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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당헌개정 투표 관련: 구체적인 반성적 실천이 전제돼야만 한다

 당 소속 지자체장이 부정부패 등의 잘못으로 사퇴한 경우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조항은 애초에 없는 게 나았을 포퓰리즘적인 조항이라고 전에 이야기했고(링크)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이번 당원투표에 대해서는 복잡한 마음이 있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 뼈를 깎는 쇄신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그걸 전제로 후보를 내는 게 당원과 국민들에 대한 도리 아니겠나. 잘못된 조항이라는 데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신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없어온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번 당헌개정에 선뜻 손가락이 향하지는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서, 벌써 광역단체장만 몇 번째인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해온 정치인들도 결국 보좌진들에게는 모셔야 할 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었고 그러한 권력은 업무를 넘어 개인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성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해당 지자체장 개인들의 문제에 의한 일회적 악재로 치부하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옹호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갑질과 권력형 성폭력에 취약한 정치환경의 근본적 문제로 인식을 하고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음을 입증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

박시장 사건 이후 필요했던 대응은, (1) 의원들과 당 소속 유명인사들이 공공연히 2차가해성 발언을 하는 것부터 강력하게 제지하고 (2) 정치활동 및 보좌의 과정에서 권력형 성폭력과 갑질에 대한 인식제고, 예방, 올바른 사후대처가 가능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3) 권력의 축을 불가역적으로 여성정치인들이 많이 획득하도록 하는 등 체질을 근본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전제된 채로 당헌을 개정하고, 여성후보를 공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얼마든지 지지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듯이) 그런 구체적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막연한 사죄와, 공공연한 2차가해성 발언들만이 떠돌고 있다.

후보공천은 책임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반성적 실천에 근거하지 않은 공천은 책임이 아닌 뻔뻔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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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트루스포럼은 비겁한 학내 행보를 중단하라: 추적기사를 소개하며

 트루스포럼이 학내단체 코스프레 하는 것과 달리 연령대가 높고 외부단체에 가깝다는 점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지만(특히 와 이정도구나 했던 게 댄디 보수라고 하면서 자유의새벽이랑 같이 조선일보 탔을 때), 매거진닷킴 박도형 메신저의 이 유익한 연재기사(링크)에서는 그 전모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취재하여 밝혀두고 있다.


트루스포럼은 든든한 자체 네트워크를 통한 자금지원이 있음에도 학생자치공간을 무단으로 사용해왔고, 심각하게 차별주의적인 대자보 및 지속적인 인권가이드라인/인권헌장 반대 운동으로 캠퍼스를 안전하지 못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정상적인 학내단체가 아님에도 학내 보수단체로 조명받으면서 캠퍼스가 비정상적 방향으로 외부의 주목을 받게 해왔다. 최소 4년간 적절하게 제지되지 못하고 계속 노골화되어 온 트루스포럼의 이러한 비겁한 행보는 학생 구성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겠다.

특히 보수교회 및 정치판을 넘어, 학술영역을 포함한 이곳저곳에 트루스포럼 류가 서울대 교수들을 끼고 이미 진출해서 강연도 하고 그러는 것 역시 이번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들 세력이 미국의 일부 음모론적, 반사회적 극우개신교세력의 논리를 대체로 따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현상이 일시적일 것 같지는 않다. 미국만큼 보수교회가 도미넌트한 나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욕을 잃지 말고 싸워야 하겠다.

덧붙여 트루스포럼의 오렌지연필 양포재단과의 밀접한 관계도 지리적 이유 등으로(?) 어쩌다 생긴 것이 아니라, 김은구 대표의 문화계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굉장히 뿌리깊은 것이라는 점도 이 기사에서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학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학내만의 문제였던 적이 없다. 이들이 학교의 유뮤형 자원을 비겁하게 활용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받고 있음에도, 학생 구성원들이 대응하기에는 버거운 크기의 일이기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다. 그러나 정파를 떠나 우리 학교가 차별주의적, 반지성주의적 담론의 총체적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데 성공해야 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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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9일 금요일

육군훈련소 인터넷편지 축소개편 시도 유감

찾아보니 진짜네. 육군훈련소 인터넷편지가 140자의 응원메시지로 변경된다고 한다. (기존에는 1500자, 사진첨부 가능)


군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유가 상당부분 제한된 채로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가 생길텐데, 그런 환경에서 인터넷편지는 사회와의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이고, 실제 훈련병들한테도 많은 힘이 된다고 한다. 무슨 전면전 상황이 아닌 한, 시간과 인쇄용지가 많이 쓰이고 업무량이 많다고 해서 이렇게 바꿀 성격의 일은 아니다.

군 복무환경이 대체로 개선되는 와중에 이런 퇴행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있으면 다른 방식을 도입해서 해결하던가 해야 하는데 이런 건 전형적인 한국군대식 하향평준화 해결법이다. 애초에 수많은 사람을 징병하는 만큼 그에 걸맞게 이런 걸 원활히 지원가능한 여건을 갖추어 놓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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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각계의 비판 및 전용기 국회의원의 관심 등에 따라 해당 조치는 1-2주만 시행한 뒤 철회되었다고 함. 전용기 의원 Facebook 게시물 보기: 링크)

2020년 9월 25일 금요일

공무원 피격사망 관련

해상 표류중인 우리 공무원을 북한 측이 사살한 것에 대해 이례적인 사과를 받은 것은 다행이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건 경위에 대해서도 북한이 밝혀온 것과 국방위에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아귀가 여전히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첩보자산 노출 등을 감안할 때 국민들에게 어디까지 밝힐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진상조사 자체는 철저히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정부 및 군의 대응과정에서 의구심이 발생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밝힐 수 있는 선에서 국민들에게 가능한한 소상히 설명이 필요할것이다.


첩보 종합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보고가 늦게 되었다는 등 나름의 설명들이 단편적으로 보도되기는 했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런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때 보호를 위한 액션이 빠르게 적절히 취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두려움이 생긴게 사실이다. 종전선언 어쩌고가 모양 빠지는 일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건 이쪽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지자들도 사과에 과도하게 고무되거나, 어차피 본인이 월북한거 아니냐면서 (국방위 쪽에선 어느정도 납득할 만한 근거들이 오간 것 같지만 아직 국민에게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월북 확신할 근거도 없는데) 사망한 당사자를 탓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체적인 북측영역 진입 경위 등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국민 생명 보호가 안 된 게 사실인만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공식 입장에서도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고 고개숙이고 시작했는데, 지지자 일각에서 피격에 따른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은 어느새 안중에 없이 발언하는건 인간적으로 자제가 필요해보인다.

그리고 공식 발표와 무관하게 기관 관계자가 한두 마디 언론에 흘리는 모습이 이번에도 역시나 보이는데(아마 월북 확실시 발언도 국회 국방위 말고 정부부처쪽에선 처음에 그런 루트로 나온걸로), 이게 전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 같고, 각 기관의 의도에 따른 것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말이 바뀐다고 욕이나 더 먹지. 덜 검증된 정보, 나가면 안 될 정보가 계속 나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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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4일 목요일

팀 아짐키야: 신기함의 이유와 욕망의 정체

유튜브에서 '가상 해외반응'에 이어 또 다른 기괴한 한국적 장르를 발견했다. 한국어로 된 시덥잖은 문장을 이메일로 신청하면 방글라데시 현지인들이 마치 원시사회에서의 ritual을 연상케 하는 복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그것을 크게 읽어 주는 것인데, 덧글창에서 사람들이 이를 즐거워하는 지점을 보면 '가상 해외반응'에서 집약되어 드러났던 두유노적인 인정욕구를 넘어선 제국주의적 욕망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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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2일 토요일

헬리콥터 사회를 질타하기 전에 우리가 되짚어야 할 것

 이 글은 성장 중인 매체 매거진닷킴(https://www.magazine.kim)에 기고되었습니다. 실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꾸준한 성장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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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임에도 학부모 단톡방이 존재한다는 소리에 의대생들이 조롱을 받는 모양이다. 그런 반응들은 표면적으로 비웃음이지만, 그 네트워크가 효과적인 재생산의 도구로 기능할 거라는 데서 오는 묘한 씁쓸함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아예 다른 얘기긴 하지만, 비록 성인들이지만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보호해야 마땅한 집단도 필자의 생각엔 분명히 있다. 바로 군대에 가 있는 병사들이다.

군인이 겪는 여러 제한과 압박 중에 ▲군대의 특수성에 의해 요구되어 마땅한 부분과 ▲그렇지 않고 허용해줄 수 있음에도 안 해 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 한국군 병사들이 겪는 것 중 후자에 해당하는 게 꽤 많다는 데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대표적인 게 최근에야 해결된 핸드폰 소지다.

병사 개인이 그런 걸 구분해서 요구하기 어렵다. 사회 초년생이라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도 틀리진 않은데, 좀 더 근본적으로 상명하복 질서가 생활 전반에 매우 내밀하게 파고들어 있는 군대의 구조 때문에 그렇다고 봐야 한다.

군에 대한 민간감시 차원의 여러 공적 제도를 병사 개인이 직접 활용하기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러한 환경은 분명히 보완이 필요하다. 개인의 신뢰할 만한 대리자로서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군대는 이들의 요청에 대해 지금보단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군사적 기밀 유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 보신과 사건 은폐를 위해 병사 가족들한테까지 고압적 비협조로 일관하는 일이 그동안 많지 않았나.

물론 이게 생각대로 제대로 안 돌아갈 가능성이 무척 높다. 부모가 자식을 챙기는 건 사적인 것이며, 공적 보호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군대에 대해 병사 부모들이 지나치게 많이 개입하게 되면, 대리인으로서의 부모들이 다 같이 합심해서 병사들의 권리 일반을 공적으로 챙겨주는 것보다는, 권력 가진 부모들, 싸울 줄 아는 부모들의 사적인 제 자식 챙기기로 흘러갈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러면 이게 요즘 비웃음 받는 의대 부모 단톡방과 대체 뭐가 다른가? 바로 당사자들이 기본권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제한받고 있으며, 그에 대해 국민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해명하고 조정해야 할 군대라는 조직이 수십 년간 뻔뻔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술한 부작용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군대와 관련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저런 게 지금보단 활발히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적 토양에서 그런 부작용은 어느 정도 선에서 관리될 수 있어 보인다.

자녀의 학교 생활 및 입시에서는 물론이고, 직장 생활 등에까지 나서서 좌지우지하려 드는 '헬리콥터 부모'가 군대에서까지 사적인 부탁으로 악영향을 주는 것을 경계하는 의견도 물론 정당하다. 따라서 거창하게 말했지만, 필자가 얘기하는 건 사실 상식적이다: 사적으로 챙겨달라고 청탁하는 건 금지하되, 공적인 보호장치 및 민원창구는 확대해야 한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구분이 모호한 게 난제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최근 이슈를 하나 더 꺼내지 않을 수 없다. 현 법무부 장관이 당 대표 시절, 아들의 군대 휴가 미복귀 관련해서 챙기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에 대한 논란이다. 아들 서 모 씨의 휴가 미복귀가 원활히 처리된 것이, 위에서 언급한 '특수성에 의해 요구되면 안 되는 부분'에 해당하는지 '허용해 줄 수 있는 부분'에 해당하는지 필자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진실은 많은 카투사 병사들이 그런 사례는 자기 경험상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진술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사례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사안은 간단하다. 부당한 영향력 행사이다. '허용되지 말아야 할 일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에 해당한다면 얘기가 좀 더 복잡해진다. 물론 부당한 영향력 행사인 건 변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일반인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데, 소수에게만 허용된' 것이 문제라는 점에서, 비판을 위해 필요한 단계가 위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지위에 의한 특권 행사의 방식으로 기회의 부족을 극복할 때, 그 개인 차원에서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획득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남들이 따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그런 획득과정은 공적이지 못하기에,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기회의 보편적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그 특권 행사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적 논의는 오히려 축소되므로 국민 전체의 권익은 도리어 침해된다. 특수한 루트를 통한 권리획득이 나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를 휩쓴 조국 교수 자녀 논란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인턴을 제대로 안 하고 1 저자로 실렸다는 것, 그리고 표창장을 허위로 발급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인턴을 할 기회 자체는, 많을수록 좋고 일반적일수록 좋다. 그런 공식적 루트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적 연락에 의해서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기회가 존재했던 것은 분명히 문제적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어때야 할까? 그런 기회들을 없애는 것보다는, 그런 기회들이 실질적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하게 확대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본다. 조국 사태가 그런 '수시스러운' 기회들의 보편적 확대가 아닌, 수시 축소와 정시확대라는 정반대의 결론으로 이어진 것을 필자가 무척 반동적이라고 보는 이유이다.

군대 문제에서는 저런 것이 일상이다. 누군가가 어떤 과도한 제한사항을 특권적으로 극복하면, 사회는 그 제한사항 자체에 대해 재고하기보다는 특권 행사를 욕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은 사회의 당연한 속성이며 나는 이걸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 제한사항 자체를 논할 창구가 점점 좁아지는데, 군대라는 조직은 이런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를 기회로 삼아 극복의 여지를 아예 차단해 버리며, 그에 대응할 당사자들의 정치적 결집력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말하는 필자 역시도, 자기 혼자만 빠져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그 특권적 개인을 욕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현역 군인들의 휴가 관리만 더 빡빡해지고 끝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예측하는 군필자들이 많다. 병역과 관련해서 특혜 논란이 생겼을 때 이렇게 하향평준화식 대응으로 모두가 피해를 보는 일을 막으려면, 군대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의 구체적인 문제점과 그 해결책에 대한 담론이 상시적으로 있어야 한다. 여당의 몇몇 의원들이 이번 논란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되려 분노를 자극하는 발언을 했는데, 군대가 왜 이토록 민감한 문제가 되었는가를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특정인이 특혜를 받았는지의 여부만 논의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높은 현역판정률,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데 따른 불안감, 그리고 권익 침해가 만연한 군복무 환경 같은 것들도 공적인 논의의 주제가 되고 정치인들의 관심사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9월 11일 금요일

경험과 증언을 존중하기: 권익의 보편화를 향해

추미애 장관 아들 휴가 논란을 보면서, 나도 미필이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정말 이해 안 가는 게 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옹호하는 과정에서, 대체 왜 자기가 겪은 군대가 모두와 같을 거라고 단정짓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본인이 권익 보장받았었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이 그랬겠는가? 군대라는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은 군병원에서 진료 안받고 민간병원에서 받겠다고 병사 마음대로 정할수 있는 것이나, 휴가 미복귀 상태에서 전화로 연장하는 것 자체가 (당연히 되어야할 일이지만) 본인은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신빙성도 꽤 있어 보인다. 아픈데 민간병원으로 안 보내 주고 군 병원에서 시간 지체하거나 진단을 제대로 못 해서 병 크게 키운 것을, 인터넷 썰이나 뉴스 기사 등을 통해 예전부터 아주 많이 보아 왔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설령 본인은 안 그랬더라도 '아 그런 어려움이 있구나... 경우에 따라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게 상식적일 것이다. 그런데 본인은 안 그랬고 얼마든지 편하게 외진 결정할 수 있었다면서, 저런 증언들을 거짓말 취급하는건 진짜 이해가 안 간다.
특권이나 빽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단정짓진 않겠다. 오히려 본인이 이리저리 알아보는 수완이 좋고 인간적으로 싹싹했거나, 간부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남들이 문제를 겪었다는 걸 저런식으로 무시하는건 참기 어렵다.

권익을 보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보장받은 경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사례들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위와 같은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 논란의 결말은 권익의 보편적 보장이 아닌, 다같이 더 나빠지는 길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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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일 수요일

유아적 엘리트주의를 극복하기: 컨텍스트의 자각으로부터.

 소위 명문고등학교에서 사건이나 논란 같은 게 터지면, 재학생들이 당혹감과 입시 불이익 걱정 탓에 학교를 방어하는 글을 쓰곤 한다. 요새도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학생회가 교사들과의 교감 하에 언론 대응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글들에서 도리어 입시위주의 고교생활 동안 내면화된 공부 만능주의, 명문고라는 자의식 같은 것이 필터링 없이 외부로 전달되어 비난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순진무구함으로 가장된 오만함, 내집단에 대한 애정에 근거한 유아적인 엘리트주의라고 하겠다.
멀쩡히 공부하던 학생들이 사회와 언론의 풍파에 부당하게 휘말린다는 관점이 비록 온전히 거짓은 아닐지 모르나, 덜 휘말리기 위해 위치를 자각하고 발언을 자중하는 것 분위기 역시 분명히 필요하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의식뿐 아니라, 외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까지 갖추어야만 그런 시야가 확보된다. 그러나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나도 만약 내 일이 된다면 잘 할 자신이 없다.
왜 이 얘기를 하냐면, 최근에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어떤 싸움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개인들의 분노가 필터링 없이 공식에 가까운 루트로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만약 그런 분노에서 엘리트주의적인 색깔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정책토론이 아니라 집단을 둘러싼 여론전으로 상황이 금세 전환될 명분이 제공되어 버린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일각의 엘리트주의는 단기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표출되지 않도록 메시지 관리를 잘 해야 하고, 공적 가치를 최우선에 두고 있다는 진정성 있는 메시지에 구성원들이 동참하고 외부에도 설득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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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9일 토요일

테넷 - 후기 (스포일러 있음)

체계적으로 정리는 못 하겠어서 러프하게 나열만 해둠.

스포일러(?)가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줄거리를 디테일하게는 이해하지 못한 상태여서 크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음.

 

1. 과학적 소재 및 설정에 대해

먼저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에서 늘 큰 떡밥이 되는, 소재 및 설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뭐 아래에서 길게 쓰긴 할 테지만, 사실 마이너 디테일이다. 영화 관람은 물리학적 원리 그 자체보다는 시간역행이 가능하다는 것만 알면 되고, 그 나름의 시간여행 설정이 일관적이면 된다고 생각해서, 디테일한 고증(이를테면, 시간을 역행하는데 순행자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게 일관성있게 정당화 가능한가 등)을 하고 싶은 욕구는 별로 들지 않았다.

사실 소재 자체(인버젼의 물리학적 원리)는 영화 감상에 그렇게까지 큰 진입 장벽은 아니었다고 본다. 만약 엔트로피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치를 통과하면 시간을 역행해 갈 수 있다는 그 점만 소개되었다고 해도 작품 이해에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재미가 떨어졌겠지만...). 어려웠던 것은 오히려 설정보다는 스토리였던 것 같다. 테넷이라는 조직과 사토르의 조직이 펼치는 작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려면, 물리학적 원리를 공부하는 것보다는, 복잡한 시간선을 잘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큰 얼개는 알겠는데 최종 작전의 디테일은 아직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밟혔던 점은, 역행과정 중에 순행과정 속의 '나'와 접촉해야만 소멸한다는 설정이다. 애초에 '나'의 경계가 애매하지 않은가? 역행과정 중의 '나'가 반물질이라면, 실제로는 '나'든 아니든, 그냥 순행과정 속의 아무 물질과 만나도 소멸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소멸을 막으려면 방호복으로 감싸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장 같은 것으로 진공 속에 띄워져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러면 영화상의 여러 작전 장면들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뭐 상술했듯 이 정도야 그냥 설정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나무위키에서는 시간역행 중에 산소호흡기가 필요한 것이 시간이 거꾸로 가므로 호흡이 곧 산소를 뱉는 것이 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렇다기보다는 역행자는 반물질인데 순행과정의 산소는 물질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외에 뭐... 열의 흐름이 반대로 된다거나 하는 디테일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역행자 입장에서는 평범한 온도였다가 불에 닿으니 추워지는 것인데, 순행자 입장에서 그 장면을 보면 차갑던 애가 불에 닿아서 평범해지는 것이니 말이 된다.


2. 영화 내용에 대해: 첩보영화적 특성과 수렴적 구조에 주목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은 근본적으로 범죄 영화, 첩보 영화 감독이구나 싶었다. 인셉션 및 다크나이트 3부작에서는 내용상 직접적으로 그러했으며, 놀란의 초창기 작품도 그런 장르였다고 알고 있다.

본작은 '세상을 구하는' 영화이며 과학적 설정이 대거 채용되었음에도, 모험적 색채가 있었던 <인터스텔라>와는 달리 그러한 범죄 및 첩보영화의 색채가 짙다. 아마도 영화의 핵심 사건에 있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시적인 이유 역시 제시되기는 하지만) 사토르라는 개인의 동기가 강력하게 부각되기 때문인 것 같다.

범죄, 첩보 영화에서는 주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소수의 인물들이 극을 주도하며, 그 결과 역시 바깥에 공표되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러한 특성을 유지하면서, 한 술 더 떠서 그 인물들 역시 결국은 거대한 설정과 서사의 도구로 복무한다. 

역행과정의 실현이 가능해지고 그것이 순행과정과 상호작용하는, 새롭게 발견된 현상이 영화를 성립시키는데, 영화에서 펼쳐지는 작전은 그 새로운 현상을 활용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일으킬 파국을 방지하고 존재를 은폐하여 기존의 것들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영화의 구체적인 흐름 역시 열린 구조라기보다는 닫혀있는 수렴적 구조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보였던 몇몇 장면들이, 후반부의 자기 자신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확히 표현하지는 못하겠는데,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미래세대의 일은 미래세대의 몫이다'라는 대사들에서도 묘하게 그런 색깔이 느껴진다. 놀란 특유의 시대관, 세계관이 영화 속에서 '과학적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 혹은 '파국이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영화의 근본적인 성립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자연화된 한계인 것이다.

사실 <인터스텔라>도 그러한 면이 있다. 물론 <인터스텔라>의 주요 소재인, 갑자기 등장한 웜홀은 파국이 아닌 구원을 향하고 있으므로 <테넷>의 인버젼과는 다르다. 그러나 강한 중력 하에서는 시간이 엄청나게 왜곡되어 흐르고, 그것을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주인공의 딸이 주인공보다 훨씬 늙게 되는 것은 상술한 자연화된 한계에 해당한다. 테서랙트를 통한 과거로의 신호 전달이 가지는 수렴적 구조도 <테넷>과 비슷하다. <인터스텔라>에서는 구원을 향한 모험서사가 주는 발산적 숭고감과, 이러한 자연화된 한계가 주는 수렴적 숭고감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반면 <테넷>은 훨씬 더 수렴적이다. 경고된 파국은 세계 전체가 멸망하는 것인데 설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특히 모험장르가 아닌 첩보장르의 특성상 그런 식으로 가면 긴장감을 유지하기 쉽지않다), 그렇다면 (큰 틀에서 예상가능한 방식의) 문제의 해결은 반쯤 보장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디테일에 집중하여, 기존의 영화들보다 복잡하게 만들어서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볼 때 시간여행이 소재라고 주워들었기 때문에, 쥐가 버튼을 눌러 앤트맨을 복귀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미래의 히어로들이 과거로 가서 쥐를 조종해서(...) 앤트맨을 복귀시키는 것인 줄 알았다(물론 실제로는 그런 식이 아니었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간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시간의 흐름은 순행이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에서 그러할 것이다. 반면에 이번 <테넷>에서는 시간이 아예 역행하며, 이러한 대담한 설정 속에서 장면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이 설정 속에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야 일관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유의미한 장면을 만들지를 머리 싸매면서 고민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서 '아 이건 뭔가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오슬로 프리포트에서 등장한 괴한들의 정체, 배에서 어떤 여성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영화 후반부에서 어김없이 떡밥 회수가 되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여러모로 (지극히 복잡하긴 해도) 스토리상으로 떡밥을 남기기보다는, 깔끔하게 매듭짓고 끝내는 듯한 영화였다. <인셉션>처럼 해석이 분분한 결말도 아니고, <인터스텔라>처럼 그 정체가 해명되지 않는 존재가 개입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미래의 인류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고차원 외계인 같은 존재가 맞다는 내용을 본 것 같다). 물론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미회수 떡밥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테넷>에서도 역시 놀란 감독 특유의 차갑고 비인간적인 영상미(...)는 유지된다. 대표적인 것이 예고편에도 등장한, 바다 위에 풍력발전기가 쭉 깔려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액션 씬과 전투 씬도 상당히 다이나믹하게 연출되며, 특히 시간 역행을 이용한 비교적 소규모의 신기한 장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때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가 대단히 좋아하는 구성방식이 있다. 지구적인(?) 운명이 한두 사람의 삶의 장면과 근본적으로 얽혀서, 그 장면이 그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대표적인 것이 <트랜센던스>이다). 이 영화에서는 바로 사토르와 캣이 등장하는 배 위에서의 장면이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애틋하고 운명적인 사랑과는 정반대로, 불화와 긴장이 극대화되는 내용이긴 했지만 말이다. 전지구적인 운명이 한두 사람이라는 좁은 창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이런 식의 연출은 묘한 숭고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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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6일 수요일

극우적으로 동원되는 종교와 과학: 부당하게 자연화된 가치명제로서

 '차이를 인정하고 살라'는 주장은 우생학스럽고 차별적인 것인데도, 나름의 논리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서 찾아볼 때마다 놀란다. 예전에는 그 메시지를 나름대로 감추려 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아예 저 문장을 직접 말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박근혜정부 때 권력과 결탁했던 청년단체 쪽에서 좌파를 욕하던 맥락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차이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걸 부당하게 전복하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한때 관심을 모으던 성평화라던가, 보수 유튜버들이 패시브로 깔고 가는 안티페미니즘(이는 사실 보수뿐 아니라 반대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에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그것을 선명하게 극우담론에 복무시키는 매체 위주로만 다룬다)도 그렇다. 많은 청년 대안우파 흐름이 있지만 그들의 핵심은 결국 저 메시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건 전통적인 성역할을 자연적인 것으로 강조하고 뉴에이지(?),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하는 극우 개신교 논리와 통해 있다.

물론 디테일한 차이점은 있다. 먼저 기독교 보수주의에서는, 상술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세계관 상에서의 모종의 질서가 붕괴될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우려한다. 반면 청년 대안우파는 주로 과학과 이성을 내세워서 차이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과학 중 꽤 많은 것들은 사실 부정할 수 없는 '과학지식'이라기보다는, 환경과 사회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회적 선호 같은 것을 과학적 진리라고 본인들 마음대로 생각한 것이거나,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함량미달의 과학을 인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때,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부당하게 자연화된 가치명제로서, 종교에서 말하는 자연의 섭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다.

물론 모범사례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과학지식과 종교적 신념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과도한 신봉에서 오는 폐해를 비판하는 취지에는 동감할지라도) 그 차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외곽지대에서 왜곡된 형태로 극우논리에 동원되는 방식은 서로 별로 다르지 않다. 극우 개신교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이 기독교에 기반을 두었다는 등 자신들의 세계관과 세속국가인 한국의 국가관을 얼토당토않게 동일시한다. 이들은 심지어 국가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보수주의에 친화적이지 않은 국가권력은 제대로 된 권력으로 인정을 안 한다. 한편 청년 대안우파에서도 나름의 논리를 기반으로 좌파이념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이질적으로 출발한 저 둘은, 자연스러운 차이가 지워짐에 따른 사회(혹은 국가)의 붕괴를 우려하는 보수주의라는 한 몸체의 양쪽 바퀴로 귀결된다.

이 양쪽 바퀴가 향하고 있는 길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먼저 청년 대안우파의 경우 크게 성폭력 개념의 확장에 따른 공포, 문화컨텐츠에 대한 PC로 요약되는 좌파적 개입에 대한 반감, 그리고 군대문제가 핵심으로 보인다. 앞의 두 개는 사실 잘못 흘러간 케이스가 분명히 없지는 않았던데다(그러나 잘못이 없다고 잘못 알려진(...) 케이스 역시 분명히 있다), 기존에 디폴트로 존재해온 잘못된 인식이 뿌리깊기 때문에 그것과 싸우다 보면 헛발질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으므로 정말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문제성은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대응하지만, 디폴트로 존재해온 문제적 인식은 별로 인정하지 않고, 타개하는 데 협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문화컨텐츠에서 여성 소비자들의 발언권이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길게 봐야 하고, 더욱 시급한 것은 군대문제가 아닐까 한다.

군대 문제는 근본적으로 어처구니 없이 심각한 것이 맞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실질적인 개선을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평상시 복무환경뿐 아니라 의료시스템이나, 사고 발생 시 대처 역시 매우 열악하며, 단순히 열악함을 넘어서 '할 수 있는데도 안 해서' 문제가 터지는 군대 특유의 뭣같음이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잘만 한다면 정치적 효능감을 건전하게 발휘할 기회도 있을 것이나, 적어도 현재와 같은 식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보수정권이 아닌 현 정권에서 군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점이 많은데 이에 대한 홍보 역시 필요하다고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개신교 극우주의에 대한 대응 문제다. 먼저 극우 개신교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여러 '이상한' 주장들이 비과학적이며, 나아가 종교적 신념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 자체가 우려스럽고 위험하다는 식의 비판은 많은 비종교적인 이공학도의 입장에서 꽤나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있는 종교적 경향을 지나치게 타자화시켜 오히려 그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고, 종교에 대해 인류가 기존에 쌓아 온 '문과적' 학술지식과의 접점이 많지 않아 시너지를 발휘하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정작 필요한 곳에 잘 가 닿지를 않는다. 예컨대 소위 신무신론의 일각에서 이야기되는 '밈 이론'은 방법론적으로 학술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 유비적인 낯설게 보기에 가까우며 그것을 넘어설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인다. 극우 개신교의 이상한 주장들이 가진 문제점을 링 위에 올리려면, 그 주장들이 생산되고 소비되며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구조를 사회학적으로 따지는 구체성이 필요하다.

현재 코로나19 재확산 국면에서 나타나는 반사회적, 음모론적 태도를 포함하여, 한국 극우개신교에서 이상한 지식이 아무렇지 않게 유통되는 것은 현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현상의 '원인'에 보다 가까운 것은 공적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지역사회 커뮤니티 기능과, 노인과 탈북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심지어 교육 기능 일부까지 과도하게 종교단체에 위임(극우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되어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책임을 위임하는 대가로, 세속사회와는 다른 인지도식이 신도들에게 체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떠한 반사회적 신념이 침투할지는 근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그 중 일부가 정치적으로 동원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위임된 공적기능을 집행하는 종교활동 현장에서 사적 신념이 설파되는 것 자체를 국가가 신경써서는 안 되고, 게다가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종교의 직접적인 정치동원만을 제도적으로 막는 것만 해도 위험할 수 있다. 한편 비종교적 민간영역은 복지를 굴릴 유인이 없다. 따라서 이렇게 종교단체에 과도하게 위임되어 있는 사회적 기능을 비용을 들여서라도 국가가 어느정도 회수하여 집행할 필요가 있다. 공적 프로그램에서라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통한 감시와 의견표출이 비교적 자유롭고, 조직 역시 종교지도자와 같은 특정인으로 소급되지 않기 때문에 보다 건전한 운영이 가능하다. 한편 세속적 민간영역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각종 복지프로그램에 대한 진심어린 참여 및 감시와 함께, 컬트적이지 않은 지식을 공적 영역, 특히 교육 등에 효과적으로 공급하는 것 역시 절실히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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