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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8일 월요일

개복치 엘리티즘

 최근 화두인 1심 판결에 충격을 받은 분들이 그것을 비꼬려고 '나는 왕년에/자식 교육 할때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이것도 범죄겠네?'라며 SNS 상에 자진신고(?)를 하는 모양이다. 수사기관에 인지가 안 돼서 그렇지, 인지되면 수사대상이 될 만한 일들이 대부분 맞다. 그분들이 풍자로서 말하는 '장관 자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은, 풍자도 유머도 아닌 무척 정확한 사실인 것이다.


물론 수사기관이 원래는 안 그러다가 한 명한테 엄정하게 칼날을 들이댄 것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공명정대하게 하지 않고 카드놀이 패 꺼내듯이 수사하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지적된 문제고 그 개혁방안도 논의되고 있으므로 여기선 자세히 논하지 않는다. 그리고 법원에서 선고된 형량이 과도하지 않냐는 논의도 할 수는 있다고 본다(다만 판결문 전체를 읽어 보신 분들은 변호인단의 재판 전략이 안 좋아서 형량이 세진 거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혐의들 자체가 뭐가 잘못됐느냐는 주장은 명백히 너무 나갔다.

판결 때문에 충격받아서 잠시 그러는 것만은 아닌 것이, 한창 의혹이 터지던 작년에도 이미 이런 얘기들이 무수히 나왔었다. 누구보다도 연구윤리에 민감해야 할, 대학 총장 출신으로 교육감 하고 계신 분까지도 논문 1저자 그렇게 받은 게 뭐가 문제냐고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꼼수에 대한 윤리적 선이 이리 보면 낮은 듯, 저리 보면 높은 듯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 혹은 가까운 사람이 할 때는 다들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아니꼬운 사람이 걸리면 끌어내려야 하는 이중성 같은 게 있다. 전자가 개선돼야 함은 물론이고, 후자 역시 연예인 등에게는 가혹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정치 유관심층에서 근 1년 넘게 진영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이슈 때문에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다. 이런 복잡하고 아픈 이야기들을 다 걷어내면, 나는 이 이슈에서 도출되는 일관되고 간명한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꼼수를 별거 아닌 걸로 여기는 사회 속에서 좀 잘나간다 싶은 사람들은 어김없이 업보로 인해 예정된 몰락을 맞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동료와 지지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멋없는 모습과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다. 그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는 한국의 이러한 품격없는 엘리티즘, 쉽게 그 실체가 드러나고 몰락할 수밖에 없는 개복치 엘리티즘은 윤리의식 미비의 결과이자 계속되는 정치혐오의 원인이다. 정치로 제도를 고쳐서 윤리를 세워야 함을 고려하면 이는 지독한 악순환이다.

비겁한 성공이 아예 제지되지 못하는 사회보다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 명예와 실권을 잃는 사회가 분명히 낫기는 하다. 그걸 가능케 하는 다이나믹하고 민주적인 사회분위기는 한국이 가진 귀한 자산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것을 추동하는 정서가 연예인이나 유튜버 등에겐 지나치게 가혹하게 작용할뿐더러, 정치의 영역에서도 정책들이 아닌 정치인들에 대한 무한한 검증과 폭로, 덧없는 몰락과 멋없는 옹호 일변도의 싸이클이 연일 뉴스 메인을 장식하는 지금의 이런 사정을, 나는 결코 덮어놓고 건강하다고는 못하겠다.

한창 의혹이 터지던 시절 이미 지적했듯, 저것보다 더욱 성숙한 민주사회의 모습은 소위 엘리트들이 아예 그런 방식의 성공을 시도하지 않고 비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인간적 미덕과 제도적 견제장치가 자리잡은 사회다. 그럴수록 국민들의 높은 정치참여 의지가 소모적이지 않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제도를 비껴가는 꼼수가 아닌 윤리의 철저한 준수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미덕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여러 부문에서의 윤리가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더 많이 준수되기 시작한다면, 지금의 이 사태가 그나마 발전적인 방향으로 끝을 맺는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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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7일 일요일

이미테이션 게임 - 후기

연구실 동료가 추천한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면서 생일을 마무리했다. 인기를 끌 만한 깔끔하게 떨어지는 연출로 인물들이 겪는 성공의 장면과 실패의 장면, 인간적 고뇌와 사회적 차별을 균형있게 담아낸 비극. 다만 전기영화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실제 역사와 차이가 많다고는 한다.

영화 초반부의 튜링 캐릭터 묘사가 이전에 봤던 빅뱅이론의 쉘든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런 캐릭터가 나랑도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 초반부터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공동체를 수호하는 책임이 무척 폭력적인 작용을 통해서 구현되는 역설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동원의 와중에도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는 연구자들의 줄다리기도 인상깊었다.
그리고 마침 저녁때 코드 도는 시간도 단축하고 매스매티카 오류 나는 것도 고친거같아서(...) 작중에서 문제 해결하는 장면들도 굉장히 과몰입하면서 봤다. 진짜 고친건지 좀더 확인해보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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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1일 월요일

코로나19 3차 유행국면 관련 글 모음

코로나가 불특정 다수 감염 양상인데다, 직접적으로 의미있는지는 의문이나 조만간 일일 확진자 절대치까지 기존 최대값(신천지 집단감염 때)를 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는 모양이다.


연말은 원래 소비와 모임이 많을 때인데... 이럴 때 이렇게 되니 많은 분들이 착잡할듯하다.

일단 일반인들로서는 각종 연말모임은 강력히 자제하며 주변에도 그렇게 호소해야 한다. 한번 경각심이 떨어지니까 캠페인도 이제 안 통하는 듯해서 걱정이긴 하다. 아는 사람끼리만 있으면 적당히 괜찮겠지 하는 심리가 완전한 착각이라는 점을 직접 타겟한 캠페인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때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돈을 푸는 것 같은데... (어차피 지난 8월 이전같은 안정세 되려면 최소 몇개월은 더 갈듯하니) 당국이 너무 소극적인게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그 무수한 비난을 감수하면서 아껴뒀는데(?) 마침 코로나 심해졌고 또 원래 소비가 많아야할 연말이기도 하니 지금이야말로 써도 되지 않을까.

당장의 재정 지출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큰 피해가 없으려면 고용유지 지원금도, 무직자 생계유지 지원금도 과감히 지원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 임대료 깎는 얘기도 나오는게 좋고. 비대면으로 어떻게든 돌아가는 분야는 그렇게 하면 되는데 자영업, 알바, 일용직 등은 너무 피해가 막심할듯해서...

병상 확보도 이제 한계상황이라고 하니 더욱 걱정이다. 그동안 절대적인 입원필요 확진자 수가 비교적 작았고 의료인력이 갈려나갔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해온건데 감염 통제불능 상황으로 가게되면 민간병원 일반병상까지 쓰게 될 수 있고 그러면 또 거기서 많은 문제가 생길테다.

지금까지 부작용들이 쌓여왔지만 어쨌든 근근이 잘 막아왔고, 생명과 안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결정권자들이 빠르게 결단해서 이번 국면을 파국없이 넘겼으면 좋겠다.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1 (2020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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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상황에 불만 가지면서 정작 본인도 수칙 지키지 않는 걸 보면 무척 답답하고 그런 사람들이 지역사회 전파의 한가지 원인인 것도 맞겠지만... 사실 사태가 준수/미준수로 단순하지만은 않은 게, 예컨대 상사가 모임을 갖자고 하면 위계 때문에 방역에 대한 관념은 무뎌지거나 강제로 억제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준수자 개인들이 멍청하고 모순된 사람들이며 발화자 자신은 그 위에서 통찰하고 있다라는 식의 윤서인식 단순화 묘사법(?)에는 영 거부감이 든다. 단적으로 내가 칩거할 수 있는 것도 교수님께서 비대면 랩미팅을 쭉 유지중이시기 때문이기도 함.

...라지만 과연 위의 맨 처음 문장은 그런 윤서인식 사고와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가 생각도 해보게 된다. 결국 생각의 객관적 내용 자체보다는 어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조롱의 뉘앙스, 그리고 이해가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려는 마인드 등을 내가 원체 싫어하는듯. 욕하더라도 이해(용인이 아님)의 대상으로 삼으려 해야지, 조롱하는데 그치면 쓰나.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2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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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물리적, 기계론적으로 전파되지만 방역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공동체의 안전과 사회적 비난을 고려한 도덕적인 성격에 가깝고 근본적으로 분절적, 상징적으로 작동한다. 이와 관련해서 아래 공유하는 글에서 논하는 지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기술매체에 등장하는 물리적 공간과 출연자들은 그 도덕적 자격을 충족하기 위해 일반적인 사회보다 훨씬 철저히 관리되는 상태일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내 뇌피셜이다. 열체크와 손소독을 하더라도 그 전날 출연자들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등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결국 일반 직장과 딱히 다르지 않게 개개인의 사회적 접촉 자제에 방역이 의존하는 것.

결국 대중들이 승인할 만큼의 윤리적 선을 지키면 비난을 받지 않는 구조인데, 대중들이 컨텐츠를 승인하는 것의 역방향으로 매체의 장면들 역시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있다. 그래서 유튜버나 일반 방송에서 안전하게 촬영했다는 disclaimer를 삽입하면 경각심이 은연중에 다같이 낮아질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방송 자체를 중단하고 다시보기만 줄창 틀거나 할수는 당연히 없으니... 당연히 어쩔수 없는 부분이 있다. 또한 매체에 등장하는 연예인들과 공인들은 사회적 비난을 의식해서 더 조심할 것 같기도 하고. 나부터도 집에 계속 있어도 유튜브 재밌는거 보느라 덜 심심하기도 하고. 따라서 일단 이건 막 비판이라기보단 흥미로워서 해보는 얘기인걸로.

(임예인 기자의 글(링크)을 공유하며 덧붙인 코멘트임)
Facebook에서 이 글 보기: 링크3 (2020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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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치료제... 셀프검사키트... 현 시점에서 직접적으로 택할 수 있는 방역대책으로서 큰 의미가 없거나 꽤 시기상조인 내용들이 유력 정치인들 발언으로 종종 나오는 듯하다.
과학기술 내지는 산업부문에서 해당업계 사람들 내지는 정치인들에 의해 그런 발언들이 늘상 이뤄지지만 희망회로 가동을 통한 관심유발과 투자확대는 분명히 필요한 것이니 사실 어느정도 이해는 된다. 게다가, 코로나 상황의 획기적 개선도 결국 흔히 이뤄지는 과학기술 혁신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구조의 신기술을 통해 이뤄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코로나 유행 상황에서 연일 그런 발언들이 전파를 타는 건 좀 다른 문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람들 마인드가 달라질 수 있고 거기에 생명과 안전이 직접 걸려있는 상황인데, 정치권 인사들이 나쁘게 말하면 스캠성, 혹은 좋게 봐줘도 과도한 홍보성 발언에 너무 휘둘리는 거 아닌지?
이런 사안에 있어서는 희망회로 돌리는 발언을 통해 잘못된 시그널을 줘서는 안되며, 현 시점에서 확실한 것들, 방역에 있어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 위주로 얘기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물론 방역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방역과는 다른 부문의 일인데 팬데믹과 연관이 있을 경우, 특히 방역과 직접 연관된 것처럼 오해될 수 있을 경우는 조금더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라는 게 정말 엄청나게 많은 부문으로부터 정보가 들어가고 민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정치인들 입에서 때때로 다소 뜬금없는, 혹은 의도를 알기 어려운 얘기가 나온다면 그런 구조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국민 메시지에 있어서 좀더 방역당국의 판단을 중심으로 발맞춰가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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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5인이상 사적모임 제한 관련해서 페친과 덧글로 말씀나눴는데 뭔가 얘기가 잘끝나서(?) 게시물로 옮겨본다.
이번 수도권 조치는 일단 중앙정부의 거리두기 단계와는 별도로 3개 지자체가 결정한것이다. 물론 중대본과의 논의를 거친 것이고 물밑에서는 더 윗선과도 교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그 목적 또한 전반적 거리두기단계 조정과는 달리, 연말연시에 맞는 특별조치로써 사적 연말모임을 안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침 연말이라 다들 모이고 싶어하니까 그 위주로 강력히 막겠다는 것.
따라서 연말분위기는 많이 없어지겠으나 일반적인 식당 방문식사, 다중이용시설의 개인적 이용 등은 가능하다. 물론 피해가 없다는게 아니며 지금 이순간에도 경제적 피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3단계거나 더한 조치인데 비난을 피하기 위해 단어만 다르게 한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과 다르다. 나는 이번 조치가 그 집행 주체부터 내용까지 3단계와는 명백히 다르면서도, 말이 되는 조치이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입장(?)에서는 사적 모임인지 공적 모임인지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사적 모임만 금지한다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와 달리 사람들은 공적 모임과 먹고마시는 사적 모임을 구분하며, 연말에는 그 중에서 후자가 폭증한다. 그러면 당연히 (3단계 안할거라는 전제 하에서는) 사적 모임을 갖지 말라는 인위적인 구분을 함으로써 연말변수라는 휴먼팩터를 조절하고 평상시에 준하는 관리가 가능하다. 사적 모임만 막는다고 코로나가 완전히 안 막아지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게 모순이거나 쇼는 아니고 휴먼팩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는것.
지금까지 3단계를 가급적 피하고 애매한 중간적 조치를 계속 만들어서 2.999단계냐는 식으로 여러 비난 받아온 것을 감안하면 (물론 이런 단계들 자체가 잘못 디자인되었고 단계 하향도 섣불렀다는 등의 지적이 많이 있는데 이런것들은 검토되고 반성되어야 한다) 적어도 이번 조치에 한해서만은 비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을 감수하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요컨대, 3단계와 다를 바 없는데 비난을 피해간다는 것보다는, 3단계를 할지 말지에 대한 논점이 좀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까지 있었던 거리두기 단계 관련한 이런저런 혼란상, 병상 확보 및 백신도입을 주저한 것, (결국 또 어김없이 나와버리고야 만) 청년 탓하는 발언 등 비판할 거리가 많고 지금의 상황도 그것들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으나, 그런 비판거리들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에 한해서는 필요성이 변하지는 않는다는게 내가 말하려는 핵심이다. 연말모임이 집중되는 시기가 바로 곧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원포인트 조치와 강력한 실행의지를 담은 메시지가 지금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진단과 비판이 민간과 정치권에서 이뤄질텐데 이런 비판들에 대한 과민반응이 앞으로 분명히 있을거라서 상당히 유감스럽긴 하다. 욕 덜 먹으려고 책임을 미루는게 결국 더 많은 욕을 먹는 지름길임을 이해하고 책임있는 행정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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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1일 금요일

품바

품바라고도 하는 각설이 공연문화와 관련하여, 공연 영상은 유튜브 등에 상당히 활발히 올라오고 있는데 비해 문헌 기록과 연구들은 찾기가 상당히 힘들다.


민속관련 백과사전 등에 전통적 각설이패가 비교적 단편적으로 소개된건 많이 있는데 이 주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백과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 레퍼런스가 되는 기록물들도 많이 있다는 얘기 같은데... 아마 내가 잘 못 찾는 듯.

그리고 전통도 전통이지만 사실 현재의 품바공연에 대한 게 궁금한 건데(실질적 연속성은 크게 없는 것 같고 각설이패를 다루어 히트친 특정 공연의 이름이었던 품바가 일반명사처럼 자리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걸 다루는 문헌은 정말 얼마 없는 듯하다. 꼭 연구 문헌이 아니라 지역문화 잡지 같은 곳에 생생하게 실린 것들도 분명히 많이 있을 법한데 말이다.

특이한 것으로는 공연자 및 공연 자체가 아닌 분장 및 의상에 대한 연구가 있고... 학술문헌보다는 현장에서, 주로 지역 축제 등에 섭외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 공연팀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재생산하는지 등을 알아볼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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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0일 목요일

차별금지법 법안 유감: 보수교회 눈치보기를 중단하라

어떤 차별적 행위가 '종교의 본질적인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며, 애초에 법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공권력 입장에서 특정 종교의 본질적인 내용이 어떤지를 굳이 왜 들여다보고 판단해서 배려든 탄압이든 하려고 하나?

양심적 병역거부 진정성 판가름한답시고 취조실에서 교리논쟁 벌이는 검사들도 생각난다. 한국이 세속적 경향이 꽤 강하긴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공적 영역에서의 세속주의에 대한 인식 및 수호 의지는 정말 많이 부족하다는걸 느낀다.
발의한 이상민 의원도 차금법 꽤 오래 관심 가져 왔고 실제 추진의지가 있어서 본인이 나서서 종교계랑 타협한 거겠지만, 굉장히 근본적인 부분이 어그러진 느낌이 들어서 아쉽다. 특히 성적 지향 같은 건 거의 대부분의 실질적 차별행위가 특정 종교의 이름으로 이뤄질 텐데 정확히 그 부분을 예외로 해버리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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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종교나 전도에 평등법을 적용하지 않도록 명시한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평가된다. 해당 법안 4조 4항에는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특정한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회, 단체 또는 그 단체에 소속된 기관에서 해당 종교의 교리, 신조, 신앙에 따른 그 종교의 본질적인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행위”에 대해서는 차별로 보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 의원은 종교계와의 면담을 통해 이 같은 조항을 삽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내용은 김 의원의 법안이나 정의당 장 의원의 법안에는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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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열역학(2020-2) 수강 후기

분자열역학 기말고사가 끝났다. 유익하게 들었고 물리과에도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과목인데, 한편으론 물리과에 없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생물물리나 soft matter 쪽이 큰 학교라면 물리과에서 비슷한 게 열릴 수도 있을듯.


기체 및 액체상태의 이론은 생각보다 통합적, 일반론적으로 써 내려갈 수 있어서 되게 신기했던 반면 고분자, 전해질 등의 세부 토픽들은 한 토픽 내에서도 계속 새로운 걸 도입해서 설명해야 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 간단한 모델도 생각보다 실제랑 잘 맞네 싶은 게 많았고... 여하간 재밌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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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5일 토요일

코로나19 3차 대유행을 겪으며: 익숙함에 관한 역설

11월 말쯤부터 다시 칩거하면서 연구실에 안 가는 중이다. 3-5월에 이렇게 했을땐 밤낮도 마구 바뀌고 능률이 무척 안 좋았는데, 지금은 좀더 루틴이 잡혀가는 듯하다.


일단 시야에 핸드폰 안보이게 던져 놓으니 일에 나름 집중이 잘 된다. 일단 습관적으로 핸드폰 집어드는게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걸 자각하게 됐고... 페북이랑 유튜브도 특정 시간에만 보던지 하려고 한다.

사실 살면서 주로 그때그때 마음 가는대로 했지, 시간 재가면서 하거나, 딴짓을 의식적으로 억제하거나 해 본 적이 별로 없고 그로 인해 낭비한 시간이 무척 많은 것 같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도움이 된다는데 스스로 그런상황을 세팅할 줄 모른다고 해야되나... 그런데 재택근무를 잘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을 계기로 한번쯤 그렇게 해볼 만한 것 같다.

그리고 원래도 공상이 많은 편인데 집에만 계속 있고 정신을 환기할 계기가 없다보니 정신건강엔 별로 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근본없이 앰비셔스한 마인드만 커지다가도, 그 근거가 취약한 걸 생각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그러다 보면 좀 기분이 침체되기도 한다. 어느정도 외부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져야 사람이 에고와 관련된 막연한 생각을 좀 덜 하면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듯하다.

한편 집에만 있으니 집 환경에 신경을 좀 더 쓰게 된다. 어제 Facebook에 올렸던 뱃지 보관함도 그렇고, 장난감 올려놓을 인테리어 선반이랑 칫솔 살균기도 찾아보고 있다. 그리고 집이 너무 새하얗다 보니 뭘 찍더라도 사진각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도 최근에야 제대로 깨달았다. 어차피 오래 있을 집은 아니겠지만 일정 영역을 좀더 예쁜 색으로 해둘 방법을 고민하고있다. 보조 조명만으론 안되는 것 같다.

여하간 종합적으로 드는 생각은... 감염병은 익숙함 속을 지독하게 파고드는 재난이고 익숙함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귀신같이 그 고리에서 문제가 생기는듯하다. 그렇게 되면 일상의 회복은 더 늦어진다. 이처럼 익숙함을 수호하기 위해 그것과 계속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은 상당히 지리멸렬하고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힘들다.

그리고 나같은 경우는 사실 그 익숙함이라는 게 심리적인 것 위주에 그치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인 것이고, 일상이 회복되지 않음에 따라 매일매일 실질적인 타격을 받는 일도 아주 많다. 사회를 지탱해주는 각 부문 자체가 회복불가능하게 무너지는 걸 방관하자는 게 아닌 한 (그러면 결국 단기적으로 괜찮아보였던 영역들도 다같이 무너진다), 지금의 상황은 매일매일이 아슬아슬한 임시방편적 라이프스타일로서, 절대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지리멸렬한 시기가 당분간 계속될 것 같으니... 걱정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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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9일 일요일

가능성의 틈을 발견하기: 창의적 상상력과 지적 자제력 사이에서

 내 기준에서 그냥 그 자체로 담백하게 받아들일 만한 무언가에 과도하게(?) 매료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있었다. 예컨대 물리에서의 수학적 도구 같은 것이나, 인문사회학적 개념어 같은 것. 대화할 때 종종 부담스럽거나 오글거렸고, 지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지식을 생산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파괴력있는 뭔가를 내놓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주로 기술창업이나 예술 쪽에서 그랬지만 공부하는 쪽에서도 몇번 봤었다. 뭔가 사고에 제한이 없이 자유분방하게 상상하면서도, 어떤 형태로 갖다써야 말이 될지에 대한 고민은 놓지 않고 집요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그 결과로 나온 것들도 위에서 말한 오글거림은 줄어들고 상당히 멋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어떤 것에 강하게 매료되면, 그런 사고의 흐름 자체가 두려워서 가능한 한 억압하고 보는 편인 것 같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매료됐었는지, 과연 그럴 만한 것이었는지 계속 생각해 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안 된다는 식의 사고흐름은 발달했는데, 상상력과 창의력의 측면에서는 놓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결국 집요하게 가능성의 틈을 발견하는 건 후자의 측면일텐데, 생각의 리미터를 좀더 유연하게, 필요에 따라 조였다 풀었다 할 줄 알아야 의미있는 걸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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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7일 금요일

검찰의 판사 세평 수집: 정확히 왜 문제인가?

판사 세평 등을 수집한 검찰 문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


어제 글에서는 전례 없는 상황에 이 사안이 얽혀 버려서 함부로 무슨 말을 못 하겠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하느라, 정작 이게 정확히 왜 부적절한지 의견을 충분히 쓰지 못했다. 어제 하루 동안 여러 사람들과 생각 나눈 것을 바탕으로 이를 좀더 보충해 본다.

<목차>
- 대학 동아리의 가상사례
- 학교 시험 족보의 사례
- 검찰에 대한 일반론
- 심층진단
- 국정원의 사례: '안 들켰어야지'로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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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름 공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익혀 봤던 몇 안 되는 계기가 그나마 대학교 동아리여서 그 쪽 예시를 먼저 들고자 한다. 만약 동아리 연합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으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동아리가 동연 집행부 사람들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 같은 것을 알아냈다고 치자.

이를 사석에서 서로 슬쩍 귀띔하는 것이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동아리 내부 회의 자리에서 나온다거나, 아예 문서로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 된다. 신청서의 내용과 평가 항목 등 절차에 따른 심사가 엄연히 있는데, 편법적으로 지원금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지원금이라는 것은 용돈 같은 게 아니라 공적인 목적으로 마련돼 있는 돈이다. 동아리 외부인이 볼 것이 걱정된다는 보신적(?) 이유에서라도, 지원금을 얻으려는 준비과정에서 그런 발언이나 문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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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일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비유로 드는 건 학교 시험 족보이다. 왜 그런가 봤더니 해당 문건을 작성한 검사 본인이 그 비유를 든 것 같더라. 내가 족보에 대해 들었던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 어떤 과에서 특정 동아리 안에서만 족보 물려주는 게 문제가 되자, 과 학생회 차원에서 그걸 입수해서 모두에게 뿌린 것이다. (아마 우리 학교 얘기였던 거 같은데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난다)

이건 그 과 내에서만 본다면 분명히 일종의 정의구현(?)처럼 보이며, 실제로 인맥을 무력화한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학생회가 충실하게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원칙적으로 보자면, 학과 바깥의 제3자가 볼 때 족보라는 게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일 수 있고, 그걸 문제삼으면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게 맞다.

게다가 족보 덕분에 다들 학점이 잘 나오면(어차피 대부분 학교가 상대평가긴 할텐데 그런 디테일은 잠시 접어두고), 그 과 사람들은 다른학교 동일 계열보다 취업 등에서 유리해질 것이다. 위에서 말한 동아리 지원금이랑 비슷하게, 교육과 적절한 평가를 통해 신뢰할 만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대학교의 존재 의의를 침해해 가면서,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지 않고 높은 성적이라는 이득을 편법적으로 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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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는 동연한테 지원금을 받는 입장이고, 학생들은 교수님들에게 평가를 받는 입장이어서 비대칭성이 꽤나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문건들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물며, 이런 '없어야 하는 문건', 정상적 절차 외적인 이익을 의도하는 문건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가 공권력인 검찰이라면, 문제는 더 커진다.

그러나 공권력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 단순히 힘이 세서 그런 거면 결국 제대로 된 기준이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검찰조직에 대한 일반론으로 돌아가자. (1)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며 사법부와는 삼권분립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또한 (2) 검찰이 하는 일은 증거와 법리를 검토해 가며 재판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 검찰 조직의 존재 목적도 엄밀하게 따지면 '검사들이 재판에서 이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올바르게 구현해서 국민 일반의 법익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건 좀 전체론적인(?) 시각이고, 검찰과 그 구성원 입장에서 실질적으로는 '재판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고, 이런 목적성을 인정하되 그걸 공익에 복무시키기 위해 삼권분립을 필두로 여러 견제장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목적의 균형'이라고 내 맘대로 부르겠다. 그러나 때로는 검찰이 그런 목적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도 하다 보니 꾸준히 문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런 구조 하에서, 그런 문건을 생산하는 건 위의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법리와 증거가 아닌, 법관 성향 등을 참고해 가며 재판에 임한다면 재판에 임하는 태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이는 위에서 말한 '목적의 균형'을 명백하게 깬다.

물론 판사의 재판 스타일 같은 자료는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그 영향이 제한적이겠지만, 공권력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유죄 나오기 어려운 사건이라면 검찰이 기소를 안 하는 게 보통이겠으나, 만약 기소한 뒤 자신들이 파악한 법관의 정보를 특정한 방향으로 활용해서 무리하게 결과를 낸다면 재판 당사자들의 법익이 침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석 대화 내지는 개인 메모 같은 데에나 들어갈 얘기들이, 추미애 장관 칼자루에 걸릴 형태의 문건으로 돌고 있으며 그게 총장 선에서도 큰 문제의식 없이 용납되는 상황이었다면 이는 분명한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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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안 걸리면 끝'인 건가? 사석에서는 무한정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건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 사실 이 문제가 미묘한데, 이걸 생각해 보기 위해 국정원의 예시를 가져오자.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은 스파이를 잡거나 외교안보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때때로는 초법적인 수단이나, 바깥에 드러났을 때 문제가 될만한 수단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짐작만 할 뿐이다. 여하간 그런 게 우연히 드러났을 때 어떨 때는 감시 주체들이 용납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반면에, 어떨 때는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인터넷 덧글작업이나 검색어조작 같은 국내 정치공작이야 당연히 하면 안되는 거지만(나는 아직까지도 원세훈 시절 국정원이 잘못한 것들이 국민들한테 충분히 안 알려졌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짜 대외안보를 위해 하던 것들도 밖에 드러나서 문제가 될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쨌든 음침한 수단을 동원한 그 정도만큼 까이게 돼 있고, 털리고 넘어가야 하는 구조다.

하물며 검찰은 어떤가? 검찰의 경우 산업스파이도 간첩도 아닌 일반 사회구성원들이 많이 얽혀 있는데, 목적 달성을 위해 정석적인 절차의 바깥에 있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은 결코 떳떳한 게 아니다. 버젓이 문건으로 있는 상황과, 오래된 관행이라는 해명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아서 아쉽다.

물론 그 문건이 존재하는 게, 정보기관들이 때때로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음침한 수단들에 비할 만큼 심각한 일이냐 하면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원론적으로는 성격이 통해 있는거고, 얼마든지 더욱 심각하게 흘러갈 수도 있으므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정글과 같은 국제사회가 아니라 한국 내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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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에, 하필 지금처럼 전례 없이 칼자루를 휘두르는 상황에서 이 사안이 튀어나오면서 근거로 쓰이는 바람에 오히려 이런 식의 얘기들이 그 의도를 의심받고,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쉽다. 지난 글에서 그 어느 쪽한테도 인기 없을 거 같아서 슬프다 한 것도 그런 이유이고 말이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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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6일 목요일

검찰의 판사 세평 수집: 현 갈등국면과는 별개로 짚고 넘어가야

법무장관이 이유야 어떻든 검찰총장을 공격하는 방향성 하에 인사, 감찰 등등 해온거야 명백하고, 직무정지 사유 중 몇 가지는 궁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찾아보고 생각해 볼수록 소위 법관 사찰이라고 하는, 판사들 성향 자료 모았다는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만약에 총장이 적극적으로 한 게 아니라 검찰이 원래 해 오던 관성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파국적으로 되어 버린 지금의 국면에서 검찰총장 팔다리 자르기 위한 하나의 카드 정도로 언론 등에서 다뤄지고 말 것 같은데 이 점이 오히려 유감스러울 만큼, 검찰개혁의 원관념(?)과 닿아있고 공익적(?)으로 무척 중요한 사안같아보임.

검찰도 결국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 하는 건데 조직 내부에서 통용되는 암묵지 같은 것이야 아예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검찰이 분명한 공권력 행사의 주체인 만큼, 법관들 성향을 참고삼아서 전략을 짤 수 있도록 파악해둔 문서가 존재하고 유통되는 것은 법관들이 위협적으로 느낄 수 있고, 나아가 재판 당사자들의 법익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그런 문건 자체가 존재하면 안되는 성격의 문건이다. 게다가 문제가 된 그 특정 문건의 경우는 생산과정 중 일부가 양승태 대법원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는지라.... 만약 검찰이 관행처럼 해오던 것의 연장선이라면, 검찰총장이 컷하고 끊어내는 것이 원칙상 맞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전달을 지시한것은 분명 잘못된 처사이다. 그리고 그런 부적절한 관행의 대표사례인, 수사정보가 언론에 흘려지는 것도 그동안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지난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검찰개혁 기치가 무색해졌다는 여론에 있어서 원론적인 무한책임 이상으로 정부여당이 실질 책임이 있다고 보는 편이다. 해석이야 어떻든, 일단 검찰개혁의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 전방위적 검찰수사의 당사자가 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상술했듯 검찰이 기계가 아닌만큼 그 수사에 어떠한 의도와 판단도 작용 안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문제되는 사안들이 지나치게 많았는데 임명이 강행된 점이 있고 부적절한 옹호 역시 많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때의 극단적인 국론분열이 정치쟁점화되면서 검찰개혁의 내용에 대한 갑론을박이 실종된 게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봐야겠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식의, 검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정말로 중요한 이슈가 묻히는 것 같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도 그 내용이 어렵다보니, 여러모로 직관에 소구하는 자극적인 면이 많았던 박근혜 청와대 내부 일들에 비해 관심을 못 받았었다. 이번에도 하나하나씩 고쳐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 지나치게 비장하게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면서 오히려 설득이 덜 되는 느낌이 있다.

물론 검찰쪽의 반발이 극심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을테다. 확실히 전형적 공무원 집단과 다른 검찰 특유의 문화라는게 있기는 한 것 같고, 그것이 검찰 본연의 역할과 소위 화학적 결합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중에 필요한 것과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논쟁은 필요하겠다.

쓰고 보니 정말 누구에게도 인기 없을 듯한 소리 같아서 슬프긴 한데, 여하간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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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2일 일요일

경계에 선 시민참여 저널리즘: 퇴행인가 대안인가

오마이뉴스가 그 모토에서부터 드러나는, 일반적인 저널리즘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긍정적인 쪽으로 가져갈 수 있으려면 목수정 작가의 이번 글과 같은 기사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고민이 필요할 때다.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전세계적인 화두이고,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인 줄 알았던 음모론이 거시적인 정치세력의 응결핵이 되어 정국을 구체적으로 들었다놨다 하는 시대다.

특정 사건에 대해 정권이 석연치않은 대처를 하면서 사실관계를 불명확하게 만들 때 생겨나는 각종 의심들 중에서 음모론이 섞여 들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헛발질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구태여 발굴해서 조롱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 구분이 모호한 상황에서 나를 포함한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사안에 대해 이미 프랑스 현지에서도 거짓임이 확인된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걸러내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일반 언론과 차별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도 퇴행적인 것에 불과하다. 설령 좌파적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하더라도 극우 음모론과 그다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물론 기성 언론에서도 교묘한 왜곡보도와, 사실확인이 안된 채로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보도를 통해 공익을 해치곤 하며 이런 저널리즘 역시 문제적이다. 그러나 가짜뉴스 및 음모론의 생산기제는 아직까진 그런 것들과 나름대로 구별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마이뉴스의 특별한 저널리즘은 독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면서 그런 최후의 경계마저 흐릴 것인가? 아니면 정형화된 언어 속에 프레임을 숨겨두는 행태에서 벗어난 담백하고 개성있는 저널리즘을 통해 성공적인 대안으로 꾸준히 기능할것인가? 앞으로는 후자와 같은 날카로운 시각의 기사를 더 많이 보게 되기를 바란다.

(Facebook 페이지 '오하이오의 낚시꾼'의 게시물(링크)을 공유하며 추가한 코멘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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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4일 토요일

여기는 종교법정이 아닌 세속법정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대체복무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 헌법불합치라는 헌재 판결이 이뤄졌고 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대체역도 신설되어 2020년 10월부로 첫 소집되었다. 그러나 진행중인 병역거부 사건들에서 신념의 진정성을 다툴 때 검찰이 사용하는 주된 논리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잘 부합하지 못하며, 병역거부자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 인식 역시 헌재 판결 이전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 논리의 저변에는 특유의 어떤 관점이 깔려있다. 그 정체를 논하기 위해 아래에서는 병역거부자의 신념을 종교에 비유하여, 검찰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마치 세속재판이 아닌 종교재판처럼 임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그러나 이는 단순 편의상의 비유이며, 양심적 병역거부는 근본적으로 특정 종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신념, 단순 보이콧 등 무엇에 의해서도 될 수 있어야 함을 미리 밝혀둔다.

또한, '현역 입영자들이 비양심적인 것인가?'라는 흔한 반발은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는 양심의 자유에 따른 병역거부를 *남들보다 양심적이어서 하는 병역거부*로 혼동해서 일어나는 단순오류이며, 헌재 결정요지문 본문에도 무려 맨 처음 단락에 이 내용이 설명되어있다. 이전에도 밝혔듯 양심적 병역거부의 반댓말은 *비양심적 병역이행*이 아닌 '양심적 병역이행' 정도로 보아야 한다. 물론 제도의 취지를 착각해서가 아니라 거부자들의 신념을 선민의식이라고 판단해서 위와 같이 반발할 수도 있으나, 그 경우에도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므로 해소 방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검찰이 사용하는 논리의 두 개 축 중 첫번째는 FPS 게임 하지 않았냐는 것으로 대표되는, 신념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증거의 발견이다. 병역거부에 대한 기본적인 여론도 좋지 않은데다 이런 경우는 '선택적 양심발휘'이라는 조롱섞인 비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논리는 직관에의 소구가 굉장히 강력하고 병역거부자 개인을 숭고하지 않은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신앙심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탄에 따른 소위 '나이롱 신자' 걸러내기에 해당한다. 인품과 생활양식에 대한 이러한 판단이 병역거부의 유무죄를 가르는 세속법정에서 핵심쟁점이 될 수는 없다. 거부자 개인 및 그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내적으로 참회할 일일 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신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진술 및 일관된 실천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이 품행과 생활에서의 미비는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하지 않은 한 병역관련 신념의 진정성을 반증하기는 어려우므로, 후술하듯이 이에 대해선 비교적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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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자를 대하는 논리의 두번째 축은, 그의 신념 자체가 내적 일관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일관성을 따를 때 그 신념이 유효한 효과를 발휘하는지 평가하려는 태도이다. 최근 읽은 임재성 변호사님의 사례(검사가 피고인에게 군대의 필요성과 평화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쟁하려 함. https://www.facebook.com/jaesung.lim.182/posts/4046959075330964)도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교리논쟁'으로, 비유하자면 신이 있는지 없는지, 만약 있다면 어떤 형태로 있는지를 다투겠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신학자들끼리의 논쟁 혹은 이단심문 같은 종교재판에서 할 일이지, 세속법정에서는 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만약 어떤 신념이 완전히 일관적인데 심지어 현실적으로도 유효하다면, 그런 성공적인 신념체계를 만들어낸 사람은 거의 성인으로 추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렇듯 내가 아는 한 모든 신념은 불완전하며, 철저하게 일관적으로 추구되었을 때 내부 모순이 드러나거나 유효성을 잃는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심문은 근본적으로 그 누구도 통과할 수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서, 그 양심이 마치 어떤 공표된 학술적 주장인 양 (설령 그렇다고 해도 공권력이 논쟁에 개입하는 건 여전히 이상하긴 한데) 정합성과 유효성을 논쟁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개념 자체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양심 자체는 공권력이 인정하거나 기각하는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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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을 갖고 있다고 해서 현역 징집이라는 강제력에서 예외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이견을 가지고 논해 볼 수 있다(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양심의 자유가 수호된다고 결론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든, 그 논의의 과정은 늘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신념은 행위의 일관성과 합리성 같은 것이 정황적으로, 보충적으로 작용해서 증명하는 것일 뿐 신념의 내용 자체를 둘러싼 논쟁을 핵심쟁점 삼아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근본적으로 신념이라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 강한 의미로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양심의 자유에 있어서 중요하다.

이처럼, 신념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자, 통과!' 해서 대체역으로 갈 수 있는 방식은 양심의 자유라는 가치와 결이 맞지 않다. 따라서 신념의 진정성에 있어서는 신념의 내용 그 자체를 두고 종교재판처럼 다투기보다는, 신념이 드러나는 지속적인 실천의 존재와 진술 등을 중심으로 보면서 비교적 포괄적으로 인정해야한다.

그 대신 대체역을 어떤 평화적 봉사 부문에 투입할지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웬만큼 진정성 있는 신념이 아니면 대체역을 선택하지 않도록 유도하여 병역기피를 예방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단순 징벌적인 것이 아닌 엄연한 공익적 가치에 기여하는 대체복무로 인식되도록 제도운영 및 사회적 인식제고를 해야 한다. 교도소에 근무하도록 한 것도 그 고민의 산물일 것이다. 아무튼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인식이 변하고 그것이 병역거부 판결 및 대체역 제도운영에 반영되려면 사례도 축적되어야 하고,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한 지속적인 교육과 연수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역이 아닌 현역징집병들의 처우 역시 대폭 개선되고 병역이행이 다변화되어야 한다.

한편, 한동안은 대부분의 병역거부자들이 실질적으로는 특정종교 신자들일 것이다. 해당 종교는 병역뿐만 아니라 수혈거부와 같은, 동료 시민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교리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당 종교 신자들만이 현역징집의 합법적인 예외라는 인식(그리고 현실)이 생겨 버리면 이들은 공동체적인 책임을 분담하지 않는 하레디 같은 집단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서두에서 밝혔듯 병역거부는 해당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실제로 외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례를 포함하여 가장 유명한 병역거부자들 중 일부가 이미 비종교적 거부자들이기도 하다.

해당 종교집단의 하레디화를 방지함과 동시에, 모든 병역거부자들이 '다양하면서도 통합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려면, 해당 종교 외에도 위와 같은 다양한 사유의 병역거부가 알려지고 활성화되어야 하며, 특정종교임을 전제해서 관행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도 일부러라도 보편적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비교적 잘 되어있으나 현장에서와 대중적 인식상으로는 아직 미비하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대체역의 원활한 정착을 위해서는 법조영역의 판례 축적 및 인식변화를 중심으로, 사회 각 부문에서의 총체적 노력이 함께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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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3일 금요일

재능과 노력에 관한 소고

별다른 교훈(?)은 없고 재미로 써보는 학창시절 얘기.


중고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누구는 재능이고 누구는 노력파라는 식의 설왕설래가 꽤 있었다. 나는 공교육과 사교육에 널리 걸쳐있는 소위 영재교육(?) 클러스터에 다소 뒤늦게 진입해서 나보다 훨씬 앞서나가는 아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에 상당히 과몰입하게 된 편이었다.

또한 그런 것들이 사람 성격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문자 그대로 공부 방식에 대한 얘기로 받아들였고, 그땐 그게 나한테 더 중요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특히 더 신경썼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나는 노력파 이미지로 종종 패싱되었는데(특히 중학교 때) 그게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위에 말했듯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할 때 반쯤은 실제 공부 습관에 대한 거였겠지만, 또 반쯤은 평소 성격을 보고 이미지화한 것 아니었겠나. 그런데 성격상 머리속의 착상을 적재적소에 짠 하고 꺼내놓기 어렵다보니(난 이게 의도하든 안 하든 일종의 쇼맨십 같은 면이 있다고 본다), 소위 천재 이미지를 갖는 데 있어 핸디캡을 깔고 가는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남들이 아예 모르는 뭔가를 가져와서 풀면 뭔가 대단한 취급을 받기도 했는데, 나는 어머니가 교사셔서 그런지 학교에서는 학교 것만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정석이나 학원 교재 꺼내면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또한 어려운 거 해서 멋있어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고, 내가 하면 위화감이나 조성되고 말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노력파에 씌워져 있는(혹은 나에 대해 내 맘대로 만든 것일 수도 있는) 은근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다. 사실 노력을 안 해도 문제가 풀리면 굳이 노력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천재가 노력파보다 기본적인 우위를 깔고 가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솔직히 수학문제를 막 애써서 푸는 것보다는, 고민 좀 하다가 한번의 착상으로 간단히 푸는 게 더 멋있어 보이지 않나.

그런데 나는 내가 하는 노력이 흔히 말하는 루틴한 노력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와 재미에 기반해서 지식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공부한 게 노력이라는 단어로 평면적으로 비춰지는 데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사실 순전히 기계적인 노력이라는 게 어디 있겠나. 다들 각자마다의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지식을 처리할 것이다. 고등학생쯤 되고 공부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그런 각자마다의 처리방식을 자연스레 들어보고, 배우기도 하면서 이런 종류의 생각은 조금씩 해소되어 갔다. 또한 내가 꼭 우직한 노력파로만 보이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적분 같은 교과과정 수학과 달리 기하니 정수니 하는 경시수학은 아무리 해봐도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걸 잘 하는 친구들을 보면 진짜 머리가 좋은 게 있긴 하구나 싶기도 했다. 필요한 도구를 차근차근 익혔으면 좀더 잘 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그래도 못 했을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뭐 내가 더 하기 싫어서 안했으니 미련은 없다.

요약하자면 재능이니 노력이니 하는 남들의 잣대가 평면적이라고 생각해서 불만을 가졌지만, 사실은 반대로 내가 가진 관점이 평면적이었기 때문에 안 가져도 될 불만을 가졌던 게 아닐까 한다. 총체적으로 보고 대범하게 생각하면 좋을 텐데 시야가 좁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학에 오고 나서도 내가 범접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무척 비범한 성과, 혹은 아예 몰랐던 카테고리의 성과를 발견하면 위와 같은 사고방식이 발동돼서 종종 큰 부러움이 생기곤 했다. 그런데 그 부러움을 촉발한 사람과 운좋게 가까워지고 얘기를 많이 듣다 보면, 아 저게 어떤 종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거구나, 얼만큼 시간투자를 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이해가 되면서 비로소 그 사람이 좀 사람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여러번 겪은 게 나한테 꽤 많은 도움이 됐고, 가끔씩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발을 딛어 보기도 했다.

여튼 이런 과정을 통해 실력이라는 것의 정체를 무협지스러운 과몰입에서 약간은 벗어나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터넷이나 SNS 등에서 오가는 지능에 대한 설왕설래를 보면서 느껴지는 오글거림도, 사실 그것들에서 나한테 깊이 자리잡은 사고방식이 거울처럼 비춰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꼭 과거의 일만도 아닌 게, 매력적인 지적 성과물을 볼 때 그러한 사고방식이 다시 작동하는 경우도 여전히 많다. 이러한 쪼잔한 과몰입과, 지식추구에 대한 자의식 과잉이 공부하는 동력에 있어 한가지 축을 이루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이를 잘 통제해 가면서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활용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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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당헌개정 투표 관련: 구체적인 반성적 실천이 전제돼야만 한다

 당 소속 지자체장이 부정부패 등의 잘못으로 사퇴한 경우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조항은 애초에 없는 게 나았을 포퓰리즘적인 조항이라고 전에 이야기했고(링크)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이번 당원투표에 대해서는 복잡한 마음이 있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 뼈를 깎는 쇄신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그걸 전제로 후보를 내는 게 당원과 국민들에 대한 도리 아니겠나. 잘못된 조항이라는 데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지만, 신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없어온 상태에서 진행되는 이번 당헌개정에 선뜻 손가락이 향하지는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서, 벌써 광역단체장만 몇 번째인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해온 정치인들도 결국 보좌진들에게는 모셔야 할 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이었고 그러한 권력은 업무를 넘어 개인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성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해당 지자체장 개인들의 문제에 의한 일회적 악재로 치부하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옹호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갑질과 권력형 성폭력에 취약한 정치환경의 근본적 문제로 인식을 하고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음을 입증해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

박시장 사건 이후 필요했던 대응은, (1) 의원들과 당 소속 유명인사들이 공공연히 2차가해성 발언을 하는 것부터 강력하게 제지하고 (2) 정치활동 및 보좌의 과정에서 권력형 성폭력과 갑질에 대한 인식제고, 예방, 올바른 사후대처가 가능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3) 권력의 축을 불가역적으로 여성정치인들이 많이 획득하도록 하는 등 체질을 근본적으로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전제된 채로 당헌을 개정하고, 여성후보를 공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얼마든지 지지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듯이) 그런 구체적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고 막연한 사죄와, 공공연한 2차가해성 발언들만이 떠돌고 있다.

후보공천은 책임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반성적 실천에 근거하지 않은 공천은 책임이 아닌 뻔뻔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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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트루스포럼은 비겁한 학내 행보를 중단하라: 추적기사를 소개하며

 트루스포럼이 학내단체 코스프레 하는 것과 달리 연령대가 높고 외부단체에 가깝다는 점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지만(특히 와 이정도구나 했던 게 댄디 보수라고 하면서 자유의새벽이랑 같이 조선일보 탔을 때), 매거진닷킴 박도형 메신저의 이 유익한 연재기사(링크)에서는 그 전모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취재하여 밝혀두고 있다.


트루스포럼은 든든한 자체 네트워크를 통한 자금지원이 있음에도 학생자치공간을 무단으로 사용해왔고, 심각하게 차별주의적인 대자보 및 지속적인 인권가이드라인/인권헌장 반대 운동으로 캠퍼스를 안전하지 못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정상적인 학내단체가 아님에도 학내 보수단체로 조명받으면서 캠퍼스가 비정상적 방향으로 외부의 주목을 받게 해왔다. 최소 4년간 적절하게 제지되지 못하고 계속 노골화되어 온 트루스포럼의 이러한 비겁한 행보는 학생 구성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겠다.

특히 보수교회 및 정치판을 넘어, 학술영역을 포함한 이곳저곳에 트루스포럼 류가 서울대 교수들을 끼고 이미 진출해서 강연도 하고 그러는 것 역시 이번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들 세력이 미국의 일부 음모론적, 반사회적 극우개신교세력의 논리를 대체로 따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현상이 일시적일 것 같지는 않다. 미국만큼 보수교회가 도미넌트한 나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욕을 잃지 말고 싸워야 하겠다.

덧붙여 트루스포럼의 오렌지연필 양포재단과의 밀접한 관계도 지리적 이유 등으로(?) 어쩌다 생긴 것이 아니라, 김은구 대표의 문화계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굉장히 뿌리깊은 것이라는 점도 이 기사에서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학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학내만의 문제였던 적이 없다. 이들이 학교의 유뮤형 자원을 비겁하게 활용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받고 있음에도, 학생 구성원들이 대응하기에는 버거운 크기의 일이기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다. 그러나 정파를 떠나 우리 학교가 차별주의적, 반지성주의적 담론의 총체적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데 성공해야 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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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9일 금요일

육군훈련소 인터넷편지 축소개편 시도 유감

찾아보니 진짜네. 육군훈련소 인터넷편지가 140자의 응원메시지로 변경된다고 한다. (기존에는 1500자, 사진첨부 가능)


군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유가 상당부분 제한된 채로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가 생길텐데, 그런 환경에서 인터넷편지는 사회와의 거의 유일한 연결고리이고, 실제 훈련병들한테도 많은 힘이 된다고 한다. 무슨 전면전 상황이 아닌 한, 시간과 인쇄용지가 많이 쓰이고 업무량이 많다고 해서 이렇게 바꿀 성격의 일은 아니다.

군 복무환경이 대체로 개선되는 와중에 이런 퇴행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있으면 다른 방식을 도입해서 해결하던가 해야 하는데 이런 건 전형적인 한국군대식 하향평준화 해결법이다. 애초에 수많은 사람을 징병하는 만큼 그에 걸맞게 이런 걸 원활히 지원가능한 여건을 갖추어 놓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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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각계의 비판 및 전용기 국회의원의 관심 등에 따라 해당 조치는 1-2주만 시행한 뒤 철회되었다고 함. 전용기 의원 Facebook 게시물 보기: 링크)

2020년 9월 25일 금요일

공무원 피격사망 관련

해상 표류중인 우리 공무원을 북한 측이 사살한 것에 대해 이례적인 사과를 받은 것은 다행이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건 경위에 대해서도 북한이 밝혀온 것과 국방위에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아귀가 여전히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첩보자산 노출 등을 감안할 때 국민들에게 어디까지 밝힐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진상조사 자체는 철저히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정부 및 군의 대응과정에서 의구심이 발생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밝힐 수 있는 선에서 국민들에게 가능한한 소상히 설명이 필요할것이다.


첩보 종합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보고가 늦게 되었다는 등 나름의 설명들이 단편적으로 보도되기는 했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런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때 보호를 위한 액션이 빠르게 적절히 취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두려움이 생긴게 사실이다. 종전선언 어쩌고가 모양 빠지는 일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건 이쪽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지자들도 사과에 과도하게 고무되거나, 어차피 본인이 월북한거 아니냐면서 (국방위 쪽에선 어느정도 납득할 만한 근거들이 오간 것 같지만 아직 국민에게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월북 확신할 근거도 없는데) 사망한 당사자를 탓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체적인 북측영역 진입 경위 등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국민 생명 보호가 안 된 게 사실인만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공식 입장에서도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고 고개숙이고 시작했는데, 지지자 일각에서 피격에 따른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은 어느새 안중에 없이 발언하는건 인간적으로 자제가 필요해보인다.

그리고 공식 발표와 무관하게 기관 관계자가 한두 마디 언론에 흘리는 모습이 이번에도 역시나 보이는데(아마 월북 확실시 발언도 국회 국방위 말고 정부부처쪽에선 처음에 그런 루트로 나온걸로), 이게 전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 같고, 각 기관의 의도에 따른 것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말이 바뀐다고 욕이나 더 먹지. 덜 검증된 정보, 나가면 안 될 정보가 계속 나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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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4일 목요일

팀 아짐키야: 신기함의 이유와 욕망의 정체

유튜브에서 '가상 해외반응'에 이어 또 다른 기괴한 한국적 장르를 발견했다. 한국어로 된 시덥잖은 문장을 이메일로 신청하면 방글라데시 현지인들이 마치 원시사회에서의 ritual을 연상케 하는 복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그것을 크게 읽어 주는 것인데, 덧글창에서 사람들이 이를 즐거워하는 지점을 보면 '가상 해외반응'에서 집약되어 드러났던 두유노적인 인정욕구를 넘어선 제국주의적 욕망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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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2일 토요일

헬리콥터 사회를 질타하기 전에 우리가 되짚어야 할 것

 이 글은 성장 중인 매체 매거진닷킴(https://www.magazine.kim)에 기고되었습니다. 실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꾸준한 성장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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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임에도 학부모 단톡방이 존재한다는 소리에 의대생들이 조롱을 받는 모양이다. 그런 반응들은 표면적으로 비웃음이지만, 그 네트워크가 효과적인 재생산의 도구로 기능할 거라는 데서 오는 묘한 씁쓸함도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아예 다른 얘기긴 하지만, 비록 성인들이지만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보호해야 마땅한 집단도 필자의 생각엔 분명히 있다. 바로 군대에 가 있는 병사들이다.

군인이 겪는 여러 제한과 압박 중에 ▲군대의 특수성에 의해 요구되어 마땅한 부분과 ▲그렇지 않고 허용해줄 수 있음에도 안 해 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 한국군 병사들이 겪는 것 중 후자에 해당하는 게 꽤 많다는 데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대표적인 게 최근에야 해결된 핸드폰 소지다.

병사 개인이 그런 걸 구분해서 요구하기 어렵다. 사회 초년생이라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다는 것도 틀리진 않은데, 좀 더 근본적으로 상명하복 질서가 생활 전반에 매우 내밀하게 파고들어 있는 군대의 구조 때문에 그렇다고 봐야 한다.

군에 대한 민간감시 차원의 여러 공적 제도를 병사 개인이 직접 활용하기 근본적으로 어려운 이러한 환경은 분명히 보완이 필요하다. 개인의 신뢰할 만한 대리자로서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군대는 이들의 요청에 대해 지금보단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군사적 기밀 유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 보신과 사건 은폐를 위해 병사 가족들한테까지 고압적 비협조로 일관하는 일이 그동안 많지 않았나.

물론 이게 생각대로 제대로 안 돌아갈 가능성이 무척 높다. 부모가 자식을 챙기는 건 사적인 것이며, 공적 보호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군대에 대해 병사 부모들이 지나치게 많이 개입하게 되면, 대리인으로서의 부모들이 다 같이 합심해서 병사들의 권리 일반을 공적으로 챙겨주는 것보다는, 권력 가진 부모들, 싸울 줄 아는 부모들의 사적인 제 자식 챙기기로 흘러갈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러면 이게 요즘 비웃음 받는 의대 부모 단톡방과 대체 뭐가 다른가? 바로 당사자들이 기본권을 근본적인 수준에서 제한받고 있으며, 그에 대해 국민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해명하고 조정해야 할 군대라는 조직이 수십 년간 뻔뻔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술한 부작용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군대와 관련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저런 게 지금보단 활발히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적 토양에서 그런 부작용은 어느 정도 선에서 관리될 수 있어 보인다.

자녀의 학교 생활 및 입시에서는 물론이고, 직장 생활 등에까지 나서서 좌지우지하려 드는 '헬리콥터 부모'가 군대에서까지 사적인 부탁으로 악영향을 주는 것을 경계하는 의견도 물론 정당하다. 따라서 거창하게 말했지만, 필자가 얘기하는 건 사실 상식적이다: 사적으로 챙겨달라고 청탁하는 건 금지하되, 공적인 보호장치 및 민원창구는 확대해야 한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구분이 모호한 게 난제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최근 이슈를 하나 더 꺼내지 않을 수 없다. 현 법무부 장관이 당 대표 시절, 아들의 군대 휴가 미복귀 관련해서 챙기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에 대한 논란이다. 아들 서 모 씨의 휴가 미복귀가 원활히 처리된 것이, 위에서 언급한 '특수성에 의해 요구되면 안 되는 부분'에 해당하는지 '허용해 줄 수 있는 부분'에 해당하는지 필자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진실은 많은 카투사 병사들이 그런 사례는 자기 경험상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진술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사례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사안은 간단하다. 부당한 영향력 행사이다. '허용되지 말아야 할 일이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에 해당한다면 얘기가 좀 더 복잡해진다. 물론 부당한 영향력 행사인 건 변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일반인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데, 소수에게만 허용된' 것이 문제라는 점에서, 비판을 위해 필요한 단계가 위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지위에 의한 특권 행사의 방식으로 기회의 부족을 극복할 때, 그 개인 차원에서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획득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남들이 따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그런 획득과정은 공적이지 못하기에,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기회의 보편적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그 특권 행사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적 논의는 오히려 축소되므로 국민 전체의 권익은 도리어 침해된다. 특수한 루트를 통한 권리획득이 나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를 휩쓴 조국 교수 자녀 논란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인턴을 제대로 안 하고 1 저자로 실렸다는 것, 그리고 표창장을 허위로 발급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인턴을 할 기회 자체는, 많을수록 좋고 일반적일수록 좋다. 그런 공식적 루트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적 연락에 의해서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기회가 존재했던 것은 분명히 문제적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어때야 할까? 그런 기회들을 없애는 것보다는, 그런 기회들이 실질적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하게 확대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본다. 조국 사태가 그런 '수시스러운' 기회들의 보편적 확대가 아닌, 수시 축소와 정시확대라는 정반대의 결론으로 이어진 것을 필자가 무척 반동적이라고 보는 이유이다.

군대 문제에서는 저런 것이 일상이다. 누군가가 어떤 과도한 제한사항을 특권적으로 극복하면, 사회는 그 제한사항 자체에 대해 재고하기보다는 특권 행사를 욕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은 사회의 당연한 속성이며 나는 이걸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 제한사항 자체를 논할 창구가 점점 좁아지는데, 군대라는 조직은 이런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를 기회로 삼아 극복의 여지를 아예 차단해 버리며, 그에 대응할 당사자들의 정치적 결집력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말하는 필자 역시도, 자기 혼자만 빠져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그 특권적 개인을 욕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참으로 유감스럽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현역 군인들의 휴가 관리만 더 빡빡해지고 끝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예측하는 군필자들이 많다. 병역과 관련해서 특혜 논란이 생겼을 때 이렇게 하향평준화식 대응으로 모두가 피해를 보는 일을 막으려면, 군대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의 구체적인 문제점과 그 해결책에 대한 담론이 상시적으로 있어야 한다. 여당의 몇몇 의원들이 이번 논란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되려 분노를 자극하는 발언을 했는데, 군대가 왜 이토록 민감한 문제가 되었는가를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특정인이 특혜를 받았는지의 여부만 논의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높은 현역판정률, 사회 진출이 늦어지는 데 따른 불안감, 그리고 권익 침해가 만연한 군복무 환경 같은 것들도 공적인 논의의 주제가 되고 정치인들의 관심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