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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8일 화요일

국립현대미술관 2021 올해의작가상 관람

북촌 한옥마을을 산책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21 올해의작가상 수상작들을 관람했다.


오민 작가는 예전에 다른 작품으로 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사물들의 끊임없는 재배열이라는 수행을 통해 음악의 형식과 그 창작행위를 모사하고 표현하는 비디오작업이었다. 오늘 본 《헤테로포니》는 악곡의 형식보다는 아마도 한단계 더 직관적인 차원에서, 음향이 발생하고 통제되면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종합되는 과정을 전시실 전체 규모에서 체험할수 있는 대형 작품이었다.


땅과 인간의 관계로 기술되는 문명사, 그리고 그 속에서의 소유개념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최찬숙 작가의 두개의 작품(《60호》, 《qbit to adam》)도 인상깊었다. 《60호》에서는 dmz근처 100여개의 선전용 마을이라는 경계지대의 사람들을 미시적으로 조명하는 리얼리즘적 작업을 그 배경이 되는 거시적 국제관계와 병치하면서, 일상을 규정하는 제도의 힘이 극대화되는 공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같은공간의 《qbit to adam》에서 제시되는 땅과 인간에 대한 빅히스토리(?)와 또 한번 엮이면서 좀더 근본적인 통찰로 나아간다는 느낌을 준다.


선과 면이 조형되는 방식에 대한 순수미술적 사유와, 사회적 의식을 절묘하게 결합한 방정아 작가의 회화작품들 《흐물흐물》도 흥미로웠다. 각기 다른 문제를 단일 원인으로 엮어내는 방식에는 개인적으로 꽤 회의적이지만 시각적 압도감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형회화의 힘에는 충분히 공감할수 있었다.


올해의작가상을 보고 나서 문경원, 전준호 작가의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현대차 시리즈)도 관람했다. 대성동 마을을 소재로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두 영상물이 서로 등지고 상영되는데 연출의 디테일과, 모호하지 않고 무척 선명한 촬영에서 마치 케이팝 뮤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 영상 중 한쪽은 과거, 한쪽은 미래인데 어떤 단서로 연결된다는 점도 뭔가 케이팝같았다... 음향과 조명을 상당히 잘써서, 한쪽 영상을 보면서 다른쪽 영상이 어떤 상황일지 상상하게끔 하는데 작가의 의도가 매우 높은밀도로 깔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전시실이라는 공간과 결합하여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전시되면서 의미가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자료를 시공간상에 적절히 배열하여 일련의 경험을 제공하는것 자체가 미술적인 작업이 됨을 상기시켜주었다. 이는 심지어 오늘 본것중 전통적 의미의 미술에 가장 가까운 방정아 작가의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부때 전시예술공학이라는 인기강좌가 있었는데 못들어봐서 아쉽다.


한옥마을에서는 예쁜 이태리음식점 플로라에 갔다. 거의 3-4년만에 다시 왔는데 예나 지금이나 메인식재료를 임팩트있게 내세우는건 만족스럽지만 가격대비 맛은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블루보틀에도 처음 가봤다. 기와의 바다 같은 2층뷰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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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좌/우파가 적정기술을 전유하는 방식, 그리고 운동권 동아리의 추억

학부 1학년 때 적정기술 동아리라고 된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연락해 보고 갈비탕도 얻어 먹었는데 알고보니 민족주의 성향 운동권 동아리였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른 동아리에서도 꽤 오래 활동해서 학생사회에서 이름 자주 보게 되는 분이더라.


그분이 그 단체 이름으로 적정기술 대회도 참가한 기록이 있는걸 봐서 아마 그당시 실제 개인적인 관심사랑, 본인이 해 오던 (협의의)정치적 활동이랑 엮어서 겸사겸사 단체 운영한 게 아닐까 생각됨.


내가 알기론 적정기술이란 게 백그라운드가 꽤 복잡해서, 공학 및 국제협력 부문의 제도권에서도 밀어주는 등 '불온하지' 않은 자본주의질서 속에서도 꽤 히트를 쳤지만, 사상적인 면에서는 미국의 래디컬한 경제적/문화적 좌파 쪽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지고 좌파적 근거를 정립하려고 했던 개념임. 물론 반대로 적정기술이 우파와 잘어울린다는 시각도 많고. 아무튼 그런 맥락까지 의도 된것인지(혹은 그런 관심과 정확히 동일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런걸 생각해보면 재밌긴 하다.


그 동아리에서 사과모랑 같이 우희종 교수 강연도 개최해서 거기에도 한번 감. 대중적으로는 4대강 반대랑 더불어시민당 대표로 잘알려진 분인데 당시 강연 주제까지는 잘 기억은 안 나고... 암튼 소위 말하는 운동권 동아리구나 하는걸 이때 확신을 했다. 교수님인데 그런 자리에 온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암튼 위에 말한 밥 얻어먹은 거랑 이때 강연 간거 말고 여기서 뭔가 더 한 기억은 없음. 적정기술 궁금해서 들어갔는데 관련해서 뭔가 알려주는것이 없으니...


그런데 내 기억이 맞다면 몇년 뒤에는 그 동아리가 이름을 그대로 두고 적정기술이 아니라 아예 다른 테마로 바꾼 포스터를 봤었다. 역시나 조직은 따로 있고 동아리형태로 걸어두고 홍보 하는 거구나 하는 느낌이 확 들었다.


여하튼 이쪽은 짬이 있는만큼, 정돈되고 확실한 기조가 있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실력, 정치적으로 각재는 실력 자체는 아마추어리즘 종종 내보이는 반운동권에 비해서 뛰어나다고 본다. 그렇지만 동아리에 걸어두는 활동내용 말고 진의도, 조직도 따로 있다는 느낌때문에 마음편히 대하기는 어려웠다고 회고해본다.


운동권이 축소되면서, 거기서 나온 소스들을 아예 탈색시켜서 학생자치활동에 활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혁투가를 학과 특징에 맞게 재밌게 개사한 과가라던가) 그런경우는 정치적인 색채나 의도는 전혀 없는경우가 많다. 실제 옛날과의 연속성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남아있지만 활동방식은 여전히 다소 은밀한 민족주의 좌파 조직들과의 대조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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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8일 수요일

최신의 text-to-image generation 모델들: archetype에 대한 창의적 재조합자의 출현

페친분들이 올리셔서 알게된 https://app.wombo.art 라는 사이트에서 text-to-image generation을 직접 해 볼 수 있다. 아무 문장이나 넣으면 상응하는 그림을 그려 주는데 창의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무척 잘 해 준다. 지금까지 봤던 여러 신기한 AI 필터들이나 GauGAN 같은 것들에 비해서도 격이 다른듯...


그리고 진짜 이게 될까 싶은것도 척척 알아듣고 그려주는데, 기존에 학습된 오브젝트들만으로 하는게 아니라 즉석에서 구글링을 해서 뭔지 찾아내는 방식인 것 같음. 그것들을 가지고 기존에 없던 조합들까지 잘 표현해 준다는 것도 강점이고.


몇가지 잘된 예시들을 첨부한다 (하단 Facebook 게시물 링크). 대응되는 지시문은 각 사진 하단에 써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인터넷상에 형성해 놓은 어떤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공통적 archetype을 얘가 뽑아낸 뒤에 재조합해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의 퀄리티로 실현된 기분임.


뭔가 상황을 표현하고 싶은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 얘한테 시켜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거나 할 수도 있을 것. 그 전에 이걸로 이것저것 해보는 것 그 자체가 재밌기도 하고... 다만 해보실 분들이 주의할 점은 사람과 관련된 건 주로 징그럽거나 선정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아서 비위가 상할 수 있음. 첨부한 결과들도 사람에 따라 징그러울수 있긴 하다.

인공지능이 이미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의 조수로서의 머신러닝에 특별히 많은 흥미와 기대를 갖고 있는데, 이런 방향으로 재밌는게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 2022.05.28 내용추가: 그리고 요즈음은 diffusion model의 급격한 발전으로 이것보다 훨씬 선명한 이미지들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모델 크기와 학습 시간의 이슈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state-of-the-art에서 디퓨전 모델이 줄세우기를 하고 있는데 내 전공분야인 통계물리학에서 비롯된 모형이 머신러닝 커뮤니티에서 최전선에 쓰인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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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유를 훼손하는가? 도그마와 정설을 구분하자

어떤 분야에서 이미 자유로운 토론의 결과로 확립된 정설이 있을 때, 그걸 뒤집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이 의심을 하면서, 그 정설이 부당하게 권위를 취하고 있다며 의심할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진화 부정을 비롯한 각종 유사과학이 대표적이다.


잊을만하면 중앙 정치무대에 소환되지만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5.18을 둘러싼 극우적 발언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주로 합리성과 냉철함을 내세우지만 그 논리적 구조와 정치적 지위는 상술한 숱한 유사과학 및 음모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5.18에 대해 역사적으로 확립된 평가를 대놓고 부정하는 경우는 은근히 드물며,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인정한다고 주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의심할 자유 그 자체를 계속 외친다. 이 말대로면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알 수가 없는지라 사실 더 이상하다. 실제로 어떤 의심을 품고있지만 말하지 않고 있거나, 정설이긴 할지라도 그것이 헤게모니를 차지하고있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들거나 둘중에 하나일 거다. 그것을 파헤칠 생각은 없다.


물론 악인에게도 변호사가 필요한것처럼 논란성 발언에도 자유는 필요하지 않냐는 주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단지 그거라면 무척 중요한 얘기고 당연히 동감하는데,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대체 얼마나 침해가 되었길래 그런 발언을 해온 노재승이 공당의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고 그러겠냐는 거다. 표현의 자유 침해의 실체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발언내용과 명확히 선긋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잘못된 주장을 링 위에 올리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니게 되며 이는 자유로운 비판의 적법한 대상이다.


나도 단톡방 같은 데서 내 생각과 다른 말을 볼 때는 무조건 열내지 않고 최대한 차근차근 얘기하려는 편이다. 애초에 찍어누를(?) 언변이 별로 안되기도 하고. 그러나 공인을 논하는 태도는 다르다. 사인이던 시절 발언이라며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도 없는 상황인 만큼, 영입 철회가 안되고 이대로 간다면 음모론의 공적 권위로의 부당한 추인을 가만히 지켜보는 셈이다.


과연 누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가? 자유사회에서 어떤 민감한 문제에 대해 이미 확립된 정론을 향해 근거가 불충분한 의심을 표했다가 공적인 비판을 받을때 자신들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또한 얼마나 개복치같은가. 그 민감함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면 성역화라고 막연한 불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올바르고 진지하게 토픽을 다루는 방법부터 익혀야한다. 민감함을 이해하려는 공부와, 상황에 맞는 질문이 필요하다. 성역화라는 그들의 진단이 과장된 언사라고 생각하지만, 설령 그런 게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는 자명할것이다.


물론 어떤 헤게모니가 또다른 부당한 도그마로 작용할 가능성은 당연히 경계해야 하며, 그걸 막는 과정에서 사회가 한단계 진보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론적인 얘기고, 현재 이들의 문제제기 내용과 방식은 도그마틱한 권위와 정설의 권위를 혼동하고 있으므로 그 필요성이 전혀 설득력있지 않다. 그런 과정은 극단주의적/음모론적 주장을 배제한 판에서 알아서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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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일 수요일

가루삼겹살의 수학: 사영 연산자를 도입하여 표현하기

가루삼겹살 밈을 복습하다가 생각난 건데, 삼겹살을 가루로 만드는 operator를 일종의 projection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온전한 삼겹살을 x \in V라 하고 가루 연산자를 P라고 할 때, 가루삼겹살 Px \in P(V)에 대해 Px는 x와 다르지만 P(Px)=Px 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어떤 센스에서 linear한지 그리고 어떤 서브스페이스로 내려 주는 건지는 잘 정의를 해야겠지만, 대충 full 상태공간 V에서 구성 입자들의 상대적 위치관계가 상태 1에서 상태 2로 뒤섞였을 때도 두 상태를 같게 보는 축이 있을 것이다. 그걸로만 스팬되는 게 P(V)라고 하면 되고, 아마 삼겹살의 양에 해당하는 것일 듯하다 (구성 물질이 동일하다는 전제 하에 가루의 identification은 양이 중요하지 디테일은 안 중요하니까). 반면에 V를 스팬하기위해 추가되어야 하는 기저들은 상대적 위치관계와 관련된 방향들일 것이다.

또한 한 번 갈았을 때 믹서의 성능이 허용하는 최대한까지 갈려서, 한번 가루가 된 건 더 이상 갈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니면 더 갈리더라도 사람 눈에 어차피 가루니까 똑같이 취급하거나). 이런 것까지가 물리(?)고 이 다음부터는 대수의 영역이겠다.

원본 영상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삼겹살: x
가루삼겹살: Px
가루삼겹살을 입힌 삼겹살: Px + y
가루삼겹살을 입힌 삼겹살을 간 삼겹살: P(Px + y) = Px + Py = P(x+y)

이와 달리 대중문화에서 가루만들기의 대표 사례인 MCU의 핑거스냅은 공간을 어떻게 정의해 봐도 프로젝션은 아닌 것 같다. 사실 그냥 스톤 가진 사람이 스냅 할 때마다 그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 (즉 매번 다른 연산자) 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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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서울 원전 건설? 희화화로의 레토릭이 아닌 진지한 논쟁이 필요하다

서울에 원전 지으라는 레토릭이 원전 찬성론자 조롱하고 서울중심주의 비판하는 반어법(?) 느낌으로 계속 보이는데, 페북판에서 소수의견일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진지하게 찬성임.


일단 화력발전에 의한 지구온난화, 아니 그 이전에 만성적 대기오염부터가 원전보다 훨씬 다수의 사람들에게 훨씬 유해할거라 생각하고... 여기에 더해서 기술이란 것은 사회적 구성물이라 많이 관심받고 연구되고 사용되고 감시될수록 더 안전해진다고 생각함. 특정분야를 계획적, 체계적으로 사양시키는 것은 안전에 문제가 생기라고 고사 지내는 것과 같음.


원전의 안전문제는 기술적으로는, 그리고 시민의 감시와 참여 측면에서는 우수하다고 생각함. 다만 언제나 삐끗하고 신뢰를 잃는건 결국 휴먼팩터고... 탄소제로라는 가치에 대해 퍼블릭한 합의가 있다면 원전 비리 같은 흑역사의 적극적이고 지속가능한 청산을 하고, 책임 회피하지 않는 직업윤리를 형성시키고 훈련시키면서 원전을 이어나가는게 맞는 방향이었다고 봄.

'원전 서울에 못지을 이유가 없다, 다만 경제성이 문제라서 안짓는거다'라는 주장도 원전 찬성론 쪽에서 많은데, 이것도 결국 서울 못잃는(?) 주장이라고 비춰지므로 아주 진취적이거나 소구력있는 얘기는 아닐것. 경제성이라는 것도 자연과학적인(?) 수치는 아니다보니 각종 이해관계,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가치, 심지어 선언적 의미 등의 cost function을 바꾸면 얼마든지, 그것도 정당하게 바뀔수 있는듯.

이는 특히 원전의 경제성이 지난 몇년간 고무줄처럼 변하는걸 보면서 국민들이 체험했던 바이기도 함. 고무줄처럼 변하는것 자체는 잘못된게 아니고, 그 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정당한 싸움이 존재한다고 봐야함. 물론 전문기구 내지는 협의체 등의 민주적 장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투명하지 않은 곳에서 쪼인트 까서 경제성평가에 영향이 간다거나 하는건 제외.

요컨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면 경제성 평가의 기준도 정당하게 바뀌는것. 이는 원전 찬성론 쪽에서도 인지하고 활용해야 할뿐더러, 반대론 쪽에서도 비용 평가의 객관적 합리성을 과도하게 자처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내세워야할 주장이라고 생각함.

결론적으론 서울에 원전을 고려 안하는 것이 서울중심주의다, 아니다 경제성 문제다 등등 다 일리가 있지만 그것들 다 포함해서 결국에는 원전 지어도 된다, 지어야 한다는 정치적 설득이 안되어서 그런거 아니겠나. 정보버블을 깨고 운영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고 (원전비리가 워낙 충격적이었던 데다 운영주체의 직업윤리에 대해 알고있는 바가 없어서 나로서도 신뢰가 크게는 없긴하다 ㅠ), 정치적 설득을 해내서 필요하다면 어디든 원전을 지어야한다고 생각함. 다만 현실의 정치지형에서 그러한 설득이 가능할 경로가 보이지 않고 웃긴 결과들이 예상되기때문에 희극적으로 소비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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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4일 일요일

문화공간 운영방침을 둘러싼 갈등: 콘셉트의 섬세한 존중을 향해 서로 배려하자

왜인지 타임라인에 노키즈존 얘기가 많이 보여서 관련 있는 듯 없는 듯한 얘기들을 엮어서 적어 본다.


나는 가게에서 사람 가리는 티 나면 기분 좀 상하는 편인데 (사실 비슷한이유로 지인 초대 위주로만 운영되는 곳들도 그리 좋아하진 않음...), 꽤 많은 분들이 본인이 '가려지는' 입장이 아닐 경우 오히려 그런 제한을 기분좋게 받아들이곤 하더라. 누리고 대접받는 기분이랄까. 노키즈존도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공간의 콘셉트가 효과적으로 존중되려면 가격을 조정하거나 프라이빗하게 섹션 나눠 두는 등 유도를 해야 할 거고, 그럴 만한 여건이 안 되면 기본적으로는 아쉽더라도 부대끼는 거 감수해야 하는 것이고... 노키즈존의 경우엔 무엇보다 단순히 콘셉트와 관련된 미감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특정한 부류의 사람은 이용을 못 한다는 개념으로 연장될 수 있는 점이 실제 윤리적인 문제성으로까지 될 수 있겠다. 예컨대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인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경우 노키즈존이 확산될 시에 문화적 소외를 많이 경험하게 될 것.


조금 연결될 수도 있지만 별 상관 없는 얘긴데 다시 미감의 문제로 돌아와서... 예전에 가 봤던 어떤 공간은 주말에는 노트북 등 사용을 자제시키는데 그 이유가 장시간 점유 방지 이런 게 아니라 맘 편한 휴식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주인분의 바람이었고 그 자체가 셀링포인트 느낌이었다. 여기까진 문제 없고 차피 나도 놀러 갔던 거라 상관 없는데 웃겼던건 주인분이랑 아는 사이인 손님은 '우리가 남이가' 느낌으로 서로 하하 하며 그냥 사용 하더라고. 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일이 칼같이 어떻게 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런 거에서 위에 말한 '사람 가리는' 느낌이 나서 좀 깨긴 했었다.


나는 맘에 안 들더라도 무리 주거나 곤란하게 하는걸 잘 못하고, 공간의 콘셉트와 규칙을 존중하는 게 재밌고 예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불쾌감을 겪을 일은 현재로선 크게 없기는 하다. 예컨대 식당에서 대화 잘 안 들린다고 음악 소리 줄여달라 이런거 필요성을 못 느끼고 심지어 누가 했다는거 보기 전에는 그런요구를 해볼 생각조차 못함.... 그럼에도 섬세한 존중을 부탁하는 것과, 다소 자의적이고 불쾌한 경영의 차이를 느끼는 때는 분명히 있다. 그걸 가르는건 아무래도 운영하는 입장에서 깔린 우월감(?)의 여부 같은게 아닐까 싶은데 확실친 않다. 아 그리고 이런글 쓸때마다 단서 달아두는 거지만 기본적으로 막 비판(?)이라기보단 그저 취향이고 비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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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민족성에 대한 나이브한 비판은 반일 종족주의의 거울상이다

조선이 겪은 비극적 역사를 현대 국제정치에 그대로 대입해서 반미 반일 하는 세계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당대기준 조선 레짐과 사회상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기록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선진성을 찬미하는것은 과연 양립가능한가? 전자는 대체로 동의하는데 그것이 후자와 함께 주장된다면 읭스럽다.


이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하기 위해 깔려 있어야 하는 전제 (혹은 그것들이 가리키는 기획)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면, 바로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정서도, 조선의 전근대성도 둘다 마음에 안 드는데 그 두 가지를 같은 선상에서 파악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그 둘은 연장선일 수도 있지만 단절적인 부분도 크다고 보고 반서방 민족정서도 조선 민중에게서 직접 이어졌다기보다는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인 측면이 크다고 봐서 크게 동의되는 기획은 아니다. 선진적인 나라는 예전부터 그랬고 후진적인 나라도 예전부터 그랬다면 결국 민족성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결국 종족주의의 거울상에 다름 아니다.

국가의 경영자 입장에서든 분석자 입장에서든 소위 현실주의는 국내의 정치적 동기를 하나의 존재하는 현상으로 인정하고, 국제정치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하나의 요인으로 파악하고 제어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을 비판(?)한다고 되는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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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1일 목요일

Plini를 통해 알게 된 선진적 프록메탈/재즈퓨전 음악들

Plini를 뒤늦게 접하고 요새 듣고 있는데 충격적일 정도로 취향저격이다. 연주도 작법도 뛰어나고 너무 거칠지도 않은등 가장 절대적인 형태의 음악이라고 느껴질정도임; 흔한 서양권 유튜브 베댓 레파토리를 가져오자면 천국에 갈때 브금으로 깔릴법한 느낌.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fbclid=IwAR2mN5m9AlkH6pgwTHnZzv4cEDP4uz4zIApIeBVaHPOc6BKCtfUmipsicq4&v=Rv_a6rlRjZk&feature=youtu.be)는 (아마) 대표 곡 중 하나인 Electric Sunrise인데 다른곡들도 다 좋다. 올해 초중순엔 밴드 Bubblemath가 너무 맘에들어서 밴드캠프 첨으로 가입해서 구입했었는데 이분것도 싹 구입 각임.


이런 비슷한 느낌의 차분하고 잘깎인 다른 프록메탈/재즈퓨전 밴드들도 검색해서 쭉 틀어 놓는 중이다. 내가 음악 지식이나 감각이 일천하다보니 곡을 모두 이해하면서 듣진 못하지만 좋게 들리는 포인트들을 중심으로 이 분야를 더 디깅해 보면 귀가 더 트이지 않을까 한다. 특히 이들 중 Jakub Zytecki라는 폴란드 기타리스트는 일렉트로닉 음악과의 접점도 많고 실제로 기타 음악을 별로 안듣고 안좋아한다(...)고 할정도로 색채가 독특하기도 함.

유튜브 검색만으로 대충 듣다보니 계보도 관계도 거의 모르는지라 더 찾아보는데 한계가 있기도 해서 해외 전문포털같은데도 찾아볼까 싶다.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꾸준히 팔로업하고 나아가 참여해 보려면 어떤경로로 해야하며 얼마나 잘해야 하는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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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9일 화요일

자유의 증진과 그 계승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져야한다

친중 친북을 경계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하는 국제적 감각을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스탠스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미시적으로 추동하는 싸움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사회문화적 자유의 증진을 향한 노력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표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의아하다.


시민자유를 실질적으로 증진시켜온 세력의 후신은 우파극단주의를 경계하는 감각은 있지만 국제, 국내를 막론하고 적극적 리버럴을 하고있지 못한데, 단순히 집권하고 눈치 봐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애초에 리버럴이 아니었던거 같고... 반대로 위에서 말했듯 자유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목소리높이는 세력은 정작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고, 정치적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결정적 순간에 극우랑도 은근히 선 못긋는다.

하여튼 정치적 구도가 굉장히 답답하다. 싸우고 견주어보면서 인정할건 인정하고 발전해야 하는데 서로 싸우느라 자기자신이 가지고있던 가치들까지도 퇴색만 시키고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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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6일 토요일

북카페에서 발견한 90년대 음악잡지

북카페에 95년도, 98년도 음악잡지가 있길래 꺼내 보았다. 현재 레트로컨텐츠로 접할 수 있는 문화들이 실시간으로 유행을 선도하던 생생한 기록들. 특히 95년도 잡지의 경우는 해외 국내, 록음악 댄스음악을 막론하고 현재 레전드가 된 뮤지션들의 새파란 현역시절 활동을 볼 수가 있어 무척 재미있다. 그 시절의 분위기가 궁금해진다.


현재 생산되는 이미지들이 이때에 비해 당연히 더 세련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결이 현재와 크게 단절적이지는 않다. 특히 한국의 대중문화적 스타일이 이미 많이 확립되고 규모도 성장한 지금에 비해, 여러 스타일의 조그만 문화적 시도를 추동하는 정신적인 부분은 오히려 저때 더 다양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현재보다 국제적인 산업으로서 덜 체계화된 시점에 대한 낭만화일 수도 있다.

미용실에 가서도 건네주시는 잡지를 늘 관심있게 읽는 편인데 그 잡지들은 음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은지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다. 그래도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가진 필진들이 새로운 현상을 텍스트화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느껴진다.

현재의 음악계에서도 익숙하게 들리는 이름들이 이 잡지들에서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보면, 레트로한 것들이 단지 이색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로 연장되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명징하게 보이는 기분이고 소박하게나마 계보를 구성하고 파악해보고 싶어진다.

아무튼 하나쯤 소장하면서 심심할때 들춰보고 싶은 잡지들이다. 사진별로도 간단한 코멘트를 달았다 (Facebook에서 사진들 보기: 링크).

2021년 11월 4일 목요일

무운 사건: 놀람-경험의 전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다

무운 사건과 그에 대한 또다른 전직 기자의 글이 화제인데... 일단 원래 사건의 기자는 단어의 뜻을 임의로 판단해서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고, 회사가 비웃음을 당하게 했으므로 프로페셔널한 역량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건에 대한 다른 전직 기자의 글도 페친분들과 나눈 의견을 종합해보면, 원래 사건에 대해 비판적, 반성적으로 봐야 할 동종업계 종사자인데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평가를 맡기는 대신 '이쯤하면 충분한 대응이었다'고 스스로 단정해서 눙치려는 의도가 있어보이긴 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직한 글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 한가지 내가 생각을 달리하는 포인트가 있다. 무운이라는 단어를 모를 수도 있고, 글쓴이 자신도 몰랐고,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는걸 여러 사례 수집을 통해 얘기한 것 그 자체는 무엇이 그렇게 추하거나 반지성주의적인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오히려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것 아닌가?

'몰라서는 안 된다'라는 가치판단 이전에 어쨌든 '모르는 경우가 꽤 있다'라는 사실의 전달 자체는 엄연히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 같아서 그렇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많이들 몰랐지 않나.

어떤 단어가 화제가 될 때면 그렇게 서로 물어보면서, 얼마나 보편적으로 쓰이는 단어인지 각자의 경험을 견주어보며 파악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모두가 아는 단어(여야 한다)라고 단정하는 것보다, 이 편이 오히려 인식의 확장을 향하고 있다고 본다.

이번 일 외에도 탄핵, 사흘 등 어떤 단어를 모르는게 말이 되냐는 플로우가 잊을 만하면 있는데 (주로 실시간검색어에 떠서), 나는 그때도 과도하게 놀라거나 개탄하는 반응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이에 관해 포스팅도 했던 바 있다.

물론 이번에는 대중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글쓰기를 해야하는 기자가 몰랐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반응에 깔린 정서는 '이 단어를 모른다고?'라는 충격받음의 전시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본다. 놀람 경험은 순간이고 그것이 어떤 고찰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런 플로우에서는 놀람 경험만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느낌이어서 늘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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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혜적 태도를 걷어치워라: 정치적 유불리가 아닌 기본권의 보장 관점으로

페이스북에서 어떤 글을 보았다.


전형적인 좋은 일 하고도 욕먹는 화법이 이런것이다. 군인 월급이 그동안 비상식적으로 낮았고 문재인정부 때 많이 오른걸 군인들이랑 20대들이 당연히 누구보다 제일 잘 알지 그걸 왜 모르겠나.

글쓰신분의 평소 포스팅에서 보이는 정치 성향상, 20대 남성이 이걸 모르기 때문에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망 내지는 훈계도 은연중에 들어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지라 단 두줄이지만 더 좋지않게 읽힌다. 따뜻한 시선을 갖고, 권익을 보호해야할 국민의 한사람으로 보면 과연 이런 워딩이 나올수 있을까?

군인 월급 정상화 같은 기본적인 권익 관련 정책을 얘기할때는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기대해서는 안되고, 설령 정치적 지지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에' 해야한다. 무시하는 뉘앙스와 시혜적 태도가 모든걸 꼬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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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관람

 문화관에서 하는 음대 정기오페라를 보러 갔다 (기부자로 초청된 건 아니고 티켓 사서). 2년마다 하는 것이라는데 이번 공연은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였다.


오페라라고 해서 엄근진한 것이 아니라, 다소 통속적이면서 굉장히 개성있고 기이한 사랑이야기 세편을 엮었다. 내가 좋아하는 구성 방식이었는데 그게 뭐냐면, 한 낭만적인 인간, 혹은 이상한 인간이 남들은 겪지못할 경험들을 해왔고, 파국, 죽음, 꿈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 그걸 관통하면서 회고하고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 진부한 표현이지만 낭만적 삶의 정수를 담아내기에 좋은 방식인듯하다.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 각 인물이 같은인물인지 다른인물인지, 실제인지 환상인지 등에 대해 답이 정해져있지 않고 해석이 열려있는 것 같았는데 맞게 독해했는지는 의문.

같이 간 연구실 동료의 말씀에 따르면 음악과 극본 정도만 정해져 있고 구체적인 연출과 해석은 자유도가 크다고 하니 그런것도 보는 재미가 있겠다.

연출도 연주도 다들 너무 잘하셨다. 그리고 음악극이지만 내 당초의 생각보다 가창뿐 아니라 '연기'의 비중도 무척 높았다. 연습을 많이 하셨을거 같고 엄청 보람있었을 것 같다.

1막이 끝난 뒤엔 인형도, 주정뱅이도, 비서도 각자의 웃긴 특징이 드러나면서도 어쨌든 노래를 '잘' 해야 하니까 그렇게 곡 쓰는게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 나눴었는데, 아니나다를까 2막 처음에 바로 허를 찌르는 유머가 등장해서 재밌었다. 원작에도 있는지 이번 연출의 아이디어인지 궁금하다.

특히 내가 원래 바리톤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악역 바리톤분이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그리고 다 끝나고 사진찍는데 올림피아 역 배우분이 바로 앞에 지나가셔서 놀라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금요일에 기숙사 축제에서 노래 무대들도 봤었는데... 공연이란 걸 본 것이 코로나 이후 literally 처음인데, 운좋게 이틀연속 공연을 갔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기였고 나도 공연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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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30일 토요일

신해철과 서태지: 어떤 철지난 팬덤 갈라치기에 관하여

고재열 여행감독의 브런치 글(서태지보다 신해철이 좋았던 이유, 7주기 추모)은 제목에서부터 보이듯이 갈라치기(?)를 심하게 하고 있는데, 정작 신해철과 서태지는 애초에 친척관계기도 하고, 스키 여행, 음악 인터뷰 방송도 같이 하는 등 공사를 막론하고 무척 신뢰하는 선후배 관계였다. 마지막에는 김종서 이승환과 함께 (통칭 마태종승) 음악 작업도 같이 했지만 신해철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발매 및 합동공연은 안 하게 되기도 했다.


서태지가 전자음악을 록에 결합시키는 시도를 잘했지만 그런 서태지에게 미디를 가르쳐줬던 선구자적 인물이 바로 신해철인데 만약 서태지에 대해 글쓴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면 좋은 관계를 어떻게 계속 유지했겠나.


서태지가 사회비판 '척'에 그쳤다는 대목에도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단순히 스타일과 인기, 음악 속 메시지에 의한 사회분위기 변화뿐 아니라 본인이 음악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갈등을 겪어가며 실질적인 부조리 철폐와 제도개선을 얻어낸 실천적 성과도 많기 때문이다.


하여튼 단정적인 글도 매력이 있다지만 개인 견해 표명을 넘어 시대를 규정하고 타 뮤지션을 격하하는 과잉된 언사가 추모하는 글쓰기에 굳이 필요했을까. 둘 모두의 상당한 팬인 입장에서 이런 글에서 영양가를 찾기 힘들다. 서태지가 인기는 더 많았지만 신해철이 더 깊이있고 솔직하고 실천적이어서 좋았다는 비평 정도로 해 두었다면 둘 모두의 행보와 음악성향을 아는 입장에서 누가 이렇게 뭐라고 했겠나.


그동안 90년대가 서태지의 시대라고 속아 왔지만 알고보니 신해철의 시대였다는 본문의 '깨달음 서사'도 허위에 가깝거나, 혹은 잘 쳐줘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단평이 아닌 섬세한 논평들에서 도대체 누가 그렇게 속였으며 또 속아넘어갔는가. 정치 및 종교부문 등의 또다른 토픽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깨달음 서사'를 사회의 보편적 인식과 혼동하게끔 하는 것은 좋은 글쓰기가 아니며, 나아가 쓰는이 자신의 인식도 왜곡되게끔 한다.


2014년 하반기는 신해철과 서태지 둘 모두가 오랜만에 컴백한 시기였다. 상술했듯 이 둘은 이승환, 김종서와 함께 '나인티스 아이콘'을 4인 버전으로 공동 작업했고 음원까지 완성되어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다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쓰러지고 상황이 심상치 않자 서태지는 슈퍼스타K6에서 회복을 기원하며 울먹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서태지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녹화하는 당일에 결국 신해철이 사망하게 되어 유희열과 함께 추모의 이야기도 나누고, 슬프지만 담담하게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영결식의 추도사도 서태지가 낭독했다. 둘 모두 이러한 방식의 기억을 원하지는 않았을테다.


과잉된 재단의 언사로 점철된 공연한 서열화보다는 신해철의 행보와 대중적으로 덜 알려진 명곡들을 한 번 더 소개하는 게 더 좋은 기억의 방식일테다. 철기군에 걸맞잖은 뱀의 혀로 어찌 마왕을 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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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5일 월요일

일부 매체출연 의사들의 끊이지 않는 '랜선진단', 직업윤리 인식을 제고해야 한다

원희룡후보 설전 영상을 봤는데 수십초 이상 보기가 힘들었다. 감정이 격해진 상황도 그렇지만 내용상으로도 무리한 이야기여서 그렇다.


쟁점이랄 것도 없이 문제는 사실 간단하다. 진료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진단이라는게 나오나. 직업윤리상 그런식의 소견(?)을 말하면 안되는 이유도, '맞는 말이지만 하면 안된다'라기보다는 진료행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틀린 말이므로 하면 안된다'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이 차이가 굉장히 명쾌한데 의외로 많이들 흐리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징계를 감수하겠다며 마치 떳떳한 폭로라도 한 것인양 말하는 태도는 적반하장 격이다. 오히려 잘못을 했으니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허위사실'이라는 이재명 측 패널의 워딩에 강하게 불만을 드러내는데... 그러면 진료를 원하지도 진료를 거치지도 않았는데 소시오패스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와 같은 진단명을 말하는 것이 굳이 따지자면 당연히 허위사실에 가깝지, 그러면 진실에 가까운가?


직업윤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구나 싶다. 조국사태 때부터 해서 직업윤리라는 게 땅에 떨어져 있다는 건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주셔서 고맙다. 지키면 바보되는 세상이 아니라 안 지키면 손해보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한국 정치에서 굽히지 않는 태도, 아내를 지키려는 발언들을 보면 자동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을것이다. 원희룡 후보의 이번 설전은 합리적인 내용을 극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옹호를 고집스럽게 이어나가는 것이라 내용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그것과 무척 대조되었다.


후보의 태도가 이렇다 보니 세간의 여론도 혼란스럽다.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그런 진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그냥 흐지부지 시키는게 최선이었을텐데, 이재명이 소시오패스다 라는 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공허한 기의의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서 끌고 가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여러 방식의 무리한 옹호가 난무하게 되었다.


물론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과격한 과거 트윗들에서도 드러나듯이 누군가를 무척 쉽게 적으로 돌리고 공격하는 (그리고 심지어 그것에 무척 능한) 타입인지라 여러 부문에 많은 풍파가 있을 듯하여 걱정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고지에 오르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독선으로 치닫는걸 효과적으로 방지할 장치 자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닌 건 아닌 거고...


제대로 된 수많은 비판과 우려가 충분히 가능한만큼, 그 잘못 나온 말(실제로 강윤형 박사의 문제의 인터뷰 클립을 보면,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다소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다)을 어떻게든 옹호하려고 하지 말고 빠르게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희룡 후보가 무리하게 설전을 벌임으로써 이 국면이 더 국민들 기억에 각인되고 오래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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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1일 목요일

윤석열 예비후보의 릴레이 망언

윤석열 예비후보는 국민의힘 입당 전후로 거의 전방위적인 1일 1망언 중.... 120시간 노동, 대구 아니었으면 민란, 아프리카 손발노동, 여자들이 점도 보고 한다, 인문학은 병행 가능, 그리고 전두환 발언까지. 맥락을 지워서 그렇다고 하는데 대부분 맥락을 포함시켜도 취지 및 그 기저에 깔린 인식이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발언들이 반복되는 걸 보니 전략이라기보다는 측근들도 곤혹스러워할 만큼 실제 본인의 확고한 평소 생각에 의해 나오는 것들인 듯하다. 문제되는 발언들이 잘 보면 그것들끼리 또 나름의 일관적인 결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즉 실언이라기보다는 망언이라고 하는게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아래의 몇가지 대목을 비롯한 내 기존 평가를 크게 수정하진 않아도 되겠다. 각종 사회이슈에 대한 인식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부족하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각종 망언들에 더해서, 평소의 발언태도도 정치동료들이나 유권자들을 겁박하는, 그러면서도 카리스마 있다기보다는 어쩐지 답답한 느낌이 있다. 파란만장하고 범상치 않은 인생사임은 틀림없으나 예비 정치인으로서는 국민들을 감동시킬만한 강직하고 멋있는 이미지와는 많이 멀게 된듯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지지는 굳건한데, 대안이 없어서 그렇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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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글(링크)에서 발췌)
"말하자면 본인의 사상이 없는 소위 '정치 괴물' 타입은 아니고 오히려 독서와 토론을 통해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타입에 가깝다는것. 이는 윤 총장에 대한 오랜 지인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만약 직업정치를 한다면 정치관 전반이 상식적인지, 개별 이슈에 대한 입장이 어떤지, 직업정치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관철할 역량이 있는지 등에 대한 검증은 되어있지 않고 이는 상징으로서 받는 막연한 지지에 불과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일반 국민들뿐 아니라 정치인들부터가 무척 궁금해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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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8일 월요일

송영길 대표의 정권교체 말장난: 의미의 희석을 경계하며

[기사 (머니투데이)] '정권교체' 여론 절반 넘자... "이재명 돼도 새 정권, 정권교체"


신선한 관점이긴 한데, 이 말대로면 대통령이 무단으로, 혹은 임기중 개헌해서 재집권하지 않는 한 정권교체 아닌게 없게 된다. 민주당 내에서 이 발언이 해석되기에 따라 결집을 방해할수 있으므로 당대표로서 부적절한 발언임은 또 논외로 하고 말이다.


물론 '정권교체'라는 단어 자체가 막 헌법에 명시된 것까지는 아니고 정치학적 개념 내지는 언론에서 사용하는 용어 같은 거라, 결국 정의하기 나름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해버리면 여당이 바뀌는걸 뜻하는 통상의 용례와 매우 다를뿐더러, 무엇보다 상술했듯이 정권교체 아닌게 없게 되므로 대통령단임제 민주주의가 정착한 상황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개념이 돼버린다.


의미가 없는 개념이란 정확히 말하면 브랜딩, 내지는 레토릭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결국 어떤 의도가 있는 재개념화라기보다는 그냥 좋게말하면 레토릭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장난인데, 물론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거지만 이런거에 대해선 정치인들이 이런식으로 안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법치가 교묘하게 흐려지고 민주주의가 실제로 위협받을 때에도 다들 이런식의 말장난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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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곱근풀이에 대하여

 학생 때 공부하던 기억을 되새겨보면, 아버지는 '제곱근풀이' (루트2 같은 걸 시행착오 거치지 않고 손으로 절차적으로 구하는 방법) 를 알고 계시고 나에게도 중학교 때 심심풀이 느낌으로 가르쳐 주셨었다.


그러나 정작 정규 교육과정에서나 사교육에서나 그것을 배운 적은 없는데, 실제로 제곱근풀이는 현재 교육과정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1]. 제곱근풀이가 교육과정에 있다가 언젠가부터 빠진 것인지, 아니면 교육과정에는 처음부터 없었고 아버지가 따로 (혹은 교육과정 표준화가 덜 되어서) 배우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 계산해 보면 루트2가 진짜로 1.414213...으로 나오는 게 확인되니까 무척 재미있긴 한데, 자릿수를 하나하나 얻는 것이 은근히 오래 걸리는지라, 정말로 아무리 많이 해도 순환마디가 없겠구나 하는 확신은 사실 잘 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수 또한 (적어도 어떤 것들은) 임의의 자릿수까지 절차적으로 구해낼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과도한 신비감(?)이 줄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제곱근풀이를 왜 다루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계산이 되기는 하지만 그 원리를 해설하기가 까다로워서 교육과정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만 해 본다. 근호를 포함한 표현을 갖는 두 수의 대소 비교 등에서도, 제곱근풀이를 알고 있다면 근삿값을 이용한 '편한' 풀이법을 떠올리게 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일부는 제곱근풀이가 교육에서 활용될 가능성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박윤희, 박달원, 정인철 (2004) 는 학습자들이 무리수에 대해 '근호를 써서 나타내는 수' 따위의 오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한다. 해당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학습자들이 제곱근 풀이법, 혹은 계산기 사용을 통해 직접 제곱근 계산을 해 봄으로써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임을 체감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 모두 결국 어떤 정수의 제곱근을 취하는 방식이므로,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는 그러한 방식으로만 얻어진다는 오개념을 가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물론 추측이다). 특히 계산기 사용이 아닌 제곱근 풀이법의 경우, 상술한 것처럼 제곱근풀이를 직접 해 볼 때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라는 확신이 드는지 여부도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위 교육과정에서 제곱근풀이 혹은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 무리수의 근삿값을 구할 일은 없다시피한데, 오직 순환마디가 없음을 체감하고자 그 원리도 까다로운 제곱근풀이를 학습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제안 역시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이미 학습하였을 원주율 역시 무리수라는 것을 강조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곱근풀이는 알아두면 나름 재미있고, 무리수 역시 적어도 어떤 것들은 임의의 자릿수까지 절차적으로 구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감각은 전형적인 '수학적' 사고력과는 다소 결이 다른 것 같다. 또한 위에 쓴 여러 이유로 실익이 크지 않고 응용 문제풀이 시에 사용해 본 적도 딱히 없는 듯하다. 따라서 교육과정에서 다루기 애매한 건 사실인듯하며, 꼭 없어도 된다는데 동의한다. 실제로는 어떤 이유로 빠지게 되었는지 (혹은 원래부터 없었는지) 그 경위가 궁금해진다.


[1] 박윤희, 박달원, 정인철. "중학교 수학에서 무리수 개념에 관한 학습자의 이해 연구." 한국학교수학회논문집 제 7 권 제 2 호 (2004): 9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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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7일 일요일

묘한 매력의 한국자유총연맹 건물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야외의 이미지일 수 있음

한국자유총연맹이 쓰는 건물은 엄청 견고하고 위압적이어 보인다. 밑으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저 곡선 때문인 거 같은데 딱 봐도 안보시설 내지는 이데올로기적 건축물 같다. 튼튼한 댐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이쪽과 달리 반대쪽 파사드는 좌부터 우까지 전체가 위로 말려올라가는 지붕으로 되어있는데, 르코르뷔지에가 계획한 인도 찬디가르 국회의사당과의 유사성이 지적된다고 한다.

건물 자체의 이름은 자유센터이고 김수근 설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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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3일 수요일

산울림 음악 예찬

말 신기한 밴드 중 하나는 김창완님으로 대표되는 산울림이다. 신나거나 잔잔해서 무난하게 널리 불리는 곡들뿐 아니라, '산할아버지', '개구장이' 등 동요 느낌의 곡들도 많고,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처럼 난해하거나 사이키델릭한 곡들도 많다.


특히 제목부터 왠지 비범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정말 넘버원 명곡같음. 유명한 베이스리프가 쭉 깔리면서 신나는 분위기를 한창 형성하다가, 퍼지한 기타가 들어오면서부터 뭔가 서늘한 느낌이 확 든다. 러브크래프트 식으로 비유하자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불온한 먹구름 사이에서 들려오는 천 개의 나팔 소리와도 같달까... (그게 뭔데 이자식아)


하여간 내가 아는 한에서 이런 분위기로는 버줌의 Til hel og tilbake igjen이라는 곡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꽤 먹고 나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이런 포인트를 재발견하고는 등잔밑이 어두웠구나 싶었음.


잠비나이가 함께한 최근의 리메이크 버전도 완성도는 굉장히 높고 국악이 잘 어울려서 무척 좋은데, 원곡 특유의 그 압도적인 느낌은 덜 나긴 하는 것 같다.


더 놀라운 것은 각 곡들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 봤다는 걸 넘어서, 그것들을 관통하는 산울림만의 일관된 색채가 있음을 누구라도 발견할수 있다는 점. 복잡한 고급의 화성보다는 직선적이고 동요스러운 구성요소들 위주임에도 그걸 전형적이지 않게 사용해서 엄청 특이한 느낌이 난달까. 단순히 옛날 음원이라서, 혹은 연주가 다소 서툴러서 그런 것은 단연코 아닌거같다.


특히 3집까지의 곡들은 어릴때부터 놀이하듯이 악기들 둥당거리면서 100% 형제들끼리 만든 거라는데, 믿기지 않으면서도 너무 독특하다보니 믿긴다(?).


김창완 아저씨는 인물 자체라던가 퍼포먼스도 너무 독특하신듯. 덤덤하게 직선적으로 읊조리듯이 부르는데도 표정같은게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고... 그러면서도 어떨 때는 되게 차가워 보이고 (그래서 드라마에서 악역 연기도 잘함). 언젠가 음악 관련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전문적인 대담 하는 티비프로를 봤는데 굉장히 지적이시기도 함. 보고나서 무슨 프로인지 찾아봤었는데 아예 못찾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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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 간단한 시청 후기

인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연휴동안 봤다. 사실 흥행에 따른 의무감(?)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매력있고 스무스하게 쭉 보게되는듯. 캐스팅이랑 연기도 좋았고 장면 연출도 돈 많이 들였겠다 싶게 세련되어 있었다. 다 보고나서 자세히 찾아봤는데 흥행도 그냥 흥행이 아니라 무슨 전례없는 수준의 흥행이더라.


이런 장르에서 작품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처한 삶의 어떤 모순적인 순간들에서 오는 막막함/암담함의 내용적 깊이와, 그걸 담아내는 게임의 형식면에서의 자극성이 균형있게 조응해야 한다고 본다. 오징어게임은 어느 한쪽도 과하지 않고 밸런스있게 구성된 듯하다.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이지만 의미있고 매력적인 인물들이어서 드라마적으로도 괜찮았다. 또한 게임 상황 및 묘사 자체도 과하게 악취미적이지 않고,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다같이 얘기해 볼 수 있는 정도인것 같았다. 이런 게 흥행 요인들이었을 듯하다.


그리고 군상극(?) 속에서 서로의 서사가 얽히는건 극중에선 우연이지만 제작진 입장에서는 필연일것이며 그 엮임구조를 어떻게 안 어색하게 하느냐에서 비평적 설득력이 나오는데, 그런 면에서도 대다수 작품들보다 덜 어색하게 잘 구성이 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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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2일 화요일

맥락에 어긋나는 나무위키의 페미니즘 비판 서술들

나무위키 돌아다니다 보면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이런 식의 서술이 되어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맥락상 불필요하거나 어색한데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을 강하게 비판하는 예시를 삽입해두는것.

여기서도 그냥 인구가 앞으로 더 급격히 줄어든다고 하면 충분한 내용인데 굳이 페미니즘으로 원인을 단정짓는 서술이 존재할 필요가 하나도 없지않나.

나무위키 자체가 다같이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보니 글의 완결성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지만, 이런 서술이 불특정 다수 문서에 등장하고 딱히 수정도 안될 정도라는건 남성위주 인터넷공간들의 문화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조심스럽거나 논쟁적이지조차 않은 디폴트가 되어버렸고, 소위 젠더갈등(?)이 갈데까지 갔다는게 아닌가 싶어 다른의미로 유감스러운 심정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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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7일 목요일

aespa 미니앨범 [Savage] 단평

에스파 미니앨범 처음엔 소리가 비어있다고 느껴지고 잘 와닿지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일관성있는 반주 위에 보컬이 깔리는게 아니라 보컬이 기본적으로 곡을 끌고가는데 전환이 잦고, 거기에 비교적 간단한 반주가 시시각각 다르게 밀접하게 결합하는 느낌 때문에 그런듯하다. 꼭 에스파에게서만 나타나는게 아니라 요즘 케이팝 댄스곡들 메타가 좀 그런것 같긴 하더라.


암튼 계속 들어보니 곡이 좀 귀에 익게 되었고, 제일 맘에 드는 두 트랙은 'Savage'와 'YEPPI YEPPI'다. 'Next Level'에서도 그랬지만 위에서 말한 점 덕분에, 비트를 정직하게 쓰면 진부해질수 있는 부분들도 정형적이지 않게 해놔서 트랙들이 힙하게 뽑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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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4일 월요일

불닭: 불닭볶음면의 잊혀진 기원

센세이셔널하게 매운 불닭이라는 요리가 10-15년 전쯤에 상당히 유행을 탔고 그 느낌으로 인스턴트 면요리를 만든게 불닭볶음면인 것인데... 물론 지금은 인지도가 역전된지 한참이다. 나보다 약간 아래 나잇대에는 불닭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아서 이 이야기를 하면 신기해하곤 한다. 꽤 크게 유행했었는데 격세지감이다.


난 불닭 자체는 안먹어본거 같고 불닭 스타일의 소스를 쓴 매운치킨을 시켜먹어본 기억이 있다 (근데 생각해보면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많이 매운건 그리 즐기진 않는다. 불닭 이후로도 아주 매운 음식의 유행 계보가 꾸준히 있어온 걸로 아는데 아예 대표로 정착해버린 불닭볶음면을 제외하면 그것들 중 하나는 2010년대 중반쯤까지 유행했던 치즈등갈비고, 지금은 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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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일 토요일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기대하며: 메타적으로 감행되는 미학적 실험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대한 각종 루머(루머라고 해두자ㅎㅎ)들이 나오는 이 시점에 약간 엮어볼 수 있는 글을 공유해본다(https://www.facebook.com/yongjae.oh/posts/1143266179098419. 시공의 폭풍: 서사성의 붕괴와 탈맥락적 조합). 사실 반 장난식으로 썼지만 마음에 드는 글이라서 꺼리가 있을 때마다 다시 올리는 것이다.


원래의 글에서 간과된 점을 덧붙이자면, 기원 내지는 현재의 담지자를 서로 달리하는 문화적 상징들이 마음껏 조합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의 이해관계가 조정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얼만큼 정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단군 신화의 내용을 현실에서 일어난 곰 세력과 호랑이 세력의 관계에 대한 은유일 것이라고 해설하곤 하던데, 이 역시 그 전형적 사례일 것이다.

마블의 MCU에서 어벤져스 시리즈를 중심으로 하여 인피니티 사가라는 거대한 기획이 성공하면서 나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강한 흥미를 느꼈다. 히어로들의 서사와 비중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해서는 책임자의 결정도 있었겠지만, 각자의 취향을 가진 기획자들이 토론하며 수많은 조정을 거쳤을 것이다. MCU 영화 속 수퍼히어로들 간의 파워 밸런스 및 인간관계와, 그들을 창작하는 스튜디오 직원들 사이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는 '관계들의 관계'를 이룬다. 말하자면 다층 연결망(multiplex network)인 것이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는 어떤가. 일단 루머의 내용들을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소니에 속해 있는 스파이더맨이 MCU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이전에 애초에 원래 마블 캐릭터인데 소니가 가지고 있게 된 것 자체가 '무대 뒤'에서의 숱한 이해관계 조정의 산물임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물며 이번에 나오는 출연 루머들이 사실일 경우 이벤트성 출연이건 보다 본격적인 세계관 통합이건간에 무척이나 깊은 수준의 줄다리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각 주체들이 성공을 거두어왔느냐 아니냐에 따른 발언권의 차이가 여기에 동적으로 개입해왔음도 명백하다.

전작인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는 극중 빌런이 주인공을 비롯한 히어로진영을 속임에 따라 영화 제작진도 관객들을 속이게 되는 '이중의 속임 구조'를 통해, 사실적 가상에의 immersive한 경험을 의도하는 영화 제작행위의 본성을 빌런의 서사에 그대로 이식하여 유쾌하면서도 소름돋게 풀어내었다. 이어서 후속작인 본작에서는 현대 영화가 가지는 대중문화 산업으로서의 특성이 인물과 서사에 직접 (그리고 필연적으로) 반영됨으로써, 과거작들에 찬사를 보내며 관객들의 열광을 이끌어낸다. 일종의 미학적 실험이 전작에 이어서 재차 감행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현대 대중문화에서 대상들의 질적인 차이가 지워지고 무한히 재조합되는 디지털 플레이그라운드가 형성되는 것은 (한국의 야인시대 혹은 영미권의 Bully Maguire를 필두로 한 '합성' 문화에서 보듯이) 불특정 다수 대중들의 유희 본위의 협력으로 가능해지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 유희를 넘어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또다른 국면, 어쩌면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국면을 요한다.

하필 상술한 디지털 플레이그라운드의 대표사례인 Bully Maguire 밈 역시 토비 맥과이어가 출연한 오리지널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무척 인기있는 시리즈기에 대중적 밈의 소재도 되며 실제 산업적 콜라보레이션도 가능한 것임을 감안하면 이는 그저 '하필'이 아닐지도 모른다. 루머들이 사실이라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해당 밈의 소스를 제공한 소수의 당사자들이 직접 제작하는 '합성물 중의 합성물', '합성물 아닌 합성물'로서의 유일무이한 성격을 가지며, 밈에 대한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진본의 아우라를 귀환시킬 전망이다.

이것은 오직 현대화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디지털을 추동하는 리얼월드의 특수한 협력의 조건 속에서 제한적으로 가능해진다. 권리의 아나키 상태에서라면 특수한 협력이 없어도 무한한 재조합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서로 다른 것들을 불화 없이 엮어낼 힘을 가진 현대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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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4일 화요일

SNL 주현영 인턴기자 컨텐츠를 보고: 배제적 공감이 아닌 포용적 공감으로

있음직한 인간상의 잘된 재현은 그 자체로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감상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의견을 말하고 싶게끔 한다. 그런 관점에서 SNL의 이 기획은 영리하고 성공적인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코미디가 언제라고 없지는 않았겠으나, 이번 기획이 성립한 것에는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희극인들의 최근 메타가 대대적으로 성공한 것의 영향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저런 사람 꼭 있지 라는 시청자들(사실 페북러들)의 반응에서 묘하게 다른 결들을 느낀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써보자면 먼저 한쪽 끝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곤혹스러워했던 (혹은 현재도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며 왼쪽 인물에 공감하는 경우가 있겠다.

한편 반대쪽 끝에는 의사소통에 문제를 덜 겪고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한, 말하자면 '강자적' 입장들에서 서로간에 공감하는 반응도 있다. 그 수위는 저런 사람 꼭 있다를 넘어 저런 사람들 참 잘못됐다, 짜증난다 까지 상당히 넓게 나타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강자적 반응들은 또다시 남녀노소 등에 따라 각각 메타적으로 비평될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분들이 써주셨다.

왼쪽 인물(인턴기자)의 연기가 무척 부각되어서 그렇지, 형식적으로 두 인물이 상당히 패러렐하게 제시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반응 둘 중 어느 쪽도 적어도 작품 내적으로는 틀린 감상이 아닐것이다. 많은 경우에 양쪽 모두에도 공감이 될것이고 말이다. 전자의 경우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나도 한때는 그랬었다, 저런 포멀한 상황이 참 tough하지 하며 위로를 얻을수 있을것이므로, 반드시 왼쪽 인물에 대한 조롱 위주로 극이 구성됐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왼쪽 인물에 소극적으로나마 이입하며 공감을 주고받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다만 내가 다소간에 거리감을 느꼈던 것은 위에서 이분법적으로 제시한 두 반응 중 후자의 경우이다. 집단에서는 그러한 짜증섞인 말을 서로 한 마디씩만 주고받으면서 확인하더라도 개인에 대한 따돌림으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해당 인물을 배제하는 방식의 공감이 아닌, 해당 인물까지 포함하는 포용적 공감이 이상적이겠다. 이 두 가지 공감은 그 시작에서는 정말 한끝 차이, 한순간의 호의와 용기 차이이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라고 할만큼 다르며 나중에는 아예 돌이킬수 없게 커진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점을 인지한 채로 그런 짜증을 팀원들과 직접 나누는걸 자제하는 상황에서, 이 극에 대한 감상, 즉 가상인물에 대한 답답함-경험의 공유를 통해 그것을 해소할 수 있으므로 이런 감상도 반드시 문제적인 태도는 아니겠다. 단지 실제의 인간관계에서 같은 방식의 공감이 발휘된다면 포용적 공감이 아닌 배제적 공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다소 아쉬울뿐이다.

그런데 나는 인턴기자의 행동이 '그렇게까지' 미숙한 건지부터가 사실 의문이다. 물론 뉴스 방송이라는 매우 포멀한 자리를 위해 훈련을 받고 충분한 역량을 갖추었다면 나와서는 안될 장면인 건 맞다. 가장 포멀한 상황에 그러한 미숙한 태도를 갖다붙임으로써 연출되는 아이러니와 함께, 그러면서도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고 충분히 상상할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 때문에 더 화제성이 커진 것일테다.

그렇지만 일상으로 끌고 와 보자면, 왼쪽 인물은 어느정도 전형적인 언행을 끊임없이 수행하면서 열심히 상황을 타개하고 포멀함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잉된 형식들만이 난무하고 내용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장담하건대, 만약에 이 극에서 '정말로' 많이 미숙한 태도를 재현했다면 시청자들은 '못 보겠어서'(소위 공감성 수치?)가 아니라 순전히 '재미가 없어서' 감상을 중지했을 것이다. 즉 이 장면이 정말 참을 수 없을만큼 곤혹스럽고 답답한 상황으로 느껴진다면 요즘 말로 [진짜]를 모르는 거라고 생각한다.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포멀함을 지키고자 하면서 열심히 사회생활 하는 초년생 정도이지, 뭔가 더 심각하게 답답한 상황을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한편, 맥락을 약간 떠난 일반론을 가져와 보자면, 나는 미숙한 의사소통을 접할 때 말 그대로 미숙함으로 우선적으로 연결짓게 되는 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불쾌한 반사회성이자 위협의 가능성으로 먼저 연결짓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자주 느꼈다. 여기서 위협이란 직접적인 것이기도, 배려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오는 상대적인 피해가 있을것까지 염두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즉물적으로 드는 거부감에 더하여 실제적 경험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도식일것인데, 상술한 포용적 공감의 가능성을 그저 이상론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러면서도 피해가기 힘든, 모든 행위자에게 비극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의 감상으로 미루어 보아 한가지 더 재밌었던 점이 있다. 긴장을 많이 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하려는, 그러면서도 포멀함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일련의 언행은 다른 시대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자체가 보편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양상 중에 90년대 - 00년대생에게서 새롭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등장한(것이라고 이야기되는) 특질들을 이 극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한다.

면접 학원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배워서 그렇다는 말도 있던데,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직접적인 학습 외에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어투와 언행을 선호하고 채택하도록 상당히 구체적으로 유발할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온갖 설왕설래를 떠나 이렇게 잘된 있음직한 재현들이 축적된다면, 대중적 반응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를 빌려오자면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자료로 될 수 있어 보인다. 마치 서울사투리 선망이나 MBTI 성격유형 스테레오타입 재현처럼 말이다. 문화인류학이 여기서 맞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100% 정확한 사회상의 투영이 아닌 선별된 예술적 재현이라는 점때문에 오히려 의미가 더 커지기도 한다. 전형을 바탕으로 하는 논쟁은 추상적이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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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7일 화요일

백지고발장 의혹: 수사기관의 모럴과 민주적 견제의 균형이 필요하다

'사실이라면'이라는 따옴표가 너무 많이 붙은 언설은 표출하지 않는게 좋을 듯하여 참아 왔으나 김웅 의원의 매우 석연찮고 오락가락하는 대응을 보며 결국 몇 자 적어본다.


제기되는 백지고발장 의혹이 사실이라면, 선거 국면에서 반짝 공격하고 말 이슈가 아니다. 중대함의 정도를 떠나 수사기관의 공권력이 적절하게 사용되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 일반적인 네거티브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문제인데, 나는 이런 문제에 늘 관심이 있다보니 관심이 안 갈수가 없었다.


윤 당시 총장까지 개입을 했는지 어쩐지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는걸로 알아서 일단 그건 제껴두고, 고발장이라고 하는 문건의 존재사실과 전달사실이 있다면 그게 왜 문젠지 핵심만 얘기해보고, 그리고 그런 일들이 왜 계속 일어나는지 내 생각도 써보려 한다.


고발장이 야당에 전달됐다는 보도를 봤을때 처음에는, 물론 있어서는 안되지만 자주 일어나는, 검찰의 수사정보유출을 얘기하는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고발장은 원래 검찰 바깥의 누군가(고발인)가 써서 검찰에 접수를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손 검사인지 누군지 모를 검찰 내부인사가, 이미 완성되어 있지만 고발인 이름이 비워진 고발장 (소위 백지고발장) 을 직접 써서 검찰출신 정치인인 김웅에게 전달했다는 게 의혹의 내용이다. 이에, 고발인 이름을 채워넣어서 검찰에 접수하도록 검찰이 사주 한거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는것.

그리고 김웅 현 의원은 고발장을 작성 했다, 안했다, 모르겠다 등등 상당히 오락가락하며 수상한 해명을 하고있다.
(어떤 보도에서는 실제 그 백지고발장과 내용이 동일한 고발장이 대검찰청에 접수되었다고도 한다. 이부분은 찾아봐도 정확한 얘긴지는 모르겠다. 접수돼서 영향을 미쳤냐 안미쳤나에는 사실 관심이 크지않다. 그거에만 천착하게 되면 본질을 잃는다)

고발장과 관련해서 이런 프로세스가 존재한다면 수사기관이 원하는대로 사건을 기획할수 있다는 말이 된다. 사건을 기획한다는 말이 너무 세게 들리는가? 하지만 사태의 적확한 묘사인걸 어떡하는가. '어차피 수사 해야될, 수사 하게될 일이었다'라는 걸로는 이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프로세스가 작동을 한다면, '어차피 해야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까지 작동하는 것은 정말로 쉽기 때문이다. 공적 권위가 행사될때는 그런 잠재적 가능성까지 모두 고려가 되어야 한다.

왜 계속 이런일이 생길까? (마침 글을 쓰면서 뉴스를 보다보니 검찰이 이재명 관련 수사를 무리하게 하면서 사람들을 부적절하게 압박했다는 내용의 KBS 보도도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수사기관 특유의 모럴에 있지 않나 싶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 수사기관의 구성원들의 모럴은 일처리에 있어 "이건 해도 되고, 저건 하면 안된다"며 자중하는 느낌보다는, "되어야 하는 일을 밀어붙여서 되게 해야한다"는 느낌에 가까워보인다. 검찰뿐 아니라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총장이 여당과 처음 대립각을 세울때 여당 지지자들이 많이 혼란스러워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윤총장의 사퇴 이전까지의 행보가 어느정도 일관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본다.

여하간 그런 모럴이 깔려있다보니 목적 달성을 위해 조금만 무리하거나 견제의 균형이 깨지면, 원칙을 어기는 일이 발생하기 쉬울거라는것.

물론 수사기관은 온갖 꼼수를 쓰는 험한 양반들을 많이 다룰테니까 그런 태도가 일정부분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그래서 소위 검찰개혁의 과정에서 그런 태도가 완전히 깎여나간다면 손발이 잘리는 느낌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적절하게 쓰였을때, 혹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더라도 절차적 문제가 있었을 때는 그걸 당연히 철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 일반의 법익이 심대하게 침해되게 된다.

더구나 이번 건은 산업스파이 잡는 것마냥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일도 아니고, (사실이라면) 야당 정치인에게 여당 정치인을 고발하도록 한것이라 명백히 부적절한 정치개입인것.

언론의 보도들도, 의혹을 충분히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실제로 내 지인 중에는 정치뉴스 자체는 자주 접하기는 하지만 소위 정치덕후 내지는 고관심층까지는 아닌 친구가 있는데, 그친구도 김웅만 계속 언급되니까 '야당 동료 의원들끼리 고발을 기획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더라. (아마 김웅은 당시 의원도 아니었을거다) 의혹이 제기되는 사실관계는 검찰이 '너네 이름으로 한번 내봐라'라고 고발장을 미리 써놓았다는 거라, 공권력이 할수있는 일의 범위와 관련해서 질적으로 저거랑은 완전히 다른데 말이다.

이렇다보니, 의혹의 사실여부는 물론 더 봐야겠지만, 제기된 의혹 내용을 좀더 정확히 전달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그래야 의혹제기가 거짓일때 생기는 책임도 더 클것 아닌가.

여하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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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3일 금요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 후기

거시적인 것과 개인사적인 것이 유치하지 않게 잘 결합한 느낌

빌런의 설계가 굉장히 현대적

기존 MCU와의 연계도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출됨

<210919: 내용추가>
웬우
- 수천년을 살아온 사람이라 '거시적'인 느낌이 드는데, 극중에서 큰 사랑과 슬픔을 겪고 악령에 사로잡힌 것은 웬우의 삶에서 그저 하나의 지나가는 미시적인 이벤트일 수도 있는 건데, '근본적인 몰락'으로 기능을 함
: 사랑의 크기가 커서 그런가? 아니면 넘봐선 안될 그 마을을 넘봐서 파국이 생긴건가?
: 개연성이 이해가 잘 안되긴 하지만, 뭐 나는 거시적인게 몇몇사람의 사적 관계속에 수렴되어서 보여지는거 좋아하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음

- 전반적으로 아시안 가부장적 학대가정(…)의 모습을 매우 잘표현함. 상처를 받아서 정신병에 가깝게된 웬우와 그것이 가족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까지. -> 이게 거시적인것과 미시적인 것의 연결고리가 되어줄수 있음.

- 액션이 훌륭함. 마지막에 용들 등장하는 건 좀 읭스러웠는데 버스 씬이 계속 기억에 남음

- 샹치 친구는 원작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역할인지 모르겠음

- MCU 기존내용과의 연계가 생각보다 이르고 본격적일 것으로 보임. 웡 등 마법사집단에 아예 합류해버린걸 봐서 노웨이홈이나 닥스2 정도에 바로 투입될수도 있지않을까?

- 실제 큰줄기의 내용적 연계와 별개로 기존 내용들에 대한 리스펙?도 좋았음. 아이언맨3의 만다린 배우가 다시 등장한 거라던가. 만다린의 재해석 (과거 미국사람들이 만다린이라고 이름 대충지었다는 대사로 셀프디스) 도 상당히 재미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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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6일 목요일

임기응변식 여론대응이 아닌 중장기적 원칙과 기조를 바란다

확고한 기조가 없이 사안별로, 혹은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정부여당 옹호 논리가 만들어져서 유통되는게 상당히 많이 보인다. 정치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싶긴 하지만 나중에 보면 흑역사인 것도 많을 것이다.


민주당이 리버럴세력으로 확고한 기조를 잡고 자리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어쩌면 나만의) 처음의 기대가 물론 사안별로 꽤나 달성된 부분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민주당이 축적하고 주장해온 기조와 반대로 가는데도 위기감을 갖지 못하고 옹호 일변도로 나가고있는 점들도 많다. 자유를 침해하는것 아니냐는 반대진영의 비판에 자꾸만 더 연료를 제공하는 최근의 몇몇 입법시도들을 포함한 얘기다.

(리버럴로서 기조가 있어야 한다는게 어떤 건지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극단주의를 '상대방이어서' 비판하는게 아니라 '극단주의여서' 비판할수 있어야 건강한 민주세력이 아닌가 이런 느낌인 건데, 민주정치에서 이건 조금 조심스러운 주장일수도 있긴 하겠다.)

자유, 인권 등의 보편가치를 둘러싼 큰 그림들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부동산 정책 실패하고 나니까 타국사례를 봐도 원래 선진국 수도권은 엄청 비싸다, 원래 월세 사는 사람이 많은 게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묘하게 옹호하는 의견도 많은데, 당장 집 구하기 어렵게 된 사람들한테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를 간과하는 언행인 듯하다.

원전도 마찬가지다. 올해 상반기에 SMR 밀어주자는 게 꽤나 히트친 것도 (사실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뜬금없지만 아무렴좋아 느낌이었던 거 같긴 한데) 에너지정책 및 관련 알앤디 정책에 있어서의 어떤 일관된 기조에 의해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과 정치 고관심층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채택되거나 기각되는 그런 것중에 하나일 뿐이 아니었나 싶다.

생각해보면 사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걸 처음 느낀 것도 예전에 '원전 해체기술' 밀어 줄 때였다. 원전해체가 마치 원전산업의 지속가능한 차세대기술이자 탈원전 기조 속에서 너네가 살 길이라는 식으로 원전업계한테 메시지 던져준 것인데...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꽤 많이 퍼져있고, 그것이 유통되는 방식 또한 비판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에 가까운 듯했다.

정작 대통령은 오히려 원전에 대해 너무나 확실하게 의중을 가지고 있어 이를 의식한 청와대 비서진들과 산업부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정도였던걸 감안하면, 지지자들의 이러한 임기응변식 여론 대응은 굉장히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중요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확실한 의중이 있음에도 그걸 정확한 언어로 대중 앞에서 설득하는 일을 꺼리는 편이라면, 지지그룹이 이렇게 상황에 따라 대응논리를 유통시키며 지지고볶고 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다시 부동산 얘기로 돌아오면, 월세 살아도 괜찮다라고 할 거면 부동산정책 실패 하기 전에 미리 그 말을 하던가, 혹은 그런 새로운 방향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도록 욕망의 구조와 인식을 바꿀수 있는 따뜻한 대안을 얘기하던가 해야 했다. 점점 부동산으로 실질적 계급 고착화되는게 자연스러운 수순인지 (그치만 설령 자연스럽더라도 그걸 가능한 완화하고 기회를 여는게 평등의 가치 같긴 함) 의 여부와 별개로, 정책에 의해 집값상승이 부스트된 게 분명한데... 내집마련 하고 싶다는 꿈 자체가 잘못된거라고 비판(?)할 일은 아니다.

늘 말하지만 대중들의 의지는 비판과 계도의 대상이 아닌, 받아들여야 하는 (그러나 정석적인 노력을 통해 바꿀 수 있는) '자연현상'처럼 대해야 하는 면이 있다. 처음엔 집값 잡겠다고 했다가 폭등하고 나니 이제는 욕망이 잘못됐다는 훈계를 하고, 그에 대한 반발으로 지면이 채워진다. 이런 상황을 넘어 좀더 건설적인 얘기들을 많이 보고싶다.

여하튼 이렇게 동적으로(?) 여러가지 옹호 논리가 유통되는 것이 수준높은 민주정치에 도움이 되려면, 정부가 무언가를 원칙에 근거한 확실한 (그리고 확실히 작동하는) 기조로 추진하고 지속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공격적인 비판들도 수용하는 것과 활발하게 조화가 되어야 할텐데 그런 면모들이 약해지는 거 같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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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일요일

에반게리온: 신적인 것의 양적 표상

에반게리온 지금까지 봤던 편들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이카리신지의 자아 및 성장과 관련된 주제의식을 내 경우엔 잘 캐치해내거나 공감하지는 못했다. 제일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이오한 것과 정신적인 것을 병치시켜 숭고감을 연출하고 신적인 것을 표상해내는 방식, 그리고 메카닉하다고 부르기엔 애매한 에반게리온 특유의 공허하고 거대한 인공물들로써 인간들이 그 신적인 것과 대립하면서도 제어하고 활용하는 방식 등 다소 표면적인 설정과 연출들이었다. 이거 메타-중2병일지도...? 하여튼 그랬다.

AT필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작품 자체로부터도 대충은 느꼈지만 여러가지 해설을 보고 아 이런거구나, 무척 매력적이다 싶었는데, 이걸 연결고리로 해서 상술한 그런 주제의식에 대한 공감에 가 닿을 수도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봤었던 타 작품들은 (물론 나름대로의 고민은 있었겠지만) 신화들로부터 설정과 인물 등 모티브를 빌려오고 압도감을 연출해 낼지언정 결국엔 아우라를 다소 약화시킨다고 느껴진 반면, 에반게리온의 경우에는 설정 및 연출의 매우 핵심적인 부분에 신화적 구성방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TV시리즈와 신극장판 서만 봤는데, 이번에 나온 마지막편을 보기 전에 아직 안 본 EoE, 신극장판 파, Q도 한번 꼭 봐야겠다. 그런 뒤 여러가지 해설을 보면 에바에 대한 이해가 좀더 깊어질수도 있을 것 같고.
하여튼 만화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본 것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은 연출과 설정이 압도감을 주면서 그에 대한 작품의 셀프-호들갑이 심하지 않은 그런 작품들(혹은 그렇지 않은 작품일지라도 그러한 포인트들)이었다. 인터넷에서 소개받고 어렵게 구해 읽었던 브레임(BLAME!)도 그 중 하나다.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판을 봤었는데 장면들이 멋지지만 만화책으로 봤을 때의 맛은 안 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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