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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3일 토요일

대중을 타자화하는 정치인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문제적이라고 간주되는 어떤 경향성을 보이는 특정 계층 혹은 집단의 정치적 주체성(혹은 주체화의 가능성)을 지워 버리는 사고방식이 근래에 일부 여권 인사들의 실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그 양상은 서로 정반대되어 보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1)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좋은 의제를 가지고 노력했음에도 그들은 계몽되지 않고 있다. 결국 그들 개인의 탓이다.

(2)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 개인을 탓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처한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물론 지극히 단순화시킨 것이기는 하다. (1)은 주로 혁명을 바라는 진영에서 자신들의 노력 이후에 찾아오는 냉소로 인해 나오는 발언이고, (2)는 주로 온건한 방식을 좋아하는 진영에서 나름대로 포용적인 태도를 의도하면서 하는 발언일 테다. 최근의 잇따르는 실언은 진보주의자이자 민주화 투사로서 가지는 (1)과 같은 태도가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일단은 갈등을 봉합하고자 하는 정부여당 인사으로서 가지는 (2)와 같은 태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위 두 가지는 정반대되는 주장 같지만, 사실 둘 모두 그 개인들을 자신이 설득해 내서 잠재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취급하지 않고, 어떤 문제를 풂에 있어 주어져 있는 전제 조건처럼 보고 타자화시킨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하다. 말하자면, 정치인으로써 설득과 변화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척이라도 하)고 '상호주관적'인 태도로 대중을 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분석가 내지는 평론가처럼 '객관적'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 객관이란 것도 게임을 많이 한다거나 이명박근혜 정권 하에서의 교육 때문이라는 등의 뇌피셜에 불과하다는 것은 덤이다.

내가 어떤 분에게 처음으로 듣고 꾸준히 사용하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라는 문장은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거나, 잘못된 행동에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문장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특정 계층이 보이는 경향을 오직 전제된 조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경향 자체에 대한 변화와 설득의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발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인간적인 것인가 하면, 인간은 (사실적, 당위적 측면 모두에서) 그렇게 생겼으며 그렇게 대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공학, 전략적 접근 등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전자처럼 할 경우 위의 (1), (2) 모두에서 정치공학'만' 남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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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3일 일요일

『통섭과 지적 사기』: 전선에서 산출되는 비판

  아예 정반대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접점이 별로 없기 때문에, 서로 시비가 걸리더라도 논의가 겉돌면서 유의미한 비판이 잘 생산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히려 활동 영역이 겹치지만 분명히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 싸우면서 서로가 가진 문제점을 폭로하여 고찰하도록 해 줄 수 있다. 역시 진공 속에서보다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야 비로소 구체적인 국면들이 변증법적으로 산출되는 것 아니겠는가.

  과학과 인문학을 결합하고자 하는 '통섭'을 대단히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 『통섭과 지적 사기』(이인식 기획)이 있어서 저자가 어떤 분인지 봤더니 '융합'을 선도적으로 주장해 온 인물이었다. 분명히 다른 기원을 가진 통섭과 융합이라는 두 단어가 인기를 모으는 과정에서 늘 병렬적으로 소개되고 심지어 동의어처럼 간주되면서 대중적으로 비슷한 진영으로 여겨지는 데 대한 모종의 위기감이 이 책의 기획 동기가 아닐까 싶다. 융합의 가치를 철저히 수호하고자 하는 이 책의 목적에 동의하지 않거나, 수록된 개별 글들의 본래 목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융합과 통섭 사이에 어떤 역사적, 잠재적 대립이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통섭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비판이라는 점에서 읽어 볼 만할 것이다. 반대로 통섭을 주장하는 이들이 융합에 대해 언급하는 글도 있다면 흥미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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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31일 목요일

중앙일보 '우유당번' 인터뷰 기사를 보며


남성이 겪는 차별의 예시로 학창 시절의 우유당번을 제시한 중앙일보의 20대 남성 인터뷰 기사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나는 전반적으로 웃기다기보다는 조금 소름이 돋게 느껴졌다. 원내정당의 청년대변인까지 했으며 구독자 1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꽤나 유명한 청년보수 스피커를 유력 언론인 중앙일보가 불러서 임의의 일반인인 것처럼 해 두고 이 주제에 대해 이 정도의 논조로 인터뷰 기사까지 썼다는 사실이 말이다.


따라서 지금 터져나오는 조롱과 비웃음 섞인 반응들의 포인트를 그 개인에 대한 집단적 조리돌림이라기보다는 기만적인 언론권력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해학적인 반응으로 본다면, 이러한 반응은 정당하게 정초될 수 있을 것 같다. 기사 전체에 우유당번 내용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 와중에 가장 임팩트가 큰 대목이 우유당번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해학적으로 회자되는 것이다. 물론 그 양상이 우유당번 발언을 한 개인에 대한 조롱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해당 인물이 엄연히 ‘정치인’인 만큼 일정 부분 감수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체적인 의도를 보았을 때 이 기사는 우유당번이나 생수통 같은 맨박스를 남녀가 함께 연대해서 개선을 하자는 방향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공격하면서 20대 남성들을 반페미니즘적 우파세력으로 끌어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쓰여진 것이 명확하므로, 이 기사를 읽을 때는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면서 지적해야 한다. 우유당번 발언을 한 인터뷰이는 20대 남성 개인이기도 하지만 보수언론이 자신들의 논조에 적합하도록 선택한 스피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기사에 대하여 "그래, 우유당번도 맨박스 맞다. 그러니까 함께 연대해서 해결하자"라는 이상적인(?) 반응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반응은 20대 남성 개인들에게 던져야 할 메시지이지, 젠더이슈에 특정한 방식으로 개입하여 판을 짜려고 시도하는 보수언론에게 던질 메시지는 아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유당번도 결국 페미니즘으로 타파하여야 할 맨박스이기 떄문에 함께 페미니즘으로 연대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설득의 측면에서 보리수 청년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일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페미니즘을 공격하고자 하며, 결국 남성들의 군 문제나 정책에서 소외되는(것처럼 느끼는) 문제 등이 페미니즘에서 부가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학(?) 같은 별도의 분야로 정립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나 역시 적어도 군대 문제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적 시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점이 아주 많다는 데 공감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남성들의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싶다면 해 보자고, 그러나 문제의식을 세밀하면서도 정직하게 해야 한다고, 없는 사상을 있다고 하지 말자고, 보수언론에 편승해서 쉽게 가려 하지 말자고, 보수언론이 이런 식으로 갈등 구도의 판을 짜서 부추기는 것에 당신들이 편승하는 순간 당신들의 문제의식은 반동적인 것이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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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7일 일요일

'성평화'란 없다: 이퀄리스트들의 반복되는 실수

2년쯤 전에 '젠더 이퀄리즘'의 개념적 공허함이 폭로되었음에도, 이퀄리즘은 그 이름만 '성평화'로 바꾼 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나무위키가 아닌 위키백과에 '성평화'문서가 만들어져 있다(위키백과 '성평화' 문서 링크. 내용이 부실하여 삭제 토론이 걸려 있다). 또한 한국성평화연대의 첫 워크숍 장소는 청년우파의 아지트 [라운지리버티]였으며, 몇몇 정당에서 한국성평화연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 오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들 이퀄리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점 두 가지가 있다. 그 문제점들은 '이퀄리즘'이라는 이름보다 '성평화'라는 새로운 이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첫번째 문제점은, 이들이 내세우는 평화는 다름이 아니라 그저 겉보기에 싸움이 발생하지 않는 '기만적이고 억압적인 평화 상태'라는 것이다. 둘째, 이들이 하는 모든 활동은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을 비판하는 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성차별의 개선이라는 보다 실질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렇게 되면 성차별 타파에 대한 인식을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를 뿐이라고 누가 믿어 주겠는가? 성차별의 타파를 향한 사회문화적 실천을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이들 이퀄리스트들의 주장을 '내부 비판'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외부의 적'으로 봐야 할지는 명약관화하다.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함께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실질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을진대, 이들의 행보는 그런 방향과는 정반대되며, 오히려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형태만을 주로 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바로 개념적인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사실 이걸 지적하는 것은 순전하게, 없는 개념인데 있는 척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내 개인적 성향 때문이다. 아래의 이퀄리즘 글에서도 지적했듯, '지금까지 없었지만, 선언을 했으니까 이제 있는 거 아니냐'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아래의 글에서 '이퀄리즘'을 '성평화'로 바꾸어 보자. 2년 전 글이지만 현재의 상황과 완벽하게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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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1일 월요일

신선놀음 설화와 시간적 숭고의 가능성

  알고 있는 설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을 낳은 설화이다. 산에 나무 하러 들어간 나무꾼이 신선들의 바둑놀음을 잠깐 구경하는 사이에 어느새 가지고 온 도끼의 자루가 썩어 있었고, 이에 갸웃거리며 산을 내려와서 마을로 가 보니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 설화는 연출 및 스토리텔링에 따라 희극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며, 시간을 멍하니 보내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설화를 생각할 때 왜인지 모를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가장 많이 받는 것 같다. 각종 설화들에서 괴물들이나 신적 존재들의 크기가 이렇게나 컸더라, 이렇게나 복잡하게 생겼더라 할 때는 그 숭고감이 사실 그렇게 잘 와닿지는 않았는데(나의 상상력 부족 탓일지도 모른다), 이 설화에서는 시간축 상에서의 간단한 조작만으로 인물로 하여금 갑작스럽게 대규모의 시간성을 마주하도록 함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방식의 '시간적' 숭고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러한 시간적 숭고가 내게는 상당히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숭고감이 기본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큰 규모의 대상 혹은 양태를 뜬금없이 대면하게 될 때의 불쾌감으로부터 유발된다고 보는 입장에서(이는 칸트의 견해를 나름대로 수용한 결과이다), 시간적 숭고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종종 한다. 예를 들어서 시간에 따라 극도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조형물은 그 공간적 크기가 작더라도 양적으로 지극히 많은 것을 담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숭고감을 유발할 수 있다(이에 따라, 시간성을 도입한 조형물에서는 '아기자기함'과 숭고함이 한끝 차이인 것도 가능해진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론 이후로 밝혀진 시간여행의 가능성들 역시 이러한 종류의 시간적 숭고를 낳기도 한다. 빠르게 움직였다가 멈추었을 뿐인데 바깥 세상에선 극도로 많은 시간이 지나 버렸고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불쾌하면서도 경이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를 설정에 도입한 작품 중 대단히 유명한 것으로 <인터스텔라>를 꼽을 수 있겠다.

  설화들에서 나타나는 설명을 거부하는 숭고감(아무튼 그랬대!)과 현대의 스페이스 오페라 류의 잘 설계된 장엄함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많은 작품을 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후자에서는 큰 규모의 대상이나 양태를 납득 가능하고 인과적인 설명으로 풀어내면서 극중 장치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던데, 이로써 작품의 장엄함은 획득되지만 그 대상들 자체의 아우라는 제거되곤 한다. 사실 나무꾼이 들어간 동굴은 숨겨진 우주선의 입구였고,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동안 우주선이 광속의 0.9999999999배의 속력으로 움직였을 뿐인 게 아닐까? 장르 자체가 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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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9일 수요일

뉴스타파 전문연 보도 유감: 문제는 합리적인 정량평가 방식의 부재이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에서 전문연구요원 대체복무 현장을 비판적으로 취재한 기사가 나왔다.

기사 보기: '가짜출근에 대리출근'....카이스트 병역특례 난맥상

연구자의 성실함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논문 실적으로 평가하자니 분야 및 연구주제에 따라 논문이 나오는 주기가 다르기 때문에 연구자 개인에게도, 그리고 제도의 취지 상으로도 부당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근무시간으로 평가하자니, 비록 극단적인 가상적 사례이긴 하지만 그냥 3년 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다른 이들의 대체복무 기회를 뺏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결국 연구자의 성실함을 평가하는 것은 전문연구요원 대체복무 제도의 공정함을 유지하고 제도의 설득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라는 척도로 성실함을 평가하는 것은, 연구라는 활동에서 성실함을 측정하는 마땅한 방법이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된 미봉책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평가 방식이 대학원생이라는 삶의 형태와 매우 상성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각각의 연구실에서 학생들이 놓여 있는 조건은 모두 다르다. 실험 진행 및 관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때때로 철야를 해야 하는 연구실도 많을 것이며, 과제 및 학위논문 등으로 바쁜 시기에 철야를 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굳이 철야근무 문제가 아니더라도, 정시 출퇴근 여부와 성실성이 상대적으로 상관관계가 적은 분야들 또한 분명히 있다.

대학원이라는 조직에서의 대체복무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일체의 저널리즘적 탐사내용 없이, 출퇴근 시간으로 평가하는 현재의 기준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 기준에 따라 대학원생 개인들을 비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번의 기사는 매우 유감스러우며 그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다. 편견 없이 현상의 원인을 첨예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를 기사 내에서 적극적으로 밝혀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우수한 인적자원으로서 병역특례를 받는 대신 이공학 계통에서 연구하면서 실적을 내도록 모종의 국가적 책무를 부여받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고 책임감을 갖는 것 역시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밤을 새서 아침에 출근을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기사의 방점이 잘못 찍혀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개인들의 준법정신과 책임의식은 그것들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공정한 평가환경 속에서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

차라리, 생활패턴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인권 침해이므로 그런 연구들에 규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물론 이것도 별로 상상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뉴스타파의 이런 주장으로는 학생들 개인만 엘리트이자 적폐라는 식으로 비난받게 되고, 필요한 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만 양산될 뿐이다. 기사 원문에 첨부되어 있는 '병역비리' 태그가 눈에 밟힌다.

2019년 1월 4일 금요일

양심적 병역거부 용어변경 유감


  이 나라가 세속국가가 맞는지 의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민의 보편적 권리가 되어야 하며 특정 종교만의 전유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종교를 강조하는 네이밍은 꽤나 부적절하다. 게다가 이 이름은 양심적 병역거부 자체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면서 국민들한테 잘못된 시그널을 줄 가능성도 높다. "특정 소수종교 신도들의 특혜가 아닌 국민 모두의 권리입니다"라는 식으로 설득해야 그나마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식이 나아질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부처간 협의과정에서 국방부가 제도의 인권 측면에서의 취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여론을 의식한 미봉책을 내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특정 종교에서 국민 일반으로의 대체복무의 확산을 원하지 않는 정부부처의 입장과, 그런 조건 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정적 특혜로 간주하여 반감을 가지는 국민들의 입장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종의 비극적인 최적해인 것이다.

  단순 용어만 바꾸는 거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아직 헌재랑 대법원 판결 빼고는 구체적인 무죄취지 판례들도 거의 축적 안 된 상태고 양병거 자체도 제도적으로 막 도입되는 단계이다 보니, 단순 용어가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의 핵심 개념적인 부분까지 왜곡될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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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일 화요일

과학철학과 현장 과학은 대립하는가?

  과학철학에서 과학지식의 인식론적 정당화를 추구하는 시도가, 현장 과학자들이 합의하고 있는 내용을 근본없이 의심하는 유사과학적(?) 행동으로 간주되어 좋은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꽤 있다. 이 카톡 내용은 과학철학과 과학 현장의 그런 갈등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나름 예비 과학도로서, 이런 질문에 대한 반감은 분명히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 입장에서는 피아식별이 어려울 만한 것이, 이런 질문은 주로 과학 지식의 지위를 좀 더 엄밀하게 세우기 위해 이뤄지는 것일 테지만, 과학지식도 틀릴 수 있다고 세련되지 못한 회의론을 펼치면서 창조과학적 믿음이나 유사과학을 정당화하는 물귀신 작전에서도 이 질문과 외견상 동일한 질문이 이뤄지곤 하며, 과학자들은 후자를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과학도들과 철학도들 사이에 충분한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자 입장에서 틈 날 때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는 생각들인데도 불구하고 철학도에 의해 이뤄지면 마치 과학을 무턱대고 부정하려는 시도처럼 여겨지곤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럴 때 피아식별 코드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실재성 문제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첨부하자면, 나는 자연이 주는 극도의 정합성과 조밀함으로부터 그 실재성이 요청될 수 있다고 보고, 실재성에 대한 의심은 불필요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 점들을 함부로 간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요청되는 것일 뿐 증명되는 것은 아니므로 논쟁의 여지는 많이 남는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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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1일 월요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소감


  올 한 해는 여러모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는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을 매듭짓는 일에 집중해야 했던 한 해였다. 그렇다 보니 취업, 진학 등으로 먼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동료들과 나를 자꾸만 비교하게 되면서 심적으로 힘든 점도 많았다. 비록 복수전공 때문에 제도상으론 초과학기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주변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더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진짜로 초과학기인 만큼, 내 할 일을 하면서 나보다 먼저 출발한 동료들로부터 들려오는 것들에도 귀를 기울여서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대학생활 동안 빠르게 중심 잡아서 동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막연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보낸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올 한 해 동안 그 방황을 수습하고 몇 가지 중심을 잡아서 추구해 보는 과정을 겪고 나니까, 재미있게도 내 관심사는 멀리 돌아서 고등학교 및 대학저학년 때 막연하게 관심 갖던 분야들로 향했다. 이건 확증편향이겠지만, 내가 해 온 것들이 일관되게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때보다 알고 있는 것은 분명 더 많아졌을 텐데, 아는 게 없다는 느낌은 어째 더욱 커진 것만 같다. 방학부터 해서 2019년 동안은 관심분야 방법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익히고, 어디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생각이다.

  사실 이번 한 해는 수업보다는 2개의 졸업논문을 쓰면서 많이 배웠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전기과에서는 졸논보다는 졸프라고 많이 부르며, 주제가 정해져 있어서 해당 주제에 지원하는 방식이다. 나는 학부 수업으로 익숙한 분야가 아닌 처음 보는 분야에 도전하면서 제어이론을 밑바닥부터 봤는데,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따라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교수님과 담당 연구원님이 그 연관성도 짚어 주셔서 감사했다.

  물리과에서는 졸논 주제를 온전히 스스로 정했다 보니 더욱 애착이 간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분야를 살펴봐도 결국 통계물리, 복잡계스러운 쪽으로 관심이 가길래 약간 답정너(...)긴 했지만 그쪽 위주로 논문 리딩해 가면서 주제를 선택했다. 모델은 다 구상했으니 이제는 이변이 없는 한 뭘 해야 할지는 사실상 거의 정해져 있고, 전산적 구현만을 남겨두고 있다. 못하는 코딩 어찌저찌 해 가면서 1월 중에 끝냈으면 한다.

  미학과에서는 수업 들은 게 전부지만... 상반기에 고전연구회와 Freethinkers에서 니체를 다뤘었는데 하필 2학기의 현대독일미학 수업에서도 니체를 다뤘기 때문에 정말 원없이(?) 니체를 읽었다. 니체는 그 문체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면서 막연히 거부감을 가졌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얻을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에 감명을 받으면 괜히 지는 것 같고 쿨한 태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미미학연습에서는 OCR 해서 구글 번역기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영문텍스트 꾸준히 본다는 게 크긴 큰지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이 예전만큼 오래걸리지는 않게 되었다.

  동아리에서는 직접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 활동들 전반을 관리하는 임원진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회의도 하고 소중한 인연들이 된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책임을 맡은 부분들에 대하여 좀 더 빨리, 좀 더 신중히 했어야 하는 것들도 떠올라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해 동안의 개인적인 소득을 꼽자면, 자리에 막연하게 오래 앉아 있는다고 성실함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감한 점이 크다. 물론 길게 본다면 시간투자는 정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간투자를 꾸준히 하는 것도 분명히 성실함의 개념에 대표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메타인지와 정보수집을 통해 내게 현재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적재적소에 도움을 요청하면 보다 짧은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이것 역시 - 때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중요한 - 성실함일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의미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어떤 일의 한 국면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어차피 학업내용의 범위가 좁았고 그 안에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이 유리했으나, 대학교에서는 이런 방식이 내게 대체로 비효율적이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계속 고민만 늘게 된다.

  이런 점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대학을 4년 다니면서도 고쳐지지 않아, 전기과 졸논을 쓸 때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밑바닥부터 공부해서 도전하는 분야인 만큼 더욱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다가 성적 잘 못 받으면 그만인 일반 교과목들과 달리 졸논은 무조건 써야 하는 것인데다, 과 도서관에 검색하면 나온다는 데서 자존심 문제도 있다 보니 어떻게든 잘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당장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구현해 보고, 일단 써 보고, 일단 풀어 보는 것이 일의 진행에 있어 훨씬 낫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이해 안 됐던 것들은 자연스레 실마리가 보이고 말이다. 2019년 한 해는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좀 더 의욕적인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감상평

  보고 나오자마자 또 보고싶다. 심야영화 보러 가는 생전 안하던 짓을 했는데,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다. 우주명작의 반열에 들 법하다는 생각.

  일단 단순히 잘 만든 영화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섬세하면서도 실험적으로 짜여진 영상들이 자유자재로 다뤄지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만화영화라는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마도 돈과 시간도 많이 들여서) 그 잠재력을 무척이나 탁월하게 끌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꼭 만화영화라는 형식이어야 하지 않은 작품들도 꽤 있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매체의 특성을 적극 발견하고 활용하는 작품들에 더없이 매료되는 편이다.

  이러한 '만화적 특성'이 전면에 노골적으로 부각되면서 극중 내내 연출적 측면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까지 넘나들면서 인상깊은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분위기를 지배하는데 어찌 감탄하지 않겠나. 실험작임과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귀감이 될 만한 영상물이 될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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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