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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2022년을 마무리하며: 기술매체에 대한 단상들 (방탈출, 아바타, 그리고 생성 AI)

어쩌다보니 이번 12월 31일엔 기술매체를 활용한 인터랙티브하거나, 실감나거나(immersive), 생성적인(generative) 문화 컨텐츠들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할 계기가 참 많았다.


먼저 하루의 시작부터 신촌에서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서 방탈출을 했다. 방탈출은 거의 이 친구들 만날 때에만 하는데, 처음 접했던 몇 년 전에 비해서도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단순 퍼즐 풀이부터 시작해서 여러 소품들을 이용한 키치하면서도 인터랙티브한 테크놀로지적 체험, 다양한 콘셉트로 예술적으로 연출된 시공간에 참여하기, 친구들과의 자연스러운 친목 다지기까지, 거의 놀이공원 어트랙션을 능가하는 종합적인 엔터테이닝한 경험을 도심 한가운데에서 제공해 주는 훌륭한 컨텐츠로 발전한 듯하다.


저녁에는 <아바타 2: 물의 길> 4DX를 관람했다. 3시간이 길긴 했는데 거의 5-6시간 분량의 체험을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밀도 높은 장면들이 실감나게 이어진 덕분에 몰입해서 단숨에 볼 수 있었다.


또한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 탓인지 올 한 해에 세상에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조금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중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오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주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내가 늘 꿈꾸고 있던,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뜰 거라고 생각하며 팔로우업하고 있던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의 조수로서의 생성 AI'가 내 막연한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전격 대중화된 것이다.

이런걸 보면서, 내가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는 주제,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반드시 잘 될 거라고 확신이 드는 주제에는 조금 더 과감하고 빠르게 직접 dive in 해 보아야 후회가 없이 흐름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기의 변동이, 대단히 도전적인 선택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저 적당히 평화롭고 싶은 개인들의 일상과 진로 선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한 해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도 일상과 건강과 인간관계를 유예해버리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할듯하다. 그러려면 시간을 더 밀도있게 써야 하고, 이를 위해 계획을 더 잘 지키고 더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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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7일 토요일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의 레이저 핵융합 성과 관련 포스팅 모음 (3건)

 1. 2022년 12월 13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LLNL 핵융합 중대발표가 한국시간으로 오는 새벽 12시쯤 (즉 두 시간쯤 후) 이라고 하는데 무척이나 기대된다. 내일 아침 출근이고 준비해야할 발표도 있지만 중계 보고 잠들어도 괜찮겠다.

미국 에너지부 홈페이지에서 중계가 된다고 한다. 에너지부 장관이 나올지 바이든 대통령이 나올지도 궁금하고, 어떤 내용의 발표일지도 무척 궁금하다. 기사들에서는 제법 구체적인 숫자들까지 제시하며 스포일러가 꽤 있었는데, 해당 내용 그대로여도 충분히 많은 의미가 있는 breakthrough일테고, 혹시 something more가 있는지도 기대해보게 된다.


다만 12년 전인 2010년에 NASA에서 우주생물학 관련 중대발표라며, 지구에서 발견한 비소 박테리아를 소개해서 대중들을 꽤 실망시킨 전례가 있기는 하다. 물론 충분히 의미는 있지만 아무튼 외계생물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기대를 일부러 낮추고 들어보려 한다 (생각보다 별 게 아니면 실망을 덜 해서 좋고, 생각보다 놀라운 거라면 그만큼 많이 놀라워서 좋고). 암튼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JWST) 이후로 금방이라면 금방,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에 세계인의 이목이 쏠릴 만한 과학 이벤트인 듯.


태양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핵융합은 꿈의 기술 취급받는데, 사실은 핵융합 그 자체는 이미 지상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혁신적인 발전 방식으로서의 실용화를 위해서는 안정성을 높여서 지속시간을 늘리는 것, 그리고 에너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게끔 하는 게 남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그런데 에너지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아야 한다는 건 뭔가 근본적인 제약을 돌파해야 한다는 느낌을 줘서, 내 기준에서 핵융합을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꿈의 기술처럼 들리게 만든다.

그렇지만 여러 군데에서 듣기로는, 사실은 이게 근본적인 물리학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효율 점점 올리면 되는 느낌에 가깝다고 한다. 당연히 아예 없던 에너지를 만들순 없으니까, 저기서 말하는 투입량이라는 게 핵자간 에너지를 무시하고 우리가 직접 투입한 에너지만 따지는거겠지.

(물론 말이 그냥이지, 여기엔 엄청난 엔지니어링이 들어갈 것이다. 그치만 여전히 '원리적' 장벽은 아니라는 것)


그래도 뭔가 너무 단점이 없어 보이는 청정 발전 방식이다 보니, 어떤 이유로든 기술적으로 실현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회의론이 많은 게 사실이다. 만약 이번에 LLNL이 실제로 투입량보다 산출량이 많은 것을 미미하게라도 보여준 거라면, 그런 회의론이 어느정도 불식되고 더욱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해질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과학기술은 순전한 진공속에서 그 실현 가능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변화하며 발전하는 명백한 가능세계의 사회적 구성물이다. 만약 그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면서, 미미하게라도 실현의 가능성이 있다면 필요에 따라 투자해서 비용을 낮추고 실현가능한 범위 안에 들어오게 할수 있다.

이미 비가역적으로 발생하고있는 기후변화의 명백한 위협 앞에서, 핵융합 발전이 약간이라도 더 가시적인 범위에 들어온다면 작금의 인류에게 오랜만에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얘기가 될수 있을 듯...


물론 기술 독점 혹은 기술 유출의 문제, 국가별 불평등의 문제, 성장주의의 근본적 지속불가능성 문제 등등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얘기들이 산적해있겠으나... 이것은 현재와 같은 개념증명 시도의 단계에서는 다소 이른 얘기일 수 있다. 실현 가능한 발전방식으로서 가시적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쟁점들이 자연스럽게 구체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 개념과 사유의 고속도로를 미리 깔아두고 미리 합의해두는 사상적, 국제정치적 작업들 역시 너끈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정 과학기술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실현되어 가느냐에 따라 그러한 사유와 합의의 고속도로들이 꼭 그대로 사용되지는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건설해보는 경험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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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년 12월 14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히어로 영화 <스파이더맨 2>의 빌런인 닥터 옥토퍼스의 핵융합로는 KSTAR 같은 자기장 속 플라즈마를 사용하지 않고 무슨 레이저를 쓰길래 상상의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핵융합 발전방식이었던 모양이다. 이번 LLNL의 발표가, 바로 이렇게 작은 연료 펠릿에 레이저를 쏜 방식이라고 한다.


핵융합의 에너지 효율과 관련된 여러가지 개념들이 언론에서 잘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어 쓰이고 있으므로 아침에 잠깐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관계를 정리해 봤는데, 아래의 각 조건들이 서로 모두 다른 것인 듯하다. 아마 위로 갈수록 더 어려운 조건인것 같다.


* 점화조건(self-sustaining, burning, fusion ignition): 무한대의 Q factor에 해당. 아주 좋은 조건으로, 핵융합의 경제성있는 실용화에 꼭 필수는 아니라고 함.

: 근데 DOE(미 에너지부) 공식 아티클에서는 fusion ignition을 달성했다고 써 있는데... reddit에서는 ignition 아니라는 설명도 있다. 아래의 Q=1.54 얘기를 보면 이번 연구 결과가 fusion ignition은 아닌 듯.


* 연소조건(Combustion): 경우별로 다르나, Q가 약 5~10보다 큰 것에 해당. 플라즈마가 cooling되는 속도와 관련이 있음. 실질적으로 경제성있는 실용화의 조건은 이쪽에 제일 가까운 듯.


* Net energy gain = Q factor가 1보다 큰것 = scientific breakeven

: 이번에 처음으로 달성했다는 게 이것인 듯. Q=1.54 정도라고 한다.


(기존의 다른 연구들에서 Q가 1보다 큰걸 달성 했다는걸 몇 개 볼수 있는데, 아마 그것들은 여기서 말하는 진짜(?) Q가 아니라, 에너지 투입량의 일부를 무시하거나 해서 extrapolated breakeven이라고 하는, 좀 다른 양인것 같다. 위키백과 fusion energy gain factor 문서에 있다.)

(별개: Lawson criterion = 위의 여러 figure of merit들, 혹은 핵융합반응 발생 자체의 조건 등을 플라즈마의 밀도, 온도, 압력과 같은 구체적인 물리적 조건과 연결지어 계산한 것)

원리를 모르다보니 말로만 찾아봐서 힘들다. 틀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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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22년 12월 17일 (Facebook에서 보기: 링크)

내가 이해하기로는 연료에 가해진 레이저 에너지보다, 연료에서 핵융합에 의해 나온 에너지가 많다는 것이 이번 Q>1 실험의 의미이다.


일각의 지적대로 end to end로 모든 에너지투입을 고려하려면 레이저 발진 자체의 효율까지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히 맞고, 그러면 합산 효율은 꽤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실제 청정하고 효율적인 발전원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따지는것도 이쪽 기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치 당장 청정에너지가 실현될 것처럼 보도가 이뤄졌다면 그런것들은 명백히 과장된 보도이기는 할 테다.

그러나 연료펠릿을 중심으로 한 apparatus에만 스코프를 맞추고, 그 안에서 energy conversion이 어떤지 보는 작업 역시 핵융합 실현의 한 마일스톤이 되는 선결과제이다. 에너지 투입은 이루어졌다고 치고, 그 연료펠릿이라는 apparatus가 Q>1을 달성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직접 보여주는건 정말 중요한 이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Q>1을 실증함으로써 핵융합 발전의 실현이 한걸음 더 가시적으로 다가왔다는건 전혀 과장된 보도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효율을 정의하는것은 전혀 trivial한 이슈가 아니고, 정답이 없다. 숨겨진 에너지 출입을 정말로 모두 고려하려면 레이저 발진의 효율뿐 아니라, 생성물인 헬륨보다 반응물인 D+T의 핵력 퍼텐셜에너지가 높게끔 형성되어 마련되어 있는 것 그 자체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이건 빅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모든 시스템은 여러가지 에너지 출입에 따른 복잡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걸 어느 단계에서 끊어서 '계'와 '주변'을 나누게 된다. 이렇게 나눠 둔 상황에서 둘 사이의 에너지 출입을 빠짐없이 추적해서 효율 식을 쓰기만 한다면, 어디서 끊었느냐에 상관없이 열역학 제 2법칙에 부합하는 올바른 효율 식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심지어 에너지 출입이랑 별 상관도 없는 수많은 다른 efficiency measure들도 유익할때가 많다. 예컨대 kWh당 사망자 수라던지...)


Make sense하는 발전원으로서의 가치를 따질때는, 지구에 이미 준비돼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출발했을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적절할 것이다. 다만 그런 재료들이 그냥 바로 쓸 수 있게 준비된 게 아니며 채굴하고 가공하고 운송해야 한다는 점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부품이나 각 연료 같은 걸 채굴하고 생산하는 체제가 총체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연구실을 벗어나 현실의 산업 망에 연결된 상황에서 어디서 끊어서 효율을 정의할지는 여전히 debate 해보아야할 점이다.


아무튼 이번 발표에 대해 언론 플레이이다, 혹은 심지어 사기극이다 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이는 과잉된 비판이라고 본다. 거대과학이 국가의 역량 과시와 관련이 깊고 군사 부문과도 종종 연관이 되어 있는 걸 대중들이 모르지 않으며, 그런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지구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이게끔 다같이 비판적 관심을 가져야 하는 셈이다.

핵융합은 비록 아직 기초연구 단계이지만, 무슨 초대칭입자 찾는 것마냥 불확실한 가능성에 걸고 원리적인 장벽을 돌파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명백히 원리가 밝혀진 현상에 대해 효율을 높이면 되는 문제라서 (그렇다는 근거가 이번 실험에서 더욱 강화된 것이고), 연구결과가 축적되면 될수록 그 노하우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예컨대 토카막 방식에서 제일 큰 문제가 플라즈마 안정성인데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이걸 잘 제어해주는 연구들이 최근에 여러가지 나오고 있다. 핵분열과 달리 낮은 확률로 제어에 실패해도 큰일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기계학습을 적용하기에 상당히 적절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냥은 잘 안 되는 걸 기계학습을 이용해서 쥐어 짜내는 식으로 최적화를 해야 한다면 뭔가 믿음이 안 갈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직관적으로 그러한 '쥐어 짜내는'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그런 것 없이도 안정적으로 잘 되는 게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건 신재생에너지와 연결된 스마트 그리드 및 에너지 저장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미 너무 커져 버린 인류문명을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감당하기 위한 고도의 기술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물적/비생물적 행위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떠받쳐지고, 그런것이 없다면 하루 만에 무너지는 성격의 것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고출력 레이저를 이용해 연료펠릿을 집중적으로 가열하는건 Q>1이 가능하다는 개념증명에 가깝다고 보고, 실제 발전원으로서 의미있게 효율을 높이는 작업, 그리고 상시적, 지속적으로 운전하며 발전 가능한 반응로 개념에 좀더 가까운 설계는 여전히 토카막 쪽에서 나오지 않을까 한다. 이건 해당분야를 잘 모르는 관계로 순전한 뇌피셜이긴 하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한 점이지만 굳이 덧붙이자면, 청정 에너지가 나오기만 하면 문명의 규모가 무한히 성장할수 있다는 욕망 내지는 믿음은 개인적으로 비관론보다도 훨씬 두렵다. 아무리 효율을 쥐어 짜내더라도, 아무리 부작용을 줄이더라도 지구라는 물리적 한계에 의해서 지속적 성장이 근본적으로 제한되는 현실, 그리고 이미 그러한 한계에 당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물론 꼭 필요하지만 아직 기초연구인 핵융합보다도 우리가 더욱 시급하고 명확하게 인식, 대응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 끝 -

2022년 12월 1일 목요일

중력현상의 시뮬레이터로서의 양자컴퓨터: AdS-CFT 대응의 이용

양자컴퓨터로 웜홀을 구현했다는 따끈따끈한 네이쳐 논문이 기사로 나왔다 (네이쳐 논문 링크, 국문기사(뉴시스) 하이퍼링크, 영문기사(quanta magazine) 하이퍼링크). 매우 네이쳐스러운 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주제들은 나도 교양수준으로만 알고 수식들은 거의 모르는데, 대략 이해한 내용을 써본다. '어려운 저차원 양자다체계 현상'과, '쉬운 고차원 중력현상'의 대응이라는 틀을 기억하면 읽기에 용이하다.


먼저 '양자전송'은 양자얽힘 현상에 의해 정보를 원격 전송하는 것으로, 양자암호(양자기반암호화, 양자내성암호)와 함께 양자통신이라는 큰 카테고리를 이루고 있다. 양자암호가 각국의 정부 및 산업계에서 상용화 관련 논의가 될정도인 것과 달리, 양자전송은 아직은 실험실 내의 기초과학 연구에 머무르고있다.


양자전송은 국소성 (대충 말해서, 물리적 현상은 공간상에서 정보가 잇따라 전달되면서 나타나며, 한번에 여기서 저기로 점프하진 않는다는 믿음) 을 위배한다. 이것이 직관적으로는 매우 이상하므로 해명이 필요한 역설이라고까지 생각되기도 했는데, 우리 학부 김석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상하긴 해도 국소성이 깨지는 게 그냥 사실이라고 한다. 그것이 양자세계의 비직관성이며 양자전송의 놀라운 점이다.


양자전송을 하려면 양자상태들 사이의 얽힘(entanglement)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양자컴퓨터는 여러 양자상태의 얽힌 상태를 유지하며 제어해서 한꺼번에 커다란 계산을 해내는 장치이므로 얽힘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많이 들어가있다. 그렇기때문에 양자컴퓨터는 얽힘 실험을 하기에 최적의 시스템이다. 이번 논문에서도 9 큐비트짜리 양자컴퓨터 위에서 양자얽힘을 활용해서 실험을 했다.


이 논문도 기본적으로 양자전송을 실험적으로 구현한 여러 논문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 논문의 재밌는 점은 바로 홀로그래피 원리, 더 정확히는 AdS-CFT correspondence (반 드 지터 공간 - 등각 장론 대응성) 를 이용해서, 흔한(?) 양자통신을 넘어서 훨씬 멋있는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AdS-CFT 대응성이란 홀로그래피 원리의 일종이다. 간단히 말해서 (1) 높은 차원 공간에서 정의되며 상호작용의 크기가 약한 이론 (주로 양자 중력이론의 후보인 끈 이론) 과, (2) 그 고차원공간의 '경계면'인 낮은차원공간에서 상호작용의 크기가 강한 이론 (주로 응집물질 계에 대한 양자 장론) 이 형식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고차원공간의 정보가 그 경계면인 저차원 공간에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홀로그램을 연상시켜서 그렇게 부른다.


이 대응을 이용하면, 우리가 사는 차원에서 강하게 상호작용하는 다체계 (쉽게말해 양자컴퓨터 내지는 고체 및 반도체 같은 응집물질들) 의 풀기 어려운 문제를, 고차원에서의 끈 이론의 풀기 쉬운 문제로 대신해서 쉽게 풀 수 있다. 더 멋있게 말하면, 물질 속의 집단현상 문제를 우주 속 중력 문제로 대신해서 풀 수 있다. 이것이 홀로그래피의 강력함이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는 위와는 정반대 방향의 접근을 한다. 둘 사이에 그런 대응이 있다면, 실험으로 만들기 힘든 웜홀 같은 양자중력현상을, 실험으로 어느정도 구현가능한 저차원의 다체계현상으로 대신해서 실험할 수 있다는 재밌는 접근이다.


먼저 우주에 있(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웜홀에서 양자전송이 가능한것처럼, 실험실 속의 양자 다체계에서도 양자전송이 가능하며 이는 이미 꾸준히 실험으로 확인이 되고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양자정보의 전송이라는 점에서 통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별개의 물리현상이다. 전자는 양자중력 현상이고 후자는 중력과 상관이 없다.


이 논문에서는 양자컴퓨터의 설비로 sparsified SYK 모델이라는 양자다체계를 구현해서 실제로 양자전송을 했다. 그런데 이 모델은 흥미롭게도 AdS-CFT 대응에 의해, 웜홀에 대한 중력이론과 같은 방정식으로 기술이 된다. 이렇게 웜홀의 양자전송과 양자다체계에서의 양자전송이 (형식적으로) 연결되게된다.


따라서 양자컴퓨터를 양자중력현상에 대한 적절한 시뮬레이터로 쓸수 있다는 개념증명을 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실제로 웜홀에서 있어야 하는 여러가지 성질들이, 이 논문에서 연구한 시스템에서의 양자전송에서도 나타났다고 한다. 다만 이 (가상의) 웜홀은 아주아주 짧은 거리 사이의 웜홀이라고 한다.


마지막 질문은, 어떤 양자다체계랑 웜홀이 같은 이론으로 기술이 된다고 해서, 그 양자다체계 실험장치 속에 정말로 웜홀이 생긴 것인가? 이는 굳이 따지자면 따질 수 있는 과학철학적 문제인데, 보통은 상식적으로는 'No'라고 답할 것 같다. 실제로 논문에서도 웜홀을 실제로 만들었다 라고 무리하게 주장하기다는, 실험실 속에서 양자중력을 간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쭉 쓰고 나서 생각해 봐도 정말로 네이쳐스러운 논문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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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8일 금요일

부쩍 증가한 철도 고장이 우려된다

철도 애호가인 지인들 말을 들어보니, 한국 철도가 (도시철도 일반철도 막론하고) 평소에 정시성도 괜찮은 편이고 장점들이 많지만, 생각보다 노후화가 상당히 진행돼있어서 안전이 슬슬 걱정된다는 얘기를 공통적으로 한다.


요새 도시철도나 ktx가 자잘한 고장 때문에 멈추거나 지연되는게 유난히 많은 것도 기분탓만은 아닌것 같다고 한다. 지금 기억나는 것만 해도 불과 몇 주 사이에 분당선, 신림선(이건 새 거긴 하지만), ktx 탈선 등등 크게 보도될만한 지연이 여러 건 있었다.

(추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몇 달 동안 끊임없이 지하철 및 일반철도 관련 사고가 생기고 있다.)


심지어 저번에 코레일 직원이 충돌로 사망하기도 했는데, 이건 인력부족의 영향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그런데 꼭 그 역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보니 직원들이 굉장히 정신없을 거라고 한다. 세밀한 안전 점검 같은 게 부족할수도 있고, 그런게 누적되다 보면 심하게는 예상되지 않은 상황에 대응할때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덜되거나 신호가 안맞는 사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함.


작은 사고가 여러 번 쌓이면 큰 사고가 나는데.... 특히 철도 사고는 한번 나면 많이 크게 날 테니까 이런 얘기를 들으니 걱정이 많이 됐다. 오늘 선릉역 가는 지하철 타면서 노조에서 붙인 유인물을 봐도 인력감축 우려를 언급하고 있는데 상당히 믿을만한 얘기 같았다. 철덕들도 같은 얘기를 하기도 하고.


고질적 인력부족이 심각한게 사실이라면 요금을 올리더라도 인력을 더 늘리던지 해서 안전점검을 최대한 잘 해서 사고를 미리 예방하고, 미숙련이나 피로 등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방지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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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6일 수요일

문화전쟁과 러시아

극우(이경우 주로 미국에서)와 극좌 모두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 요약되는 서구 주류사회의 가치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류문명의 지향점을 현대 러시아에서 찾는 경우가 더러 있는듯하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어느정도 계속되고있다.


그런데 재미난것은 자유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서방진영의 가치를 명백히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친러주의와 그 연원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에도, 그 양상이 두 가지로 또 갈라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러한 갈라짐의 원인은 결국 현재의 서방진영이 당면하고 있는 비교적 새로운문화적 현상들을 (1) 근대를 거치며 수립된 전통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퇴락시키는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2) 유지 및 확장시키는 것으로 보는지의 차이인듯하다. 물론 매우 거칠게, 그리고 전형적으로 나눈것이다.


무슨 말일까? 일단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문명에 대한 미적 매료 (나 또한 꽤 가지고 있는) 를, 현실 국제사회에서의 러시아에 대한 정치적 지지, 혹은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한 기대감으로 연결시켜 버리는 모종의 메커니즘이 극좌 및 극우 일각에서 작동하는것은 사실인듯하다.


그러한 정치적 매료는 서구 주류세계의 가치에 대한 반발심으로 대안을 추구하다보니 발생하는 것일텐데, 이는 서구적 가치들이 최소한 그들에게는 충분한 신뢰와 미적 매료를 제공하지 못하고있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얘기하기위해, 일단 서방세계에도 그런 사람들이 어느정도 존재하는것 자체는 현상이니까 그렇다 치자. 아예 없는게 정치적으로 꼭 건강한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여기서 갈림길이 생기는 지점은 대략 다음과 같은 느낌인듯하다. 첫째로, 설령 자유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추구되더라도 그러한 일부세력은 근본적으로 설득할수 없는 것으로 보고 고정적 비주류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을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가 원래대로 추구되었다면 그들을 더 많이 설득할수 있었는데, 최근에 서구에서 발생하고있는 포스트-적인 현상들을 자유민주주의가 충분히 잘 작동하지 않고 지침을 제시해주지 못해서 (예컨대 과도한 지적 상대주의를 적용해서, 혹은 거시적인 것을 경시하고 미시적인 것에 천착해서 등등) 나타나는 혼란상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을것이다.


물론 위에서 강조했듯 매우 거칠게 그리고 전형적으로 나눈것이며 매우 많은 예외가 있을것이다.


만약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후자를 본다면, 현재 서구세계가 당면한 이슈들을 끊임없이 비웃지만 그렇다고 러시아를 지지하는건 아닌, 애매하고 모순적인 입장으로 보이게 되는듯하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모순될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대략 이러한 인식 차이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 현실인식을 공유함에도 서로에게 묘한 불편을 느끼는 두 집단이 있는듯하다.


그리고 이는 소위 문화전쟁에서 각자가 전선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와도 관련이 될수 있어 보인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요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러한 전선의 설정이 달라질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안으로서의 친러적 인식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좌/우파 모두에서 생겨나는 이상한 현상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게다가 서방진영에서 상술한 새로운 무브먼트들을 주도하는 당사자들 중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관점보다는 대안의 수립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경우에는 반서방 친중친러가 되는 경우가 실제로 더러 있는듯해서 (이는 소련붕괴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좌파에서 꾸준히 조금씩 존재해온 경향이기도 하다) 위의 두 입장이 서로를 비판할 땔감을 제공하고 전선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듯하다.


여기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위치시키는지까지 들어가면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나같은경우 기독교정신을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필연적 관련은 없는 것으로 보고 전 세계에 각자마다의 기독교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둘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경우 (또는 그래야 유익하다고 생각할 경우) 에는 전선의 설정이 나랑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경우, 인류가 회복시키고 증진시켜야 할 특정한 부류의 기독교정신을 상정해두기도 한다.


결론은 딱히 없지만... 얼핏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만 치고받는 것으로 보일수있는 소위 '문화전쟁'은 기실 훨씬 커다란 글로벌한 외교안보 구도와도 결코 떨어질수없이 연관된 사안이며, 그 전선 또한 좌/우, 도시/농촌, 기독교/세속 등의 어느 단일한 기준으로 그어져있지가 않다. (n개 기준이 있다면 2^n개 견해가 모두 있다고 보는게 속편할것이다...)


이런 것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각자 나름의 전선을 형성해서, 스스로의 주장이 어디에 맞닿아있고 무엇과 맞서 있는지 파악해보는 연습을 해보는것도 정치에 관심있는 시민들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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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일요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간략한 후기

포스터에 "그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구할거야" 이 문구가 매우 내 취향저격이었는데 (소중한 개인과의 관계가 세계 전체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느낌) 실제로도 그런 느낌으로 영화가 흘러갔다

딴생각을 자주 하며 여러가지 꿈을 가졌으나 실패한 사람의 성장과 화해 이야기라고 볼수 있을것임. 환상적 설정과 소재를 이용해서 그런 스토리를 풀어내는게 매우 자연스럽고 재밌음

우연과 필연을 혼동(나는 왜 하필 이렇게 살고있을까? 왜 하필 이런일들이 일어날까?)하며 여러가지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면서도 덧없게 느끼게 하는, 삶의 핵심적인 부조리인데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으로서 다중세계를 도입 -> 그러한 다중세계가 가져오는 마음속의 풍요로움과 파국, 그리고 그것을 현실과 화해시키며 살아가는 방식을 잘 묘사하고있음

지극히 일상적이고 재미없는 일들은 사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기위해선 그런 일들에 충실해야함. 그런 일을 상징하는 공간인 국세청을 배경으로 함

한편 객관화될수 없고 두사람 사이에 상호주관적으로만 존재하는 특별한 순간들과 의미들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사랑의 요체일것임.

인격적 성장은 자기 스스로를 깊게 돌아보는 것과, 한발짝 용기내서 주변을 따뜻하게 챙기는것 양쪽 모두 있어야 이뤄지는데, 몰아치는 장면들이 지나가고 처음과 끝의 주인공을 비교해보면 이런부분이 잘 다뤄졌음을 알수 있는듯

내가 이런식으로 시공간을 섞는 영화에서 디테일한 타임라인을 잘 못따라가는 편이라 정확히 어떤일들이 일어난건지 한 60%도 못따라간것 같아 아쉽고, 여운이 상당히 남는 영화여서 영화관에서 한번 더 봐도 좋을듯. 그치만 점프가 어떻게 일어나며 각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연출의 디테일은 확실히 굉장히 좋았음. 시네마에서 보여줄수있는 여러 비일상적, 병리적 행동들이 끊임없이 개연성있게 등장하면서 재미를 줌. 여러가지 명작 영화들에 대한 유머섞인 오마주도 돋보임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1 (관람 전 기대), 링크2 (관람 후기)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A Road to 'Science of Semantics' (의미의 과학 및 의미 엔지니어링의 가능성)

이건 그야말로 잘 모르면서 하는 순전한 상상이기는 한데, 최근 머신러닝 분야의 발전과 발맞추어서, 그런 머신들이나 우리들의 두뇌 속에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어떻게 엔지니어링할지에 대한 학문 분야가 발달하게 된다면 굉장히 재미있을 듯하다.


부전공에서 '기호학'이라는 키워드를 알게 되어서 이래저래 찾아봤던 바로는, 특히 철학 쪽에서 이런방향을 지향하며 지적 고속도로를 깔아 두는 탐구들이 예전부터 이미 활발히 있어 왔기는 하며, 이들은 과학기술과의 협력에도 굉장히 적극적이다. 그런데 최근에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가 지능시스템을 어떻게 '뜯어봐야' 할지에 대한 효과적인 개념적 틀이 점점 생겨나고 있으니, 계기만 있다면 이러한 분야가 훨씬 더 폭발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한다. 이공계 쪽에서는 내가 종종 언급하는 스탠포드의 Surya Ganguli 그룹이 어느 정도 이런 걸 지향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말하자면 수량화된 기호학이라고 불릴만한 이러한 '의미 엔지니어링' 분야가 더욱 발달하게 된다면 계산신경과학과 인문학 최전선의 협력이 될것이며, 이러한 분야는 분명히 '공학'인데도 불구하고 상징과 직관의 찬란한 언어가 오가는 독특한 색채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의미 엔지니어링이라는 단어와 그 가능성은 다름아닌 영화 《인셉션》을 보고 나서부터 내 머리속 한곳에 늘 자리잡고 있던 것인데... 최근의 발전들을 보다 보니 이것이 그저 SF적인 상상이 아니며, 내 생애 안에 그런 비슷한 건 충분히 가능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만큼 그 존재를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면이나 자각몽 같은 각종 비일상적 정신상태도, 결국은 휴리스틱하게 해왔던 일종의 정신 엔지니어링이 아닌가.


좀 다른얘기일지 모르지만 자연어처리 쪽에서 GPT-3으로 대표되는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들도, 단지 그럴듯한 말을 적당히 흉내내는걸 넘어서 상당 수준의 reasoning 즉 논리적 기능이 자연스레 창발한다는게 보고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이라면 그런 기계들도 어느 정도 논리성, 합리성을 갖추고 결이 맞는 언어생성기제를 내적으로 갖출 수 있다는 것인데 (그리고 그 능력의 유무는 '정도의 문제'가 될수 있다는 것인데), 그 속에서 각 단어들의 의미가 어떻게 인코딩되고 인출되는지를 뜯어보고 실제 생물체와 비교할수 있다면 재밌을 것이다. 특히 실제 생물체들은 의미의 추상적 부호화가 시청각적 직관과 막 뒤섞여 있을거 같은데 반해서, 자연어처리 기계들은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최근의 거대 언어 모델까지 가지 않고, 머신러닝 붐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했던 word2vec 같은 임베딩만 봐도 의미의 수량적 분석 가능성은 예고되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단어들을 벡터공간 속 좌표로 임베딩했을 때, 예컨대 king에서 male을 빼고 female을 더했더니 queen이 나오더라 이런 것 말이다. 물론 실제 의미부호들의 존재방식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초등적인 부호화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추상적인 의미들일수록 뇌 속의 네트워크에 보다 '분산적으로' 저장되어있을 듯한데, 그런걸 뜯어보면서 identify하고 사람마다 비교하려다 보면 지난 20년간 인터넷의 연결망 구조 분석 등으로부터 발전해온 '복잡계 과학' 및 네트워크 사이언스가 다시 한 번 크게 주목받을 수 있어 보인다.


다른 한쪽 극단으로 가 보자면 생명이나 안전에 관련있다던지 해서 좀더 본능에 가까운 대상들의 의미론은, 보편적인 의미 저장/인출 망으로서의 뇌에 소프트웨어적으로 올려진 것이 아니라 보다 낮은 레벨에 있는 '전용' 뇌 부위에 따로 저장돼있는게 아닐까 상상도 해본다. 특히 평소에 사람들의 언어생활 (그리고 언어생활에 발생하는 전형적인 결함의 패턴들) 을 보다보면 욕설이나 성적인 단어 같은 건 일반적인 단어들과 좀 다른방식으로 저장되고 인출되는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전술했듯이 이런 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하는 상상이고... 또한 위에서는 언어 위주로 썼지만 의미라는 게 꼭 순전히 언어적인 것일 필요도 없고 비언어적인 시청각적 archetype들과도 막 섞여 있을 것 같고. 아무튼 앞서나가는 분들에 의해 이미 제대로 된 판이 깔려있을 것 같긴 하다. 취미삼아 follow-up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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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7일 목요일

강금실 전 장관 강연 (과학기술시대의 기후위기와 지구 패러다임) 을 기대하며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11/8(화)에 자연대에 강연 오는데 나는 하필 그때 출장이라 못 갈 듯하다. 강연 주제는 '과학기술시대의 기후위기와 지구 패러다임'으로 강금실 장관의 오랜 관심사이다. 그런데 이 분은 한국정치에서 하나의 커다란 상징성을 가진 파격적 인사였던데다 민주당 원로로서의 활동이 있는 분이다보니, 그쪽 정치권에서 과학기술 및 기후위기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환경 의제의 현실적 담지자들이 어떤 세력으로 구성돼 있는지까지 기대섞인 비판적 관점으로 들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듯하다.


젊은 이공학도들 중에 환경 의제와 기후위기 걱정 자체에는 진심으로 공감하면서도 지구의 총체성, 연결성을 강조하는 '세계관'으로서의 생태주의에 대해서는 히피적인 대안담론이라며 냉소하는 경우가 꽤 많은 듯하다. 나도 사실 단편적인 인상으로는 그렇게 느껴지는 편이기도 한데... 다만 그쪽 담론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을 것인데 (사회주의 기반일지, 종교 기반일지, 철학 기반일지 등등) 나 같은 경우는 그런 담론지형 자체를 잘 읽어낼 줄 모르는지라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다. 대신 나한테 비교적 잘 읽히는 종류의 글들부터 읽으면서, 어떻게 해야 의견을 효과적으로 모아서 거시적인 흐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상상해 보는 편. 그리고 강금실 장관이 공부한 생태주의가 한국의 생태담론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 것인지도 사실 전혀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강연이 전직 정치인의 개인적 컨텐츠 홍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문에서 기후위기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종의 링크가 되어 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기후위기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매우 현실적인 위협이고,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문/이과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어떤 의견들이 어떤 담론지형으로 존재하는지 그 전모를 이해하고 있어야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모을 수 있을 테니까.


암튼 나 출장 가는 건 우리 분야 교수님들이 강의 느낌으로 발표해 주시는 학술행사인데,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일주일 중 하루 정도를 버리고 강금실 장관 강연 들으러 갈지 고민을 했겠지만... 어쨌든 선발 절차를 거친 스쿨인데다 (실제로 선발에 경쟁은 딱히 없었던 것 같기는 함) 내용도 매우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병무청에 통보되는 출장이다 보니 애초에 함부로 빠지고 강연 들으러 올 수가 없다. 나랑 비슷한 관점 가진 사람이 있으면 대신 들어주고 내용 알려줬으면 좋겠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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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잔치는 끝났는가? 고연봉 리서치 포지션들의 상황 변화를 듣고

IT 쪽 석박사급 고연봉 일자리들은 올해 초중순을 끝으로 당분간 거의 문 닫힐 모양이다. 그동안 우수인력 뽑기도 충분히 많이 뽑았을뿐더러 경기가 급격히 얼어붙다 보니... 물론 내가 아예 모르는 좋은 자리들이 있을수 있겠지만 일단 들리는 바로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사실 지난 2년 정도가 유동성 덕분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잔치였던 건가 싶기도 해서, 당분간이 아니라 그냥 앞으로 다시 안 올 수도 있을 것 같음. 딱 지금시기에 학위 받고 졸업하는 분들은 그 전 시기 취업자들과 비교해서 꽤나 배 아픈 분들 많을 듯함...


나는 어떤 부문에서 무엇을 될지를 떠나 포닥을 할지 취업을 할지조차 아직 아예 모르겠지만, 3년 후엔 전반적인 취업 상황이 어떨지 걱정되기도 하고 참 아예 모르는 일인 거구나 싶음.


취준생들뿐만 아니라 재직자들한테서도 안좋은 소리 종종 나오는 게, 지난 2년간 리서치 하도록 보장해 주겠다고 뽑은 포지션들도 올해 초중순 기점으로 연구 아닌걸로 돌려서 투입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함.


제품 개발하고 이익 내서 회사 살리는게 우선이니까 어쩔순 없다 싶지만, 약속이 안지켜진 것도 사실이기도 하고... 게다가 이쪽 직군에서 그간 형성된 컬쳐 탓에 자기 자신이 회사와 한 배를 탔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보니 직무 변경으로 스트레스 많이들 받는 듯하다. 리서치에 열정 많은 분들은 심지어 네카라쿠배 급 회사에서 대학원으로 컴백 준비중인 경우도 좀 있다.


아무튼 거시적인 경제지표가 경제 및 금융분야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의 진로선택 및 직무 만족도에까지 이정도로 중요한 선택을 주는구나 하는 것을 이번에 처음 제대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회사 연구직들이 정말정말 부러웠는데, 꼭 그렇진 않고 (특히 경제가 어려워질 때) 그들도 힘든 점들이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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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3일 일요일

확장된 가정으로서의 숨막히는 한국사회: 김연아 선수 결혼에 대한 반응을 보며

나는 피겨 팬인 친누나의 영향으로 김연아 선수도 직접 보러 다니기도 했고, <팬텀싱어 2>도 워낙 열심히 봐서 화려한 목소리의 베이스 고우림도 원래 즐겨듣고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처음 결혼 발표됐을 때 사람들의 '그게 누구임?' 하는 반응이랑 반 농담식으로 전국민이 지켜본다고 하는 것을 넘어, 진지하게 급이 안맞는 결혼이라는 식으로 인터넷 상에서 계속 얘기가 나오는 건 굉장히 '억까' 같고 피곤하게 느껴진다.


농담이냐 진지하냐의 기준은? 일단 김연아선수가 아깝다 아니다에 대해 각자의 생각과 느낌이야 당연히 가질수 있지만, 아까운지 여부가 마치 논쟁을 통해 결정할수 있는 '논쟁거리'처럼 소비되는 양상이 생기면 진지해지는 거고 그게 억까의 시작인 듯하다.


그리고 후술하듯이 그렇게 진지하게 따지기 시작하면야 이 경우에 답은 당연히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으며 개인사를 '논쟁거리'로 만들기 시작하는 이들도 이것을 알면서 의도하고있음. 그러니까 오히려 애초에 시작되어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며, 설령 안 진지하고 가볍게 말하는 것이더라도 한번 더 생각하는 게 좋은 것임.


결혼에(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관계에)도 손익을 따지고 비교하는 측면이 작용 할수밖에 없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서로한테 서로가 만족할 만큼 충실한 평생친구 하자고 하는 것이 결혼인데, 당사자들이라면 모를까 축복하고 응원해주면 될 타인들이 점수 매기는 식으로 접근하는건 별로인 것 같다.


김연아선수가 훨씬 유명하고 전국민이 주목하는데다 인간적으로도 멋있는 면모가 많이 알려져 있는, 대한민국 내에서 위인급 인물인건 자명한 사실이니... 아깝다는 소리 안나오게 하려면 고우림 당신이 정말 잘해야겠네 라는 덕담 정도로 해두는게 맞는거 같고, 그걸 넘어서 좋은 결혼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점수 매기고 평가질 하는건 매우 별로인 것 같다. 대중들한테 알려진 대단한 하자가 있다거나 한것도 아닌데 좋으면 결혼하는거지. 상대방이 올타임 레전드급 스타여서 그렇지 고우림도 보고있으면 심술이 날 정도로 정말 결점이 없고 가진게 꽤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아예 억까 말고 뭔가 근거를 갖춘(?) 듯 보이는 우려의 레파토리들의 경우는, 혹시 실제로 문제가 생기고 나서 i told you 시전하는거라면야 굉장히 심술나긴 하지만 그래도 인정하겠는데... 그러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는건 (물론 유명인이라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거지만) 한국사회에서 일반인들의 결혼이 주변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방식과도 무관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셀럽들의 연애사가 대중들의 초미의 관심사인건 어느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파퓰러컬쳐에서의 떡밥으로 남겨두면 좋을 그런 관념이, 한국에서는 뭔가 가정과 가정간의 끕이 맞는 결합이자 계급의 재생산이라는 K스러운 관념과 나쁜 쪽으로 섞여서 더 유해해질 때가 많은 듯하다. 그렇게 하는게 한국사회 다수 정서라면, 주변에서 미래에 내 결혼에 대해 어떤식으로 잣대 들이대고 평가질 할지도 명약관화할 테고... 굉장히 숨막힐 것 같다.


한국사회는 아직까지는 강한 단일성과 동질성을 바탕으로 일원화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의 기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면서 사회적 화두를 생산하는데, 이것은 성숙한 사회라기보다는 확장된 가정에 불과한게 아닌가?


가정 공동체와 그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에 있어서 현재 작동이 멈춰가고 있는 디폴트 모델을 파탄없이 유지하고 싶다면 오히려 그것의 경직되고 답답한 부분을 사회전체가 최대한 빨리 버리고 다양한 모델을 포섭함으로써 연착륙시켜야 한다.


암튼 둘 모두의 나름 팬이지만 공개 때까지 전혀 몰랐던 결혼 소식이다 보니 아직도 신기한 기분이고.. 구설수없게 충실하게 좋은 결혼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응원의 말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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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9일 수요일

엘리베이터 꿈에 대하여

내가 어릴 때 특히 많이 꾸었고, 지금도 아주 가끔씩 꾸는 꿈 중에 하나는 바로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엄청나게 빨리 올라가면서 비현실적인 수백 수천 층까지 표시되는 꿈이다. 주로 그 순간에 잠에서 깨게 된다.

(뇌피셜이지만, 잠을 깨게끔 하는 실제 물리적인 움직임이 꿈속 세계에서도 가속도로 작용해서, 그걸 해석하려다 보니 그런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일수도 있지않을까 싶음. 만약 그런거면 꽤 재밌을듯)


한동안 잊고있었던 이러한 레파토리가 오랜만에 다시 생각났던 것은, aespa의 'Girls' 뮤비 첫장면에 딱 그런 장면이 나와서다. 아래에 쓰겠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꾸는걸 보면, 아마 실제로 꿈에서 힌트를 얻어서 그렇게 연출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음.


아무튼 내 경우는 그런 꿈에서 나오는 엘리베이터들이 주로 평범하지는 않고, 유리 온실처럼 돼있다거나, 아니면 옛날 아파트에 간혹 있었던것처럼 칙칙하게 창문이 뚫려있어서 구동시스템 내부가 보인다거나 하여간 좀 이상한 경우가 많다.


인터넷 검색을 조금 해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꿈을 겪는다. 엘리베이터의 빨간색 디지털숫자판에 숫자가 아닌 이상한 문자가 마구 표기되거나 (참고로 점검을 하거나 합선이 된다면 실제로 가능한 일인듯하다. 좀 무서울듯), 아니면 통제할 수 없이 위아래 층으로 빠르게 왔다갔다 한다거나 하는 등 사례를 많이 찾아볼수 있다.


내생각에 사람들이 이런 레파토리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꾸는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실제로 숫자판이 마구 바뀌어서 놀란 경험을 했다거나, 아니면 인터넷에서 엘리베이터 악몽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거나 하는것 말이다. 그것보다는 생활의 흔적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런 꿈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라는 공간 자체와 거기에 숫자가 표시되는 방식이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는 인식 및 정서의 틀과 효과적으로 조응하고 (아니면 강하게 불화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덕분에 우리의 꿈에 빈번하게 archetype으로서 등장하는게 아닐까 한다.


엘리베이터 외에도, 내가 꾸는 꿈에는 주로 인물과 스토리가 등장하지 않고 여러가지 공간들이 등장한다. 특히 살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공간들이 실제보다 훨씬 넓어지고 그 특징 또한 과장돼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꿈의 특성상 '내가 보는 한에서만' 존재할 (즉 공간으로서가 아닌 장면으로서만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몇년전에 겪었던 게 몇년 후에도 다시 나오고 하는걸 보면 어느정도는 정합적인 공간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꿈에 대한 통제력이 없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조사해보거나 하지는 못했다.


꿈에 나오는 그런 공간들의 특징은 자연스러운 공간들이 아니라 그 구조가 현대적으로 바닥부터 짜올려진 공간들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복잡다단한 플랫폼 및 환승구조를 갖고있는 지하철역 및 열차, 긴 복도가 있는 칙칙한 학교, 폭이 좁지만 수많은 층에 걸쳐있는 수직적인 학원건물 등이다.

(예전에 리미널 스페이스 (liminal space) 라는 걸 접하고 마음에 들어서 그에 대한 포스팅을 했었는데, 꿈에 이런 공간들이 자주 나오는건 이러한 취향과 연결되어 있지 싶다.)

그런데 이 포스트의 주제인 엘리베이터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조사해볼 여지 자체가 없는, 매우 타율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크기 자체도 무척 작다. 이런 면에서 그런 과장되고 연장된 공간들과는 달라보인다. 그런데 어디로 나를 보낼지는 모르고, 웬만한 광대한 공간보다도 불확실성이 크며, 또한 오작동에 대한 은근한 걱정도 알게모르게 있을테다. 그런 면에서는 위에서 말한 커다란 공간들과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아무튼 모던하게 직조된 여러가지 공간들의 이러한 특징이 우리의 시공간적 직관과 결합해서 묘한 불안감이 유발되고, 이것이 정신에 새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걸 뜯어보면서 체계적으로 조사해보고, 더 나아가서 엔지니어링해 볼 수 있다면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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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7일 월요일

능동물질 연구의 대가, M. E. Cates 케임브리지대학 루카스 석좌교수

아이작 뉴턴, 폴 디랙, 스티븐 호킹 등이 거쳐 간 케임브리지 대학의 석좌교수직인 루카스 석좌교수 (Lucasian professor of mathematics)는 2015년 이래로 마이클 케이츠 (Michael E. Cates) 교수님이 역임하고 있다.


이 분의 주 연구분야는 연성물질(soft matter), 그 중에서도 꾸준히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평형으로부터 벗어난 채로 와글거리는 물질군인 능동 물질(active matter)이다. 박테리아들의 모임이나, 세포 내부의 복잡한 환경 등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물질들에서는 일반적인 평형상태의 액체 및 기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상들 (작은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다거나, 유한한 크기의 방울들을 이루되 더 성장하지는 않는다거나) 이 나타난다.


Cates 그룹의 연구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practical한 생물물리학적 모델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수 이론물리에서 주로 볼 법한 미니멀한 통계장론(statistical field theory)적 접근 및 RG 해석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다양한 임계현상을 탐구하는 등 특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나 같은 경우 미시적 디테일을 갖춘 사실적이고 정확한 모델링도 물론 좋지만, 미니멀한 원리와 멋있는 이론적인 포말리즘으로부터 탑다운으로 유도해나가는 걸 분수에 안맞게 무척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나로서는 이런 스타일의 연구들이 꽤 마음에 든다. 이분의 구글 스콜라 페이지 (링크) 에 들어가서 보면, 최고 저널인 PRL과 PRX에만 대체 몇개를 쓰신 것인지 셀 수 없어서 놀라게 된다.


우리 지도교수님도 임용 직전까지 Cates 그룹에서 포닥을 하셨는데, Cates와 이름이 직접 같이 올라간 논문은 없지만 Cates와 늘 같이 일하는 (주로 유럽 쪽) 분들이랑 함께 논문을 여럿 쓰셨다. 나 또한 학위과정 동안, 혹은 포닥 때 이분들이랑 협업할 기회가 생긴다면 좋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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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한 인식 함양은 통례, 통설의 존중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

꽤 유명한 우파 페북셀럽의 최근 포스팅 중에 사실관계와 인식의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있는 글이 하나 보이길래 캡쳐해봤다 (본 게시물 최하단 Facebook 링크에 캡쳐본 게시). 이 글에서는 전후 GHQ가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한국인들은 그 이름을 거의 모르고 일본인들은 거의 안다며 한국인들의 무지와 반미적 의식을 비판하고있다.


그러나 내가 늘 지적하듯이, 어떤 역사적 개념이나 쟁점을 남들은 몰라서 얘기 안하는게 아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모른다, 일부러 안가르친다, 쉬쉬한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소위 '불편한 진실'이다, 성역화다 등으로 믿는 것은 건강한 보수세력이 아닌 극우화로의 출발점이 될수 있으므로 경계해야한다.


물론 대한민국의 시작, 위기극복 그리고 존속에서 미국의 역할을 되새기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한미동맹 및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국제주의적 시야를 함양하는것 자체는 우파에서 권장될만한 하나의 정합적인 실천적 견해임.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 사실관계와 역사학계의 통례/통설을 기반으로 해야하는것임.


► 2차대전 종전 후 일본과 한반도에서 군정을 시행한 기구의 정식명칭은 SCAP이며, GHQ는 사실 원래는 그냥 총사령부 라는 일반명사로, 일본의 미 군정을 지칭하는데에만 주로 사용함.


► 그렇다고 한국에서 안 쓰거나 기피할 이유가 없는 단어이고, 한국에서도 근현대 세계사와 일본사에 조금만 관심 있다면 GHQ 당연히 모르지 않을것임. (물론 한국의 역사교육에 국제주의적 시각이 아직 부족하고 한국인들이 국제사안에 관심이 덜한면은 있어보이긴 함)


► 그러나 GHQ가 주로 >일본의 미 군정<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단어임은 변함이 없으며 한국의 미군정사령부 및 군정청은 그냥 '미 군정'이라고 부르는게 일반적임.

► 편제상 한국 미군정의 사령관인 존 하지가 맥아더 휘하였던것은 맞으나, 실제로는 일본 통치에 바쁜 맥아더보다는 미국 본토의 지휘를 받거나 미군정청 자체적으로 통치한 면이 많으며 맥아더의 직접적 영향은 미약하였음 (물론 재조망의 시도도 존재함). 따라서 실질적 통치 형태를 고려하더라도 본문에서처럼 한국의 미 군정까지 GHQ로 칭하는것은 통례와 매우 다르며 정치성향을 막론하고 용례를 찾아보기 힘든 어색한 쓰임임.

즉 종합하자면 본문은 역사서술에서 용어 사용의 이슈(그마저도 용어 선택 문제가 실질적 정치적 쟁점사안도 딱히 아닌)에서 자신이 임의로 택한 의견이 통례와 불일치할 뿐인 것을, 국민들의 역사 인식의 문제로 비약 과장하고있음.

본문의 핵심 문제제기였던 GHQ 용어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로 하되, 미 군정 자체에 대한 평가부분에도 사실관계 오류와 비정합적 논조가 다수 보이므로 사족으로 추가해본다.

► 물론 공산주의를 철저히 막는다는 큰 방향성 설정, 그리고 한반도 남부 통치라는 중책을 맡고 향후 수립될 대한민국의 기본적 방향을 잡았다는 점에서 미 군정의 영향은 매우 크긴 하지만 정작 그 세부에는 반복되는 실패와 혼란이라는 측면도 많이 존재함.

► 특히 여순사건은 미군철수 공표와 한국군 전력 충원 과정에서 미군정청이 좌익성향 인물들을 색출 없이 군인으로 받아서 총을 쥐어준것이 주요 요인중 하나로, 미 군정의 실책이 있다고 보는것이 통설임.

► 게다가 막상 여순사건의 실제 발생 및 진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이므로 미 군정의 역할은 없음. 백번 양보해서 '주한미군'이 진압을 지원하긴 했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한 진압으로 보는게 일반적. 여순사건의 대응에서 미군의 역할이 알려진것보다 클것이라고 가정하고 추적하는것은 주로 반미 진보계열 언론임.

► 4.3 사건의 경우도 그 최초 발생은 미 군정시기이나, 약간의 소강기를 거쳐 본격적인 토벌에 따른 커다란 인명피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로, 역시 미군정과 무관함. 남로당 무장세력뿐 아니라 군과 서북청년단 등의 토벌대가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음. 더군다나 미군정이 각 세력을 조기에 원활하게 다루지 못한것도 4.3사건의 극단적인 귀결에 책임이 있다는게 흔히 지적됨.

► (이건 글 서두와도 연결되는 내 개인적 생각임) 정부수립 전후 혼란상에 있어 공산주의 세력의 책임은 모르거나 쉬쉬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모두가 아니까, 그리고 당시에 조직이 와해되고 주요인사가 월북하면서 쟁점들이 종결되고 현재성을 잃었으니까 굳이 적극적으로 얘기 할필요가 없어서 얘기가 덜되는것이 아닐까함.

► 4.3사건 진행은 미국이 예의주시하며 본국에 리포트 하고 있었으나, 토벌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얼마나 했는지는 미규명된 부분이며, 역시 미국의 역할이 클것이라고 생각하고 추적하는것은 주로 진보언론의 견해임. 물론 정확히 알려져야 할 부분이나 본문의 미군에 긍정적인 논조와는 맞지 않음. 4.3사건은 수많은 민간인희생을 자유진영 공산진영 양쪽에서 일으킨 사건이므로 미국의 역할을 부각하며 상찬하는것을 미국이 꺼려할지 반길지는 명약관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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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2일 수요일

Novel AI 히트를 보며: 인터넷상의 정보전파와 임팩트를 추적할 수 있을까?

지난 십수 개월 동안 그림을 그려주는 ai들이 등장하고 발전하는걸 보면서, 이렇게 대단하고 신기한데 왜 인터넷에서 그렇게까지 폭발적인 유명세를 타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미드져니 작품의 미술공모전 수상소식 등이 소소한 화제가 되는정도였다.


그런데 최근에 등장한, 2d 만화캐릭터 그림을 잘 그려주도록 stable diffusion을 파인튜닝한 'Novel AI'의 이미지 제너레이터의 경우에는 좀 다른듯하다. 정말 불과 3-4일만에 전 인터넷이 들썩이게 되었고, 그림그리는 분들 및 지망생들의 대화는 가히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나아가 이로인해 인터넷상에서 AI에 대한 경탄과 경외, 일자리 위협 등은 2016년 알파고 화제 이후 최고수준의 관심을 다시금 받고있다. 또한 주변 지인들 중에서도 인터넷커뮤니티에 익숙한 분들은 다들 novel AI 이야기를 꺼내며 디퓨전모델의 작동원리를 요약한 디시인사이드 글을 서로 공유하고있다. 이러한 대박의 원인이 궁금하다.


지금 생각나는 경우의 수로는 1. 인터넷문화 향유자들의 관심사가 2d여캐에 상당히 많이 쏠려있어서 / 2.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그림 지망생들의 상당수의 향후 기대 진출 분야가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 쪽이라서 / 3. 상업미술 시장 중에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이 그 비중이 무척 커서 등이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위 요인들 모두 섞여있을 것이며, 이유를 딱히 얘기하기 힘든 우연일수도 있겠다. 아니면 허브의 역할을 하는 몇몇 대형커뮤니티에서 유명세를 탔느냐 아니냐가 중요할수도 있다. 아무튼 인터넷 떡밥 전파의 과정과,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니 이런게 굉장히 궁금하다.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생각하는게, 인터넷 곳곳에서 시간에 따른 정보의 흐름을 토픽별로 혹은 키워드별로 probe하고, 이용자층 통계와 종합해서 이러한 유행의 과정을 추적하고 인과를 알아낼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는 열심히 노력을 들이면 반드시 가능할것이며, 이미 꽤 많은경우에 그런 작업들이 이뤄지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적이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인데 비해서 >제너럴한 솔루션<은 마땅히 없는듯하다. 뇌피셜이지만 이것은 고맥락적 정보흐름을 토픽별로 분류하고 취합하는게 어려워서 그런게 큰 것 같다.


2000년경에 복잡계 과학의 대상으로서 척도 없는 네트워크 (scale-free network) 가 주목받은 이후로, 네트워크 위에서의 데이터과학이 지난 20년동안 매우 활발히 연구되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해당 분야는 근래에 대성공한 패턴인식 및 ai라는 패러다임만큼 아주 결정적으로 빛을 발하진 못한 감이 있다.


그런데 만약에 인터넷상의 고맥락적인 정보를 취합, 가공, 판단하는 절차가 보다 쉬워지거나 ai에 의해 자동화되어서 위에 말한 제너럴한 솔루션에 근접한게 나온다면, 복잡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지적 조류의 한 정점으로서 매우 흥미롭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널리즘적으로도 의미가 있을테고 말이다. 아마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상업적인 응용은 이미 많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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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1일 화요일

과학친화적 세계관을 철지난 계급주의로부터 적극 분리해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진화론의 수호자이며 합리성의 옹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생학이랑 별로 다를 바 없는 얘기를 진지하게 하는 게 꽤 많이 보인다. 설령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능동적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사회의 변천을 유전자 풀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결국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월-열등 개념 (특히 지능이나 외모 관련) 을 바탕으로 한 '낯설게 보기'만이 남는 그런 아티클들 말이다.


최소한 우생학은 지금 와서는 윤리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적절히 비판받고 사장되었지만 당시에는 수리통계학을 만들다시피 한 사람들까지 적극 참여하는 정상과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기라도 했던 반면에, 한국 인터넷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러한 우월-열등 설왕설래는 동시대의 나무위키 주석에서조차 극우주의로 규정되고있는 실정이다.


만약에 이를 집단유전학을 비롯한 진화생물학 및 사회과학의 세련된 정량적 연구방법론, 그리고 과학연구가 인간 사회에 대해 말해줄수 있는/없는 것에 대해 실제로 잘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본다면 뒷목 잡을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작 저들은 자신의 계급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엉뚱하게도 진화론에 대한 도전, 내지는 좌파적인 상대주의로 잘못 간주하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지독한 농담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는 담론지형을 꼬이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 한해선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런 잘 훈련된 학자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창조과학 같은 사이비이론에 비판적일테고, 정치적 동기를 가진 지적 상대주의를 경계할 것이므로 과학의 적법한 옹호자일텐데 말이다.


진영을 오독하고 스스로 진화론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면서 불필요한 분란을 촉발하는, 그러면서도 과학 및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인 이러한 과학주의적-계급주의는, 유사과학 비판 및 광의의 과학커뮤니케이션에 관심있는 실력있는 연구자들에게 곤혹스럽기 그지없을테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진화생물학을 인용하는 아티클이나 영상컨텐츠들 중에 과도하게 '썰 풀기 식으로만' 되어있는, 혹은 개별 과학지식의 전달을 넘어 어떤 이념 내지는 '세계관'의 구축에 몰두하는 것들은 일단은 의심하고 보기 시작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권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한 냉정한(?) 과학주의적 주장들뿐만 아니라, 자연의 연결성과 총체성을 중시하며 주로 진보적 의제를 서포트해주는 과학기반 담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좁은 지성계 및 출판계의 역사에서 간헐적으로나마 주류로 등장하는 이쪽의 계보를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작업도 꽤 의미가 있을테고 언젠가는 취미삼아 해 봐야 하는데 아직 문헌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해보지는 못했다.


아무튼 내생각엔 비과학 및 유사과학에 대응해서 과학적 합리성을 적극 전파하려는 사람들 ㅡ소위 말하는 스켑틱 진영ㅡ은 이렇게 인간학과 생물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특유한 유사-학술적 주장들과의 디커플링을,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천명해야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얘기지만, 외부에서 보기에 스켑틱진영은 이러한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와 오히려 비슷하게 여겨질 때가 많으며, 스켑틱진영 스스로도 이들을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명시적으로 설정해두진 않을때가 많다. 나는 나름 내부자인 입장에서 그러한 동일시가 대부분 오해라고 생각하지만, 적극적 선긋기가 부족하다면 100퍼센트 그렇다는 보증은 못 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의 연원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그냥 가설이다. 김정희원 선생님의 최근 Facebook 포스팅(전체공개가 아니어서 링크하지 않음)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약간 나왔는데, 소위 명문고 및 명문대 재학생들 중에 지능 및 학업성취 관련해서 과몰입한 경우엔 우열에 대한 얘기를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나도 노골적 우월-열등이라는 개념까지는 거부감을 느껴서 안 다다르긴 했지만, 학창시절 소수 고지능자들의 사례를 보며 지능이 높느니 낮느니 하는 것에 과몰입한 시기가 길었던 건 사실이다. 경쟁하며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의 시야에서 이것이 자연스러울듯하며, 다만 적절한 교육을 통해 조기에 또다른 시야들도 경험하고 선택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튼 이렇게 머리가 좋다 나쁘다와 관련된 설왕설래가 오가며 '끕'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고착시키는 대치동 학원 내지는 오르비 마인드셋에, 고교와 학부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학습한 과학지식,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느끼는 돈 및 외모 등에 대한 관념 같은 게 절묘하게 결합해서 위와 같은 세계관이 형성되는 듯하다. 물론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지 꼭 이렇다는 건 아니다.


세계관 얘기를 더 해보자. 학부수준의 과학지식 및 교양과학지식 학습,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가 모종의 과학 친화적 세계관 (기계론적, 원자론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을 유발하는 면은 분명히 있는 듯하며 나 또한 그런 세계관을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만큼 당연히 가지고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들 과학주의적 계급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지식을, 그리고 과학에 대한 애정을 갖고있지 않을 거라고 잘못 가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비교적 지적/실천적으로 건전하게 쓰일만한 과학친화적 세계관에, 자꾸만 자신들의 차별적 생각을 덤으로 끼워넣고자 시도하게된다.


아무튼 사람들이 살아가고 공부해나가면서 형성한 세계관과 인지도식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인식의 층위를 분별하여 세계관과 개별 지식을 잘 구분하고, 각각을 적재적소에 꺼낼 줄 아는 훈련은 이공학도들 및 과학 애호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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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6일 목요일

여성권익 문제의 통합적, 독립적 관리부처로서 여가부를 존치해야한다

여성가족부 폐지 추진과 관련한 연합뉴스 기사 (["21년만에 간판 내리게 된 여가부…주요 기능 대부분 복지부로" (연합뉴스 계승현 기자)] : 링크) 말미에 꽤나 일리있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쯤 내가 썼던 포스트와도 맥락이 통한다.


여성가족부 기능을 폐지하지 않고 복지부 산하로 이관한다고 해도 기존과 부처 구획을 달리해서 여성권익 문제의 통합적 관리주체가 부재하게 되면 조율이 어렵게 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많을듯하다.


단적인 예시로 말하자면 여성가족부가 독립 부처냐 아니냐에 따라, 국무위원으로서 발언권을 갖고 국무회의에 참석 하냐 못하냐 자체부터가 달라지지 않나. 여성 권익 문제를 중심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국무회의에 오냐 못오냐가 달라진다는 것.


과거 장관들의 무용담(?)을 들어보면 국정운영은 관료제 시스템에 의해 이뤄지는것 같지만 결국 최종심급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보니 예컨대 국무회의에서 어필과 설득을 해야된다던가 그런 면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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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하지만 여성계에서는 여성 및 성평등 정책의 총괄 기능을 수행할 '컨트롤타워'가 사라지게 된다는 데 대한 우려가 큰 상황이다.
여가부 업무를 여러 부처로 쪼개면 정책 수혜자인 여성·청소년·가족의 복지 수준이 낮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보건복지부가 보건부와 복지부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도 방대한 규모의 보건이나 복지 업무에 더해 돌봄과 가족지원 업무까지 추가되면 이 업무는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인지적 관점을 갖고 각 부처의 성평등 업무를 조율하고 관장할 곳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계속 제기된다.
전 부처 정책에 대해 여가부가 시행하는 성별영향평가사업이나 성인지 교육이 축소될 경우 성적 불평등을 점검할 정책 수단이 사라지고, 성평등 관련 예산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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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일 일요일

Asunojokei - Island (2022)

따끈하다면 따끈한, 이번 여름에 발매된 포스트 블랙메탈 음반인데 꽤나 맘에 든다. 밴드명인 Asunojokei는 일본어로 내일의 풍경 (明日の叙景, 명일의 서경?)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래 링크된 곡은 짧지만 맘에 드는 수록곡 Tidal Lullaby이다 (Youtube에서 듣기: 링크). 재즈퓨전 및 매스록 스러운 전반부와, 블랙게이즈/포스트블랙 하면 흔히 생각나는 멜로딕하면서도 immersive한 느낌의 후반부 둘다 잘 쓴듯. 짧은 플레이타임 안에서 밴드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곡이며 그것이 제목에도 정직하게 반영되어 있다.


밴드캠프에서 사서 다른 수록곡들과 이전 정규앨범도 쭉 들어 보았다. 처음에는 이분들이 곡 부분부분은 잘 쓰지만 긴 곡 구성을 좀 못하는가보다 싶었는데, 한두 번 더 듣다보니 짜임새도 꽤 좋은것 같기도 하다.


주관적 표현이지만 이쪽 장르의 매력은 개인들을 동일화하는 강대한 자연을 연상케 하는 헤비한 송라이팅의 틈에서 역설적으로 개화하는 소품적이면서도 극에 달한 서정성과 센스있는 터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블랙게이즈/포스트블랙메탈 특유의 이러한 소품적 서정성은 블랙메탈에서 하나의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Filosofem에서부터 이미 조금은 예견되는 것인데 슈게이즈와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더욱 명시적으로 탐구되게된다.


다만 어려운 점은 그 균형을 조금만 잘못 잡으면 유치하게 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사실 4년 전에 나온 이 밴드 전작의 몇몇 트랙들도 상당 부분 그랬다. 반면에 이번 앨범은 장르의 매력을 살리면서도 스무스하게 들을 수 있게 꽤나 잘 다듬어진 것 같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일본어 나레이션이 들어가니까 만화느낌이 확 나기는 한다. 우리가 일본 만화 말투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냥 일본어 말투였던 것인가... 암튼간에 요즘 보니까 세상에 있는 좋은 음악 중 꽤 많은게 일본에서 나온것 같아서 일본어도 좀 익혀볼겸 그런것들을 더 많이 찾아 들어야겠다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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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9일 목요일

A mathematical coincidence: 1-e^-1 ~ sqrt(0.4)

회로이론 등에서 특성시간 볼 때 자주 나오는 (1-e^(-1))=0.632...라는 숫자가, 루트 0.4라는 숫자와 값이 0.05% 차이밖에 안 난다는 걸 방금 발견했다.


이러한 우연한 근사식들은 사실 꽤나 많은데 위키백과의 mathematical coincidence 문서 (링크) 에 잘 정리가 되어있다. 이것도 0.05%면 저기에 등재될만 하지않나~


암튼 이러한 우연들 중에는 알고보니 원리가 있는 것도 있지만, 그야말로 순전한 우연으로 생각되는 것들도 있는데, 전자뿐 아니라 후자 중에서도 단순한 amusement를 넘어 실제로 공학적으로 활용되는 것들도 간혹 있는 듯하다.


참고로 원주율의 제곱과 중력가속도 9.8이 비슷한 것은 때때로 물리학도들의 계산과 추정을 편하게 해주는데, 재밌게도 이것은 우연이 아니며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옛날에는 1미터를 진자(pendulum)의 흔들림을 가지고 정의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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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6일 월요일

모델하우스 홍보의 이유있는 음침함

모델하우스 홍보 뭔가 이상한거 나만 느끼는게 아니었구나. 새집 홍보 하는거면 뭔가 편안하고 좋은 인상을 줘야 할 텐데 거기 분들 호객 하는거 보면 그렇지가 못하고 거의 무슨 다단계처럼 음침하고 desperate한 느낌남...


특히 위례성대로 쪽이 새 오피스텔 같은거 자주 들어서는 동네라서 그런지 모델하우스 호객 정말 엄청 많았던듯. 그쪽에 대형 학원도 많다 보니 멋모르는 학생들도 끌려들어가서 연락처 쓰고 나오곤 했으며 나도 그중 하나였는데... 아직도 그럴련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딱봐도 학생이어서 그런지 투자 권유까지는 안 받았는데, 투자권유까지는 아니라도 사람 끌어와서 이름이랑 연락처 쓰게 하고 이런것 자체도 그 직원들 실적이 되는 구조인 것 같다. 실적압박이 심한 것 같고 개중에는 아웃소싱의 폐단뿐 아니라 아예 실제 사기성인 것도 꽤 있는 모양이다.


하여튼 세상의 많은 무서운 일들 중에서 특히 오피스텔 신축처럼 애매하게 큰돈이 얽힌 일들, 그리고 계약의 구조가 여러단계 있는 일들(하도급?)은 안전한것과 위험한것의 경계가 유달리 모호한것같고, 생산, 유통 및 서비스에 기여하는 멀쩡한 직역인데도 이상하게 권익보호가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는 인상이 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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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일요일

대상의 속성 및 반(反)속성 지칭에서의 모호함

어떤 대상의 속성 및 반(反)속성을 표현하는 문장에서 종종 존재하는 모호함이 있다. 이에 대해 평소에 막연하게 모호함을 느꼈으나 그것을 오래 붙잡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최근에 생각이 정리되어 기록해둔다.


이를테면 '식들의 논리적 성격'이라는 명사구를 보자. 이 표현은 다음의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식들이라는 대상이 갖는, 비논리적이지 않고 논리적이라는 특징

(2) 식들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데, 논리라는 체계 속에서 각 식들의 구체적인 기능이 무엇인지 (전제인지 조건인지 명제인지 등등)


해당 표현이 둘 중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확하지 않고, 일단은 (1)과 (2) 모두를 의미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에 어법 규칙상 한쪽만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들이 꽤 많이 혼용해서 쓰는 것 같고, 그러면 맥락에 따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게 아닌가 싶다.


음성 언어에서는 말의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구분이 가능한 것 같기도 한데... 글로만 써 있을 때에 이 모호함을 해소하려면 아예 문장을 통째로 풀어헤쳐서 다시 쓸 수밖에 없어서 답답한 경우가 꽤 있었다.

조금 더 쉬운 예시로는 '계획의 군사적 성격'도 있다. 이 역시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된다.

(1) 비군사적인 계획이 아니고, 군사에 초점을 둔 계획이라는 특징
    : 음성언어로는 주로 계획의 '군사적' 성격이라고 강조해서 말하는 듯.

(2) 기본적으로 군사적인 계획이 맞는데, 그 중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음
    : 음성언어로는 주로 계획의 군사적 '성격'이라고 강조해서 말하는 듯.

사실 맥락에 따라 어느정도 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이슈는 아닐수도 있으나.. 어려운 문헌, 그리고 처음 보는 분야의 문헌 (따라서 대상과 속성의 관계에 대해 독자의 지식이 불명확할 경우) 을 볼 때는 이런 점이 실질적인 혼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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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0일 화요일

빛으로 작동하는 인공지능

이전에 우연히 접하고 신기해서 포스팅 했던 전기과 유선규 교수님(https://waves.snu.ac.kr/research)은 박사 때는 플라즈몬 같은 걸 하셨고, 지금은 질서가 깨져있는 물질의 설계 쪽과 함께, 전기 대신 빛으로 작동하는 인공신경망의 설계를 연구 테마로 잡고 계신다.


그런데 마침 요새 analog optical computing이 나한테까지 전해 들릴 정도로 업계에서 굉장한 화두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유 교수님 연구실 소개를 보고 그때는 지적으로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프랙티컬한 관점에서도 시의적절하게 매우 좋은 연구주제를 설정하신 것 같아 멋진듯하다.


머신러닝을 개선하는데 쓰이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들을 보면, 물론 디지털 하드웨어를 효과적으로 쓰도록 로우레벨에서 개선하는것도 엄청 중요했지만, 이해와 활용에 있어서는 대부분 아날로그한 알고리즘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컴공의 여타 분야에 비해 머신러닝에서는 선대, 미적분학 등이 유독 더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극단적으로는 그러한 아날로그 알고리즘이 머신러닝의 요체이고, 디지털 컴퓨터는 그러한 아날로그 알고리즘을 원하는대로 쉽게 implement 하게 해주는 플랫폼 역할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다.


이런 센스에서, reservoir computing이라고 해서, 수많은 비선형 자유도를 가진 시스템이라면 (이를테면 물 담아놓은 바가지(...) 등 물리적 시스템들을 포함하여) 뭐든지 사용할수 있는 아날로그한 딥러닝도 제안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비선형 자유도 전체를 시시각각 업데이트 하는것이 아니라, 말단에 있는 상대적으로 조그만 뉴럴넷만 트레이닝 시켜서 원하는 함수의 윤곽을 뽑아내게 된다.


아직 analog optical computing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reservoir computing과 약간은 비슷하게, 그러나 전자 기반의 디지털 집적회로처럼 매우 세심히 디자인된 광회로를 만들어가지고서 머신러닝을 비롯한 계산을 하겠다는 듯하다.


Genuine analog의 장점은 명백하다. 자연은 나비에-스톡스 방정식 등의 복잡한 편미분방정식을, 말하자면 매 순간 아주 쉽게 근사적으로 푼다고 할수 있다 (방정식이 정확히 캡쳐하지 못하는 건 stochasticity로 간주될테다). 이는 근본적으로 에뮬레이션인, 컴퓨터속의 아날로그와는 다른것이다. 한편 아날로그의 큰 단점으로는 어떤 디자인을 바닥부터 원하는대로 쌓아올리거나, 요소 하나하나 값을 시시각각 컨트롤하기가 어렵다는 게 있다.


후자의 특징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드라마틱하게 절약되진 않을수도 있겠단 생각은 든다. 만약 기존 디지털컴퓨팅 노하우들과 시너지를 이룬 좋은 광회로가 나와서 이런 점들에서 breakthrough가 일어난다면 우리가 아는 컴퓨팅의 모습에 근본적인 도약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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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9일 월요일

재구획의 성정치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때 쓰려다 만 얘기에다 최근의 문제의식을 약간 더 섞어서 올려본다.

1.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지난 지방선거에서 이준석 대표의 기획 중에는, 정치영역에서의 다양성 확보를 위한 약자 우대를 할당제라고 명명하고, 이를 없애겠다 라는 선언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직역에서의 채용에 비유해서 이를 할당제라고 칭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을 같아보이게 만드는 잘못된 프레이밍이다. 평시 정치행위의 목적이며 대의제 민주사회의 핵심이벤트인 각종 선거에서, 각 부문, 각 인구집단의 실질적 파워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른 결과가 나오게끔 임파워링 해주는 것은 할당제라고 비웃을 일이 아니며 사회 통합을 위해 일부러라도 권장해야 하는 일이다.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비례대표제를 운영하는 취지이기도 하다. 비례대표제가 없다면 각 지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대변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질텐데 이것이 진보진영에서 흔히 생각하는 건강한 지역균형 의제로 흘러갈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실제로 할당제라고 칭할수 있는 일반 취업의 경우도 논할 필요는 있다. 궁극적으로는 학과, 그리고 해당 전공 유관 학계/산업계의 각 직급에 여러 인원이 지속적으로 고르게 분포되는게 지향점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천장을 겪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장기적인 실적 면에서도 더 좋다는 리포트들도 꽤 있다. 특정 성별에 대한 특정 직위로의 어퍼머티브 액션은 그 자체 수단이라기보단 이를 위한 과정이라고 볼수 있겠다. 물론 유일무이한 개인의 실적이 매우 강하게 반영되는 종류의 취업시장에서는 좀더 애매해지는 이슈가 있겠으나... 마이너 디테일이고 각 부문의 특성별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리더가 조직에 존재하면 좋은 롤모델이 될수 있고 그렇기때문에 여성리더를 중심으로 각종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그런거 아니겠는가.

즉 대의제 선거에서의 균형있는 선출, 일반취업에서의 할당제, 연구직 취업에서의 블라인드제 등 서로 비슷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공통점은 공통점대로, 차이점은 차이점대로 논해야 한다. 무조건 같다고, 혹은 무조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단주의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2. 구획의 정치는 현실을 규정하고 추동한다
여성부를 독립 부처로 존치하는지 여부는 단순한 상징 싸움이 아니다. 직제 계통의 분리와 통합, 위계의 변화 등은 실제 정책의 방향 및 추진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전반적인 국정철학(?)을 반영할뿐 아니라, 어디에 힘을 싣고 어디에 힘을 뺄것인지가 구체적으로 결정된다.

예컨대 지자체 분리 및 통합을 생각해보라. 수도권 재구획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거철만 되면 여러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경기도와 서울시를 통합해서 '서울특별도'를 신설하는 방안, 그리고 경기도를 분리하여 '경기북도 및 경기남도'를 신설하는 방안 등이 있다.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예산의 관할주체와 각 사업의 유기적 연계 여부 등에 매우 큰 차이를 불러일으키며, 균형발전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현실에 매우 구체적으로 반영되게 된다.

정부부처 통합 및 분리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점을 염두한 채로 아래 단락으로 넘어가보자.

3. 분할과 정복: 개별화의 욕망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에 여성의제라는 단일한 의제는 실체가 모호하며 (혹은 그러한 묶임이 실용적이지 않으며) 철저히 개별 문제로 접근하면 된다는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잠깐 정반대로, 서로 다른 여러 부문을 하나로 엮는 이해에 대해 살펴보자. 이거 역시, 당연히 지적으로 위험하고 실천적으로도 올바른 결과를 주기 어렵다. 좋아하는 분들도 많이 계실거라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대표사례는 평화라는 키워드 하에 여성, 생태, 군사, 국제 등 모든 키워드를 엮는 정희진 선생의 텍스트일것이다. 물론 그러한 글쓰기 및 사유 스타일은 이미 지성계 전반에 특정 조류로 이미 자리잡은 상태여서 지금와서 특정인을 탓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아무튼 만약에 그러한 신념이 권력을 통해 현실에 구현되어 부처가 통합된다면 특정한 이론, 보편적이지 않은 관념에 의존하는 셈이 되고, 제도의 공적 가치가 저해될것이다. 이는 민주적 권력에 의한 공적기구 재편에 사적 신념이 반영되면 안된다는, 광의의 세속주의적 문제의식으로 비판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분별한 통합을 경계하는 만큼이나, 무분별한 분리 또한 경계해야한다. 여성 의제는 여성이 삶의 여러 경로와 단계에서 종합적으로 겪는 것들이므로, 이런 경우에는 정치적, 정책적으로 한 덩어리로 묶여있는 것이 그저 상징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인 시너지가 있다. 위 문단에서도 이미 밝혔다. 조금 과한 비유일수도 있지만 육군과 해군 모두 국방부의 통제를 받는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번에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관련해서 법무부장관이 방문하여 주문한, 여성 안전 문제의 제도적 개선 같은 건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당연히 필요하고 또 정말 중요하다. 잘하는 거라고 본다. 그렇지만 만약에 지지층이나 정권이 그것들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여전히 문제적이라는 얘기다.

위에서 말했듯이 윤석열 정부는 '젠더문제란 없고, 파편적인 각 부문에서 여성과 관련있는 문제들이 존재할뿐이므로 쪼개놓아야 마땅하다'로 귀결되는 인식을 후보시절부터 매우 일관적으로 드러내고있다. 그 인식의 중심에 여가부 폐지가 있다. 이는 부처별로 이미 정립되어 있는 기능을 본인의 신념에 따라 재배열하여 이해하고있는 윤석열대통령 개인의 일관된 사고방식 (ex. 교육부의 존재 목적은 산업인력의 배출이라는 발언), 독립된 부문으로서의 젠더문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여가부폐지를 염원해온 청년남성 지지세가 절묘하게 조응한 결과일것이다.

4. 자유주의와 조화되는 평등론?: 자유의 총량 증진을 향하여
끝으로 자유라는 가치를 통해 이 문제를 다시 조명해보자. 위에 말한 임의적 재구획이 일어나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충돌하는 가치들을 서로 견주어보며 타협을 하든지 한쪽에 힘을 실어주든지 할 수 있는 정책적 논의의 장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러한 분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사이의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각자의 자유에 따른 각자의 이해관계로의 통약불가능한 추구로 우리를 이끈다. 이러한 분리의 욕망은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 온 소위 K-자유주의(여기에 이과감성을 곁들인)와 상당부분 관련이 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예컨대 자유와 권리를 비롯한 법익은 민주사회에서 원칙적으로 불가침한 것이지만 타인의 자유와 권리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경합한다. 만약에 특정한 종류의 자유를 누리는 정도가 두 집단 (예컨대 두 성별집단)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는 상황이라면, 사회의 다양성있는 통합을 위해서 한쪽을 임파워링 시켜서 자유의 총량을 증진시키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자유와 평등의 추구는 조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부분은 정치철학과 정치학에서 많이 논의하는 주제일 것 같은데, 잘 아는 바가 없어 이렇게 약간의 인상을 조심스레 던져두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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