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는 여러모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는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을 매듭짓는 일에 집중해야 했던 한 해였다. 그렇다 보니 취업, 진학 등으로 먼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동료들과 나를 자꾸만 비교하게 되면서 심적으로 힘든 점도 많았다. 비록 복수전공 때문에 제도상으론 초과학기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주변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더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진짜로 초과학기인 만큼, 내 할 일을 하면서 나보다 먼저 출발한 동료들로부터 들려오는 것들에도 귀를 기울여서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대학생활 동안 빠르게 중심 잡아서 동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막연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보낸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올 한 해 동안 그 방황을 수습하고 몇 가지 중심을 잡아서 추구해 보는 과정을 겪고 나니까, 재미있게도 내 관심사는 멀리 돌아서 고등학교 및 대학저학년 때 막연하게 관심 갖던 분야들로 향했다. 이건 확증편향이겠지만, 내가 해 온 것들이 일관되게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때보다 알고 있는 것은 분명 더 많아졌을 텐데, 아는 게 없다는 느낌은 어째 더욱 커진 것만 같다. 방학부터 해서 2019년 동안은 관심분야 방법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익히고, 어디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생각이다.
사실 이번 한 해는 수업보다는 2개의 졸업논문을 쓰면서 많이 배웠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전기과에서는 졸논보다는 졸프라고 많이 부르며, 주제가 정해져 있어서 해당 주제에 지원하는 방식이다. 나는 학부 수업으로 익숙한 분야가 아닌 처음 보는 분야에 도전하면서 제어이론을 밑바닥부터 봤는데,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따라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교수님과 담당 연구원님이 그 연관성도 짚어 주셔서 감사했다.
물리과에서는 졸논 주제를 온전히 스스로 정했다 보니 더욱 애착이 간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분야를 살펴봐도 결국 통계물리, 복잡계스러운 쪽으로 관심이 가길래 약간 답정너(...)긴 했지만 그쪽 위주로 논문 리딩해 가면서 주제를 선택했다. 모델은 다 구상했으니 이제는 이변이 없는 한 뭘 해야 할지는 사실상 거의 정해져 있고, 전산적 구현만을 남겨두고 있다. 못하는 코딩 어찌저찌 해 가면서 1월 중에 끝냈으면 한다.
미학과에서는 수업 들은 게 전부지만... 상반기에 고전연구회와 Freethinkers에서 니체를 다뤘었는데 하필 2학기의 현대독일미학 수업에서도 니체를 다뤘기 때문에 정말 원없이(?) 니체를 읽었다. 니체는 그 문체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면서 막연히 거부감을 가졌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얻을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에 감명을 받으면 괜히 지는 것 같고 쿨한 태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미미학연습에서는 OCR 해서 구글 번역기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영문텍스트 꾸준히 본다는 게 크긴 큰지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이 예전만큼 오래걸리지는 않게 되었다.
동아리에서는 직접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 활동들 전반을 관리하는 임원진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회의도 하고 소중한 인연들이 된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책임을 맡은 부분들에 대하여 좀 더 빨리, 좀 더 신중히 했어야 하는 것들도 떠올라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해 동안의 개인적인 소득을 꼽자면, 자리에 막연하게 오래 앉아 있는다고 성실함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감한 점이 크다. 물론 길게 본다면 시간투자는 정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간투자를 꾸준히 하는 것도 분명히 성실함의 개념에 대표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메타인지와 정보수집을 통해 내게 현재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적재적소에 도움을 요청하면 보다 짧은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이것 역시 - 때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중요한 - 성실함일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의미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어떤 일의 한 국면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어차피 학업내용의 범위가 좁았고 그 안에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이 유리했으나, 대학교에서는 이런 방식이 내게 대체로 비효율적이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계속 고민만 늘게 된다.
이런 점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대학을 4년 다니면서도 고쳐지지 않아, 전기과 졸논을 쓸 때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밑바닥부터 공부해서 도전하는 분야인 만큼 더욱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다가 성적 잘 못 받으면 그만인 일반 교과목들과 달리 졸논은 무조건 써야 하는 것인데다, 과 도서관에 검색하면 나온다는 데서 자존심 문제도 있다 보니 어떻게든 잘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당장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구현해 보고, 일단 써 보고, 일단 풀어 보는 것이 일의 진행에 있어 훨씬 낫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이해 안 됐던 것들은 자연스레 실마리가 보이고 말이다. 2019년 한 해는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좀 더 의욕적인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