표면에는 비평의 의도만 드러나 있지만, 마지막 줄에서는 고양이가 귀엽다는 세간의 판단과, (그것과 직결되지는 않는) 밥 주는 행위를 비판하는 서술이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특정한 실천적 방향을 가리키는 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적 잣대를, 고양이의 생태라는 자연 현상에 비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귀여움이라는 주관적인 취미판단을 논박하려는 시도라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총체적 비합리일 것이다. 「판단력비판」을 100회 필사 시켜야 한다.

일부 덧글은 더 문제적이다. 이견은 있겠으나, 길고양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중성화 등 개체 수 관리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협조하는 경우도 많은데, '귀여우므로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라는 단편적이고 비합리적인 인간상을 가상적으로 설정해 두고 그것을 공격하는 건 혐오감만을 재생산하는 공허하고 악의적인 양성피드백일 테다.

결론적으로, 귀엽다는 판단 자체에 대한 반론(?)은 설득보다는 차이의 끝없는 확인에 그칠 것이며, 생태 균형 고려 없이 밥 주는 것을 줄이고자 한다면 개별 행위의 동기에 대한 비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 자체를 현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현실적, 정책적 논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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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7일 일요일

Criticism on 'All Lives Matter': 정치구호의 의미를 몰라내지 말자

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는 그 맥락이 시작된 곳에서 실질적으로 BLM에 대한 반동으로 사용되는 말인데, 모든 삶이 소중하다는 말 자체가 맞는 말이라는 이유로 일부 한국인들이 그 말을 쓰겠다는 것은 정치적 구호의 의미가 사전적, 원론적인 의미 바깥에서 획득되는 사회적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정당화될 수 없는 처사이다. 해당 구호 자체를 인종차별 철폐의 맥락으로 전유하려는 전복적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설령 그런 전복의 의도여도 마땅한 전선 위에서 이뤄져야 말이 되는데, 현재 국면에서는 뜬금없는 말일 뿐 설득이 되지 않는다), 서구에서 흑인에 대해 적대적으로 발화되는 all lives matter와 그 발화 의도가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실 이퀄리즘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것이어서, 이렇게 길게 얘기해야 할 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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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일 화요일

과학인들의 정치를 향해: 정치의 본령에 먼저 충실하자

과학인들이 정치사회적 열망을 풀어나가면서 집단적 영향력을 갖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과제이고 나도 관심이 많은데... 문제를 다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적 감수성과 기성 정치문법을 성실하게 훈련받지 않은 채 발언을 하려다 보니 의도와 메시지가 자연스레 전달되지 못하고, 사지 않아도 될 비웃음을 사는 일이 꽤 잦아서 유감스럽다. 합리성을 강조하며 그 가치에 자기 자신을 굉장히 이입하지만 정작 딱히 합리적이지는 않은 희극적 장면들 말이다. 발언의 영향과 사회적 의미까지 고려해서 발언하는 게 합리성 아니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정치뿐 아니라 과학의 작동원리에도 그다지 충실하지 않다. 정치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 기본에 충실해야 신뢰가 확보되고 공간이 열린다.

이미지: 사람 1명, 서 있음, 사람들, 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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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7일 수요일

인터뷰 후기: 결국 하고픈 한 마디

개강 전인 2월 말 경에 전문연구요원 지망생으로서 서울대저널 기자님들과 인터뷰를 했다. 정신이 없어서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가, 2건의 기사에 쓰여 나온 것을 지금에서야 봤다. 다소 중언부언했던 인터뷰였는데, 인터뷰에서 제일 하고 싶던 얘기를 잘 넣어 주셔서 감사하다.

<현재 전문연을 지망하고 있는 오용재(물리천문학부 석박사통합과정) 씨 역시 "당시 전문연에 대한 누군가의 발언이 나오면 그렇게 확정된 것처럼 기사가 나왔다"면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도만 쏟아지면서 진로에 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4년 가까이 지속됐다"고 말했다.>

기사 1: 밑 빠진 독에 전문연 붓기 - 전문연구요원 존폐 논란 너머의 문제들 (링크)

기사 2: 갈등과 논란 속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전문연 제도 존폐를 넘어 폭넓은 논의 필요해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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