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게시물 목록

2018년 12월 31일 월요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소감


  올 한 해는 여러모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보다는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을 매듭짓는 일에 집중해야 했던 한 해였다. 그렇다 보니 취업, 진학 등으로 먼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동료들과 나를 자꾸만 비교하게 되면서 심적으로 힘든 점도 많았다. 비록 복수전공 때문에 제도상으론 초과학기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주변과 비교하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더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진짜로 초과학기인 만큼, 내 할 일을 하면서 나보다 먼저 출발한 동료들로부터 들려오는 것들에도 귀를 기울여서 앞으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대학생활 동안 빠르게 중심 잡아서 동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막연히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보낸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올 한 해 동안 그 방황을 수습하고 몇 가지 중심을 잡아서 추구해 보는 과정을 겪고 나니까, 재미있게도 내 관심사는 멀리 돌아서 고등학교 및 대학저학년 때 막연하게 관심 갖던 분야들로 향했다. 이건 확증편향이겠지만, 내가 해 온 것들이 일관되게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때보다 알고 있는 것은 분명 더 많아졌을 텐데, 아는 게 없다는 느낌은 어째 더욱 커진 것만 같다. 방학부터 해서 2019년 동안은 관심분야 방법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익히고, 어디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생각이다.

  사실 이번 한 해는 수업보다는 2개의 졸업논문을 쓰면서 많이 배웠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전기과에서는 졸논보다는 졸프라고 많이 부르며, 주제가 정해져 있어서 해당 주제에 지원하는 방식이다. 나는 학부 수업으로 익숙한 분야가 아닌 처음 보는 분야에 도전하면서 제어이론을 밑바닥부터 봤는데, 논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따라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교수님과 담당 연구원님이 그 연관성도 짚어 주셔서 감사했다.

  물리과에서는 졸논 주제를 온전히 스스로 정했다 보니 더욱 애착이 간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분야를 살펴봐도 결국 통계물리, 복잡계스러운 쪽으로 관심이 가길래 약간 답정너(...)긴 했지만 그쪽 위주로 논문 리딩해 가면서 주제를 선택했다. 모델은 다 구상했으니 이제는 이변이 없는 한 뭘 해야 할지는 사실상 거의 정해져 있고, 전산적 구현만을 남겨두고 있다. 못하는 코딩 어찌저찌 해 가면서 1월 중에 끝냈으면 한다.

  미학과에서는 수업 들은 게 전부지만... 상반기에 고전연구회와 Freethinkers에서 니체를 다뤘었는데 하필 2학기의 현대독일미학 수업에서도 니체를 다뤘기 때문에 정말 원없이(?) 니체를 읽었다. 니체는 그 문체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면서 막연히 거부감을 가졌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얻을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것에 감명을 받으면 괜히 지는 것 같고 쿨한 태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미미학연습에서는 OCR 해서 구글 번역기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영문텍스트 꾸준히 본다는 게 크긴 큰지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이 예전만큼 오래걸리지는 않게 되었다.

  동아리에서는 직접적인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 활동들 전반을 관리하는 임원진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회의도 하고 소중한 인연들이 된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책임을 맡은 부분들에 대하여 좀 더 빨리, 좀 더 신중히 했어야 하는 것들도 떠올라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한 해 동안의 개인적인 소득을 꼽자면, 자리에 막연하게 오래 앉아 있는다고 성실함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감한 점이 크다. 물론 길게 본다면 시간투자는 정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간투자를 꾸준히 하는 것도 분명히 성실함의 개념에 대표적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메타인지와 정보수집을 통해 내게 현재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적재적소에 도움을 요청하면 보다 짧은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이것 역시 - 때로는 앞의 것보다 훨씬 중요한 - 성실함일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의미의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어떤 일의 한 국면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그 다음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는 어차피 학업내용의 범위가 좁았고 그 안에서 정확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이 유리했으나, 대학교에서는 이런 방식이 내게 대체로 비효율적이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계속 고민만 늘게 된다.

  이런 점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대학을 4년 다니면서도 고쳐지지 않아, 전기과 졸논을 쓸 때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밑바닥부터 공부해서 도전하는 분야인 만큼 더욱더 그랬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다가 성적 잘 못 받으면 그만인 일반 교과목들과 달리 졸논은 무조건 써야 하는 것인데다, 과 도서관에 검색하면 나온다는 데서 자존심 문제도 있다 보니 어떻게든 잘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당장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구현해 보고, 일단 써 보고, 일단 풀어 보는 것이 일의 진행에 있어 훨씬 낫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이해 안 됐던 것들은 자연스레 실마리가 보이고 말이다. 2019년 한 해는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좀 더 의욕적인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2018년 12월 20일 목요일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감상평

  보고 나오자마자 또 보고싶다. 심야영화 보러 가는 생전 안하던 짓을 했는데, 정말 잘 한 일인 것 같다. 우주명작의 반열에 들 법하다는 생각.

  일단 단순히 잘 만든 영화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섬세하면서도 실험적으로 짜여진 영상들이 자유자재로 다뤄지는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만화영화라는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마도 돈과 시간도 많이 들여서) 그 잠재력을 무척이나 탁월하게 끌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꼭 만화영화라는 형식이어야 하지 않은 작품들도 꽤 있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매체의 특성을 적극 발견하고 활용하는 작품들에 더없이 매료되는 편이다.

  이러한 '만화적 특성'이 전면에 노골적으로 부각되면서 극중 내내 연출적 측면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까지 넘나들면서 인상깊은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분위기를 지배하는데 어찌 감탄하지 않겠나. 실험작임과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귀감이 될 만한 영상물이 될 것 같다고나 할까.

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2월 5일 수요일

권력자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의미와 가치 사이에서의 책임

1. 예술과 정치의 관계 측면에서

무언가가 해석을 통해 부여받는 '의미'와 정당화된 수단으로서 갖는 '가치'는 개념적으로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매우 밀접하게 동반된다. 그 밀접함을 책임있게 짚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소 인위적일지언정 이 둘을 머리 속에서라도 엄격히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가 곧 정당화를 통해 가치를 부여하는 시도로 간주되는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사유의 교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철학적 오류가 아니며 오히려 외부 현실과 결부된 불가피한 정치적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부조리하다. 세계의 한 단면을 끄집어 내어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하여 전시하는 작업은 사유의 전개에 있어 필수적이나, 그렇게 끄집어내어진 사건들을 소재로 한 사유가 사람들에게 공유되면 그 소재들은 본래 의도와 관계없이 '실제로' 가치를 획득하게 되며 이것은 사상가를 모종의 윤리적 평가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작업은 예컨대 순전한 예술에서라면 매우 일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이기까지 한 작업이지만, 정치의 영역과 결부된다면 시도되는 그 즉시 온갖 종류의 문제를 야기한다. 예술에 대해서건 정치에 대해서건, 예술적 비평과 정치적 비평을 의식적으로 구별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


2. 거시적, 미시적 정치권력 측면에서

  이 글에서는 '의미'와 '가치'를 둘러싼 부조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의미는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존재하지만 가치는 실천을 통해 사회 속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다. 이처럼 의미와 가치는 그 개념상 별 상관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가치는 실천적으로는 굉장히 밀접하게 동반된다. 필연적인 개념적 관계가 없는 것들이, (말하자면 우연적인)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진 바에 따라 서로 관계맺어지면서 마치 필연적인 것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부조리이다. 그리고 이 부조리의 원인은 다름아닌 권력이다.

  누군가가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가 어떤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현상이 정당화되고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 구별되기 어렵다. 그가 어떤 현상이 갖는 의미를 머리속에서 생각해내고 그것을 끊임없이 언급한다면, 언론 보도를 통해서, 지지자들의 담론 재생산을 통해서 그 현상에는 실제로 가치가 부여되게 된다. 사람들의 삶의 일정 부분이 그 의미에 결부되어 규정되기 때문이다. 지극히 뇌피셜이지만 나는 이걸 권력의 '정의'처럼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대상들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를 그저 그렇게 머리속의 지적 유희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을 실제로 그렇게 조직해내고 정당하다고 믿어지게 만듦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삶과 결부시키고, 따라서 가치로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위에서는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나 적용될 법한 뉘앙스로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에서의 미시적인 발화권력이나, 온갖 종류의 조그마한 결정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것은 빠짐없이 적용된다. 또한 신문사에서 무엇에 의미를 부여해서 기사화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도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예술가나 문예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에 무엇을 어떻게 집어넣을지에 대한 결정권도 여기에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가졌음을 인지하고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킨 뒤, 자신은 가치를 부여한 게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만큼이나 후자의 경우에도 신경을 쓰고 비판해야 한다. 어째 정확한 예시를 잘 못 들겠는데, '그냥 주관적 생각을 쓴 것뿐이다', '정당화한 게 아니라 그냥 의미가 뭔지 생각해본 것뿐이다' 뭐 이런 식의 해명 말이다.

  가치를 제거하고 의미만 남겨두겠다고 선언할 때, 그 선언은 그의 머리속에서야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그의 권력에 의해 뭔가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미 결부되어 버린 이상 그 결부를 끊어내는 일이 마법 주문처럼 선언 한 번에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혹은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한 번 권력을 획득한 이상, '이 의미부여는 지적 유희일 뿐, 가치로 실현시키지는 않겠다'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은 끊임없이 자기반성적으로 성찰되어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발화의 커버리지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그에 따라 책임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권력은 그 권력을 가진 자 스스로도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지극히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단순히 '권력에 중독되면 놓기 어렵다'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이런 부조리는 무언가를 외부적 가치와 결부시켜서 누군가에게 이롭거나 해롭게 하지 않은 채, 오직 내적으로 자유롭게 의미 부여를 해 가면서 여러 상상을 펼쳐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슬픈 것이다. 큰 영향력을 갖는 정치인은 더 이상 '도발적 상상'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또한, 인기를 누리던 예술가들이 간혹 영광을 뒤로 하고 은둔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부조리 때문일 것이다.

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안티페미와 기독보수의 결합

  박근혜 탄핵 이후로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흐름은 안티페미 청년세력과 반공 기독보수 세력의 결합 가능성이다. 이 둘의 결합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자칭하면서 동성애, 페미니즘, PC주의 등을 자유주의의 대립항으로 과장되게 설정해 놓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이명박 정권 즈음에 탄생하여 박근혜 정권 당시 전경련 등의 비호를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청년보수의 정치세력화를 꾀했던 이들은 주로 경제에 대하여 논하며, 종교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K-자유주의라고 부른다)에 대해서 이미 몇 개월 전에 비판적으로 적은 바 있다(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10764452348585).

  이들 청년우파가 그 발생적 기원으로 가지고 있는 2010년대 초반의 인터넷 담론은 페미니즘을 비판할 때 다름아닌 ‘종교적’이라는 단어를 쓰곤 할 정도로 페미니즘 등의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의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지 않은 편이었다. 2015년경부터 페미니즘이 사회적 의제로 급상승하면서 그 대립항으로 나타난 안티페미니즘 담론은 2010년대 초반 당시의 청년우파들의 이러한 면모를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러한 최근의 안티페미니즘 담론은 아직 실질적인 조직화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좌파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만큼 그 저변이 확대되었으므로 더 이상 우파라는 단어로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겠다.

  한편 트루스포럼 등으로 대표되는, 박근혜 청와대와 국정원의 지원 하에 정권을 보위하다가 정권이 퇴락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보수 개신교 세력은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무신론, 페미니즘, 동성애, 포스트모'드'니즘, 인본주의 등의 다양한 단어들을 ‘네오맑시즘’이라는 표현 아래 묶어서 지칭하면서 그것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세상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충 좌파이론들 중 경제에 대한 것이 아닌 사회문화에 대한 것을 묶어서 네오맑시즘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개념들 사이의 관계가 상당히 왜곡되고 뭉뚱그려져 있어서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는(not even wrong) 일종의 ‘가짜뉴스’에 해당한다. 지난번 글에 이어, 이하에서는 이렇게 이들이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저 수많은 단어들을 함께 묶어서 비판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썼듯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의 대표자로 여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개신교를 등장시킨 종교 개혁이 역사적으로 자유주의 정신의 발흥과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초강대국 미국은 아예 국가 자체가 그러한 개신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성립된 데다,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개신교 정신이 주류 사회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게다가, 냉전시절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이 국가 무신론을 채택했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지구의 운명을 놓고(...) 그 공산권 세력과 대립한 역사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 주류세력의 인지도식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개신교가 한 덩어리가 되고, 공산주의와 무신론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 둘이 대립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주류적 정신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사실 개신교랑 별 상관이 없이도 얼마든지 보편성을 획득하고 존립할 수 있는 체계이다. 반대로, 개신교가 역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해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고, 개신교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필연적인(즉 개념적인) 관계는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무신론도 당연히 공산주의와 전혀 상관없이 존립할 수 있으며, 서구 사회의 무신론자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을 공산주의와 연관짓는 주장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요컨대, 냉전의 역사는 보수 개신교인들이 우연(역사적 현상)과 필연(개념적 도식)을 혼동함으로써 세계를 보는 개념적 도식을 꼬이게 하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현재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자신들이 자유민주주의를 필연적으로 대표한다고 평가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으며, 오히려 현재 그들의 행보는 실천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까지 하다.

  이들 보수 개신교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등을 경계하는 맥락도 위와 통한다. 그 맥락에는 이들 사상이 다루는 개별적인 문제들에 대한 반대도 있겠지만 그것은 핑계에 가깝고, 이들 사상이 기반을 두고 있는 주된 철학적 이론들에 대한 경계심이 더 커 보인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오맑시즘’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페미니즘 이론 중 꽤 많은 수가 기반을 두고 있는, 20세기 유럽을 풍미한 철학 및 문화이론이 맑시즘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 나름대로 정확하게 캐치해 내고 있다. 이들은 부정할 수 없는 이 미약한 연결고리를 상당히 과장하여, 냉전 시기에 자신들이 가졌던 반공 정신을 그대로 반동성애, 반페미니즘 정신으로 이식시켜 버린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을 소련이 미국을 몰락시키기 위해 퍼뜨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수 개신교인들에게서 페미니즘, 퀴어 이론 등은 그 세밀한 차이가 지워진 채 엉뚱하게 사회주의와 동일시되고, 그들 스스로 수호한다고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립항으로 설정된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2010년대 초반을 풍미한 청년보수,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꾸준히 있어왔던 반공 기독보수는 박근혜 탄핵 이후로 유튜브 채널을 함께 운영하고, 보수의 재건을 꿈꾸는 언론사들에 의해 함께 묶여서 소개되는 등 실질적으로 결합되었다. 사실 이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일반적으로 서로 가깝다고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K-자유주의 청년보수와 반공 기독보수는 각각 전경련, 그리고 국정원/청와대를 매개로 하여 박근혜 정권을 비호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위하던 정권 자체가 퇴락하면서 이들은 보다 직접적인 결합을 도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합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지점은 바로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사회문화적 아젠다들이 자신들을 배제하고, 세상을 망칠 것이라는 위기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요즘은 청년보수를 낳은 인터넷 문화의 직접적 후신이자 2015년 이래로 좌우를 막론하고 발흥하고 있는 일련의 안티페미니즘적 모멘트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발견한 대단히 흥미로운 어떤 장면이 있다. 안티페미니즘으로 대중적 화제를 얻고 있는 오세라비 작가가 내일부터 두 대학교에서 하루 간격으로 강연을 하는데, 첫번째 초청은 과격한 안티페미, 반PC주의를 표방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반종교적이기도 한 개인에 의해 이뤄진 반면, 두번째 초청은 극렬한 보수 개신교 단체인 카이스트 리버티 아카데미(트루스포럼과 동일한 단체로 보임)에 의해 이뤄졌다. 상술한 흐름을 고려할 때, 이 두 사례가 교차하는 장면은 나름 상징적이다.

  최근들어 느끼는 문제점 중 하나는, 현재 논의되는 사회적 의제들을 보았을 때 남성 청년들이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권 출범 이후 청년 일자리 문제는 충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다 고용세습 논란 등으로 박탈감과 배신감은 가중되었다. 남북평화 추구는 원론적으로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삶에의 직접적인 영향이 체감되기 어려우며 독재정권을 웃는 얼굴로 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감을 사는 측면도 있다. 남성 청년들의 삶과 관련하여 단기간에 개선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군 인권 문제 정도일 텐데 이것조차 크게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페미니즘의 급속한 정치적 의제화를 보면서 또래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무언가를 '누리는데' 자신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정치적 박탈감은 가중된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박탈감은 현 시대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의 근원과도 같은 보수 개신교가 생산하는 컨텐츠들을 통해 은밀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충족될 수 있고, 잠재적으로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 전세계가 겪는 문제 중 하나인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서도, 정치에서의 세속주의적 가치의 수호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15일 목요일

고립과 배제로는 교조화를 막지 못한다

  여성이 머리를 짧게 했다고 해고되었다는 뉴스와, 머리를 짧게 했다고 린치를 당했다는 뉴스를 거의 동시에 보았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환경에서 페미니즘을 향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식의 말들이 어떻게 기만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싸움의 원인은 도대체 누구의 어떤 말들에 의해서, 누구의 어떤 행동들에 의해서 제공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오지랖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도를 논하기 이전에 여성이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개인의 자기표현일진대, 그것을 공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면 안 된다. 그 공격이 바로 여성이 머리를 짧게 함으로써 페미니즘을 표방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핵심적으로 비춰져야 하는 지점은 명백하게 젠더폭력의 문제가 된다. 후자가 핵심이므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되 전자의 측면도 조명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탈코르셋이 교조주의적으로 흐를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최근에 많다. 나 역시 탈코르셋 운동이 가진 여러 함의 중 '기존 질서에 복무하는 특정한 상징의 철폐'라는 함의가 강화되고 '상징의 채택에 있어 간섭받지 않음'이라는 함의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목소리에 동감하는 면도 없지 않다. 개별 상징 자체의 철폐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징이든지 일방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기존의 시선을 파괴하는 것이 더 궁극적인 목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결은 이 문제에서 상관없다. 어찌되든 저런 논의는 우선 맨 처음에 제시한, 사람을 해고하거나 때리고 심지어 죽이면서 삶의 조건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젠더폭력이 제거되고 난 뒤의 문제이다. 단순히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뭐랄까, 인식상의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해야겠다. 저런 거대한 문제가 계속되는 한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조주의를 둘러싸고 편갈라 토론하면서 충분히 세세하게 성찰할 만한 여력이 없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교조주의를 정당화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조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 교조주의의 발흥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단순히 그 과격한 모습을 비판하고 그 모습에서 눈을 돌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격함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더 과격하지만 더 은밀한 것이 마치 당연한 듯이 자리잡아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자신과 그 주변, 나아가 사회의 폭력적인 인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돌아보면서 싸워낼 필요가 있다. 어떤 문제이건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착하기를 잠시 중단하고 일상을 투쟁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페미니즘적 실천과 참여라고 불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고 '진정한 페미니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래서 잘못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일관되게 주장해 온 바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커다랗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미시적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만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사람들 각자가 이러한 문제들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삶의 일정 부분 이상을 이 문제에 개입시키고 있을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과격한 태도를 중단하고 조곤조곤 설득해서 '선뜻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오히려 과격한 태도를 유지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를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린치를 하는(그리고 그것에서 젠더폭력의 맥락을 애써 지우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말이다. 특정한 언어표현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같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남이 페미니즘을 표방하건 말건, 머리를 짧게 하건 말건 해고하거나 린치하지 말자는 기본적인 문제 정도는 그런 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시민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와, 시민적 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일단 상대방을 시민 취급 좀 하라는 문제는 다르지 않나. 물론 단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5일 월요일

영단어 'radical'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

  영알못이지만 radical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그 다양한 용례로부터 받는 인상을 종합해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급진적인 것과 과격한 것은 매우 다른데, 영어의 radical에는 그 두 가지 뜻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다. 이 단어의 다양한 사전적 의미를 모두 종합해 보았을 때, 이 단어가 담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뜻은 급진적인 것과 과격한 것 중 어느 것도 아닌, 무언가의 '근본을 타협 없이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 정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르면 무언가를 radical하게 추구했을 때 최전선의 세밀함을 보여주는 급진적인 사유로 이행할 수도 있고, 혹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사유로 이행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 둘은 교집합이 존재하지만 어떤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근래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어떤 경우에는 학술적 분파로서의 2세대 페미니즘을 일컫는 의미로, 다른 경우에는 탈코르셋 등을 예외 없이 철저하게 추구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지칭하는 의미로 분리된 듯 하면서도 분리되지 않은 채 쓰이고 있다(후자가 대체로 '랟펨'으로 불리는 듯하다). 이 둘은 겹치는 점이 있지만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2세대 페미니즘과 3세대 페미니즘의 관계는 최근 담론에서 등장한 소위 '랟펨'과 '쓰까'의 관계와도 정확하게 대응되지 않는 것 같다. 한편 안티페미는 주로 그 세부적인 주장 내용보다는 주장의 공격성에 초점을 맞추어, '과격한', 내지는 '공격적인' 페미니즘이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한편, 종교적 근본주의나 정치적 극단주의에서 나타나곤 하는 반사회적 의견과 같이 '과격하면서 동시에 반동적인' 것에 radic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1월 2일 금요일

악마적인 디지털성범죄 카르텔의 원천 소탕을 염원한다

디지털성범죄 영상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제국을 세운 이가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가 회사 직원에게 행한 갑질과 폭력도 문제지만,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그의 회사가 사실상 거대한 범죄집단이라는 데에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사과문은 지극히 기만적이다. 그는 복수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디지털성범죄 영상을 유통함과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돈을 받고 영상을 삭제하고 또 다시 유통하는 악마적인 구조로 부를 축적해 왔다. 디지털성범죄와 관련된 꾸준한 여론 형성과 기자들의 노고를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반드시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며, 수익구조 차단을 위한 연구 및 입법적 노력과 더불어 디지털성범죄 영상을 무비판적으로 소비해온 이들의 철저한 인식 개선이 동반되어 이러한 기업이 더는 등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미지: 사람 1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950190711739291&set=a.230707467020966&type=3&theater

archived on 2018.12.31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화를 환영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원심의 유죄판단을 뒤집고 무죄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최근들어 1, 2심에서의 무죄판결은 종종 있어 왔으나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은 그 개별 판결들과는 무게가 다르다고 보인다. 지난번에 헌법재판소에서 병역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에 이은 중대한 전환점인데, 이로써 현재 계류 중인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비록 나의 사적인 신념, 개인적 양심은 병역거부가 아닌 군 인권 보장을 통한 복무환경 개선 쪽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공적 영역에서 명백한 연대의 대상이다. 일부 반대론자들의 오해와 달리 양심적 병역거부의 반의어는 비양심적 병역이행이 아닌 양심적 병역이행임을 강조하면서 오늘의 판결을 환영하고 이들의 선택을 응원한다. 아울러 평화체제의 정착을 통해 다양한 대체복무의 유지 및 확대가 보다 편하게 논의될 수 있었으면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군대문제를 보는 관점에 대한 좋은 예시

  어제 공유했던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관점의 활동들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페친 분이 공유해 주셔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군대를 오직 시민사회와 유리되어 있는 이상한 공간으로 보기를 중단하고, 시민성을 바탕으로 군대의 운영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간섭하고 개입해야 한다. 군대에 대한 시민적 담론이 활성화되는 것이 역으로 군대가 시민성을 규정하는 반동적인 사태로 이어질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며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만, 30년 동안 성장한 우리 사회의 '맷집'에 이제는 슬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기대를 걸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5년 2학기 때 우리 학교 사회대 학생회랑 군인권센터 공동 주최로 이것과 비슷한 관점에서 임태훈 소장님이랑 김광진, 김종대 의원님이 토크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여담이지만 당시 행사 종료 후 김광진 의원님이랑 우리 동아리 회원들이 길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가지 않은 점이 새삼 아쉽다. 지금 같아서는 아무리 드랍 기한 이후일지라도 중간고사 따위 버리고 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941046795987016?__tn__=-R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SNL 군무새 논란

  SNL의 후속격 프로그램인 '최신유행프로그램'의 한 코너에서 모임을 갖는 대학생들이 소위 '군무새'에게 한 방 먹이는 내용의 콩트(https://www.youtube.com/watch?v=8LkYkx6Ne3U)를 제작하여 화제와 논란이 되고 있다. 나는 이 영상이 '군무새'가 모임 분위기를 깨뜨리는 데 대한 불쾌감을 공유하며 웃음으로 승화하는 효과는 있으나, 문제의 핵심은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영상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이상의 시사적 효과를 (적확하게) 발휘하기를 의도했다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다.

  군인들의 경험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을 이 정도로 '빈틈없이' 타자화시키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소위 '군무새' 문제의 원인을 그러한 행동을 하는 개별 전역자들이 아닌,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충분한 물질적/정신적 보상을 제공하지 않고 있는 국방부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할진대, 이 영상은 문제를 개별 전역자들에서 찾고, 그 너머에 대한 시야를 제공하지 않는다.

  제목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여성혐오의 주요 레퍼토리인 스타벅스를 전복적으로 활용하는 포인트는 재미있었으나, 이 역시 여성혐오와 '군무새'의 괴이한 결합을 지적하는 오직 그 지점까지만 한정적으로 유효하다고 본다. 스타벅스 간다고 욕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을 넘어 스타벅스가 여성혐오의 레퍼토리가 된 이유에 대한 진지한 분석도 필요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일단 영상의 주제와는 별개일 것이다.

  전역자들의 경험을 들어 주고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제공해 주는 것은 국가의 몫이며, 시민들은 전역자들이 보이곤 하는 '군무새'적인 태도를 조롱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게 그들을 챙겨 주기를 요구해야 한다. '군무새' 현상을 모종의 트라우마라고 본다면, 국가는 그 트라우마의 해소를 전역자의 주변 사람들, 사적인 심리적 안식처 등에게 떠맡겨서는 안 되며 공적으로 해결할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월급을 인상하고 복무기간을 단축하며 휴대폰 사용을 보장하는 등의 최근의 조치는 -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 다행스럽다. 이러한 조치들을 점차 확대함과 동시에, 휴가 및 외출도 대폭 늘리고, 전역자들에게도 군에서 겪은 신체적, 정신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적극적으로 약속하고 실현하는 등의 조치도 필요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남북 평화체제 정착을 통해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더 힘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은 이만 줄이도록 하고, '군무새' 문제에 대해 이전에 썼던 글을 링크로 공유한다. 이 글에서 중언부언하는 것보다는 링크된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잘 전달될 것 같기 때문이다. 위 문단에서 장황하게 쓴 것을 보니, 어쩌면 나도 이 영상에서 희화화하고 있는 그러한 종류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군대 문제 외의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도 개별 인간에 대한 조롱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관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10월 1일 월요일

평양: 연출된 도시

  물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는 하지만, 평양의 변화와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을 조명하는 최근의 기사들과 달리 나는 평양이 여전히 일반적인 도시라기보다는 물화된 이념의 전시장으로서의 거대한 극장 내지는 놀이공원 같다는 인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아파트에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든 사람들이 동원된 간부들이라는 기사, 그리고 도로의 양 사이드에서 손을 흔든 사람들이 권역별로 수십 명씩 동일한 옷을 입고 있는 사진 등을 볼 때 어느 정도 실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내가 속한 사회도, 가상의 완전히 중립적인 제3자가 보면 그렇게 여겨질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서울도 그 형태가 강제적이지 않고 자기검열적일 뿐 무언가의 선전장일지도 모른다. 특히 경쟁관계에 있는 국가에 서울의 모습이 소개될 때는 권력에 의한 동원을 통해 그러한 전시장과 같은 면모가 인위적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에 대한 반성을 현재와 미래에 중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평양에 분명히 존재하는 강제적 통제는 구별하기 쉬우니 우선 논외로 하고, 나는 자기검열적 통제의 상태와 자유의 상태도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검열적 통제의 상태에서도 사회는 나름대로 (긍정적 의미에서) 혼란스러워 보이게 될 수 있으며 주민들이 기본적인 운신의 폭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꽤나 많은 것을 누리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유로운 상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사실 한국도 이념적 동질성이 너무 강하고 '불온한' 언설들을 사회적으로 싫어라 하는 면이 있어서 완전히 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평양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후자에 가깝다고 보아야겠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문화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삶의 질이 높아지고 활기가 돌더라도 평양은 후자가 아닌 전자의 상태에 머무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당국이 평양을 자유롭고 활기찬 모습으로 노출시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자유화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체제가 극도로 잘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강제적/자기검열적 통제에 의해 자유를 연출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 아닐까?

  만일 이러한 관점이 정당할지라도, 현재의 남북관계 개선 국면에서 한국의 리더십은 평양의 자유로운 모습에 대해 일종의 외교적 제스처로서 어느 정도 호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방향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 현재 한국의 리더십이 남북관계에 임함에 있어 평양에 대한 낭만적인 관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의 연출을 위한 물적, 인적 자원의 착취가 있었을 가능성을 언제나 분명하게 염두하고, 그러한 일이 실질적으로 덜 발생하도록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이산가족 상봉 시에 한국의 가족들이 북측 가족에 건넨 선물 중 상당수가 북한 당국에 '자발적으로' 신고되고 바쳐졌다고 한다. 명백한 착취이다. 반면 3차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 당국이 보내 온 2톤의 송이버섯을 한국 정부는 남측의 미상봉 이산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만약 북측의 미상봉 이산가족들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했다면 더욱 더 멋졌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기는 했으나, 이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고 선물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때문에 외교적 제스처의 측면에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국 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북한 당국과의 대조를 이루는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는 외교적으로 우호적인 제스처를 유지하면서도 북한 당국의 주민 착취를 적극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교묘한 방법을 찾는다면 더욱 좋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9월 11일 화요일

문/이과 융합적 교양 담론을 늘 의심하자

  나는 과학과 인문학 양 쪽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매우 상이한 그 두 가지를 서로 섣부르게 합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그 둘을 모든 수준에서 방법론적으로 치밀하게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층 수준에서 병존시킨 다음에 얼기설기 연결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과학과 인문학이 동일한 발생적 기원을 가지므로 그 둘은 사실 하나의 진리로 소급된다는 식의 '세련되지 못한 일원론'적 발상, 혹은 과학과 인문학이 지금까지 서로 다른 것이었지만 양 쪽에 능통한 내가 그 둘을 통합해서 하나의 멋진 컨텐츠를 만들겠다는 식의 '르네상스'적 발상 같은 것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발상들은 주로 종교적 신념과 같은 숨겨진 형이상학적 전제에 의해서, 아니면 문화산업을 통해 정치적/금전적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에 의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발상들은 학술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나, 많은 경우에 대중적으로 학술의 최전선으로 간주되며 이것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들은 현대에도 '통섭', '융합' 등의 이름을 취한 채,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과 그것을 선망하는 준비생들에게 일군의 교양적 담론을 공급하면서 문화적 권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교양적 담론에서 4차 산업혁명 등 최첨단 과학기술처럼 보이는 것과 명상과학 등 사이비적으로 보이는 것의 기이한 결합이 종종 관찰되는 것은 아마도 이 둘이 위에서 지적한 오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9월 9일 일요일

인천 퀴어축제 혐오세력 폭력사태 유감

혐오세력의 난동으로 인해 인천 퀴어문화축제가 부스 설치조차 하지 못하고 사실상 무산되었다고 한다(알아본 결과 무산이라고 기사화는 되었지만 그것은 축제 부스 등이 정상 진행되지 못했다는 뜻이며 많은 대치 끝에 퍼레이드까지 마무리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혐오세력이 등장해서 행사 장소를 둘러싸고 참가자가 진입할 수 없게 한 것은 물론, 기존에 안에 들어가 있던 사람이 나가는 것도 막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기존의 어느 퀴퍼보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 폭언을 듣거나 폭행당한 참가자는 수도 없이 많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방화를 위해 기름통을 들고 왔다가 체포되기까지 했다. 무한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위한 세계를 예비해 주었다는 절대자를 닮기를 바라면서 정작 현실 세계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배제와 폭력만을 재생산하는 이 자들은 사랑을 입에 올릴 자격이 단언컨대 없다.

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81246401967056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8월 25일 토요일

과학자를 참칭하는 사이비 구루들을 주의하자

  물리학자 Menas Kafatos는 대체의학자 Deepak Chopra와 함께, 정식 학자임에도 무언가에 경도되어서 우주와 인간을 조화시키려는 사이비 과학자가 된 대표적 서양 학자이다. 이들이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세민이 센터장으로 있는 '일우생명문화융합센터' 에서 초청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세민은 세월호 사건 당일에 정윤회와 만나고 있었던 역술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사상에 관심 가지는 것 자체는 좋지만 그 중 꽤 많은 경우가 사이비집단을 통해서라는 것이 안타깝다(대표적으로 단월드). 이들은 단순히 유사과학을 전파해서, 혹은 오리엔탈리즘적이라서 막연하게 나쁜 것이 아니라, 유사과학을 활용하여 자기들만의 왕국을 짓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과 협력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나쁘다. 이공학도에게 사회적 책임이 부과된다면 그 1순위는, Menas Kafatos와 같이 과학 지식을 통해 정신적 수양과 삶의 지침을 제공하겠다는 Guru와 같은 인물과는 되도록 엮이지 말고, 이들은 과학자이든 아니든 일단 의심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임무일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62722527152777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8월 18일 토요일

합리성과 공감

'공감 능력'이라는 개념은 감정-이성 이분법 상에서 흔히 감정의 영역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사실은 상호주관적 '이성'의 영역에서 설득력 있게 정초될 수 있다. 나는 늘 합리성의 두 거목으로 칸트와 하버마스를 지목한다. 감성과 이성(정확히는 오성)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고 둘 모두를 인식판단에 이르기 위한 불가분한 요소라고 간주하여 성공적으로 통합한 칸트 인식론의 성과와, 칸트의 고독한 의무론적 윤리를 비판적으로 보완하는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적 윤리학의 성과를 함께 고려함으로써 공감 능력을 합리성의 영역에 통합하는 기획이 가능해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49460535145643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8월 15일 수요일

안희정 1심 선고 유감

  성폭력 상황의 애매성에 의한 고질적인 증명부족 문제가 얘기되는데, 아래의 대목을 보면 원인을 거기에만 귀속할 수는 없으며 성폭력에 대한 사법부의 인식 개선 역시 분명히 필요해 보인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즉시 기존의 업무상 관계를 피해자-가해자 관계로 스스로 전환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위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전환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

"김씨가 피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안 전 지사에 대한 존경을 나타낸 점, 지난 2월 마지막 피해를 당할 당시 미투 운동을 상세히 인지한 상태였음에도 안 전 지사에게 그에 관해 언급하거나 자리를 벗어나는 등 회피와 저항을 하지 않은 점 등을 보면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지적했다."
[ 안희정 '성폭력' 모두 무죄... "성적자유 침해 증명 부족" (종합) (2018.08.14)] )


(1) 애매하다는 특징을 갖는 성폭력 혐의를 합리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신뢰로운 방법이 연구되어야 한다. 이건 연구를 필요로 하는 어려운 문제인데 지금은 피해자 개인의 입증 능력에 과도하게 맡겨져 있는 것 같다.

(2) 위의 애매성과 별도로 성범죄 처벌을 유달리 어렵게 만드는 추가적인 법률적, 현실적 요인들이 개선되어야 한다. 법의 여러 원칙들은 지켜져야 하지만, 법의 원칙에 어긋나거나 법률적인 틀로 담아낼 수 없으므로 처벌이 힘들 수밖에 없다는 태도'만을' 갖는 것은 지나치게 방어적이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법의 원칙을 수호하면서도 처벌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입법적 노력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3) 성폭력에 대한 검경 및 사법부 구성원 개인의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물론 판결문만 보고 판사의 인식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서 공유한 기사에 나온 것 같은, 판결에서 엿보이는 인식상의 문제를 애써 무시하고 무한히 합리적인 가상의 사법부를 상정하는 것은 더 이상하지 않나. 이 문제가 개선된다면 (2)와 관련된 대중 설득도 좀 더 수월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8월 2일 목요일

유튜브의 이상한 분노 자극 영상들



  유튜브에서 '카톡'을 검색해 봤는데,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한국 고유의 대중예술 장르가 형성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진위 여부조차 불분명한, 시청자들의 분노 및 억울함을 자극할 만한 카톡 대화를 영상으로 만들어서 띄워 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에게 통쾌하게 복수해서 쩔쩔매게 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이런 영상들의 다수가 '김치녀', '맘충' 등을 표적으로 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각종 창의적인(?) 소재들이 많이 있으며, 남자친구의 데이트폭력, 집착 등을 소재로 한 영상들도 좀 있기는 하다. 조회수 100,000이 넘는 영상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데, 사람들이 유튜브에서 이런 걸 찾아 보면서 분노와 통쾌함을 재생산하고 현실 인식에까지 영향을 받는 이런 기이한 모습은 디지털 시대 대중예술의 디스토피아적 귀결 그 자체가 아닐까.

자동 대체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7월 31일 화요일

서태지 8집 발매 10주년을 기념하여

  어제는 서태지 8집이 나온 지 정확히 10년 째 되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정규 8집이 나오기 전에 미스터리 컨셉의 프로모션이 진행된 뒤 <Moai>, <Human Dream>, <T'ikT'ak> 등이 수록된 첫 번째 싱글이 2008년 7월 29일에 발매되었고, 나머지 곡들은 그 이후에 2회에 걸쳐 공개되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일부러 찾아서 들어 본 노래가 서태지 8집이고, 이것을 계기로 서태지를 통하여 록의 다양한 장르를 접하기 시작한 만큼 내겐 2018년 7월 29일이라는 어제의 날짜가 괜히 감회가 새로웠다. 이하에서는 서태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과 함께 좋아하는 곡들을 추천해 보기로 한다.

  이 10년이라는 숫자는 이 글을 쓰면서 내게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숫자이기도 하다. 메탈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 출신인 서태지가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으로 넘사벽급 커리어를 쌓고 은퇴하였을 때가 서태지가 불과 25세일 때로, 그가 악기를 처음 잡은 지 약 10년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저런 걸 이뤄낼 수 있는 기간인데 나는 10년간 무엇을 했는가? 서태지가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엄청난 인기를 바탕으로 기존 음악산업의 관례를 무시한 채 마이웨이를 걸으면서 개인적 성공과 함께 사회에도 많은 화두를 던진 것을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만화적 인물'이라는 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4집을 끝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을 정리하고 은퇴했던 서태지는 귀국하지 않고 앨범만을 발매한 솔로 1집(통칭 5집)을 거쳐, 새빨간 레게머리를 하고 뉴 메탈 장르의 곡들을 들고 나온 6집 활동을 통해 음악적으로도, 외모적으로도 완연한 로커의 모습으로 컴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커로 컴백한 솔로 커리어 이후로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아이돌'적인 면모를 독특한 방식으로 계속 가지고 간다. 한국의 록을 이야기할 때 서태지의 위치가 아주 미묘해지곤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이것은 첫째로는 그가 록 밴드의 성향과 랩댄스 아이돌의 성향을 결합한 음악적 토양을 가지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대의 대중음악 판도에는 주로 후자의 면모만이 부각되어 계승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그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선보였던 랩댄스 음악을 솔로 활동에서는 주로 록으로 편곡하여 선보이면서도, 방탄소년단과 함께한 25주년 기념공연 등 특별한 경우에는 랩댄스 스타일의 원곡을 최대한 살려서 선보이기도 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로커 출신이지만 랩댄스 위주로 대중음악이 재편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나서 은퇴한 뒤, 다시 로커로 회귀하여 컴백한 서태지는 과거의 랩댄스 아이돌이자 현재의 로커로서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서태지가 로커로 컴백했음에도 아이돌적인 면모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위와 같은 점 외에도, 그의 솔로 커리어의 구체적인 운영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서태지의 솔로 커리어의 매 앨범은 같은 아티스트의 앨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상이한 장르를 보여준다. 6집에서는 공격적인 기타 리프와 차가운 래핑 위주의 뉴 메탈을 표방하였으며, 7집에서는 몰아치는 기타 연주에 마치 다채로운 색깔이 느껴지는 듯한 장조의 선율을 덧붙이는 작법을 구사하였고, 8집에서는 지극히 복잡한 리듬 위에서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화학적 결합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9집에서는 기타의 비중을 축소시키고 통통 튀는 신스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러한 디스코그래피 운영은 넓은 폭의 장르를 수용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서태지의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일관되지 못한 커리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개별 음반들이 꽤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디스코그래피로 인하여 록 중에서도 특정한 장르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 정통적 록 팬들보다는, 서태지라는 인물과 서태지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 위주로 팬덤이 축소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팬덤은 록 밴드의 팬덤이라기보다는 아이돌 그룹의 팬덤과 닮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태지의 의중과 관계없이 상당히 많은 록 마니아들에게 서태지와 그의 팬덤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지고, 때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그러나 펜타포트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위와 연결되기도 하는 이야기인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설 등 돌이켜 볼 때 웃음만이 나오는 것들을 제외하면, 서태지에게 가장 크게, 또 오래 씌워진 혐의는 아마 '록적 저항 정신의 상업화'일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상술한 솔로 2집(6집) 활동에서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게는 헤드뱅잉 등의 록적 액션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안무를 하듯이 구사한다는 비판부터, 크게는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저항의 이미지만을 상업적으로 활용할 뿐 실질적인 저항이 부재하다는 비판까지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이러한 비판은 기성 보수 언론에서부터 진보적 인디씬까지 넓은 스펙트럼에서 터져나왔다.

  그러한 비판들 중 일부는 뼈아픈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서태지가 저항을 상업화시켜 퇴색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각종 문제들에 대한 개인 차원에서의 저항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서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는 아이들 시절부터 솔로 시절까지 끊임없이 기획사의 횡포, 음반 사전심의제도, 방송 검열 등 충분한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애를 썼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춤출 수 없으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 서태지의 이런 행보가 인기를 바탕으로 한 대담한 마이웨이에 따른 통쾌한 성공이며 그 과정에서 꽤 많은 사회문화적 변화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가 주로 대중음악인의 권리 증진에 집중되었고, 진보적 인디 씬에서 서태지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로 기대하던 혁명적 사회 변화와 인디 음악의 부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으므로 비판의 소지가 제공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는 스스로 끊임없이 혁명가, 문화 대통령이라는 언론의 칭호에 대한 부담감을 표해 왔으며 자신이 자처하지 않은 어떤 사회적 역할이 기대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자주 난처함을 표했다. 말하자면 서태지에게 과도한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 것도 서태지 및 팬덤이 아닌 외부의 호사가들이었고, 그 역할이 수행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서태지를 비판한 것도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태지는 솔로 커리어 초기에 서태지컴퍼니를 통하여 인디 씬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넬, 피아 등의 밴드를 지원하고 록 페스티벌 ETPFEST를 수 회에 걸쳐 주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서태지에 대한 '록적 저항 정신의 상업화'라는 비판은 대체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서태지 솔로 커리어의 가장 큰 특징은, 사운드, 가사 등 모든 면에서 솔직하고 강렬한 표현보다는 거의 집착적인 수준으로 세밀하게 정제된 음악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서태지의 곡을 감상할 때 가슴이 뛰는 것과 별개로 그 곡들이 창작된 작법은 디오니소스적이라기보다는 아폴론적이고, 뜨겁고 열정적이라기보다는 차갑고 계산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약간의 '센스' 내지는 '재치'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많으나, '유머', '인간미'라고 불릴 만한 요소는 0에 가깝다는 점도 특징이다. 아마도 충분히 조탁되지 못한 인간미가 작품에 혼입되는 것을 서태지가 체질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서태지를 둘러싼 '신비주의'라는 유명한 칭호의 본래 정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은 서태지뿐만 아니라 대중적이지 않은 록 음악에서 어느 정도 빈번하게 관찰되는 특성이지만, 서태지는 한때 대중성의 정점에 오른 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향을 추구하다 보니 마치 이게 서태지만의 특징인 것처럼 세간에 회자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서태지가 이들 중에서도 유달리 이러한 성향이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러한 특성은 가사뿐만 아니라 사운드적인 면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기타 리프를 raw하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여러 겹의 소리들로 감싸서 조심스럽게 배치한다(6집 리레코딩은 예외이겠다). 이런 성향은 6, 7집부터 조짐을 강하게 보이다가 8집에서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는데 몇몇 평론가들은 이러한 성향을 두고 '자폐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어제로서 딱 10년 된 서태지 8집은 그의 이러한 세밀함이 가장 잘 드러난 앨범이기도 하고, 서태지가 제일 잘 하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8집을 서태지 솔로 커리어의 마스터피스라고 생각한다. 곡 하나하나의 밀도가 상당하여 여러 번 반복해서 듣더라도 인지적으로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앨범이라는 점도 있고. 그런데 뭐 이러한 서술도 9집에서 인간미를 많이 드러내면서 옛날 얘기가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특유의 세밀함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으므로 뭐라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겠다. 아무튼 기대하면서 지켜볼 일이다.

(2) 'Bermuda[Triangle]' (8집 'Seotaiji 8th Atomos', 2008) : https://www.youtube.com/watch?v=km1fuG7svPY
(3) '로보트' (7집 'Seotaiji 7th Issue', 2004) : https://www.youtube.com/watch?v=ToeTsQWSSqI
(4) '울트라맨이야' (6집 'Tai Ji', 2000) : https://www.youtube.com/watch?v=8jtKmWXdhm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7월 30일 월요일

음산한 종교적 도상들에 대한 매료

  나는 동서양 문화권을 막론하고 음산하고 신비주의적인 느낌을 주는 종교적 도상들이 뭔가 컬트적으로 마음에 든다. 집에 걸어두고 싶지는 않지만 미술관 같은 걸 차려서 수집해 두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 특히 상대적으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르네상스적인 그림들보다는, 지극히 복잡하여 눈과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들, 종교적 위계에 따라 인위적으로 배치된 것들, 기하학적 대칭성을 갖는 것들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뭐랄까... 분절적으로 언표될 수 없는 고대의 거칠고 원형적인 정신(?)을 담으려고 한 것 같달까. 나는 이런 것들을 본래의 맥락에서 탈각시켜서 내 미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멋대로 향유하고 있긴 하지만, 제작자의 본래 의도대로 향유될 경우에는 굉장히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정신분석이 문화이론 등에서 많이 쓰이게 된 것도 이런 것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사람들이 많이 요구해서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내가 헤비메탈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에 쏙 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메탈밴드들이 컨셉으로 이런 이미지를 자주 차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일부는 진지하게 반종교적인 표현을 위해 다른 문화권의 종교적 모티브를 차용하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그냥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특유의 시각적 느낌을 주고자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음산한 종교적 도상들에 더불어 나는 이전에 썼듯이 기계스러운(?) 것들에도 강하게 매료되는데, 메탈이 하필 사운드적으로, 내용적으로 그런 기계스러운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나는 메탈 장르를 적극적으로 새로이 찾아서 듣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늘 괜스레 친숙하게 느끼곤 한다.

  막짤 국벤져스는 보너스.

자동 대체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Tsongkhapa Refugee Tree by Urken Lama

자동 대체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서태지 6집 "Tai Ji" 앨범 커버(후면) designed by 전상일

자동 대체 텍스트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Meshuggah 7집 "Koloss" 앨범 커버 designed by Luminokaya

이미지: 사람 1명
Mexican. Mano Poderosa (The All-Powerful Hand), or Las Cinco Personas (The Five Persons), 19th century. Oil on metal (possibly tin-plated iron), 13 7/8 x 10 1/16 in. (35.2 x 25.6 cm). Brooklyn Museum, Museum Expedition 1944, Purchased with funds given by the estate of Warren S.M. Mead, 44.195.24

이미지: 사람 8명, 웃고 있음, 사람들이 서 있음
국벤져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7월 27일 금요일

오랜만의 일기

  인생샷, 인생맛집 같은 것처럼, 뭔가를 생각하다가 때로는 '이건 진짜 내 인생주제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들이 여기서 종합되어 다뤄질 수 있겠구나'하는 느낌이 들어서 생각이 마구 전개되고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는 때가 있다. 문제는 그 인생주제라고 확신하는 관심사가 지난 1년만 해도 벌써 몇 번씩이나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주 넓게 보자면 '합리성'에 대한 관심인 것 같긴 하지만, 딱히 체계적이지 않고 그냥 산발적인 것들이므로 단순하게 요약되긴 어렵다.

  그럴 때마다 카톡 나와의 채팅에다 써 놨던 글 조각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뇌를 그 때의 모드로 되돌려 보고 싶은데 시간이 지나면 그게 불가능해지는 것이 대단히 아쉽다.

  사실 중학교 때는 인생주제라고 일관되게 생각한 게 "물리를 계속 공부하면서도 '일반물리적 센스'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일반물리적 센스라는 것은 그냥 내가 만든 말인데, 지금은 그 때 생각했던 일반물리적 센스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 시절 저 강령을 따르면서 써놓은 글 조각들을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지만 그 당시로 되돌아가서 생각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치 남이 써 놓은 글을 읽는 느낌이다.

  아마도 그때 생각했던 '일반물리적 센스'란, 물리적 세계를 이루는 원자들과 그 상호작용을 나름대로 '내면화'함으로써, 추상화된 개념들과 수학적 도구를 쓰면서도 계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결국 수식에만 매몰되면서 현상을 못 보게 되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안함이었던 것이다. 그걸 일반물리적 센스라고 불렀던 것은 그냥 내가 그걸 일반물리에서 그나마 잘 해서 그랬을 것이고.

  물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서 물리를 공부하면서, 저것이 아주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라 충분히 흥미를 가지고 공부한다면 달성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 '충분히'의 기준이 생각보다 높기 때문에 갈피를 못 잡는 것도 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수하지 않고 일반적인 일이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모르겠다면 거기가 내 공부의 한계인 것이겠다. 그래서 '일반물리적 센스'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과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학도 아닌', 중간쯤에 있는 분야를 정초해 보는 것이 나의 인생주제라고 생각했다. 저것 역시 적절한 단어를 몰라서 그냥 내가 만든 표현인데, (물리적 세계가 아닌) 인간 세상을 문학으로만 다루는 것은 명백히 불충분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발전해서 모든 걸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며 모든 뇌피셜을 완전히 중단하기도 아쉬우니까, 그 중간 정도 위치에서 나름대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만든 표현이다.

  구체적으로는 과학 자체를 배우는 걸 넘어 그 과학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 사회 내지는 인간관계에 대해 마치 과학처럼 나름대로 개념을 정의하고 이론을 세우는 것들, 그리고 국어 시간에 배우는 문학 작품들의 형식에서 느껴지는 형용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좀 구체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들 등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첫번째와 세번째는 그냥 교과 공부를 하면서 든 생각이고, 두번째는 내가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자책하면서 주변을 열심히 관찰하다 보니 든 생각이다.

  그런데 웬걸, 대학에 와 보니 이런 분야가 이미 (너무도 당연한 듯이) 있었고 그것은 다름아닌 '철학'이었다. 위 문단의 세 가지 관심사는 각각 과학철학, 사회철학, 미학 정도가 되겠다. 중학교 때는 철학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도덕 시간에 단편적으로만 배우면서 부정적인 인상으로 접했고(뇌피셜로 훈계하는 느낌이라), 고등학교 때는 철학을 접할 기회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그 이름도 익숙한 '철학'이 정확히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것일 줄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관심사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철학이란 말 자체는 많이 보았지만 대부분 그냥 물리에서의 어떤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말하는 것이었고,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해서는 어린시절 모친께서 말해 준 '생각에 대한 학문'이라는 말만을 기억한 채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기에, 바로 그게 철학이라는 걸 알고 대단히 반가웠다. 철학 중에서도 여러 가지 우연적인 이유로 미학에 흥미를 느껴서 미학과를 부전공하게 되었고, 돌아보니 마치 필연이자 운명인 것처럼 느껴지는 몇몇 이유가 있지만 필연이란 없으므로 자세한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잘 맞는 것 같아서 계속 하고 있다.
(참고로 어린시절 모친께서 물리에 대해서는 '힘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했다. 문리대를 나오셨는데 발음 때문에 당시에 잠깐 동안은 물리를 전공했다는 줄 알고 이것저것 물어보았었다. 그 당시에 사회과 교사이신데 물리를 전공했다고 하는 것의 이상함을 아주 막연하게밖에 못 느꼈을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서 이론 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계속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나의 철학적 성향에는 위에서 말한 중학교 시절의 '일반물리적 센스'가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점이다. 나는 뭔가를 과도하게 체계화하여 사변적으로 성을 쌓는 것, 상징과 은유, 서사를 오용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며, 온갖 분야를 하나로 합치고 거슬러 올라가서 통합된 진리, 내지는 궁극인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냉소한다. 따라서 로고스중심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그걸 까면서 나온 상징과 은유, 내러티브에 과잉되게 의존하는 현대철학의 일부 사조에는 더욱 비판적이다. 철저하게 개별 문제의 성격에 따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성향은 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학교 시절에 추구했던 '일반물리적 센스'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최근에 생각하는 '합리성'과도 통해 있다. 흔히 이성이라고 생각되던 오만한 사변을 철폐하되, 흔히 이성의 오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것으로 여겨지는 상징, 은유, 서사의 오용 (양적 남용이 아닌 질적 오용이다) 역시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상으로 서사를 경계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겪었던 여러가지 생각의 변화를 자의적으로 엮어서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보았다. 서사를 경계하면서도 결국 서사를 만들어 내고야 마는 이러한 습관이 생긴 건, 내가 했던 생각들이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집착에 의해 사후적으로 어떤 '큰 그림'을 뒤늦게 요청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이것이 나의 지난 몇 년에 대한 최선의 요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으면 또 생각이 바뀌어 다르게 요약될 것이다.

  아무튼 필연이란 없고 서사 역시 사후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므로, 나라는 인간의 캐패시티를 키워서 다양한 가능성과 기회를 열어 놓으면서도, 밀려오는 우연들에 잘 대처하여 특정한 방향을 향하고 그것이 사후적으로 괜찮은 서사로 요약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라는 자기계발서스러운 결론으로 일기를 마쳐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13429752082055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7월 26일 목요일

저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댄디 보수'를 보며

  K-자유주의자들이 조선일보에서 '댄디 보수'라고 소개되어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꼰대 보수는 싫다, 2030 '댄디 보수'의 등장 (2018.07.19)] )

  자유는 그 자체로 발견된다기보다는 그 가능성만이 발견되어 실질적으로는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론화하는 출발점처럼 여겨지는 사회계약론 역시 - 물론 사회 형성 과정에 대해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보고 분석한 것이기도 하지만 - 실질적으로는 근대국가 속에서의 개인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당위적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밑바탕에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이 있어야만 유명무실화되지 않고 실현되어 유지될 수 있다. ‘사회는 사회계약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다’ 같은 명제를 투쟁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 법칙인 것처럼 이해한 채 전개되는 담론은 유해하다. 내가 한국 보수이념에서의 자유주의, 소위 ‘K-자유주의’를 자유주의에 대한 오독이라고 여기며 매우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2년 전에 이에 대해 몇 자 적은 바 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002544776503894&id=100002451425265)

  정치적 자유주의자라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성실하고 근면하게 노력하여 남들보다 잘 되어서 성공을 거두라는 주문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부당한 처사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과 관련되어 있는 ‘불온한’ 영역, 입사지원서의 스펙 란에 써넣기 다소 꺼려지는 영역을 필시 어느 정도 긍정하게 된다. 그러나 K-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정치적 영역에서의 행동들을 비판하고, 오직 비정치적이고 소시민적인 노력만이 성공의 정당한 수단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때 '꼰대 보수'들에 의하여 유행했던 노오력 담론과 통하는데, 특정한 방식의 삶만이 정상이고 보편인 것처럼 권장하는 것을 보면 친기업 정서의 확대를 노리는 공작의 산물이라는 혐의도 받을 수 있다.

  차라리 정치적 투쟁을 통한 자유의 획득도 정당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하여 동일한 관점을 적용한다면 일관성도 있고 나름 설득력도 있는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유 사회를 쟁취하기 위한 수면 아래의 투쟁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불온하다’고 생각하여 폄하하고, 활동가들의 실책이나, 청렴결백한 이미지와 달리 권력을 누리는(?) 모습들을 부각하고 희화화하면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삶을 영위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스스로는 그런 가식적인 모습에 감화되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댄디한’ 보수임을 자처한다.

  이들이 정치적 자유에 의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비우호적인 이유는 주로 그러한 활동들이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지키고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 속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가 훼손된다면, 즉 자유로워야 할 사람들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정치적 자유에 의거한 비판이 과연 부당할까?
결국 K-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긴밀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오묘한 관계를 무시하고 후자의 영역만을 긍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K-자유주의는 매우 정치혐오적이고 반동적이다. 이러한 점은 현실 정치 지형상에서도 나타나는데, 지난 박근혜 정권 4년간 자유주의를 자처해 온 청년 보수단체들은 어버이연합과 함께 전경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어용단체로서 박근혜 정권의 이념적 정당성을 결사 옹위한 것을 제외하면 그 정치적 기여가 전무하다.

  폭식투쟁을 기획하여 많은 어그로를 끌고 정작 그 실행이 임박하자 비겁하게 뒤로 물러났던 K-자유주의 청년단체의 타고난 반사회성은 벌써 4년이 넘게 비판받았고, 박정희의 국가발전 서사를 찬미하는 기성세대의 보수 역시 태극기집회를 필두로 한 실추된 이미지를 보이며 몰락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한목소리로 ‘댄디’를 자처하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면서 출범한 보수 개신교인 모임으로서 캠퍼스 내에서 수구적인 이미지의 총화와도 같은 ‘트루스 포럼’마저, 채널에 따라서는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하면서 급기야는 이 ‘댄디보수’의 대열에 함께 소개되기까지 하였다. 세련됨을 강조하는 청년보수와 수구적 기독보수의 이미지는 표면적으로 반대되기에 이 둘의 결합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으나, 유튜브의 ‘슈타인즈 채널’ 등을 보면 이미 이 둘의 결합은 ‘화학적 결합’ 단계에 이르렀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보다 자세히 써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댄디’를 운운하면서 세련되고 품위있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보수의 품격 상실과 이미지 실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라고 보지 않으며, 오히려 반사회적 폭식투쟁만큼이나 문제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약자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때 ‘댄디’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변하여 열을 내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는 일베적 정서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북 판에서 나름 유명한 어느 대학생이 노회찬의 사망과 관련하여 잔치국수 짤을 올린 것 역시 이와 비슷하게, 고인을 모독했다는 데에 진보 진영이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화내는 것을 웃음거리로 삼으려는 일베적 정서와 통해 있다는 생각이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 혹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정치적 문제제기가 감정적 표출만으로 끝나지 않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은 맞으나, 이것은 국민들의 의견이 효과적으로 접수되어 누적될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가 발전해야 하는 문제이지, K-자유주의자들처럼 감정이 섞였다는 이유로 문제제기를 기각하고 조롱함으로써 해결되는 문제는 절대 아니다.

  자유, 합리 등 내가 좋아하는 가치들을 가져가서 오염시킨 K-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비난을 하다가도, 정작 이 단어들이 오염되지 않고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보여진 적이 있는지를 생각하면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자유와 합리를 좋아할수록 이들 단어의 의미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실제 정치적 문제에 적용해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

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810764452348585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7월 24일 화요일

드루킹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점

  수상한 외곽조직 굴리면서 정치인들 도와주다가 종국에는 코가 꿰이게 해서 이득 취하는 업자들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정치권에서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몇 개의 지역에만 거점을 둔 정치조직의 경우에는 조직 전체가 이런 업자들에게 장악되기가 쉬운 것 같다. 이재명 건에서 볼 수 있는 기업화된 폭력조직도, 드루킹 같은 인터넷 컬트 리더 출신도 마찬가지다.

  기성 정치인들은 수상한 단체가 정치영역에 발을 붙여서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마약과 무기가 활개치는 몇몇 타국에 비해 한국에서 나름대로 괜찮게 유지되고 있다고 보여지는 '선량함'을 수호할 책임을 가져야 하겠다. 정치는 공적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하며 그 문제들에는 '더러운' 것들도 포함될 수 있겠으나, 정치인들은 더러운 것들을 다루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될지언정 또다른 괴물을 끌어와서 정치판을 잠식하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1) 초선 국회의원 및 기초의원, 광역의원 등이 그런 업자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교육이 철저히 이뤄져야 할 것이고 (2) 당내에 섞여들어온 세력의 현황을 중앙당 차원에서 적극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3) 외곽조직이 사람과 돈을 잘 끌어온다고 해서 구체적인 origin을 잘 모르면서 과도하게 의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4) 마지막으로, 각 지역에서 정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정치판에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승부를 볼 수 있도록 공정한 환경을 조성하여, 그런 업자들에게 감화되지 않도록 신경써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rchived on 201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