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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8일 화요일

'내로남불'의 논리학과 화용론

  나는 소위 '내로남불'에 대해서 전향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인 일관성보다는 정치적 지형 상에서의 일관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논리적 오류가 존재하더라도 그 교정의 가능성은 언어 속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반면, 머릿속에서 정치 지형을 실제와 전혀 다르게(혹은 매번 다르게) 설정해 놓고, 제대로 된 조준 없이 자신의 주장을 '난사'한다는 것은 그 의제가 논의되고 있는 도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므로 누구에게도 신뢰를 얻기 어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내로남불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생각보다 그 근거가 미약하며, 논리적 문제보다는 정치적 신뢰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내로남불을 대략 도식화해 보자면 "상대방은 A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A를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딱히 '논리적 오류'라고 볼 수는 없다. 위의 주장은 하나의 당위명제일 뿐, 그 안에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저지른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구성하고자 한다면 그 시도의 결과물은 얼마든지 논리학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타당할 수도,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논리는 구성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된 논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는 없으나, 반드시 하나 이상의 당위명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로남불은 정당하지 않다'라는 결론(당위명제)을 유도하고자 할 때, 당위명제가 아닌 사실명제들만을 전제로 하여 그러한 결론을 유도하는 것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간에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리적 정당화의 시도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침묵하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사과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내로남불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의 시도,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의 시도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위의 내용을 반대로 말하면, 논리는 어차피 구성하기 나름이므로 내로남불의 정당화에 대한 논리적 비판도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은 것이 된다. 보다 강력한 비판을 위해서는 결국은 사회적 계기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로남불은 심지어 '수행적 모순'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수행적 모순이란 화행(speech act)의 타당성이 부정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는 그 자체로 솔직하고 투명한 주장이며, 그 내부에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수행하는 A'와 '내가 수행하는 ~A'는 엄밀히 말하면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표출적 진술)가 아닌, 내로남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발화(규범적 진술)는 그 타당성 요구에 대한 거부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따라서 내로남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발화는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규범적 진술에 대한 타당성 요구 주장을 검토하는 작업에는 사회학의 영역이 개입되어야 하고, 언어만을 분석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분석이 유보된다.

  요약하자면, 흔한 오해와 달리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발화는 그 안에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수행적 모순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규범적 진술로서 내로남불을 정당화하는 발화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논리적으로 비판될 가능성이 있으며, 수행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내로남불의 문제점은 그저 그것이 노골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상호주관성의 측면에서 발화자에 대한 신뢰를 깎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뿐이다. 무언가를 노골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긴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며, 내로남불의 정당화 시도는 수행적 모순을 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내로남불을 저지르는 사람이 비판받자 '그그같'('그거랑 그거랑 같냐?')이라고 반문하는 클리셰가 설정되어 희화화되곤 하는데, '그그같?'에 대한 반박은 위와 같은 이유로 생각보다 어렵다. 실제로 모든 경우에 그거랑 그거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수행하는 A와 내가 수행하는 ~A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그같'이 내로남불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기계적 판단은 사실 그 근거가 미약하며, 그거랑 그거랑 비록 다르지만, 어느 정도 동질적인 성격의 것이라서 같은 잣대를 적용 가능하지 않냐고 주장함으로써 내로남불 정당화 시도의 수행적 모순을 입증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그거랑 그거랑 표면적으로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동질적인 성격의 것이 아닐 경우에는, 내로남불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과감하게 돌파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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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일 수요일

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2)

  국가폭력에 의해 마주하게 되는 실존의 문제 앞에서 정치적, 도덕적 의식은 얼마든지 '한갓된' 것일 수 있다. 정치적 의식에 부합하는 선택과 스스로의 고통을 경감할 것으로 기대되는 선택이 서로 대립될 경우에,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가 전자를 택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모두가 위의 대립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견주어 보면서 선택을 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가 중점을 두어 비판해야 할 것은 다수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징병에 의해 행사되는 국가폭력이 대외를 향하지 않고 대내를 향하도록 일부 전환하여 일상적으로 시민들과 충돌하도록 판을 벌여 놓고, 그 선택지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사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정서에 호소하여 투쟁을 어렵게 만들고 국가 폭력을 은폐하는 상황 그 자체이지,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선택을 한 개별 주체들이 아니다.

  꾸준히 언급해 온 점이지만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개별 주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들 개인에 대한 공적인 자리에서의 비난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기에 비판받아 마땅하다.

  오해와 달리, 내가 즐겨 쓰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에서 '인간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정서적인 편안함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비정해서는 안 되고 무턱대고 관용을 가져야 한다는 따위의 상투적인 표현이 당연히 아니다. 그 의미는 선택의 주체인 인간이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서 작용하는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자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군 복무 이행의 형태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 문장은 잘 적용된다.

  징병제라는 국가폭력 하에서 누군가는 위와 같이 견주어 보는 과정을 통해 의경을 선택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같은 과정을 통해 반대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인식할 것을 주장하는 자가 의경을 선택한 자들에 대해 혐오발언을 자행하는 모습은 모순적이고 희극적이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지 않고 개인을 본 것은 과연 누구인가?

  + 추가로 드는 생각은, 애초에 SNS 상에서 일어나는 몇 줄의 의견 교환으로는 서로의 논지를 확인하는 것부터가 어려울 만큼 전제의 차이가 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정치에서 기본적으로는 국가권력이 온건하고 민주적으로 행사되도록 감시하고 그렇게 행사되는 국가권력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국가권력과 분리된 영역에서의 의식화를 통해 사회 전체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반민주적이니까 말이다. 개인들의 주체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들의 개별적인 선택에 도덕적 의무론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대중은 설득의 대상이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면 나는 엄격한 의미에서 진보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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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d on 2018.12.31

제로부터 시작하는 진보정치: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면 안 되는 걸까? (1)

  나의 페이스북 이용 방식은 수동적인 편이다. 나의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포스팅하기보다는, 들려오는 이슈들에 대해서 답답한 지점이 있으면 내 나름의 관점으로 그것에 대해 글을 써 보는 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군대와 국가폭력'에 대한 얘기를 유독 자주 쓰게 된다.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이나 징병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보에 위협이 되는 불온한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폭력을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는 반동적인 주장이라고 여겨서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군대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만족스럽지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국가폭력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우파의 전형적 방식도 잘못되었고, 국가폭력에 대해 정교한 성찰 자체를 거부하는 좌파의 전형적 방식 역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나의 관점이, 대단히 조심스럽게 발화되지 않는 한 어디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관점이라는 뜻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최근에 페북 친구를 맺은 어떤 분이 의경을 강하게 비난한 것을 캡쳐본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대략 말하면 의경 복무자들을 자기 몸 편하려고 대중을 압제하는 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목숨을 잃어도 싸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의경 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1) 징병제는 국가폭력이다 (2) 그러므로 부당하다 (3) 그 중에서도 의경 제도는 특별하게 부당하다는 세 가지의 명제가 모두 입증되어야 한다. 각각의 단계의 입증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중대한 문제를 우선 차치하고 셋 모두를 비판 없이 전격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복무 방식의 선택은 온전히 자발적인 개인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징병제라는 국가폭력의 압박 하에서 개인에게 그나마 선호되는 환경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상적인 시공간, 일상적인 과업들로부터 유리되어 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복무자 개인에게 대단히 큰 실존적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그나마 선호하는 의경이라는 환경을 선택했고, 그 환경이 시위대에 대응하는 역할이라고 해서 그 개인에게 국가폭력에 대한 정치적인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며, 그러한 정치적 의식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고 독단이다.

  이렇게 보면 설령 의경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의경으로의 전환복무를 선택한 개인이 아니라 징병 제도, 혹은 의경 제도의 운용 자체에 있게 된다. 좀더 구체화해 보자면, 다양한 틀이 있겠지만 예컨대 대외를 향한 폭력을 담당하여야 할 군 인력을 대내를 향한 폭력으로 '전환'하는 것의 법적, 제도적 정당성에 대한 논의 등이 가능할 것이다.

  유명한 페이스북 페이지 '헬조선 늬우스'가 2015년 민중총궐기 당시에 이것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의경들을 비난해서 일어난 큰 논란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이처럼 좌파 일각에서 관찰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나이브한 보이콧은 국가폭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에 지적으로, 실천적으로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징병제의 당사자들에게만 2차 피해를 입히게 된다. 구조를 보아야 할 때 개인을 보고, 개인을 보아야 할 때 구조를 보는 행태는 책임 소재를 흐리고 문제를 불명확하게 할 뿐이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지 자체도 논쟁거리가 되는 판에서, 부상을 입어도 싸다거나, 호적에서 파야 한다는 단순한 정념 표출에 불과한 발언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국가폭력에 대해 가장 정교하게 성찰해야 할 좌파를 자처하면서 정작 국가폭력의 말단에 위치한 개인들에 대하여 정념에 기반을 둔 노골적인 혐오를 자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치적이기 전에 인간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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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8일 토요일

남북 평화국면에서 집중하여야 할 지점은?

  거시적이고 복잡다단한 남북관계 문제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평화 선언을 넘어서, 이행 여부의 검증이 가능한 과제들을 설정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과제는 남북의 이해관계를 잘 조정하여 그것을 보편적인 가치 속에 녹여낼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정권 수뇌부 간의 서면 합의에 의한 일시적이고 기만적인 평화 상태를 넘어, 북한의 대외, 대내를 막론한 총체적인 변화를 통하여 실질적인 평화 상태가 천천하게나마 수립되기를 기원한다. 비록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전향적인 태도와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북한이 여전히 정상국가가 아니며, 선언만으로는 정상국가에 돌입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쪽도 급변사태는 원하지 않을 터이니, 합의된 국제 공조 하에 완전한 신뢰 상태도, 완전한 불신 상태도 아닌 판단중지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한 단계씩 비가역적인 변화가 이뤄지도록 주시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발표될 공동선언문의 내용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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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월요일

상징과 관념 너머: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성찰하기

  며칠 전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학생회에서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논란이 발생했다.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고 진행이 강제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이 발생한 이유는, 학생회 운영위원회 내에서 사업을 진행하지 않게 된 사유로 논의된 것 중에 하나가 “국가 폭력에 부당하게 동원되는 학내 구성원을 위한 저항활동의 일부라고 하면 온전히 설득이 되는데, 1) 강제 동원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편의만을 위한 사업임에도 극히 소수만을 대상으로 함”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사유가 해당 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만 논의되고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아마 비공식적 경로로 유출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글을 쓰는 첫번째 이유는 이 사유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 운영위원회 내에서 없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극적 동의들이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이유는 이 논란에 대한 나의 비판적 평가가 내가 평소에 늘 하고 싶은 말과 맞닿은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와 사회적 규약에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매우 정확하며 중대한 사회학적 통찰이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모든 현상은 원자들의 상호작용에 불과하다’라는 말만큼이나 원론적인 말이다. 그 말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 말을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집단 사이에서는 그 말을 반복하는 것 자체로는 개별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거나, 실천적 대책이 제시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나 행위, 대표적으로 학내 인권폭력 사건 등에 대하여 ‘이것은 폭력’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원론적인 선언에 불과함에도 사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을 공적으로 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대응을 하겠다는(혹은 그 대응을 지지하겠다는) 의도가 동반되어 있는 실천적인 선언이기 때문이다. 선언에는 구체적인 실천의 가능성이 동반되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어떤 행위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 가능성(나는 이것을 ‘사건성’이라고 부른다)을 상상할 수 없고 그것이 폭력이라는 선언 자체만 가능하다면, 그 폭력은 그 정도의 중대성만 가지는 것이 된다. 반대로 말하면, 중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이것은 폭력’이라는 선언에만 그친다면, 그 발화자는 그 문제의 ‘사건성’을 부정하고, 원론적인 수준의 인식만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총장선거 출마자가 학내 인권폭력 사건에 대해 ‘이것은 폭력’이라고 원론적으로 말하는 데에 그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쉽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못할 거라면 조용히 하라’는 억압적인 말과는 거리가 멀다.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모든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밀접한 문제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과, 오직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이해에 그치는 것은 그 전제와 접근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크다는 뜻이다. 이것은 언어가 가진 상징과 서사 기능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구조주의를 내가 경계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깊다.

  군대와 폭력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단순히 전쟁을 상징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실제 근대적 국민국가의 핵심 원리가 군대의 폭력 독점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군대 내에서 실제 폭력이 매우 농축되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서 군대는 분명히 폭력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 (그리고 또한 자주 폭력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은 언어 속에서만, 그리고 언어 행위를 통해서만 폭력적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면서 사람들에게 강제력을 발휘하는 군대라는 집단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군대를 실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담지한 상징으로 보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군대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폭력적'인 사유 방식이다. 우리는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상술한 학생회 운영위원회의 논의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우선 버스 대절 사업이 ‘강제 동원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편의만을 위한 사업’이라는 전제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은 분명히 군대가 학우들에게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학우들이 보다 적은 비용으로 보다 편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응원하는 의미를 가지는 사업이다. 그것을 국가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의미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며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물론 학생회의 인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동원 대상자가 군대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대한민국의 환경에서,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운영하면서 군대가 국가 폭력이라는 인식을 학생회가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면 사업 참여에 대한 학우 일반의 부담이나 거부감이 엄청나게 가중될 수밖에 없으므로, 또한 그것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군대는 폭력이다’는 선언 자체만으로는 개별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거나, 실천적 대책이 제시되지 않는다.

 만약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이 국가 폭력에 대한 순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 국가 폭력에 대한 일종의 보이콧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콧의 의미는 ‘보이콧을 한다’는 선언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대상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입히는 데 있다. 그러나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음으로써 병무청에, 혹은 군대라는 동원체제 자체에 끼칠 수 있는 손해는 전혀 없다. 버스 대절을 진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는, 동원 당사자인 학우들이 제공받을 수도 있었던 편의를 제공받지 못하고 원래대로 비용과 수고를 들이게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의도대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효과조차도 갖지 못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안보 문제와 관련한 군대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동의하는 편이며, 군대에 대한 거대담론을 전개할 때에는 (그 필요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당연히 포함하여) 그런 측면까지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내가 진보적 담론 일각의 나이브한 평화주의를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불편함과 동시에 이러한 문제점까지 경험한 예비군 대상자 학우들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이념적인’ 이유로 사업이 무산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비군 버스 대절 사업을 진행하지 않는 이유로는 학생회의 행정력 투입이 어려운 상황이고 다른 사안과 비교하여 중심적인 의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업 진행을 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가 더 솔직하며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공개 전의 최종 단계에서 해당 사유를 삭제한 해당 학생회 운영위원회의 조치는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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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추가

오용재 사과문은 적어도 사과문 자체로서는 잘 쓰여졌다고 생각했는데 댓글에서 많이 비난받길래, 자세히 봤더니 역시나 '국가 폭력'이라는 워딩을 문제삼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군대가 국가 폭력이라는 진술 자체가 군인을 무시하고 깔보는 의도라고 인식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정서가 상당수 작용하는 것 같다(그리고 이번 논란과 같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런 정서는 강화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반대급부 식의 정서 역시 국가 폭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하는 태도는 아니다. 군대의 본질이 국가 폭력이냐 아니냐로 논쟁한다면 너무 당연히 폭력이 맞다는 쪽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 폭력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무슨 효과를 의도하는지가 중요하다. 폭력에 대해 관념적으로만 접근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치기어린 보이콧을 시도하는 진보의 방식도 폭력적이며, 안보를 언급하며 폭력의 불가피성만을 주장하는 보수의 방식도 폭력적이다.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걸 보면, 군대에 대해 좌우 막론하고 '스위치 눌리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만 군대에 대한 좌파와 우파 사이의 깊은 골짜기가 메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내무부조리 개혁과 월급 인상, 개인시간 보장 등의 조치가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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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4일 토요일

과학적 회의주의의 입지에 관하여

사람들이 <물은 답을 알고 있다>와 같은 유사과학을 피식 웃으면서 마음껏 조롱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사이비적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서 합의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새로운 폭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회의주의의 궁극적 역할이 그러한 키치한 조롱을 필두로 한 놀이문화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한 놀이문화는 분명히 매우 재미있는 일이며, 공통적인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류하고 결집하도록 돕는 긍정적인 영향이 있으나, 그 문화는 어디까지나 분명히 '특정한' 무엇이므로 그것이 과도할 경우에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주류적인 마인드로 자리잡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주류에서 벗어난 컬트로 취급되기를 거부하고 진지한 영항력을 발휘하기를 원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상당한 크기의 권력이나 자본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체계가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폭로하는 '불온한' 역할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과학적 회의주의는 제 위치에서 안주하지 않고 성실할 것을 영구하게 요청받을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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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acebook post 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680270745397957

archived on 2018.12.31

2018년 4월 3일 화요일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개의 바퀴

  우연적이고 유한한 세계 속에서 필연성과 무한성을 표상하는 능력과, 그 능력을 바탕으로 비약이 동반된 서사를 구성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만족 불가능한 충동이야말로 인간사의 가장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이며, 사태의 일회성/고유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한쪽 바퀴와의 모순적인 결합을 통해 인간을 작동시키는 두 번째 바퀴이다.

  예컨대 내가 지금처럼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할 때, 잠시 후에 있는 시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유일한 기회이며, 시덥지 않은 우연들에 의해서 결과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대비를 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첫 번째 바퀴). 반면에, 삶에 대한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자의적인 그림 속에서 이 시험이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중요성을 차지하는지를 상상함으로써, 시험을 잘 보아야만 내가 상정한 필연대로 삶이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두번째 바퀴).

  이러한 충동은 일상에서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에서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늘 잠재하면서 우리를 움직이며, 조금만 생각해 보면 헛된 것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지식과 문화의 풍부함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충동을 잘 인지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스스로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고, 독단적인 사상누각을 세워서 스스로 속아넘어가거나 타인을 속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서사적 본능', '우연과 필연 사이의 투쟁'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술(description)과 규범(prescription)을 분리하면서도 양쪽 모두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과학에 대한 지식과 특유의 양적 방법에 대한 이해가 꽤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조만간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써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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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4일 토요일

보수정권의 댓글공작과 대선개입을 잊지 말자

  국정원 및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공작을 통한 대선개입은 내가 정치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자 현재까지도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 중에 하나이다. 2012년 대선 당시 김용판 경찰청장은, 국정원의 댓글작업 혐의가 분명히 포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격적으로 은폐하고 '무혐의' 기자회견을 무려 "대선 3일 전에" 직접 진행하여 대선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경찰 관계자들이 혐의를 포착했으나 은폐하겠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영상이 존재한다). 사실상 박근혜 당선의 일등공신인 김용판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탈락하고 부정경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박근혜는 당선 이후 2013년 내내 국정원과 사이버사에 의한 부정선거 의혹에 시달렸고, 대중의 관심도가 시간에 따라 점차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모는 차차 밝혀져 갔다. 윤석열 검사가 황교안과 검찰조직으로부터 체포된 국정원 직원들을 돌려보내라는 등의 외압을 받아 정상적인 수사 진행이 어려웠다는 것을 법사위 국감에서 폭로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한편,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에서는 대선개입을 위한 댓글공작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를 홍보하고 좌파를 비난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물이 국민들의 사상적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대내 심리전이라는 차원에서 다수 제작 배포되었다는 것도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오늘은 정보기관, 군부대 뿐만이 아닌 김용판의 경찰조직까지 이러한 댓글공작을 적극적으로 (그것도 독보적인 규모로) 진행했음이 드러났다. 진작에 밝혀졌어야 할 일들이 그동안 박근혜 정부에 의해 은폐되다가 늦게나마 서서히 드러나는 데에 안도감을 느끼지만, 지속적인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체상이 확실하게 드러나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 기사출처: "경찰 댓글 공작 '압도적 1위' 였네" (2018.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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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0일 화요일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칸트미학적 접근 가능성

  소위 말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칸트미학의 체제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전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 논의가 다소 얼기설기하지만 일단 간단하게 메모해 본다.

  논의의 출발은, 수학 공부를 하다 보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직관의 형식(대충 말하면 시공간에 대한 직관)에 근거한,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통합적이고 근본적인 이해를 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수학적 직관'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 직관 자체는 명료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지만, 명료한 수학적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명백하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직관을 새롭게 얻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 선형대수학을 공부하다가 '이게 뭔지 알겠다'는 느낌이 들 때 기분이 좋은 것 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나는 대수적 구조에 대한 지식으로는 고등학교 수학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직 그걸 많이 느껴 보지는 못했다. IR^n도 극도의 겉핥기로만 알고 복소공간 C도 거의 다룰 줄 모른다).

  이 통합적인 이해(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아름답다는 느낌, 지적으로 충만한 느낌)가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수학적 개념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법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어 이해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머리가 팽팽 돌면서 마치 '전체를 보는', '현상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명료하게 논증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내 머릿속에 있는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엄밀한 의미의 '인식'은 없지만, '인식능력의 활발한 작동'은 있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미학적 과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학적 직관'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적 예시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수학은 예술이나 공학과는 달리 '이미 뭔가 정해져 있고 내가 그걸 발견할 뿐'이라는 느낌이 강함을 고려할 때 (칸트적 언어로 말하자면, 수학적 명제가 선험적 종합판단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든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든 이것에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통합적 이해의 순간에는 '전체를 보는' 듯한 오만한 느낌이 들겠지만, 보다 추상화된 수학을 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여, 예전에 내가 전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 단면에 불과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인식의 확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인식적 확장의 단서들은 내가 아는 것들 속에 모두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수학적 지식이 선험적 종합판단인 이유이다. 보다 '덜 당연해 보이는', '김새지 않는', 그러면서도 단순히 '신기하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관을 확장시켜 주는' 논증이 재미있는 논증인 것 같다.

  그러나 수학적 아름다움이 자연물 혹은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 등과 구분될 수 있는 근거는, 후자의 경우에 우리로 하여금 머리가 팽팽 돌아가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인식 일반' 혹은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는 결국 일종의 주관적인 '비유'에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므로 '주관적 보편성'에 그치지만, 수학의 경우에는 여기에 '객관적 보편성'까지 확보되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설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각자의 수학적 직관이 '동일한지' 여부를 알기 어렵다. 개별 수학적 명제는 명석 판명하게 논증이 가능하지만, 각각의 수학적 명제들이 개인의 머릿속에서 이해되는 '직관'적인 방식은 명석 판명하게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예시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다. 칸트 미학에서 공통감이 '논증'되지 못하고 '전제될 근거를 얻는' 정도에 그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수학에서의 공통감에는 약간 다른 국면이 있다. 수학적인 명제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성격을 가지므로, 원리적으로는 누구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면밀하게 생각만 해 보면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적 아름다움은 미학의 과제이지만, 오로지 미학의 과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수학은 왜 다른 학문과 차원이 다르게 성공적인가'라는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칸트가 수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에 속한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수리철학적 물음을 던진 바 있으나 칸트에 반대하는 수리철학적 의견도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칸트적 기획의 장점은 수학과 아름다움을 보다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수리철학과 미학의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결합이, 칸트가 제시한 간단한 인지도식 상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해명된다.

  물론 수학의 엄밀성과, 수학적 개념들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직관/아름다움은 별개로 가야 하며, 이상한 비유를 붙여서 유사과학을 만들면 안 된다.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이 부드러운 유체를 다루므로 여성적이라서 남성중심적으로 고안된 수학 체계에서 안 풀리는 것이라는 등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당장 칸트부터가 이것을 싫어할 것이다. 수학의 발전사가 수학자들의 직관과 주관적 편향의 영향을 받는 것과 별개로, 수학적 명제에는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객관성이 있다. 한 치의 '비약' 및 '서사적 접근' 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 착상을 떠올리는 데 있어서 '비약' 및 '서사적 접근'이 작용한다는 점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여겨지던 과학마저(특히 생물학 및 사회과학) 성차별적 편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수학의 경우에는 과학과도 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 물론 수학자 사회에서 수학적 지식이 생산되는 구조, 그리고 일반 사회에서 수학적 지식이 교육되고 소비되는 구조가 성차별적일 수는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끊임없이 비판해나가야 한다.

  나는 펜로즈가 '실체에 이르는 길'에서 거칠게 제시한, 물리적 세계도 아니고 인간의 정신도 아닌 제 3의 영역에 수학적 구조들이 있다는 존재론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결국 수학을 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 수학적 구조들을 엿보며 밝혀내는 것이 인간의 정신이기 때문에 칸트철학과의 보완적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나는 '밝혀낸다'는 표현이 대단히 마음에 든다. 수학적 작업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전체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이 (혹은 스타크래프트에서 새롭게 도달한 영역이 지도 상에 추가되듯이) 조금씩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리적 탐험은 반드시 발자국을 남긴다. 아메리카를 탐험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 표면의 모습을 폭력을 동원하여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그들의 발자취이다. 그러나 수학이라는 행성의 표면은 '무한히' 단단하고 치밀하여 탐험자들에게 발자국을 허용하지 않으며, 누가 어떻게 탐험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수학에서 다루는 무한을 제외하고, 내가 인정하는 무한성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오직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 지도 상에서 탐험된 영역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수학자들이 어떤 착상을 하여, 수학사적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지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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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8일 목요일

인권센터와 평의원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

  성 소수자 관련 내용을 사회적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인권교육에 포함시킬 수 없다면, 교육이란 사회의 모습을 무비판적으로 반영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인권교육은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반영하고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 근거하여 그것의 개선을 꾀해야 하며, 사회적 합의를 선도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사회적 합의의 부재를 이유로 성소수자 관련내용을 문제삼은 평의원회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인권교육의 '대상자'이다.

  성소수자 인권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차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어떤 내용 자체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그것을 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별개이다(이를테면 기벡처럼...). 그러나 전자의 합의는 명확한 주체가 없고, 후자의 합의는 결정권자들이 주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결정권이 있으면 책임도 있다. 결정권자들이 전자의 합의가 없음을 근거로 후자의 합의에 반대하는 것은 수동적인 태도를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능동적으로 소수자를 배제하는, 책임이 결여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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