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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4일 토요일

어르신 짤: 아우라의 귀환과 공적 권위의 인식

  어제 청와대 SNS에 '어르신 짤' 양식으로 예산안 홍보물이 게시된 것을 보고 단순히 키치적 유행에의 때늦은 영합인 줄 알았는데, 청와대 공식 유튜브에 따르면 이는 실제 그 밈의 유래가 된 방식으로 어르신들이 복지관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외형적으로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문화적 산물들도 그 생산의 과정이 다름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맥락으로 수용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배경 일화는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대중적인 것, 사적인 것, 공적인 것이 이 일화에서 서로 묘하게 겹쳐서 드러나므로 종합적으로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 짤' 밈은 그것과 외형상 비슷하면서도 결이 상당히 다른 '망한 PPT 밈'과 함께, 키치적 유행 중에서도 특히 실패하기 쉬운 종류에 속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에는 어김없이 권력 혹은 권위의 문제가 개입하고 있다. 만약에 위와 같은 배경을 몰랐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듯이, 어르신 짤 밈에 SNS 담당자가 단순히 영합하였을 뿐이라고 (잘못) 가정해 보자. 키치적인 것 중에서는 공적 권위에 의해 추인됨으로써 더욱 빛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는데 그러할 경우는 전형적인 후자의 사례로써 사람들에게 실소를 유발할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실패는 공적 권위의 최종 심급에 위치한 청와대에 의한 것이므로 한국 내에서 원리적으로 가장 강력한(...) 실패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 링크된 기사에서 보듯, 실제로는 달랐다. 일단 청와대 홍보 담당자가 이러한 '어르신 짤'들이 밈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채로 기획을 했다는 것을 전제하자. 그렇다면 이러한 기획은 공적 권위라는 측면에서 끝판왕 급인 청와대 스스로가 그러한 유행의 원조를 추적하여, 사실은 그러한 키치적 유행의 원조는 임의의 대중이 아니라 특정한 프로그램들에 있는 것이었고, 그것도 다른 게 아니라 어르신들 대상의 복지 프로그램이라는 지극히 공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아우라를 귀환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복지관 현장에서의 생산 행위와 결부된 아우라가 귀환할 때, 복지관으로 대표되는 복지 제도를 유지하고, 또한 그러한 제도를 홍보할 수 있는 정부라는 공적 주체의 거대한 힘에 대한 인식 역시 은은하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논할 점은 결국 위 논의의 연장선 상에서 도출되는, 궁극적인 구분 가능성의 문제이다. 위에서 전제하였듯이 밈적으로 소비되는 것을 인지한 채로 진행된 것이라면 결국 키치적 유행을 공적 권위에 의해 전유하는 점은 다를 바 없는데, 그 유행의 근원이 사실 공적인 것에 있었다는 점에 의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진 것뿐이다. 과연 대중적 유행에 맞서 있는 모멘트로서 아우라를 복귀시킨 행위라는 점에서 궁극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공적인 것들도 사실 처음에는 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했다는, 언뜻 잊기 쉬운 사실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봐야한다.

  나는 어르신들이 짤을 만들면 자동으로 이러한 양식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사들의 강의 내용, 축적된 샘플, 그리고 어르신들의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러한 양식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체계가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식은 따지고 보면 결국 '우연히' 공적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 어디까지나 '특정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식별하기 쉬운 이러한 양식의 존재를 통해, 결국 공적 권위라는 것은 처음부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이고 특정한 무엇인가가 공적 권위에 의해 선택되어 제도의 틀 속에 편입되는 데 성공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선택행위는 홍보 담당자의 홍보 방식 선택행위와도 겹쳐 보인다. 권위에 의한 선택에 따라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으로 추인되는 사태가 한 번은 공적 권위의 말단인 복지관 현장에서, 한 번은 공적 권위의 최종 심급인 청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중화된 구조인 것이다.

  공적 영역은 언뜻 생각했을 때 '상징'이라는 키워드와 거리가 멀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청와대 정도 되면 모든 활동 하나하나에 타의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므로, 상징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상징들을 자의적으로 스스로의 내부에 포섭함으로써 적재적소에 메시지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공적 가치일 수도 있다. 현대 국가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권력에게 기대하거나 권력이 자처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감하지만 그것은 의례 행위 그 자체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의례에 활용되는 양식의 선택과 공적 영역으로의 포섭 과정이 사실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문제의식의 총화와도 같음을 고려할 때 권력이란 어떤 면에서 여전히 현대에도 어느 정도 제사장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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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6일 금요일

만물상 예찬


금강산에는 만물상이라고 이름붙여진 일군의 봉우리가 있다고 한다.

높이 솟은 복잡다단한 기암괴석들이 마치 세상의 만물을 다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곱씹어 볼수록 무척 마음에 드는 작명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산이 존재한다는 상상은 그 풍광의 장엄함을 보면서 느껴지는 숭고감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인 동시에,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동양적 숭고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걸 조금 비틀면 보르헤스적인 발상이 연상되기도 하며, 또 다르게 비틀면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이토 준지(!)스러운 기묘한 상상력과도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여러모로 풍광에 대한 즉물적 감탄 그 이상의 많은 영감을 주는, 절경에 걸맞는 멋진 찬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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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유진박에 대한 생각

마미손의 신곡 <별의 노래>에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이 피처링을 한 것을 알고 뮤직비디오를 찾아봤다. 놀라운 아이디어이고 멋진 콜라보레이션이어서 인상깊게 들었다. 특별히 우월한 입장에서, 혹은 특별히 비참한 입장에서가 아닌, 그냥 많이 울어 본 한 명의 사람으로서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는 "괜찮아 울어"라는 가사는 마미손과 유진박의 대화 같기도 하고, 그들이 청자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하다.

유진박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많은 감정이 든다. 이것의 이유로는 그가 선보여 온 음악이 주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그의 재능과 성향, 그리고 겪어온 삶에 대하여 내가 머릿속에 만들어낸 어떤 인상이 강하게 작용함을 부정하기는 어렵겠다. 그러한 감정들이 팬심의 동력이 되는 것이 틀림없지만 그것들 자체에 과도하게 집중하기보다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유진박의 행복한 삶과 멋진 음악생활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유진박에 대한 다큐멘터리, 인터뷰 등을 종종 찾아보곤 하는데, 유진박은 대체로 자신에 대해 말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추측이지만 그가 좋지 않은 일을 여럿 겪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언어 문제를 위시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느끼는 약간의 낯섦 탓에 그의 이러한 성격이 특정한 방향으로 규정되고 개념화됨으로써 부풀려져서 소비되는 점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겪었던 좋지 않은 일들을 조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거의 방송들을 보면 낯설고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점이 내레이터에 의해 종종 언급되곤 한다. 사람이 망가졌지 않냐, 도움이 필요하다 라는 식으로 시청자를 설득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 점이 영 편하지만은 않다. 유진박은 사건사고를 많이 겪었고 그러한 시절이 마치 긴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타인 혹은 스스로에 의해 규정지어질 수도 있지만, 그는 어찌되었든 매일매일 그의 삶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것이다.

유명인에 대해 모든 종류의 답답함, 명쾌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하고 특정한 개념을 동원하여 규정짓고야 마는 것이 대중의 속성이다. 그러나, 정서적 문제를 겪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비록 도움을 주고자 하는 선의일지라도 캐물어 가며 너무 많이 알고자 하는 것이 도움이 별로 안 될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명인과 대중의 관계에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에게 무리가 되지 않는 방식과 수준에서 의사소통을 지속해 가는 것이 건강한 관계가 아닌가 한다.

여하튼 유진박이 매체에 하는 말의 양에 비해 그에 대한 궁금증은 너무 많다보니, 그에 대한 기억과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많은 지레짐작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략 '잊을 만 하면 방송에 나오는 비운의 천재' 정도의 이미지로만 소비되어 온 몇 년을 거치면서도 그의 음악세계는 엄연히 활발하게 살아 있으므로, 앞으로는 유진박 본인의 의사와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는 배려 있는 매니지먼트를 받으며 그러한 부분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 내가 제일 자주 듣는 유진박의 곡은 바이올린 연주만큼이나 보컬의 비중이 많은 "Do it in the dark"(링크)라는 곡이다. 애수가 느껴지면서도 솔직담백한 특유의 분위기가 일품이니 꼭 들어 보시기를 권한다. / 이번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마미손의 인터뷰(링크)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의 맺음을 대신한다.

"저도 처음에 유진박 형님에 대한 인상이, 안타까운 일에 대한 솔직히 동정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당연히 그런 맘이 들잖아요. 만나뵙기 직전까지도 제가 작업 제의를 하고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것도 형님께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고. 만나 뵙고 나서 그게 굉장히 내가 오만한 생각이었고 굉장히 건방진 동정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TV나 이런 데에서 비친 것처럼 그 일 자체는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 맞잖아요? 거기에서 우리가 받는 어떤 감정만큼 형님께서는 불행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공연 어떻게 할까, 바이올린 녹음할 때 잘 했나 못 했나 이런 게 주된 고민과 걱정거리고 관심사고, 음악 안에서 너무 행복하세요, 형님은, 제가 만나서 느낀 바로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가졌던 그런 감정들이 굉장히 얄팍했다고 느꼈던 거였고, 제가 작업 같이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대중들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요. 우리가 이렇게 얄팍한 동정심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되겠구나, 오히려 음악 안에서 지금 행복해하고 있구나, 그리고 앞으로도 더 행복해질 것 같아 보인다라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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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4일 월요일

조국 사태가 남긴 것

1. 여러모로 애매한 사퇴의 시점
  소위 '조국 사태'의 시작은 대략 지난 8월 중순부터였을 것이다. 자녀 입시 및 장학금 문제, 사모펀드 문제 등 일반인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조 장관 일가의 특권들이 드러나면서 논란은 어느새 엄청나게 커졌다. 장관 후보 한 명의 인선 문제가 정권 최중요 인물 급의 거대한 논란으로 점화되어 버렸고, 전방위적 검찰 수사도 진행되었다. 서초동과 광화문에 많은 인파가 운집해서 지지 집회와 규탄 집회를 했다. 검찰개혁의 선봉장을 자처한 후보가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됨으로써,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의의 도식이 크게 꼬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쩌면 조 장관은 처음부터 검찰개혁이라는 과제를 책임지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조국의 사퇴는 한편으로는 너무 늦었다.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조국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총선 부담 등에 따른 연말 사퇴설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논란에 따른 국민적 분열을 감수하고까지 임명된 바, 상처를 감수하고 검찰개혁 특임장관(?) 느낌으로, 검찰개혁안을 어느정도 제도화 선상에 올려놓고 난 뒤에 퇴진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최선의 정국 수습방안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아직 어떤 것도 불가역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조 장관은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예상보다도 더 빠른 오늘 사퇴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의 사퇴는 너무 일렀다.


2. 검찰개혁의 딜레마: 공은 누구에게 넘어갔는가
  솔직히 검찰개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그 요체가 쉬이 잡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지금까지 법무부 개혁위 측과 검찰 측으로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조치들은 부족하나마 괜찮은 방향의 것들이니, 궤도에 잘 올려놓고 나서 사퇴하는 것이 더 책임 있는 모습일 수 있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힘든 것이야 이미 지난달부터 계속 그랬을 테니, 검찰수사 관련해서 새로운 국면이 있거나, 여당 쪽에서 사퇴 압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임명 과정에서 국론 분열은 될 대로 되고 본인과 주변 역시 망가졌는데, 숙원이었던 검찰개혁 조치를 궤도에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기한은 가진 뒤 사퇴하면 안 되었나. 검찰개혁이라는 의제 자체도 그렇지만, 국민에 대한 책임의 측면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검찰개혁의 선봉장이 바로 검찰의 전방위 수사 대상이라는 기막힌 사태에 의해 전선이 복잡하게 꼬여 버린 상황에서 조 장관의 사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장관 일가에 대한 검찰수사가 장기화되는 와중에 장관 발 검찰개혁도 계속된다면 결국 실제의 의중과 별개로, 두 가지 사안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검찰개혁이라는 보편적 의제를, 조국 수호라는 특수한 의제로 축소시켜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퇴와 같은 결단이 필요했다(이는 조 장관의 입장문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기도 하다). 다만 그 옵티멀한 시점은 지금보다 좀더 나중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아쉽다.

  서초동 집회에서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이 동시에 외쳐진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검찰개혁 필요성'이라는 보편적 의제가 '조국 사퇴 트라우마로 인한 검찰개혁 필요성'으로 인식되면서, 보편성을 잃고 세력 간의 복수와 같은 개념으로 축소될 것 같아서 나는 두렵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 개혁의 과정에서는 세력끼리 치고받으면서 승기를 점하는 구도가 어느정도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목표는 '자신들의 승리'가 아니라 제도의 올바른 구현에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 장관은 사퇴했고, 검찰개혁이라는 의제는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긍정적으로든 냉소적으로든 국민 일반에 확실하게 각인되었으니, 그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책임이 붕 뜨면서 국민 전체에 공이 넘어가 버렸다. 지금까지 나온 개혁안들은 물론이고 그 이후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국민적 논의가 충분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3. 윤석열 총장의 딜레마: 검찰개혁을 완수해야만 하는 이유
  모두가 망가지고 있는 이번 국면에서, 최근까지 그나마 제일 '정석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윤석열 검찰총장이다(물론 윤중천 관련 의혹보도는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 하겠다). 권력의 핵심인사일지라도 전방위 수사를 한다는 점, 그리고 임명 취지대로 꽤나 과감한 자체 검찰개혁 방안들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과 같은 이상한 상황에서 그런 '정석적인' 행보를 밟았기 때문에 윤 총장의 의중을 짐작하고 해석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면이 있다.

  검찰이 기존엔 이 정도로 현 정권 핵심 인사를 날카롭게 겨누어 전방위 수사를 한 적이 잘 없다는 것, 그리고 하필 윤 총장 임명 후 첫 대형 이벤트가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였다는 두 가지 우연(?) 때문에, 조국 지지자들에게 윤 총장은 적폐청산 검사에서 순식간에 적폐 검사로 낙인찍혔다(참고로 어린이들을 동원하여 윤 총장 등을 모욕하는 동요(?)를 만든 '주권TV' 채널은 조 장관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트롤러(...)라고 할 만한, 전혀 다른 성향의 채널로 보이던데 동질적으로 취급된 점이 아쉽다).

  윤석열 총장이 검찰 개혁의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검찰을 비호하고자 하는지는 본인만이 아는 일이고 시대가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윤 총장이 청와대에 조국 임명 철회를 건의하고자 시도했다는 설, 그리고 조국 수사 개시 전에 '이러다 정권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라고 사석에서 말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그 말은 현재 국면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을 어느정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엄중한 사안이고 문제가 될 사안인 만큼 검사로서 수사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합당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 장관의 혐의와 별개로, 언론에 수사정보를 흘리는 검찰의 지극히 잘못된 관행도 역시나 볼 수 있었다. 그런 일을 한 일선 검사들과, 윤 총장을 동질적인 행위자로 봐야 할지 이질적으로 봐야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전자라면 윤 총장도 결국 검찰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검사인 것일 테지만, 후자라면 검찰 수사의 잘못된 관행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것일테다. 자극적 보도는 언론의 속성이다. 그러나 그 소스를 제공하는 검찰의 수사정보 유출은 청산되어야 할 관행이다. 일반적인 수사도 정치검찰의 모욕주기로 보이게 만드는, 아니, 스스로를 실제로 정치검찰로 만드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검찰이 다른 세력,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기준을 보여준다면(그러면서도 포토라인 폐지, 수사정보 흘리기 금지 등 개혁조치는 유지된다면), 윤 총장의 행보는 모두에게 비교적 긍정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교적 건실한 정권의 핵심인사를 겨눈 전방위 수사가 이번으로 일회적인 데 그친다면,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친문 지지자들의 실망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윤 총장은 더욱더 임기 중에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야만 하게 되었다. 용의자 인권 보호와 같은 조치는 물론이고, 눈치를 봐서 수사를 안 하거나, 타겟을 잡아서 표적수사를 하는 등의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고 공명정대한 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4. 기타: 권력과 특권을 성찰하자
  내가 생각하는 현 정부여당 집권층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들 권력은 진짜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특유의 태도이다. 김정호 의원이 공항 직원에게 갑질하면서도,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으로서가 아닌 저항적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상징적 장면이다. 또한 김의겸 대변인 사퇴 때처럼, 중요 기관 관계자들의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들이 자꾸만 보도되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본다.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발언들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최근 '조국 사태' 국면에서도 이러한 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알릴레오 인터뷰로 며칠간 화제의 중심이었던 유시민 이사장은 자신을 유튜브 언론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한테 무슨 권력이 있냐'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최성해 동양대 총장이 조국 관련 폭로를 하자 전화를 걸어서 노골적인 압박을 하면서도 그것이 압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국 장관 본인이 일가를 수사하는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걱정되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수도 있지만, 논란 당사자이자 잠재적 수사대상인 실권자로서는 결코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나치게 잘 행사하면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되지만, 자신의 권력이 권력인 줄 모르면서 행사하면 추한 존재가 된다. 다들 본인의 권력을 인지하고 자중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조국 일가에 대한 논란, 특히 입시 및 장학금과 관련되어 대두된 공정성 담론이다. 조국 자녀 논란은 웬만큼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도 상상도 못할 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명문대라고 하는 곳들에 있는 많은 기회들도 일반적으로는 제도의 형태로 포장되어서 주어지는 것이지, 조 장관의 자녀처럼 관계자로부터 특별하게 케어받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공정성' 담론은 주로 공정성에 그치며, 특권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까지 도달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겠다. 결국 공정성을 위해 입시 등의 과정에서의 각종 제한과 감시를 강화하는 것을 넘어, 입시를 물질적으로 추동하고 있는 기회 자체의 불균등함까지 해소해야 한다. 교육 기회의 확대와 동시에, 각급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들에서 특권적 색채를 지우고 공공성을 강화하여 그 기회가 분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 오세정 총장이 구성원 특혜에 대한 성찰과 공공성 강화의 일환으로, 고교와 교육청을 통해 신청할 수 있는 인턴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지인 통해 알음알음 인턴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성적 장학금을 폐지하여 소득 장학금을 강화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늦었지만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에 대한 고민은 정해진 룰 하에서 반칙이 있었는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룰 자체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데까지 도달해야 한다.

  끝으로, 스누라이프 인용해서 기사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들인데 언론을 타면서 과대 대표되는 경향이 있으며, 눈치를 봐야 해서 싫다는 사람도 있지만 기사화가 꾸준히 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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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2일 목요일

휴먼아시아 청년인권활동가 워크숍 참여 후기

  여름방학 동안 휴먼아시아 청년인권활동가 워크숍에 참여했다. 이주민 인권 문제 및 상호문화교육 방법론 관련해서 이슈들을 빠르게 따라갈 수 있도록 7월 한 달 동안 활동가 분들의 수업을 집중적으로 들었고, 중고등학교에서 강의할 나름대로의 강의안을 만들어서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는 시간도 가졌다.

  8월 동안에는 현직 교사 분들의 피드백을 받았고, 각 조별로 자율적으로 모여서 강의안을 마저 개발했다. 학교라는 기관에 가서 수업하기에 적합한 형태로 인권교육 강의안을 구성하려다 보니 고려해야 할 점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도 많은 분들께 피드백 받으면서 내용을 어찌저찌 구성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조원들 파트가 워낙 좋았어서... 여튼 8월 28일에 서울 중화고등학교에서 <이주인권교육: 세계시민적 관점으로>라는 제목으로 밀도있는 수업을 마쳤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학생분들이 잘 따라오지 않았나 싶다.

  수업이란 걸 할 때 단순히 내용 구성뿐 아니라 그걸 어떻게 전달할지, 어떤 태도로 전달해야 오해가 없을지 등에 대해 다같이 고민해본 두 달이었다. 다수 청중 앞에 서서 말하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늘 잘하고 싶어하는지라, 내 개인적으로도 배움과 도전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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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9일 월요일

사변적 이론체계의 힘에 대하여: 이우창 선생님의 글을 읽고

아래에 소개할 이우창 선생님의 글은 매우 매우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사변적 이론체계를 대하는 연구자의 메타적 태도와 관련하여 내가 지난 수 년간 막연하게 가져 왔던 문제의식의 상당 부분이, 이 글에 명료한 언어와 적확한 예시를 바탕으로 제시되어 있다.

거대도식이 제공하는 미적 매료와 강한 설명력의 뒷면에는 많은 비약과 디테일의 생략, 목적에 복무시키는 경향 등이 있음을 습관적으로 기억하면서 그것을 조심스레 다루어야 할 것이다. 사변적 상상은 대범하고 유쾌하게, 내딛는 발걸음은 엄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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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서울대의 미래: 결국 구성원의 실천만이 신뢰에 기여할 것

  학교 안에서 지켜본 바로는 트루스포럼이라는 기독보수 집단과, 현재의 비운동권 총학생회 및 그 주변 사람들은 그 기원도, 정서도, 활동도 매우 다르다. 그런데 최근에 캠퍼스가 정치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는 과정에서, 캠퍼스 외부의 조국 후보 지지자들에게 그 둘이 비슷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특히 김어준은 서울대 집회를 주최한 곳이 바로 트루스포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트루스포럼의 성격을 이해하는 건 단지 일개 캠퍼스 내의 문제가 아니라 중앙정치에서의 세력 구성에 대한 이해와도 약간은 연결이 되는 문제라서 김어준 같은 사람이 모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왜곡을 위해 그 차이를 일부러 뭉갰거나, 아니면 애초에 자세히 알아보지조차 않은 것 아닐까 싶다. 왜곡에 따른 반발이 있더라도, 공격은 어차피 효과적으로 먹힐 것이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이전에 나는 2010년대 초반의 청년보수가 박근혜 탄핵 이후로, 트루스포럼 류의 기독보수와 유튜브 채널 등을 함께하면서 어떤 면에서 실질적인 교집합을 형성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탄핵 이후에 등장한 '보리수'(?)에게선 그런 현상을 직접 관찰하지는 못했다. 또한 스스로는 비정치적임을 선언하지만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보리수(?)와 종종 유사하다고 간주되는 현 비운동권 총학생회 역시 그렇다(다른 관찰들이 있다면 댓글로 말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다). 정치적 공세 국면이라 가려지는 면이 있어서 이런 건데, 역사적 기록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명백히 다른 집단들을 좀 더 자세하게 나눠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순전히 내 감상을 적으려고 쓰는 것이지, 누군가를 두둔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캠퍼스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해 온 얘기들이, 캠퍼스 밖의 국가적 정치 이슈 속에서 계속 호출되고 있는 현재의 상태가 매우 흥미롭긴 하지만 다소 혼란스럽고 두렵다는 느낌도 있다. 학내 정치가 갑자기 훨씬 더 크고 무서운 중앙정치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예컨대 강용석이 취재하러 온 것도 그렇다.

  조국 교수 논란과 그에 따른 시위를 거치면서 서울대는 이전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해서 혜택을 누린다는 식의 막연한 전통적 도식(주로 입시생들 동기부여에 자주 쓰여 온)은 통하지 않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는 것인지, 또한 그것이 왜 정당한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낼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이 학교 사람들의 많은 수가 상대적으로 큰 사회적 혜택을 받아 왔고, 사회적 시선도 많이 쏠린다는 것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 이 논란 이후에 적폐 집단이라는 식의 인식이 자리잡지 않기를 원한다면 누구의, 어떤 지혜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 그게 과연 누군가의 지금 당장의 지혜만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이기는 할까. 결국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증명해야/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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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4일 토요일

학부 졸업을 앞두고

학교는 대학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카데미에 원활히 편입될 수 있도록 많은 자원들을 제공한다. 인턴 같은 기회가 대표적이다. 학부 오래 다니면서 복수/부전공, 수업, 동아리 등 후회없이 하긴 했지만, 그런 걸 충분히 활용 못 한 건 아쉽다. 돌아보면 그때 그냥 하면 됐지 싶은데, 당시에 그게 막막하게만 느껴졌단 건 내 시야가 그 정도였다는 것이겠다.

그래서 뒤늦게 졸업논문 쓰기 시작했지만 재밌게 진행을 했다. 전기과에선 control theory 쪽으로 했는데(Stability Analysis for Newly-proposed Distributed Kalman Filtering Algorithm), 물리학, 응용수학 쪽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교수님께서 관련된 주제 추천해 주셔서 재밌게 할 수 있었고, 이게 지금의 희망분야 선택에 큰 계기가 되었다. Multi-agent system의 collective behavior를 다루는 수학적 framework는 제어이론에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일부 분야에까지 공유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리과에선 멱법칙, 상전이 쪽으로 주제 잡아서 진행을 했고(Power-law Degree Distributions and Percolation Phase Transition Characteristics of 3-dimensional Weighted Stochastic Lattice), 막판에 조교님이 코딩도 많이 도와주시고 글쓰기도 피드백 주시는 등 많이 신경써 주신 덕분에 논문 쓰는 기분을 상당히 내 볼 수 있었다. 논문 검색 중에 찾은, 기존에 존재하는 2d 모델(WPSL, weighted planar stochastic lattice)을 고차원으로 꽤나 trivial하게 확장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주제를 정했다는 점에서 동기 부여가 많이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주제임에도, 프로그래밍 능력이 부족한 덕분에 실질적 구현 중에 꽤 고생을 했고 조교님의 결정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훨씬 더 축소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미학과 쪽도 많이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사실 내적친밀감은 이쪽이 제일 컸던 것 같기도), 부전공이다 보니 졸업논문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글쓰기 훈련을 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그래도 영미미학연습 수업에서 레포트 피드백은 한 번 받아 봤다). 철학, 미학 쪽으로 얘기 나눌 지인도 별로 없었고 해서 페이스북에 그런 쪽으로 글 많이 쓴 것 같고, 그 덕분에 페이스북 친구 분들과도 많이 교류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졸논 2번 다 랩에 자리 얻어서 출퇴근하고 랩미팅 가는 식으로는 못 한 게 아쉬워서, 지난 겨울방학 동안은 카이스트 물리학과의 연구실에서 개별연구를 했다. 여기서도 출퇴근은 안 했지만 매주 랩미팅 가서 피드백을 받으니까 상당히 빠르게 발전을 했다(물론 초기값이 낮아서 ㅎㅎ). 교수님도 늘 친절하게 조언 주셔서 개인적으로 무척 가치있게 느낀 시간이었다.

3월에 마음을 잠깐 바꾸어서 전기과에서 ML이랑 통신 이론 하시는 교수님께 예비 컨택도 해 뒀는데(물천이랑 반대로, 전기과는 입시절차와 동시에 지도교수를 정한다), 물리를 부전공한 분이다 보니 내 상황을 잘 이해해 주셔서, 좀더 고민해 보고 결정하라고 하셨다. 그 때도 카이스트 쪽 교수님께서 시간 내서 설득해 주신 덕분에 흥미 따라서 물리쪽으로 진학을 결정했다. 공부 더 하고 싶은데 안 하면 후회할 테니, 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나.

카이스트로 가려고 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몇 번 얘기했었는데, 개별연구 했던 랩이 워낙 인기가 많은데다, 후기라 TO 문제도 있다 보니 아무래도 자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물론 여기서도 원하는 랩 가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리천문학부의 경우 연구실 결정 전에는 인턴도 원칙상 불가능하다고 해서, 공부하고 알바하고 수업조교 하고 그러면서 준비하게 될 듯하다.

연구실이 결정될 시점(올해 12월)이면 학부 동기들은 표준적으로 이미 석박통합 2년을 마친 시점일 거라(학부 3학년 때부터 연구실 생활을 했다고 치면 무려 4년 차이), 늦었다는 조바심이 많이 든다. 뭐 늦은 건 늦은 거고,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준비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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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0일 화요일

조국교수 논란에 부쳐: 특권에 의한 공공성 훼손을 강력히 규제하자

  논란이 되고 있는 조국교수 딸의 연구참여는 고교에서 대학 등의 기관과 연계하는 프로그램이었나본데, 그걸 각계의 지위 가진 학부형들이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하도록 한 것이 상당히 놀랍다. 아무 학교에서나 하지 못할, 위화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한 발상이고 공공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사회적 위화감과 교육 공공성의 문제를 넘어 지금의 인사청문회 국면에서 조국 후보자에게 직접적으로 문제제기할 만한 것은 이 프로그램 자체라기보다는, 무리하게 1저자를 받았다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결국, 대학교수가 개인적으로 알음알음 진행한 이러한 배경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이건 고교 입장에서나 '프로그램'이었지, 사실 대학 입장에서는 학교의 자원을 자기도 모르게 고교생 개인 스펙을 위해 나눠준 셈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는 이런 프로그램을 교수 개인이 비공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공식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그리고 사전에 보고받도록 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단국대학교의 입장은 꽤나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우수한 학생 있으면 끼워서 논문 쓸 수 있지' 이런 예외적인(?) 느낌이 아니라, 상시적, 공개적으로 운영되는 쪽으로 대학 차원의 프로그램이 아예 마련되어 버렸으면 한다. 그러면 예컨대 지역 사회에 기여한다던지 하는 공익적 목적도 생길 수 있을테고 말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부당하게 할 사람들은 언제나 생길 것이고, 지역/학군 등에 따른 위화감이 빠르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학연계 프로그램이 최소한의 공적 가치라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은 이쪽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더 나아가서 수시입학 제도에 대한 뿌리깊은 국민적 불신을 완화하는 것과도 관련될 것 같다.

  조국교수와 같이 사회적 입지를 가진 민주/진보 인사들에게서 발생하는, 정치적 소신과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공적 영역에 진출하고자 할 때 받는 국민적 요구들과, 자녀교육 및 개인의 경제적 풍요를 위해 해 온 일들 사이의 충돌이 그 자체로 뭔가 비극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여기서 비극적이라는 건 당연히 감정적으로 슬프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모순이 누군가에게 발생하도록 사회적 구조가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의 첨단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비난을 피하기 어렵고 말이다.

  물론 위화감 그 자체만으로는 특정한 이윤 추구 행적이 '부당하다'고 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테니,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활발하게 필요할테다.

  나는 개인적 영달을 위한 찜찜한 선택의 순간에 사회적 소신에 따라 그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도덕적인 '성자'와 같은 공인들이 많아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그 자체로야 훌륭한 일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 선택지가 그들에게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는 환경, 그리고 설령 눈에 보이더라도 감시 및 견제 장치가 많아서 비자발적으로 포기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사회 주류집단에는 그러한 견제 장치가 없었고,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 오던 사람들이 공직에 오르려 할 때 언제나 망가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순 없이 정의로움을 유지하려면, '안' 하기보다는 '못' 하는 방향밖엔 없는 것이다.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국면에서 보이듯이 이런 쪽으로 개혁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그 문제의 당사자들이고(...), 그들이 공직에 나서고자 할 때 언제나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되어 실망감을 안기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신뢰를 형성하고 바꿔갈 수 있을지, 찜찜하고 부당한 일들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참 막막하고 답답하긴 하다.

  더불어, 이런 구조를 비판하는 청년들의 언어가 등장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주로 특정한 세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런 구조의 첨단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기성 보수 언론이 그들에게 부여한 '386 세대'와 같은 단어는 '내 언어'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오히려 그 단어를 사용할수록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거라는 불안감이 든다. 민주/진보 인사 개인을 비판하되, 그 사람들 개인이 위선적 운동권이라는 식의 비판에 머무르기보다는 그들이 그렇게 된 요인도 함께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 장기적인 해법이 등장하면 현재의 보수언론이 좋아할까? 그러지 않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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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7일 토요일

인공적 자연으로서의 영화적인 것에 대하여


  이전에 진정한 대중예술이 될 수 있는 장르로 야인시대 합성물을 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그 후보는 하나 더 있다. '영화 예고편'이야말로 독자적인 장르로서, 문화산업의 영역 바깥에서 대중에 의해 창작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사례 중심으로 이 가능성을 검토해 보면서 영화적인 것 전체에 대한 고찰로 확장해 보자(작품(?)별 링크는 하단에).

  영화의 예고편은 본편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독자적 문법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고편들은 영화 본편의 흥행이라는 목적에 복무하고 있는 면이 많다. 그런데 그러한 문법을 파악한 대중들은 종종 대응되는 실제의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순전히 독자적인 컨텐츠로서의 '영화 예고편'을 창작해 내곤 한다. 이 새로운 장르의 등장은 그 기원을 생각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으로, 대부분 기존 유명 영화 예고편의 주된 요소(주로 OST)를 그대로 채용하여 본인이 창작한 다른 장면들을 끼워넣는 방식이지만([1], 주로 중고등학교 UCC에 이러한 방식이 많다), 때때로는 한 예고편을 다른 예고편의 스타일로 변환하는 방식이기도 하다([2],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예고편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겨울왕국>의 가상 예고편을 만든 사례). 심지어 내용을 철저히 삭제하고 형식만을 남김으로써, 블록버스터 영화 예고편의 '공식'을 노골적으로 지적하여 웃음을 주는 영상도 있다[3].

  우리는 어떤 영화들이 지나치게 전형적이라고 종종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런 영화들이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임의의 '영화적인 것'(영화 예고편, 포스터, 플롯, 배역 등)과 결부지을 수 있는 대략적인 얼개만을 지닌 어떤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바로 그 얼개에 대응되는 전형적인 영화 한 편 혹은 그 일부를 마음 속에서 구성해 낸 듯한 느낌을 받고, 그 영화를 실제로 재생하여 감상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으면서 '영화 한 편 다 봤다'고 말하곤 한다. 인터넷에서는 종종 이러한 심적인 경향을 구체화하여 직접 표현하기도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예시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주제로 한 가상의 영화 '제 78수'의 포스터[4], 그리고 그것과 동일한 주제로 쓰인, 황정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상의 플롯[5]이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대중적 화제가 되고 있는 특정한 이벤트를 영화라는 우수한 형식의 일면 속에 배치하여 특유한 효과를 노리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의 정형화된 형식에 대한 조롱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한편 우리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화 같다', 혹은 '영화보다 더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런 표현에는 사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관조한다는 데서 오는 윤리적 문제성이 있으나 일단은 차치하고, 이런 표현을 할 때에 우리가 어떤 가상의 영화를 연상해내어 해학적으로 향유하면서 집단적으로 위로받는 경향을 갖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물론 심각한 사건일수록 이러한 문학적 연상작용은 당장은 심리적으로 거부될 것이다). 2016년에 최순실 게이트가 거대한 논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모종의 '영화적인 것'을 차용한 패러디물이 다수 생산되곤 했다. 김경진 의원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압박하는 장면에 음악을 깔아 느와르 영화처럼 편집한 작품[6]도 기억에 남고, 논란이 생겼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너의 이름은>의 예고편을 패러디한 '동무의 이름은'[7], '너의 실세는'[8] 등의 가상 예고편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아니지만 또 하나 특이한 것으로는, 당시 시국을 드라마로 만든다고 가정할 때의 '가상 캐스팅'[9]도 있다. 이러한 컨텐츠들은 경건하다기보다는 해학적으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순수 창작이 아닌 재구성이라는 방식이 갖는 유머러스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우리는 실제 영화에 비해서 훨씬 적은 자본만 가지고도 전형적인 영화가 주는 감동을 어느 정도 내적으로 모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익명의 제작자의 실감나는 표현에 대해 감탄함과 동시에, 정형화된 감동을 이끌어내는 영화들에 대한 모방으로서의 - 우리 스스로가 마음속에 만들어낸 - 가상의 영화를 감상하면서 웃음을 맛본다.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듯 이러한 모방은 영화라는 형식에 대한 경의이자 적극적인 활용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형식의 정형화를 지적하는 풍자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방향이던간에 그러한 컨텐츠들은 산업의 영역 바깥에서 오로지 대중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점에서 대중문화를 기층에서 추동하는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사실 영화적인 것이 가진 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결국 그러한 대중문화는 영화산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에서 영화가 갖는 이러한 성격은 마치 '자연'이 가지는 성격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는 대중예술을 표방하여 만들어졌고 대중에 의해 향유되고 있으나 대중에 의해 생산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포스터, 예고편, 심지어 캐스팅 등 어느 정도 독자적인 미학적 성격을 갖는 주변적 산물들을 동반한다. 현대의 대중은 이렇게 문화자본에 의해 생산되어 종합적으로 다가오는 '영화적인 것'에 대해 매우 익숙하며 직관적으로 상당히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주변적 산물들을 모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모종의 영화적인 것을 생산해 내곤 한다. 초기 인류가 자연이라는 절대적 형식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바위 위에 그리면서 향유하였듯이, 현대인들은 영화라는 인공적인 형식에 대한 미메시스를 통해 영화적인 것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재현하고 향유하는 것이다.

[1] 유튜브 '영화 예고편 패러디' 검색 결과: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영화+예고편+패러디

[2] '엔드게임 제작진이 《겨울왕국》을 만들면 벌어지는일': https://www.youtube.com/watch?v=pT2Oawi330I

[3] 'How to Make A Blockbuster Movie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KAOdjqyG37A

[4] '[이세돌-알파고] 이세돌 첫 승리에 가상영화 등장?… "영화제목은 제 78수"':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0140&fbclid=IwAR3qMMTkHVIdOuw-xTfu1D0LHm06kUy26PyRTSfrQx-s1LZ1ONBFsdnsEbY

[5] 'CJ에서 황정민 데려다가 알파고 vs 이세돌 영화를 만들면ㅋㅋㅋ.jpg': https://www.instiz.net/pt/3655327

[6] '청문회 스릴러 (출연: 우병우 / 김경진 의원 / 김성태 의원)': https://www.youtube.com/watch?v=KPA24azHn3U

[7] '동무의 이름은': https://www.youtube.com/watch?v=jVQeuf6F5d0

[8] '[너의 이름은 패러디] 너의 실세는。메인 예고편 (박근혜, 최순실 주연 / 君の名は parody)': https://www.youtube.com/watch?v=X-h16VakV1g

[9] '최순실게이트 가상캐스팅':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327149&fbclid=IwAR1l7yswePW0xmjBrgB0-fqoYiS7Q-Ccns-Qp61bfXuIk_E0yGeb1Dikp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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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4일 수요일

'불편한 진실'을 지혜롭게 다루기: 방해물이 아닌 동력으로

  위안부 담론에 비판적인 관점들 중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것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적이 있느냐, 자발적인 위안부도 있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의도적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보거나, 더 나아가 통념과 다른 일종의 '불편한 진실'을 강조함으로써 위안부 문제 속에 있는 인륜적인 부분을 탈색시키려는 관점들이다. 그러한 관점들이 작동하면서 담론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여 상당히 유감스럽다.

  조금 다른 문제로 비유를 하자면, 후기 근대국가의 근대화 과정에서 폭력을 동반한 전통사회의 해체가 어느정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역사적 관찰이 있다고 해서, 혹은 전통사회 내에서도 근대화의 적극 협력자들이 있었고 이권을 이유로 한 내부적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폭력을 겪은 것이 피해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이건 21세기의 개발사업 등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비극들을 인정하고 부각하는 것이 국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데에 방해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마치 통념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한 다양한 이야기들에 주목하여 가시화하는 것이 바로 합리성을 담지한 사람들의 몫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의 존재를 반드시 위안부 문제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복무시킬 이유는 없지 않는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스탠스의 학자 및 스피커들이 통념과 다른 이야기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복무시키면서 시민단체의 반발을 사고, 그럼으로써 더욱 더 설 땅이 없어지고 '흑화'한 일련의 비극적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이런 얘기다. 한국군도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것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서 전혀 뼈아프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사건에는 특수한 성격과 보편적 성격이 작용하는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후자의 측면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한국 정부가 자국에 의해 이뤄진 폭력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한국의 민족주의적 주장이기보다는 세계시민적 보편가치에 근거한 주장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이상적이겠다.

  물론 국제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구도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기는 할 것이나, 국내의 시민적 담론이 그러한 방향으로 형성되어 뒷받침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의 한국정부가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여지에 있어서 은근히 중요할 수 있겠다는 것을 요새 느낀다.

  일본군 위안부의 자발성 주장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야기들을 강조하여 위안부 담론을 허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보편성에 기대어 특정 사안을 무력화시키려는 경향과 통해 있다. 사회에서 늘상 일어났던 성의 산업화의 연장선이므로 특수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안의 단편적이지 않은, 통념과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부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그 사안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필연적으로 흘러가야 하는가. 이것은 그 이야기들을 하필 그 사안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복무시켰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정반대로 활용될 수 있다. 일례로 해방 이후 미군 기지촌의 성매매 역시 잘 알려져 있고 그에 대한 문학 작품들도 많이 나왔으나, 그러한 문학 작품들에서 꼭 일방적 피해자만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어느정도 주체적이고 일상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설정함으로써 사안에 '보편성'을 부여한 것이 과연 기지촌의 문제성을 희석시켰는가? 오히려 정반대로,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포함시킴으로써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보편성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내친김에 좀 더 넓혀서 식민 지배 그 자체에 대한 담론도 이야기해 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이 마치 반일 담론의 핵심 논리를 파훼하는 '불편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또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이것이 대단히 부당하다고 본다.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본래 물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근대화는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아름답지 않으며 늘 폭력이 동반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널리 관찰되는 것 아니었나? 해방으로 인해 현재 일본과 한국이 독립적인 두 국체로 되었고 각자의 민족주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폭력에 대한 문제성이 남아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주장되는 것이며 그것이 딱히 부당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식민 지배 문제에 대해 냉소적인 일각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과를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나? 보상금 얼마를 줘야 만족할 건가? 대체 어떻게 사과해야 진정성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부당한 구도이다. 사과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척도로써,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개를 몇 도 숙여야 하냐'는 식의 단편적인 기준만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한국인들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들므로 상당히 악의적이다.

  도대체 한일협정 이후에도 식민 지배 문제가 왜 계속 호출되는가? 첫 번째로 한일협정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정권이 상당히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이므로 시민적 차원에서 해소되지 않은 문제성(이것이 '한'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이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 일본이 '사과하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교육 등에 있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직시의 측면이 매우 미흡하므로 문제가 궁극적으로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보편화하기에 용이한 기준(사과를 분명히 받았고, 돈도 받았다)들을 근거로 해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다소 복잡한 문제성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앞의 내용들과 어느 정도 통한다.

  보편적 관찰, 통념과 다른 측면, 생각보다 일방적이지만은 않은 구도, 불편한 진실 등에 의거한 우파적 공격을 모두 안고 가면서도 인륜적 문제제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전선의 설정이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어떤 사안의 특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그 사안의 보편적 측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구도는 대단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취함으로써, 보편성에 의해 취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에 의거해서, 혹은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물론 판 자체가 새로 짜여야 하는 것이라 실질적으로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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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3일 토요일

인터넷 덧글창과 어린이의 마음: "원초적 정신"의 관점으로


1. 인터넷 덧글창에 대하여

  상호성이 강한 SNS 및 각종 커뮤니티를 제외한 일반 포털의 경우, 덧글창이라는 곳은 늘 내게 묘한 영감을 준다. 살펴보다 보면, 정신 속에 오랫동안 덮어뒀던 곳이 바늘로 쿡쿡 찔리는, 그러나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느낌이다. 단순히 댓글들의 내용이 놀랍다거나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묵묵히 존재하는 덧글창이라는 공간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댓글들이 메아리치며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런 아련한 심정상태를 유발한다.

  기업형 블로그, 네이버포스트, 그리고 메인에 뜨지 않은 뉴스 등의 덧글창을 보면, 답변이나 답글이 달릴 것이라고는 딱히 기대하기 어려움에도 사람들은 그 곳에 자신의 의식과 정서를 투자하여 덧글을 작성한다. 그리고 그 덧글은 그 상태로 그 서비스 속에 반영구적으로 남는다.

  덧글 작성자들끼리 싸우는 것이라던가, 정치 단체에서 ‘작업’ 들어가서 정치적 덧글 쓰는 것은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그것들보다는 누구인지 모를 익명의 네티즌이 오롯이 자기 내면의 솔직한 생각을 투사해서 쓴 덧글들이 내게 그런 아련한 느낌을 준다. ‘외로운’ 덧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덧글들을 어릴 때 종종 몰두해서 쓰곤 했던 나의 모습도 회고해 보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그게 ‘상호적인’ 의사소통 과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철저히 ‘내적인’ 언어화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공간에서 여전히 그렇게 하는 다른 사람들, 그걸 볼 때마다 그것을 아주 잘 이해해 버리는 내 자신의 모습, 한 때는 융성했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곳에 있는 덧글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 그런 곳들에 표출되어 메아리치고 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 속에 있는 비일상적인 모멘트를 자극하곤 한다.

  인터넷에 저런 방향으로 종종 몰두하곤 했던(또한 그럴 수 있었던) 어릴 때의 심정상태가 나는 대체로 짠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면서, 또한 은근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하필 그 때 주로 그렇게 했던 이유는 단지 시기상으로 그런 게시판들이 내가 어릴 때 융성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덧글창의 속성과, ‘어리다’는 속성 사이에 무언가 개념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




2. 어린이의 마음에 대하여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터넷 중독이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관심사의 균형이 맞춰지고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환경에서 꽤나 바람직한 양육을 받았는데, 인터넷을 할 때에는 그것을 활용하는 방향이 저랬을 뿐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인터넷 말고 삶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린이의 마음에는 소위 ‘어리광’, 혹은 심하면 ‘땡깡’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있기야 하지만, (불공정한 계약인) 부모-아동 간의 유대 관계에 근거하여, 비합리적인 요구일지라도 나를 봐 주고 챙겨 달라는 호소이기도 한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한 행동을 할 때 나는, 주로 내 호불호에 근거하거나 뭔가 명분을 잡아서 고집을 부렸지만, 정작 나 스스로도 그러한 행동을 명시적으로 의도하고 통제하는 수준의 메타인지는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볼 때에야, 요구 사항 자체보다는 유대 관계의 확인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비로소 생각이 들 뿐이다.

  또한, 각각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 ‘호불호’에 대한 감각을 강하게 형성한다는 사실도 위와 병렬적으로 짚어 볼 수 있다. 아이들은 경험이 쌓이면서 무언가에는 몰두하고 집착하게 되며, 또 다른 무언가는 거부하게 된다. 그러한 호불호의 감각은 아이마다 교집합도 많지만, 또 매우 특이하게 형성될수도 있으며,  의식적인 것일 수도, 감각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내 예시를 기억나는 대로 들자면, 옷 뒤 안쪽에 있는 상표가 등 위쪽에 닿아서 간지럽고 거슬리는 것을 유난히 못 견뎌해서,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위로 떼어내 주셨었다. 또한, 옳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화나는 것과 별개로, ‘나는 부조리를 싫어한다’라고 다소 의식적으로 정체화를 해서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정도면 평범했지 싶다. 아무튼 이러한 호불호의 형성 역시, 위에서 서술한 유대 관계 확인 욕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어린이들마다 다르게 형성되는 원초적인 호불호의 감각, 그리고 유대 관계 확인의 욕구를 나는 ‘원초적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나는 신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다소 두렵다고 느낀다. 나도 모르게 형성되는 그러한 감각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세련되게 포장되면서 그 날것의 형태로서는 거의 무뎌지거나 잊힌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그러한 감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때 나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됨과 동시에, 앞에서 쓴 인터넷 덧글창을 볼 때처럼, 약간 비일상적이지만 꼭 피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3. 종합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인터넷 덧글창과 어린이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 소재를 나는 이상하게도 굉장히 비슷하게 느낀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서 적어 본다. 우선 두 가지 모두, 상대방을 향한 유효한 의사소통의 요구라기보다는 내적인 심정상태의 외적 표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두 가지 모두 결코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성을 나름대로 이리저리 적용해 보며 발전시키는 필수적인 사회적 과정일 테다 (사이버네트워크의 경우, 이러한 과정은 각각의 사람뿐만 아니라 인터넷 스스로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가지 소재의 공통점을 '미성숙한 단계의 사회성'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소재 모두, ‘권력’이라는 단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의 덧글들은 종종 권력자들에 대해, 혹은 심지어 그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것들은 권력자와의 실제 의사소통 시도가 아니므로 당연히 실질적/직접적인 소통으로 가 닿지 않는다. 아이가 갖는 호불호 감각의 경우에도, 주로 아이 자신과 양육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 균형(아이는 아이라는 사실 자체로 챙김받을 권력이 있으나, 양육자는 실질적으로 챙겨 줄지를 결정할 권력이 있음) 속에서 서로가 가진 권력을 본능적으로 견주어 보는 형태로 드러나지, 합리적 의사소통의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인터넷 사이트는 기술적인 한계와 일관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에 (특히 뉴미디어가 아닌 전통적 포털의 경우) 행위의 선택지와 상호작용의 방식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제한되어 있다 보니, 그 구조가 다면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인간의 원초적 정신을 닮아 있고, 따라서 그런 원초적 정신이 표출되기에 상당히 적합한 공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통적 포털에 비해 뉴미디어 환경에서는 상호작용 방식의 선택지가 많고 또한 ‘사회성’의 모멘트가 강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기가 힘들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세련된 의사소통은 권력의 행사를 간접화하는데, 이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원초적 정신이 가졌던 미성숙한 사회성이 고도의 사회성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은 일이고, 또한 어린이들이 발달하고 성장하면서 겪는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예시를 끌고 와서 마무리를 해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초기에 형성된 원형(archetype)적인 이미지들과 그것을 재조합한 레트로한 아트워크들이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아트워크들에서는 인터넷의 원시적 시기에 업로드되거나 생산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편집되고 조합되어 등장한다. 초기의 인터넷 컨텐츠들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원초적’이라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또한 실제로 내 어린시절에 그것들이 급속히 발달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내 정신의 초기적 구성 요소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꿰뜷는 키워드는 역시나 ‘미성숙한 사회성'이 아닐까 한다. 배제할 수도 없지만 익숙하지 않고 낯설 수밖에 없는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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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8일 일요일

19세기 일본의 과학기술 인식

19세기 일본의 과학기술 인식
: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야먀모토 요시타카)을 읽고

  과학기술학 스터디에서 읽고 있는 재미있는 책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야마모토 요시타카)에서는 일본이 1800년대 중후반에 걸쳐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인식하고 발달시킨 특유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개국의 타이밍'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한다. 비단 과학기술 그 자체뿐 아니라, 다소 막연하지만 과학기술과 결부된 일본 특유의 문화적 이미지에도 그런 요소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이 근대화를 도모하던 1800년대 중후반은 서구에서 뉴턴역학에 이어 전자기학과 열역학이 정립된 시점으로, 물리학이 형이상학과 신학으로부터 완연하게 독립되어 그 자체로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하도록 정립되었던 시기이다. 또한 내용적으로 보면 양자물리 등의 현대물리학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시점이고, 물리학이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고전물리학 이론을 외부 세계에 적용하는 '지구물리학' 등의 연구,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주도하는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 등이 진행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놓여 있던 서구 과학기술을 수용한 일본은, 재래의 공업과는 달리(그리고 지적 유희에 가까웠던 초기의 서구 과학과도 달리)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과학 이론이 교육되어 직접적으로 기술적 산물들로 연결되는 일련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궁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교양 물리학이 유행하였는데, 궁리학 저서들에서도 물리학은 그 자체의 이론적 흥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자연스레 기술적 응용, 국가 부강과 결부지어 소개되었다(그 대표적인 예가 증기기관과 철도에 대한 엄청난 경외감이다). 근대적 인프라들의 탄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면서, 그 자체의 이론적 완성도도 매우 높아진 상태의 고전물리학을 수용함으로써, 자연을 이해함으로써 조작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정복적이고 낙관적인(따라서 상당히 제국주의적인) 경향을 일본은 가지게 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일본의 개국이 서구에서 현대물리학이 등장한 이후에 일어났다면 일본의 과학기술 수용 양상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는 저자의 상상도 흥미롭다. 이러한 상상은 21세기에 유행하고 있는 (주로 미국식의) 교양 물리학 서적이 대체로 현대물리를 선호하며, 우주의 넓음과 양자세계의 불확정성 등에 대해 지극히 '자기수양'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여 소비하곤 하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현대 교양과학 서적의 이러한 '자기수양' 경향은 일본 근대화 시기 궁리학의 '자연 정복' 경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며, 과학의 내용적 특성이 사회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산출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질문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21세기 교양과학 서적의 자기수양 경향은 해당 주제에 깊게 매료된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정신적인, 영적인 부분을 커버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 1800년대 후반의 탈형이상학적인 과학기술에 매료된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영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1868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일본은 중앙집권화를 꾀하면서 상당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는 천황제로 회귀함과 동시에, 그러한 체제를 근대국가화, 현대문명화에 복무시키는 특이한 형태를 정립했다. 그 과정에서 종교적인 색채와 결합한 국가주의가 근대적 일본인의 정신에서 영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두 번째 질문은 스터디원의 흥미로운 지적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일본은 20세기에 등장한 혈액형 성격설, <물은 답은 알고 있다> 등을 비롯한 많은 유사과학 및 컬트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일본의 한 교수가 무언가를 주장했다는 기사는 한국에서도 단골 레퍼토리였다. 이러한 20세기 일본의 유사과학을, 사회상의 변화 속에서 위에서 서술한 19세기적 과학기술 인식의 일부가 계승되고 일부가 변화된 결과로 이해해 볼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것이 스터디원의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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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9일 화요일

<위기의 이성>(줄리언 바지니) - 책의 첫인상

독서모임 차 읽게 된 책인데, 아직 머리말만 보긴 했지만 평소의 생각과 강하게 공명하는 문장들이 많기에 여기에 옮겨둔다.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는 무력하기 그지없고, 한편으로는 너무 폭력적으로 사용되면서 이미 그 빛을 잃은지 오래다. 이렇게 되어 버린 합리성에 대해 사람들이 보내는 냉소적 시선들을 종종 나 스스로도 취하곤 하지만, 그 냉소의 끝에서 결국 나는 합리성의 한계를 한정시켜서라도 그것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면서 생각을 더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유된 토론 공간에서 개인들 혹은 문화들 사이에 상호 이해가 가능한 추론이 존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얇은 이성의 개념이다. (...) 따라서 이 책은 공적 이성이라는 영역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단일한 '이성의 공동체'로 함께 모아 내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의 가장 긴밀한 친구들만이 우리의 가장 심각한 결함을 알고 있듯이, 마찬가지로 이성에 대해 가장 격렬한 회의주의자들이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성에 관한 거창한 신화가 틀렸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 적들이 훨씬 더 파괴적으로 그렇게 해낼 것이다. 따라서 합리성을 옹호하는 나는 우리가 네 가지 합리성의 신화를 익힐 것을 적극 주장한다."

"이성이 존경받던 자리에서 끌어내려진 이유는 너무 높이 추어올려졌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합리성에 대한 더 신중한 버전이 그에 선행한 전능에 가까운 신화적 버전보다 강력하고 유용하다고 판명될 것이다."

- <위기의 이성>(줄리언 바지니) 머리말 中

인터넷교보문고의 <위기의 이성>(줄리언 바지니) 책 소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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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금요일

아닌 건 아닌 거다: 무리한 자기정당화를 경계하며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과학지식(처럼 보이는 것)의 이름을 빌려서 차별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그러면서도 진지한 목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종국에는 모든 걸 진보에 대한 조롱과 희화화로 귀결시키는 우파세력의 행태를 비판해 왔다. 나 역시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미약하게나마 지적해 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러던 이들이 정작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자 본질적으로 정확히 똑같은 종류의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 보인 현장은 참으로 희극적이다. 손아람 작가가 페이스북에 최근에 쓴 글이 댓글로 많은 지적을 받자, 그 글을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손 작가에 대한 옹호에 나선 그 현장에 대한 이야기다(손작가님 Facebook 게시물 링크).
그들은 과학지식(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주장의 확고하고 든든한 근거로 쓰이기를 바라며 직접 인용하거나, 혹은 '그 인용이 사실 이런 의미였지 않겠냐'라고 애써 선해하여 정당화하면서, 정작 그러한 옹호가 무리한 것임이 드러날 때에는 '웃고 넘기면 되는 주장인데 왜 달려드느냐'며, 순식간에 그 지식들을 그냥 편한 대로 쓰다가 버리면 되는 썰풀이 소재 정도로 전락시키기도 하는 모순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옹호자들의 상당수는 손 작가의 글에 대한 비판자들이 '버튼 눌려서'(트리거가 걸려서) 부들부들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들의 태도는 이와 반대로 맥락과 의도를 읽을 줄 아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이 그 글을 유익하게 읽었다는 이유로, 글 속의 문제적인 대목들을 억지스럽게 옹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네를 학습하는 유전 알고리즘을 '문화의 유전'과 결부짓는 주장을 포함하여) 그들이 실제로 '과학적'이라고 여기는 주장들뿐 아니라, 흔히 반 농담조로 '사이언스'라고 불리는, 일상에서 도출한 귀납적 결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손 작가의 골상학 언급은, 최근에 남성 연예인 성범죄 연쇄보도 이후로 유행하는 '역시 관상은 사이언스다'라는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일종의 유머 내지는 수사로 이해하자고 옹호되었다.
그러나 정작 손 작가 자신이 쓴 댓글들에는 단순히 재치있는 수사에 대한 것으로 보기에는 그 무게감이 심히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진지한 변호가 들어 있다(심지어 손 작가는, 자기 자신은 진화론을 지지하고 진화를 이해하고 있으나 비판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완전히 거꾸로 된 생각마저 내비치면서 비판자를 '창조론자'라고 비꼬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아슬아슬한 희화화의 수사들은 만약 탁월하게 구사될 경우 전복적인 언어구사로서 결집을 돕는 강력한 힘을 갖지만, 이런 식으로 한 번 진지하게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힘을 잃게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손 작가의 옹호자들은 그가 한국인들의 전형적 외모 등을 희화화하며 언급한 대목에 대해서도, 그 역시 한국인이므로 당사자인데 무엇이 문제냐며, 유머러스한 서술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레이시즘적 계기로 연결될 여지를 애써 차단하기도 한다. 물론 한국인의 특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외국인이라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상정하여 한국인과 비교하는 레이시즘적인 계기가 직접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준 동양계 서양시민', '문화적 교정' 등의 표현은 만약 우파진영 스피커에 의해서 나왔다면 가히 우리를 아연실색케 할 만한 표현으로, 그 타겟이 내집단인지 외집단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포비아적 뉘앙스로 얼마든지 읽힐 수 있다.
정리하자면, 옹호자들의 위와 같은 태도는 '어쨌든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면 되지 않느냐', '재미있지 않느냐'라는 생각으로부터 오는 지적 안이함, '나는 재밌게 읽었는데 반응이 왜 이렇지'라는 심리적 당혹감, 그리고 '적들이 꼬투리를 잡아서 욕하는 상황을 모면하도록 돕겠다'는 사회적 정의감이 결합해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비판적 독해를 잠깐 접어두고 애써 선해해야만 간신히 옹호가 가능한 대목, 적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만한 대목이라면 그냥 애초부터 글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던 것 아닐까? 그런 대목들이 비유 내지는 수사일 뿐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면 되었던 것 아닐까? 그 대목들에 대한 무리한 옹호를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유머일 뿐이지 않느냐고 일축하는 분열적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정의감을 잠시 유보하고 당혹감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지적 안이함을 비껴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비록 이 상황이 온전히 손 작가가 의도하고 통제한 범위 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스스로도 약간의 당혹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논쟁을 만들어내어 페북 상의 수많은 네임드 분들을 '참전'시킨 손아람 작가의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뛰어나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글 속에 세부적인 결을 많이 설정해 놓음으로써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무언가 논평을 할 여지를 잔뜩 제공하는 글을 쓰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글에 무리한 주장들이 있었다면(실제로 '골상학'을 언급한 대목은 지적이 있자 수정하셨다), 그러한 지적들에 대해서는 비꼬지 않고 책임 있게 대응하여야 마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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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으로부터 포착되는 정신세계

  단지 깨어났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가끔가다 꾸는 내 꿈들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이 별로 없고, 스스로가 가진 건축적 구조를 통해 내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말없이 조건짓는 '공간'들이 부각되어 등장하는 편이다.

  보다 자세히 묘사하자면, 내 꿈에서는 현실에서 경험한 공간들 중 인상에 남은 공간들이 상당히 웅장하게 과장되어, 그리고 때로는 서로 조합되어 등장한다. 그런 공간들 중 특히 자주 등장하는 것들로는, 긴 복도에 작은 공간들이 나뭇잎처럼 달려 있는 전형적인 학교 형태의 공간, 롯데월드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 틀림없는 거대한 실내 놀이공원, (어릴 때 자주 갔던 다양한 콘셉트를 갖춘 찜질방의 이미지가 반영된 듯한) 깊이 들어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들을 보여주는 모험적인 선형적 공간, (중고등학교 때 다녔던 학원 건물들의 구조에 대한 표상으로 추정되는) 좁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직적으로 연결된 각기 다른 테마의 공간들, 건축 자재와 제어설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복잡한 환승 구조를 가진 지하철역 등이 있다.

  이런 꿈 속 공간들에 대한 매우 신기한 점은, 이들이 몇 개월 혹은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꿈 속에 계속 재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 각각의 공간들이 현실 세계로부터 떨어진 어딘가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크게 변하지 않은 구조를 가진 채 말이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명시적 의도와는 상관 없이 형성되는, '정신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어떤 형태로든지 분명히 있긴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정신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지, 그리고 단순히 꿈 속에서 갑작스레 일방적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탐사하면서 시험하고, 나아가 특정 목적으로 활용해 볼 방법은 없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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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7일 월요일

강요되는 근본주의: 그들의 악의적 독해에 위축되지 말자

최연소 연예부장으로서 여러 연예인들에 대하여 비하성, 논란성 기사들을 써서 연예인 팬덤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김용호 기자는, 최근에 우파 싱크탱크를 자처하는 김세의, 강용석의 '가로세로연구소' 유튜브에 출연하면서 배우 정우성이 중졸이므로 변호사 연기를 못 한다는 등의 비하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정우성이 상당수의 진보적 국민들에게 모범적이라고 간주될 만한 사회참여적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에 관심 있는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김 기자가 이번에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을 대표적인 좌파 감독이라며 자신의 채널에서 비난한 모양이다. 우파 진영은 파괴력 있는 컨텐츠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대로라면 '문화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외치는 그의 위기감 넘치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페친 분들이 탁월하게 지적해주신 바 있다.

내가 언급하고 싶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지점은 바로 김 기자의 봉준호 감독 비난에서 엿보이는, 좌파사상에 대한 특정한 악의적 독해법이다. 그는 봉준호 감독이 미국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어 왔으나(아마 <괴물>에서의 비판적 묘사 등을 염두한 것 같다), 정작 대표적인 미국 기업인 넷플릭스에서 투자를 받아 <옥자>를 만들었다며, 이것이 좌파들의 이중성이라며 비판한다.

그러나 현대의 영화라는 것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현대적 체제를 완벽히 벗어난 대안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예술과 인간성을 외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대중문화 장르의 저력 아니겠는가. 이것은 현실과 신념의 중간 어디쯤에서 신념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는 식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을 실천하되 어떠한 방식으로 실천하는지와 관련된 '양태'의 문제이다.

즉 김 기자의 이러한 비난은 좌파사상에 대한 '근본주의적' 독해를 악의적으로 취함으로써 발생하는 잘못된 비난이다. 조금 확장해 보자면, 이것은 최근에 청년보수 진영과 극우개신교 진영 등에서 다수 생산되는, 좌파, 운동권 등을 비판하는(그러면서 문재인 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칭하며 좌파세력과 동일시하는) 뉴미디어 컨텐츠들이 높은 비율로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좌파라면 모름지기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알고 있는 전통적, 전형적인 좌파의 모습(주로 90년대까지 융성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지하조직 중심으로 작동했던 '운동권')에 시대착오적으로 근거하여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그 요소 자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그 요소를 충분히 강력하게 취하지 않는 좌파에 대해서는 또 위선적, 이중적이라며, 혹은 이득에 따라 비일관적으로 행동한다며 비난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 신념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특정한 신념체계 전체를 문자 그대로 추종하며, 충돌하는 것들을 전적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만이 진정한 실천이라고 여기는 '근본주의'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아마 극우진영에서 유달리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 좌파진영에서 매우 강경한 목소리를 내다가 소련 붕괴 이후 전향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미제의 산물인 콜라를 먹지 말자고 할 정도의 강성 좌파였으나, 나중에는 박근혜 정권에서 어버이연합 등의 극우단체를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주도한 허현준 청와대 행정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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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3일 목요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기억: 서거 10주기를 맞으며

  10년 전 오늘의 기억을 회고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흔치않은 10의 배수인지라 오늘은 나도 그 집단기억에 두서없는 몇 자를 보태 보고자 한다.

  나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침에 방에서 쉬고 있던 중 친구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문자를 받고 처음에는 그 친구의 짖궂은 거짓말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으나, 매우 갑작스럽고 놀랍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 친구가 재차 사실이라고 얘기해 주었고, 방에서 나가 봤더니 가족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참여정부 대통령인수위와 행정부에서 몇 년 동안 근무했기 때문에 나는 노대통령에 대해 기본적으로 공연히 친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정치를 잘 몰랐음에도 인터넷상에 대운하 등으로 이명박을 조롱하는 밈이 많았던지라 역으로 민주당계열 정부에 막연하게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별개의 얘기지만 당시에 극우매체 뉴데일리를 보고 충격받았던 게 내 지금의 성향에 많은 영향을 준 듯하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그 사건이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현재적'일 것으로 보이므로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하여 학술적 객관성을 추구하는 조명작업은 아직 수월하지 않아 보인다. 증언과 일화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의 영역보다는 현실정치와의 연관 하에서 수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런 증언과 일화들은 정치를 떠나서도 역사적 기록으로서 틀림없이 소중하므로 끊임없이 찾아보고 기억하게 되는 면이 있다(다르지만 비슷하게, 얼마전에 박근혜정부 말기의 내부 상황을 옹호적, 동정적으로 기록하여 신동아에 실린 글도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청와대 내부의 기록들뿐 아니라, 국민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참여정부 시기의 각종 정책들이 어떻게 수립되고 수행되었는지, 또한 그러한 과정 중 소위 '노무현 정신'의 구현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어디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끝없이 길어질 테니 내 개인적 평가를 간추려 보자면, 말과 글을 도구로 하는 민주적 통치,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적 기록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실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좋은 모습 중 하나였으며, 이는 말과 글에 있어서 무척이나 능했던 대통령 개인의 '스탯'에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합리적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늘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지만 정작 '말을 잘 못한다'라는 컴플렉스가 아주 강한 내 입장에서 부러운(?) 점이기도 하다. 무엇을 하던지 언어적 표현을 갈고닦아 적시에 꺼낼 수 있는 능력은 높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는 다들 알다시피 순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보수언론을 필두로 한 소위 기득권층의 공격뿐 아니라 '약자'에 해당하는 계층의 대표세력과의 대립도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민주당 계열과 진보세력의 대립이 더욱 공고해지기도 했다. 노무현을 지지했으나 실망한 이들, 그리고 아주 복잡한 마음을 갖게 된 이들도 많다. 여담이지만 노무현이 비판했던 보수언론의 무서움을 나는 상당히 최근에야 체감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 시기는 소위 '시민사회'가 활성화되었으며 글 쓰는 사람들끼리 상당히 생산적으로 싸웠던 시기이기도 한 것 같다. 물론 나의 직접적 경험이 아닌 기록을 통한 유추이지만,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흥미로운 논쟁과 사건들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독 참여정부 시기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아마 인터넷이 발달했으나 소위 뉴미디어가 대중적으로 자리잡지 않은 기술적 환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글 쓰는 사람들 중심으로 자주 이야기된 '시민사회'는 그들의 의도나 자기인식과는 관계없이 엘리트적인 면이 없지 않았고 높은 수준의 정치성을 지속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이것은 내 경험의 한계상 철저히 온라인공간 상에서의 파급력을 중심으로 한 편협한 평가일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결과적으로, 여러모로 '한국적 리버럴'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주장하며 시민들의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을 추구하지만, 혁명이 아닌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소위 '좌파'와는 어느정도의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확고하게 탄생하게 된 시기가 참여정부 시기가 아닌가 한다.

  과학기술과 관련해서도 양면적인 평가가 있을 것 같다. 컴퓨터에 상당히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고, 인터넷의 잠재력을 인식했으며 대통령 재임시절 프로그래밍 능력을 바탕으로 이지원시스템 개발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기술에 대한 관심이 있던(그리고 이것들을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결부짓고자 했던) 대통령이었으나, 과학정책에 있어서는 황우석 사건이라는 두고두고 회자될 '흑역사'격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과학 연구 내용 그 자체를 정치의 영역과 과도하게 결부짓는 과정에서의 여러 오판이 단적으로 드러난 이 사건을 주도한 '황금박쥐'는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고 십수 년 후 문재인 정부에서까지 잊을 만하면 등장하곤 한다.

  결론짓자면, 노무현 개인이 여러 가지 면에서 가졌던 유능함은 매우 탄복할 만한 것이나, 대통령으로서 그의 정치적 한계 역시 오직 외적 여건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엔 여전히 새로운 것이었던) 대통령 선출의 민주적 정당성, 대통령 개인의 카리스마, 개혁론자들의 기대와 실망, 재임기간 내내 어려웠던 외적 여건 등은 아직까지도 정치에 관심 있는 사회구성원 상당수에게 트라우마라고 할 만한 기억이 되었으며 입체적 평가를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앞으로는 대통령의 훌륭했던 점이 보편적인 민주 정치의 가치와 결부되어 계승되어야 하고, 한계를 보였던 점은 솔직하게 조망하며 분석되어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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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월요일

사이비단체의 뇌과학분야 침식, 오래된 현실이다

2005년도의 기사(사진1, 링크)를 보면, PET(양전자 단층촬영)의 세계 최초 발명자인 조장희 박사님도 이승헌이 거느리는 사이비집단의 행사에서 특별강연을 했으며, 개신교계열 합작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에 깊게 관여한 박찬모 포스텍 전 총장도 축사를 했다. 특히 조장희 박사님의 경우는 2017년에도 이들 사이비집단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등 꾸준히 이들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사진1: 조장희 박사, 박찬모 총장 등 학계 유력인사가 참여한 사이비집단의 행사.


그리고 놀랍게도 유명 뇌과학자인 IBS(기초과학연구원)의 신희섭 단장 역시 2006년에 이승헌과 함께 책을 냈고(사진2, 링크), 2018년에도 관련 인터뷰를 하는 등, 슬프지만 이 사이비집단과 연관이 있는 분으로 간주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미지: 사람 2명, 웃고 있음, 텍스트
사진2: 사이비집단의 수장인 이승헌이 유명 뇌과학자인 신희섭 박사(현 IBS 단장)와 공동저술한 책.


지난번에도 썼듯, 고려대, 서울대, 연대, 카이스트, 포스텍 등 각 대학의 뇌과학, 인지과학 연구소에서 후원하며 과학고 학생들도 많이 참여하는 '한국 뇌 캠프'(과거명 한국뇌과학올림피아드) 역시 매우 정상적인 내용의 대회이지만, 정작 '뇌교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명백한 사이비단체에서 후원하고 있다(사진3, 링크). 그리고 이 단체의 장은 서유헌 서울의대 명예교수이다.
(추가: 단순히 이름에 뇌교육이 들어가서 사이비라고 단정한 것이 아니다. 서교수님과 이승헌이 함께 검색되는 문서들이 매우 많고, 위키백과에 있는 서교수님 저술 목록에도 단월드 관련 내용이 많다. 이렇게 내용상 지극히 정상적인 행사까지 이승헌과 연관되어 있다는 정황이 있기에 오히려 더욱 주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적은 것이다.)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사진3: 사이비집단이 주최 및 주관하는 한국 뇌 캠프(과거명 한국뇌과학올림피아드).


이렇게 한국 뇌과학계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까지 포섭되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뇌과학분야 전체가 사이비집단에 침식될 수도 있다는 지난번 글(https://bit.ly/2Gq5A9Z)에서의 내 언급은 우려 정도가 아니라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단체는 앞에서는 실제 뇌과학 분야를 후원해서 정당성을 얻으면서, 뒤에서는 사이비 행사를 하는 식으로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를 흐리면서 영향력을 더욱 넓혀가고, 뇌과학 분야의 대중화에도 '물주' 역할을 지속하려고 할 것 같다. 돈이 걸려 있고 유명 과학자들까지 포섭되어 있는 문제이다 보니 결코 쉽진 않겠지만, 이 사이비단체를 과학계에서 몰아내려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할 것 같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뇌과학 분야를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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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8일 목요일

과학고에서의 기억, 그리고 단월드



뇌교육 등의 키워드를 내세운 단월드의 행사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후원을 받는 것이 드러나 충격을 자아내고 있다.

이승헌의 사이비단체 단월드는 그야말로 사회 곳곳에 '깃들어' 있으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넘어서 이처럼 공적 영역까지 보란 듯이 침투해서 예산과 사회적 자원을 갉아먹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 외연도 명상, 상담, 교육, 뇌과학 등으로 지극히 다양하다.

다수의 방송에 출연하고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강연하기도 한 '임마뉴엘 페스트라이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가 단월드 계열의 사람임은 이미 이전에 밝힌 바 있다(https://bit.ly/2Pg582m). 아래의 포스터에서 두 번째 사진에 있는 '이만열'이 바로 페스트라이쉬 교수와 동일한 인물이다.



비단 이 행사뿐일 것 같은가? 사이언스 라이프의 원문에서는 '제대로 된' 뇌과학을 하는 분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에 매우 동의하긴 하지만, 과연 과학자의 눈이 아닌 행정과 법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단월드를 '제대로 된' 뇌과학과 분리시킬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충격적이게도, '제대로 된' 뇌과학 분야에도 단월드 계열의 단체가 이미 후원자 등의 자격으로 귀신같이 들어와 있다.

내가 과학고등학교 재학 시절 겪은 일 중 가장 쎄했던 일은, 4대강 사업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연사가 강연을 온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모르고 지나갔던, 훨씬 더 문제적인 일이 있었음을 최근에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생물 분야를 지망하는 과학고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참여했던 뇌과학올림피아드라는 대회는, 적어도 그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제대로 된'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연한 계기로 찾아본 결과, 그 대회의 홈페이지에서도 명백한 단월드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 대회는 여전히 과학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다, 단월드 계열이 아닌 실제 각 대학교 연구소들도 참여하고 있는 대회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그 외연을 어디까지 떨치고 있는지 아찔하기까지 하다.

약간의 비관적 상상을 곁들이자면, 이들이 뇌과학 분야의 후원자를 자임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도미넌트한 역할을 하게 되어, 해당 분야에서 한국 학계의 위상이 실추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에서 '비과학이 과학을 참칭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온 단월드라는 단체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사회적 자원을 갉아먹고, 정상적인 단체들과의 구분을 흐리면서 사회 각계에 자연스럽게 진출해 있는 현재의 상황은 명백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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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2일 금요일

[논문 소개] 복잡계 제어이론 관점에서의 뇌 연구들

Complex network에 대한 control theory 관점에서의 뇌 연구가 요새 종종 눈에 들어와서 흥미롭다. 오늘만 해도 페이스북 뉴스피드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돌아다니는 논문 링크 두 개를 봤는데 키워드 때문에 처음에 언뜻 보고 똑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UPenn에서 나온 리뷰논문(The physics of brain network structure, function, and control)인데 차근차근 읽어 보면 트렌드를 follow하는 데 대단히 도움이 될 것 같고, 다른 것은 KAIST 바뇌과에서 나온 논문(The Hidden Control Architecture of Complex Brain Network)으로,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겹쳐 있는 뇌의 특수한 제어 구조 덕분에 제어의 강인성이 보장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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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 쟁점에서 종교적 신념이 개입할 자리는 없다

  종교단체가 자신들의 교리를 어떤 사회적 변화 상황에 적용하여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자체는 매우 존중할 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 내부적으로 그 문제에 대하여 입장을 정리하려 할 때에나 그렇다는 것이지, 낙태죄 폐지를 바라보는 지금의 천주교 교회와 같이 그 세속 사안에 직접 개입하여 절충안을 마련하겠다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헌재 판결 등의 공적 결정에서는 종교 단체의 특정 교리, 그리고 그것이 믿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들이 어떤 결정의 당사집단이 되는 특수한 경우라면 그런 것이 간접적으로 고려될 수야 있겠으나, 당사집단이 아닌 사안에 대해 그들이 외부에서 '훈수'를 두는 형태라면 그런 개입의 정당성은 단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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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환영하며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동안 여성들이 겪어온 어려움은 제도적인 측면 때문인 게 컸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문제로 인하여 여성들이 삶의 계획에 대한 응당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적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던 지금까지의 구조는 명백한 불합리이다(부조리와 불합리를 구분할 필요를 느껴 수정함). 이번 판결이 그런 불합리함을 대폭 해소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낙태죄라는 법조문을 바꾸는 차원의 문제가 지극히 중요한 쟁점이었다면, 앞으로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뒤로는 보건 인프라와 그에 대한 사회적 접근성 등을 확충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를 것 같다.


  이렇게, 헌법불합치 판결에도 불구하고 특정 세력으로부터 소극적 개정입법을 향한 압력은 지속될 것이므로 우리는 안심할 순 없으며,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도 그들만의 사안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이 관심 가질 만한 사안이다 보니, 조금은 더 대응이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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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8일 목요일

사회적 존재로서의 과학기술

  2018년 정부 예산안에 대한 환경운동연합의 의견서에서 양이원영 처장이 핵융합에 대해 남긴 코멘트가 그 실소를 자아내는 내용으로 인해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당사자인 양이원영 처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대응하면서 '핵융합 지지자'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일각에서 "과학기술은 지지/반대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응하곤 하는데,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1) '된다 / 안 된다'의 문제를 미리 말할 수 없고 일단 해 봐야 아는 것일진대(그것도 그 특정한 구현방식에 대해서만), 그것에 대해 실제로 (2) '해 보자 / 하지 말자'의 여부를 정하는 것이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일 테다. 적어도 후자의 차원에서는 과학기술을 지지/반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은 아닐 수 있다. 양이원영 처장의 문제는, 가히 자연신론적이라 할 만한 비과학적 주장을 근거로 (1)의 차원에서 '안 된다'의 쪽을 부당하게 채택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2)의 차원에서 '하지 말자'의 쪽을 채택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부당한 주장을 공문서에 수록하여 운동가로서의 공적 책임을 방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내 페친이신 전명환 씨가 이전 글에서 댓글로 탁월하게 지적해 주셨듯(Facebook 게시글 링크), 과학 예산과 에너지 예산을 잘 구분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현재 단계의 핵융합 연구는 (우리의 머리 속에서) 분명 과학에 속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에너지기술 관련 예산으로 책정이 되어 있다면 에너지기술 관련 예산인 것이다. 원래 권력이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개념을 뒤틀어서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 아니겠나. 머리 속의 개념을 원하는 대로 사회 속에 구현하려면 어찌되었든 권력이 필요하다.

  지극히 정당한 주장을 하는 이공학도들을 자신의 진영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적폐 취급하는 행동은 매우 적폐스러우나, 그러한 행동에 대응하는 입장에서도 과학기술은 진공 속에 놓여 있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구현되는 것임을 늘 염두하여야 할 것 같다. 양이원영 처장은 이러한 측면을 무척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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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6일 화요일

집단에는 의식이 없다: 타자화의 징후

특정 집단에 대한 타자화의 징후 중 하나는, 그 집단 내에서도 서로 상호적으로 대립하는 다양한 견해와 갈등이 있다는 것이 무시되고 마치 그 집단 전체가 단일 인격체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당 집단에게는 모순을 일으키면서까지 이익을 좇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또한 이것은 집단을 부당하게 대표하는 어떠한 고정된 단일 상을 만들어서 소비하려는 경향과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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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의 무책임한 공적 판단을 규탄한다

핵융합 관련 예산 전액 삭감 의견을 주장하는 자료(아래 캡쳐. 출처는 Facebook '물리학과 무관합니다만,' 그룹 게시물)를 보고 경악했다가, 담당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끄덕끄덕했다. 나는 이것이 시스템을 원자론적으로(?) 들여다보지 않고 언어적인 차원에서 비약적으로 사유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며, 과학지식에 대한 접근성 부족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기본적인 논리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미 예전부터 수 초 이상 핵융합 반응 유지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그렇다 치고, 설령 '전력 생산에 실용화 가능할 만큼' 핵융합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선해한다고 해도, 저 말이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어찌 한낱 인간이 재현해 내겠느냐"는 자연신론적 예언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시민참여가 확대되는 것, 정치적 목적으로 비전문가에게 권력을 주는 것 등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며, 국민을 냉소하고 불신해 버리는 과도한 전문가주의를 경계한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정책 결정과 연관되는 권력이 주어진다면 전문가들이 참여 의지를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치적 목적으로 상징성 있는 비전문가를 등용하는 것이, 그 사람과 얽히게 된 이해관계를 반영하거나 혹은 어떤 메시지로서 기능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상징성으로만 기능하면서 정책 추진의 중심을 잡아 주거나, 혹은 휘하에서 생산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성실하게 하거나 해야 할 텐데 이런 경우는 정말로 납득하기 힘들다.

심각한 악순환이다. 전문가들이 정치참여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진 문제도 있겠으나(그러다 보니 점점 코너에 몰리고, 결국 자유한국당과 함께하게 되어서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집단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과연 그 탓만 할 수 있을까? 이공계 인력 풀을 확보하려는 정부의 의지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 캡쳐 상단 때문에 양이원영 씨가 어느 새 아예 산업부로 가 계시고 산업부에서 이런 자료를 생산한 것으로 보아서 경악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자료는 환경운동연합 처장으로서 산업부에 전달한 자료인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악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다. 이 단체는 공론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정부 부처와의 채널도 확보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 문서는 예산안 평가에 대한 의견서로서 정부에 실제로 제출한 의견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 단체는 분명히 실제로 중요한 위치에서 권력(즉 공적 권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위의 논지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019년 3월 18일 월요일

작가의 작품개입이 부당해지는 순간



작품이 완성되고 독자들에게 수용되면 그때부터는 작가의 손을 떠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작품을 향유한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그 작품은 텍스트 그 자체라는 공통된 기반을 가진 채로, 그러나 각기 다른 형태로 수용되고 해석되면서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작가는 기존에 작품 내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사항들을 트위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언급하면서, '사실은 이러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한 마디씩 던진다. 그런 말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작품세계는 작품에서 표현된 오직 그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작품의 배후에서 실제 세계에 준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음을 가정하고 그것을 상상하는 일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창작 당시에 표현되지 않았던 설정이나 사건을 작가가 한 마디씩 끊임없이 추가하는 것은 무의미를 넘어 TMI이며,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들에게 수용되어 있는 작품에다 다시금 작가적 권한을 행사하려고 하는 부당한 시도로밖에 달리 평가하기 어렵다.




물론 작품세계 밖 실제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국면이 드러나도록 설계된 작품, 혹은 자기 자신의 외연을 그 텍스트 자체에 한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작품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애매하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구체적인 예시를 알거나 스스로 제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독자와 소통하며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가는 과정 자체에서 농도 짙은 예술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창작 당시에 무언가를 설정해 두고 있었다는 '창작 비화'의 형태라면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좋다. 설령 그것이 독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모종의 이유로 '깨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작품의 이해와 평가, 새로운 지평의 발견에 도움이 되는 이러한 '창작 비화'가 아닌, 그저 탈맥락적으로 내용을 추가할 뿐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상당히 난감하다. 그것이 실제로 작가가 창작 당시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인지, 혹은 이후에 추가한 생각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해당 작품의 오래된, 그러나 매우 라이트한 팬인 나의 입장에서, 혹시 이러한 행동들에 팬들이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다른 예술적 의도(혹은 예술 외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부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만약 작품의 세계관 아래에서 나올 후속 작품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탈맥락적으로 제시되기보다는, 해당 후속 작품들 내에서 충분히 표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저 미감의 문제일 뿐이다. 지금처럼 무언가가 멋지지 않다는 주관적 인상을 보편적으로 전달 가능한 언어로 풀어내고자 할 때는, 늘 윤리적 규정성에 의해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으로 읽힐까 걱정스럽다. 만약 그렇게 읽힌다면 그것이 내 글쓰기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이 미감의 차원이라고 해서, 윤리적 차원에 비해 진지하지 않은 것도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